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카페지기 서봉석(소선)의 블로그
"소선의 음악이야기" blog.naver.com/bongarr 에서 옮긴 것입니다.
한국 대중음악계의 트럼펫 역사와 명연주자(1930~80)
목차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국내 트럼펫 주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미국의 재즈 트럼피터는? (나이 순)
트럼펫은 우리나라에 언제 도입되었나
1950년 이전의 국내의 유명 트럼펫 주자는
1950년 이후의 국내의 유명 트럼펫 주자는
박주근,현경섭,노갑동,고계화,최상룡,이상우,강대관
김인배
여대영
=================================================
♬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트럼펫이 현대의 밸브 트럼펫으로 자리잡은 것은 1800년대 후반이다. 1813년에 영국의 클라겟(Claggett)에 의해 밸브시스템이
발명되었지만 그로부터 수십년 후인 1800년대 후반에 가서야 밸브트럼펫이 일반화되어 지금의 Bb Trumpet이 서서히 트럼펫의
중심악기로 자리잡게 된다. 이 때에는 1828년 프랑스에서 발명된 코넷이 트럼펫의 자리를 대신했었다.
미국에서 재즈 초기인 1900년을 전후하여 흑인들이 코넷을 많이 연주했던 것을 보면 또 1901년생인 재즈트럼펫의 원조
루이 암스트롱(1901~1971)도 초기에 코넷을 사용했던 것을 보면 재즈에서 트럼펫이 생각보다 늦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
다.
당시에는 영국을 위시한 유럽의 오케스트라에서도 코넷을 많이 사용했었고 남북전쟁 당시 남군 군악대들도 코넷을 사용했었기에
종전 후 남군 군악대가 해체될 때, 민간에게 불하한 악기들을 흑인들이 싸게 구해서 연주했기에 코넷이 재즈 초기에 활용된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
1920년대에 와서 재즈가 미국에서 새로운 음악장르로 인정받게되고 20년대 중반부터는 빅밴드가 생기면서 부드럽지만 박력이
덜한 코넷에서 화려하고 강렬한 음색의 트럼펫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루이 암스트롱이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꾸면서 재즈계에
서도 변화의 바람이 분것 같다. 이 시기부터 코넷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트럼펫이 주를 이루게 된다.
♬ 국내 트럼펫 주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미국의 재즈 트럼피터는? (나이 순)
루이 암스트롱 (Louis Armstrong 1901~1971)
해리 제임스 (Harry James 1916~1983)
디지 길레스피 (Dizzy Gillespie 1917~1993)
레이 앤서니 (Ray Anthony 1922~ 현재)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 1926~1991)
도크 세브린슨 (Doc Sevrinsen 1927~현재)
♬ 트럼펫은 우리나라에 언제 도입되었나?
1901년 독일 해군군악대장인 프란츠 에케르트(1852~1916 / 1879~1899 일본해군군악대 고문으로 20년간 지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대한제국군악대를 창설할 때 악기편성에 트럼펫 1개, 코넷 2개 가 있었으니까 이때가 트럼펫의 첫 도입시기라고 간주해야
되겠다.
그 이전인 1881년에 고종의 특별지시로, 우리나라보다 서양문명을 일찍 받아들이고 군대도 근대화 한 일본의 군사교육을
받고 오라고 3명을 일본에 국비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그중 1명인 이은돌( ? ~1885)은 일본 교도단 군악대에 입학하여 악대교육,
군사교육 등을 수학하게 되는데 7개월 코스인 악대교육에서 프랑스 군악교사 다그롱(Gustav Charles C.Dagron) 에게 코넷과
뷰글(밸브가 없는 신호나팔) 을 배웠는데 재능이 뛰어나서 5개월만에 조기졸업을 하게 된다.
아마도 뷰글 위주로 배우고 코넷은 부수적으로 배운것 같다.
이은돌은 1882년에 귀국하여 대한제국 군대가 현대식으로 재편된 뒤인 1883년부터 남한산성에서 병사 500여명에게 악대교육을
시켜서 각 병영에 4~8인조의 곡호대(曲號隊)를 편성하여 활동케 했다. 그는 일본 유학때 뜻을 같이 했던 김옥균 등 개화파와 정변
에 가담, 실패하자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1885년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만일 그가 살아있었다면 1901년 독일인 에케르트가 대한제국군악대를 창설할때 큰 역할을 했을텐데 ........
