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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운낭의 죽음
구양봉이 독사장을 질풍같이 휘둘러대는 바람에 소씨 거렁뱅이는 몹시 당황했다.
'이런 고수는 정말 처음 대하는데. 대협 왕중양, 대리의 단황나으리, 그 도화도에 있는 황노사(黃老祀)를 제외하고는 천하의 고수는 없는 줄 알았더니, 이런 구양봉이 나타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한편 구양봉이 다루는 독사장법수는 갈수록 절묘한 신기를 표출해냈다. 독사장 자루에 매달린 작은 뱀들이 바로 눈앞에서 슉슉 혀를 내물며 지나다녔다. 자칫하다가는 그 요상스런 뱀들에게 물린 판이었다.
그 뱀을 본 소씨 거렁뱅이는 괴상하기 그지 없어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 작은 뱀은 여느 큰뱀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대가리가 유독 가늘고 긴데 비하여 눈언저리가 타들어간듯 시커멓게 칠해져있어 눈이 몹시 표독스럽게 보였다. 몸에 돋아난 비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독사들의 것보다 비늘이 컸고 황록색을 띠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도 늘상 뱀을 가지고 놀던 사람이었지만 이런 독사는 사실
처음 대하기에 속으로는 은근히 겁을 집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위기에 봉착한 소씨 거렁뱅이는 개방의 녹옥죽봉을 얼른 꺼내어 그 끝을 구양봉을 향해 겨누었다. 악전고투가 예상되기는 했지만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되도록 구양봉의 독사장 끝에 감겨 있는 뱀이 자기 몸에 닿지 못하도록 애를 썼다. 일단 그 뱀의 날카로운 이빨에 스치기라도 하는 날엔 끝장이었다. 구양봉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물론 목숨마저 간수하지 못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자리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물러설 수 없다는 질긴 승부욕이 빚어낸 끈이기도 했다. 그 만큼 두 사람의 무예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막상막하의 상태에서 잠시 머물고 있는 셈이었다.
구양봉은 서서히 독사장에 감겨 있는 독사를 이용해 우세를 점하려고 했다. 한편 소씨 거렁뱅이는 조심스럽게 녹옥죽봉을 휘두르며 그 두 마리의 작은 독사에게서 눈을 떼지를 않았다.
'저 두 마리의 독사를 때려죽인다고 해도 결코 무사할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게다.'
하며 생각의 끝자락을 순간 거둔 소씨 거렁뱅이가 약간 솟구치듯 몸을 날렸다. 녹옥죽봉을 잽싸게 휘둘러 바로 앞에 있던 독사의 몸둥이를 내리쳤던 것이다. 녹옥죽봉은 독사의 몸을 떠나 독사장과 차가운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아니 이럴수가!"
그러나 즉사한 줄 알았던 독사가 여전히 꿈틀대기 시작했다. 결국 녹옥죽봉과 녹사장이 순간 몇백근도 넘을 듯한 육중한 무게로 힘을 겨누게 되었다. 결국 독사는 죽지를 않았다. 더욱 끈질기게 두 가닥의 혀를 날름거리며 어느새 녹옥죽봉 끝으로 건너오려고 스멀스멀 몸뚱이를 내뻗었다. 당황한 소씨 거렁뱅이는 얼른 죽봉을 옆으로 거두면서 법수를 바꾸기로 작정했다.
두 사람은 벌써 몇십합이 넘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소씨 거렁뱅이는 차츰 법수가 딸리는 듯했다.
위기를 느낀 소씨 거렁뱅이는 기회를 모색하며 잠시 긴장을 늦추었다.
'이 구양봉이란 작자는 과연 어디에서 불쑥 나타났을까? 철장방 놈들이 서역으로부터 불러들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호, 이 놈과 맞붙은 게 결국 신수사나운 꼴이 되고 말았구나!'
소씨 거렁뱅이는 원래 절에서 뛰쳐나와 옥면검객 호심을 구하려고 했던 일이었는데 뜻하지 않은 서독 구양봉과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제 몸뚱어리조차 돌볼 수 없게 된 지금 어찌 호심을 구할 수 있겠는가? 호심이 두번 비명을 지른 뒤에 잠잠해있는 걸 보면 처지가 아주 급박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몸을 둘로 가르지 못하는 이상 옥면검객 호심을 구할 길은 없는 노릇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얼굴은 움직이지 않은 채 재빨리 눈을 돌려 한쪽을 살폈다. 옥면검객 호심은 이미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상태였다. 그 흉악한 몰골을 지닌 자가 검으로 그의 오른쪽 손을 쿡 찍어 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 자는 입꼬리를 옆으로 찢어 웃으며 사납게 내뱉었다.
"흐흐흐, 네 놈이 개방의 장로이든 개방의 장로가 아니든 죽더라도 이 점만은 똑똑히 알아두어라. 너희들 개방놈들은 모조리 죽어야 해! 내가 너희들을 모두 죽여 불쏘시개로 삼겠다!"
그리곤 갑자기 손바닥을 펴 호심의 가슴을 장을 향해 한방 먹였다. 만약에 그가 알아준다는 고수였다면 호심은 영락없이 숨통이 멎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의 공격은 별 것이 아니어서 호심은 약간 피를 토하였을 뿐 여전히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쪽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호심이 힘들여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주, 죽일 생각이면 제대로 손을 써야지."
하는 욕설을 듣자 그 자가 다시 허연 이빨을 내보일 듯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네 놈은 개방을 대단한 것으로 보느냐? 오늘은 이 집 일을 상관하고 내일은 저 집 일을 상관하면서 마치 천하의 대사는 몽땅 너희 개방에서 관계해야 하는 것처럼 여긴단 말이냐. 그러니 어찌 남의 부아를 돋구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흐흐흐, 네 놈의 개방은 이제 사면초가에 빠졌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오늘부터 네 놈의 개방에 속한 자들은 하나둘씩 씨를 말리게 될 것이다!"
팍! 그리곤 또다시 호심의 아랫배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웁!"
호심은 비명을 내지르며 온몸을 떨었다. 아픔을 어루만질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오른손이 검 끝에 눌려 있기 ㄸ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호심은 결국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지경으로 곤두박질치고 만 꼴이었다. 호심은 온몸으로 아픔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오른손이 검 끝에 눌려있는 데다가 등어리와 팔에는 독약이 묻는 바람에 더욱 곤혹스러웠다. 그 독은 서서히 헤어진 살 속으로 스며들어 훤히 보이는 뼈까지 강한 통증으로 갉아대는 듯했다.
"이 천하의 몹쓸 놈들아! 네 놈들은 영락없는 철장방의 악한들이로구나. 난 죽더라도 네 놈을 꼭 죽여버리고 말것이다!"
하고 호심이 다시 힘을 다해 고함을 내지르자 그 자의 안색이 돌변했다.
"죽어가면서도 붙어있는 주둥이라고 날 욕한다는 말이냐?"
그러면서 네 손가락을 곧추 편 손바닥으로 호심의 아랫배를 힘껏 찔렀다.
"우욱!"
그 일격은 무서운 것이었다. 원래 그 자의 다섯손가락에는 각각 강쇠로 된 가락지를 씌워져 있었기에 그 아픔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자는 그것으로 끝내지를 않았다. 그 자가 다시 호심의 아랫배 깊이 찔렀던 손가락을 안으로 오무려 밖으로 끌어당겼다.
"으아악!"
호심이 곧 고개를 꺾어 스스로 숨을 놓을 듯 비명을 질러댔다. 그 바람 검끝에 눌려있던 오른손 손가락이 피를 튀기며 잘려나갔다.
