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우리 나라 대중 음악의 역사
한국의 록음악의 역사는 신중현에서 비롯되었다. 신중현은 일본색 음악을 혐오하면서 960년대 미국에서 성행한 인종 차별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록 음악을 발빠르게 도입 했을 뿐 아니라 그 음악 정신인 저항과 자유의 정신도 흡수했다. 신중현이 서양의 록음악과 우리 가락을 적절하게 버무려 만든 대표곡은 1974년에 발표한 <미인>이다.
김민기의 노래에는 1970년대라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가 깊이 배여 있었다. 김민기의 음악은 서양에서 1960년대에 유행한 반전·반체제 음악 포크였다. 김민기의 곡에는 <아침이슬>, <친구>, <작은 연못>등이 있다. 유신 정권이 저항적 포크에 철퇴를 내린 뒤에는 송창식·윤형주·김세환 등 통기타 가 수들이 대표하는 저항 요소를 배제한 순수 서정 포크가 등장했다.
트로트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 전통 민요를 대체하는 장르로 등장한 후 우리 나라 의 대표적 유행가요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전성기를 되찾은 트로 트 분야에서 최고스타는 조용필이었다.
1990년대 야당에서 여당으로 탈바꿈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정부는 초기에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 실명제 등 파격적인 정치 공세를 펼쳤다. 대중 음악계는 트로트와 성인층 노래가 주춤하고 랩을 주축으로 다양한 시도가 일어났으며 그 도화선은 단연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우리 대중 음악계에 일으킨 핵심은 힙합문화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음반 회사와 방송국은 수명이 긴 음악가를 기르는 전략에서 가 장 짧은 기간 안데 최대의 이윤을 뽑고 새로운 스타로 전환하는 전략으로 바뀌었다. 한편 보수적인 기성 질서와 주류 음악계의 지나친 상업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제도 권 무대 대신 좁은 클럽에서 소수의 매니아를 상대로 음악 활동을 하는 언더 그라운드 밴드들이 있다.
Ⅱ. 본 론
60년대 대중음악
60년대 음악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좀 더 완숙한 체제로의 음악형태를 나타냈다. 그것은 수난기에서 돌출 되어온 히트곡들의 영향과 더불어 창작인들의 창작욕구를 더 한층 불러 일으켰고 특히 미8군의 방송과 함께 8군 쇼에서 활약한 가수들의 무대진입이 활발히 나타났던 시기였다.
1961년 한명숙의 "노란 샤쓰입은 사나이"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택시 운전기사들에게까지 유행이 번져 노란셔츠를 입고 운전하는 운전사들의 모습도 비쳐졌다. 같은 해 김희준은 "내사랑 주리안"과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로 인기를 구가했고 1963년에는 현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밤안개"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다. 미8군쇼는 1963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때 실력있는 가수들이 이 무대를 거치며 활발한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나 초기 때는 개런티를 돈이 아닌 커피나 초콜렛, 술, 빵 등으로 대치됐고 개런티는 약간의 수고비 정도였다. 초기 미8군쇼에서 활약한 팀은 김시스터즈, 김보이즈, 패티김, 이금희, 서수남, 코리안 키튼즈의 윤복희, 한명숙, 임희숙, 신중현 등이 이 8군쇼를 거쳐갔다.
8군에서 이들이 활동하는 반면 전통적이 트로트를 구사하는 가수들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트로트와 신민요 쪽에서 인기를 누렸던 가수들로는 한복남, 박재랑, 이해연, 현인, 명국환, 권혜경 그리고 이미자였다. 이미자는 이미 1950년대 때 "열아홉 순정"으로 인기를 누렸고 이후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등으로 이미자의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1965년 남일해는 "빨간 구두 아가씨"등의 곡을 발표했고 1966년 배호는 "만나면 괴로워", "안개낀 장충단 공원", "마지막 잎새"등을 노래했다. 레코드 회사 역시 1950년대에 비해 2-여개로 늘어났고 오아시스, 대도, 유니버샬, 도미도, 지구, 아세아, 성음 등 유수의 레코드사가 생성됐다. 트로트의 부흥뒤에도 젊은 청소년층의 노래 역시 확산됐다. 50년대 말 명동에 근거지를 둔 "은하수", "영보다방", "돌체"등은 젊은이들의 또 다른 배출욕구의 장소였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디쉐네", "메트로", "시보네"등도 명소로 자리 잡아갔다.
이 시기를 통하여 최동욱, 이종환, 김인권, 박광희. 원종관, 조용호, 이백천, 이선권, 박원 웅 등이 디제이 활동을 벌였으며 후일 방송사가 생기면서 이들은 각각 프로듀서나 방송 DJ로 자리를 옮기는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다.