대한제국 군악대를 창설할 때에는 이은돌이 교육시켜 각 병영에서 활동하던 곡호대원 500여명 중에서 20세 미만의 젊은 병사 50
명을 뽑아 음악이론과 실기등을 철저히 교육시켜 6개월만에 고종황제 생신날 국내 귀빈들과 서양사람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우리
나라 처음으로 서양음악을 연주, 외국 언론들로 부터 대단한 찬사를 들었다고 한다.
기록을 미루어 살펴보면 이은돌과 대한제국 군악대원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트럼펫을 연주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이후로는 1929년에 홍난파가 이끌던 코리안재즈밴드의 명단에 코넷과 트럼펫에 김원태가 기록되어 있다.
1930년대 중반에 와서는 현경섭(1913~1950납북)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현경섭은 악단 대표의 위치가 아니라
연주단원으로서의 활동이었는데 당시 이 철이 운영하던 국내 최고의 레코드사인 오케(Okeh)레코드사(조선악극단
=CMC=Chosen Musical Club-오케레코드사 직영 홍보공연단체)의 전속악단원으로서 당시 트럼펫의 대표급 연주자였다.
※ 여기에서 이 철(1903~1944 오케레코드 사장)은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 재학시절 교내 오케스트라의 리더로서
활동을 했었고 1929년경 홍난파의 코리안재즈밴드에서는 색소폰을 연주했고 트럼펫도 겸했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
초기의 역사를 정리할 때, 이 사람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될 정도로 레코드계에 역할이 대단했던 인물이다.
♬ 1950년 이전 국내의 트럼펫 유명 연주자는?
아마도 1930~40년대에는 악기를 다루면서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던 김해송(기타), 박시춘(기타), 손목인(아코디언) 같은 분들이
금관악기(트럼펫, 트롬본) 연주자 중에서는 없었고 다만 연주자로서만 활동을 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사실 이 시절에는 미국에서 빅밴드가 서서히 성행하기 시작할때였고 유명 연주자들이 하나 둘 나타날 때이지만 당시의 매스컴
상황으로는 우리나라에서 미국의 연주계 흐름을 파악하기가 지극히 어려웠기에 그들을 대상으로 벤치마킹 할 수도 없는 입장이
었다고 하겠다. 오로지 국내에서 또는 일본에서 유행하는 대중가요 반주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다 보니 그당시에 나팔을 잘 불었다고 하는 것은 가요나 외국 음악의 멜로디를 멋드러지게 부는 것만으로 잘 불었다고 했던
것 같다. 트럼펫의 대테일한 기교나 유창한 멜로디의 처리 등과는 거리가 멀었으리라 짐작된다.
기록상에 나타난 트럼펫 연주자를 보면
이은돌 (185?~1885) 국내 처음으로 일본 교도단군악대에 유학, 코넷과 뷰글(밸브가 없는 신호나팔)을 수학하고 귀국,
대한제국의 현대화된 군대에 곡호대를 창설, 교육시킨 서양음악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 철 (1903~1944) 연희전문학교 상과 출신으로서 대학 음악서클에서 트럼펫(코넷 겸)과 색소폰을 연주했으며
1924년 단성사에서 외국으로부터 수입해 온 무성영화의 배경음악 연주악단에서 활동.
1933년 오케레코드사 설립(김성흠과 공동)
1934년 자체 녹음스튜디오에서 녹음하기 시작(국내 처음 - 다만 음반 제작은 일본에서 만들어 옴)
1938년 오케그랜드쇼 창단(신곡과 가수 홍보를 위한 전국 순회공연- 일본과 중국도 순회)
1939년 조선악극단으로 개칭하여 활동, 국내 최고의 악극단이었음.
김원태 ( ) 1929년을 전후하여 홍난파와 코리안재즈밴드에서 코넷과 트럼펫을 연주.
박주근 (1909~ ? 별세)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 대동아전쟁 직후 신태양악극단 소속으로 일본군과 만주 등지를 순회공연
했으며 필리핀 밴드에 입단하여 상해에서 활동하며 재즈를 익혔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영국이 지배하던 국제도시 홍콩
으로 옮겨서 활동하다가 1945년 해방 직후 귀국해서 "박주근과 그악단"을 창단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분을 지칭할때
필자의 선배들은 "나까노상(朴氏)"이란 일본식 발음으로 말했었다.
(일본에서는 이름을 부를때 씨(氏)를 안 쓰고 양(樣)을 쓰는데 발음으로는 "상"이 된다)
박주근님은 1950년대 중반에는 KBS경음악단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었다.(이 당시 KBS경음악단 단원은 각 악기의 최고연주자들이 모인 단체였다.)
