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광무 개혁 답②
이 문제는 광무 개혁이라고 제시되어 있으니 <보기>에서 광무개혁의 내용을 찾으면 됩니다.
난이도면에서 1점짜리 문제 수준의 중급 문제 수준입니다.
고종은 아관파천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 제국을 선포하여(1897) 국내외에 자주 독립 국가임을 천명하였습니다. 1899년에는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제가 군대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등 모든 권한을 장악한 전제 군주국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을 기본 방향으로 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고종의 연호인 광무를 따서 광무 개혁이라고 합니다. 군사력 강화를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사권을 장악하고 서울의 시위대, 지방의 진위대 군사 수를 늘렸으며, 장교 양성을 위한 무관 학교를 설립하였어요.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 사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상공업을 진흥하기 위한 정책도 추진하여 섬유, 운수, 광업, 철도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 공장과 회사의 설립을 지원하였어요. 화폐 주조 기관인 전환국을 통해 백동화를 대량으로 발행하여 근대화 정책의 재원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과학 기술을 진흥하기 위해 의학교, 상공 학교, 외국어 학교 등을 세우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어요. 이 밖에 전화 가설, 우편과 전보망 확충, 전차와 철도 부설 등 교통, 통신 산업도 발전시켰습니다.
ㄱ - 대한 제국은 1899년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대한 제국이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국이며, 황제가 입법,
행정, 사법에 걸친 절대적 권한을 갖는다고 명시하였습니다.
ㄴ - 별기군은 개화기인 1881년에 설치된 신식 군대입니다.
대한 제국은 갑오·을미개혁 때 설치한 서울의 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의 군사 수를 크게 늘렸어요.
ㄷ - 대한 제국은 재정 수입을 늘리고 토지 소유권을 조사하기 위해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토지를 측량하고 토지 소유자에게는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지계(地契)를 발급하였어요.
ㄹ - 1880년대 초 들어 외국 상인의 내지 통상이 허용되자 국내 상인들은 대동 상회, 장통 상회 등 상회사를 설립하여
외국 자본과 경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대한 제국의 광무 개혁
1. 개혁의 성격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하면서 새로운 것은 참작한다.)의 원칙에 바탕을 둔 복고적, 점진적 개혁 → 황제권을 강화(구본)하면서 경제, 사회적 근대화를 추구(신참)하려는 개량주의적 성격, 동도서기론과 유사한 입장 ↔ 독립 협회(입헌 군주제, 의회(대의) 정치)
2. 개혁의 내용
• 정치 : 대한국 국제 반포(1899, 최초 헌법) → 자주 독립과 황제 전제권 강화 표방
▶대한국 국제(일부) 제1조 대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 독립 제국이다. 제2조 대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이다. 제3조 대한국의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 등을 명한다. 제7조 대한국 대황제는 행정 각부의 관제를 정하고, 행정상 필요한 칙령을 발한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 체결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 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 |
• 경제 : 양전 사업 → 지계 발급(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 확립 도모), 황실 중심의 상공업 진흥책 추진
(근대적 공장, 회사 설립)
• 사회ㆍ문화 : 각종 학교 설립, 유학생 파견, 근대 시설 확충
• 군사 : 원수부 설치(황제가 군권 장악), 무관 학교 설립(장교 양성)
• 외교 : 간도, 연해주 교민 보호 정책 → 간도 관리사 파견
▶ 간도와 독도 ① 19세기 후반 이후, 우리 민족의 본격적인 간도 개척 → 청의 간도 귀속 문제 제기 →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을 둘러싼 조ㆍ청 사이의 영토 분쟁 발생 ② 간도 관리사 파견(1902, 이범윤) : 간도를 함경도 행정 구역에 편입 ③ 간도 협약(1909) : 일본이 만주에서 안봉선 철도 부설권과 광산 채굴권 등을 얻는 조건으로 청의 간도 영유 인정 ④ 독도 : 대한제국 때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독도 관할 → 러ㆍ일 전쟁 중 일본이 자국 영토로 강제 편입 |
3. 개혁의 한계
• 전제 군주권의 확립을 통한 근대 주권 국가 지향, 민권 운동 탄압
•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 일본 등 열강의 간섭으로 성과를 못 거둠
유사 기출문제
대한 제국의 광무 개혁
23회 고급 34번 문제
41. 대한제국 시기의 모습 답③
문제에 주어진 자료에 나타난 '고종은 국호를 고치고(대한 제국) 새로운 연호(광무)를 선포', '지계 발급'이라는 내용을 통해 대한 제국임을 파악할 수 있어요
따라서 대한 제국 시기(1897~1910)에 있었던 사실을 찾으면 됩니다.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을 이룬 상황을 이용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 제국을 선포하였습니다(1897).
대한 제국은 국내외에 자주 독립 국가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899년에는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제가 군대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등 모든 권한을 장악한 전제 군주국임을 강조하였죠.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의 고종은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기에, 이 시기의 개혁을 광무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개혁은 자주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와 재정 확충,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습니다. 먼저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사권을 장악하고 서울의 시위대, 지방의 진위대 군사 수를 늘렸으며, 장교 양성을 위한 무관 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8년에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토지를 새로이 측량(양전)하여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 즉 지계(地契)를 발행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상공업을 진흥하기 위한 정책도 추진하여 섬유, 운수, 광업, 철도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 공장과 회사의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의학교, 상공학교, 외국어 학교 등을 세우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습니다. 이 밖에 전화 가설, 우편과 전보망 확충, 전차와 철도 부설 등 교통, 통신 산업도 발전시켰습니다.
① 조선은 통리기무아문(1880)을 설치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신식 군대인 별기군(1881)을 창설하였습니다.
② 군국기무처는 제1차 갑오개혁(1894)을 추진한 최고 정책 결정 기구로, 4개월 동안 약 210건의 안건을 처리하였어요.
③ 대한국 국제는 1899년 8월 대한 제국의 고종 황제가 발표한 것으로, 황제의 권한이 무한함을 강조하였습니다.
④ 한성 사범 학교는 교육 입국 조서 발표 후 1895년에 설립되었어요.
2차 갑오개혁 시기인1895년 2월에 반포된 교육 입국 조서에 근거해 근대 교육 제도가 확립되면서 소학교와 사범 학교
(1895.4, 한성사범학교 설립), 외국어 학교 등 각종 관립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⑤ 노비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제1차 갑오개혁 때입니다.