신중현은 1960년대 초 미8군쇼 무대에서 활약하며 주옥같은 곡을 많이 선보였다. 63년 에 "빗속의 여인", "커피한잔"등을 발표했고 에드4라는 그룹을 조직, 서정길(보컬 리듬), 한영현(베이스 기타), 권순권(드럼)과 함께 이 그룹을 이끌어 갔다. 이때 "키 보이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신중현의 후반 작품들은 더욱 원숙미를 더해주고 있다. "미인", "떠오르는 태양", "거짓말이야", "님은 먼곳에", "안개속의 여인", "너를 사랑하네"는 현재까지도 꾸준히 불려지는 명곡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저속하다는 이유로 그가 지은 3백곡중 13 곡이 방송금지로 묶이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룹 애드4 이후 신중현은 덩키스와 "골드 그레입스" 활동을 거치며 완숙한 음악을 보여주었다.
70년대 대중음악
70년대 대중음악은 포크 음악의 출현과 트로트의 활성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특히 이때는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정부의 음반간여가 심하게 부각된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든 음반에는 건전가요가 수록되었고 "새마을 노래"와 "예비군가"는 직장은 물론 학교, 단체, 공공기관에 걸쳐 20여 년 동안 우리의 귀와 뇌리를 자극했다. "새마을 노래"는 90년대 초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70년 초기에는 한대수, 양희은, 이필원, 박인희 등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통기타 음악이 아닌 하남석, 김정호, 백영규 등으로 이어지는 크로스오버적인 장르의 가수들을 배출해내는 동기도 부여 됐다. 국내에서 활약한 본격적인 포크 가수는 한대수를 뽑는다. 미국 본토에서 포크 음악을 접했던 한대수는 68년 11월 드라마 센터에서 귀국 공연을 열어 많은 젊은층들에게 어필했고 이후 "물좀 주소", "고무신"등을 발표했다, 그 뒤 서유석이 풍자적인 노래로 대학가에서 활약을 했으며 김민기, 양희은, 이필원, 박인희 등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저항가요라는 미명하에 김민기 등이 독재체제로부터 제재를 맏기도 했다. 이후 한대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서유석은 노래를 잠정 그만두었고 양병집과 조동진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노래들도 많이 취입했다. 은희의 "꽃반지 끼고", 윤형주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익", 조영남과 최안순의 "산까치야", 4월과 5월"내가 싫어하는 여자", 에보이스의 "물새의 노래", 양희은의 "새노야", 학생들의 기타 교본으로 채택되기까지 한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백구", "작은 연못"등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발표됐다. 70년대 중반이 되면서 트윈폴리오를 해체한 송창식과 윤형주는 각각 솔로로 활동했고 이정선, 어니언스(임창재, 이수영), 4월과 5월(백순진, 김정호), 박인희, 원 플러스 원, 김세환 등이 포크음악을 펼쳐나갔다. 또 이장희, 석찬, 홍민, 허림, 둘 다섯, 하남석, 정종숙, 김인순 등은 포크의 형식과는 다른 일반 유행음악을 했다. 투 코리안즈의 "벽오동"은 민요형식을 띠기도 했고 이종용의 "너"나 유심초의 "사랑이여"는 포크음악과는 다른 유형의 음악에서 접근했다. 특히 박인희는 청아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시낭송을 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포크음악 이외에도 70년대는 록과 중창, 트로트의 전성기가 있었다. 중차엥서는 버블검, 쉐그린, 뜨와에 므와, 라나에 로스포, 현경과 영애, 투 코리안즈, 서수남과 하청일, 원 플러스 원, 어니언스, 산이슬, 금과은, 하사와 병장, 물레방아, 버들피리 등 중창단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70년대 일대 트로트의 발흥을 일으킨 가수는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였다 이때부터 패티김, 김추자, 김상희, 송대관, 이미자, 조미미, 김부자, 정훈희, 하춘화, 김세레나가 맹추격을 했고 특히 이때 남진과 나훈아의 맞대결은 남자 트로트의 양대 산맥을 그을 만큼 매우 위력적으로 작용됐다. 이때 리사이틀이란 단어가 많이 쓰였고 이들의 펜클럽도 조성이 된 시기였다. 당신 남진의 "님과 함께"는 아이들에게조차 애창됐으며, 나훈아는 남다른 창법으로 "고향역", "감나무골"등을 히트시켰다. 방주연의 "기다리게 해놓고", 김부자의 "사랑이 머물다 간 자리", 박우철의 "잊지마오" 등이 주된 히트곡이었다. 한편으로는 요들송을 하는 김홍철, 샹송분야의 이미배, 칸초네 스타일의 이용복, 재즈 분양에서의 김준, 장우, 임희숙의 활약도 이어졌다.
