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장 묵상
출처 : KTSM 대표 최승호
40. 예수님을 따르고 섬긴 사람들 (눅 8:1-3)
◆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그 복음은 어떤 내용일까? 적어도 사도 바울처럼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고, 십자가의 오묘한 진리를 설명하는 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 사람에게는 너무나 높고 어려운 지식이다.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내용일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 고백 위에 서 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의 유일성을 선포한다. 다른 예수가 가능하다거나 우리도 노력하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모두 미혹이다.
바울의 복음도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과 전혀 다르지 않다. 바울의 복음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이기 때문이다. 일부 극단적인 교파에서는 바울의 복음을 오해하여 마치 '죄 사함'과 '구원'이 복음의 핵심인 듯 가르치지만, 실제로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받는 여러 복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 됨과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복인지를 알게 된다면, 그리고 율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들은 더욱 이 말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을 제대로 배웠다. 그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베드로의 고백과 동일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왕으로 받아들인 자만이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될 수 있다. 그게 시민권을 얻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리고 시민이 왕께 충성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물며 그 왕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선한 목자가 되신 분이라니 더더욱 기쁨으로 충성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 예수님을 섬긴 여인들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3)
예수님을 따르면서 섬겼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사 등 각종 잡다한 일을 하며 도왔을 것이다. 그중에 하나는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자 곧 막달라 사람 마리아다. 늘 이름 앞에 따라다니는 수식어,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
사람이 일곱 귀신이 들리면 어떻게 될까? 쓰레기통을 뒤지며, 길거리에서 노숙하고 이 사람저사람 공격하거나... 아니면 여러 마음과 육체의 질병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여인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고, 외모와 상태는 처참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그를 피하지 않고 고쳐주셨다. 이것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그 안에 고통받는 영혼을 보실 수 있는 분만이 하실 수 있는 행동이다. 절대로 구제가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여자가 완전히 고침을 받았다. 그는 자기를 완전히 고쳐주신 주님을 평생 은인으로 삼고 따랐다.
마리아는 자기 이름 앞에 있는 수식어 '일곱 귀신이 나간 자'라는 말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듯하다. 그 말 자체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만 있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모두가 예수님을 버렸을지라도 바로 그 옆을 지켰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당시에도 빈 무덤에서 훌쩍거리며 끝까지 무덤 곁을 지켰다(요 20:15).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일 처음 만나주신 자가 바로 이 마리아였다(요 20:16). 부활의 첫 증인 된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인생은 기구해 보였어도 사실은 그는 창세 전에 이미 택함받은 여자였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영광, 또 영광이다.
예수님을 섬긴 여인들은 여럿이었는데, 오늘 본문에 꽤 신분이 높아보이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도 섬기는 데 일조했다. 아마도 이 여자는 병 고침을 받은 후에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면서 물질로 후원했던 것 같다(3).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긴 여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도 있다(마 27:55-56). 이들의 헌신은 정말로 너무 아름답게 느껴진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섬긴 자들이다.
주님, 주님을 끝까지 따랐던 제자들의 충성과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긴 여인들의 헌신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이 영광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습니다.
41. 씨 뿌리는 비유 – 네 부류의 사람들 (눅 8:4-15)
◆ 네 부류의 사람들
(8)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배를 조금 띄우시고 배 위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마 13:2). 큰 무리 중에 저 뒤쪽에 있는 사람들까지 듣게 하려면 아주 목소리를 꽤 크게 하셨을 것이다. 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조용히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크게 외치셨다(8).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오늘 비유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이 뿌려질 때 반응과 결과를 따라 네 부류의 사람이 나누어진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일까?
▷ 길 가
- 씨를 길 가에 뿌리면 공중의 새가 먹어버린다. 즉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 간다. 말씀을 들어도 믿음으로 받질 않아서 삶에 적용되질 않는 사람이다. 큐티나 설교를 통해서 은혜받은 것 같은데, 끝나기가 무섭게 핸드폰에서 각종 뉴스와 관심기사에 몰두한다. 잠시 후에는 자신이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새가 먹어버린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설교를 하거나 멋진 글을 쓸 수는 있을지언정, 정작 자신은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는 길 가에 속한 사람이다. 이런 자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과 '실천 의지'다.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하며, 믿음을 가지고 적용하려고 애써야 한다. 실천 의지를 갖지 못하면 진정한 믿음이 없는 것이므로 구원받지 못한다(12).
