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누군가에게는 90년대 히트곡으로 기억될지도 모를 이 단어는 한 아버지의 ‘육아 아이템’일 수도 있다. 온전히 함께하는 주말 이틀 동안 아이들의 요청을 이런저런 핑계로 빠져나가는, 육아 8년 차 두 아이 아빠에게는 말이다. “아빠 심심해, 게임하자”는 말에는 소파에 누워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지는 거다~”라는 대답과 함께 ‘가만히 있기’ 놀이로 대응하며, “아빠, 동물원 놀이하자”라는 또 다른 제안에는 “아빠는 나무늘보야~!”라고 응수한다. 내 책상 뒤에는 첫째 아이가 그려준 <아빠는 나무늘보>라는 제목의 그림이 붙어 있다.
가족여행, 여정의 시작…!
KDIans 에서 ‘여행 스케치’ 참여 신청을 받는다는 게시판 글을 아내가 알려준다. 아, 부부가 같은 직장에 근무한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이점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원내 소식을 어떻게든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오빠도 한번 신청해봐”라는 말은 권유가 아니다. 유부남들은 알 것이다. ‘오빠’ 혹은 ‘여보’, 아니 그 어떤 호칭이든 배우자에게 불려질 때, 그 미묘한 톤의 차이를. 그리고 그 뉘앙스를 잘못 파악했을 때의 불상사를 말이다. 마감일에서야 부랴부랴 신청서를 냈다. “지원자가 많을 텐데. 설마 되겠어?” 하는 마음에 가볍게 신청서를 작성했다.
며칠이 지나 ‘여행작가’로 선정됐다는 메일을 받았다. 메일을 확인하며 처음 든 생각도 역시 핑계. 어떤 핑계를 대며 포기하지싶었던 마음은 ‘작가’라는 표현이 주는 압박 때문이었다. 평소 작가분들을 동경해마지않았던 것은 나의 글재주가 변변찮기 때문인데, 여행기라니…. 아, 가족의 힘이란, 아버지의 무게란 이런 것인가 보다. 어쩔 수 없다면 즐겨야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핑계를 다르게 대보자. 이 핑계로 휴가도 내고 아이들과 여행도 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맞벌이 가정에서 육아를 위해 유연근무로 오전과 저녁 육아를 번갈아 하는 아내와 나에게도 휴식은 필요했다. “그래, 가자.” 이렇게 우리 가족의 여행은 시작됐다.
신청서로 제출한 여행 콘셉트는 세종에서 부담 없이 떠날 수 있는 근거리 여행이다. 출발하자마자 “몇 분 남았어?”라고 1분에 한 번꼴로 물어보는 아이들 덕에 우리 가족은 웬만하면 2시간 내의 거리까지만 여행을 다닌다. 그렇게 이번 목적지도 세종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역들로 결정하게 됐고, 단양과 제천, 충주를 이번 여행 스케치의 목적지로 정했다.
Day 1. 단양
만천하스카이워크 & 도담삼봉
첫째 날의 여행지는 단양이다. 우리 가족 모두 단양은 처음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일어난 아이들.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 가는 날에는 깨워도 잘 일어나지 않지만, 휴일과 공휴일, 엄마와 아빠의 휴가 때는 기가 막히게 일찍 일어난다(어떤 육아 관련 서적에도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잠깐. 그런데 나만 빼고 모두 드레스 코드가 줄무늬 티셔츠다. 아내의 패션 센스는 이런 데에서도 빛이 난다. 가족 모두가 맞춘 듯이 입는 촌스러움에 빠지지 않으려는 저 배려. 역시 난 모든 면에서 아직 아내를 따라갈 수 없다. 가슴 한켠에서 비집고 나오려는 소외감을 꾹꾹 누르며, 차에 짐을 싣는다. 이제, 정말 출발. 단양에서 처음 방문한 곳은 만천하스카이워크. 남한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25m 높이의 구조물이다. 대전 장태산에도 스카이워크가 있는데, 비슷한 구조임에도 단양의 스카이워크가 더 높게 느껴지는 것은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기 때문인 것 같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단체 관광객들을 포함해서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인근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로 스카이워크까지 이동했는데 모노레일, 짚와이어, 알파인코스터, 슬라이드 등 이용할 수 있는 시설들도 다양했다. 스카이워크 정상은 아래쪽이 내려다보이는 철골과 유리로 되어 있어 상당한 스릴을 느낄 수 있는데, 아래 쪽을 보지 못하는 엄마, 아빠와는 다르게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스카이워크에서 내려와 방문한 곳은 도담삼봉. 단양 여행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단양팔경’이다. 단양에서 꼭 봐야 할 8가지 경치인데, 그 중 첫 번째이자 가장 유명한 것이 ‘도담삼봉’이다. 주차장 요금 외에 따로 요금은 없다. 남한강에 있는 세 개의 봉우리로, ‘조선 건국에 큰 영향을 준 정도전이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삼봉은 정도전의 호이기도 하다’ 등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이들은 벌써 저만큼 앞서 뛰어가고 있다. “아빠 이 돌이 유명해?”라는 말을 남기고.
