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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
머리말
지각의 장을 넓혀야 관계지움이 가능해진다
괴벽
대학원 학급의 단합대회 토크쇼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회자가 웃으며 “교수님의 대학 성적은 어느 정도입니까?”하고 물었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에 돌아와 강단에 설 정도면 공부벌레, ‘올 에이’였을 것이라고 생각 했던 모양이다. 나는 대학시절에 학교 성적엔 큰 관심이 없었다.
자유로운 토론과 비평이 허락되는 강의를 좋아했던 탓에 받아 적고 암기하는 식의 공부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필기조차 거의 하지 않는 내 ‘괴벽’은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배움을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강의를 귀담아 듣고, 핵심을 찾아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핵심 개념들을 상호 관련지었다. 논문형태의 글쓰기를 좋아했다.
이 같은 괴벽이 상당히 괜찮은 학문탐구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태평양을 건너갔을 때였다. 내가 미국에서 밟았던 석박사과정 교육은 대부분 강의 내용과 필독서에 대한분석과 비평 활동을 중시했다. 언어 과목 외에는 대부분 제출한 논문과 수업시간의 비평적 토론을 바탕으로 성적을 평가했다. 상당액의 사립대학 수업료와 생활비를 장학금으로 제공받으며 학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면 이 괴벽 덕분이었다.
모교로 돌아와 강단에 섰을 땐 흥분과 기대로 가득 찼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 학생들의 공부 방식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모두들 받아 적기에 바빴다. 고기 잡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는 잘 요리된 생선을 입에 넣어 주기 바라는 듯했다.
나는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다. 무조건 외우려 하지 말고 강의를 귀담아들으라고 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핵심을 파악하며, 서로 관련지어 한 줄로 꿰어 보라고 했다. 비틀거려도 스스로 걷고, 몇 마디를 써 도자기의 생각을 또렷이 제시하는 학생을 높이 평가했다.
논지 중심의 비평적 사고가 학문활동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논지십훈(論旨十訓)이란 것을 만들어 가르쳤다. 논지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를 소개했다. 각 학과목에 짧은 논문 한편을 요구하면서 논지가 분명한고 그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좋은 성적을 주지 않겠노라고 했다. 그래서 인지 학생들은 내게 ‘논지교수’라는 영광스런(?)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작 학기말고사 시험답안지, 학과목 과제논문, 학위청구논문을 받아들었을 때, 내가 누누이 강조했던 것이 잘 먹혀들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잘 따라 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전혀 고려하지 않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대학교육의 총아
대학ㆍ대학원 학습은 국내외 할 것 없이 모조리 ‘쓰기’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이르게 된다. 예술을 포함하여 몇몇 분야는 예외이지만, 특히 인문ㆍ사회계 대학원의 학습은 내내 논술형 시험과 논문쓰기로 진행된다. 입학시험 논술에서 학위청구논문에 이르기까지 학술적인 글쓰기로 시작하여 학술적인 글쓰기로 마치는 셈이다. 글쓰기가 주죽을 이루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논문쓰기는 창의성과 합리성을 포함한 고급 인지능력의 총아이면서, 아울러 그것을 배양하고 계발시키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가진 학문의 종합비타민이다.
서양의 대학은 전체 학생이 수강할 수 있는 통합과목인 논문쓰기(Creative Writings)를 개설한다. 또는 비평적 사고(Critical Thinking)라는 과목에 포함 시켜 가르치기도 한다. 수필, 산문, 소설, 시 등을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주를 어떻게 달고, 참고문헌 목록을 어떻게 만들며, 구두점을 어느 경우에 찍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을 비평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며 감추어진 가정이나 문제점을 발견하고 추적하도록 가르친다.
미국의 대학원은 논문쓰기 훈련소이다. 특히 세미나로 진행되는 박사과정은 정해진 시간 안에 주제 논문을 써서 발표하고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이 주 과업이다. 논지찾기, 논지설정, 논지서술, 논지입증, 논증방법을 배우고 주장의 옳고 그름과 정당성을 따지며 건전하고 타당한 판단을 내리는 법을 거듭 훈련한다.