"으으...... 아악!"
다시금 호심이 고통을 무는 소리를 내지르며 잠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심이 갑자기 솟아오르듯 그 자에게 덮쳐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깊이 독이 퍼져 있는 몸이라 그 자 가까이 닿을 수가 없었다. 힘이 모자라 그 자 앞에 손가락 끝조차 내밀지를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다만 화기를 누르지 못해 용솟음칠 것같은 눈빛으로 그 자를 노려볼 뿐이었다. 호심의 아랫배로 피가 그침없이 뿜어져나왔다. 그리곤 곧 피물을 흥건히 뒤
집어쓴 창자가 흘러내렸다. 호심은 자신의 배를 내려보며 분노했다.
"내가 저 놈에게...... 한칼에 베어버렸어야 했는데, 윽!"
그러나 호심은 더이상 어떤 분노의 외침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호심은 그 자리에서 풀썩 고개를 꺾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그뿐이었다. 그것으로 호심은 영원히 숨이 끊어지고 만 것이었다.
놈들은 휘둥러그러진 눈으로 땅바닥에 널부러진 호심을 내려다보았다. 호심은 반면에 아직 노기가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그대로 부릅 뜬 채 죽어있었다. 모두들 호심의 무서운 최후를 목격하고는 공포심을 느끼는 듯했다. 몸을 떨며 그 자리에 굳어버리는 자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더 싸우고 싶은 마음도 나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호심이 죽자 비로소 소씨 거렁뱅이와 구양봉이 싸우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씨 거렁뱅이는 법수가 점점 떨어져가는 데다 다른 놈들까지 몰려오니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옥면검객 호심이 죽지 않았다면 이 놈들이 이렇게 몰려올 수 없었을 거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소씨 거렁뱅이는 불현 투지를 잃어버린 채 도망갈 틈만 엿보았다.
그가 방금 구양봉과 맞붙었을 때만 하더라도 도망을 하려고 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젠 이십여명이나 되는 놈들에게 둘러싸였고 또 놈들이 저마다 독액이 가득 들어찬 죽통을 들고 있어 그도 쉬운 일이 아닌 듯싶었다.
그 순간 흉악한 작자가 나서 구양봉에게 소리쳤다.
"구양선생, 우리가 저 놈에게 독약을 뿌릴까요? 간단히 독약으로 죽여버리고 맙시다!"
그러자 구양봉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헛헛헛, 임자들의 도움은 필요없으니 저기 한켠으로 물러나 구경이나 하게!"
그러면서 구양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중원에서 명성이 대단치 않으므로 이 서독의 이름을 아는 자들이 많지 못할 것이다. 오늘 이 소씨 거렁뱅이를 거꾸러뜨려 너희들에게 이 구양봉의 진가를 보여주마.'
구양봉은 점점 정신이 깨어나고 법수와 동작 역시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절묘해지기 시작했다.
구양봉의 이 독사장법은 원래 그의 형인 구양적의 것이었다. 하지만 구양적의 독사장법은 부드러운 것으로서 그 법수와 동작은 신기롭고 변화가 많은 특징을 위주로 하였었다. 반면에 구양봉의 독사장법은 구양적의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맹렬하고 강력한 부분들을 가미해 발전시켰던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도 그놈의 무서운 두 마리의 독사만 아니라면 더 대담하게 싸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두 마리의 작은 뱀이 독사장 자루 끝에 징그럽게 감겨있으면서 수시로 혀를 빼문 대가리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독사장 자루가 녹옥죽봉과 맞부딪칠 때마다 그 뱀은 녹옥죽봉에 더 결사적으로 매달리려고 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 뱀이 녹옥죽봉에 옮겨오지 않도록 하면서 싸우려니까 자기의 법수와 정확한 동작을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흐를
수록 구양봉에게 수세로 몰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구경하고 있는 놈들은 모두 악랄하고 한편 비겁한 무리들이기도 했다. 그 자들이 떠벌인 대로 그 죽통 속의 독액을 내어 뿜기만 하면 소씨 거렁뱅이는 처참하게 죽어나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양봉이란 이 사람이 자존심이 대단한 데다 지금 소씨 거렁뱅이와 팽팽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맞붙어 있는 중이어서 그자들이 참견하는 걸 허락할 리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잠시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긴장을 거두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외쳤다.
"구양봉, 임자도 호인물로 부를 만하이. 임자의 이만한 실력이면 천하의 5대고수들과 어깨를 견줄만 하단 말이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임자의 이 부하들은 모두 무예도 보잘 것 없거니와 독액으로 사람을 해치는 너절한 수단을 쓰고 있으니 어찌 모두들 임자를 비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구양봉이 변명 아닌 변명같은 말을 흘렸다.
"너절한 수단을 쓰겠으면 쓰라지. 저 사람들은 나의 백타산장 사람들이 아니니까 내 관여할 바가 아니오. 저 놈들은 철장방 방주 구천이란 자의 부하들이란 말이요."
구양봉이 그렇게 말하자 주위에 퍼져있던 그들은 일제히 눈길을 모았다. 구양봉 쪽으로 얼굴을 돌린 그들 중 몰골이 흉악하게 생긴 자가 나서며 말했다.
"구양선생, 구양선생께서 수고하실 거 없이 우리가 저 자와 싸우게 해주십시오."
구양봉은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처음부터 소씨 거렁뱅이와 싸우고 싶었으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무예가 대단하여 그와는 우열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만일 이때 독액을 분사하는 죽통을 쓴다면 저 놈은 끝내 도망칠 수가 없지 않은가? 이런 호기를 왜 마다하겠는가? 소씨 거렁뱅이를 죽이는 것은 철장방과 개방 사이의 원한에 관계되는 일인데 내가 고생스럽게 끼어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구양봉은 아주 간사하게 이 일에서 발뺌을 하고자 결심했다. 구양봉이 입을 떼었다.
"좋아, 소씨 거렁뱅이! 나 이 노독물은 임자의 실격을 인정하지. 당신들 개방과 철장방 사이에 무슨 곡절이 있다는 것을 난 몰랐거든. 그러니 임자들끼리 해결하라구."
말을 마친 구양봉이 슬그머니 한쪽으로 물러나며 철장방 무리 십수명이 소씨 거렁뱅이를 에워싸는 것을 구경했다.
십여개의 분사죽통이 일제히 소씨 거렁뱅이를 겨누기 시작했다. 또한 수십개나 되는 살기어린 눈빛들이 소씨 거렁뱅이의 몸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 놈들은 모두 소씨 거렁뱅이의 몸에다 독액을 뿜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선수를 치려는 자는 보이질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를 독액으로 거꾸러뜨리려 하면서도 그의 뛰어난 무공이 두려워 주춤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손을 쓰기만 하면 눈깜짝할 사이에 상대를 쓰러뜨릴 수가 있다는 사실을 모
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십여개나 되는 분사죽통을 앞세운 그 놈들은 소씨 거렁뱅이를 겨냥한 채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틈만 노리고 있었다.
그때 흉악한 몰골을 지닌 자가 마치 크르릉 하는 짐승소리를 내며 외쳤다.
"소씨 거렁뱅이! 네 놈이 죽을 때가 되었으니 어서 고스란히 목숨을 내놓으시지!"
그러자 소씨 거렁뱅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
"네놈들이 그까짓 분사죽통으로 날 업신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리석은 수작 말아라!"
