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03년 9월호에 실린 백소영 님의 글입니다. 단, 저는
“함석헌 님은 김교신 님의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멀리 뛰었습니다.”
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하필 무교회인가
시작하며
저는 감리교인입니다. 목사 사택은 교회 건물 안에 있어야 하고 사택 문은 교인들을 위해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사신 아버님 덕에, 교회 건물 안에서만 스물여섯 해를 지낸 진짜배기 ‘교회 교인’입니다.2)
첫딸은 살림밑천이고, 목사 가정의 첫딸은 목회밑천이라는데, 그래서인지 교회 안에서 자라며 그곳에 모이고 흩어지는 사람들을 만나고 갈등하고 사랑하고 하는 동안, 어느덧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 된 신앙공동체가 제 삶의 주된 애정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도미하여 학문의 길을 더 가는 동안에도 제가 사랑하는 한국의 교회에 도움이 되는 신학사상을 찾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졌고요.
그런 제가 정작 박사학위 논문은 ‘무교회’(Non-Church, 無敎會)에 대하여 썼습니다. 무교회의 주장에 대해 낯선 제 주변 분들은 ‘무교회’ 하니까 교회를 몽땅 없애자는 ‘주의’인 줄 아시고 많이들 걱정하셨습니다. 무교회를 조금 아시는 분들도 교파교회나 제도교회를 부정하는 점, 예배의식 및 성례전을 거부하는 점, 이성적이고 지적으로 치우친 신앙생활 등을 들어, 제가 논문 주제를 아주 잘못 택했다고들 하셨지요.
하지만 무교회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한 6년 전이나, 졸작이지만 그것으로 학위를 마치게 된 지금까지 저는 참으로 제대로 된 것에 제 시간과 힘을 쏟았다고 확신합니다.
북아현동에서 반경 10킬로미터 밖으로 나가본 일이 드문 토박이 강북 처자가 겁도 없이 기댈 곳 하나 없는 태평양 건너 보스턴에 뚝 떨어졌던 1994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제가 사랑하고 무언가 귀한 것을 드리고 싶은 대상은 한국교회입니다. 무교회 분들의 주장과 삶을 귀히 여기고 배운 바가 많지만, 저는 무교회로 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제 삶의 자리는 교회 안에 있고, 감리교회 안에 있고, 한국에서는 아현중앙감리교회 안에 있고, 이곳 미국에서는 달라스 중앙연합감리교회 안에 있습니다. 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매일 만나고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의 신앙 성장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소부재하시기에 또한 어디에나 자리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니, 저야 제 자리가 있어야지요.
참으로 오랜만에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제 감정과 전하고 싶은 내용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우려하며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서, 한국의 교회 교인들과 무교회 교인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 된 모든 분들에게 제 사랑의 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귀를 두 개 만드시고 입은 하나 만드신 데 까닭이 있다 합니다. 말하는 분량의 두 배를 듣기에 힘쓰라고요. 무교회 분들이 삶을 바쳐 살아내고 있는 그 신앙고백들, 한국 교파교회의 병폐를 바라보며 예언자처럼 외치던 소리들, 우리만의 한국적인 신앙 표현을 하려 했던 시도들, 귀 기울여 듣고 곱씹고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한국의 교회가 새로이 거듭나는 데 꼭 필요한 깨우침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 하필 무교회냐
한국 개신교회사를 훑으며 한국의 교회들을 나름으로 유형화해 보았습니다. 유형이라는 것이 이론적 성찰을 위한 도구이니 실제의 특정한 어느 교회가 꼭 한 유형에 속한다는 법은 없습니다만, 대략 세 가지 형태가 보였습니다.
(1) 기독교 자체보다는 민족이 우선인 교회들입니다. 민족정신을 깨워야겠는데 무력한 불교정신이나 낡아빠진 유교정신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힘이 있어 보이는 현대 서구의 종교, 즉 기독교를 통해 한국을 다시 깨워 보자는 교인들의 모임입니다. 이 경우 기독교 신앙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도구(ideological tool)로 여겨지는 셈이지요.