우리나라 대학은 대개 논문작성법이라는 과목을 개설한다. 그러나 그것을 수강해도 실제 논문쓰기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논문이라는 것은 주를 어떻게 달고, 구두점을 어떻게 찍는가를 안다고 하여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교육의 목적은 직업적인 생산력을 갖추도록 도와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려 깊고 탐구적 이고 통찰력 있는 원숙한 사람, 유능한 시민을 만드는 데 있다. 최선의 대학교육은 학생들에게 백과사전적인 지식전달, 언어훈련,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니다. 과학도가 예술을 음미할 수 있고 예술학도가 과학을 이해할 수 있고 신학도가 학문을 하는 방법을 익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교육과 연구의 가치는 단편적 지식 전달과 눈에 보이는 경제적 이익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학에서 철학, 논리학, 논문작성법조차 수강하지 않고 졸업을 하기도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 대학원생들은 거의 빠짐없이 가정, 직장, 학교를 오가면서 공부를 한다. 교수에 대한 학생 비율이 높은 처지에서 교수의 개인지도를 받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한두 시간의 지도를 받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교수는 기껏해야 자기 주변을 맴돌거나 지도를 맡은 제한된 숫자의 학생들만을 가까이 할 뿐이다.
아킬레스의 힘줄
나는 우리나라 대학생, 대학원생들의 이러한 욕구를 채워 주려고『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를 썼다. 학과목 과제논문에서 박사학위 청구논문에 이르기까지, "논문을 어떻게 작성할 것인가”와 “논문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함께 제시한다. 논문쓰기는 “비평적 생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학문은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내가 대학ㆍ대학원에서 한 학습경험, 국내외 학술지의 편집인 경험, 몇 년 간의 전문직 경험, 10년 동안의 교수로서 겪었던 경험을 살렸다. (1) 논지 중심의 비평적 사고, (2) 논지 찾기와 논지설정, 그리고 (3) 논지입증을 위한 논증방법에 초점을 두었다. 해석학적 특질을 고려한 독서법과 본문생산 전략을 소개하고, 문장, 문단, 문체, 수사법을 포함시켰다. 컴퓨터—영상시대의 문헌 인증방식, 문서작성기(Word Processor)로 논문 만들기, 인터넷으로 자료찾기 등도 다루었다. 영상문화의 활성화로 글쓰기가 주변으로 밀려나가는 등의 변혁을 겪고 있는 시대에, 어떻게 인문적 상상력으로 자신의 이해와 주장을 논술문이나 논문쓰기로 연결시킬 수 있는가를 소개한다.
마지막 부분에 실은 ‘인증ㆍ참고문헌목록 보기’는 사카고 스타일(Turabian Manual, 제6판, 1996)에 따른 것이다.1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이 문형은 우리 학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대학출판사들이 펴낸 ‘논문작성법’들은 한결같이 1960년대의 시카고 문형을 따르고 있다. 1996년 개정판은 인터넷과 더불어 시작된 초고속 정보시대와 영상시대에 걸맞은 인증법을 제시하고 있다. 정보서비스 기관을 통해 얻은 자료,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다큐멘트, 악보, 녹음테이프, 비디오테이프, 연극, 그림 등을 처리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개정판의 인증은 지난 것보다 훨씬 간편하다. 약기의 방식도 간편해졌다. 예컨대 약기 문자 op. cit., loc. cit., p., pp. 등을 생략하고, p.와 pp.는 특별한 경우에만 쓴다.
프래트대학에서 광고(Communication Design)를 공부하는 아들 평화에게 적절한 삽화 몇 개를 그려 달라고 초고를 내밀었더니, 녀석은 ‘아킬레스의 힘 줄’을 건드렸다. “원, 요즘 세상에 누가 이렇게 두꺼운 책을 사 본답니까?” 표현의 경제성 원칙을 따진다면 부피가 크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독(毒)은 때로 약(藥)으로 쓰이기도 한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보물섬』,『괴도 루팡』,『얄개전』, 『오성과 한음』등을 즐겨 읽었다. 너무도 흥미진진하여 밥 먹는 일도 잊을 정도였다. 도서관에서 『얄개전』을 읽다가 실내에서 소리 내어 웃는다고 꾸중을 들은 일도 있다. 비평적 사고, 논증방법, 논문쓰기도 이처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은 대학시절부터 나에게 주어진 특별한 숙제였다. 이 책이 두꺼워진 가장 큰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각의 마당을 넓혀야 관계지움이 가능해진다.