박주근님은 60년대에도 레코딩세션으로 활동을 했다. (60년대만 해도 나이 50이 넘으면 완전 노인네로 치부하던 시기였는데
이때에도 솔로연주를 하셨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현경섭 (1913~1950납북) 1935년 - 오케레코드 레코딩 세션맨
1938년 오케그랜드쇼(=조선악극단) 핵심 단원으로 활약 (연주, 편곡 위주로 연기,춤,노래에도 가담.)
1945년 김해송의 KPK악단 활동
1949년 서울교향악협회가 발족하면서 산하 단체로 창단한 서울교향악단 정식단원으로 활동.
(서울교향악협회는 1945년 발족한 고려교향악협회가 해산되면서 1949년 새로 발족한 순수
예술단체의 집합체였다.)
1950년 6월중순 국도극장에서 KPK악단 공연을 마지막으로 6.25때 인민군 후퇴때인 9월 납북됨.
(현경섭의 경력은 후손들이 최근에 관계기관에 유품들과 일기장을 기증함으로서 대중음악 역사 정리에 큰 도움을
주는 경사가 생기면서 자세히 알게 된 것이다)
노갑동(1918~2009)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을 전후하여 악단에서 활동.
1945년 해방직후에는 당시 국내 최고의 악단인 김해송의 KPK악단에서 당시 유명했던 트럼펫 현경섭과 함께 활동했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는 미군 1개군단 병력이 남한에 주둔해 있었기에 미군 클럽의 공연도 많이 있었다. 이 시절 그는 재즈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노력했으리라 생각된다.
1950년의 6.25를 전후하여 "노갑동과 그악단"을 창단, 극장무대와 클럽 등에서 인기리에 활동을 했다. 재즈의 원조 루이 암스트
롱과 체격도 비슷하고 그와 비슷한 음색으로 트럼펫과 목소리를 흉내내어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필자는 1971년 루이 암스트롱이 별세했을때 KBS에서 추모의 프로로 노갑동님을 초청하여 녹음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뵌적이
있었다. 그때가 53세때인데 우리는 그분을 노인처럼 생각했었다. 하지만 트럼펫 소리는 좋았었다고 기억된다.
그시절에는 연주하시는 분들이 40대 중반만 넘어도 은퇴하시는 분들이 많았었다.
♬ 1950년 이후 국내의 트럼펫 유명 연주자는?
1950년은 우리나라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시기였다.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학교를 다니던 사람, 입학하려던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정지되고 학업을 중단하고 군 입대 내지 피란의 길로 들어서게 되니 개인생활이나 계획이 엉
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시절의 각군 군악대에 실력파(후에 유명 연주자가 된)들이 그 후 어느때보다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음악도들이 6.25전쟁으로 대학을 못 가게 되니까 군악대로 입대한 것이다.
육군은 1948년, 해군은 1949년에 군악학교를 설립하여 운영 중이었는데 전쟁이 나니까 음악도들이 군악학교로 몰리게 되었다.
군악대 행사를 겸하면서 2년간의 교육을 마치면 2년제 전문대학에 준하는 경력을 인정해 주는 제도였는데 이 교육을 마치면 일부
는 군교향악단(육군교향악단, 해군은 해군정훈음악대=해군교향악단)으로 배치되고 대부분은 군악대로 배치되었다. 군교향악단
은 입대 전 교향악단에서 활동하다가 입대한 나이 든 중견 단원들은 문관 신분으로 근무했고 군악학교의 교육수료자는 현역군인
의 신분으로 복무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군악학교 거치지않고 군악대에 입대한 자들 중에는 1945년 해방 직후 직업 악단에서 활동하다가 입대한 유능한 대원들
도 다수 있었는데 육군군악대의 고계화(트럼펫) 와 해군군악대의 송민영(트롬본)이 그들 중의 대표격이었다.
이들처럼 사회에서 직업연주자로 활동하던 고급 인력의 덕분에 당시 군악대 내에서 스윙밴드(당시의 명칭 =재즈빅밴드)를 지도
하여 한창 재즈를 배우고 싶어하던 젊은 음악도들에게 좋은 경험을 쌓게 해 준다.
이 시절 군악학교 출신 군악대원 중에는 후에 우리나라의 대중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 훌륭한 음악인들이 육군군악대에
서 많이 나오게 된다. 김인배(트럼펫-KBS악단장) 김강섭(피아노-KBS악단장) 홍덕표(트롬본-1세대재즈) 이정식(테너색스-재즈의
원조) 이 윤(트롬본-워커힐 악단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 시절에는 군교향악단에 금관악기와 목관악기 연주자가 부족했던 시기였기에 군악대와 교향악단을 병행하면서 근무한
대원도 있었고 이들은 군교향악단이 해체되고 KBS교향악단(육군교향악단 중심)과 서울시향(해군교향악단 중심)으로 창단된 후
에도 1960년대까지 군악대 출신(대중음악연주자)들이 협력한 시기가 있었다.
