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길따라 뱃길따라 열리는 고려의 교통로
이인재(연세대 국학연구원 계약연구원)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당산철교의 통행이 금지되었을 때, 사람들은 단순히 길이 끊겼다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강 건너 있던 직장을 몇 배의 시간을 투자하여 돌아가야 했고, 주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손님을 부르는 방식이 달라졌다.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길이 지역과 지역을 연결시켜 줄 뿐만 아니라 산업과 산업, 생활과 생활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우리는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길이 한 국가의 생명을 이어주고 핏줄과 같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교통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와는 그 역할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국가경영에서 교통로의 의미가 처지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전국을 잇는 스물 두 개의 뭍길
<고려사>를 보면 당시 전국에는 525개의 역이 있고, 이 역들은 22역도로 묶여 있었다. 역도는 지금의 국도를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22역도 가운데 8개는 수도인 개경 북쪽에 있고, 그 남쪽에 14개가 있었다.
우선 개경에서 황해도 방면으로 나가는 길은 서해안을 따라 배천-연안-해주를 거치는 산예도가 있고, 내륙으로는 금천을 지나 평산-신계-곡산에 이르는 금교도가 있다. 그리고 지금 철원-금화-평강-회양을 잇는 도원도가 있다. 이 길로 쭉 가면 철령을 지나 금강산이나 원산까지 갈 수 있다.
개경에서 서경(평양)길은 금교도와 절령도이다. 그교도의 평산에서 서흥을 지나 자비령을 넘다 보면 평양 남쪽인 절령도와 만나게 된다. 절령도는 황주와 봉산, 재령과 수안을 거쳐 평양까지 가는 길이다. 연안지역으로 태뻗은 산예도에서 황주를 지나 평양에 이르는 길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 개경에서 직접 배를 타고 평양에 갈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상방으로 뻗어 나가는 여러 길이 홍교도이다. 홍교도의 한 방면은 평양에서 서남방향으로 강서를 지나 용강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한 방면은 숙천-안주-박천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을 연이어 당시 국경지대인 의주방면을 중심으로 뻗은 길을 홍화도라 하고, 평북 내륙지방으로 이어진 길을 운중도라 한다. 홍화도는 안북도호부가 있던 안주 북쪽 지역인 선천-철산-의주까지 이어지는 길이 중심이 되고, 운중도는 안주 동쪽인 영변-개천-맹산등지를 잇는 길을 말한다. 이 지역의 여러 역들을 매우 세밀하게 파악한 것은 국방상의 이유였을 것이다. 개경과 원산지역을 잇는 도원도와 연결되었을 것이 삭방도이다. 삭방도는 지금의 함남지역과 강원도 북부지역을 이어 주는데, 그 역시 국방상 필요에 따라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삭방도 밑으로 강원도 동해안을 끼고 명주도가 있다. 명주도는 강릉을 중심으로 연곡-양양으로 이어지는 길과 남쪽으로는 옥계- 삼척으로 해서 울진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길로 짜여져 있다.
다음 개경 남쪽으로 뻗은 길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개경과 남경(서울)을 잇는 청교도이다. 청교도는 개경의 청교역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개경-파주-서울에 이르는 길을 중심으로 서울과 부평, 인천 및 고양과 양주 주변을 잇는 길을 통칭한다. 이 길을 따라 가평-춘천-인제로 이어지는 길이 춘주도이고, 이천-원주-제천-단양을 지나 영주-안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평구도이며, 과천-용인-죽산-음성-괴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광주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반도 내륙지역은 모두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길이 뻗어 있었다.
그 아래로는 충주청주도와 전주공주도와 승주나주도 등 3개의 길이 내륙지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충주청주도는 지금의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수원-청주-연기길과 온양-예산-해미-공주-부여길을 모두 포괄하며, 전주공주도는 전주-여산-공주 길과 고부-태인-정읍 길로 짜여져 있다. 승주나주도는 고창-영광-함평-영암-해남길과 담양-광주-나주-화순길로 구성되어 있다.
남해안 지역에는 전라도쪽에 남원도, 경상도쪽에 산남도가 있으며, 동남해안을 끼고 금주도가 있다. 남원도는 지리산쪽의 임실-남원-구례-운봉길과 남해안 쪽의 순천-낙안-보성-장흥길이 있는데, 장흥길로 해서 승주나주도와 연결할 수 있었다. 산남도는 전주-진안-진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전공주도와 연결되며, 거창-합천-고성길로 해서 금주도와 연결된다. 금주도는 김해를 중심으로 창원-밀양-청도-현풍을 잇고, 밀양에서 양산-동래-울산-언양으로 이어진다.