밥솥의 밥은 부글부글 끌어 올랐다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뜸이 들어야 한다. 김치, 된장, 젓갈도 숙성기간을 거쳐야 제 맛이 난다. 마음의 정서적 공간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배움이 시작된다. 시시콜콜한 이야기, 예문, 삽화를 곁들인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책의 부피를 차지하는 것 들은 보물섬으로 가는 결코 수월하지 않은 여정(旅程)에 여유와 활력을 제공하고, 창백해지기 쉬운 논리의 고갯길을 웃음으로 넘어가도록 도울 것이다.
논지중심의 비평적 사고를 높이고, 고정관념을 깨는 획기적인 생각과 왕성한 상상력을 촉진하며, 또 사고의 길을 뚫고 폭을 넓혀, 수정처럼 맑고 고래등의 심줄처럼 두드러진 논지를 가진 논문 쓰기를 지도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학생 스스로 연구 과제를 찾고 그것에 숨어 있는 왜(why)를 해결하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위해 정보를 어디에서(where), 어떻게(how) 찾아낼 것인가를 지도한다. 주제ㆍ문제를 발견하는 능력, 내용ㆍ소재를 조직하고 구성하는 능력, 의도ㆍ목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표현하는 능력, 근거를 제시하고 결론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갖도록 할 것이다. 설교, 강론, 설법, 변론, 강연, 논술형 시험, 기말 시험에도 적절한 도움을 줄 것이다. 논리적 사고와 비평적 통찰의 결정체인 논술문 쓰기를 익혀야 하는 고등학생과 그것을 지도하는 부모나 교사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Ⅰ. 비평적 사고와 논문쓰기
암행어사 이몽룡
비평적 사고
논문
본문생산 조건
논문의 맛과 영양소
진짜 실력은 비교, 분석, 종합, 유추, 판단, 응용과 같은 고급 사고 능력이다.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정보를 분류하고, 습득한 개념의 상호 관계를 따져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것들을 상호 관련짓는 관계지움 능력이다. 비슷한 상황에 그것을 적용하는 문제 해결 능력이다. 일정한 법칙을 발견하여 일반화하고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며 예측하고 구상한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다.
1. 암행어사 이몽룡
1.1 한국 전통 소설의 백미『춘향전』
한국 전통 소설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춘향전』의 클라이맥스는 어사또 출두 장면이다.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한 이몽룡이 암행어사로 임명을 받자마자 연인 춘향을 구출하려고 한양에서 전라도 남원까지 단숨에 달려간다. 판소리, 연극, 영화 가릴 것 없이 모두 이 극적인 대목에 초점을 맞춘다.
어사또 일어서며, 좌우로 살펴본다. 청패역졸(靑具釋卒) 수십 명이 구경꾼같이 드문 듬성 늘어서 어사또 눈치를 살필 적에, 청패역졸 바라보고 뜰 아래로 내려서며, 눈 한 번 꿈쩍, 발 한 번 툭 구르고 부채짓 까딱 허니, 사면의 역졸들이 해 같은 마패를 달 같이 드러내고 달 같은 마패를 해같이 드러내고 좌우에 우루루루, 삼문을 후닥닥! “암행어사출두(暗行御史出頭)요!”(국립국악원 편, 『춘향가』)
춘향은 지방관리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옥에 갇혀 죽음 직전까지 간다. 풍전등화 같던 그의 운명은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난 연인 이몽룡의 청천벽력 같은 호령과 더불어 극적으로 전환된다. 숨 막히는 긴장과 초조, 절망적인 상황은 통쾌한 복수의 상황으로 바뀐다. 이별할 때 춘향이 이도령에게 준 옥지환을 보자마자 “아이고 서방님!” 하며 그 자리에 엎드러져 정신을 잃는다. 관객, 독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걱정을 내려놓는다. 응어리진 서러움을 삭히며 쌓였던 한을 푼다.