(2) 순수한 복음 전파에만 주력하는 교회들입니다. 우리가 널리 쓰는 대로의 복음적, 성령운동 위주의 교인들이 모인 교회로서 개개인과 개교회의 영적 신앙에만 주력하는 경향이 짙지요. 이런 공동체에서는 세상 정치와는 철저히 분리하여 무관심한 것이 경건한 신앙생활의 지표인 양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참 역설적인 것은, 이런 유형의 교회들이 일제 시대나 군부 시대에 세상 정치세력을 묵인하고 심지어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겁니다.
(3) 사회적 조건들을 개혁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믿는 교인들의 모임입니다. 선교 초기의 기독교 계몽 운동이 그 대표적 사례이지요. 사업을 해야 하니 본의는 아니더라도 현 질서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복음 전파를 우선하던 교회로부터는 이차적인 것에만 치중한다는 비난도 받았고요.
이 세 유형이 모두 갖는 공동의 문제점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기독교 신앙이든 간에--이데올로기적 도구든, 복음주의든, 자유주의든--하나같이 서구 기독교의 틀과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드물게 몇몇 개인이 기독교의 토착화에 관심을 가진 경우는 있지만, 주요한 흐름은 그랬습니다.
한국 무교회 운동이 제 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이 세 가지의 눈에 띄는 주류들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귀히 여기고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정신을 찾아보자 하는 것은 (1)과 같으나,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결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었지요. 세상과 다른 질서, 영적 신앙을 중요시한 것은 (2)와 같은 듯한데, 그러면서도 시대마다 비판적 시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대안적 공동체를 꾸리며 사회 개혁을 꿈꾼 것은 (3)과 비슷한데, 그러나 프로젝트의 성공적 완수보다는 근본적인 영의 개혁이 주된 관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와 군부시대를 거치는 동안 무교회 신앙인들은 세상과 철저히 대항하는 초월적 신앙을 가지고도 역사에 참여해 온, 참으로 독특한 신앙공동체를 꾸렸지요. 인간의 잔머리로 만든 용어인지 모르지만, 저는 무교회 분들이 신앙공동체를 버티어 나간 정신이랄까 세계관을 ‘초월적 역사의식’(a world-transcen-ding historical consciousness)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이 용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이 ‘초월적 역사의식’은 세상을 초월하시지만 동시에 역사에 참여하시는 하나님 신앙에 기반을 둔 것인데, 이 기독교적 의식 때문에, 무교회 분들의 ‘한국적’이려고 했던 노력은 당시에 유행하던 토착 신앙에 기반을 둔 민중 종교들과도 달랐습니다. 한국의 전통적 세계관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인즉, 만물이 한 근원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화해하는 ‘한’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전통 안에서 무교회는 분당 짓고 교리가 조금 다르다고 교파를 만드는 서양의 교파적 기독교도 거부하였죠. 하지만 바로 그 하나 되고 화해하는 성향 때문에 한국의 종교전통에는 세상과 긴장되고 대립되는 신앙관이 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무교회는 분명히 기독교의 이원론적 긴장을 믿고 살았던 공동체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저로 하여금 무교회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그 안에서 한국 교회갱신에 도움이 될 만한 소리들을 기대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김교신(1901-45)과 함석헌(1901-89), 한국 무교회 운동의 ‘바통’을 전하고 받으며
‘무교회, 그게 어디 한국 거냐? 일본 것이지. 우치무라 간조(Uchimura Kanzo, 1861-1930)가 서양 교파교회가 싫어 창시한 것이고, 아직도 일본에서 더 성하고 있으니 일본식 기독교라고 해야 맞다.’ 그리 생각하시는 분이 많으실 줄 압니다.
실제로 무교회라는 이름과 그 신앙공동체의 주된 특징들은 우치무라에 의해서 생겨났습니다. 우치무라는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 사무라이의 덕목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아는, 우리에게는 아직도 곱게 들리지 않는 그 ‘사무라이’ 말입니다. 1868년 시작된 명치유신 이래 일본은 근대화의 물결이 한창이었습니다. 군인으로서 이전까지 누리던 사회적 특권이 위협받던 변화의 시기에, 사무라이 집안 자녀들은 재빨리 서양 기술문명을 터득하여 정부 관리직을 차지하려 했지요. 그래서 서양 기술을 전하는 학교에 많이들 들어갔습니다. 우치무라도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양 평신도 과학자인 클라크(William S. Clark)가 세운 삿포로 농업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비록 서양의 발전된 기술을 배우러 그 학교에 가기는 했지만, 온통 서양 종교(기독교) 냄새가 나는 학교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답니다. 그래서 그가 믿던 일본 귀신(가미)에게 기독교를 없애 달라고 매일 빌었다나요.3)
그러던 우치무라가 1876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 그는 사무라이식으로 절제되고 훈련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일곱 명의 형제들끼리 일주일에 세 번씩 모여 돌아가며 성서공부를 인도하는 소그룹 모임도 만들었고요. 예배도 없고 성가도 없고 그냥 둥그렇게 둘러앉아 성서만 놓고서 각자가 연구한 내용들을 나누는 식이었습니다. 사실 거기서 무교회가 태동한 셈이지요.