경상도 내륙지역에는 경상도와 상주도, 경주도가 있다. 경산도는 성주-김천-횡간으로 해서 옥천-보은에 이르는 길이고, 상주도는 문경-예천-안동길과 선산-군위로 이어지는 길이다. 경주도는 경주를 중심으로 영천-대구-경산에 이르는 길과 동해안을 끼고 영덕-평해로 이어지는 길이다. 경산도는 충주청주도로 이어지고, 상주도는 광주도와 연결되며, 경주도는 명주도와 연결된다.
이상이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을 거미줄처럼 짜 놓은 22개의 뭍길이다. 자동차를 타고 국도를 달려 본 사람이면, 지금도 그 때의 교통로를 이용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전국의 70퍼센트가 산악지대인 우리나라에서는 길을 낼 수 있는 지형 조건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뭍길의 관리와 이용
요즈음은 건설교통부에서 도로를 건설하고 관리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병부에서 관할하였다. 병부 아래에 있는 공역서라는 관청에서 각 지방에 보내는 문서가 제대로 격식을 갖추었는지, 사신들이 지방에 갈 때 역에서 사용하는 말의 수가 규정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를 감독하였다. 이 일을 담당하는 관리가 관역사이다.
그러면 고려국가가 어떠한 목적과 필요성에 따라 525개의 역과 22개의 역도를 관리해 나갔는지 살펴보자.
개경 북쪽에서 북계를 관통하는 6개의 뭍길 121개 역 가운데 53퍼센트에 달하는 64개 역과 개경 동쪽에서 동계의 남북을 관통하는 3개 물길 91개 역 가운데 57퍼센트에 이르는 52개 역, 그리고 개경남쪽에서 서울을 지나 춘천, 제천 방면 2개의 뭍길 54개 역 가운데 33퍼센트에 해당하는 18개 역을 6등급으로 나누어 특별히 관리하였다. 이 가운데 춘추도와 평구도에 소속된 역을 제외하면 크게 북계방면과 동계 방면에 해당되는 9개의 뭍길 212역 가운데 55퍼센트에 달하는 116개의 역이 특별 관리된 셈이다. 이를 22역도제와 별도로 6과체계라고 한다.
과에 따라 1과역은 75명의 역정이 있었으며, 2과역은 60명, 3과역은 45명, 4과역은 35명, 5과역은 12명, 6과역은 7명을 두도록 하였다. 역정은 경제력이 있는 사람인 정호로 충당하였는데, 부족할 경우에는 일반농민인 백정이라도 충당할 수 있었다. 역에 필요한 인원은 반드시 채워 좋아야 했기 때문이다.
22뭍길에 소속된 역 가운데 6과체계로 편성된 역을 보면, 1과역은 개경과 서경을 잇는 역들이고, 2과역은 북계방면, 3과역은 동계방면의 역이다. 이들 6과 체계는 개경과 서경 간을 연락하고, 군사. 행정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묶기 위한 도로망이었다.
역에는 역장과 역리, 역정이 있었다. 역장은 역에 관한 모든 일을 책임졌다. 역리는 문서를 전달하고, 필요한 말을 뽑아내고 인원을 충원하였다. 역정은 직접 문서를 들고 뛰거나 사신들의 심부름을 하였다. 역의 운영명목으로 공해전 명목의 토지, 용지 조달을 위한 지위전, 역장을 위한 장전, 말 사육을 위한 마위전을 지급하였다.
사신이나 문서를 보낼 때, 각 역은 자기 역에 도착한 사람이나 문서를 다음 역으로 보내는 일을 하였다. 사신의 지위에 따라 역에서 조달하는 말의 수가 달랐는데, 2품 이상의 재추면 10마리, 3품관원이나 안렴사는 7마리 등이었다. 이들은 각 역에서 말을 쓸 수 있다는 문서를 받아 그 말을 사용하여 다음 역까지 가는 방법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중앙 관청의 공문서는 먼저 상서성에 보고한 후 각 지방에 보냈다. 공문서는 보통 가죽 주머니에 넣어 역졸이 릴레이 하는 식으로 역에서 역으로 전송하였다.
급한 문서인 경우에는 가죽 주머니에 방울을 달아 보낸다. 아주 급하면 방울 3개를 다는데, 격이 떨어지면 2개 혹은 1개를 달았다. 그러나 역졸이 천천히 달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규제도 마련해 놓았다. 예를 들면 2월부터 7월까지는 방울 3개 달린 문서를 가진 역졸은 하루에 6개의 역을 지나야 하고, 2개 달린 문서는 5개의 역, 1개 달린 문서는 4개 역을 달려야 했다. 그러나 8월부터 정월까지는 각각 1개 역씩 줄여서 달리도록 하였다. 이렇게 문서를 들고 뛰는 사람들이 요즈음 마라톤을 했다면 메달 몇 개씩은 땄을 것이다. 이로 보면 오늘날 역전마라톤의 기원은 무척 오래 된 셈이다.