『춘향전』은 오랜 세월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 왔다. 이는 한국인의 정서에 그 만큼 잘 어울리는 소재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극적인 대목엔 두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첫째는 암행어사가 첫 직무 수행을 고작 자신의 연적(戀敵)을 숙청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국가의 녹(綠)을 받으며 비리척결의 임무를 부여받은 공직자가, 수많은 척결사항을 두고서 전라도 남원까지 단숨에 달려가 고작 자기의 연적 변학도를 타도한 것이다. 과연 이것은 정당한가? 남원에 있는 한 지방관리의 비행도 암행어사의 사찰(査察) 대상이기는 하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공인으로서, 중앙국가 공무원으로서 우선적으로 척결해야 할 사건이었는가? 둘째는 이몽룡은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해야할 공직자로서 암행어사라는 공직, 공권을 이용하여 사적인 원한을 갚았다는 점이다. 비리를 척결해야 할 자가 비리를 저질렀다. 오늘날 정부의 감사원장이 이러한 비리를 저질렀다면 국민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의 정서는 이 같은 암행어사 이몽룡의 행위를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공권을 이용한 연적 척결에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수탈에 억눌리며 말 못하는 고통을 받아온 백성들은 논리적 타당성 같은 것을 문제 삼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벼슬아치들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는 마당에 억눌려 살아온 백성이 그것을 따지고 나설 까닭이 없다. ‘암행어사 출두’와 더불어 맺힌 한을 풀고, 심리적으로 통쾌한 복수를 하는 것에 견주면 어사의 행동이 얼마나 정당한가, 민주적인가, 윤리적인가 하는 그런 비평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국경이 없는 정보시대, 인터넷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합리성, 타당성, 민주의식이 결여된 암행어사 이몽룡의 행위를 곱게만 볼 수 없다. 비록 이 문학 작품의 초점이 반상(班常)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 계급타파, 평등사상에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합리성을 추구하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논문쓰기에서 가장 기본 조건이 되는 비평적 사고란 이런 것들을 한번 생각해 보고 따져 보는 정신활동이다.
이몽룡의 행위를 흔히 있을 수 있는 일 또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우리의 정서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시내에서 자동차를 운전할 때 무례하게 노선을 변경하는 것이 그 한 예이다. “내일 일은 나 몰라요”하는 식으로 갑작스럽게 끼어든다.
금방이라도 접촉사고가 날 것만 같다. 머리 부분을 일단 들이밀고 나서 상대방이 물러서도록 위협한다. 노선변경은 신호를 먼저 보내고 상대방이 위협을 받지 않을 정도의 거리와 여유를 갖고 해야 함에도 그런 합리적 과정은 무시한다. 고속도로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차가 제한속도를 유지하고 달리는데도 느리게 간다고 뒤에서 빵빵거리며 비키지 않는다고 으르렁댄다. 전조등을 켰다 껐다 야단이다.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상대방을 위협하는 범죄(assault)이다.
서양에서는 즉각 경찰에 체포될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예사롭게 여긴다. 시비가 벌어지면 대체로 잘못한 쪽의 목소리가 크다. "왜 비켜 달래도 안 비키는 거야?”, "정말 잘났다. 잘났어!” 서양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보험제도가 잘 정착되어 있고 모든 것을 법정에서 끝장내는 데 익숙한 서양인들은 얼굴을 붉히고 싸울 까닭도 없겠지만, 되도록 감정적인 대립을 피하고 매사를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풀려는 태도는 분명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점이다.
길거리에서 멱살을 잡고 싸우는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어릴 때 본 독사가 떠오른다. 친구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개구리 잡기나 참새 잡기도 했고, 뱀 잡기도 했다. 뱀을 보면 버럭 겁이 나지만 잽싸게 꼬리를 붙잡아 땅 바닥에 후려치면 쭉 뻗는다.
화를 잘 내는 독사는 더 쉽게 잡을 수 있다. 검붉은 뱀이 독기를 품고 나타나면 막대기를 가지고 놀리기 시작한다. 화가 잔뜩 난 독사는 몸의 전반부를 수직으로 세운 뒤 달려온다. 막대기에 후려 맞기 알맞은 자세이다. 이때 막대기로 독사의 목에 일격을 가하면 폭삭 거꾸러지고 만다. 목이 떨어지기도 한다.
국제회의장에서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약소국가의 대표들이다.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착취당하고 짓밟히고 그래서 울분이 목까지 찬 사람들이다. 그러나 화를 내도 눈도 꿈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백인들이다.
어릴 때부터 냉철한사고 훈련과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 온 나라사람들이다. 그들의 나라는 작아도 국제 사회에서 발언권은 세다. 화를 내면서 고성을 지르고 맺혔던 울분과 적대감을 폭발하면 속은 시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만사를 망치는 일이며,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이다.
