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霜降)
개요
24절기 중 18번째 날로 한로(寒露)과 입동(立冬) 사이에 있는 절기. 24절기는 기본적으로 태양의 궤도인 황도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정해지므로 양력 날짜에 연동된다. 상강은 태양의 황경이 210°인 날로 대개 양력 10월 23일 무렵이다. 낮에는 쾌청하나 일교차가 심해 밤에는 온도가 급강하하여 서리가 내리고, 고장에 따라서는 이른 얼음이 얼거나 눈이 오는 경우도 있다. 산에는 단풍이 절정에 이른다.
유래
'상강'이라는 말은 '서리(霜)가 내리다(降)'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전통의학서인 <황제내경(黃帝內經)>(기원전 475~221),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舊唐書)>(945),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1281) 등 여러 문헌에서 상강 기간을 5일 단위로 3후로 구분하고, 초후(初候)에는 승냥이가 사냥을 하고, 중후(中候)에는 나무와 풀이 누렇게 물들고 낙엽이 지며, 말후(末候)에는 겨울잠을 자는 벌레들이 땅속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상강 기간에 대한 이런 묘사가 조선 초 이순지(李純之) 등이 펴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1444) 등 한국의 여러 문헌에도 인용되고 있는데, 중국 문헌의 절기는 주(周)나라 때 화북(華北, 지금의 화베이 지방으로 베이징과 텐진이 있는 지역) 지방의 기후를 기준으로 기술된 것이어서 한국의 기후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풍속
이 시절에는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 시절이어서 대개 가을 나들이를 한다. 한로와 상강 무렵에는 국화주를 마시며 보신 음식으로 추어탕을 즐겼고, 농가에서는 겨울맞이를 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중 '9월령(음력이므로 대체로 양력 10월 무렵에 해당)'에 한로 상강 절기에 대한 당시 농촌 풍습이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상강에 국가의례인 둑제(纛祭)를 지냈다.
둑제는 대가(大駕) 앞이나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기(大將旗)에 지내는 군기제(軍旗祭)인데, 한양 문밖 지금의 뚝섬 자리에 사당이 있어서, 무신 당상관(武臣堂上官)이 헌관이 되어 제사를 지냈다. 둑제에는 악생 23명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며, 간척무(干戚舞, 방패와 도끼를 들고 추는 춤), 궁시무(弓矢舞, 활과 화살을 들고 추는 춤), 창검무(槍劍舞, 창과 검을 들고 추는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날 부르는 노래인 <납씨가(納氏歌)>는 고려의 향악인 청산별곡(靑山別曲)에 맞추어 부르는 곡이며, <정동방곡(靖東方曲)>은 고려의 향악인 서경별곡에 맞추어 부르는 곡으로 태조의 무공(武功)을 찬양하여 정도전이 가사를 지은 노래이다.
<상강 시모음>
상강(霜降) /박경희
낼모레면 칠십 넘어 벼랑길인디
무슨 운전면허여 읍내 가는디 허가증이 필요헌가
당최 하지 말어 저승 코앞에 두고 빨리 가고 싶은감?
어째 할멈은 다른 할매들 안 하는 짓을 하고 그랴
워디 읍내에 서방 둔 것도 아니고 왜 말년에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여
오 개월 걸려 딴 운전면허증에
한 해 농사 품삯으로 산 중고차 끌고 읍내 나갔던 할매
후진하다 또랑에 빠진 차 붙들고
오매, 오매 소리에 초상 치르는 줄 알고 달려왔던 할배
그리 말 안 듣더니 일낼 줄 알았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풀린 다리 주저앉히고 다행이여, 다행이여
혼잣말에 까딱까딱 해 꺼진다
상강 /최영숙
장독대 옆에 살던 뱀은 산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무는 허술해져 경계처럼 빗금을 긋는다
저렇게 주먹 불끈 쥐고 가는 길
너를 향해 가는 고추 벌레 구멍 같은 길
툭 부러지고 싶다 이제 그만 자리 잡고
눕고 싶은 생각
생각은 자면서도 깨어 있을까
꿈틀 나의 손을 치우는 돌서덜
그 돌서덜 위에서
숲은 작은 몸을 하고 툰드라의 바람으로 운다.
상강이 지났어도 /南島 최동락
상강은 서리 내리는 날
울긋불긋 초목들
겨울채비
서둘러야 하는데
요즘 날씨에
초목들도 헷갈린다
초록으로 버티는가 하면
다른 군상들은
주황색으로 갈아입고
겨울 채비에 바쁘다
나도 헷갈린다
두툼한 옷을
입었다 벗었다
텃밭에 겨울나기
시금치 상추 춘채가
너무 무성하다
상강(霜降) 즈음 /곽진구
나무도 할 말이 있을 때가 있다
평생 입 꼭 다물고 답답히 살 수 있으랴!
