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 응렴[景文王 膺廉] - 신라 추존 의공대왕의 적 1 남
1. 생몰 : 846 ~ 875
2. 재위 : 861 ~ 875
3. 아버지 : 의공대왕 계명(懿恭大王 啓明)
4. 어머니 : 광화부인 김씨(光和夫人 金氏)
5. 휘 : 김응렴(金膺廉) / 김의렴(金疑廉)
6. 황후
- 문의황후 김씨(文懿皇后 金氏) : 헌안왕의 딸
7. 후비
- 차비 김씨(次妃 金氏) : 헌안왕의 딸, 문의황후 김씨의 여동생
8. 자녀(3남 1녀)
* 장남 헌강왕 정(憲康王 晸) : 제 49 대 황제 (문의황후 生)
* 차남 정강왕 황(定康王 晃) : 제 50 대 황제 (문의황후 生)
* 3 남 왕자 윤(王子 胤) (문의황후 生)
* 장녀 진성여왕 만(眞聖女王 曼) : 제 51 대 황제 (문의황후 生)
경문왕(景文王)은 신라의 제 48 대 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응렴(膺廉)이다. 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인 계명(金明)이고,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865년 4월에는 당나라 의종으로부터<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시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상주국·신라왕(開府儀同三司・検校太尉・侍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上柱国・新羅王)>으로 책봉 되었다. 또, 이때에는 왕뿐만이 아니라 황후·황태자·대재상·소재상에게도 하사품이 있었다. 869년 7월에는 왕자 김윤(金胤)을 당에 파견해, 말 2마리·사금 100량·은 2백량 외 , 다양한 물품을 전해졌다. 이 때 에는 이동(李同)을 김윤에 따르게 하고, 당나라에서 학업을 거두게 하는 것과 동시에 서적을 구입하기 위한 비용으로 해서 은3백량을 이동에 하사 하였다. 다음 870년 2월에는 사찬 김인(金因)을 당에 숙위 시켰다. 874년에는 희종으로부터의 선유사를 받고 있어 당과의 교류는 지난 날의 번성함을 회복했다. 이전, 864년 4월에 일본으로부터도 국사를 맞이했던 것이 기록되고 있다.
867년 5월에는 왕도 금성(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역병이 유행했고, 동년 8월에는 홍수가 일어났다. 지방 각지에서도 곡물이 여물지 않고, 왕은 각지에 안무의 사자를 파견하고 위문에 노력했다. 870년에는 왕도가 지진·홍수에 휩쓸려 그 겨울에는 다시 역병이 유행하게 되었다. 873년에도 기아와 역병이 일어나, 왕은 백성에게 곡물을 주어 구제했지만, 정황은 안정되지 않았다. 역병등의 액재와 호응 하는 것도 아니게 왕도로의 귀족층의 반란이 잇따른 것은, 그 현상이라고 보인다.
866년 10월에는 이찬 윤흥(允興)이 그 남동생 숙흥(叔興), 계흥(季興)과 함께 반역을 꾀했다. 사전에 발각되어 윤흥등은 대산군(岱山郡, 경상북도 성주군)에 도주했지만, 포박 되어 참형에 이곳에서 일족이 몰살을 당했다. 또, 868년 1월에는 이찬 김예(金鋭), 김현(金鉉)등이 반란을 일으켜 죽였다. 게다가 874년 5월에도 이찬 근종(近宗)이 반란을 일으키고 궁중까지 도달해, 왕은 근위병을 파견해 격파해, 근종을 잡아 차렬형으로 처벌했다. 반란자를 완전히 잡지 않을 수록에 통제력이 저하되고 있던 문성왕의 무렵부터 비교하면, 조금은 통제력은 회복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재위 15년째의 875년 7월 8일에 사망해, 경문왕으로 시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