▷ 바위
- 씨가 바위 위에 떨어지면 얇은 흙 위에서 싹을 내기도 하지만, 뿌리를 깊이 박질 못해서 결국 말라 죽는다. 이들은 말씀을 쉽게 잘 받으며 매우 기뻐한다.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어서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의 열정 기간은 지극히 짧다. 번개 칠 때는 온 세상을 밝게 하는 듯하지만, 금방 사그라든다.
이들에게 종교란 취미활동 수준이다. 그 이상의 부담을 주면 즉시 반발하고 떠난다. 소위 '배도'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 유형이다(13). 그러나 평소에는 좋은 땅에 속한 신자들과 구별이 안 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다. 끝까지 견디는 믿음이 필요하다. 인내로 견디면 결국 좋은 땅이 될 것이다.
▷ 가시떨기
-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지면 싹이 나고 자라긴 하지만 가시떨기 때문에 제대로 결실하지 못한다. 이것은 많은 신자가 속한 유형이다. 이생의 염려 곧 건강염려, 사업 염려, 자식 염려 등이다. 이들의 염려는 매우 타당해 보이는 듯하지만, 사실은 믿는 자에게 마땅하지 않다.
사람들은 염려를 크게 나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염려'는 '방탕함'이나 '술 취함'과 동급의 타락임을 아는가? 염려는 마음이 둔하여지는 마약과 같다. 다음 말씀을 보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만일 어떤 형제라고 일컫는 자가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면 충격받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다고 하는 형제가 지나친 염려가 습관화 되어 있다면 그는 이미 믿음이 타락한 자다. 어려운 상황에서조차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며 성도의 언어생활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가시떨기가 재물과 향락을 의미한다고 하신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자나(딤전 6:9), 세상 향략에 집착하는 자(딤전 5:6)들은 모두 이 유형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신자들이 모두 이 유형이다.
많은 신자가 중독에 빠져있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만이 중독이 아니다. 핸드폰 중독, 유튜브 중독... 심지어 운동 중독, 일 중독도 있다. 종일 핸드폰으로 성경을 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핸드폰 중독이라고 하면 안 된다. 핸드폰으로 끊임없이 드라마를 본다면 드라마 중독이다. 그러나 핸드폰이 없으면 불안하고,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꺼내서 여기저기 쓰레기 같은 내용이나 뒤져보며 쉬지 않고 만지작거린다면 핸드폰 중독이다.
우리가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절제가 필요하다. 음식만 끊는 금식이 아니라, 각종 미디어를 끊는 금식이 필요하다. 음식을 끊는 금식과 인터넷과 같은 각종 미디어를 끊는 금식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영적으로 유익할까? 음식은 끊었지만, 각종 오락을 계속하는 금식은 영적으로는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사 58:3).
차라리 음식은 꼬박꼬박 먹어도 각종 인터넷과 오락을 끊는 금식을 해보라. 그게 더 유익할 것이다. 가시떨기 땅에서 탈출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절제'다. 만일 절제하지 않으면 결국 끝까지 열매 없는 삶을 살다가 죽을 것이다.
오, 주님, 이러한 중독에서 건져주십시오.
◆ 좋은 땅에 속한 신자
길 가, 바위, 가시떨기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 아니다. 우리의 선택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어디에 속하느냐가 결정된다는 의미다.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고 해석해주지 않으셨다. 무리 중에는 주님을 판단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바리새인이나 트집 잡으려고 애쓰는 관원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예 들으려는 마음이 없는 자들에게 해석해줄 필요가 없었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다. 그들은 발로 밟고 오히려 공격의 빌미로 삼기 때문이다(마 7:6)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비유를 해석해주셨다. 해석해주심은 모름지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좋은 땅이 되려고 애써야 함을 교훈하심이다. 자신을 돌이켜보았을 때, 예배가 더는 기쁨이 아니라면, 성경 말씀이 더는 흥미를 끄는 대상이 아니라면, 당신 마음속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가시떨기가 덮인 땅에 속한 사람이다. 메마른 삶, 평안을 잃은 삶이 그것을 증거한다.
