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제자(3) - 요한 / 눅 9:49-50
성경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여럿 나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입니다. 이 사람을 ‘세례요한’이라고 구별해서 부릅니다. 다음에 나오는 사람이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 요한입니다. 이 사람을 ‘사도요한’이라고 구별해서 부릅니다. 그 외에도 사도행전에 몇 사람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마가라고 하는 요한입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아버지도 요한이고, 공회원 가운데도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요한은 ‘자비로우신 여호와’라는 뜻의 ‘예호하난’의 줄임말인 ‘요하난’에서 온 이름입니다. 그 뜻이 좋아서인지 당시 유대인들이 이 이름을 많이 지어 불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렇게 많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요한이라는 이름이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인들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각 언어권에서는 자기네 언어로 이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John(영어, 잔, 존), Johann(독어), 괴테, 바흐 등이 다 요한입니다. Jean(불어, 장), 빅토르 위고가 쓴 프랑스 소설 ‘레미제라불’의 주인공 장발장이나 칼빈도 장 깔뱅(Jean Calvin)입니다. Jan(폴란드, 체코, 얀), Juan(스페인, 호안), Ivan(러시아, 이반), Giovanni(이태리, 죠반니), Hans(덴마크), 그리고 우리나라는 요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미국에 ‘peter(베드로)’라는 이름이 30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John(요한)’이라는 이름이 6백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이름을 따라 지어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도요한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의 신앙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마음에서, 그 이름을 이렇게 지어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팀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팀원들의 면면을 보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께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불러서, 열둘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어 전도도 하게 하시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셨습니다. 막 3:13-15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이 세운 열두제자의 명단은 이렇습니다. 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베드로와 야고보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요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형 야고보와 함께, 핵심 제자 삼인방에 속합니다. 제자 중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히브리어 ‘요하난’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시몬은 히브리어 시므온에서 왔고, 야고보는 야곱에서 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이란 이름의 뜻은 ‘자비로우신 여호와,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그의 이름 그대로, 예수님께 특별히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요 13: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9:26절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의 가족에 대해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① 먼저는 아버지 세베대가 있습니다. 세베대는 평범한 어부가 아니라, 품꾼을 거느린 선주였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알고 지낼 정도로 유력한 사람입니다. ② 그리고 어머니는 살로메입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동생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님과 외사촌지간이 됩니다. ③ 또한 요한에게 형도 있었는데 야고보입니다. ④ 요한은 열두 제자 중 막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요인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요한은 일찍이 세례 요한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요 1:35-39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기존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들이 믿는 방식을, 맘에 내켜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다분히 전통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영적이고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생활을 단순히 동경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하루는 스승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그 길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안드레가 형인 베드로를 전도했듯이, 요한도 형인 야고보를 전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후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각자 생업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소개를 받고 예수님을 따라간 거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안에는, 이미 예수님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께 받았던 깊은 인상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막 1:16-20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먼저 베드로 안드레 형제가 부르심을 받았고, 이어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아버지를 품꾼들과 함께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많이 가진 자가, 버릴 것도 많은 게 당연합니다. 그때 선택해야 합니다. 가진 것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가진 것을 버리고라도, 예수를 따를 것인가? 결국 신앙이란 자기 안에 가치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소유에 가치를 둘 것인가, 예수에 가치를 둘 것인가? 예수님에게 최상의 가치를 두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덕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덕 보려고 예수 믿으면, 중도에 탈락할 수 있습니다. 또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형제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물을 버린 것과, 야고보 요한 형제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아버지와 품꾼을 버린 것 중에, 어떤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까? 사실상 같다고 봐야 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나, 야고보와 요한 형제나, 예수님에게 최상의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들이 버린 것의 가치의 크기를 따지는 것은 별의미가 없습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보니,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니 별 기대를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실수가 없으십니다. 롬 11: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그분의 손에 이끌리기만 하면, 그 계획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요한은 성격이 형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막 3:17절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형제라고 성격이 꼭 같은 것은 아닙니다. 쌍둥이 형제인데도, 성격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형 야고보와 성격이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형제를 묶어서,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붙이셨습니다. 형제는 열정이 과했고, 거기다 목소리도 얼마나 크던지 천둥치는 거 같았습니다. 열둘 중에 한 명만 있어도 힘든데, 형제가 그랬습니다. 거기다 베드로도 한 성질하지, 열심당원 시몬도 있지, 또 가룟 유다도 있지, 열두제자 공동체가 조용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열정으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세 사람이, 핵심제자 삼인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정의 사람을, 자신의 최측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냉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냉소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냉정과 냉소는 좀 다릅니다. 냉정은 생각이나 행동이 감정에 죄우되지 않고 침착한 것을 말하고, 냉소는 쌀쌀한 태도로 비웃는 것을 말합니다. 냉소적인 사람은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쓰임받기 어렵습니다. 냉정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 열정적으로 변한 후 쓰임 받을 수는 있습니다.