그자가 다시 너털웃음을 토하며 재반격에 나섰다.
"소씨 거렁뱅이야, 네 놈은 개방의 방주가 되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고 여기느냐? 너같은 놈은 한 마리의 개나 다름없다. 미운산이 죽지 않으면 네가 죽어야 하고 네 놈이 죽지 않으면 홍칠이란 놈이 죽어야 한다. 누구든 개방의 방주 노릇을 하는 놈은 모조리 죽음을 면치 못할 거다!"
잠시 제 목소리에 취해 격한 몸짓을 하던 그 자가 사위를 둘러보며 제법 위풍있게 호령했다.
"저 놈을 죽여라!"
놈들이 일제히 분사죽통을 겨누기 시작하자 소씨 거렁뱅이는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홀연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치솟더니 두번이나 재주넘기를 했다.
픽! 픽! 픽!
순간 세 줄기의 독액이 그를 향해 뿜어졌다. 소씨 거렁뱅이는 얼굴 옆으로 비껴지나가는 독액을 느꼈다. 훅 하고 코끝으로 풍겨오는 지독한 냄새를 맡은 소씨 거렁뱅이는 순간 아찔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땅바닥에 사뿐히 내리자마자 이번엔 두 놈이 독약을 쏘아댔다. 소씨 거렁뱅이는 왼쪽 소매로 독액을 막듯 휘두르는 한편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녹옥죽봉을 공중으로 힘차게 그어댔다.
"칵! 칵!"
두 놈이 녹옥죽봉에 목대를 맞아 고개를 꺾은 채 고꾸라졌다. 그 두 놈은 미처 죽는다는 소리조차 질러보지 못하고는 땅바닥에 허물어져버렸다.
한번 시작된 녹옥죽봉은 가히 대단한 위력이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머리를 돌려 그 십여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한꺼번에 덮치려 했다. 그는 이렇게 하면 그놈들이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일대 아수라장이 돼버리면 자기 편에게 독이 미칠까봐 놈들은 함부로 분사통을 사용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자의 표독스런 목소리가 다시 다급하게 들려왔다.
"어서 다시 뿜지 않고 뭘 하느냐! 저놈을 아예 독액으로 버무려버려라!"
그 자는 소씨 거렁뱅이가 미처 숨을 돌릴 틈을 주지 않으려는 계략이었다. 그 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 몇개의 죽통에서 독액이 발사됐다. 픽! 픽! 소씨 거렁뱅이는 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자 그 독액이 마침 맞은편에 있던 놈의 얼굴에 고스란히 떨어지고 말았다.
"사람살려!"
놈의 얼굴은 단번에 새까만 재처럼 변하더니 급기야는 살점이 여기저기서 묻어나기 시작했다.
"크큭, 크윽크......"
놈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감싸고는 사람의 소리로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괴성을 토했다.
그때 이상한 기미를 눈치 챈 소씨 거렁뱅이는 재빨리 눈을 돌려 녹옥죽봉으로 막 움찔거리려는 한놈의 손을 찍었다. 그놈은 소씨 거렁뱅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독액을 뿜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놈의 손목은 보기 좋게 부러지고 말았다. 비명조차 내지를 겨를도 없이 놈은 손목을 움켜쥐고는 데굴데굴 굴렀다.
"받아라!"
때를 놓쳐서는 안되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다시 녹옥죽봉을 휘둘러 다른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놈의 머리가 박살이 난 것은 확인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놈 역시 맥을 놓은 채 제자리에서 풀썩 무너져버렸다. 그런데 놈이 허물어지면서 반사적으로 독액을 뿜어대는 바람에 소씨 거렁뱅이가 흠칫 몸을 피했다. 다행히 독액은 발밑에 떨어져 무사할 수가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두 다리에 힘을 가해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토끼의 그것보다 더 날샌 솜씨로 오른 소씨 거렁뱅이는 이번엔 사나운 매가 되어 아래로 내리꽂혔다. 그 순간 네 명이나 되는 놈들이 낙엽처럼 소리조차 내지 않고 쓰러졌다.
소씨 거렁뱅이는 자세를 추스리고는 목청을 높혔다.
"어서 물러나거라! 피하지 않고 나와 대적하려고 하는 놈은 가차없이 죽여버리겠다! 아니 지옥에까지 쫓아가 남아있는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이다!"
그러나 놈들은 이미 목숨을 내놓은 듯했다. 한 사람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소씨 거렁뱅이와 맞선 그대로를 고집했다. 그들이 각기 들고 있는 분사죽통 만큼이나 독하고 질긴 무리들이 아닐 수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용맹스럽게 놈들을 해치우는 것을 보면서도 겁을 집어먹지 않는 눈치들이었다.
놈들은 결사적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십여개의 죽통을 앞세운 채 동시에 독액을 내뿜었다. 삽시간에 지독한 독액냄새가 공중에 흩어졌다.
위기를 모면한 소씨 거렁뱅이는 그러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일찌감치 이 십여명의 무리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기가 크게 다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만일 자기가 황약사, 왕중양 같은 사람들의 손에 죽게 된다면 오히려 달게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허나 이처럼 소인배나 다름없는 자들에게 목숨을 받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야야야!"
소씨 거렁뱅이는 괴성을 내지르며 녹옥죽봉을 번개같이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소씨 거렁뱅이가 그것을 쓸 때면 어찌나 그 소리가 크고 또 그 소용돌이가 엄청났던지 모두들 위축되어 몸을 사리기에 급급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단단한 장벽을 둘러싸고 있는 듯 사방에서 날아오는 어떠한 독액도 허사였다. 그런데 놈들은 강호의 오합지졸들과는 다른 면을 갖고 있었다. 철장방 놈들은 근본상 죽음을 두려워하질 않았다. 앞의 놈이 녹옥죽봉에 힘없이 나가떨어지면
뒤에서 버티고 있던 다른 놈이 대신 달겨들었다.
"앗!"
바로 그때였다.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독액이 날아와 자신의 어깨를 맞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녹옥죽봉의 소용돌이를 멈추지를 않았다. 그런데 차츰 어깨가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예리한 발을 지닌 벌레가 앉아 간지럽히는 듯하더니 곧 뼈속까지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급기야는 심장 속까지 독액이 파고든 모양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불현 몸의 일부가 경직되는 기분에 휩싸였다. 삽시간에 독액은 심장까지 이르렀는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소씨 거렁뱅이는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무리를 노려보다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야앗!"
무서운 속도로 다시 무리들 가운데로 내리꽂힌 소씨 거렁뱅이는 녹옥죽봉을 휘둘렀다.
"퍽!"
녹옥죽봉이 한놈의 관자놀이께를 갈기자 그런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두 눈을 흡뜬 채 입으로 꾸역꾸역 피덩어리를 내뿜던 놈은 곧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런데 더욱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쏴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독액으로 추측되는 것이 등으로 꽂히는 것을 느꼈다. 등짝은 불꼬챙이로 쑤시는 듯 뜨겁고 묵직한 통증이 일어났다.
"으!"
소씨 거렁뱅이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입에 물고 말았다.
그러자 그 흉악한 몰골을 지닌 자가 외쳤다.
"소씨 거렁뱅이야, 네 놈은 개방 방주 노릇하기가 알맞지 않으니 지옥에나 떨어지란 말이다. 그곳으로 너희네 그 개방제자들을 끌고 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라구. 우하하하하!"