과연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좋은 땅이 되어보려고 시도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좋은 땅이 될 수 있을까? 주님께서는 좋은 땅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씀하셨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하는 자'(15)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이 어떤 것일까? 말씀을 지식이나 연구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달게 듣고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진 마음이다. 음식 평론가처럼 음식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먹듯이 그렇게 말씀을 대하는 마음이다. 말씀을 전할 때 보면 이런 자들은 얼굴이 빛난다. 흑백의 사람 중에 컬러로 앉아있는 사람이다.
또한 '지키어 인내'하는 자다. 지킨다(keep)는 말씀은 헬라어 '카테코'라고 하는데, 이것은 기억을 간직한다. 소유하다, 억누르다라는 의미가 있다. 좋은 땅이 되려면 말씀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마귀가 와서 다른 데 눈을 돌리게 하려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인내란, 말씀을 지키는 과정에서 여러 방해와 어려움이 있어도 꿋꿋하게 실천하는 모습이다. 이럴 때 그 사람은 좋은 땅이 되며, 그 속에서 말씀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백 배의 열매 맺으려고 애쓰기 보다는 좋은 땅이 되려고 애써야 한다. 열매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좋은 땅으로 만드시고 부르셨다. 그런데 우리는 생활의 염려와 마귀의 시험으로 가시떨기 땅, 바위 등과 같은 불모지로 만드는 잘못을 저질렀다. 회개하고 돌아가자. 묵은 땅을 기경하고, 좋은 땅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각종 열매가 풍성한 인생이 되자.
주님, 가시떨기처럼 세상 염려와 각종 향락이 제 생활에 많이 침투했습니다. 제가 좋은 땅으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각종 유혹과 중독에서 보호해주십시오. 절제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우유부단함과 믿음 없음에서 건져주십시오.
42.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둔다 (눅 8:16-21)
◆ 등불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당시의 등잔은 크기가 다양했다. 신랑을 기다리는 들러리 처녀들이 들은 등잔은 손 위에 올려놓을 만한 작은 것이지만, 집 안에 두는 등잔은 작은 찻 주전자만 했다. 그런데 이 등잔을 큰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평상(침상) 아래 두는 사람은 없다. 등잔은 등잔을 놓는 등경 위에 두어야 제 역할을 발휘한다.
오늘 비유에서 등불을 등경 위에 두는 주체가 누구일까?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등불이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마 5:14)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등경 위에 두신다.
이 말씀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 직후에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좋은 땅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사용하셔서 100배의 열매를 얻도록 이끄심을 시사하시는 말씀이다. 우리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인내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마치 등잔을 등경 위에 두심과 같이 그를 필요한 곳에서 두셔서 필요한 사역을 하도록 이끄신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 년간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등불을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평상 아래 놓지 않으심을 수없이 확인했다. 따라서 주님을 위해 당장 식사 준비에 분주한 마르다만이 본받아야 할 일꾼이 아니라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열심히 듣는 마리아도 본받아야 할 귀한 일꾼이며, 오히려 마르다보다 더 칭찬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때가 되면 등경 위에 두실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서 착실하게 준비하라.
17절에서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다고 하심은 어떤 은밀한 죄나 숨겨진 비리가 드러날 것을 말씀하심이 아니라, 진리의 빛을 말씀하심이다. 지금 제자들에게 은밀하게 말씀하신 이 진리와 교훈이 결국은 온 세상에 공개되고 전파되어야 함을 말씀하심이다.
◆ 삼가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세상에 내가 만든 철학, 내 교훈을 전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예수님을 전하는 자다. 어쭙잖은 자기 견해와 철학을 떠들어대는 사역자는 그나마 남은 것까지 다 빼앗기고 초라하고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사모하며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자는 더욱더 진리의 빛이 더해지고 그 빛을 온 세상에 비추도록 인도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말고, 전심으로 집중하자. 잊지 않으려고 해야 하며, 제대로 새겨야 한다. 우리가 대충 듣고 대강 행하면 그나마 있던 것까지 모조리 잃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진지하고 간절함으로 받자. 주님의 말씀을 허투루 듣거나 대충 이해하는 버릇을 버리고, 순종하려는 자세로, 겸손한 태도로, 진실한 마음으로 듣자.