이몽룡의 행위를 문제 삼지 않고, 자동차 노선을 무례하게 변경하고, 길거리에서 멱살을 붙잡고 싸우는 것을 보고서도 예사롭게 여기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겠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또 그렇게 할 지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 아닌가 싶다. 인간에게는 다른 창조물과 견줄 수 없는 이성적 능력이 있다.
이성적 존재란 문제를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순리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존재란 뜻이다. 사람의 마음은 시시콜콜한 정보들이 꽉 들어찬 정보은행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말, 생각, 행위, 글 등이 논리적이며 체계적일 때, 우리는 그것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일컫는다.
인생만사가 다 합리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감정과 힘으로 처리해야 할 일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포옹을 하고, 아내나 남편을 즐겁게 해 주는 일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만원 지하철 전동차와 버스를 탈 때는 힘으로 밀고 들어가야 한다.
한시도 북한과 군사적 긴장을 늦추지 않는 상황에서 북녘의 굶주린 동포들을 돕는다는 것은 합리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인도주의적 차원이 아니고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합리적인 것이라고 하여 모두 다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올바른 신념체계, 가치 지향적 태도 그리고 윤리성이 결여된 합리성은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정연한 논리의 숲속엔 항상 아름드리 모순이 자란다. 우리가 논리, 합리, 지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때로 독단과 아집과 그릇된 신념의 거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논문이라고 하는 것은 합리성과 논리에 호소하는 의사전달 수단이다.
논문이 “친구 따라 강남 간다”, “홧김에 서방질한다”, "X로 밤송이 까라”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불난 데 부채질한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는 식의 논증으로는 ‘씨’가 먹히지 않는다.
1.2 책상 앞의 호랑이
거지 면허증을 받은 사람이 있다. 미국 뉴욕 시가수년 전에 그것을 발부했다.
제임스 벤하(James Benagh) 씨는 오래 전부터 뉴욕 번화가인 맨해튼 42번가 시외버스 정류소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다. 각설이 타령과 비슷한 일장 연설을 한 뒤에 모자를 벗어 내밀며 구걸해 왔다.
매일 수백 명, 수천 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지나가는 장소에서 누더기 옷을 걸치고서 구걸했다. 경찰은 그의 행동이 위대한 뉴욕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내쫓았다. 그러자 벤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정 투쟁의 승리는 그에게 돌아갔다.
패소한 뉴욕시는 궁여지책으로 그에게 거지 허가장을 발부했다. 허가장에는 활동 장소와 ‘근무시간’이 명시되어 있다.
벤하가 법정 투쟁을 벌인 근거는 미국 헌법이 규정한 언론의 자유이다. 변호사는 비록 거지의 구걸 연설이라고 할지라도 언론의 자유는 보호되어야 한다고 호소했고, 판사도 그것이 옳다고 선언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정신을 재확인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시민도 나름대로 살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벤하의 전례가 생기자 거지 면허증 신청자가 잇따랐으며, 30명 이상의 거지들이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미국의 한 어린이가 우리나라의 유명 가전제품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전자 오븐을 구입한 가정의 이 아이는 목욕시킨 고양이를 그것 속에 넣고 말리려다가 고양이를 죽였다. 아무리 어린애가 한 일이라도 상식 밖의 일이다.
그러나 소송에서 승소한 것은 원고였다. 그 아이의 주장은 사용설명서에 생명체를 그 안에 넣고 전원을 켜면 생명체가 죽게 된다는 문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해괴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법정은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아이의 승리를 선언했다.
패소한 가전제품회사는 고양이 값뿐만 아니라 애지중지하던 동물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받았을 심리적 고통과 슬픔에 대한 보상도 톡톡히 치렀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이 더불어 살아가야 할 오늘날의 지구촌 모습이다.
선진국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기술을 배운다. 미국은 국민 3백 명당 변호사가 한 명 꼴이다. 소송이란 것은 본디 말로 따져보는 해결책이다.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이다.
우리 사회에서 소송이라는 것은 인간 말단의 천박한 해결수단이다. 정으로, 이해로, 대화로 풀려고 노력하고, 더 이상 어떤 방법이 없을 때는 체념해 버리든지 아니면 법에 호소한다. 그러나 서양은 그것을 편리한 생활 수단으로 이용한다.