80년대 대중음악
80년대는 발라드가 강세를 보인 반면 트로트의 약세를 몰고 왔다. 그러나 트로트는 지난 60년대 이후 새로운 차에대 트로트 가수들을 양산해냈으며, 좀더 다원화된 음악들도 선보였다. 80년대에는 정태춘, 배따라기, 신형원, 해바라기, 유익종, 이태원 등이 활약을 했다. 신형원은 서희덕에게 발탁, 불씨, 유리벽 등 젊은 청소년층의 노래를 불러 잔잔한 인기를 얻었다. 특히 신형원은 얼굴 없는 가수란 닉네임을 가지고 작곡가 한돌과 함께 "개똥벌레", "터"등 서민적인 노래를 많이 불렀다. 83년 이주호가 이끄는 해바라기는 "모두가 사랑이에요"등으로 1년여 정상을 차지했고 "내 마음의 보석상자", "사랑으로"등 국민 들의 많은 지지를 얻는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이때 이태원의 "솔개"가 아주 재치있는 가사로 받아들여졌고, 배따라기는 "아빠와 크레파스", "그댄 봄비를 좋아하나요"등 새로운 창법을 선보였다. 또한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의 아픔을 노래한 "바위섬", 88년에 대뷔한 수와진은 길거리가수로 "파초", "새벽아침"등 참신한 노래를 불렀다. 80년대는 그룹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옥슨80의 "불놀이야"의 기폭제로 신중현의 불후의 명작 "아름다운 강산", 록이 가미된 들국화의 "행진", "그것만이 내세상", 다섯손가락의 "새벽기차"가 신선감을 주었다. 이때 특히 가수들간의 듀엣곡도 성행했는데 이정석, 조갑경의 "사랑의 대화", 홍서범 조 갑경의 "내사랑 투유", 이문세와 고은희의 "이별이야기" 윤수일과 최진희가 "찻잔의 이별"들을 발표했다.
81년 민혜경의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는 발라드의 포구를 열었다. 이후 정수라의 "사 랑이었나", 85년 이광조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선희의 "j에게", "아! 옛날이여", "알고싶어요"를 발표했고 조용필, 이문세, 최성수, 수라, 조하문, 김범룡, 이선희, 유열, 이정석 등이 발라드 음악을 불렀다. 특히 발라드의 확산은 변진섭의 등장으로 더욱 확산됐다. 88년 "홀로 된다는 것", "너에게로 또 다시", "희망사항"등 좋은 반응을 얻었고 89년 김민우의 "사랑일뿐야", "입영열차 안에서", "휴식같은 친구"를 히트시켰다. 이승철은 89년 솔로로 전향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를 발표했고, 이상우는 88년 "슬픈 그림 같은 사랑"으로 좋은 평가를 얻었다. 후반부에는 소방차의 인기도 가히 폭발적이었다. 트로트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임종임, 인순이, 방실이, 현철, 현숙, 나미, 주현미, 문희옥, 설운도, 태진아, 김국환, 송대관 등의 전성기가 있었다. 현숙은 "정말로"라는 노래로 일대 트로트의 댄스바람을 가져다 주었고 소울창법을 인용한 윤시내는 "열애", "DJ에게","공부합시다"등을 발표했다. 이은하의 "봄비", 한울타리의 "사랑의 미로",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등을 불렀다. 코미디언 출신 가수 방미의 "날 보러와요"가 대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이어 주현미의 시대가 80년대 트로트를 풍미하게 했다. 약사 출신인 그녀는 84년 "쌍쌍파티"로 시작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사람"등 주옥같은 히트곡을 냈다.. 특히 주현미와 같은 시기에 문희옥 역시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설운도와 현철 역시 대기만 성형으로 설운도는 "마음이 울적해서", 현절은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으로 10여년의 무 명세월을 씻었다. 또한 송대관과 태진아 역시 그 뒤를 이어 롱런의 히트곡을 계속 내면서 남자 4인방 시대를 열었다. 또한 당신을 애절하게 부른 김정수, 김국환의 "타타타"등으로 발라드와 트로트의 활성이 두드러졌던 때였다.