승자의 기쁨을 맛보고자 그 자는 연신 기분 나쁜 웃음을 매달았다. 그리고 이미 소씨 거렁뱅이가 일격을 받아 회생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었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분사죽통을 쏘게 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독액에 맞으면 삽시간에 중독이 되어 살점이 썩고 구멍이 휑하니 드러나기 ㄸ문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 놈이 득의양양해 하는 꼴을 보며 대노했다. 그 분노는 곧 행동으로 옮겨졌는데 어느 ㄸ보다 소씨 거렁뱅이는 힘을 모았다.
슈욱!
녹옥죽봉이 득달같이 놈의 눈을 향해 날아갔다. 어찌나 그 속도가 빠르던지 놈은 거의 피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약간 틀었지만 소용이 닿지를 못했다. 그 바람에 오히려 조금 빗나갔다 싶었던 녹옥죽봉이 정확하게 놈의 눈에 명중되고 말았다. 그때를 기다려 소씨 거렁뱅이는 힘껏 녹옥죽봉을 밀었다. 그러자 놈의 눈알을 찢으며 틀어박힌 녹옥죽봉은 곧 두개골 깊숙히 박히고 말았다.
"악!"
놈의 비명소리가 주위를 일깨울 듯 소름끼칠 정도로 울렸다. 그 자 역시 녹옥죽봉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놈은 주르르 녹옥죽봉에 몸을 의지한 채 천천히 쓰러져버렸다.
소씨 거렁뱅이는 녹옥죽봉을 거두고는 쓰러진 자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또 일어나려고 했다. 그 사실 앞에서 소씨 거렁뱅이는 의외로 당황하게 되었다. 갑자기 위기에 몰린 무리들의 동태가 더욱 급박하게 돌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일 강호의 기타 패거리에 속하는 무리들이었다면 벌써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가 치명타를 입고도 이처럼 용감무쌍한 괴력을 보이는데 남아있을 자는 없을 것이다. 저마다 살길을 찾아 뿔뿔히 흩어지는 게 어쩌면 옳은 일에 속했다. 하지만 이 철장방은 규율이 엄한 무리로서 도망을 가다가는 더욱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놈들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더욱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것이었다. 수많은 자들이 피를 내뿜으며
죽어갔는데도 놈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악착같이 달겨들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녹옥죽봉을 휘둘러댔다. 소씨 거렁뱅이는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의 근육들이 나른해옴을 느꼈다. 처음 굳어질 듯 단단히 경직되던 것과는 반대로 온몸의 근육들이 곧 흘러내릴 것처럼 맥이 없게 느껴졌다. 한발짝의 걸음조차 옮겨놓기가 벅찼다. 그는 녹옥죽봉을 세차게 휘두르고 있기는 했지만 법수를 따르지 못해 정확한 힘이 살아나지를 못했다. 정신이 가물가물한 것이 아무래도 놈들 앞에서 힘없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밀실(密室)에서는 침향(沈香)이 타고 있었다. 향 연기가 조용히 피어놀라 천정에 이르렀다가는 다시 아래로 은은하게 스미어 온 방안이 향내로 가득찼다.
미운산이 의자에 앉아 두 눈으로 향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운낭(雲娘)에게 물었다.
"임잔 이 연무(烟霧)가 형태가 있다고 여기나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여기나?"
그러자 운낭이 흐드득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연무의 형태를 친히 보시고도 그러세요. 왜 형태가 없겠나요."
미운산이 그 말에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임잔 형태가 있다고 말하지만 기실 그건 형태가 없는 거야. 흩날리는 연무는 임자가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에 차이가 있거든."
"차이가 있다니요?"
"인간이 속세에서 사는 것도 이러한 이치와 같지. 임잔 그걸 똑똑히 보고 있다고 하지만 내 보기엔 흐릿흐릿하거든."
운낭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운산이 하는 말의 뜻을 쉽게 헤아릴 수가 없었다.
미운산이 다시 운낭에게 얼굴을 주며 입을 열었다.
"여야(*兒)가 죽었는데 임자가 날 따르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 아마도 임자가 떠나가는 게 더 좋을지도 몰라. 내가 이미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임잔 떠나갈 때 되도록이면 슬그머니 사라지란 말야. 안 그러면 내가 아주 마음이 편치 않게 될테니. 또 그렇게 되면 내가 사람들을 시켜 임자를 죽여버리게 될지도 모르지."
다시 웃음을 입가로 만든 운낭이 대꾸했다.
"당신께서 절 죽일 마음이라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가 될텐데요."
일순 정색을 한 미운산이 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허나 어찌 임잘 죽일 수 있겠는가? 임잔 나와 함께 지금까지 삼사년이나 살아왔는데 어찌 내가 매정하게 함부로 그런 마음을 먹겠나?"
그러자 비로소 진한 웃음을 흘리며 운낭이 미운산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호호호, 남녀가 함께 있는 건 단지 그 정 때문인 것만은 아닐테죠. 지금처럼 서로 이렇게 바라보는 것도 삶의 소중한 쾌락이 아닐런지요?"
미운산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자, 내게 차 한잔 따라주게."
그들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미립(米粒)이 밖으로부터 슬그머니 들어왔다. 미립이 운낭과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며 조그마한 입술을 열었다.
"운낭, 아빠는 어떠신가요?"
운낭이 미운산에게서 몸을 떼며 대답했다.
"괜찮단다. 정신이 전보다 많이 좋아지셨어. 다만 때때로 탄식을 하며 머리를 내저으실 뿐이야. 영웅이 기개를 떨칠 수 없으니까 속내가 갑갑하신 거지."
미립은 운낭의 말에 아까의 미소를 다시 내보이며 더이상은 캐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미립이 이번엔 미운산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아버지...... 좀 어떠세요?"
미운산은 순간 미립이 자기를 부르고 있는 입술에는 조소와 멸시가 가득 묻어있음을 알아차렸다. 또한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음탕한 온갖 상념들이 깃들어 있음도.
"흥."
미운산은 머리를 쳐들지 않고 그런 콧소리로 대신했다. 미립은 슬쩍 시선을 돌려 운낭을 살폈다. 운낭이 이미 나가고 없는 것을 확인한 미립이 미운산의 뒤에가 선 채로 말했다.
"아빤 제 생각을 하고나 계세요? 매일마다 이렇게 앓고 있는 척 꾸며대시면서 속으로 제 생각을 하시고나 있나요?"
미립은 말을 마치고는 미운산의 목을 뒤에서 끌어안고 목덜미에다 가볍게 기(氣)를 불어넣었다.
미인이 목덜미를 자극하자 미운산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저도 모르게 한차례 몸을 떨었다. 그리곤 곧 황급히 몸을 돌려 미립을 세게 끌어안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누가 네 아버지더냐? 누가 네 애비란 말이냐? 보아하니 너도 불초의 자식이로구나. 감히 애비를 놀린단 말이냐?"
두 사람은 곧 하나로 엉켰다. 두 마리의 뱀이 비로소 상대를 탐하듯 풀리지 않을 듯한 형태로 얽히기 시작했다. 미운산이 미립을 끌어안으며 손으로 그녀의 볼록한 가슴을 더듬었다. 미립이 몸을 틀며 가느다란 신음을 물었다. 미운산은 더욱 집요하게 미립의 젖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쨍강!"