그래서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하는 말
나는 내 열매와 잎을 버릴 테니
너는 무엇을 버릴 테냐?
나무여,
산에 올라 너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텅 빈 가을 하늘처럼
너의 몸이 가벼워
쓸쓸히는 한없이 좋구나
그러나 가난하고 실업한 나는
버릴 게 없어 너에게 미안하고
가진 게 없어 그것도 미안하구나
오늘도 미안,
어쩌면 내일도 미안하구나
상강(霜降) 무렵 /양 곡
그냥 조용히 살아가라는 듯
나더러
그냥 말없이 살다가 해 지면 어둠이 되고
바람 불면 바람에 묻히라는 듯
그대는 어느 강언덕 양지쪽으로 달아나
지금쯤 향기로운 꽃을 심고 있는지
아니면 다시 또 여름날 무지개로나 피어나길 꿈 꾸고 있는지
아니다 아니다
속절없이 세상을 떨구는 저 오동잎 몇 장
여기 여기 하염없이 나뒹구는 낙과(落果) 몇 알로
가슴 미어지는 가을 내내 지리산 덕천강 어느 한 어귀에 서서
나더러 목을 놓아 한바탕 울어보라고
그대는 또
한 해의 겨울을 이 땅에 툭툭 던지고 있는가
상강 /정끝별
사립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그늘에 잠시 기대앉았을 뿐인데,
너의
숫된 졸참 마음 안에서 일어난 불이
제 몸을 굴뚝 삼아
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타고 있다
저 떡갈에게로
저 때죽에게로
저 당단풍에게로
불타고 있다
저 내장의 등성이 너머로
저 한라의 바다 너머로
이 화엄으로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霜降상강 /최진연
억세 꽃 벙거지를 쓴
산 하나가
떠내려가고 있다.
우리의 한강이 가보지 못한 바다 밑에서
도미들은 銀은싸락을 주워 먹고
배가 더 하얗게 되어 가고.
산을 낚아 올리는
큰 손이
天上천상에 하나 걸려 있다.
상강 /김명인
갈 데 없어 한나절을 베고 누웠는데
낮잠인가 싶어 설핏 깨어나니
어느새 화안한 석양이다
문턱을 딛고 방 안으로 스미는 가을 햇살들
먼 길 가다 잠시 쉬러 들어온
이 애잔, 그대의 행장이려니
움켜쥐려 하자, 손등에 반짝이는 물기
빛살 속으로 손을 디밀어도 온기가 없다
나는 삯진 여름 지나온 것일까
놓친 것이 많았다니 그대도 지금은
해 길이만큼 줄였겠구나
어디서 풀벌레 운다, 귀먹고
눈도 먹먹한데 찢어지게 가난한
저 울음 상자는 왜 텅빈
바람 소리까지 담아두려는 것일까
상강(霜降) /권경업
어둠 속 내[川]를 이루던 제 울음 따라
뭇벌레들 떠나간
어제가 상강(霜降)이었습니다
첫눈은 곧 내릴 텐데
가 버린 이들 다시 오지 않아
야윈 어깨 옷깃 여미며 가을이
치밭목을 내려갑니다
마른 꽃잎 하나 흔드는 이 없는
이토록 쓸쓸한 배웅을
올해도 나 혼자만이 해야 합니까
상강 /백우선
들국화를
바라본다
햇살과 바람의
밝고 서늘한 몸짓,
그 얼굴을 본다
그도 나를
마주본다
내 몸을 어루만지는
향기로운 눈길,
눈빛 속에 나부껴 보는
한 꽃송이――
들녘은
맑게 빛나는
꽃밭이다
상강(霜降) 무렵 /김남극
고개를 오를 때는 옴죽거리는 안개가 길가에 늘어서서
복수아뼈께가 간질거렸다
고갯마루에 오르니 길이 확 열렸다
마구 치댄 걸레 같은 낙엽들이 배수로로 쫓겨나 오종종 모여
새벽에 내린 서리를 걷어내려
등짝을 햇살 쪽으로 굽혀 둘둘 말고 엎드렸다
고갯마루를 내려오니
배추와 알타리무가 백발이 창창한 노인들처럼 일렬로 줄을 맞춰 서서
산마루까지 온 겨울빛을 걷어내려 낑낑대며
박자 맞추어 가을을 오래도록 끌고 가고 있다
밭고랑에 남은 끌려간 가을 흔적이 서리에 덮여
그 굴곡만 남았다
길가 구절초 쑥부쟁이는 씩씩하게 여전히
종일 몇 안되는 행인의 체온이라도 붙잡아 배를 덮었는지
뽀송뽀송한 꽃잎들이 탱탱하다
꽃 쑥쑥 구불구불 핀 길로 할머니 동네 잔치 보러 가는지
이마가 허리보다 낮아 삼배하는 보살처럼 길을 나섰다
오래된 옥양목 빛 소매가 잠깐 반짝한다
해가 중천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