길에게 길을 묻다
낙동정맥 마지막 20 차
일시;2010. 10.17(24)
구간;개금고개..엄광산.구덕산..시약산..대티고개...우정의 탑..
괴정고개..장림고개..봉화산..다대고개..아미산봉수대..
홍치고개..물운대
참여인원;2(62명)
(괄호 안의 날짜, 인원은 기분죤 산악회 본대가 산행을 한 기록 임)
낙동 정맥의 마지막 구간, 부산의 남쪽 몰운대를 향해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 한다.(7:10)
어제 한 산행 탓인지 오히려 발걸음이 가벼움을 느낀다.
개금 전철역을 나와 도로를 따르다가 백 병원을 우측으로 끼고 좁은 골목을 오른다.
고원 아파트 끝에서 왼쪽으로 들어서서 뙤기밭을 지나 비좁은 길을 지난다.
등로로 올라가서 능선에 자리 잡은 정자와 운동 시설을 지나고
임도를 만나서 오르막 길로 접어든다.
임도 옆에 자리 잡은 가야 산림공원에는 인근 마을에서 올라온 주민들로 왁자지껄하다.
된 비알을 오르는 동안 진한 더덕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한 줌의 땀을 훔칠 즈음 넓은 공터에 도착한다.(8:05)
되돌아 보니 지나온 백양산부터 이어진 산 마루가 확연하고 산세도 드높다.
출발 지점에서 우회하여 이곳까지 이어진 넓은 임도는
시간은 조금 더 걸리지만 수월하게 올라 올 수 있다고 한다.
임도를 따라 지근 거리에 있는 엄광산(嚴光山,504 m)에 도착한다.(8:15)
하얀 대리석 표지석 옆에는 날아 갈듯한 정자가 시원한 조망을 안겨준다.
산이 높고 멀리 볼 수 있다고 하여 1995년 이전까지는 高遠見山고원견산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시 방향으로는 이동 통신사 탑이 여러 개 서있고 그 옆으로 낙동강이 시원스레 조망 된다.
건너편 구덕산과 시약산 정상에 세워져 있는 기상 관측소의 둥근 탑과
항공 운항 시설물을 보면서 정자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다.
그 사이 정자 아래서 끊임없이 등산객이 올라와서 아침 인사를 건낸다.
다소 경사도가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다가
군복(?)같은 등산복을 입은 멋쟁이 할머니를 만난다.
복장이 특이하여 연세를 물어보니 71세, 혼자서 운동 삼아 매일 오른다고 하는데
그 걸음 걸이가 젊은이 못지않다.
군복 스타일의 등산복에 칠순 할머님, ....
안부에 이르니 좌우로 전나무가 빼곡하고
조그만 산불 감시 초소와 함께 꽃 마을로 가는 이정표가 서있다.
길은 부드러운 흙 길로서 꽃 마을 방향으로 완만하게 이어진다.
청아하게 들리는 독경 소리에 잠시 발길을 돌려 본다.
좌측 내원정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찰을 찾아오는 불자들로 길이 비좁다.
꽃 마을은, 예전에는 이곳 주민들이 꽃을 길러서 시장에 내다 팔아서 생활을 할 정도로
많은 꽃 재배 농가가 있었다고 한다.
엄광산아래, 꽃 마을 가는 길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있는 내원정사
넓다란 아스팔트 도로 구덕령을 지나서 붉은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오른다.(8:50)
구덕 문화 공원으로 진입하여 이곳에 전시된 시설물, 조각, 시비를 이리 저리 훝어본다.
숲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 들다가 작은 나무 계단을 따라 한동안 이어 간다.
10여분 후에 시멘트 도로로 다시 내려서서 항공무선 표지소 화살표를 따라 오르니
가벼운 옷 차림으로 오르 내리는 등산객들이 도로를 가득 메운다.
오른쪽으로는 낭떠러지이고 건너편 능선은 하얀 억새가 정상 부근에 가득하다.
안부 4거리에 도착하니 넓은 공터에는 산책 나온 주민과 등산객들로 북적 거리고
억센 부산 사투리가 어지럽게 흩어진다.(9:30)
구덕산 올라 가는 초입, 구덕 문화 공원에 있는 추모비
한숨을 돌리는 동안 벤치에 앉아서 컵라면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는 산객이 소매를 잡아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산객이 조심스럽게 봄가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곧 6학년이 된다고 하니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예를 표한다.