그들이 한창 한데 엉켜 서로를 탐닉하고 있는데 무엇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그대로 한동안 굳어진 상태였다. 그것은 찻잔이 깨지는 소리였다. 그리곤 순간 등 뒤로 이상한 기운이 자리하는 것을 느낀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사색이 된 채 더욱 굳어지고 말았다. 그곳엔 어느새 들어왔는지 운낭이 서 있었다. 운낭은 워낙 거동에 아주 조심스런 여인이라서 매번 이 석실에 들어올 때면 문밖에서 손기척을 하거나
헛기침으로 자신을 알리곤 했었다. 그런데 방금 들어왔다가 나간 탓이었는지 그것을 그만 놓쳤던 결과였다. 또한 운낭의 생각으로 차가 식을까봐 급히 들어섰던 것이었다.
그런데 미운산이 미립을 끌어안고 애무를 하는 것을 보자 운낭은 그만 저도 모르게 찻잔을 놓쳤던 것이다.
미운산과 미립이 그때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나 미립은 뜻밖에도 운낭을 보자 고개를 외로 틀며 웃었다. 낯빛이 파르스름하게 변한 것은 오직 운낭과 미운산 뿐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미운산은 비로소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운낭을 향해 소리쳤다.
"왜 기침이라도 하지 않는 거야!"
불만으로 가득찬 미운산의 태도를 구경하고 있던 미립이 웃어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운낭에게도 살랑살랑 걸어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건드렸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만. 아빠는 날 좋아하신다구. 안 그래요?"
하며 미립이 미운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미운산은 대꾸없이 미립이 하는 행동을 말없이 주시할 뿐이었다. 미립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빠가 나만을 생각하는지 모르고 있었군요. 그렇죠?"
운낭은 내심으로 미운산이 딸과 이처럼 정을 통하고 있을 줄은 꿈에 몰랐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귀신조차 믿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운낭은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운낭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운낭은 줄곤 선 채로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정신을 가다듬은 운낭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저 애와 그래서는 결코 안돼요......"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미립이 손을 내밀어 운낭을 뺨을 호되게 갈겼다. 운낭의 뺨은 순식간에 뻘겋게 달아올랐다.
"사실 아빤 날 가장 좋아해. 네 년과 여아 따위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줄 알아? 하하하!"
미립은 이렇게 지껄이고 나서 한바탕 깔깔 웃어댔다.
그리고 미립은 또 미운산을 향해 매몰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이 여인을 죽여버리라고 내가 몇번이나 말했던가요? 그런데도 아빤 내 말을 듣지 않았지요. 아빠가 그까짓 여아쯤 죽인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이 년은 아무리 아빠 시중을 잘 든다 해도 저보다 나을 순 없어요. 내가 이 년을 죽여버리는 걸 보시겠어요?"
하자 미운산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네가 손 댈 것 없다. 내 손으로 죽일테니."
운낭은 내심 겉잡을 수 없는 화방수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그동안 정을 나누었던 미운산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베개머리에서는 그처럼 자기에게 부드럽고 다정하던 사내가 이토록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운낭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당신은 날 죽이는 게 좋을 거예요."
운낭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미립이 그것을 보고는 키득키득 웃어댔다.
"아빤 속이 좁다는 걸 전 잘 알아요. 아빤 이 년을 끔찍하게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년을 죽이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내가 죽여버리는 게 나아요. 그러니 아빤 그저 구경만 하세요."
미운산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니 야릇한 두려움마저 미립에게서 받은 미운산은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네가 죽이고 싶으면 그렇게 하려무나."
미립은 서서히 운낭에게로 다가갔다.
"운낭, 네 년은 나와 아빨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아빠와 함께 있는 걸 보고도 모른 체 했었더라면 그나마 목숨은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 년이 모든 걸 똑똑히 그 눈알에 새겨두었으니 오로지 죽는 길밖엔 없어!"
운낭은 자세를 가누면서 미립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다. 그러자 미립이 머리를 흔들면서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괜한 짓은 말라구. 다 쓸데없는 짓이니까. 네까짓 년이 감히 나에게 손을 대겠다구. 허튼 꿈은 아예 꾸지 않는 게 좋을걸. 얏!"
미립은 말을 마치자마자 순간 운낭에게 일격을 날렸다. 미립의 동작은 매우 빨랐다. 그녀는 대번에 운낭의 양 옆구리를 겨냥했다. 운낭이 겨우 피하며 미립을 노려보았다.
"이 못된 계집 같으니라고!"
운낭이 욕설을 퍼부으며 장을 날려 반격을 가해왔다. 미립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강용팔장 법수로군! 솜씨가 괜찮은데."
이 장법은 그야말로 뛰어난 것이었는데 미운산이 전수해준 유일한 법수이기도 했다. 이 법수가 바로 <향용유회>라는 것이었다. 운낭이 다급한 나머지 그 법수를 써버렸던 것이다. 놀란 것은 미립이었다. 운낭이 <강용팔장> 법수를 쓰자 쓴웃음을 치며 말했다.
"과연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이 틀림없군. 가문의 무예까지 전수해주다니."
그녀의 말 속에는 여인의 예리한 질투심이 그득 깃들여 있었다.
"얍!"
미립은 이렇게 말은 내뱉으며 몸을 날렸다. 주먹질과 발길질이 운낭에게로 쏟아졌다. 그 무예는 모두 강남 여러 패거리들에게서 익힌 명문묘기(名門妙技)였다.
그럴 때마다 운낭은 다행히 몸을 피하긴 했지만 속으론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찮은 법수 한가지로 위기를 넘기고 있다는 자신이 문득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방극에게서 <강용팔장> 중의 한가지 법식밖에는 배우질 못했다. 아무리 몸을 쓰려고 해도 <항용유회> 말고는 달리 부릴 수 있는 법식가 없었다.
원래 이 <강용팔장>은 가장 뛰어난 절기(絶技)였다. 그러나 운낭은 그중 한가지 법식에만 치중하여 자기를 방어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립이 손을 뻗어오면 그 법식대로 반격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차츰 힘이 모자라 그 법식으로 손을 내미는 속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느려진 속도에 비례하여 그 위력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미립에게 비쳐졌다.
그 사실을 눈치챈 미립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는 운낭을 노려보았다.
"네 년이 아빠의 이불 속에서 더 훌륭한 법식은 터득하지를 못했나 보구나!"
운낭은 그때서야 절실하게 깨달았다. 미립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천진스런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미립이 내뱉는 말이 어디 순진무구한 계집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분명히 천하게 밑바닥을 전전하던 부류의 계집이나 써먹던 말솜씨가 분명했다.
안으로만 삭이려던 분노가 치솟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운낭은 자세를 단단하게 추스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미립에게 쏘아댔다.
"네 년이 날 죽이지 못하면 내가 오늘 너를 요절내고 말테다!"
운낭은 미립을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것으로 아예 미립을 거꾸러뜨리려 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립이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곤 운낭에게로 달겨들었다.
"얏!"
그녀는 학처럼 몸을 둥둥 허공에 띄운 채 연거푸 운낭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며 운낭을 궁지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어찌나 그 동작이 빠르던지 운낭은 미처 피할 겨를도 찾지를 못했다.
"받아랏!"
미립이 연거푸 두 장으로 운낭의 어깨를 가격했다. 그리곤 몸을 한쪽으로 틀며 다시 한쪽 장으로 운낭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악!"
운낭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바닥에 사뿐히 자리를 잡고 내려앉은 미립이 입꼬리를 길게 치켜올렸다. 그리곤 곧 쓰러져 있는 운낭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미립이 손가락으로 운낭의 대혈을 누르자 한차례 꿈틀댔다. 운낭 앞에 꿇어앉은 미립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운낭아, 네 년은 이젠 사람노릇을 다 하게 되었다. 네 년은 하필 아빠를 사랑했을 게 무어냐?"