----------------------------------------------------------------------------------------------------------------------------------------------------------------
고계화(高桂華1928~ ? )
1950년대 육군본부군악대 상사로 복무 당시 미국 최고의 트럼피터 Harry James 트럼펫의 명곡 "Minka" (우크라이나 민요)를
한국 初演했다. 제대 후에는 "고계화와 그 악단"으로 일반쇼무대 스타 단장이었으며 같은 악기인 트럼펫의 "이상우와 그 악단"과
함께 일반극장 쇼무대 최고 스타로서 쌍벽을 이루어 전국을 순회하며 이름을 날렸다.
미스코리아 대회 초창기 서울운동장 수영장에서 각도 미인들이 미를 겨룰때 출연한 악단으로도 유명했고 그 당시 유명했던 트럼
펫 대곡들을 무대에서 직접 연주함으로서 연주인들에게도 대단한 찬사와 존경을 받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 중반까지가 그의 전성기였다. 클럽과 일반쇼무대 그리고 정부행사등 큼직한 공연의 대부분을 소화하
면서 명성을 높였다. 1964년말에는 한국예능단(단장 김낙곤)에악단을 이끌고 동남아순회공연에 나섰으나 단장의 불성실한 운영
으로 인해 공연도 하지 못하고 대만에서 5개월동안 발이 묶여 고생만 하다가 근근히 귀국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30대 중반에는 사고로 금관악기 연주자의 생명이랄수 있는 치아(齒牙)를 다쳐 그에게서는 더 이상 화려한 트럼펫
소리를 들을수 없게 되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다.
※ 여담 한마디-1970년대 후반 KBS의 김강섭악단이 타워호텔 클럽에 출연할 때의 일이다.
트럼펫의 김헌국이 개인사정으로 결석을 하게되어 객원주자를 보냈는데 어이없게도 고계화님이 오셨다. 크지않은 키에 겸손한
모습이셨는데 이 상황에 제일 불편해 하는 분이 김강섭단장이었다. 육군군악대 시절 하늘 같은 선임상사이셨고 트럼펫 실력이
뛰어나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분이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선배님 어떻게 된일입니까. 오늘 그냥 쉬십시요. 제가 어떻게 선배님 앞에서 감히 지휘를 할 수 있겠습니까? " 하고 난색을 표하
니 "아닐세 김단장. 나는 출연료도 받았으니 그 책임은 하고 가야지요" 하면서 겸손하게 말씀하시는 걸 보고 그 자리에 있던 단원
들이 모두 숙연해 했다.
그분은 사고로 치아가 안좋아지면서 잠시 악단장으로 활동하다가 그만 두고 낮에는 용달차 운전한다고 하셨고 가끔 후배들 빈자
리나 채워주고 다닌다면서 오히려 우리들을 위로하듯이 밝은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난다.
최상룡(崔相龍1928~? )
평북 신의주 출신으로 중학교(5년제)시절 여러 스포츠에 만능이고 트럼펫도 잘 불고 거기에 훤칠한 미남이라 그 인근 지방 학교
에까지 알려졌고 특히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50년 월남 후 자신의 "최상룡과 그 악단"을 만들어 당시에는 드물게 재즈 위주의 음악으로 활동했고 1958년을 전후로 미8군쇼
에서 밴드리더로 활동했었다. 김광수악단에서도 있었으며 주로 나이트클럽에서 자신의 캄보밴드로 활동을 했다.
평소 자존심이 강한 연주자로 소문 나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홍콩의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했으며 포켓트럼펫을 국내에 처음
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무교동의 스타 더스트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재즈만을 연주하며 재즈맨으로서의 기쁨을 맛
보기도 했다. 멋쟁이 밴드마스터로 언론에서도 가끔 소개되었으며 그의 부인은 1955년도 미스코리아 진(眞)김미정씨였다.
※ 위 사진을 살펴보면 1960년 여기에 나온 이분들이 당시 국내 연주계의 최정상 위치에 있던 악단장들이다.
박춘석은 미8군 장교클럽 하우스밴드와 국내 나이트클럽등에서- 송민영은 미8군에서 토미 아리오쇼로- 엄토미는 국내
클럽에서- 최상룡은 미8군쇼와 국내 클럽에서 인기 최고의 악단장으로 활동할 때였다.