부자, 형제, 부부사이에도 법정투쟁을 벌이는 일이 잦다.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악신 스핑크스(Sphinx)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어릴 때는 네 발로 걷고 크면 두 발로 걷고 나중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무엇일까요?” 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잡아먹었다. 하루는 오이디푸스(Oedipus)가 붙잡혀 그것은 “사람이다”고 답했다.
어렸을 때는 두 발과 두 손으로 기어 다니다가, 성장한 뒤에는 두 발로 서서 다니고, 늙으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니까 세 발로 다니는 셈이라고 한 것이다. 스핑크스는 그가 자기의 수수께끼를 정확히 맞혔기 때문에 분통이 터져서 길길이 뛰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스핑크스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물었다.
“어릴 때는 네 발로 걷고 크면 두 발로 걷는 동물은 무엇일까요?” 학생들은 한 동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어린이가 손을 들었다. “OOO, 답해 보세요”하는 선생님의 말에 "선생님, 힌트 좀 주세요!” 했다.
다른 아이들도 “선생님, 힌트 좀 주세요!”하고 소리쳤다. “자, 그러면 발로 걸어 다니는 고등 동물을 말해 보세요?”하는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은 생각을 하는 듯 조금 있더니 “선생님 모르겠는데요, 답을 가르쳐 주세요” 했다. 교실 안이 시끌시끌해졌다.
선생님은 “내일까지 풀어야 할 숙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어느 학생이 “선생님, 답을 가르쳐 주시면 숙제할 필요가 없잖아요”하고 말했다. 어린이 두뇌교육에 관한 어느 책에 소개된 이야기다.
‘힌트를 달라’는 말은 자기 머리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곧바로 선생님의 머리를 빌리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답을 모르겠으니 가르쳐달라’는 말은 정답을 일러주면 받아 적고 암기하겠다는 얘기다.
“숙제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통상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는데 뭘 새삼스럽게 그런 것을 요구하느냐,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본은 오랫동안 우리 문화를 숭상해 왔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막혔던 국교가 재개되던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시대에 일본은 몇 년에 한 번씩 우리의 통신사 일행 3〜5백 명을 받아들였다.
각계의 인사들로 구성된 일종의 문화사절단인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면 길목에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지방 호족들은 칙사대접을 하느라고 재정이 바닥날 정도였다. 선진국인 조선의 문화사절을 받아들이는 것은 통치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목적 외에도 선진 문물, 과학정신, 예의범절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일본이 우리의 문화를 숭상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우리의 문화가 일본에 견주어 월등했기 때문이다. 예절이나 문화도 그랬지만 과학 분야도 그러했다. 나는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하는 국수주의적인 태도를 부추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우리 것이라면 무조건 최고로 내세우고 그것을 지켜보자는 비장감을 조장할 생각도 없다. 검증되지도 않은 유전된 감정을 붙들거나 단단한 자존심만을 가지고 억지 부리고도 싶지 않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다.
우리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구텐베르크(1460)보다 2백 년이나 앞섰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세계 최초의 철갑선,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진주성 싸움에서 군사를 성내로 실어 나른 세계 최초의 비행기, 이것들은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갖고 싶은 것들이었다.
임진왜란은 강제로 조선의 도공(陶工)들을 붙잡아간 문화전쟁이다. 아라비아와 중국에 이어 만들어진 독자적인 조선 월력, 세종대왕과 홍문관 학자들이 만든 한글, 홍대용 선생의 지전설(地轉說) 등은 실로 우리 민족의 창의적 자질과 합리적 사고 능력을 잘 드러낸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학생들은 가르쳐 준 정답을 외우는 것은 잘하지만 그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당혹스러워한다고 한다. 대학교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교수들 자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것으로 전제하고서 하는 말인 듯하다.
근대 한국의 상아탑은 단순한 암기능력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학생을 가려 뽑았고, 외우기 능력에 따라 성적을 평가해 온 것이 사실이다. 실력과 암기력을 등식관계로 이해해 왔다. 두뇌가 좋다. 실력이 좋다는 것은 주로 암기력이 탁월한 것을 뜻했다.