◆ 예수 가족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동생들은 제법 많았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리고 여동생도 여럿이었다(마 13:55, 56).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의 호적상 아버지 요셉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요셉은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 예수님은 이들의 방문을 반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냉담하게 대하시면서 진정한 형제와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가족들에게는 섭섭하게 들렸을지 모르나, 제자들에게는 참으로 황송하고 감격스러운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어떤 목사에게 '형제님'이라고 하자 무척 불쾌해하고 자기를 무시한 것으로 간주했다. 언제부터 목사가 교회에서 최고의 호칭이 되었는지 모르나 우리가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을 나와 동급으로 끌어내리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름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형제, 자매라는 의미에서 부르는 호칭이다. 따라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붙이면 안 된다. 우리가 형제님이라고 함은 함부로 대한 것이 아니라 극존칭임을 기억하자. 어떤 사람은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높여주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친분에서 부르는 것뿐이지, 극존칭은 아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은 후에 모두 열렬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우리가 읽는 야고보서와 유다서가 예수님의 아우들이 쓴 서신서다. 그들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약 1:1, 유 1:1)이라고 표현했다. 진정한 예수님의 형제가 된 것이다.
주님, 말씀을 잘 새기고,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 등경 위에 두실 때, 온 집안사람들을 비추는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해주십시오.
43. 파도를 잔잔케 하심 (눅 8:22-25)
◆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23) 행선 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갈릴리 바다는 파도조차 없는 매우 조용한 호수다. 그러나 광풍이 불면 상황이 달라진다. 오늘 본문에서 광풍은 갑자기 들이닥쳤다. 이것이 지역 전체에 영향을 끼친 태풍인지 아니면 비교적 작은 영역에서 갑자기 발생한 돌풍인지는 모르지만, 이 바람은 배를 위태롭게 했다. 갈릴리에서 수십 년간 어부 노릇을 해서 누구보다 배에 능숙했을 제자들이 목숨에 위기를 느꼈다는 것은 엄청난 광풍이었음이 분명하다.
마침내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다. 이 대목이 무척 놀랍다. 이토록 흔들리고 위험한 상황에서조차 깨지 않고 주무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주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에서 우리는 이유를 찾는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25)
주님께서 흔들리는 배에서도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절대로 폭풍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일 수도 있고, 어떤 공격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일 수도 있다. 이 믿음이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나의 모든 문제는 돌풍에 있지 않고 바로 '믿음 없음'에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환경을 보며 절망할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을 돌아보자. 나는 과연 이런 상황에서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잘 믿는 듯하다가 어려운 일만 닥치면 믿는 자란 사실을 까맣게 잊고 그저 인간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자가 아닐까?
◆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게서 극단적인 두 면을 본다. 그토록 흔들리는 배에서도 피곤함에 쩔어서 정신없이 주무실 수밖에 없는, 오히려 제자들보다도 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반면에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자 바로 그쳐서 잔잔하게 만드시는 모습에서는 자연조차도 순종케 하시는 전능자의 모습을 본다.
당신은 어디 대목에서 감동하는가?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대목인가, 아니면 슈퍼 파워를 드러내시는 대목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슈퍼파워 전능자의 모습에 열광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모습에 놀라고 놀랐다. 베드로가 쓴 서신서에는 예수께서 이러한 신성을 드러내신 대목에 열광했음을 시사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신가를 사람들에게 증거했다(벧후 1:16).