1차 갑오개혁에서 노비제 폐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가혹한 고문과 연좌 제도 폐지 등이 이루어졌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6회 고급 41번 문제
41. 대한제국이 실시한 광무 개혁 답②
시사적인 자료(신문 기사)를 제시한 문제네요.
'11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악기,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참가, 출품한 악기'라고 나와있네요.
밑줄 그은 '이 개혁'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 겠죠?
이 개혁은 '황제로 즉위한 고종이 추진'한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럼 광무개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광무 개혁이라는 것을 모르더라도 시기상 대한제국 성립 이후에 추진한 개혁 내용을 찾으면 됩니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만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합니다(1897).
러시아와 일본이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어 외세의 간섭도 약한 상태에서 고종은 실추된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 제국을 수립·선포하였습니다(1897).
또한, ‘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은 ‘만국공법’에 기초하여 건국된 국가로, 국내외에 대한 제국이 자주 독립 국가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899년에는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제가 군대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등 모든 권한을 장악한 전제 군주국임을 강조하였죠.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광무 개혁).
개혁은 자주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와 재정 확충,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습니다.
먼저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사권을 장악하고 서울의 시위대, 지방의 진위대 군사 수를 늘렸으며, 장교 양성을 위한 무관 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 사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상공업을 진흥하기 위한 정책도 추진하여 섬유, 운수, 광업, 철도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 공장과 회사의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의학교, 상공학교, 외국어 학교 등을 세우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습니다.
이 밖에 전화 가설, 우편과 전보망 확충, 전차와 철도 부설 등 교통, 통신 산업도 발전시켰습니다.
ㄴ - 청에 영선사를 파견한 것은 대한제국 선포 이전의 일입니다.
1881년 개화 정책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 습득을 위해 일본에 조사 시찰단, 청에 영선사를 파견하였습니다.
ㄹ - 교육 입국 조서는 갑오개혁 시기에 발표되었습니다.
2차 갑오개혁 때에 국민 교육을 위한 교육 입국 조서(1895.2)를 발표하고 근대적인 학제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4회 고급 28번 문제
28. 광무개혁 답⑤
이 문제는 주어진 자료를 통해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임을 알아내는 것은 쉽습니다.
'고종 사진', '대한제국', '원구단에서의 황제 즉위식'을 보면 이것이 대한제국 시기의 개혁임을 알 수 있어요.
광무개혁까지 몰라도 대한제국 시기에 실시된 개혁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대한제국 시기의 개혁 내용이 아닌 것을 골라 내면 답이 찾아지겠네요.
고종은 아관파천 후 약 1년 만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합니다.
이후 자주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 열망과 국제 역학 관계에 힘입어 원구단을 쌓아 황제 즉위식을 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이라 선포합니다(1897).
연호를 광무라 정한 고종은 국내외에 대한 제국이 자주 독립 국가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대한 제국은 만국공법에 기초한 대한국 국제를 제정합니다(1899).
대한국 국제는 ‘대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 독립국’이며 황제가 무한한 권리를 가지는 전제 정치를 실시한다는 점을 명문화하였죠. 또한, 황제가 군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외교권, 인사권 등 무한한 군권을 행사하는 전제 군주국임을 밝혔습니다.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의 원칙에 따라 점진적인 개혁을 내세운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광무개혁이라고 합니다.
정치적으로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사권을 장악하고 시위대와 진위대의 군사 수를 증강하고 장교 양성을 위해 무관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하고, 섬유, 운수, 광업, 철도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 공장과 회사의 설립을 지원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근대적 과학 기술을 일으키기 위해 의학교, 상공학교, 외국어 학교 등을 세우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광무개혁은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⑤ 교육 입국 조서는 대한제국 이전인 2차 갑오개혁 때의 일입니다.
2차 갑오개혁 때 발표된 교육 입국 조서(1895. 2)는 근대식 학제(學制)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육 입국 조서의 주요 내용은 '교육은 국가 보존의 근본이며, 신교육은 과학적 지식과 실용을 추구하며, 교육의 3대
강령은 덕육·지육·체육이며, 교육입국의 정신을 들어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국가 중흥과 국가
보존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이후 한성사범학교 관제(1895. 4), 외국어학교 관제(1895.7)를 반포하고 교원을 양성
하기 위한 목적에서 1895년 5월에는 한성사범학교를 세우죠.
3차 개혁, 즉 을미개혁에서는 서울에 4개의 소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광무개혁 때에는 신교육령(1897)을 발표하고 각종 학교를 지속적으로 설립해 나갑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상공업 진흥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상공학교, 광무학교 등의 실업 학교들을 많이 설립했어요.
물론 소학교나 중학교, 의학교 등의 다양한 학교들도 많이 세워졌습니다.
위에 설명한 것들은 관립 학교들이고, 외국인 선교사, 종교계나 민족 선각자들이 많은 사립학교를 세웁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3회 고급 40번 문제
40. 조선 왕릉의 구조 변화 답④
12회 시험 41번 문제 답지 중에도 왕릉과 관련된 내용이 나와 많은 분들이 어렵게 느꼈는데,
이번에는 온전하게 조선 왕릉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었네요.
하지만 이 문제는 간단하게 생각하면 쉽게 맞을 수 있었던 문제입니다.
태조~철종까지 동일하게 유지되던 능 구조가 고종 때부터 바뀐 직접적인 이유를 정확하게는 모르더라도(카페지기도 몰랐음....^^;) 고종 때부터 바뀌었다에 초점을 두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황제 즉위와 관련 있다고 생각해야할테니까요.
①, ②, ③번은 왕릉의 구조를 변경시킬만한 이유가 못되죠?
⑤번에서 조선이 자주국이라고 명시를 했지만, 이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명시이지 중국을 완전하게 배제한 완전한 자주국의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왕릉 구조의 변화와 관련성이 적죠.
홍릉은 고종, 유릉은 순종의 왕릉입니다.
고종은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고종의 능인 홍릉은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습니다.