80년대의 또다른 불세출의 가수를 뽑는다면 단연 조용필이다.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대마초 사건으로 인해 심한 굴곡의 역정을 살았다. 그 이후 80년 "창밖의 여자", "촛불", "미워미워미워", "못살겠다 꾀꼬리", "미지의 세계", 그 유명한 "허공"등 수십곡의 히트곡을 연달아 내보였다. 이외에도 남화용의 "회상", "가버린 추억", "홀로가는 길", 소리새의 "그대 그리고 나", 김상배의 "나이팅게일", "몇미터 앞에 두고"와 김종찬의 "사랑이 저만치 가네", "토요일은 밤이 좋아"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태호의 "미스고"도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80년대의 대중음악은 이렇듯 다양한 장르가 한 시기에 어우러져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유행가요를 양산해 냈다.
90년대 대중음악(1990~97)
발라드의 강세를 뒤로하며 김국환의 "타타타"는 대중음악계의 무대를 휩쓸었다. 김수현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드라마에 삽입된 이 노래는 김국환의 초기 음악 "꽃순이". 동요 "은하철도 999"에 이은 대작이었다. 특히나 여성인권문제가 심화되고 있을 무렵 이 노래는 여성들에게도 많은 지지도를 얻었다. 당시 사회적인 상황은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초기 때였다. 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민주화를 갈망하던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들의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치공세를 펴나 갔다. 전반적인 대중음악계는 발라드는 상승세를 타는 반면, 트로트와 성인층의 노래는 주춤하고 대중음악의 새로운 형태인 랩을 주축으로 레게, 하우스, 테크노, 마이애미, 갱스터, 데스, 모던 록까지 다양한 음악시도를 한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외국가수들의 내한공연이 자주 이어졌고 케이블 TV의 개국과 각종 레코드 및 서적이 유입되면서 청소년들의 복장과 악세서리 등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특히 이 시기에는 댄스음악을 주축으로 하는 그룹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팬클럽의 힘이 거대해졌을 뿐만 아니라 통신의 발달로 PC통신이 발굴한 스타들도 소수 발굴됐다.
89년 나미의 "인디안 인형처럼" 이후 댄스음악의 활로가 분주해졌다. 92년에 이르러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랩댄스그룹이 탄생되면서 음반시장의 수요확산은 이들에게 엄청난 부를 축적케 해 주었다. 특히 가수들의 초상권 및 팬시용품을 전제로 한 이미지 캐릭터 사업도 거대한 시장으로 발돋움케 했다. 또한 신디사이저와 컴퓨터 미디음악 등을 소수 작곡가들과 미디 프로그래머들의 출현으로 연주자, 즉 세션맨들과 안단들의 퇴보가 이어졌고 휴머니즘적인 요소보다는 막강한 자본과 무제한적인 아이디어로 근대 대중음악의 틀을 깨버리는 소위 노래만을 위한 가창활동이 아닌 프로듀서 개념의 "연출음악"이 생성됐던 것이다. 뉴키즈 온 더 블록의 방한 이후 랩뮤직과 강한 멜로디에 춤이 겸비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커다란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이미 이 시기에는 시퀀서를 다룰 줄 아는 윤상, 손무현 등이 청소년들의 또 다른 감성을 파고들어 나름대로의 색깔을 갖춰 나가기도 한 때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서태지 역시 가창만을 하는 가수가 아닌 프로듀서, 엔지니어, 편곡, 자작곡, 연주에 이르기까지 연출자의 몫을 감당해냈다.