이들 중에서 엄토미, 송민영, 최상룡 세사람은 연주인들중 스타 밴드마스터로 또 멋쟁이들로서 "3대 신사"라고 칭했다.
이로부터 2~4년 후에는 다음 세대인 30대 초반의 김인배,김강섭,여대영,이봉조 등이 방송전속악단장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그분들이 누리던 스타 악단장의 자리를 서서히 물려주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상우(李尙雨 1933~2003)
충북 충주 출신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미8군 공연단체 Band에서 활동하다가 "이상우와그 악단" 을 조직, 일반 쇼무대(극장쇼)
위주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당시에 별로 볼수 없었던 - 악단이 무대에서 율동을 하고 악단장이 멋있는 복장과 화려한 무대매너와
쇼맨십으로 관중을 사로잡는 등----- 20대중반때부터 40세 정도까지 "극장쇼의 황제" 칭호를 받으며 군림했다.
그는 극장쇼무대에서 他의 추종을 불허하는 단연 최고 인기 악단장이었다. 극장측으로 부터 인기가수보다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았
던 것이다. 극장주들이 인기가수는 나중이고 이상우부터 계약금을 주어 놓고 다른 계약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을것이다
TV가 한국에 정착하기 전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같은 트럼피터로서 고계화악단이 라이벌로 있었고 고계화의 트럼펫
실력 또한 대단했지만 인기는 이상우악단에 미치지 못했다.
같은 시대에 방송계통에서는 테너색스의 이봉조가 연이어 힛트곡 작곡과 연주로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으나 그가 전속으로
있던 TBC-TV는 그 당시 서울,경기지역 외에는 방송이 안 되었고 지방에서는 잡지나 신문으로만 보았던 이봉조였기에 실지로
지방 극장무대에서는 이상우의 인기를 따르지 못했다. 그만큼 극장쇼무대에서는 이상우의 인기가 대단했다.
70년대 들어서 TV의 보급이 확대되고 극장공연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그는 연예협회에 관심을 갖고 연주인들을 보살피는 예총
의 연예협회 산하 연주분과위원장을 맡게된다. 연주계 사상 처음으로 유흥업소의 악단 출연료 인상 문제를 어느 정도 성사시키기
도 했다. 그리고 연주인으로는 처음으로 연예협회이사장(1984~1987)을 역임했고 더 나아가 한국예술인 총연합회(예총)부회장
(1987~1989)을 역임했다.
작곡: 김포가도, 내청춘(1967 남일해 노래) 외 다수.
※ 1950~70년대의 연주자들의 활동범위를 분야별로 분류한다면 방송 또는 레코드취입실등과 나이트클럽이나 캬바레,
극장식당, 대형맥주홀 등의 유흥업소 그리고 지금은 거의 없지만 70년대까지는 극장쇼 무대가 있었다.
강대관(姜大寬 1934~2017)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여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산 해동중학교 2학년때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처음 대했는데 선생님에게서 재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된다.졸업 후 부산에서 클럽연주활동을 하는동안 재즈에 심취해 있었다.
부산은 일본이 가까워서 일본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재즈를 접하면서 재즈에 매력을 느껴 트럼펫으로 흉내도 내보고 하면서 흥미
를 느꼈다.
1957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진해군악대에서 복무했는데 간혹 해군군악대와 행사에서 마주 칠때면 강대관 위주의 즉흥연주 곡을
택해서 연주하면 해군에서 부러워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시절에는 금관악기가 즉흥연주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고 어려
운 일이였기에 더욱 그랬다.
제대 후에는 잠시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서울로 옮겨서 김안영이 리드하는 미8군쇼인 Poppy쇼에서 활동하면서 재즈트럼펫의 1
인자라는 소문이 나면서 1962년 당시 미8군 최고의 쇼로 알려진 송민영의 토미아리오쇼로 옮기게 된다, 여기서도 두각을 나타내
며 강대관 하면 뽀그락(당시 재즈 즉흥연주의 속칭)이라는 별명으로 국내 최고의 재즈트럼펫으로 인정을 받았다.
1964년에는 국내 클럽 최고의 악단인 김광수악단에서 활동하다가 또 국내 재즈의 전설 테너색스의 이정식과 함께 재즈 위주의
연주활동을 했다. 하지만 재즈만으로는 생활이 힘들어서 대중음악과 타협하게 된다. 그 후에도 그는 어느 악단을 가던지 재즈맨
으로서 재즈트럼펫의 달인으로서의 대우를 확실하게 받았다.