문제에 제시한 능의 구조를 보면 알겠지만 능침의 삼계(봉분과 정자각 사이에 일자 형태의 석대로 상계, 중계, 하계로 구분해 놓은 것)를 없애고 봉분 앞에 배치하였던 문인석, 무인석 등의 석물을 배전(종묘나 문묘 등의 배단(拜壇)에 까는 벽돌 )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습니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능으로 가는 길)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웠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 조선 시대 왕릉
조선 시대 왕릉의 구조를 보려면 다음 링크를 클릭해 보세요.
http://cafe.daum.net/hankuksalove/jPxr/33
고종의 능인 홍릉의 구조를 보려면 다음 링크를 클릭하세요.
http://geumgok.cha.go.kr/depart/n_geumgok/promenade/royal.jsp?mc=geumgok_01_01
■ 우리나라 고분
선사 시대~조선 시대까지의 우리나라 고분을 한번에 공부하려면 다음 링크를 클릭하세요.
http://cafe.daum.net/hankuksalove/jPxr/8
12회 고급 37번 문제
문제해설
이 문제는 쉽지 않은 1점 문제입니다.
몇달 차이 또는 1~2년 사이에 이루어진 개혁 내용을 시기순으로 연결해야 하는 문제잖아요.
이 주제는 앞으로도 자주자주 나올 것이니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의 폐정개혁, 갑오개혁, 을미개혁, 그리고 광무개혁의 내용은 스스로 정리해 두세요.
여기에 독립 협회의 개혁 사상까지 함께 ...말이죠.
(가)는 을미개혁(1895. 10)의 내용입니다.
일본이 민비를 살해한 을미사변 이후 단행된 개혁입니다.
그 주요 내용은 태양력 사용, 단발령 실시, '건양'이라는 독자적 연호 사용, 친위대·진위대 설치, 종두법 실시, 소학교 설립, 우편 사무 실시 등입니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 추진, 특히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납니다.
이후 아관 파천이 일어나면서(1896. 2.) 을미개혁은 중단됩니다.
(나)는 제1차 갑오개혁(1894. 7)의 내용입니다.
1차 개혁은 일본의 강요로 정부는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수립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합니다. 이때 민씨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이 다시 추대되기도 했으나 실권은 없었습니다.
1차 개혁이 일본의 강요로 시작되었지만 일본은 당시 청·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조선에 적극 간섭할 여건이 못돼 개혁은 갑신정변의 정강이나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자주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정치면에서는 ①궁내부를 따로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함으로써 국왕의 전제권을 제한하고 의정부에 권한을 집중하였습니다. ②행정 기구를 개편하여 변화된 현실에 맞게 6조를 8아문으로 확대하고 과거 제도를 폐지했으며, ③경무청을 설치하여 경찰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 연호를 사용하던 관행을 버리고 개국 연호를 사용합니다.
경제면에서는 ①국가 재정을 일원화하여 왕실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조세를 독자적으로 징수하는 폐단을 개혁하려 하였으며, ②은 본위 화폐 제도를 채택하고 ④조세를 금납화했으며, ⑤도량형을 통일하였습니다.
사회 분야 개혁도 두드러졌는데, 양반과 상민의 신분적 차별이 폐지되고, 공사 노비제가 혁파됩니다. 그리고 그전부터 내려오던 좋지 못한 관습들도 타파하여 조혼이 금지되고, 과부의 재가가 허용되었으며, 고문과 연좌제도 폐지되었습니다.
(다)는 제2차 갑오개혁(1894. 12)의 내용입니다.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아가자 일본은 조선에 대해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1차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 등을 앞세워 조선을 보호국화 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합니다.
조선 정부는 청에 대한 의존적 관계를 청산하고,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이라할 수 있는 홍범 14조를 반포합니다.
그리고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편하고, 지방 제도를 8도에서 23부로 바꿉니다.
또한, 지방관의 사법권과 군사권을 배제하여 권한을 축소하였으며, 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의 독립을 꾀하였습니다. 그리고 근대적 교육 제도를 마련하여 한성 사범학교 관제, 소학교 관제, 외국어 학교 관제 등을 발표합니다.
(라)는 광무개혁(1897)의 내용입니다.
대한제국은 황제권과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 군사 수를 늘렸고, 장교를 육성하는 등 군사 제도를 개혁하였습니다.
이 밖에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는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토지 소유자에게 토지의 소유권을 보장하는 문서인 지계(地契)를 발급하였습니다.
또한, 서양의 기술과 기계를 적극 도입하여 상공업을 진흥시키려는 식산 흥업 정책을 펼칩니다. 그 결과 철도, 전기, 해운,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시설이 마련되고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습니다. 근대적 산업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새로운 기술자와 경영인의 양성을 위해 상공 학교. 광무 학교 등의 실업 학교와 의학교 등 각종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화 가설, 전차 선로와 철도 부설 등 교통·통신 산업도 발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1회 고급 37번 문제
문제해설
1점짜리 문제니 간단한 해설로 대신하겠습니다.
제시된 자료는 1899년에 발표된 대한국 국제입니다.
대한 제국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라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상공업 진흥, 각종 학교 설립 등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전제 군주제를 표방하며, 황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적으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는 등 군제를 개편하여 궁귈과 서울을 지키는 군대(친위대), 그리고 지방을 지키는 군대(진위대)도 증강하였습니다.
그럼, 답지별로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① 도입 부분에서 설명드렸지만, 대한 제국은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전제 군주제를 표방하며, 황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얼핏 대한국 국제가 일종의 헌법임으로 이의 발표가 법에 의한 통치, 즉 입헌 군주제를 표방한 것이 아니냐고 오해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대한 제국의 모든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켜 결론적으로 법에 의한 통치를 전제
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제 군주제를 표방한 것이기에 입헌 군주제를 지향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② 대한 제국은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8년에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토지를 조사하는 양전 사업을 통해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인 지계(地契)를 발급하였지요.
③ 30번 문제에서 해설하였지만, 대한제국에서는 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여 간도에 거주하던 교민들을 보호하도록 하였지요.
④ 대한 제국은 상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회사와 공장을 설립하였습니다.
이에 필요한 기술자와 경영인 양성을 위해 상공 학교. 광무 학교 등의 실업 학교와 의학교 등 각종 학교를 설립했어요.
이와 같은 정부의 정책으로, 개인이 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많은 사립 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답니다.
⑤ 19세기 말에 조선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울릉도 경영에 나서 이곳으로의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울릉도에 군을 설치하여 관리를 파견하고 독도까지 관할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0회 고급 32번 문제
32. 대한 제국의 지계 발급과 일제 강점기의 토지 조사 사업 답⑤
문제에 제시된 사료 (가)에서는 '관계(官契)'를 통해 지계(地契)를 떠올리고 광무개혁 당시의 양전 사업을 통한 지계 발급을 파악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토지 조사.."를 통해 일제가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을 떠올릴 수 있죠?
