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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권 명종조 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 순회세자(順懷世子) 순회세자가 여섯 살이 되니, 어릴 때 교육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조정의 학행 있는 이를 뽑아 보양관(輔養官)이라 일컫고 수시로 접촉하게 하니, 안현(安玹)ㆍ이준경(李浚慶)ㆍ조사수(趙士秀)ㆍ임호신(任虎臣)이 뽑히었다. 《동각잡기》 과거에 임금이 어려서 정권이 대비에게 있고 간신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니, 을사년의 옥사는 임금이 아는 바가 아니었다.
세자가 죽자 임금이 매우 애통하다가, 얼마 뒤에 “내 울어 무엇하랴. 을사년에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이 죄 없이 떼죽음을 하였는데도 내가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말리지 못하였으니, 우리 집안이 어떻게 대대로 군왕이 이어질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훌륭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후세의 신하를 울릴 만하다. 《부계기문》 ○ 선조 임진년에 공회빈(恭懷嬪) 윤씨가 창경궁 통명전에서 졸하였다. 세자의 무덤에 부장하려고 날을 정하였으나, 난리로 파천하게 되어 마침내 후원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이듬해 환도하여 보니 이미 파헤쳐 없어져서 끝내 찾지 못하였다. 《공사견문(公私見聞)》 가까운 친척 황대임(黃大任)의 딸을 점쟁이와 짜고 오주(五柱)를 고쳐 만들어 가장 길하다 하고 올렸다. 혼례 기일이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대임의 딸이 갑자기 복통으로 매우 앓으므로, 임금이, “병자를 동궁에 짝할 수 없고 또 다른 데로 출가시키기도 어렵다.” 하고, 강등하여 양제(良娣 세자궁의 궁녀의 직함의 하나)로 삼았더니, 조금 있다 죽었다. 윤옥(尹玉)의 딸을 다시 뽑아 가례를 행하였는데, 이듬해에 순회세자가 요절하고, 임진년에 윤빈이 죽었다. 신축년 선조가 전교하기를, “공회빈 일은 내가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사변으로 인하여 국가가 황망하여, 아직 신주를 세우지
못하였고, 순회세자 또한 신주가 없으니, 내 이를 생각하면 말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유사(有司)에 명하여 신주를 세우라.” 하였다. 《문헌비고》 ○ 순회묘(順懷廟)가 도성 안 북쪽에 있어서 순회세자와 공회 윤빈을 모셨더니, 인조 병자란에 신주가 없어져서 정축년에 다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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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순회세자는 명종임금의 아들로 할머니인 문정왕후와 우리동네에 있습니다.
이렇듯 세자로 책봉을 받고도 꽃도 피우지 못 한채 어린나이에 죽어버린 왕세자가 참 많아요...
만일 순회세자가 대통을 이었다면 임진왜란 때 혼자살겠다고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 임금은 아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