운낭은 꼼짝없이 사지를 미립에게 내맡긴 채 이를 악물을 뿐이었다. 그녀의 입과 귀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립이 다시 입을 열어 비웃음을 쏟아냈다.
"네 년은 아빠가 아직도 너를 좋아한다고 믿겠지? 그러나 이 세상 사내치고 사랑을 영원히 지키는 사내는 없는 거다. 네 년은 아빠가 널 속인 걸 알고 있느냐?"
그러자 운낭이 겨우 피가 묻어있는 입술을 열어 말했다.
"그인 날 속이지 않았어. 그인 절대 날 배신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 소리는 매우 처절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미립은 비웃을 뿐이었다.
"아빠가 널 속이지 않았다면 날 속였단 말이냐! 그렇다면 아빠의 몸에 핀 독 때문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한다고 믿고 있을텐데 한번 보겠어?"
운낭은 무슨 말인가 간파하지 못하고는 휘둥그러진 눈을 돌렸다. 그녀는 미립이 왜 그런 말을 꺼내는지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미립이 웃으면서 손으로 미운산을 끌어당겼다.
"아빠, 어서 일어나보세요. 와서 이 여인에게 보여주는 게 어때요?"
운낭은 더욱 긴장된 눈으로 미운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 믿어지짖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미운산이 일어서더니 천천히 자기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운낭은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운산의 걸음걸이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미운산이 이윽고 운낭 앞에 다가와 우뚝 서더니 말했다.
"운낭, 임잔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한 게 탈이었소."
그 말의 속뜻을 알아차린 운낭은 고개를 떨구었다. 운낭이 지금까지 미립에게 당한 수모를 다시 한 번 깊게 새겨주는 말이었다.
운낭이 속으로 자신의 신세를 아프게 꾸짖었다.
'원래 다리를 쓰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일부러 꾸며낸 계략이었다니? 만일 저 사람이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절대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내게 그동안 다정하게 대해주었단 말인가? 나와 여아를 속이면서까지 자기는 다시는 여인과 관계를 나눌 수 없는 처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결국 저 사람은 지금까지 가면을 쓴 채 나와 여아를 속였던 것이로구나. 그런 사실도 모르고 나는 저 사람을 믿고 있었다니? 여아는
목숨을 빼앗기고 나는 이런 신세로 전락되고 말았구나. 저 사람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운낭은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더이상 삭일 수가 없었다.
"당, 당신은 왜 이런 짓을 꾸몄나요?"
그러자 미운산이 아주 태연한 낯빛으로 운낭을 바라보았다.
"내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 놈들은 모두 죽여버려야 한다고 믿었거든. 그래서 난 몸이 불편한 척 위장을 하여 놈들을 안심시킨 뒤 하나씩 처리해버리고자 한 것이지."
너무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이제 확연히 그들의 계략을 알게 된 운낭은 탄식을 했다.
"아주 훌륭한 계책이군요......"
미운산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임자 뿐만 아니라 여아까지 나한테 속아넘어가지 않았겠어. 하루는 여아가 나한테 오더니 스스로 옷을 벗더군. 반나절이나 땀을 뻘뻘 흘려가며 나를 다시 일으켜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지. 그녀는 내가 이젠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깨닫고는 화를 내며 도망을 치더군."
"그렇다면 당신이 여아를 죽였나요?"
운낭이 소리쳤다. 운낭은 미운산이 지금 아주 지독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 음모에 걸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운산이 어떤 짓을 하려고 하는지 구체적인 윤곽은 짚어낼 수가 없었다.
미운산이 말했다.
"운낭, 임잔 알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알아버린 거라구. 그렇지 않았더라면 임잔 후에 나와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을텐데. 임잔 눈치가 너무 빠른 게 흠이라구."
그러자 미립이 갑자기 운낭에게 달겨들어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참 아름답군. 아빠가 당신을 선택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어."
하며 손톱으로 운낭의 얼굴을 할퀴었다.
"나쁜년!"
운낭의 얼굴에는 몇줄기의 피가 고랑을 이루듯 흘러내렸다. 그러나 미립은 그것으로 멈추질 않았다. 다시 운낭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손톱으로 긁어댔다. 운낭의 얼굴은 삽시간에 피칠갑을 이루었다.
미립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소리를 질렀다.
"네 년은 아빠가 널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해. 아빤 날마다 나와 정을 통했다구. 하하하!"
미립은 완벽한 승리자를 자청하듯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는 아주 방자하게 들려왔다. 그러더니 미운산에게 다가가 두 팔로 목을 끌어안으며 간사하게 입을 놀렸다.
"매일 저녁 네 년의 시중이 끝나면 난 아빠와 한 이불 속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었지. 이불 속에서의 아빠의 실력은 네 년이 더 잘 알고 있겠지?"
미립의 말엔 더이상 천진한 여인의 그림자가 남아있지를 않았다. 운낭은 그녀는 분명 음탕한 탕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운낭은 다시 한 번 탄식을 했다.
'그래, 저 년의 말을 나도 믿는다. 저 미립이란 년은 얼추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계집 같지만 속내에는 음기로 가득찬 탕녀일 뿐이다. 저토록 미운산에게 매달려 음탕한 자태를 자아내는 것만을 봐도 알지.'
운낭의 분노는 극에 치달았다. 그들을 향해 일침의 반격을 가하고 싶었으나 이미 몸은 망가진 상태였다. 할 수 없이 그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부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개만도 못한 년놈들아!"
정말 개돼지보다 못한 인간들이었다. 친부녀지간으로 알고 있던 그들의 행각은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버러지 같은 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운산이 운낭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눙치듯 말했다.
"임잔 나를 무정하다고 원망하지 말라구. 이건 대단한 비밀이고 개방사람들 중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어. 임자가 알게 되었으니 비밀이 새어나가면 나의 대사를 망치게 된다구."
그것은 곧 운낭의 끝장을 의미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마친 미운산이 운낭을 향해 오히려 일격을 가해왔다. 운낭은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운낭이 일격을 맞고 쓰러지자 미립이 말했다.
"왜 그렇게 급하게 처리하죠? 운낭이란 년이 고통을 받을까봐 일부러 한 손에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겠죠?"
미운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순간 마음 속으로 운낭과의 정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는 운낭이 미립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미립이 그런 자신의 심중을 간파하고 있는 게 아닌가.
미운산은 미립이 쓰러진 운낭에게로 다가가 머리에 꽂혀있던 금비녀를 빼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미립은 다시 그것으로 운낭의 가슴을 찔렀다.
"아빠 곁에는 오로지 나밖에는 없다!"
금비녀가 가슴에 꽂히자 아직 숨이 남아있던 운낭이 공중으로 몸을 띄우듯 잠시 꿈틀댔다. 미립은 다시 금비녀로 운낭의 사지에 대고 무차별하게 난자를 해댔다. 미운산이 그 광경을 보다 못해 말했다.
"미립아, 저 여잘 용서해라. 어서 조용히 죽도록 내버려두라구."
미립이 두 눈을 부릅 치켜뜨며 미운산을 쏘아보았다. 낯설게만 보이는 얼굴이었다.
"미운산. 당신의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날 건드리지 말아요. 나를 건드렸다가는 당신의 대사도 흔들리게 될지 모르니까."
하며 미립이 으름장을 놓자 미운산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운산의 눈에는 어느새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거의 꺼져가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운낭이 생각했다.