사무라이답게 그는 가장 ‘일본적’인 기독교를 원했고 그것은 두 ‘J’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는 지저스(Jesus)이고, 다른 하나는 저팬(Japan)이랍니다.4) 일본 전통종교인 신토(Shinto)와 유교적인 덕목들, 거기다 불교적인 현상 초월이 뒤섞여 나온 것이 소위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5) 우치무라는 나라에 충성하되 죽기까지 하고, 스승을 존경하며, 정직·용기·신뢰·책임감,·약자에 대한 연민 등을 그 덕목으로 하고, 정의와 진실을 위해 희생적인 죽음을 택하는 것이 사무라이적 기독교의 모습이라고 보았습니다.6)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작 우치무라가 소위 ‘무교회’를 주창하고 나온 것은 1893년의 일입니다. 가장 민족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복음적이기를 원하던 그가 교파 교회와 일본인들에게 모두 배척을 받게 되었지요. 그의 일본적이려는 노력은 서양 선교사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기독교적이려는 노력은 당시 제국주의적 일본의 걸림돌이었거든요. 이래저래 생겨나서 시작한 것이 무교회입니다.
1900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1930) 매달 <성서연구>(Seisho no Kenkyu) 지를 내고 주일에는 소그룹 성서공부를 인도하면서, 자기 말대로 종교적 프리랜서(a free-lancer in religious standing)로 살아갔습니다.7) 그의 주장과 삶을 이어받은 2세대, 3세대 일본 무교회인들 중에는 무교회의 ‘무’(無)자가 불교의 ‘공’과 같다고, 그래서 토착적으로 푼 용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는 줄 압니다만--특히 ‘무신앙의 신앙’을 주창한 세키네 마사오(Sekine Masao)의 경우--우치무라 자신이 밝히기에는 그냥 단순히 ‘없다’는 뜻, 즉 교회 없이 떠도는 기독교 고아들이 모여 만든 신앙공동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8)
‘교회’라는 말이 함축하는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 즉 건물로서의 교회, 교파교회, 제도적 교회, 굳어진 교리와 형식화한 성례전, 이런 것들이 싫어 우치무라는 자신의 신앙공동체를 에클레시아(ecclesia)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초대교회의 모형을 모델로 하고요. 원문으로 성서를 연구하는 열심 있는 평신도 신학자였던 그는, 성서적 에클레시아는 “밖으로 불려서 나온 평신도들의 모임”을 뜻한다고 풀었습니다.9)
주일 하루 모여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서열에 따라 위세하다가 흩어지고 마는 그런 껍데기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평등한 사귐(koinonia)이 있는 평신도들이 주일에는 모여서 성서를 진지하게 공부하고,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매일매일, 매 순간 매 순간을 영적 예배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일터에서 최선의 삶을 사는 알맹이들의 모임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우치무라의 주장과 삶을 좋게 여긴 한국의 젊은이들,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그리고 양인성 이들 여섯 사람이 “우리도 한 번 해보자.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기독교적’인 신앙공동체를 만들어보자”면서 1927년에 시작한 것이 한국의 무교회입니다. 물론 이 여섯 분 모두가 우치무라의 성서연구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던 사람들이고, 우치무라의 무교회에서 자극받고 동기 부여를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1세대 한국 무교회의 대표격인 김교신 선생의 말대로 그분들이 우치무라에게서 배운 것은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별개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 일본 무교회의 분점을 한국에 내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10)
하지만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하필 일본에서 생긴 기독교 형태를 받아들이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 교파교회에 속하면서도 현행 교회들의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한 김린서 목사 같은 분은 나라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판에 왜 영적으로도 일본의 식민지를 자처하느냐고 못마땅해 하셨지요.11)