94년 가요계에는 대 지각변동이 있었다. 7월경 서태지와 아이들, 뮤, 룰라, 코코, 1과 2 분의 1 등이 강세를 보였던 반면 발라드곡 및 클래식컬한 곡들이 대거 진입, 가요계에 또 다른 이변을 낳았다. 당시 상승곡선을 탔던 가수는 신승훈이었다. 매년 가을 때마다 발라드의 회오리를 일으킨 그는 그해 1백만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 한 곡은 "미소속에 비친 그대", "가을빛 추억", 이풀잎작가가 쓴 "소녀에게", "로미오"등이었다. 4/4분기 초기에는 서태지와 방송프로듀서간의 마찰, 악마찬양설 등으로 서태지의 음반판매고가 다소 뒤떨어졌다. 코코 역시 인기프로의 사회자를 그만두고 인기몰이에 나섰으나 10위권에 머물렀다. 라인음향에 같이 소속됐던 김건모는 영화촬영 문제로 신승훈의 인기를 따라잡지 못했다. 신승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변진섭은 예술성향이 짙은 "니가 오는 날"로 맹추격을 벌였으나 노래가 잔잔하고 작품성에만 의존, 발라드 부문에서는 다소 역부족이었다. 뒤늦게 인기바람을 몰고온 신인 및 중고신인도 대거 등용됐던"마법의 성"은 인기가요차트에서 연속 3위를 차지했다. 잔잔한 선율과 다소 여성스러운 중성의 목소리가 주 매력으로 작용한 이곡은 한동준 1집 때 작곡을 한 김광진의 곡으로 노래도 직접 불러 팬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다. 93년 MBC대학가요제 대상수상자인 전람회는 신승훈을 이은 그룹으로 클래식컬한 멜로디와 화음으로 오디오 매니아들에게 많은 사랑을 얻었다. 젊은층의 가수들 이외에도 중견급 가수들의 활약도 만만치않았다. 패티김과 이미자는 KBS"빅쇼"를 통해 서로의 역량과 가창을 과시했다. 이어진 중견가수들의 활약은 서민들에게도 많은 지지와 박수를 받았다. 조영남을 비롯해 나훈아, 조용필, 이선희 등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가수들이 나와 무게있는 무대를 선보였다. 장외에서는 라이브에 강한 콘서트도 이어졌다. "아침이슬", "백구"등 무수히 많은 히트곡을 낸 양희은은 처음으로 콘서트를 가졌고 10.20 궁정동의 이인중 한사람인 심수봉은 연강홀에서 코러스 가수 장필순은 학전 소극장에서 각각 콘서트를 가졌다. 특히 캐롤송도 반짝하는 음반시장의 성격으로 간간히 취입됐는데 깊이있는 음반은 되지 못했고 몇몇 개그맨들과 코미디언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95년도 대중음악계는 미국의 경우처럼 절대적인 시장경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발전적 인물의 등장과 상업주의의 팽창이 한데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특히 이때는 외국 아티스트들의 내한공연이 봇물을 이루었다. 지난 3월 그리스의 작곡 가 야니가 공연을 했고 리차드 막스의 공연에 이어 딥퍼플, 해리코닉주니어, 올포 원, 본조비, 얼 크루, 어쿠스틱 일케미, 스티비 원더, 케니 G, 팻 메스니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국내를 다녀갔다. 이런 해외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이어지자 국내 음반시장의 규모도 아울러 커지기도 했다. 실제 내한공연을 한 가숟르의 앨범 판매고도 월등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질적인 상황만 고려, 공연장의 안전시설과 음향 및 제반시설의 미약함을 단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국내 정상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1월 11일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고별무대를 마련했지만 9월에는 "컴백홈"이란 곡으로 화려하게 데뷔하기도 했다. 국내 가수들중 활발한 활동을 벌인 가수들로는 이승환, 녹색지대, 박진영, 김건모, 신승훈, 노이즈, 솔리드, 디제이덕, 박미경 등이었다. 상반기까지는 룰라의 전무후무한 실적이 있었고 중반기부터는 리메이크 바람도 한몫 거들었다. 박상민의 "청바지 아가씨"를 비롯해 멍키헤드의 "남행열차", 신효범의 "님아", 공일오비의 "슬픈인연", "단발머리",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등 새롭게 재편곡, 신선감을 주기도 했다. 조덕배는 11월 11일 대마관리법 위반으로 경찰에 구속, 아쉬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가요계에 학구파라고 하는 음악인들도 많이 배출된 해였다. 한충완, 정원영, 유정연, 이병우, 더 클래식, 빛과 소금, 전람회 등은 클래식컬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대중들 앞에 순도 높은 음악을 들려줬다. 특히 12월초부터 불기 시작한 재즈 열풍은 김현철, 이소라, 임상아 등에 의해 가속화됐다. 특히 95년도에는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음반사전심의의 폐지문제가 강력히 대두되었던 해였다.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개정안이 11월 정기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일제시대 이후 60여 년 동안 옥죄어왔던 사전심의제가 폐지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재즈 부문에서는 드라마나 영화, 화장품업계, 심지어 문학계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크나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칙 코리아, 마일즈 데이비스, 빌리 할이데이, 조지 멘슨, 존 포거티, 빌 에반스, 쳇 베이커 등의 음악은 국내 잠식기간을 거쳐 방송음악으로서도 지대한 관심을 갖는 형태로 진전됐다. 96년도에 들어서부터는 안성수가 "영원히 내게"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오랜만에 한영애는 4월 라이브콘서트를 개최 팬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같은 달 "마마스 앤 파파스"의 내한공연이 이어졌다. 5월에는 인켈 아트홀에서 "전람회"의 새로운 앨범에 대한 쇼케이스가 있었다. 5월 11일에는 체조경기장에서 "미스 터 빅"의 내한공연이 이어졌다. 7월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신승훈의 콘서트가 있었다.