따라서 문제에 제시된 자료 (가)는 대한제국이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증명해 주는 문서로 발행한 지계 사업,
(나)는 근대적 토지 소유권 확립이라는 명분하에 실시된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1912~1918)에 대한 갓입니다.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안정적인 지세 수입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여러 가지 명목으로 신고되지 않거나 미확인된 토지는 조선 총독부 소유로 하게 됩니다.
⑤ 대한제국의 지게 발급은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어요.
반면, 일제의 토지 사업은 전국에 걸쳐 실시되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0회 고급 43번 문제
43. 황궁우 건립 시기의 사회 모습 답②
제시된 건물 어디서 많이 본 건물이죠?
교과서에 자주 나오던 황궁우란 건물이죠.
그런데 이 건물이 언제 축조됐는지는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제시된 설명 자료에 환구단 건립 2년 후에 완공됐다고 하네요.
환구단은 언제 건립됐는지 또 아리송하지요?
환구단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나요?
환구단(圜丘壇)이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壇)으로, 원구단(圓丘壇)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죠.
고종은 1897년 환구단을 건립하고 그해 12월에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제사를 지냈습니다(그럼 환구단 건립 후 2년 후에 황궁우를 건립했다고 하니 황궁우 건립 연도는 1899년이겠죠?).
이는 대한제국이 황제국이란 위용을 과시하는 한편 서구 열강에 대해 독립적인 국가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적ㆍ역사적인 메세지를 전달한 것이지요.
1899년에는 하늘과 땅의 신령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황궁우를 건립합니다.
고종은 환구단과 황궁우에서 황제로서 제천 의례를 행했지요.
하여간 환구단 거립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치르기 위해 건립한 것이니 대한제국 선포 연도만 알면 황궁우 건립 연도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1899년에 볼 수 있었던 모습을찾아야겠네요...
이게 더 어려울 수도 있죠? ^^;
ㄱ- 대한 천일 은행은 일본을 비롯한 외세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1899년 1월에 설립된 민족 은행이었어요.
ㄴ- 독립 협회는 1896년에 설립되어 1898년 12월에 해산되었죠?
ㄷ- 서대문~청량이 전차는 1899년에 개통되었답니다.
ㄹ-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에 창간되었어요...
그러므로 1899년에 볼 수 있었던 모습은 ㄱ과 ㄷ이겠네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5회 고급 44번 문제
44. 아관 파천에서 돌아오기 직전의 사회 모습 답①
제시된 내용에 ‘국왕 폐하(고종)의 왕궁에의 환어’라는 것으로 보아 아관파천 시기(1896~97), 그 중에서도 환궁을 위해
일본과 러시아가 고종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는 것을 보아 환궁 바로 직전임을 알 수 있어요.
이 시기에는 서재필이 민중 계몽을 목표로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1896~1898)을 발간하였어요.
② 대성학교는 신민회 회원인 안창호가 1907년에 평양에 설립한 학교입니다.
③ 헌의 6조는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에 관민 공동회에서 채택하여 고종에게 올렸죠.
④ 지계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1~1904년에 발행하였으며,
⑤ 김홍집은 갑오·을미개혁 시기에 세 차례 총리가 되어 내각을 이끌었으나 1896년 아관 파천 후 친러 내각이 수립된 후
광화문을 걷다가 친일파로 몰려 민중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 이전의 일이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4회 고급 40번 문제
문제해설
제시된 글을 보면, 청·일 전쟁 승리(1895)~대한 제국 시기(1897~1910)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어요.
아관파천, 즉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지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합니다.
환궁 당시는 러시아와 일본 모두 한반도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세력 균형을 이루게 되어 외세의 간섭도 상대적으로 약해졌던 시기입니다. 이에 고종은 실추된 국가의 위상을 높여 자주 독립 국가를 대내외에 표방하고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 제국을 수립·선포하였습니다(1897).
이후 광무개혁이라고 하는 각종 개혁을 추진해 나갑니다.
① 대한 제국 성립 이전부터 을미사변, 을미개혁(1895) 등으로 조선에 대해 압력을 가하는 일본과 아관파천(1896)으로
응수하는 러시아와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립은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도 지속되어 결국 러·일 전쟁
(1904~1905)이 일어나는 배경이 됩니다.
② 러시아가 연해주에 진출한 것은 베이징 조약(1860)으로 이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얻어낸 이후입니다.
③ 삼국 간섭(1895)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요동을 확보하자, 이전부터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번에 압력을 가해 요동을 돌려주도록 압력을 가한 사건입니다.
결국 일본은 이에 굴복에 요동을 중국에 돌려주죠.
④ 아관파천 시기 조선의 많은 이권들이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에게 넘어갑니다.
이는 고종이 이 시기 러시아에게 많은 이권을 넘겨주었는데, 조선과 통상 조약 체결시 최혜국 대우 조항을 넣은 많은
국가들이 동일한 이권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도 여러 이권을 얻었는데, 경의선 철도 부설권 획득(1896.7)도 그 중의 하나였어요.
⑤ 세계 각 지역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며 대립하던 영국은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막기 위해 일본
과 영·일 동맹(1차 : 1902, 2차 : 1905)을 맺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회 2급 38번 문제
문제해설
문제에 제시된 글을 보면, 대한제국 시기(1897~1910)에 실시된 광무개혁에 대한 것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죠?
대한 제국은 개혁을 추진하면서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라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상공업 진흥, 각종 학교 설립 등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전제 군주제를 표방하며, 황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적으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는 등 군제를 개편하여 궁귈과 서울을 지키는 군대(친위대), 그리고 지방을 지키는 군대(진위대)도 증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① 광무개혁은 고종이 주도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② 전차(서대문~청량리)가 개통되고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설된 것은 1899년입니다.
③ 대한국 국제는 황제가 군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외교권, 인사권 등 무한한 군권을 행사하는 전제 정치를 실
시한다는 점을 명문화한 것입니다.
국민의 자유 민권 등을 규정한 것이 아니죠.
④ 이채연은 한성판윤(서울 시장)을 연임하면서 최초로 서울의 도시 계획을 추진하였던 인물입니다.