이럴경우, 좋아해야 할지 서글퍼 해야 할지 잠시 당황 한다.
그러나 건내주는 산성 막걸리가 목젓을 타고 넘어가는 맛은 알싸하다.
산세를 지레 짐작하고 정면으로 난 비포장 길로 가면 자갈마당으로 가서
정맥과 다른 방향으로 떨어지니 절대로 그 길로 가지 말라고 친절히 가르켜 준다.
좌측 아스팔트 길을 따라 오른다.
중도에서 바라보는 승학산, 조금 전에 휴식을 하던 안부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승학산은
글자 그대로 학이 승천하는 듯한 모습이다.
비탈길 끝 3거리에서 좌측으로 살짝 올라서 구덕산(九德山,568m)에 도착한다.(10:00)
항공기의 운항을 돕기 위한 지상 표지소의 시설물이 철조망 안에 설치되어 있고
발 아래로 펼쳐지는 구덕령, 꽃 마을, 엄광산의 마루금이 시원스레 이어진다.
3거리로 다시 돌아와 좌측길로 이어간다.
기상 관측소가 설치된 봉우리는 시약산蒔樂山(523m) 정상이고
관측소의 둥근 모습이 어린이 놀이터의 시설물을 연상 시킨다.(10:25)
시蒔자는 “모종낼 시”자로서 약초를 심거나 채취 한 곳이라는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뒤돌아 보니 구덕산 정상 뒤로 지나온 엄광산 마루금이 뚜렷하고
승학산 정상은 온통 하얀 억새가 뒤 덮혀있다.
정문 좌측에 설치한 조그마한 이정표를 보고 좌측 숲길로 내려선다.
중도에 전망 바위에 올라서서 오늘 가야 할 몰운대 방향으로 조망해 본다.
아파트와 건물로 인하여 마루금이 다소 불규칙하게 이어 지지만
그 흐름은 완만하게 남서쪽으로 선회하여 끝 부분에서 남쪽으로 떨어지고
마지막 몰운대는 제법 큰 숲을 이루고 있다.
부산항과 감천만 사이 사이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선박이 항구가 비좁을 정도로 빼곡하다.
가야 할 목적지가 뚜렷하고 지척에 보이는 탓인지 한껏 마음이 설렌다.
중간 부분 검은 능선이 몰운대, 그 뒤로 쥐섬......
정면으로 펼쳐진 부산항과 영도, 감천만 사이 작은 봉우리 사이사이로 세워진 건물이 복잡하다.
안부에 이르니 아름드리 소나무와 넓직 한 잔디밭이 다리쉼을 하기에 그져 그만이다.
봉분이 매우 큰 묘 8기가 자리한 주변은 철제 울타리로 막아 놓았고
이곳 저곳에 봉분이 많이 보인다.(10:45)
마루금은 방화로 같이 넓직하고 이정표도 적절히 세워져 있다.
급 경사 길을 내려서서 전나무 그늘이 시원한 곳에서 산책 나온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난다(10:50)
부산시내 산은 나무가 잘 가꾸어진 것 같습니다.소나무도 전나무도 아주 좋습니다.
시에서 계획 조림을 하고 오랜 세월 동안 가꾼 탓 이지요.
이곳에서 구덕령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은 정말 좋습니다.
전나무가 빼곡하여 산림욕에 그만 이지요.
엄광산 아래 대신동 공원도 아주 숲이 좋습니다.
복분자를 한잔 권해 드린다.
할아버지는 하산하여 도로를 건널 때까지 따라와서 차조심을 하라고 당부 하신다.(대티(한치)고개, 11:10))
횡단 보도를 지나고 좁은 골목길로 이어져서 동내 뒷산 같은 길을 오른다.
다시 포장 도로를 건너서 능선으로 오른다.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 거리다가 지레 짐작으로 숲이 보이는 능선으로 오른다.
봉분이 아주 낮은 오래된(?) 공동 묘지를 지나고 우정의 탑을 지난다.(11:50)
임도와 시멘트 포장길을 헤메다가 벽산 아파트 길을 끼고 도로로 내려선다.
무조건 큰길로 나가는 방향으로 길을 잡고 이어 가다가 6차선 도로에 도착한다(괴정고개,12:00)
육교를 건너서 주유소 건물 사잇길로 들어서기 전에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들이킨다.
숲속을 거닐때는 그늘과 바람이 있어서 몰랐으나
다소 복잡한 주택가 고개로 내려오니 저절로 가게 앞으로 발길이 간다.