그런 분위기에서 1세대 한국 무교회 분들은 <성서조선>(1927-42)이라는 무교회 신앙 잡지를 통해 가장 ‘한국적’이려 하는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을 표현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 교파교회들이 일본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던 그 무교회와 <성서조선>, 정기 구독자가 300명도 안 되는 그 미약해 보이는 모임을 일본 식민정부에서는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1942년에 ‘성서조선사건’이라는 음모를 통해 잡지를 폐간하고 관련인들을 투옥하기에 이르렀지요. 관련인들을 심문하던 한 일본인 경찰만이 <성서조선>의 저력을 제대로 보았다는 것은 참 슬프고 기막힌 일입니다. 그랬다나요? ‘독립운동 한답시고 당 만들고 하는 한국인들은 그래도 봐줄 만하다. 그런데 너희 무교회는 더 악질이다. 종교를 통해서 100년 뒤, 아니 500년 뒤에라도 한국인이 독립할 수 있는 민족 혼, 영적 힘을 기르려는 게 아니냐고.’12) 실제로 <성서조선>은 ‘성서’와 ‘조선’ 사이에 ‘와’를 넣어 혹 그 사이에 거리를 두게 될까 두려운 나머지 ‘와’자를 빼고 만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13)
1945년 나라의 독립을 몇 개월 앞두고, 모임의 리더 격인 김교신 선생이 돌아가시자 한국 무교회는 송두용, 함석헌, 노평구 님들에 의해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의 의아심을 살 만한 것인즉, 제 논문의 주장인데 김교신 님의 무교회 정신의 ‘바통’을 함석헌 님이 이어받았다고 한 것이지요. 평생을 ‘김교신적’인 무교회 신앙을 이어오신 노평구, 유희세 님 같은 분들께서 참으로 섭섭해 하실 일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함 선생 자신이 <대선언>(1953)에서 참된 하나의 종교를 찾기 위해 교회에도 죽고 무교회에도 죽겠다 하신 마당에 왜 굳이 함석헌 님을 제2세대 한국 무교회의 대표로 다루느냐 탐탁치 않아 하실 분들이 많으신 게 이해됩니다.
먼저 밝히는 것은 이런 제 선택이 결코 ‘김교신적’ 무교회 신앙을 이어오신 분들의 삶과 신앙고백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무교회의 기본 정신은 끊임없는 저항(protest)의 정신, 내 주장이라 해도 그것을 굳히려는 유혹에 프로테스트하는 정신, 내 영이 자라고 시대가 자라고 삶의 자리가 변화함에 따라 끊임없이 거듭나는 새 말씀을 받아 말하는 그 정신이기에, 이미 김교신 님에 의해 확고해진 주장과 신앙 형태는 굳이 2세대를 다루는 데서 반복하여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함 선생의 경우는, 후기에 자신을 퀘이커라고 부르셨을 때나 그저 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다 하셨을 때에도, 제가 이해하는 한, 그분은 철저하게 무교회 정신을 계승하였고 거기에 ‘한국적’이라는 것의 내용을 꽉 채우신 분입니다.
한국 무교회 분들의 글을 찬찬히 읽고 곱씹으면서 나름으로 한국 무교회의 특징이랄까, 바탕이 되는 정신이랄까 하는 것들을 다음의 여섯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신앙인 개인과 하나님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표현되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신앙고백을 존중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권에 의해 인정받는 어느 한 사람이나 한 공동체의 성서해석이 더 권위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앙 표현도 다음 세대에 의해 답습되어서는 안 되고 평신도 개개인의 주체적인 신앙고백이 계속적으로 표현되어야 하기에, 월간지 형식으로 신앙고백을 표현하는 무교회인들은 자신들이 죽거나 너무 연로할 경우 스스로 자신의 신앙고백지를 폐간합니다.
(2) 그 어떤 형태의 에클레시아든지 간에 철저하고 지속적인 성서공부가 그 중심 축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원어를 배워서 읽고 연구할 만큼 성서 연구에 집중합니다.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원리 그대로이지요. 성서 연구가 주된 활동이다 보니 이성적인 모임이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감정에 휩싸여 제 감정인지 성령의 감화인지 구별이 안 되는 신앙공동체를 싫어합니다.