간선 도로 정비에 힘써 덕수궁 앞을 중심으로 방사선 도로를 새로 만들어 기존 도로들과 연결하였어요.
또한 경운궁, 독립문, 원구단, 탑골 공원 조성 등에 간여하였고, 한성 시내에 전기, 수도, 전차, 철도를 도입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독립 협회 창립에도 참여하였으며, 한성 전기 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하였어요.
⑤ 이용익은 1897년 황실의 재정을 총괄하는 내장원경에 발탁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황실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위해 인삼을 황실 전매 사업으로 하였고 외국인의 광산 채굴 금지하였으며,
일본 자본을 막고 대한 제국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시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대한 제국 시기(직전 문제 일부 포함)의 사회 모습을 묻는 문제를 추가 제시합니다.
대한 제국 시기의 모습
29회 고급 31번 문제
31. 삼국 간섭~대한 제국 수립까지의 흐름 답④
짧은 시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문제입니다.
(나) 청·일 전쟁에서 패한 청은 1895년 3월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청은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열도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어요. 이 소식을 접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 삼국은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를 반환토록 압박하여 결국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청에 반환하였습니다(삼국 간섭, 1895).
(가) 삼국 간섭을 지켜본 고종과 명성 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내정 간섭을 막으려고 하였으며, 미국, 러시아와 가까운 인물들로 내각을 구성하였습니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파견하여 일본 군대와 일본 낭인들을 경복궁에 난입시켜 명성 황후를 시해하였어요(을미사변, 1895).
(라)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의 단발령에 반발하여 의병 운동이 일어나자 의병 진압을 위해 중앙군 일부가 지방으로 출동하였습니다. 고종은 이를 틈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겼습니다(아관 파천, 1896).
(다) 고종이 아관 파천 후 1년 만인 1897년에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자 독립 협회를 중심으로 조선 국왕도 청과 일본처럼 황제 칭호를 사용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로 바꾸고 10월에는 환구단을 세우고 이곳에서 황제로 즉위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나)-(가)-(라)-(다)로 연결된 ④번입니다.
28회 고급 39번 문제
39. 을미개혁(1895)~을사늑약(1905) 사이의 사실 답④
(가)는 "고종은 비로소 머리를 깎고 내외 신민에게 명하여 모두 깎도록 하였다."라는 내용을 통해 을미개혁(1895) 당시의 단발령임을 알 수 있어요. 을미개혁 당시 유길준과 조희연 등이 일본군을 인도하여 궁성 주위에 대포를 설치한 후 머리를 깎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나)는 "법도와 절차도 갖추지 않고 강제로 조인하게 하여 억지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았었으니"라는 내용을 통해 을사늑약(1905)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05년 11월 일본 정부의 특사로 온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을 동원한 상태에서 고종과 정부 대신들을 위협하고, 이완용 등의 을사5적을 앞세워 이른바 을사조약(제2차 한·일 협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였습니다.
따라서 1895~1905년 사이에 있었던 사실을 찾으면 됩니다.
① 1912년 의병장 출신의 임병찬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전국 곳곳의 의병장과 유생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습니다.
② 1907년 정미의병 당시 의병 투쟁이 확산되자 의병 간 연합 전선이 결성되어 13도 연합 부대(13도 창의군)를 편성하고
1908년에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③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어요.
이들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일제의 불법적인 국권 강탈을 폭로하여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일을 계기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어요.
④ 1895년 유인석, 이소응 등은 명성 황후 시해 사건, 단발령 실시에 반발하여 항일 의병을 일으켰습니다(을미의병).
을미의병은 유생층이 주도하고 일반 농민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들이 참여하였어요. 그러나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해산을 권유하자 활동을 중단하였습니다.
⑤ 1907년 일본이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자, 의병이 일어났습니다(정미의병).
이때에는 해산된 군인이 의병에 합류함에 따라 의병의 조직력과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6회 고급 39번 문제
39. 개항~한말의 역사적 사실 파악 답④
개항 직후~1907년까지의 근대 문물의 수용 모습을 시기별로 파악해 보는 문제입니다.
① 전환국은 1883년에 설치되었어요.
정부에서는 개항 직후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화폐 발행을 담당할 기관으로 전환국을 설치하였어요(1883), 또한,
박문국을 두어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하고(1883), 기기창을 설치해(1883) 근대 무기를 제조하였어요. 우정
총국을 두어 근대식 우편 업무를 추진하였고(1884),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였어요(1885).
② 명동 성당은 1898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개항 후 서양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대표적 건축물은 정동 교회(1885), 러시아 공사관(1890), 명동 성당(1898),
손탁 호텔(1902), 덕수궁의 정관헌(1900), 석조전(1910) 등이 있습니다.
③ 한성주보는 1886년부터 발행되었어요.
갑신정변 실패로 한성순보는 폐간되었으며, 이후 온건 개화파의 주도 아래 한성주보가 간행되었습니다.
한성주보에 독일계 무역 회사인 세창 양행이 1886년에 광고를 실은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광고였어요.
당시 광고글를 참고하세요.
"덕상(독일 상사) 세창양행에서 조선에 개업해 외국에서 자명종, 뮤직 박스, 각종 램프, 서양 천·성냥 등 여러 물건을
수입하여 공정한 가격으로 팔고 있으니 손님과 상인은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은양(銀洋)은 시세에 맞게 계산하여
아이나 노인이 온다 해도 속이지 않을 겁니다. - 한성주보 제4호, 1886. 2. 22. -"
④ 경인선은 1899년 개통되었어요.
이어 경부선(1905), 경의선(1906)이 개통되었는데, 이는 모두 일본에 의해 부설되었습니다.
한편, 1898년에 한성 전기 회사를 설립해 발전소를 만들고 1899년부터 종로 일대에 전차를 운행하였습니다.
⑤ 원산학사는 1883년 봄에 원산의 덕원 주민들에 의해 세워졌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4회 고급 33번 문제
33. 1897~1907년 시기의 모습 답⑤
(가)는 구본신참과 광무라는 연호를 세웠다고 나와 있으니 대한 제국의 성립 모습(1897),
(나)는 통감이라는 존재와 즉위식이라는 내용을 통해 순종의 즉위(1907)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1897~1907년 사이에 있었던 사실, 즉 고종 황제 재위 기간의 대한 제국에서 있었던 모습을 찾으면 되겠네요.