이봉조의 TBC-TV경음악단(1967~1978)에서 재직하면서 레코딩세션으로도 장기간 활동했다. 강대관과 그악단을 만들어 클럽에
서 활동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서 포기하고 클럽악단에서 연주활동을 하다가 김강섭의 KBS-TV관현악단(1988~1995)에서
활동하며 재즈 1세대팀에서도 재즈활동을 이어나갔다. 2001년에는 잠시 강대관과 딕시랜드밴드를 조직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모던재즈 트럼펫의 1인자였고 70대 중반까지도 원로 재즈맨 1세대의 주역으로서 무대에 오르다가 부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아들이 사업을 하는 경남 봉화로 옮겨서 지내면서 간혹 중요한 재즈 공연이 있으면 상경해서 재즈1세대팀
에서 연주를 했었으나 점차 본인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봉화에서만 지내다가 2017년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된다.
독집음반 : 강대관 고희 헌정 라이브앨범
==============================================================================================
※ 클래식 계통에서는 동시대에 순수음악을 꾸준히 지켜온 정윤민이 있어서 우수한 후학을 많이 양성했다.
정윤민(1930~1993)은 1946년 북한 거주 당시 평양에서 개최된 김일성 콩클에서 트럼펫 부문 우승 경력. 월남한 후
국내 교향악계에서 활동했고 서울음대교수로 재직하며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우렸던 전설적인 국내 트럼펫의 代父였다.
그를 빼놓고는 국내 교향악계의 트럼펫 역사를 논할수 없는 주요 인물.
==============================================================================================
◆ 김인배(金仁培 1932~2018 트럼펫. 작곡가. 편곡자, 지휘자)
[음악경력]
육군군악학교 / 육군본부군악대 / 육군교향악단 / KBS교향악단
미8군쇼 (Top & pops쇼, Star Dust쇼, New Star쇼 리더 1958~)
김호길악단 / 김광수악단 (1960~1961)
KBS전속경음악단장 (1962~63)
Telstar 레코드사 설립
TBC-Radio전속경음악단 (1977~80 KBS로 방송통폐합)
KBS-라디오관현악단장 (1980~1995)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 (1996~1999)
수상
방송유공자 포상 / 연예예술발전 공로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화관 수상 (2006)
[작품]
삼별초(주제가) 너는 말했다(주제가) 사랑해 봤으면, 내 이름은 소녀, 보슬비 내리는 거리, 그리운 얼굴,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황금의 눈, 위험한 육체, 사랑이 뭐길래, 큰댁.임이 그리워 외 다수
김인배 트럼펫 독주곡집 다수 발표
[스토리]
평북정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트럼펫을 접했고 1948년 단신 월남, 광신상고 밴드부에서 실력을 가다듬고 1950년 육군군악학
교에 입교하자마자 6.25전쟁을 겪는다. 육군군악학교를 거쳐 육군교향악단 연주와 육군군악대의 연주를 병행하며 군악대에서
스윙밴드로 미8군 클럽의 연주를 하게 된다. 이때에 재즈빅밴드 음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1950년대 후반 미8군쇼에서 밴드리더로 활동하다가 김호길악단에 입단하여 국내 대중음악을 처음으로 대하게 되고 이어서 김광
수악단에서 활동, 1961년 KBS주최 제1회 경음악단경연대회에서 편곡상을 수상했고 1962년 KBS전속경음악단의 단장으로 임명
된다. 전설적인 인기 아나운서 임택근으로 부터 “철의 입술을 가진 사나이” 라는 멋진 닉네임을 들을 정도로 시원시원하고 파워풀
한 트럼펫 솔로로서 대중들로부터 각광을 받은 국내 정상급 트럼펫 솔리스트이다. 국내의 트럼펫 연주자 중 가장 많은 가요의 트
럼펫 독주곡집과 함께 또한 교회 장로로서 찬송가의 트럼펫 독주곡집도 다수 발표했다.
단장 재직시부터 각 프로그램의 시그널뮤직을 비롯 드라마 주제가 등의 작곡이 히트하면서 많은 가요곡을 작곡, 히트시키는 인기
작곡가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KBS에는 1962년에 경음악단장을 맡아 2년간 활동하다가 작곡 활동에 전념하며 클럽악단장으로 활동했었다.
1977년 최창권단장의 후임으로 TBC라디오경음악단장을 맡아 활동하던 중 1980년 언론사통폐합때 KBS로 옮겨 라디오관현악단
장으로 근무하다가 1995년 퇴직했다. 방송악단 재직중 뇌졸중으로 인해 한동안 고생했으며 그 후유즈증으로 보행이 불편했지만
퇴직 이후에는 원로연주자의 모임인 청송회악단에서 밴드리더로 활동했고 원로연예인의 전국 투어공연에서도 악단장으로 다년
간 활동했었다.