10월 들어서는 마이클 프랭스의 내한공연과 같은 달 31일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공연과 11월 20일에는 허비행콕의 공연이 이어지는 등 외국아티스트들의 공연이 활발한 한 해였다. 97년 초기에 오게 되면서 경제 침체로 음반시장 역시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를 못했다. 이소라와 조관우의 새 앨범이 선두권을 차지했고 표절시비로 잠시 주춤했던 HOT가 "캔디", "행복", "위아더 퓨처"등으로 활동을 펼쳐갔다. 유영석이 이끄는 화이트는 가사의 참신성으로 고정적인 팬을 확보했고 HOT에 이은 젝스키스, 영턱스 클럽, 에메랄드 캐슬, 나일론, 넥스트, 김애리, 클론, 지누션, 임창정, 김경호, Ref, 유리상자, 디바, 김종환, 주주클럽, 구피, 유피, 레드 플러스, 유승준, 박진영, 포지션, 부활, 일기예보, 장필순, 자우림, 이승훈, 리아, 이현도, 척, 소찬휘, 주주클럽, 윤도현 밴드, 김원준 등이 대활약을 펼쳤다.
이해에는 최악의 음반시장 침체인데도 불구하고 영화 "접속"의 주제가 사라본의 "사랑 의 송가"는 6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큰 수확을 올렸다. 외국 아티스트들의 내한은 불황의 파장으로 2월 엘자의 공연, 베이비 페이스의 방한, 보이즈 투 맨 방한, 브링크 공연, 10월 9일, 10일 에릭 클랩튼, 유진박 공연이 있었을 뿐 등 예년에 비해 크게 줄어든 편이었다. 특히 97년 11월에는 국내의 금융권의 한파로 IMF로부터 긴급자금을 차임해오는 등 경제의 악순환을 겪었다.
Ⅲ. 결 론
대중 음악역사는 시대마다 영웅을 탄생시켰고,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상황에 영향을 받으며 이어져 왔다.
1960년대는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가 유행을 하면서 노란샤쓰를 입고 운전하는 운전사 들의 모습도 비쳐졌다. 미 8군쇼는 실력이 있는 가수들이 이 무대를 거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해나갔다. 또 이때는 라이도 DJ와 음악다방의 DJ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여 선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종환, 박원웅, 최동욱, 등은 당시에 최고의 DJ로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중창단과 그룹도 결성이 되기 시작하였다. 부르벨즈, 쟈니 브라더스, 에스4 등이 활동 하였다.
70년대는 포크송과 트로트의 활성이 두드러졌다. 특히 정부가 음반에 대하여 간여가 심했다. 포크송의 대부 한대수는 대학가세엇 커다란 유행을 만들었다. 후에 한대수는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요즘은 우리나라에 정착을 하여 음악활동중이다. 김민기는 이 시대의 가장 불운할 가수였다. 발표하는 곡마다 방송불가였기에, 하지만 대학가에서는 정부에 대한 저항가요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연출가로서 활동중이다.
80년대는 역사적으로 파란만장한 시대의 서두를 알리는 시기였다. 민주화의 열풍이 확산되어갔고 12.12사건으로 시민들은 초긴장 상태를 이루었으며 정부에 의한 공연이 치러졌다. 대학가에서 흘러나온 저항가요는 각 기업의 노조나 노동자 집회에서도 많이 불러지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라는 대학생 동아리가 결성이 되었다. 이때 신중현은 "아름다운 강산"이라는 대곡을 가지고 재기에 성공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으며 지금도 꾸준하게 곡을 발표하고 있다. 얼마전에는 "가을 나그네"라는 곡을 발표했다.
90년대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3인조 가수가 등장을 하여 가요사를 다시 쓰게끔 하였다.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공전의 히트를 쳤다. 랩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을 하였고 외국 가수들의 내한 공연이 줄을 이었다. 국악과 중견가수들도 활발하게 활동을 한 시기이기도 하다.
요즘은 가수들의 역량은 뒷전이고 외모만을 가지고 립싱크만을 하는 가수들이 많아서 가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뒤지는 가수가 많다. 괴기스러운 복장, 노출이 심한 의상, 염색한 머리 등 정신세계를 허무는 사조의 파행을 알렸다. 세기말 적인 현상이 일어났으며 그에 따른 파급은 무엇일까? 6~70년대의 언플러그드 음악이 새삼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투박한 악기소리와 열심히 열창을 하는 가수들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이런 것이 세대차이일까?! 무더기로 나와서 춤만을 보여주고 립싱 크로 노래하는 가수들은 줄어들고, 진정한 음악을 할 줄 아는 가수들이 많이 배출됐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램이다.