카페 ‘산’ & 단양구경시장
숙소에 간단하게 체크인을 한 후 늦은 점심을 먹으러 출발한다. 사실 여행은 무얼 먹는지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하겠지만, 이런 생각은 아이들이 없을 때 이야기다. 먹을 것이 한정된 아이들에게 여행지에서 맛집을 검색하는 것은 그림의 떡이며, 실체가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다행히 단양은 떡갈비가 유명하다. 그래, 오늘 점심은 떡갈비. 고수동굴 근처에 맛집이 있다. 맛은 개인적 호불호가 있으니 블로그 맛집으로 남겨두고, 허기를 달랜 우리 가족은 카페로 이동했다. (맛집 이야기를 궁금해할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나의 여행기에는 맛집 이야기는 등 장하지 않을 예정이다. 이번 여행에서 계획했던 식당들은 휴무였거나, 추천할만한 맛집은 아니었다.^^;)
단양은 팔경도 유명하지만, 패러글라이딩 성지로도 유명하다. 테마파크에서도 가장 무서운 놀이기구를 즐겨 타던 아내와 나다. 꼭 해보고 싶은 레포츠 중에 패러글라이딩도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기고 싶지만 아직은 어린아이들이다. 그래도 패러글라이딩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경치가 좋은 카페가 있다. 패러글라이딩 활강 시작 포인트 바로 옆에 위치한 카페 ‘산’. 산 정상이라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긴 하지만, 비포장도로는 아니기에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다. 일요일이라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이 꽤 많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바람이 강해 비행은 없었다. 가까이에서 패러글라이딩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덕분에 활강장에서 아이들과 빗자루를 타고 다니며 ‘해리포터’ 놀이를 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기 전 단양구경시장에 들러 시장투어도 했다. 마트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좋은 구경거리 될 것 같아 동선에 넣었는데 이날은 장날(1, 6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조금 한가했다. 그렇게 여행 첫날은 짧은 시장투어까지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Day 2. 제천
비봉산 & 의림지 & 용추폭포
둘째 날이다. 단양팔경 중 하나가 ‘옥순봉’이다. 그곳의 출렁다리를 가보고 싶었으나, 월요일은 휴무란다. 여행지의 많은 곳이 월요일에 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바로 제천의 청풍호반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재작년 제천에 왔을 때도 케이블카를 탔었는데, 딸의 기억 속에 이 케이블카(왕복 17,000원)는 처음인 듯했다. 물태리역 승차장에서 케이블카에 올라 비봉산으로 향했다. 비봉산에는 전망대가 꾸며져 있는데,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고, 청풍호의 경치는 아름다웠다. 곳곳에 마련되어 있는 SNS용 사진 명소들은 방문객의 나이를 불문하고 사진을 찍고 포즈를 취하게 만들었다.