(3) 교회가 살아 있는 신앙을 일정한 형태의 제도 속에 묶어 넣으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합니다. 제도라는 것이 인간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인데, 그래서 제도화한 성례전이나 예배 형식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지속적으로 제도화를 부정하는 원칙’(the principle of continuous negation of institutionalization)은 보다 넓은 사회를 대할 때에도 똑같이 적용되며, 인본주의적(anthropocentric) 문명과 그 제도를 신성화 또는 절대화하는 모든 시도에 대해 프로테스트합니다. 이 점에서는 분명히 이원론적입니다. 세상 질서에 맞서는 하나님의 질서를 주장하니까요.
(4) 그러나 이 세상 질서를 초월하는 이들의 신앙은 동시에 세상 참여적입니다. 그 기반은 세상을 초월하시나 동시에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신앙에 두고 있습니다. 이 신앙관을 본 논문에서는 ‘초월적 역사의식’이라고 불렀습니다.
(5) 교회가 부여하는 타이틀을 거부하다 보니 원칙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평등한 사귐(egalitarian koinonia)을 지향합니다.
(6) 모든 에클레시아는 각자 특수한 제자리가 있다고 보는데, 따라서 한국적 에클레시아는 한국의 종교, 사회, 문화 전통을 소화하고 그 내용을 담아내는 기독교 공동체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때 무교회의 ‘제도화 부정의 원칙’은 한국적 에클레시아가 자신만의 신앙고백을 표현할 때도 적용됩니다. ‘이게 한국적인 거다’라고 한번 정해서 틀에 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려는 시도들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계속해서 껍데기 벗기를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한마디로 한국 무교회의 정신은 안주하려는 것, 굳히려는 것, 변하지 않으려는 것들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의 정신입니다.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다 무교회처럼 되라는 주장이 아니고, 철저히 한 극단을 살면서 자꾸 세상에 순응하려 하고, 타협하려 하고, 지속적인 신앙적·신학적 성찰을 게을리 하며 남이 만들어 놓은 교리에 매여 있는 한국의 제도 교회들을 향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살겠다는 주장입니다. 이 점에서 분명히 함석헌 님은 김교신 님의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멀리 뛰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기독교사상>에서 제 논문의 내용을 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다음 호에는 제가 제1세대와 2세대 무교회를 연결짓는 데 사용한 두 정신, 즉 (1) 한국의 종교문화적 정서로서의 ‘한’ 사상과, (2) 기독교 세계관으로서의 ‘초월적 역사의식’을 설명하고, 김교신 님으로 대표되는 제1세대 한국 무교회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밝히는 것은 제 논문에서는 3세대 무교회라 할 수 있는 지금의 ‘성서연구’ 모임은 다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계속 자라는, 살아서 펄펄 뛰는 생명을 어찌 글로 제한할 수 있겠나 생각하여서입니다.
백소영 님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 후 보스턴 대학교에서 종교사회윤리학(전공)과 비교신학(comparative theology, 부전공)으로 올 5월 박사학위(Th. D.)를 받았다.
첫댓글 좋은 글이십니다. 그러나, 무교회,교회,등 다좋으나, 현대한국교회의문제점은 솔직히 "돈"문제입니다. 성도들이 십일조못내서 창피하고,죄책감때문에 교회못가는 분들 주변에서많이봅니다. - 십일조및 헌금내는데 이름를 꼭밖혀야합니까. 중심를 보시는 주님에게 맡길수는 없는지 개탄스럽습니다.
돈(헌금)을 공공연히 강요하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사업장입니다.
실망하지마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아십니다.
식민지배 하에서 민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초기 무교회 지도자들의 삶은 지금 우리에게 신선하게까지 느껴지는 군요. 이민족의 억압과 절대적인 가난이 물러간 지금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싸워야 하는 적 하나는 십자가의 자리에 독버섯처럼 자리잡고 있는 物神 그것입니다.
더 잘 읽어보려고 퍼가요..
교회는 부자인데 그 교회 교인들은 가난하다.한국의 현실,,,,,,
무교회주의 탄생과 활동 알기 쉽게 써 주신 것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백소영님 박사학위 받으실 만 합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사상과 모임으로
성서 공부를 하고 실천했던 분들이 계셨다는게 기쁘네요.
어떤 식으로라도 하나님 뜻을
알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밖에서 본 무교회'인지라 사실관계를 잘못 알고 계신 부분도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