▶60~70년대◀ (60년대 음악 : 미국 대중가요의 영향) 비틀즈와 미국 팝송, 로큰롤 등이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 주한 미군 계통에서 노래하던 가수가 알려지기 시작 → 윤항기 학사 가수들의 등장 = 최희준, 박형준, 위키 리, 유주용, 김상희, 김수연 등 남녀 보컬그룹의 등장 = 블루벨스, 봉봉4중창단, 쟈니 브러더스 , 김 시스터스 1962년 민간방송국 개국 →전파매체를 통한 대중가요 보급 본격화 65년 한일 정상화 → 엔가풍의 복고조 노래 재등장 = "동백 아가씨"(이미자) <영국 가수들의 미국 시장 상륙> 팝 음악의 흐름을 되짚어보면 우연찮게도 그 시대의 말쯤에는 늘 커다란 사건들이 벌어지거나 음악적으로 큰 획을 긋는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60년대 말에도 어김없이 세기적 음악이슈가 탄생하죠... 1959년 미국의 로큰롤 음악을 가장 백인적인, 그리고 가장 미국적인 대중 음악으로 승화시켜 더욱더 폭넓게 세계에 보급시켰다는 평을 받은 미국 로큰롤 음악의 마지막 보루 버디 홀리(Buddy Holly)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어쩌면 순수 로큰롤 시대를 마감하는 대 사건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미국의 포크 가수 돈 맥글린(Don Mcglean)은 자신의 노래 에서 버디 홀리의 죽음을 가리켜 '미국의 음악도 죽었다'라고 표현했죠. 버디 홀리를 비롯해서 리치 밸런스, 빅 바퍼 등 가장 굵은 로큰롤 스타들을 한꺼번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잃은 미국의 팝 음악계는 6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영국 출신의 그룹 비틀스(The Beatles)를 핵으로 해서 애니멀스, 롤링 스톤스, 더 후 등에 의해 미국의 팝 시장이 완전히 점령되면서 빚어진 일이었습니다. 50년대 로큰롤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 땅에 전해지고, 그것을 듣고 자란 40년대에 태어난 영국의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이 떼를 지어 미국 팝 시장을 석권하면서 60년대 (로큰롤 제 2세대)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들 영국 출신의 로큰롤 그룹들이 미국 내에서 끊임없이 히트곡을 내놓으며 수많은 레코드를 팔자 팝 음악계는 갑자기 솔로 가수의 시대에서 그룹의 시대로 변모해갔습니다. 그 결과 로큰롤 음악의 격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작용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팝 세계는 서서히 '록 뮤직(Rock Music)' 시대로 돌입하게 되죠... 그러나 미국 내에서도 '비치 보이스'나 '몽키스' 같은 미국 그룹에 의해 새로운 음악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는 50년대 초부터 시작한 산레모 가요제가 세계적인 관심을 모아 60년대에는 칸초네의 인기가 가히 세계적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프랑스에서도 미국에서 흘러 들어온 로큰롤의 영향으로 자니 알리데이, 미셸 폴라레프, 실비 바르탕 같은 신세대 샹송 가수들이 록 적인 비트를 가미한 프렌치 팝(French Pop)의 기수로 등장,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습니다. 6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미국 내에서는 소위 아메리칸 모던 포크송의 인기가 최고조로 달했는데, 킹스턴 트리오, 피터 폴 앤 매리, 브라더스 포, 사이먼 앤 가펑클, 버즈, 마마스 앤 파파스, 그리고 밥 딜런, 존 바에즈 같은 포크 음악계의 스타들이 대거 출현해, 통키타와 청바지를 내세운 새로운 청년 문화를 이끌었습니다. 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히피 붐과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출현이었다. 자유와 평화를 표방하며 허례 허식을 집어던지자고 외쳤던 히피이즘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이색적이면서도 아주 중요한 문화 현상이었습니다. 팝 음악 역시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된 이 히피 붐과 함께 나온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타고 서서히 70년대 록 뮤직 시대를 열어 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 60년대 말의 분위기였다. 60년대 말에는 팝 음악계의 중요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는데, 특히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뉴욕주 우드스톡(Woodstock)에서 벌어진 록 음악 페스티벌이 대표적이며 깨지지 않는 신화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반전, 사랑과 평화, 공동체와 약물, 그리고 록 음악이 전부인 히피들의 마지막 낙원이었습니다. 