해동고교 후문을 지나서 능선으로 오르다가 임도를 만나고,
체육공원을 이어서 지나고 나서 부대 정문 앞에서 철조망을 끼고 우회한다.
다시 아파트 진입 도로를 따라서 6차선 도로에 내려선다(13:00,장림고개)
횡단 보도를 건너 좌측 임도로 가다가 우측 언덕으로 오른다.
오랜만에 정맥에서 자주 만나던 글씨체로 쓰여진 봉화산(149.6m)이라는 표지가 나무에 걸려 있어서
반갑고 고마운 마음을 느끼면서 지나친다. (13:30)
내려서는 길은 상가와 주택 단지에 인접하여 매우 복잡하다.
가구 단지가 들어선 이 지역은 정맥 마루금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혼돈스럽다.
몇 번이나 길을 묻고 확인하여 삼환 아파트 2차 단지로 내려 서서
노원 소아과 의원 앞 육교를 건넌다.(다대고개,14:10)
신다대 아파트 105동을 보면서 내려서는 육교 아래에 서림사 입구 표시를 발견하고 안도한다.
서림사 표시판을 따라 오르다가 좌측 능선으로 방향을 잡는다.
시멘트 길 끝 지점에 서있는 서림사는 주변의 민가 뒤에서 지붕만 드러나 보인다.
짧은 급경사 봉우리를 지나서 안부에 내려서니 서림사 우측 사면길로 올라온 길과 만난다.
평탄한 안부를 따라 시원한 솔바람을 맞으면서 진행을 한다.
돌 무더기가 연 이어서 3개나 쌓여있는 안부를 지나
짧은 급경사 오르막을 올라서서 아미산峨眉山에 세워진 봉수대에 도착한다.(14:35)
아미산은 중국 사천성에도 같은 이름의 산이 있으며 인도 불교가 중국에 전파 되어서
중국 최초의 불교 사원이 세워진 곳이다.
해발 3000m 가 넘는 아미산은 계절과 기후에 따라 천태 만상의 고운 모습을 지녔다고 하여
소녀의 눈썹 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대중 가요에도 아미산을 언급한 노래가 있다.
봉수대는 외관이 첨성대와 흡사하고 그 안에는 둥근 점화판이 설치되어있다.
봉수대 아래에 설치한 검은 오석에는 응봉 봉수대라고 쓰여있다.
1530년 조선 중종때 설치 되어서 고종 35년까지 363년간 사용 하였다고 한다.
봉수대에서 바라보는 감천만과 그 앞으로 펼쳐진 바다 안쪽 동리 다대동 사무소 부근에는
태극기를 만든 갑신 정변의 기린아 김영효의 묘가 있던 자리가 있다.
봉수대와 봉수 방법
봉烽)이란 홰(炬)에 불을 켜서 서로 알게 하는 것으로 밤에만 쓰고
낮에는 수(燧),즉 나무에 불을 피워 그 연기로서 알리는 방법을 사용 하였다.
우리나라는 백제(온조왕), 가락국(수로왕) 때 봉수관련기록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제도화된 것은 고려 의종 3년 1149년에
서북병마사 조진약의 상주로 임금의 허락을 받아 봉수식을 거행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1홰; 평상시
2홰; 적의 행적 발견, 바다에 적 출현
3홰; 전세 긴급 함, 해안에 적 접근, 경계선 접근
4홰; 국경 침범, 바다에 접근
5홰; 접전, 육지 상륙 적 접근으로 단계별로 구분 하였으며
봉수는 평상시 하루 한번씩 봉수간에 실시 하였으며
각 봉수대에서의 거화 시간이 정해져 있고 제 1기점에서 서울까지 약 12시간이 소요 되었으며
각 선로의 봉수가 서울(남산)에 도착하는 시간은 초 저녁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단 걸음에 안부로 내려와서 건너편의 낮은 봉우리에 오른다.
헬기장을 겸한 정상은 낙동강 방향으로 전망이 아주 뻬어나다.
발 아래 사하구의 공업단지는 낙동강을 따라 북쪽으로 길게 이어져서 공장 건물이 빼곡하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나무 데크가 끝 없이 이어져 있다.
나무 데크에 걸터 앉아 끝을 가름하기 어려운 김해 평야를 한동안 바라본다
부산과 대중가요는 묘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가수 조용필의 힛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에서 불려 지면서 전국으로 확산 되었고
가을이 되면 누구나 한번씩 불러보는 고 차중락의 노래 “낙옆따라 가버린 사랑”도
이곳 부산에서 처음으로 알려져서 전국으로 펴졌다고 한다.
