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내리는 절 마당의 맨얼굴을 본다. 정원 공사를 끝낸 마당에는 어린 라일락이 가지 끝에 사력을 다해 보랏빛 희망을 부풀린다. 드문드문 심긴 꽃나무들은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채 쭈뼛거리며 몸살을 한다. 물기 머금은 잎사귀마다 불안으로 뒤척이는 모양새가 이제 막 새 학기를 시작한 새내기를 닮았다.
적막한 공기를 깨고 한 무리의 등산객이 절 마당으로 들어선다. 빨강 파랑 분홍, 사람도 꽃이 될 수 있고 풍경이 되기도 한다. 더욱 화려해지고 기능이 다양해진 등산복은 대한민국 국민의 무너지는 심정과 달리 원색적이다. 내리는 비를 피해서인가, 그중 몇 명은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있다. 그들을 보자, 요즘 시선을 끌던 광고가 갑자기 생각난다.
얇고 가벼운 소재로 등산 가방 안에 넣어 다니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바람에 꺼내어 입으면 물기가 스며들지 않고 굴러내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천 조각이 방수와 방풍, 방습의 역할을 해낼 뿐 아니라 색상도 화사했다. 광고를 보다가 바람막이는 등산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그 해, 국민 모두는 비통에 잠겨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수학여행을 가던 어린 학생들의 희생이 상대적으로 컸기에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온 국민이 밤을 지새우며 고통을 나누었으니 부모의 마음이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차가운 바닷속으로 점점 가라앉는 배를 지켜봐야 하는 심정은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선장과 선원들은 왜 퇴선 명령을 하지 않고 자신들만 빠져나왔을까. 그 긴박한 순간에 학생들이 폰으로 찍어 보낸 영상에는 안내방송이 시키는 대로 선내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둥둥 떠서 기다리는 장면이 세월이 지나도 현재형이다.
초기 해경도 해양수산부도 안전행정부도 안전관리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을 여실히 보여주며 오락가락 행정을 일삼았다. 삼백여 명이 사망 실종된 세월호 사건은 국격의 손상은 물론 국민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와 씻지 못할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 특히 어른의 말을 듣고 최후의 순간까지 구조될 것이라는 믿음 앞에서는 모든 어른들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 바람막이가 되어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어른들이 가장 먼저 탈출하며 아이들이나 승객의 안전은 나 몰라라 했으니.....
절 마당을 둘러본다. 맞배지붕을 한, 절집 한 채가 고요 속에 잠겼다. 낮은 하늘 아래 암키와와 수키와의 짜 맞춤새가 지붕의 골과 둔덕을 조화롭게 이루어낸다. 지붕 아래 사람과 사람이 마주한 듯 옆모습은 속삭이듯 다정하다. 사람 人 아래 다소곳이 숙인 이마, 그 아래 속눈썹 올올이 세워 선 낡은 목판을 마주한다. 비바람에 본채가 상하지 않게 보호해 주느라 바람의 채찍이 갈겨진다. 곱던 살들이 쩍쩍 터져 있고 빗물 자국이 어지럽다. 절간 한 채 지키느라 무거운 지붕을 이고 온몸으로 세월의 풍파를 견디어낸다. 나란히 마주한 맞배지붕 옆얼굴에 붙여진 빛바랜 바람막이 조각들이 오늘따라 대쪽처럼 올곧다.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그는 누군가가 맞을 비바람을 대신 맞아준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쓰고 남은 자투리 나무 조각으로 덧대었지만 알록달록한 단청을 칠해 달라거나 눈부신 금박을 입혀 달라 하지 않는 절의 옆모습 같은 사람들이다. 티벳의 승려처럼 진한 갈색의 소박한 옷을 입고 숨은 듯 비켜서서 제 몫을 하며 조용히 늙어갈 뿐이다.
바닷가 마을에는 누군가의 수고로 심긴 방풍림이 있다. 몇백 년 전 사람들은 당장 혜택을 보려고 나무를 심었을까. 묘목을 한 그루 두 그루 틈틈이 심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십 년, 수백 년 뒤 후손들이 평안히 살 수 있게 하려면 목전의 희생은 감수한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미래세대를 위해 노동을 품앗이하고 푼돈이라도 모아 내일을 준비한 사람들, 그 마음이 곧 방풍림의 마음이지 않을까.
어촌마을은 반달처럼 굽어진 방풍림의 품 안에서 평안하다. 비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해송이나 후박나무, 팽나무나 동백나무는 반듯하게 자라지 못하고 뒤틀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굽은 해송과 나무들을 우러르며 아름답다, 말한다. 고난을 이겨낸 나무의 수고를, 동네 사람들의 정성이 깃든 숲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리라.
방풍림처럼 든든한 보호자들이 많은 세상을 소망한다. 참사의 원인과 책임을 분명히 하여 다시는 이런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힘쓰는 것 역시 어른의 역할이다. 사건 해결에 아무리 솔선수범하는 사람이 많다 하여도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만은 못하다. 바람막이 벽이 되어준다는 것은 그저 더 큰 사랑을 주는 것이다. 참사의 고통 속에 몸과 마음이 지친 실종자 가족의 손을 잡고 무언으로 다독여주는 것이다. 깊은 슬픔을 치유하는 한 가지 길은 더 큰 사랑뿐이라고 하지 않던가. 책임을 분명히 하고 더 큰 사랑으로 아픔을 품어 안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앞장서서 바람을 막으며 길을 열어주면 청소년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따라온다.
세월 앞에서도 여전히 푸른 아픔으로 놓여 있는 녹슨 세월호 앞에서 새삼 부끄러워지는 봄날 오후다.
첫댓글 구구 절절 옳으신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