ㄱ - 육영 공원은 1886녀에 세워져 1894년까지 운영되었어요.
개화기 정부는 육영 공원을 세워 헐버트를 비롯한 미국인 교사들을 초빙해 현직 관리나 양반 상류층 자제들을 대상으로
외국어를 비롯한 산수, 국제법 등 근대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ㄴ - 원각사는 1908년 개관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극장이었으며,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극으로 공연되었어요.
ㄷ - 경부선 철도는 일본이 러·일 전쟁 등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1901~1905년에 걸쳐 건설하였습니다.
ㄹ - 우리나라는 1900년에 만국우편 연합에 가입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22회 고급 33번 문제
33. 전차가 개통된 1899년의 사회모습 답②
특정 시기 자료를 주고 이 시기에 볼 수 있었던 사회모습을 찾는 문제도 매회 빠지지 않고 출제되는 유형입니다.
문제에 제시된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의 기술로 제작된 전차로 운영하던 전차 개통식'이네요.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 개통식 장면을 묘사한 내용과 사진입니다.
1898년 조선 황실과 미국인 콜브란 등이 공동 출자로 서울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회사인 한성 전기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고종은 한성 전기 회사에 한성 지역의 전차, 전등, 전화 설비의 시설과 운영권을 주었어요. 이에 따라 한성 전기 회사는 전기 생산을 위해 동대문에 발전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고종 황제는 서울의 전차 건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성 전기 회사는 미국인 콜브란 등과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전차 선로를 부설하기로 하죠. 이 전차 선로는 1898년 9월에 기공하여 1899년에 개통됩니다. 전차 개통 후 고종은 청량리에 있는 홍릉(명성 황후의 릉)에 다녀올 때 이 전차를 이용하였다네요.
전차의 등장은 같은해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과 함께 새로운 운송 수단으로 서울 시민들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제공합니다.
① 경부선은 러·일 전쟁(1904~1905) 중에 완공(1904. 12), 다음해 개통되었습니다(1905)
② 황성신문은 1898년에 창간되어 1910년까지 발행되었어요.
③ 잡지 "소년"은 최남선이 1908년에 창간하였습니다.
최남선은 여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어요.
④ 극장 원각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극장으로, 1908년에 은세계가 최초의 신극으로 공연되었습니다.
이후 치악산 등의 작품이 신극으로 공연되었습니다.
⑤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에 대구에서 시작되었던 경제적 구국 운동이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1회 고급 33번 문제
33. 1907~1911년 당시 볼 수 있었던 건축물 답①
제시된 자료에 나타난 외국인은 헤이그 특사 사건(1907)이 계기가 되어 취재를 위해 그해 한국을 방문해 4년 후 서울을 떠났다고 하니 그가 볼 수 있었던 건축물은 1907~11년에 존재하고 있었던 건물이어야 합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① 1926년에 완공된 조선 총독부 건물이다.
1910년 국권 강탈 후 세워진 조선 총독부는 처음에는 남산에 있는 통감부 건물을 청사로 사용하였습니다.
이후 경복궁 근정전 앞에 새로 청사를 건립하기 시작해 1926년에 완공하여 패망할 때까지 사용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정부의 청사(중앙청)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 사용되었어요. 이후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하나로 이를 철거했어요.
② 1897년에 독립 협회가 세운 독립문입니다.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들의 숙소 또는 환영연을 베풀던 모화관을 개수해 독립관으로 사용하였고,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주 독립 국가를 상징하는 독립문(1897.11 완공)을 세웠습니다.
③ 1910년에 르네상스식 건축양식으로 완공된 덕수궁 석조전입니다.
기본 설계는 영국인 하딩이,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담당하여 지어졌어요.
대한제국 시기에 사용된 이 건물은 침전(왕의 침소)과 정전(업무공간)이 별도 건물로 분리되었던 기존 궁궐 건물과는
달리 한 건물에 통합되어 있었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해방 후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리기도 했으며, 1954~1973년까지는 국립 중앙박물관, 1973~1986년에는 국립 현대
미술관, 1992~2004년에는 궁중 유물 전시관, 2005년 이후에는 국립 근대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④ 원구단과 황궁우입니다.
원구단은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터에 단을 만들어 조성하였어요.
그 후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를 1899년에 축조하고 신위판을 봉안하였습니다.
⑤ 1898년에 완공된 천주교 성당인 명동성당입니다.
명동 성당은 프랑스 신부 고스트가 설계하여 1898년에 완성된 고딕 양식의 건물로, 원래 이름은 종현성당이었으나
1945년에 명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9회 고급 37번 문제
37. 경인선 개통 시기의 사회 모습 답①
'최초의 철도', '운행 구간이 노량진(서울)-제물포(인천)'라는 내용을 통해 경인선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철도에 대한 문제는 단독 출제보다는 대한 제국 시기의 사실, 러·일 전쟁 시기의 철도 부설의 목적이나 내용, 토지 약탈 등과 연결시켜 출제되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은 미국인 모스가 철도 부설권을 획득(1896)하여 1897년부터 공사에 착수했으나, 도중에 자금 부족으로 중단되어 일본으로 부설권이 넘어가 1899년에 완공, 개통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대한제국 시기입니다.
이후 러·일 전쟁 시기에 러·일 전쟁 등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남북을 연결하는 경부선(1901~1905), 경의선(1904~1906)이 빠르게 공사, 개통되었습니다.
① 오늘날 이화여대의 모체인 이화학당은 1886년 스크랜튼 부인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입니다.
이화학당은 1904년에는 중등과, 190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함으로써 보통·중등·고등 과정의 일관된 학제를
마련하였습니다.
② 나운규가 만든 영화 ‘아리랑’은 1926년에 개봉되었습니다.
나운규는 영화를 통해 민족 의식을 일깨웠는데, 그가 직접 각본을 쓰고 제작, 주연한 아리랑은 나라를 잃은 민중의 울
분과 설움을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③ 방정환이 활약한 천도교 소년회에서는 1923년에 어린이날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라는 잡지를 간행하는 등 천도교에서는 소년 운동을 적극 전개하였습니다.
④ 극단 토월회는 1923년 박승희, 김기진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습니다.
⑤ 동아일보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로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사진
을 기사에 실은 사건은 1936년의 일입니다.