그런데 바울은 좀 달랐던 것 같다. 다른 제자들이 인간 예수를 만나서 전능자인 예수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면 바울은 다메섹에서 전능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인간 예수를 알게 된 자다. 그가 다메섹에서 처음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압도하는 권위, 거역할 수 없는 음성. 강렬한 빛 속에서 예수께서 정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바울에게는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능력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바울에게는 그런 능력보다는 오히려 흔들리는 배에서 피곤에 쩔어 주무시는 예수님이 정말로 놀랍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사신 것이 경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서신서에 이러한 감동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이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안다면,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그 능력에 열광하기보다 정말로 인간으로 오셔서 함께 해주신 주님의 겸손과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주님의 믿음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주님, 주님의 겸손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갈 2:20 KJV흠정역)으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44.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눅 8:26-39)
◆ 귀신 들린 자
(27)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귀신은 어떤 존재일까? 내가 어렸을 때 한 맺힌 귀신들이 돌아다니는 전설의 고향이라는 드라마가 무척 인기가 있었다. 과연 귀신들은 한 맺힌 인간의 영혼들일까? 그동안에 소위 귀신 들렸다고 하는 자들을 여럿 보았다. 어떤 귀신은 자기가 수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9살짜리 여자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귀신은 자살한 새어머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과연 이들은 사람의 영혼들일까? 이런 귀신들의 말을 근거로 회귀니, 전생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심지어 드라마에서조차 이런 회귀물이나 전생 이야기가 제법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믿을 걸 믿어라. 귀신들은 거짓말쟁이 그 자체다. 어찌 귀신들의 말을 믿고 그런 중요한 교리를 세우는가? 귀신은 인간의 영혼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는 귀신들이 자기들을 무저갱에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했다(31). 무저갱은 사람의 영혼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거기는 마귀와 그 종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다(계 20:3). 따라서 귀신이 이렇게 간구함은 스스로 사람의 영혼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귀신을 사람의 영혼 취급하신 적이 없다. 그들을 위로하거나 불쌍히 여기신 적이 없다. 성경은 귀신을 일관되게 '더러운 귀신'(마 10:1)이라고 말한다. 안타까운 귀신이나, 불쌍한 귀신은 없다.
◆ 귀신 들린 상태
(29)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귀신 들린 자는 어떤 상태일까? 오늘 본문에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옷을 입지 않고 무덤 사이에 거하며, 쇠사슬과 고랑을 끊을 정도로 기이한 힘을 가진 자다. 귀신에게 이렇게 완전히 눌려버리면 자기 인격이 말살되고 참혹한 상태가 된다. 이런 사람들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인격이 말살될 상태는 아니지만, 귀신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이들은 매일 어떤 악한 생각에 시달리거나 이유 없이 거리를 방황하거나 이유 없는 우울감, 근거 없는 염려, 또는 어떤 비상식적인 행동을 강요받는다. 심지어 깊은 병에 걸리기도 한다.
귀신은 수시로 성도들도 공격한다. 성도들은 귀신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공포를 가지거나 두려워하면 안 된다. 귀신의 위치는 딱 '똥파리' 정도다. 더러운 존재이지 무서운 존재는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귀신이 넣어주는 생각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가는 큰 고생을 한다. 똥파리가 음식에 앉는 것을 방치하면 안 되듯이 귀신들이 우리 마음에 넣어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
신앙이 좋은 내 친구가 갑자기 '이순신 장군이 예수 안 믿었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후로 그는 기도도 되지 않았고, 찬송도 되지 않았다. 사실 이순신 장군이 지옥에 갔는지 안 갔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 소관인 것까지 우리가 참견할 일이 아니건만, 이 친구는 내 말을 한편으로는 수긍하면서도 이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런 것이 일종의 귀신에게 눌린 상태다.
수년이 지난 후에 이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서 나는 물었다. 그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니? 그러자 그 친구는 말하길 어떤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날 그것이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귀신에게서 해방된 것이다.
음란한 생각에 집착하고 있다거나, 하나님을 향한 트집, 지나친 자책, 자살 충동... 귀신이 넣어주는 생각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굳게 믿고 믿음의 방패로 그들의 화살을 잘 막아낸다면 눌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지금 눌려있는가? 그렇다면 이제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고, 말씀을 암송하며, 착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자. 똥을 치우면 냄새는 자연히 없어진다.