비봉산에서 내려와 근처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숙소에 체크인을 한 후에는 다음 목적지인 의림지로 향했다. 강행군은 아닌가 싶어 아이들과 함께 의림지 근처의 카페에서 여유를 부려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여유’라는 단어는 사치일 뿐이다. 카페에서 1시간 이상 머무는 일은 어려운 도 전이다. 의림지는 저수지이다. 세종실록에 ‘의림제’라는 표기로 등장한다고 하니 오랜 역사를 짐작게 한다. 이곳은 산책하기도 좋지만, 용추폭포라는 폭포가 있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 눈에 들어온 것은 의림지에 떠 있는 오리배였다. 청주의 한 호수에서 오리배를 탔던 기억이 났나 보다. 그래, 폭포는 어두워도 볼 수 있지만, 오리는 문 닫으면 탈 수 없으니, 어떡하니, 뛰어야지. 그렇게 마감을 하는 매표소 아저씨와 딱 만나는 천운(?)으로 오리배에 올랐다. 4인용 오리배는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동력으로 움직이는데,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지난번 그 오리배처럼, 나와 아들이다. 문제는 아들의 다리가 아직 페달에 닿지 않는다는 것. 그랬다. 그때 오리배도 그래서 나만 페달을 굴렀더랬지. 아, 어찌 나의 기억은 이렇게도 단편적인 것일까. 그걸 기억했더라면, 매표 소까지 조금은 덜 빠르게 뛰었을까, 매표소 아저씨를 조금은 덜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을까. 그나마 그때보다는 짧게 탄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 “그래, 너희들만 좋다면야!” 가족의 힘이란. 아버지의 무게란. 짧지만 다리의 고난은 남았던 오리배 체험 후 용추폭포를 보러 이동했다. 의림지가 이렇게 높은 곳이었나 싶을 정도로 폭포 높이가 꽤 있었다. 유리 전망대로 되어 있어서 폭포 위에서 아래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다만, 해가 질 무렵의 저 수지는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하루살이가 많다. 해질녘 호수는 더욱 아름다웠다. 그러나 하루살이들이 싫은 분들은 한여름이 아니라면 낮에 방문하길 추천한다.
Day 3. 충주
카페 ‘게으른 악어’ & 활옥동굴
어느덧 여행의 마지막 날 여행지인 충주로 부지런히 이동했다. 활옥동굴이 목적지였는데 가는 길에 ‘게으른 악어’라는 카페에 들렀다. 국도변에 자리한 휴게소 느낌인데, 충주호를 조망할 수 있는 시원한 풍경이 기억에 남는 카페였다. 간단한 간식거리와 차를 멋진 풍경과 함께 즐길 수 있다. 충주호가 워낙 넓긴 하지만, 근처를 방문하게 된다면 꼭 들려보길 추천한다. 활옥동굴 방문은 처음은 아니었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무더운 여름의 금요일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평일인 오늘은 사람이 정말 없다. 활옥 동굴은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활석 광산으로, 연중 11~15도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어 여름철에 인기가 많은 관광지라고 한다. 규모도 꽤 크며 동굴 안에서 다채로운 조명들과 다양한 테마들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다. 그중에서도 투명 카약을 체험할 수 있는데 주말에는 대기시간이 매우 길다. 첫 방문 때는 1시간 넘게 대기해서 5분 정도 카약을 탔었는데, 오늘은 떠 있는 카약 자체가 우리를 포함해서 3대뿐이다. 덕분에 아이들과 여유롭게 카약을 즐길 수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그리고 나무늘보 아빠의 다짐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아이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운전을 하며 여행의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내 기억에 남는 건 멋진 풍경들도, 먹었던 음식들도, 체험했던 그 무엇들도 아니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강렬한 단상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던 순간이다. 그저 아이들에게 첫날 리조트를 나오며 했던 말처럼, “숙소야, 안녕. 다음에 또 보자”라며 인사하자고 했는데 첫날과 다르게 갑자기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번 여행이 끝나는 게 아쉽다고 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동안 핑계만 대던 내 모습이 떠올라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내 아이 키워주는 세상보다 내가 키울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던 며칠 전 기사도 생각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육아프로그램은 인기가 많다. 결혼을 꿈꾸고 아이를 원하면서, 내가 원하는 아빠의 모습을 그려보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현실 육아는 달랐다. 주변에서 전해지는 아버님들의 모습들과 내 모습을 비교하면서, 나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이번 여행은 이렇게 나와 가족들에게 많은 걸 남겼다. 더이상 아이들에게 핑계는 그만 댈 때가 된 것 같다고 다짐해 본다. 집에 돌아왔다. 짐을 정리한다. 다시 일상이다.
아이들을 씻기고 저녁을 먹인다. 그래도 조금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신다. 이 맥주는 왜 이리 시원한 건지. 여행 마지막에 했던 나의 다짐들이 무색해지게 말이다. 맥주 한 캔에 흔들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