이로 인해 일제는 동아일보를 무기정간 처분하였다가 9개월 후에 복간 조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8회 고급 36번 문제
36. 근대 우편의 역사 답④
1점짜리 배점 문제입니다.
제시된 자료에 연도가 제시되어 있으니 (가) 시기(1895~1915)에 있었던 사실만 찾으면 되네요.
쉽게 1895~1915년 사이에 있었던 우편 업무와 관련한 사실을 찾으라는 말이네요.
보통 우편 업무 관련하여서는 우정총국=갑신정변을 연결시켜 묻는 문제로 출제되는데, 이 문제는 순수하게 1895~1915년까지에 있었던 우편 업무와 관련된 역사 사실을 묻는 문제로 출제되었네요.
우리나라의 근대적 우편 제도는 개화 정책의 하나로 시작되었습니다.
보빙 사절단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던 홍영식은 미국의 여러 근대 시설을 둘러보았는데, 그때 눈여겨 본 것 중의 하나가 미국의 우편, 전신 업무였습니다.
그래서 귀국하여 우편 업무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1884년에 우정총국이 개설되고 홍영식은 우정 참판을 담당하였습니다.
홍영식을 비롯한 개화당은 우정총국 개국연에서 수구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변을 꾀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으나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게 되죠(갑신정변)
결국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우정총국은 폐지되고 우편 업무는 실시되지 못하다가 1895년 을미개혁 때에 우체사를 설치하면서 실시되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는 만국우편 연합(1900)에 가입하여 외국과 우편을 주고받게 됩니다.
① 갑신정변(1884)으로 우편 업무가 중단된 후 1895년에 재개됩니다.
② 우정총국은 1884년에 개설되었습니다.
③ 한성순보는 1883년부터 박문국에서 간행하였으나, 갑신정변(1884.12)의 실패로 폐간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는 국내 소식과 함께 서양의 신문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⑤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에 따라 조선 주재 미국 공사가 파견되자 정부는 미국에 보빙 사절단을 파견하죠(1883).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의 보빙사 일행은 40여일의 기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박
람회, 병원, 신문사, 육군사관학교 등을 시찰하고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5회 고급 38번 문제
38. 명동 성당 답②
엽서에 쓰인 내용을 보면 어떤 건물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 김범우의 집터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1898).’, ‘1970년대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집회가 열린 곳’은 바로 명동 성당입니다.
엽서에 쓰여진 건물이 무엇인지 몰라도 고딕 양식의 특징을 알거나, 답지에 주어진 건물들이 무엇인지 알아도 답을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① 일제 식민지 통치의 핵심 기관이었던 조선 총독부 건물로 1920년대에 지어졌습니다.
광복 후에는 중앙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김영삼 정부 때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하나로 이 건물을 헐어버렸죠.
② 명동 성당입니다.
고딕 양식의 가장 큰 특징은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입니다. 고딕 양식의 특징만 알면 답지에 제시된 건물 중에 명동
성당 빼고는 고딕 양식이 없으니 답을 바로 찾을 수 있어요.
③ 덕수궁 석조전으로 르네상스 양식으로 1910년에 완성되었습니다.
④ 서울 정동에 있는 구 러시아 공사관입니다.
⑤ 식민지 착취 기관이었던 동양 척식 주식 회사 건물입니다.
실제적으로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집회가 열릴 수 있는 장소는 명동 성당 빼고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3회 고급 32번 문제
32. 1890년대 모습 답⑤
문제에 제시된 자료는 백범일지네요.
김구가 저술한 책이므로, 이 내용은 김구과 관련된 사건이겠죠?
문제 자료에 '전화가 인천에 통하게 된 것이 사흘전(전화가 서울과 인천 사이에 개통)'이라는 것에서 시기를 추측할 수 있어야겠네요.
김구가 쓴 백범일지에 보면, 김구는 주막(?)에서 명성황후를 시해(1895)한 일본 낭인으로 의심되는 일본인 스치다 중위를 잡아 죽입니다(1896).
이 사건으로 체포된 김구는 1896년 7월 사형을 언도 받고 동년 윤8월 26일(음력..양력으로는 11월쯤) 사형 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고종 황제의 특사로 사형 바로 직전에 형집행 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네요.
이때가 전화가 인천에 가설되고 감리서에 개통된 것이 이 사실 사흘 전이었다고 하네요.
1896년의 모습을 찾으면 되겠네요.
① 광혜원은 1885년 2월 고종이 미국 선교사 알렌의 건의를 받아 서울 재동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입니다.
이 병원은 같은해 3월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죠.
② 서대문 ~청량리간 전차가 개통된 것은 1899년 5월입니다.
전차 개통 후 고종은 청량리에 있는 홍릉(명성 황후의 릉)에 다녀올 때 전차를 이용하였다네요.
③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개통은 1899년입니다.
④ 한성순보는 1883년 발행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박문국의 인쇄 시설이 불에 타 발간이 중단되었습니다.
⑤ 우리나라에 전등이 가설된 것은 1887년 경복궁의 건청궁입니다.
이후 경복궁 전체에 가설되었어요. 따라서 이후에 경복궁의 전등을 유지 관리하는 관리가 있었겠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3회 고급 36번 문제
36. 1901년 서울 모습 답④
한말~일제 강점기 당시 볼 수 있었던 건물에 대해 묻는 문제도 종종 출제되니 잘 알아두세요.
이 문제는 제시된 자료에 시기가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어 풀기 힘들지 않은 문제네요.
'110년 전 서울을 3주간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이라고 했으니, 계산해보면 1901년(2011-110=1901년) 정도인거죠.
그럼 1901년 당시 볼 수 있었던 건물이나 사회 모습을 찾으면 되겠네요.
ㄱ - 일제가 남산에 세운 남산 신사(神社, 조선 신궁이라고도 함)의 모습입니다.
이 신사는 지금의 백범 광장을 지나서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분수대 일대에 본 건물이 있었으며, 사진에 보이는
계단은 분수대 위쪽에 있었습니다. 남산 신사는 1920년에 공사를 시작해 1925년에 완공하였습니다.
ㄴ - 전신인지, 전선인지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전봇대를 세우는 모습 같네요.
이때 당시 미국인 콜브란은 한성전기회사를 설립(1898)하고 전차(1898~1899), 동대문 발전소(1898~1900) 건설
등의 전기 관련 사업을 독점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ㄷ -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백화점인 화신백화점 모습이네요.