◆ 돼지 떼의 몰살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에 돼지 떼들은 호수로 뛰어들어 몰살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재산상의 피해를 줬다고 트집 잡는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며 탈무드에서도 돼지 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쓰여있다거나 또는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죽인 것은 아니니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단 한 사람의 영혼을 돼지 이천 마리보다 더 귀하게 보셨음에 감사한다. 사람 목숨보다 돈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세대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일깨우셨다. 형제여, 돼지 떼 죽은 것만 트집 잡지 말고, 이 비참한 사람이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음을 주목하라. 예수님은 이 사람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에게 평생 살아야 할 이유를 주신다.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오, 우리 주님께서 한 사람의 영혼을 이토록 귀하게 보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라사인들은 사람의 구원보다 돼지 떼가 더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오신 은혜의 구주를 오히려 배척하고 떠나기를 구했다. 영원히 후회할 선택이다. 과연 돈과 사람의 목숨 둘 중에 선택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주님, 제가 절대로 사람의 영혼보다 물질을 더 귀중하게 여기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나의 가치관이 주님을 닮게 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45.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선고자적인 믿음 (눅 8:40-48)
◆ 한 영혼의 귀중함
(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예수께서 돌아오셨다. 그런데 이 한마디가 깊은 감동을 준다. 돌아오셨다 함은 배를 타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셨다는 뜻이다(막 5:21). 그 거친 파도를 뚫고 힘들게 건너가셔서 하신 일이라곤 딱 하나, 군대 귀신 지핀 사람 한 명을 고치고 돌아오신 것이다. 그것도 신분이 높은 사람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닌, 심지어 사라지는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 모든 사람이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한 귀신 들린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수 km 나 되는 험한 바다를 건너셨다.
겨우 한 명이라니! 거친 파도 속에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너온 제자들로서는 허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기꺼이 그렇게 하셨다. 한 명을 향한 주님의 집념이 얼마나 고마운가? 설마 나를 위해서도 그런 수고를 하실까? 물론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 나 혼자 살았어도 주님께서는 나를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을 것이다. 이것이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한 선한 목자의 집념이다. 우리들은 이 한 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예수님의 제자 자격이 있다. 교회에서 어린이 한 명만 맡았어도 소중히 여기며 충성하는 제자가 진짜다.
◆ 혈루증 여인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어떤 분은 혈루증을 혈우병으로 오해하는데, 혈우병은 남자에게만 생기는 선천적 질환이지만 오늘 본문의 여자는 발병한 지 12년이 되었다고 하니까, 후천적 질환이다. 혈루증이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모르나 원어에는 피가 유출되는 병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생리가 멈추지 않는 것과 같은 병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무엇이든 분명히 극심한 빈혈을 유발했을 것이다. 이러한 병을 12년이나 않았음에도 생존한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율법에서는 이 여자와 같이 유출병이 있는 자는 부정한 자로 여겨서 이런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만 앉아도 부정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사람과 접촉한 자는 부정해지니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을 명한다(레 15:2-7).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 여자가 어떻게 드러내놓고 다닐 수 있겠는가? 아마도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극도로 제한된 생활을 했을 것이다. 이 여자는 이 병을 고치려고 수많은 의사를 찾았지만 엉터리 치료법으로 수없이 고통을 당하였고, 자기 재산도 다 허비했다(막 5:26). 그런데 낫기는커녕 오히려 더욱더 심해졌다. 이제는 절망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 무슨 병이든 낫게 한다더라. 마지막 소망이다. 여자는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께 접근했다. 소리라도 질러서 하소연할 용기는 없었다. 부끄러웠고, 부정한 자라고 질타하는 사람들의 눈총도 무서웠다. 그러나 반드시 고침을 받아야 했다. 이 갈등 속에서 그녀는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기발한 생각을 했다. 그 옷 가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을 것이다(막 5:28). 말이 되는가? 옷 가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정말 나았다. 세상에! 피가 멈추고 몸에 생기가 돌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울고 싶은 정도의 감동이다.
갑자기 예수님께서 돌이키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다. 사람들이 많아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시다니! 베드로가 한마디 했다. ‘주님,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45) 너무 당연한 것을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구시냐고 한 마디한 셈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 추궁하셨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마침내 여자가 떨면서 나아와 엎드렸다. 부정한 자가 옷을 만졌으니 야단맞아도 싸다. 그래도 병이 나은 마당에 그까짓 욕 몇 마디 듣는 것이 대수겠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주님께서 그 여자를 찾으심은 이 말씀을 해주시기 위함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안심해라. 괜찮다. 이 여자가 나은 소문이 퍼지자, 이전에는 예수님의 손이라고 잡아야 나을 수 있다고 믿었던 자(막 3:10)들이 이 여인 사건 이후로는 예수님의 옷 가라도 잡으려고 애썼다(막 6:56). 이 여자는 믿음의 선구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과장해도 과장할 수가 없다. 우리가 과장한 것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 믿음이 작을 뿐이다. 믿음의 선구자들은 더 큰 믿음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전했는데, 혈루증 앓은 이 여인도 바로 그러한 자 중의 하나였다.