그렇게 해서 뽑힌 학생이 뒤에 선생이 되고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다시 그렇게 가르쳤다. 일제의 수탈, 빈곤, 전쟁, 인구의 증대, 기회의 축소, 경쟁, 빈약한 교육시설, 일본식 주입 교육 등과 같은 것들이 우리의 교육을 그렇게 몰고 갔다.
공부를 잘하자면 암기력이 탁월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암기력 중심의 교육은 창의적 문화 발전에 필요한 고급 사고 능력을 극대화하지 못한다. 많은 학습량을 달달 외워야 하고, 많은 것을 외우는 데 정성을 쏟는 동안 스스로 생각하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생각의 길이 뚫리지 않으며 사고가 역동적으로 확산되어 나갈 틈이 없다. 줄줄 외워서 머릿속에 잔뜩 집어넣는 동안에 학문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지움, 상상력, 창의성이란 것이 배양될 틈바구니가 없다.
컴퓨터는 지금까지 우리가 한없이 우러러보던 암기 활동을 대신한다. 무한정의 정보를 탐색하여 손쉽게 공급한다.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세상은 문자 그대로 요지경이다. 데이터베이스와 CD—ROM은 암기력, 곧 기억력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우리의 교육을 “닭 좇던 개 먼 산 쳐다보기”로 만들었다.
진짜 실력은 분석, 비교, 종합, 유추, 판단, 응용 등의 고급 사고 능력이다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정보를 분류하고, 습득한 개념의 상호 관계를 따져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것들을 서로 관련짓는 관계지움 능력이다.
비슷한 상황에 그것을 적용하는 문제해결 능력이다. 일정한 법칙을 발견하여 일반화하고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며 예측하고 구상한다. 그것들은 상상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다.
영국 경제신문『이코노미스트』의 논설위원 아드리안 울드리지는 아시아 교육이 책상 앞의 호랑이만 길러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 교육의 허(虛)를 찌르는 지적이다.
동양 몇몇 나라의 교육이 학생들로 하여금 학교 시험은 잘 치고 성적은 잘 받아도 학교를 벗어나면 당장 눈앞에 닥친 작은 문제조차 역동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을 길러낸다고 꼬집은 것이다.
하늘에서 비행기가 추락하고, 땅에서 기차가 탈선하고, 강에서 다리가 내려앉고, 바다에서 배가 전복되고, 호수에서 유람선이 불타고, 지하에서 가스가 폭발하고, 도시에서 백화점이 무너지고, 시골 하천의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국가경제가 부도 직전에 이르고,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과 핵 개발에 대책이 없는 것이 어찌 우리의 교육 실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1.3 전기고문 의자
나는 아이 셋을 선물로 받아 한국과 미국에서 키웠다. 나라마다 교육의 장단점이 있지만 서양 교육엔 특기할만한 것이 있다. 서양인들이 말을 잘하고, 얄미울 정도로 정확하게 따지며, 쉽게 흥분하지 않는 데는 다 까닭이 있다. 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논리적인 사고 훈련을 한다. ‘연구논문 작성법’을 배우고 지침에 따라 해마다 한 두 차례 ‘논문’을 제출한다. 대여섯 쪽(레터, 두 행간) 정도의 간단한 것이지만, 기본 원리와 형식은 석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맏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작성하여 제출한 ‘연구논문’의 주제는 사형을 집행할 때 사용하는 전기의자(The Electric Chair)에 관한 것이었다. 담임교사에게서 숙제를 받아 돌아온 아이는 제 엄마를 데리고서 시립도서관, 대학도서관, 법대도서관 등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찾았다. 인근의 법대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시간을 약속하고 찾아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이 모든 내용을 카드로 만들고 종합하여 정리했다. 상당히 많은 자료들이었다.
논지는 “전기의자를 사용한 사형제도가 사회악 억제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준 가이드에 따라 서론에는 무엇을 쓰고, 본론은 어떻게 진행시키고, 결론에서는 무엇을 써야 하며, 주와 참고문헌목록은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가? 등을 알기 위해 끙끙댔다. 아이가 작성한 것은 보고서(리포트)가 아니다 비록 초등학생의 것이지만 그 나름대로 독창성을 가진 작은 논문이었다.