'이 여인이 이다지도 흉악한 것을 내 어찌 몰랐단 말인가? 태산이 무너져도 꼼짝도 하지 않던 미운산이 저토록 고분고분하다니. 앞으로 개방이 처할 고초가 막심하기만 하구나.'
온몸으로 파고드는 고통에 운낭은 신음소리를 토했다. 운낭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날 빨리 죽여다오!"
그러나 미립은 쓴웃음을 만들며 운낭의 적삼을 찢어 벗겨냈다. 허연 속살이 드러났다.
"아빠, 당신은 이 여인의 어느 곳을 가장 탐하셨나요? 이 어깨가 아닌가요? 옛사람이 미녀의 미끈한 어깨, 가는 허리 버들과도 같아라 하고 말했다고 하는데 아빤 아마도 어깨를 좋아했겠죠? 아니면 저 허리를 좋아했나요?"
미립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운낭의 어깨를 꽉 깨물어버렸다. 운낭은 더이상 지를 비명조차 남아있지를 않았다. 그저 분통함의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운낭의 어깨에서 뻘건 살점이 뜯겨나갔다.
"옛날 양귀비 몸의 살점이 향기롭고 흘리는 땀마저 연지와 분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던데 아빠가 좋아하는 운낭의 살점은 왜 이다지도 비린가요?"
하며 미립이 이빨로 문 살점을 퇘 하고 뱉았다. 미운산은 대답을 못하고 놀란 표정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운낭, 네 년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더라도 절대로 여인으로 태어나지 말아야해. 더군다나 미운산과 같은 이런 사내의 여인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되지."
라고 떠벌인 미립이 요사스럽게 웃어댔다. 그녀는 운낭이 입고 있던 옷의 소매자락을 찢어내어 피가 묻은 자기 입술을 훔쳤다.
미운산은 머리를 푹 숙인 채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이전에는 이 운낭을 가장 소중한 여인이라고 여겼는데 오늘은 저 여인이 고초를 겪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구나."
미운산은 차마 운낭의 최후를 지켜볼 수도 없었고 또한 미립에게 어떠한 제동을 걸 수도 없었기에 그저 시선을 돌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미립은 미운산의 거동을 살피더니 다시 운낭에게로 표독스런 눈빛을 쏘아댔다. 이제 회생할 기미는 전혀 없이 꺼져가는 운낭을 향해 다짐했다.
'미운산이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분명히 속으론 몹시 아플 것이다. 나 역시 미운산을 보니 마음이 좋지를 않구나. 더 괴롭히지 말고 내가 지독한 여인이라는 걸 보여주기만 해야겠다.'
그리하여 미립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운낭에게 말했다.
"운낭, 네 년이 죽은 뒤 나도 네 년을 생각하게 될지도 몰라."
그리곤 손으로 운낭의 아혈을 짚고나서 가슴을 향해 힘껏 치명타를 꽂았다. 운낭은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못했다. 미립의 손바닥 가격이 엄청난 파괴를 가져온 것이라 운낭은 곧 절명하고 말았다.
미운산은 그 자리에 멍청이 서서 운낭의 시체를 들여다 보았다. 운낭의 시체를 바라보는 미운산의 심정은 아주 괴로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미립이 어느새 다가와 미운산의 목에 매달렸다.
"아빠, 아빤 무얼 그리 생각하세요?"
미운산이 미립을 돌아보았다. 그는 내심으로 이 여인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 여인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유는 미립은 이미 자신이 세운 계획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미립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미립이 다시 간사스런 목소리를 미운산의 목덜미에 대고 불었다.
"아빠, 아빤 저 년을 원해요 아니면 날 원해요?"
미립의 목소리에 섞여 전해지는 숨소리에 미운산은 긴장감을 맡을 수 있었다.
"난 물론 널 원해."
그러자 미립이 와락 미운산의 품으로 덮쳐들어 얼굴을 들이댔다. 미립의 손에 강제로 이끌린 미운산이 침상으로 가 누웠다. 그녀는 미운산의 옷자락을 찢으며 말했다.
"난 당신을 원해요. 난 당신을 원한단 말이예요. 당신은 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 안돼요. 당신이 나를 먼저 죽이지 않고서는 내 곁을 떠날 수 없을테니 그리 알아요!"
미립은 미운산의 옷을 벗기고는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미운산은 내키지 않았지만 차츰 농도가 짙어가는 미립의 애무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비틀고 말았다. 정욕이 일어나기 시작한 미운산이 이번엔 미립을 덮쳐 옷을 찢어발기고는 짙은 애무를 했다. 두 사람은 한데 얽혀 다시 정욕을 불태웠다.
소씨 거렁뱅이는 자기가 이제 더이상 포위를 뚫고 나가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죽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독이 묻은 상처가 뼈속까지 들쑤시는 바람에 힘을 낼 수가 없었다. 철장방 놈들은 저마다 분사죽통을 내밀고는 어지럽게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속으로 애탄했다.
'이 소씨 거렁뱅이가 이런 허접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의 상태로는 싸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이놈들아! 어찌하여 십여명이나 되는 놈들이 한 영감을 그리도 못살게 구는 거냐?"
그 사람은 히히덕거리며 다가왔는데 장난기가 철철 넘쳐흐르는 것이 아무리 둘러봐도 점잖은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철장방 놈들은 그러나 그 소리에 개의치 않고 소씨 거렁뱅이를 치려고 더욱 거리를 좁혀왔다. 그놈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넌 누구냐? 순순히 물러서지 않으면 네 놈의 살을 포를 떠 지나는 까마귀에게 던져주겠다!"
그러자 다시 히히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로 웃기고 있구나. 네 놈들이 나까지 죽이겠다구.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텐데."
이윽고 그 목소리의 임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선비차림을 한 사람이었는데 아주 기괴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도사처럼 보이는가 싶더니 아닌 것 같고, 공자 같으면서도 공자 같지가 않고, 어른인가 하면 차림새가 그렇지 않았고, 어린애처럼 보였으나 삼사십살은 넘어보이기도 했다. 그 선비차림이 철장방 무리 속으로 날아들며 외쳤다.
"그대들은 무얼 빼앗으려고 그러나? 저 사람한테 무슨 흥미로운 물건이라도 있나?"
그가 다시 히히덕거리자 무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사태를 주시했다. 그러나 놈들은 그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은 눈치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눈치를 살피다가 선비차림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어서 물러가지 못하겠어!"
그러나 선비차림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얼른 손을 내밀어 상대의 발을 잡아 비틀었다. 그러자 상대는 두번이나 공중에서 돌더니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 선비차림이 호탕하게 웃었다.
"우화화화,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네 놈의 공중제비가 이 노완동보다 썩 나은데."
그때서야 그 자가 노완동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완동은 바닥에 널부러진 놈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퍼부었다. 넘어진 자가 화를 내며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두 손을 뻗어 노완동의 눈알을 파내려고 했다. 놈의 날카로운 손톱이 노완동의 눈에 박히려는 찰나 다시 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노완동이 놈의 손가락을 이빨로 깨물어 작신 부러뜨리고 말았다.
"재미없구나, 재미없어. 웬 놈의 손이 이다지 맛없고 더럽단 말인가? 우하하하하!"
그러면서 여전히 노완동은 비웃는 것인지 모를 웃음을 터뜨렸다.
철장방 무리들은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법수에 뛰어난 한 고인(高人)의 출현으로 모두들 잔뜩 겁을 집어먹는 눈치였다. 그들은 강력한 상대를 만난 것에 맞춰 새로운 술책을 쓰려고 했다. 무리 중 다섯놈이 갈라져나와 노완동을 재빨리 에워쌌다. 한놈이 분사죽통을 쳐들자 노완동 역시 얼른 손을 쳐들며 소매 속으로부터 죽통을 끄집어내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외쳤다.