낙동강을 가로 지르는 큰 다리가 을숙도를 지나서
새로 조성한 공단으로 이어지면서 가덕도가 눈 앞에 다가온다.
거제도에서 가덕도를 지나서 신호 공단으로 이어지는 거가 대교가 개통되면
낙동강을 건너 부산으로 이어지는 이점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바다 밑으로, 지상으로 연 이어서 뚫린 도로는 상상만 하여도 멋있어 보인다.
낙동강 하구 삼각주와 그 뒤로 가덕도와 거제도...
내려서는 등로는 아늑한 소나무 숲길이다.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산책 나오듯이 산을 오른 등산객이 줄을 잇는다.
산 아래로 내려오니 정면에는 아파트 벽이 가로 막고 서있고
우측으로는 산 허리를 감아 돌아 낙동강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시원하다.(15:10,홍티고개)
홍티고개의 원래 이름은 무지개 고개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무지개 홍虹자를 써서 홍치고개로 불렀으나 치가 티로 변형 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무지개 언덕이라 불렀던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인가,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지명이 참으로 많다.
해운대 뒤편 동산에 오르면 달맞이 언덕이라는 곳이 있다.
동해 바다에, 하늘에 떠있는 달을 맞이하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곳이다.
아파트 뒷 편이 몰운대 임을 짐작하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으나
정맥의 마지막 구간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 하기가 싫어서 되돌아 나와
우측으로 난 도로를 따라 걷는다.
시원한 낙동강 전망과 바람을 맞으면서 지루한 길을 한걸음 두 걸음 내 딛는다.
길고 긴 도로를 걸어서 강변 도로에 내려선다.
넓은 낙동강 하구를 따라 시원스런 도로가 이어진다.
중간 지점에 있는 전망 정자에 올라 눈 앞에 우뚝 솟은 가덕도를 바라본다.
가덕도 남쪽 바다의 수평선이 아득하고, 낙동강의 넓은 하구 모래 언덕이 철새를 불러 들인다.
학교에서 배웠던 삼각주, 모래 언덕은 밀물과 썰물에 따라 그 모양이 수시로 바뀌면서
낙조와 함께 사진 애호가의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하구는 다대포 해수욕장으로 연결된다.
철 지난 해수욕장은 썰렁하지만 가야 할 몰운대 쪽 백사장은 넓게 펼쳐져 있다.
우측으로 이어지는 식당과 상가 끝 부분에 서있는 몰운대 표지석을 한동안 바라다 본다.(16:40)
두 손으로 표지석을 어루만지면서 한동안 그 느낌을 체감해 본다.
1872년에 재작된 동래부 지도를 보면 동래읍성과 금정 산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수영만을 따라 동래까지 배가 드나든 것을 보면 동래부 지역은 왜적 방어의 최 전방 기지의 성격을 지녔다.
그래서 현 부산 수영동에는 경상 좌수영左水營, 동구 범일동에는 부산진釜山鎭,
이곳 다대동에는 다대진多大鎭등의 진영이 있었다.
水營은 지금으로 치면 해군 지역사령부,鎭은 그 산하 지방 군사기지에 해당된다.
다대포 해수욕장 상징 조형물
숲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지금까지의 다소 혼란스러웠던 구간을 정리 하라는 의미인가,
조용하고 고즈녁한 숲이 한동안 이어진다.
詩碑시비를 지나고 몰운대 객사 앞에서 이곳을 스쳐갔을 역사의 인물들을 떠올려 본다
몰운대 객사客舍
오솔길을 따라 계단 끝에 자리한 돌출부,
바다에 서있는 등대 좌우로 경도와 쥐섬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낡은 군 시설물이 남아 있는 몰운대,
낙동 정맥의 마지막 지점에서 푸른 바다와 마주한다.
10개월, 20회차, 421.3km의 대 장정을 끝내는 순간,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에 기쁨과 서운함이 반반이다.
해변으로 내려서서 바닷물에 손발을 담가 본다.
시원한 바다 내음이 산속에서 맛 보던 솔바람을 지워 버린다.
몰운대
다대곶 일대는 해류의 영향으로 짙은 안개가 끼어 시야가 자주 가려지기 때문에 몰운대라 하였다고 한다.