초등학생의 리서치 작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논지를 중심으로 서론, 본론, 결론의 요점을 두터운 종이판에 큰 글자들을 오려 붙여 학교로 가져갔다. 학교는 우수작을 뽑아 교정 입구에 몇 주간 전시하고 최고작을 만든 아이에게 상을 준다. 이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프레젠테이션 보드(Presentation Board)라고 하는 종이판은 동네 문방구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이 보편화해 있음을 말한다.
나는 이 책 원고를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1997-1998)로 있는 동안 마무리했다. 그때 막내는 자그마한 동네에 자리 잡은 알링턴 고등학교에 2학년으로 다니고 있었다. 한국의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역사과목과제로 ‘페이퍼’를 써야 한다면서 대학도서관에서 여러 권의 책들을 빌려달라고 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 매사추세츠주 군인들이 군목에게서 어떤 종류의 정신교육을 받았는가에 대한 리서치 페이퍼(Research Paper)를 쓴다고 했다. 이제껏 아무도 그 주제로 연구한 바 없다고 한다. 내가보기에 그 주제는 석사학위 논문이나 박사학위 논문감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독창적이다.
서양 국가는 자국민의 독자적인 연구능력을 키우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다. 자기의 독창적인 생각을 말과 글로 조리 있게 표현하는 훈련에 무게를 둔다. 그런데 이 책을 쓰면서 참고하기 위해 고려대학교출판부가 펴낸『논문작성법』을 살펴보는 가운데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대목을 발견했다. 대학졸업 논문의 성질에 관한서술에서,
졸업논문이라고 해서 학문에 무슨 새로운 지견(知見)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거나, 또는 엄밀한 의미의 독창성(獨創性)을 담은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또한 졸업논문은 연구논문이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이때의 연구는 무엇인가 새로운 사실을 찾아낸다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나 자료를 학생의 독자적인 관점에서 재음미함을 의미한다.
고 쓰고 있다. 논문작성법에 관한 다른 몇 권의 책들은 이 책의 이 대목을 아무런 생각 없이 그대로 옮겨 적거나 표절을 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초등학생조차 자기 나름의 주장, 견해, 논지(論旨)를 가진 ‘논문’을 쓰게 하고 새롭고 독창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는 마당에, 한 대학의 논문지도서가 대학생들에게 무슨 새로운 지혜나 식견을 가져올 필요가 없고, 엄밀한 의미의 독창성을 담은 내용일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계에 일제의 잔재가 서슬같이 시퍼렇던 광복 후 반세기 동안, 우리 학계를 지배해 온 만연된 질병은 표절이었다. 대학자로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인물들이 남긴 학문 업적들은 선구자로서 존경을 받기보다는 가혹한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
원전을 들고 씨름하는 눈 밝은 젊은 학자들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그들의 감춰진 부끄러움이 드러나고 있다 차라리 학자답지 못하다고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책을 쓰지 않은 ‘학자들’이 오히려 더 정직한 자로 드러나고 있다.
나는 선배학자들의 성취를 표절이란 이름으로 매도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너나할 것 없이 베꼈다. 어미 게가 베끼다 보니 새끼 게가 베끼는 것을 나무랄 수 없었다.
그릇된 풍토는 결국 대학 졸업논문이 반드시 무슨 새로운 지혜나 식견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거나 엄밀한 의미의 독창적인 것을 담는 것이거나, 무엇인가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는 것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물론 ‘이미 알려진 사실이나 자료를 학생의 독자적인 관점에서 재음미함을 의미 한다’는 것은 독창성을 전혀 배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후자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베껴 쓰기 문화는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 베낄 뿐 창작하지 않는다)이라는 선언에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송나라 때는 문이재도(文以載道: 글에는 도덕을 담아야 한다)라는 풍조 때문에 선배, 스승에 반대되는 새로운 것을 말하지 못했다. “괴이한 것, 억지 쓰는 것, 상황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 귀신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자가 가르친 군자의 기본 조건이다. 우리 문화의 바탕인 유교는 창의성과 상상력을 죽이고, 토론과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왔다.
밤 하늘의 별처럼 수시로 반짝이는 창의적인 것들을 논리 적이고 체계 있게 풀어내고 표현하고 그것을 다른 정보와 연계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 힘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고귀한 능력이다. 논문은 오로지 독창적인 것이어야 한다. 논문쓰기는 독창적인 발상과 건전하고 타당한 관계지움의 힘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인 동시에, 그 같은 능력을 키우고 극대화하는 최고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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