또한 6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의 총 결산이죠.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대중음악의 주요 장르들이 모두 60년대에 생겨나거나 개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60년대는 파격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대였으며, 이상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시대였다는 점, 그리고 기존 체제에서 억압받던 자들에 의한 저항의 시대였기 때문이죠! (70년대의 청년문화와 대중가요) 이탈리아의 칸초네에서 미국의 팝송, 컨트리송,하드록 등이 젊은 세대를 열광시킴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시대 → 외국가요의 전성기 살롱뮤직의 전성시대 → 신시사이저(synthesizer)음악 시작 대중가요가 매스컴의 각광을 받음 → 젊은 송 라이터들 출현 => 송창식, 윤형주, 박인희, 이필원, 양희은, 김민기, 조영남 등의 시대 -> 산업화, 대도시화에 대한 저항의 노래 시작 베트남전쟁을 전후해서 동남아시아와 멀리 유럽이나 미국 등지로 유능한 가수들 해외진출= 패티 김, 윤복희, 이연옥, 곽순옥, 김성옥, 로라 성 등 한국 대중음악의 국제화 = 70년에 도쿄[東京] 세계가요제 입상 ->《안개》(이봉조 곡, 정훈희 노래) 이후, 계속해서 그리스·칠레 등에 한국가요의 진출. -> 대표적인 작곡가 = 이봉조, 길옥윤, 김강섭, 김기웅, 정민섭 등이 활약 _> 박경희, 정미조, 김상희, 혜은이 등이 입상 78년부터 서울에서 개최하는 국제가요제, 세계가요제 등은 세계 각국에서 16개국 이상이 참가하는 연례행사로까지 발전 77년 이후 광복 30여 년 만에 한국가요의 일본 상륙 등 새로운 양상 -> 이성애, 이미자, 김연자, 허영란, 남상규, 문주란, 정재은, 남진, 나훈아 등 의 레코드 매출이 큰 성공을 거둠 70년대 들어면서 부터 더 유명한 노래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퀸의등장.. 비지스,아바, 섹스 피스톤스,이글스 등.. 퀸 유명한 노래는 We are the champions 보헤미안 랩소디, We Well Rork You, Too Much Love Will Kill You 가 있죠..;; 그리구.. 비지스의 노래 How Deep is your love Hoilday (인정사정 볼것 없다 의 OST죠..) 아바 노래는 우선 댄싱 퀸은 기본이고요..;; Honey Honey ,I Have a Dream,Chiquitita 등이 있겠구요.. 카펜터스의 Top of the world두 있구요.. 8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 많은 음악들이 공존했던 바람직한 시대였고, 라이브의 강자들이 방송출연을 하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놀라운(?) 시기이기도 했다. 김현식, 들국화, 한영애, 봄여름가을겨울, 동물원 등이 TV를 통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었음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 80년대 유행곡 입니다. ] 조정현-그아픔까지 사랑한거야 이문세-광화문 연가 김현식-비처럼 음악처럼 김동환-묻어버린 아픔 안치환-사랑하게 되면, 내가 만일 이선희-J에게 박미경-민들레홀씨되어 그리고..80년대는 마돈나와 마이클 잭슨을 빼놓고는 팝음악을 말할수가 없겠죠.. 80년대는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 이 나왔죠.. 60년대 음악과 음악 배경 같은 것이 다른것을 알수있죠.. 마이클 잭슨의 유명한 엘범 'Thriller' 앨범 37주간 빌보드 차트 1위 및 5000만장 판매하며 팝 음악의 황제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Beat it,Billie Jean .. 대단하죠 마돈나는.. Like A Virgin 으로 유명하죠.. 90년대의 우리나라 가요는 서태지의 등장으로 인해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국내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장 활동을 많이했으며 인기도 최고였었죠. 그때는 서태지 열풍이 불어서 모두들 콘서트장에서도 더 앞에서 볼려고 하다가 사람들 많이 발에 깔려 죽은일도 있었으며 해체 한다는 소식에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죠.. 공일오비, 솔리드, 모노.. 도 그때 한창 인기 절정이였습니다. 90년대 초반 들어서 신승훈, 이승환이 등장했다.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많은 연예인들이 사라진 지금 그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발라드의 황제, 왕자 등으로 불리면서 말이다. 또 그 뒤에 등장한 김건 모. 김건모는 '핑계' '잘못된 만남' 등의 앨범을 통해 국내 음반판매에 있어서 새로운 기록들을 습니다. |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출력해 쭉 읽어 보렵니다...공부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