16세기 이전 몰운대는 섬이었다가 점차 낙동강에서 밀려온 토사가 쌓여 육지와 연결된 것으로
임진 왜란때 충무공 이 순신 장군의 선봉장으로서 이곳 앞바다에서 전사한
녹도만호(鹿島萬戶) 중장공(忠壯公) 정운(鄭運)이 이곳 지명을 듣고
운(雲)과 운(運)이 같은 음인 것을 따라 “내가 이 대에서 죽을 것이다(我沒此臺)”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으며,
정운의 순절을 기리는 유적비가 있다.
1983년 북한의 무장간첩선이 이곳으로 침투하다 괴멸되기도 하였다.
언덕 전체에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지만 예전에는 동백나무가 울창했던 곳이다.
어떤 지도에는 우리가 도착한 이곳을 침운대라 하고
몰운대 표지석에서 조금 더 진행하여 몰운대 객사 오기 전 우측 지점, 서해 바다 쪽 벼랑을 몰운대 라고도 한다.
몰운대 건너편 돌출부 화손대 절벽에서....
못다 한 이야기
눈 덮힌 매봉산 천의봉을 떠나 낙동 정맥을 시작 할 때는 걱정도 많았고 두려움도 컸다.
등로가 험하여 어지간한 산 마니아가 아니면 어렵다고 하는 낙동 정맥,
횟수가 지날수록 참여도가 줄어 들까 봐 지레 걱정 하던 일,
식당이 없어서 하산하면 식사 하기 조차 어렵다는 오지 산행…..
내 자신이 끝 가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기우였음을 일깨운것은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힘입어
우리 산악회가 전례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것은 많은 분들의 공이 크다.
산행 계획을 수립하고 사전 준비와 공지,연락을 하느라 헌신적인 노력을 해 주신
쑥맥 산행 대장님, 짱아 총무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애매한 등로와 구간 구간 길라잡이 역할을 멋 지게 하신 1대간 9정맥 완주의 고수 이 고문님,
낮선 산악회에 참여하여 끝까지 완주 하시고 분위기를 북 돋운 배슈막님과 동료들,
방초님,범려님, 백야님, 젊은 아저씨등 이번 정맥 산행에 처음으로 참여 하신 분들,
숨은 재주를 멋지게 발휘하여 미식美食을 제공한 마중물님과
지역 특성을 살려 맛있는 음식을 준비 하느라 애쓴 쑥맥 대장님,
울산에서 태화 막걸리를 손수 가지고 오신 진돌님 등,…… 모두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개인적인 면면은 산행을 하면서 숨은 재능과 기량을 발휘하고
희생과 봉사로 노력하신 분들이 너무도 많았다.
산행을 끝내자 말자 월요일에 어김없이 산행기를 재미있게 올린 범여님,
함축성 있게 산행기로 마무리 하신 1대간 9정맥의 완주자 배슈막님
사진 실력이 뻬어나서 눈을 즐겁게 한 황호님,뭉클님,산그리메님,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여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시는
배슈막님,방초님,마카루님,범여님의 숨은 재능과 노력이 돋 보인다.
선두에서 거미줄을 걷어 내느라 고생하신 감사님과 눈솔 부부,
아침 식사 전에 어김없이 어御 부인에게 전화 인사를 올려
무박 산행을 하는 뭇 남자들의 가슴을 아리게 한 흐흐님,
우중 산행에는 텐트를 준비하여 식사하는 산행의 예禮를 보여준 백야님,
멀리 파주에서 왕복 5시간이 더 걸리는 먼길을 참여하신 지극 열성 젊은 아저씨,
정맥 산행을 위해 매번 중국에서 와서 1대간 9정맥을 마무리 하신
에센시아 님의 성실한 자세에서 배울점이 너무도 많았다.
선두와 후미를 거침없이 오가는 준족의 젠틀멘 님,
지극한 열의로 희생을 아끼지 않은 용인 트리오 황호,등산조아,역마차님,
남 먼저 하산하여 점심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눈솔 부부,
식사 후에 기꺼이 행주를 집어 드는 박 종석님도 참으로 대단하다.
낙동정맥은 그 자체가 도전과 흥미의 대상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구불구불한 산길 접근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민가를 거의 만나지 못하는 외로움이 있었지만,
저마다 엇 비슷한 높이를 자랑 하면서 이어져 온 준령들과
동해 바다 내음을 수시로 접할 수 신선함은 어느 산행에 비길바가 아니다.