주님, 주님께서 제게 주신 믿음을 제한하지 말고 굳게 잡고 더 큰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믿음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믿음으로 얻는 영적인 큰 복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46. 회당장의 딸을 살리심 (눅 8:49-56)
◆ 믿기만 하라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회당장의 이름은 야이로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속히 와서 손을 얹어서 낫게 해달라라고 정말 많이 간구했다(막 5:22-23). 딸의 나이는 12살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이동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동이 회당장이 보기에는 너무 느렸다. 딸의 목숨은 경각을 다투는데, 뛰지는 못하셔도 멈추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혈루증 여인 때문에 지체하셨다.
결국 집에서 사람이 뛰어왔다. 딸이 방금 죽었다고 한다. 알려온 사람이 말하길 '더는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마소서'라고 권한다. 예수님의 능력은 살아있을 때나 통하지 죽은 사람에게 통하겠는가?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다. 놀라운 약속이다. 죽음도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가?
사람들은 종종 '믿음' 자체에 초능력이 있다고 착각한다.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오해다. 믿음은 분명한 목적어가 필요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이 목적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없는 믿음은 자기 확신에 불과하고, 망상이 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설정해놓고, ‘믿습니다’를 반복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확실한 목적어를 가진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 오늘 본문의 야이로는 주님의 약속을 받았다. 이제 야이로의 할 일은 단단히 믿는 것이다.
우리도 얼마나 많은 약속을 받았던가? 영생, 구원, 성령을 이미 받았고, 기도의 약속, 인도의 약속을 받았다. 약속조차 기억 못하는 내가 과연 제대로 믿을 수 있을까? 수많은 약속이 있건만, 여전히 불평하고 있고, 여전히 염려에 휩싸여 있다. 우리가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말씀을 착한 마음으로 받고 확고하게 믿는 믿음이다.
◆ 아이가 잔다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아이가 죽었다. 정말 죽은 것이 맞다. 그런데 주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다. 사람들이 비웃었다. 과연 예수님이 틀린 것인가? 과연 주님께서는 아이가 죽었음을 정말로 모르시는가? 요한복음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표현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말뜻을 못 알아듣자 예수님은 밝히 말씀하시길 '나사로가 죽었다'(요 11;11-14)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죽은 것과 자는 것을 혼동하심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교훈하심이다.
죽음과 잠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영원히 깨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그러나 깰 수 있으면 잠이다. 많은 사람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소멸, 영원한 절망이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성도에게는 죽음이란 긴 잠을 자는 것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향해 '자는 자(those who fall asleep)'라고 했다(살전 4:13). 사도행전에서도 스데반이 죽었을 때, 잤다고 표현했다(행 7:60, 행 13:36).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부활 신앙을 드러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심은 그 아이가 부활할 것을 암시하심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달리다굼'(막 5:41). 마가는 이 말을 '내게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의역을 했다.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써 '달리다'는 어린 암양을 의미하는데, 당시 귀여운 어린 소녀에게 하는 애칭이라고 하며, '굼'은 일종의 명령어로서 일어나라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달리다굼'은 마치 부모가 잠자고 있는 자기 어린 자식을 보고 몹시 귀엽다는 표현으로 '우리 강아지야 일어나야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지만, 예수님은 귀여운 소녀를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달리다굼'하시는 것이 상상된다.
과연 그 아이는 살아났고, 잠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런 부활을 맛본 아이도 결국은 다시 죽을 것이다. 이런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부활을 암시하는 일종의 예표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때, 그 부활이 실체이며, 영원히 다시 죽지 않는 부활이 될 것이다(살전 4:17).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믿지 않는 자들처럼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잠들었다'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살전 4:1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아멘, 주 예수여, 제가 이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