요한은 열정이 과한 면이 있습니다. 눅 9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좀 멀더라도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돌아서들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고자, 먼저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보인 반응이 이랬습니다. 눅 9: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쯤 되면 분노조절장애에 해당합니다. 막 9장에 의하면, 요한이 12제자가 아닌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잘했다고 칭찬하실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두의 예상을 깨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막 9:39-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이 사건으로 볼 때, 요한의 성격은 포용적이지 않았습니다. 하긴 열정적이면서 포용적이기까지 합니다만, 그건 쉽지 않습니다. 열정은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입니다. 열렬한 애정을 가지면, 눈이 멀게 됩니다. 열중하는 그것밖에 못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열정적인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은 후에 사랑의 사도가 됩니다.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사랑의 사도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요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 3: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이, 과격하고 편협한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에베소에서 전도를 하다가 붙잡혀 독사 굴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살아나고, 또 끓는 물에도 던져졌지만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한은 제자의 증거로 서로 사랑을 들었습니다. 요 13:34-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제자에겐 제자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제자라는 것을 보여줄,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안 보여줘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게 있어야 합니다. 그걸 요한은 ‘서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제자의 자격 요건을,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제자가 갖추어야 할 구비 조건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가장 결정적인 자격요건으로, 서로 사랑을 들고 있습니다. 다른 게 좀 부족해도, 이것만은 구비해야 할 조건으로, 서로 사랑을 들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적용하면, 서로 사랑이 안 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입니다. 서로 사랑에 무관심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 주장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요일 4:20-21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형제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마태가 위대한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했다면, 요한은 새계명으로 서로 사랑을 말했습니다. 사실상 위대한 계명과 새계명은 같은 것입니다. 요한이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외치다 간 이유입니다. 보아너게도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레의 아들도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단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가능합니다. 이게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요한은 유독 베드로와 짝을 이루어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열둘 중에, 베드로가 가장 나이가 많고, 요한이 가장 어립니다. 큰형님과 막내 사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두 사람이 환상적인 콤비를 이루었는지 모릅니다. 베드로가 큰형으로서, 막내를 잘 챙겼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요한이 막내로서, 큰형을 잘 따랐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길 원하셨습니다. 그럼 유월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유월절 준비를 위해, 예수님이 두 사람을 보내십니다. 그때 선발된 두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눅 22:7-8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예수님의 핵심제자로 삼인방을 말하지만, 두 사람만 말한다면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그 두 사람은 예수님이 가장 신뢰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실 때도, 두 사람을 보내십니다. 막 11:1-2절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네 개의 복음서 어디에도, 두 제자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추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도 가장 믿을만한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문 받을 때, 가까이 갔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요 18:15-16절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는 순간, 다른 제자들처럼 이들도 도망쳤습니다. 그러다 베드로는 돌아와 예수님을 멀찍이 따랐고, 그후에 대제사장을 아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이 심문 당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때 빈무덤을 확인 차, 부리나케 달려갔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요 20:3-8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그 두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을 치유할 때도, 두 사람이 함께 했습니다. 행 3:1-5절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그 두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했는데, 그 중 한 곳이 사마리아입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은 확인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파견한 두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행 8:14-17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이쯤 되면 베드로와 요한은, 영혼의 콤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있어 요한이 있고, 요한이 있어 베드로가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최고의 파트너이자 최고의 라이벌이었습니다. 주의 일을 할 때나, 생업 활동을 할 때나, 취미 생활을 할 때도,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다면 좋습니다. 물론 누구와도 완벽하게 맞을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오래 몸을 섞고 살아 온 부부도 삐걱 거리는데, 자기 뱃속에서 나온 자식하고도 안 맞는데, 타인과 완벽하게 맞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뜻이 맞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비전이 일치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동역자를 붙여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동역자보다 더 필요한 사람은, 믿음의 동무이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입니다.
요한은 후에 에베소에서 사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베소에 가면, 지금도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살던 집이 보전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에베소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요 19:26-27절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동생들도 있고, 또 다른 제자들도 있는데, 왜 하필 요한에게 부탁하셨을까요? 요한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만큼 신뢰할 말한 제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90이 넘도록 살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면서, 에베소에서 복음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에베소에서 남서쪽으로 90km 떨어진, 밧모섬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밧모섬은 로마제국시대에 종교·정치범을 귀양 보냈던 유배지였다고 합니다.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18개월 정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그가 밧모섬에 유배를 가기 전, 그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박해도 받았고, 실제로 죽음의 자리에 이르기도 했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살려주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에 비해, 30년 정도를 더 살았습니다. 그건 그가 요한계시록을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계 1:1-3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 1: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실제로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다 쓰고는, 트라이안 황제 때 밧모섬에서 에베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것 보면, 박해자들이 요한을 밧모섬에 유배를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밧모섬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교회로 보내셨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가정으로 보내셨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일터로 보내셨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기의 요셉처럼 말입니다. 창 45:7-8절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한은 에베소에서 노쇠한 몸을 이끌고, 죽는 순간까지 말씀 사역에 힘쓰다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 품에 안겼습니다. 요한은 AD 100년 경, 자신을 사랑하시는 자 곁으로 갔습니다. 말년에는 박해를 너무 많이 받아 몸이 상해서, 들것에 뉘어져 제자들에 의해 모셔졌다고 합니다. 주일이면 간신히 버티고 앉아서, 매주 같은 주제로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했다고 합니다. 좋은 설교지만 똑같은 설교를 듣다보니 좀 그래서, “선생님, 이번 주일에는 새로운 설교를 해 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소자들아, 새로운 설교를 하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사랑을 외치다가, 사랑 가운데서 죽어간,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설교,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소자들아, 새로운 설교를 하노니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오늘도 우리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사람들로 인해 화가 치밀 때는, 인류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신 것을 기억하면서, 그 대상이 누구이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거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크신 사랑의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성령이 그분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채주실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 13: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의 삶이 되어서, 십자가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며 증거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귀한 자로 부르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건져내어, 아름다운 덕을 비추는 예수님을 사모하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모든 성도들은 사도 요한처럼, 뒤에서 사랑과 생명을 공급하는, 고품격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도 요한처럼 우리의 남은 날 동안 더 사랑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에 매여 살게 하옵소서. 늘 그 사랑에 매여, 귀를 기울이게 하옵소서. 그 사랑에 매여, 끝까지 주를 따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와 권세있는 삶, 세상을 이기는 지혜와 능력있는 삶, 그리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복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며, 증거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