"그건 뭘 하는 물건이냐? 여기도 있다!"
노완동이 자기의 죽통으로 앞에 있는 두 놈을 겨누었다. 철장방 놈들은 그 죽통을 보자 모두 질겁을 했다. 그 놈들 역시 죽통 안에 들어있는 독액이 몸에 묻기만 하면 처참하게 끝장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놈은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놈 모두가 물러서는 것을 보던 노완동이 말했다.
"좋아, 참 좋단 말이야. 네 놈들보다 내가 독액을 먼저 뿜겠다."
미처 멀리 도망치지 못한 놈들을 향해 노완동이 독액을 뿜었다. 다섯 놈 모두에게 적중하도록 노완동은 죽통을 좌우로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악!"
"어쿠!"
그 다섯 놈은 독액에 맞아 저마다 소리를 내지르며 들고 있던 죽통을 버리곤 도망을 쳤다. 도망을 치면서도 품속에서 해독약들을 꺼내 입에 쑤셔넣느냐 야단이었다. 노완동이 다시 소리쳤다.
"너희들이 아직도 놀 생각이면 내가 친구를 해주지. 이 죽통의 독액은 다 썼으니 새 죽통으로 바꾸어야겠다."
그런데 떨어진 죽통을 들어 안을 확인하던 노완동이 인상을 찌푸렸다. 죽통은 비어있었다.
"재미가 또 없군."
또 하나의 죽통을 집어들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거 화가 나는군. 모조리 빈 통들이로군."
그는 죽통을 네 개째 확인하고는 휙 휙 집어던졌다. 그러다가 마지막 다섯번째 죽통을 집어들었다. 순간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노완동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호, 드디어 놀잇감 하나가 생겼군."
하며 갑자기 죽통을 소씨 거렁뱅이 쪽으로 돌려 겨누었다. 그런데 누군가 소리쳤다.
"저 죽통엔 독약이 없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직 남아있는 무리 가운데 세놈이 노완동에게 달겨들었다.
"죽고 싶어서 성화를 부리느냐?"
노완동이 히히 웃더니 죽통에 있던 독액을 세 놈에게 뿜었다. 세 놈은 아무런 방비도 없이 있다가 그대로 얼굴과 가슴팍에 독액벼락을 맞았다.
"살려!"
세 놈들은 모두 가슴과 얼굴 등을 감싸안고 비명을 토했다. 그 비명소리는 마치 짐승이 내는 그것과도 흡사했다. 한 놈이 두 손으로 자기 앞가슴을 움켜쥐고는 고통스러워했다. 손에까지 독액이 묻는데도 놈은 가슴을 사정없이 어우만지며 신음을 게워냈다. 놈은 곧 쓰러져버렸다. 다른 한 놈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액에 아랫배를 맞았는데 주머니 속에 든 해독약을 꺼내 입에 넣으려는데 그만 아랫배에서 내장이 쏟아져나왔다. 그것을 본 놈은 해독약을 써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런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노완동이 죽통을 팽개치며 말했다.
"아이구, 깜짝 놀랐네! 이렇게 지독한 독이 들어있을 줄이야."
하며 노완동은 줄행랑을 칠 준비를 했다. 노완동의 손에서 죽통이 벗어나자 한 놈이 대신 죽통을 집어들고는 소리쳤다.
"서랏! 어딜 도망가려 하느냐?"
몇걸음 도망을 치다가 고개를 돌린 노완동의 눈이 커졌다. 바로 자기가 들고있던 죽통이었다. 노완동은 잔뜩 겁을 먹었다.
'저놈이 정말로 내게 독액을 내뿜기라도 하면 난 죽은 목숨인데......'
그는 얼른 눈둥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꾀를 생각해냈다. 그때 죽통을 집어든 놈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네 놈이 꿇어앉아 날 어버이로 섬긴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널 죽이고야 말겠다!"
그러자 노완동이 다시 히히덕거리며 방금 떠올린 꾀를 내보였다.
"내게 보물들이 많은데 갖고 싶은 생각 없나?"
죽통을 집어든 놈은 철장방에서 가장 가난한 자였다. 그 자는 노완동의 말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냐? 그렇다면 어서 꺼내보아라!"
놈이 외치자 노완동이 기다렸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수정구슬을 한줌 꺼냈다. 그것은 반들거리는 광채를 뿌리고 있어 멀리서 봐도 귀한 물건처럼 보였다. 하지만 철장방 놈은 어리석은 자가 아닌지라 그 구슬이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진기한 물건은 아니라는 것쯤은 간파했다.
"네 놈이 날 놀리느냐?"
하고 소리를 지르며 노완동에게 독액을 뿜으려고 했다. 노완동의 다급해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잠깐! 모두 주겠어! 네게 모두 줄테니 진정하라구!"
그러나 그것 역시 노완동의 꾀였다. 놈에게 구슬을 건네는 시늉을 하면서 노완동이 아홉개의 구슬을 힘껏 날렸다. 팍팍팍......
"윽!"
구슬은 놈의 머리와 손 등에 박히고 말았다. 놈은 그중 하나의 구슬이 자신의 혈도에 명중되는 것을 감지했다. 죽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간괴한 놈!"
그러나 이미 놈은 노완동에게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손뼉을 치며 노완동이 여유롭게 웃었다.
"내 구슬이 싫다구 했더냐? 차라리 잘 됐다. 네 놈이 그걸 가져가면 난 무엇으로 놀겠느냐?"
노완동이 떨어진 죽통을 들어 멀리 있는 바위를 향해 힘껏 던졌다. 죽통은 보기좋게 박살이 나버렸다. 독액이 흩어졌는지 바위가 갑자기 흙갈색으로 변하며 까맣게 타들어갔다. 푸스스. 돌가루가 떨어져내리는 것을 바라보던 노완동이 혀를 내밀었다.
"어휴, 무서워라. 정말 대단한 독이야!"
이제 소씨 거렁뱅이 주위에는 다섯밖에는 남지를 않았다. 그것을 본 노완동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 멍청한 놈들아! 아직도 도망가지를 않았더냐? 오냐, 너희들마저 저기 바위처럼 만들어주마!"
그러자 놈들은 불리함을 깨닫고는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갑자기 앞이 흐려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노완동이 달려와 소씨 거렁뱅이를 흔들었다.
"영감, 정신을 자리시우. 정신을 차리란 말이요. 영감이 죽으면 내가 괜히 헛수고를 해야되지 않수?"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꿈적도 하질 않았다. 노완동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쓰러진 사람들을 툭툭 치며 확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작은 움직임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모두 죽어버렸군. 산 놈이라고는 없으니 저 영감을 어쩐담."
순간 노완동은 뒷머리를 치고 가는 것을 감지했다.
"그렇지! 해독제를 찾아보면 되겠군."
노완동은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곧 해독제를 발견한 노완동은 소씨 거렁뱅이 입에 밀어넣었다. 그러나 의식이 없는 상태라 소씨 거렁뱅이는 약을 받아먹지를 못했다. 노완동이 손가락 끝으로 소씨 거렁뱅이의 인후를 가볍게 찌르자 그때서야 꾸르륵 하고 약이 넘어갔다. 노완동은 나머지 약들도 모두 모아들였다.
"이 정도면 충분한지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노완동은 소씨 거렁뱅이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