그의 아들 김대우도 부친의 대를 이어 KBS관현악단장(2005~2019)을 역임했다.
----------------------------------------------------------------------------------------------------------------------------------------------------------------
◆ 여대영(呂大泳 1935~1985 트럼펫, 작곡가, 편곡자, 악단장)
[음악경력]
1954년 서울사대부고 졸업
1957년 육군군악대(전방 사단 군악대)에서 예편
1958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입학(신흥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첫해- 연주생활과 학업을 병행)
1958년 서울시립교향악단 단원(정윤민 수석과 함께)
1959년 미8군쇼 밴드리더 (서울음대 출신 소프라노 봉혜숙과 같은 팀=후에 부부가 됨)
1963년 MBC라디오 경음악단장 (~1969)
1963년 워커힐호텔 극장식당 쇼 초대 밴드리더 (MBC와 중복 출연 했음)
1969년 MBC-TV 경음악단 초대 단장 ( ~ 1978)
1969년 여대영과 그악단으로 클럽밴드 활동
[작품]
차중락 - 낙엽의 눈물
장미화 - 안녕하세요, 웃으면서 말해요, 그 누가 뭐래도, 바람아, 기다리는 마음, 봄이 오면,
김하정 - 신아리랑, 님의 목소리, 속삭여 주세요
장미리 - 아빠 선생님
투코리안스 - 천하일품
윤복희 - 청산리 벽계수야
최정자 - 시월단풍 타는 마음
공군군가 - 보라매의 꿈
무용극 - 퍼시픽호텔 클럽에서 극장식 공연무 작품 - 무용극 "황진이"
여대영 트럼펫 독주곡집 다수 발표
[스토리]
클래식 기초를 확실하게 다지고서 팝재즈 음악에 입문했다. 1950년대 미국 최고의 트럼피터 해리 제임스(Harry James) 처럼 테
크니컬한 독주곡을 주로 다룸으로서 뛰어난 솔리스트로 인정받았다. 빅밴드의 편곡에도 능했으며 짧은 시간내에 미국 재즈곡들
을 청음편곡(Transcribed)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또한 청음능력이 탁월해서 단원들이 고개를 흔
들었을 정도였다. 너무 음악적인 면에서 예민하여 한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세밀한 성격 탓인지 40세 이전부터 고혈압으로
고생했다. 건강 관계가 덮치면서 방송악단을 그만 두고 평소에 그답지 않게 자존심 상하는 일도 하게 되는 등 현실 속에서 어려움
도 있었지만 늦게나마 기독교신자가 되어 신자로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썼으나 51세의 이른 나이에 소천하게 된다.
1963년 워커힐호텔 쇼밴드 초대악단장 시절에는 개관기념공연에 1주일간 특별출연했던 재즈의 원조 루이 암스트롱이 여대영의
트럼펫 연주를 듣고서 한국에도 저렇게 훌륭한 트럼펫 솔리스트가 있었느냐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부인인 봉혜숙은 서울음대 출신 소프라노로서 미8군쇼를 거쳐 워커힐 무대와 TV방송 초기인 1960년대에 방송출연등 무대활동을 원활히 했었다. (부인은 2020년 소천)
===========================================================================================
※ 위에서 보면 유명한 연주자들이 대부분 김광수악단 출신들이 많을 것을 볼수 있다.
김광수(金光洙 1921~1993 바이올린, 작곡가, 악단장)라는 분은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사쿠라이
기요시 탱고밴드에서 탱고를 익혔으며 1945년 해방 직후 귀국하여 윤이상 등과 실내악 활동을 했었다.
곧 이어 탱고밴드를 조직. 활동하다가 1950년 6.25 전쟁 중에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미해군의 폐군함(LCI)을 활용하여 만든, 그 배
의 이름 그대로 LCI 클럽을 맡아 연주 활동하다가 1954년 환도 후 상경하여 퇴계로입구에 고미파 홀(1959년 화재 발생 -재건축
후 이름을 바꾼) 무학성 홀(1967년 또 화재 발생)에서 "김광수와 그 악단" 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악단은 1950~60년대 국내 최고의 악단으로 군림했었다. 고미파(=무학성) 홀은 당시 사교클럽으로는 국내 최고의 장소였다.
최고의 시설, 최고의 악단, 최고의 댄서로 유명했던 클럽이었다.