바다가 인접한 준령 탓인지 유난히 비가 많았던 산행도 기억에 남는다.
높고 낮은 능선과 산마루가 모두 다 애정이 가지만
그 중에도 울진,영덕 구간의 금강송을 보면서 무한히 상서로운 기운을 느꼈고,
주왕산 별바위에 올라서 주산지를 조망하는 기쁨도 참으로 값진 것 이었다.
두릅과 산나물이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구간도 많았고,
멧 돼지를 만나서 사투를 벌리던 새벽 산행도 섬뜩 하였다.
통고산의 상고대가 이룬 설화수는 평생의 기억으로 자리 잡을 것 같고,
신불산에서 천성산까지 이어진 억새는 새로운 감동을 불러 일으켰으며,
맹동산 풍력 발전기의 큰 날개는 문명의 이기와 함께 자연에 대한 거부감도 불러 일으킨다.
뜨거운 여름에 지나간 영천 안강 기계의 6.25격전지에서
이 나라를 사수한 선열들의 자취를 느끼면서 숙연해 지기도 하였다.
천년 고도 경주와 동해 바다까지 아우르는 단석산에서의 조망에 발길을 멈추었고
OK 그린 연수원의 푸른 초원을 이어,
영남 알프스 구간에서의 폭우와 강풍 속 산행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적극 동참하신 회원님들과 연 20일을 함께 한 우정 어린 산행을 한 셈이다.
산을 찾을 때 마다 우리의 소중한 자연과 국토를 훌륭하게 가꾸고 보존하여
세계 10대 강국에 진입하게 한 위정자의 넓은 안목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구간 구간을 지나면서 역사와 조상의 얼을 알아 보려고 애쓸 때마다 도움을 주신
지방 행정 관청, 특히 포항시청 문화 관광부서의 큰 도움에 대해서도 거듭 감사를 드린다.
궁금한 지.능선마다, 애매한 구간에는 어김없이 표시판을 달아 놓은 준.희님의 노고에도
고개 숙여 감사 드린다. 님은 전국에 약 2,000개의 표시판을 메달아 놓았다고 한다.
이런 분들의 노력에 힘입어 우리가 가슴 벅찬 산행을 이어 가면서
국토를 사랑하고 자연을 노래하지 않을 수 있으랴 ?
붉게 솟아 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 하면서 느낀 감흥은
땀 흘려 산을 오른 후에 느낄 수 있는 값진 것이었다.
알프스와의 싸움이 “노동처럼 유익하고, 예술처럼 고상하며, 신앙처럼 우아 하다”고 말한
이태리의 등반가 기도 레이(Rey Guido, 1861-1935),자유인으로 살아간 그와 같이
일상으로 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가고 싶은 데로 떠나는 자유를 즐기고 싶다.
세계 등반사의 살아있는 전설, 세계 등반사를 다시 쓴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쓴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정기 “검은 고독, 흰 고독”이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학생 시절부터 산을 다니고 암벽 등반을 하게 된 산악인이 많다고 한다.
인용 하기에는 주저 넘지만 그가 남긴 말이 너무 좋아 옮겨 본다.
……………..
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
그 대신 산으로 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너무 많은 답을 기대한다.
산은 모든 사람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는 매일 새로운 해답이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1944년 독일태생)
회자 정리라고 하였던가 ?
만나면 이별은 정해진 이치라고 하지만
산은 그대로 거기 있음에 우리는 언제든 산에서 또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길에게 길을 물을 것이다.
----終-----
메모;
마지막 구간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10월 17일 별도로 산행을 하였으며
구간별 산행 시간은 길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평소의 산행 시간과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간, 산행 구간마다 역사와 숨은 이야기를 찾으려고 노력을 하였으며
산행에서 본대로 느낀대로 표현을 하려고 애를 썼으나 부족한 점이 너무도 많았음을 느낍니다.
격려를 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깊이 감사 드립니다.
첫댓글 맑은 날 밝은 길을 걸어 낙동 마무리 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기록 남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다대고개 병원은 '도원'정형외과/소아과 입니다. 제 친구 부부이고,마지막날 그곳에서 라면 얻어 먹고, 몰운대 횟집까지 찾아 와서 축하해 주었지요..
함께 한 산행 오랜동안 기억에 남을것 같습니다.사당동 맥주집에서 환대에도 감사 드리고요....
그런데 "배슈막"은 어떤 의미인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