그런데 각 역에서는 주어진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힘든 일은 사신이나 승려가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경우이다. 승려가 관역에 머물면서 영접이나 음식대접이 소홀하다고 해서 역리나 역정을 매질하거나, 사신의 노비가 주인을 빙자하여 공적으로 사용해야 할 말을 함부로 타고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혹은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특산물을 사다 파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매우 피곤하다.
뱃길 하나로 묶어진 13곳의 창고
각 지역에서 생산된 곡식은 조창에 모아 배로 운반하였다. 뭍에서 가까운 곳으로 곡식을 옮길 때에는 지게나 달구지를 이용하였고, 소 등에 기르마를 올려 운반하기도 하였다. 그 중 가장 많이 실을 수 있는 달구지는 보통 벼 15에서 20가마니를 나를 수 있었다. 그런데 개경과 같이 먼 거리일 경우에는 배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운반하였다.
전국 각지에는 13곳의 조창이 있었다. 충청도에는 아산의 하양창과 서산의 영풍창이 있고, 전북에는 부안의 안흥창과 임피의 진성창이 있다. 전남에는 조창이 네 개가 있는데, 나주의 해릉창과 영광의 부용창, 영암의 장흥창과 승주의 해룡창이 있다. 경남에는 사천의 통양창과 창원의 석두창이 있다. 이 외에 남한강을 따라 충주의 덕흥창이 있고, 원주에 흥원창이 있고, 황해도 장연에 안란창이 있었다.
조창에는 역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영역과 주민이 있었다. 이들이 조세로 거두어들인 쌀을 보관하고 조운하였다. 이 일을 총책임을 지며 감독하는 이를 판관이라고 하였다. 판관 밑에는 색전이라는 향리가 있었는데, 실제로 조세 등을 거두고 개경의 창고로 옮기는 일을 맡았다. 이들 이외에 조창에는 뱃사람과 잡일꾼도 있었다.
배로 곡식을 나를 때에는 난파와 약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선단을 짜서 운반하였고, 한 배에 실을 수 있는 곡식량도 정해 놓았다. 충주나 원주에서 출발하여 한강을 따라 운반할 때에는 각각 배 21척과 20척으로 선단을 짜서 운반하되, 곡식 200가마니를 실을 수 있는 밑이 평평한 평저선을 이용하였다. 연해안을 따라 곡식을 옮길 때에는 큰 배 6소(배를 세는 단위)로 선단을 구성하되 곡식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을 이용하였다.
운반비는 곡식량과 출발 지역에 따라 책정하였다. 즉 개경까지의 수송 거리와 난이도에 따라 달랐는데, 개경에서 가장 먼 남해안 지역에서 쌀 5석에서 6석의 운반비는 쌀 1석이었다. 전남 서해안 지역에서 옮길 때에는 쌀 8석에서 9석의 운반비가 쌀 1석이었다. 결국 개경에 가까울수록 운반비가 싸져서 13석에서 15석, 20석에서 21석의 운반비가 쌀 1석의 운반비가 쌀 1석으로 매겨졌지만, 그것도 적은 것은 아니었다.
곡식을 옮기는 기간에 대한 규정도 있었다. 개경과 가까운 조창에서는 2월까지 거두어 보내도록 했는데 늦어도 4월까지 도착해야 하고, 먼 곳이라도 5월까지 도착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제때에 출발하더라도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거나 풍랑을 만났을 때에는 사고 정도를 감안하여 조세를 받지 않기도 하였다. 이 기준은 키잡이 3명과 잡부 5명이 미곡과 함께 침몰할 때이다. 이 경우 조세를 다시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늦게 출발하였거나 동원된 키잡이나 잡부의 3분의 1만이 빠져 죽은 경우에는 해당 고을의 수령이나 담당 아전, 키잡이, 잡부에게 분담시켰다. 키잡이나 잡부의 처지에서는 그 부담을 지는 것보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거짓으로 배가 침몰했다고 하여 곡식을 국가나 해당 주인에게 바치지 않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문종 때에는 키잡이나 잡부들이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되었다거나 파괴되었다고 거짓 보고한 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진 자들에게, 모두 곡물을 내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
뭍길과 뱃길로 엮인 국가의 동맥
22뭍길과 뱃길은 중앙과 지방을 묶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앙에서 각종 공문서를 보낼 때도 길을 통하여 전달하였고, 조세를 거둘 때도 길을 통해야 하였다. 임금이나 관리가 이 길을 따라 지방을 여행하였고, 군사나 상인도 이 길을 이용하였다. 길 가는 도중에 잠을 자거나 물건도 쌓아 놓을 공간도 필요하였다.
미곡 따위를 실은 조운선은 대부분 연안 항로를 따라 운항하였고, 내륙지방의 경우는 남한강 등을 이용하였다. 육지가 바라다 보이는 근접 연안을 따라 항해했지만 조난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 중기에 충청도 서산 안흥량에 운하를 파려고 했던 것은 해난을 방지하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계속 개척하고 보수하는 가운데 우리의 교통로는 국가 동맥으로서 발전하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