그가 후에, 유명 악단장이 된 유능한 단원들을 항상 기용할 수 있었던데에는 그의 음악적인 뛰어난 능력도 중요한 몫을 했지만
거기에 그 클럽의 사장이 그의 부인이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당시에 그와 쌍벽을 이루며 활동하던 클라리넷과 테너색
스의 엄토미도 일을 쉬게 되면 친구인 그의 악단에 가서 연주를 하곤 했다.
대부분의 악단장들은 클럽의 운영방침에 따라 출연 여부가 결정되어지지만 김광수악단은 자신의 부인이 운영하는 클럽이니만큼
악단의 출연은 항상 계속되어졌기에 실력있는 단원들로만 연주 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KBS가 남산에 새로이 방송국 건물을 지은 1958년에 KBS전속경음악단장으로 부임했다가 KBS-TV가 1961년에 개국하게 되니까
KBS를 사직하게 된다.(그 시절에는 TV방송국에 녹화시설이 없던때라 모든 쇼프로그램을 저녁에 생방송으로 송출할때라 클럽 연
주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는 TBC라디오의 전신인 RSB(라디오서울) 전속경음악단장으로 부임하여 1968년까지 방송악단과 클럽 연주를 겸해서
활동하다가 1969년 미국으로 이민, 1993년 73세에 LA자택에서 소천하였다.
(김광수 악단 출신으로는 트럼펫의 노갑동, 최상룡, 김인배,강대관 피아노의 김강섭, 박선길, 테너색스의 박호일, 이봉조, 아코디
언의 권창호, 드럼의 최세진 등 유명 연주자들이 이외에도 많았다. 실력 위주로 기용했으니까 단원 모두가 실력파였다고 하는 것
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전 KBS-TV관현악단 김강섭단장은 육군본부군악대가 부산에 있을때인 현역 중사 시절에 군악대의 스윙밴드가 군대 행사로 LCI
클럽에 갔다가 김광수단장의 눈에 띠어 즉시 스카웃, LCI클럽 김광수악단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었다.)
================================================================================================================================================================================================
부치는 글
♬ 대중음악 연주계의 어제와 오늘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과거 유명 연주자들은 사실상 재즈를 바탕으로 1930년대 부터 미국의 이름난 재즈맨들의 음반을 듣고
흉내 내면서 자생 성장했다고 하겠다. 클래식음악과 국내의 가요와는 전혀 다른 ,그 새롭고 매력 있는 재즈와 한국의 옛 가요음악
을 어떻게 융합해야 할까 고민하며 우리 가요계에 정착, 접목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시절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고 보여진다.
1950년대 들어서서는 미군의 장기 주둔으로 인해 미국의 대중음악을 수시로 접하면서 재즈에 대한 이론서적이나 편히 들을 수
있는 음향장비도 구하기 힘들었던 그 시절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미국의 재즈를 위시한 여러 나라의 세련된 음악을 듣고 그와
비슷하게 연주하는 훌륭한 연주자들이 계속 이어서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예술적 감각과 재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한
DNA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나 유추해 보게 된다.
우리나라 대중음악 연주계에 다행스러운 것은, 1980년대 말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에 대중음악 전공의 실용음악과 설립을
필두로 그 이후 1990년대에는 국내 대학교에 대중음악 전공학과의 신설이 확산되고 거기에 맞춰 재즈 교육의 최고봉인 미국 보
스턴의 버클리음악대학을 비롯한 선진국의 음악대학에서 재즈를 수학한 엘리트들이 국내 대학의 강단에 서게 되면서부터 엄청난
발전을 하게된 것도 우리나라 대중음악 연주계의 크나큰 수확이라 하겠다.
가끔 TV에서 연주자 경연대회에 출전하는 멤버들을 보면 악기연주의 기본인 음정, 박자. 테크닉 등은 이미 초월했고 감정표현 내
지 창의력, 팀웍, 관중흡인력 등을 중점적으로 가리게되는 그런 수준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래고 또 놀랜다. 하지만 이 뛰어난 고
급 인력이 활동할 공간이 별로 많지가 않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 우리나라에서 관악기 연주계가 발전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시기를 살펴보면
1930~40년대 가요의 탄생과 악극단 성행 및 8.15직후 미군 3년간 주둔 시기에 재즈를 처음 들어보며 접해보던 악단 연주활동
1950~60년대 미군의 대병력 국내 주둔 시기에 미8군연예대행기관(1958~)에서의 본격적인 재즈와 팝음악 연주활동
1970~80년대 국내 라디오(1948~) 및 TV(1961~)방송사의 개국과 방송전속악단의 활동
1980~90년대 국내 재즈밴드의 활성화 와 재즈 유학생 증가 및 각 대학교의 대중음악과목 신설 등 교육저변의 확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