화신백화점은 1931년 박흥식이 건립하였으나, 1935년에 불이 나 소실됩니다. 이후 1937년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현대식 백화점 건물로 다시 세워집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내부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설치, 그리고 옥상에는 전광 뉴스판까지 설치되었던 최신식 건물이었다네요.
문제에 제시된 건물은 1937년에 신축된 건물입니다.
ㄹ - 여자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모습이네요.
여자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인 이화학당(1886)이 세워지면서부터입니다.
이 문제는 1901년에 볼 수 있었던 모습을 찾기보다는 1901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고르는 방식으로 풀어야 쉽게 풀리는 문제입니다.
ㄱ, ㄷ은 1901년 이후에나 볼 수 있었던 건물이니 답이 아니겠죠?
그럼 ㄴ, ㄹ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언제적 모습인지 모르더라도 답은 ㄴ, ㄹ임을 알 수 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2회 고급 35번 문제
문제해설
이 문제는 아관파천이 실행된 직후의 상황을 묻는 문제입니다.
문제에 제시된 글을 쓴 스페이에르는 1896년에 조선에 부임한 주한 러시아 공사입니다.
그리고 자료에 나타난 ‘이 계획’은 아관파천(1896~1897)을 의미합니다.
아관파천이 단행된 배경을 간단히 알고 넘어가죠.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았어요. 그러나 일찍부터 랴오둥 반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의 랴오둥 반도 할양을 저지합니다(삼국 간섭).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려던 정부는 친러 정책을 추진합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의 주도적 역할을 하던 민비(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1895. 8. 20.).
을미사변 이후 친일 내각에 의해 태양력 사용, 단발령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3차 개혁(을미개혁)이 추진됩니다. 그러나 단발령 등에 대한 반발로 유인석, 이소응 등 많은 유생들이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게 되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 부임한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는 조선 내 친러 세력과 모의해 고종에게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제안합니다. 결국 고종은 신변의 안전을 꾀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아관 파천을 단행하게 됩니다(1896. 2.).
러시아가 순수한 마음으로 자국의 공사관에 한나라의 왕을 모시고 있지는 않겠죠?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는 고종의 신변을 보호하면서 국내에서 삼림 채벌, 광산 개발 등과 같은 각종 이권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러시아가 각종 이권을 차지하자 과거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최혜국 대우 조항을 넣었던 미국, 일본, 프랑스 등도 동일한 이권을 요구함으로써서 조선의 각종 이권이 이들에게 넘어갑니다.
이들의 이권 침탈은 주로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삼림 채벌권에 집중되었습니다.
당시의 이권침탈 모습은 아래 지도를 참고해 보세요.
[출처/미래엔 한국사 교과서]
② 프랑스는 1896년에 경의선(서울~신의주) 철도 부설권을 얻었습니다.
경의선 경의선은 프랑스가 부설치 못하다가 1899년에 대한철도회사에 부설권이 넘어갑니다. 그러나 대한철도회사도 이를 부설치 못해 결국 1900년에 국가에 환수됩니다. 대한제국은 정부 기관인 내장원에 서부철도국을 두고 철도 부설을 위한 측량 등을 실시합니다. 그 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이 이를 부설하기 시작하여 완공하지요(1906). |
오답들을 살펴볼까요?
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은 1885년의 일입니다.
이 당시 국내에서 유길준, 부들러 등에 의해 한반도 중립화론이 주장되었다는 것!!! 알아두세요.
③ 1894년의 일입니다.
동학 농민 운동군과 정부는 동학 농민군과 전주 화약을 맺자, 조선은 청과 일본에 군대를 철병할 것을 요구합니다.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경복궁을 점령한 후 조선에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청·일 전쟁이 일어납니다.
④ 한성~의주를 연결하는 전신 가설권을 얻은 것은 1885년입니다.
⑤ 을사조약(1905) 당시 고종은 헐버트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조약이 불법임을 알리고 미국의 협조를 얻고자 하였어요.
이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할 때 거중조정(계약 상대국이 위급한 상황 등에 처했을 때 서로 돕는다) 조항을
넣었기 때문에 이에 근거해 이루어진 조치였으나 미국은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상태였기 때문에 헐버트의 면담 요구 조차 거부해버리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1회 고급 39번 문제
39. 1909년 서울의 주요 건물 답②
이러한 유형의 문제가 매회 한 문제씩은 출제되고 있네요.
특정 시기를 주고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건물이나 문화 등을 묻는 문제가 출제되니
근현대사 부분을 공부할 때는 이러한 부분을 생각해두며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는 '1909년'이라는 시간을 제시하고 있으니 시기에만 신경써서 풀어주시면 됩니다.
긴 설명 필요없이 답지를 살펴볼까요?
① 손탁 호텔은 1902년 독일인 여성 손탁(Sontag:한자명 孫鐸)이 정동에 세운 서울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습니다.
손탁은 1885년 초대 한국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함께 서울에 도착해 베베르 부부의 추천으로 궁궐에 들어가
양식 조리와 외빈 접대를 담당하다가 명성 황후의 신임을 얻어 정계의 배후에서 활약하였어요. 1895년 고종으로부터
덕수궁 옆 정동에 있는 가옥을 하사받아 외국인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하다 1902년에 이를 헐고 2층의 서양식 호텔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손탁 호텔입니다. 이 호텔에는 서울에 사는 서양인들이 자주 찾았으며, 훗날 영국 수상이 된
처칠도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리고 '톰 소여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도 이 호텔에 묶은 적이 있다네요.
② 원각사는 1907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극장입니다.
이곳에서는 창극이 주로 공연되었던 상설 극장이었습니다.
1907년에 세워졌으니 1909년에 존재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아리랑은 1926년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따라서 1909년에 아리랑이 여기서 상영될 수는 없었으니 틀린 답지네요.
③ 배재 학당은 미국에서 온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설립한 개신교 학교로, 아직까지도 존재하는 학교입니다.
1886년에 고종은 배재 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간판을 써서 하사하였지요.
1980년대에는 정동에서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④ 세브란스 병원은 서야 선교사들에 의해 1904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존재하지요.
⑤ 명동 성당은 프랑스 파리 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1898년에 완공된 고딕식 건물입니다.
명동 성당의 주교는 1942년까지 프랑스 선교사들이 맡았다네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고급 교재지만, 고등학교 교과서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3급 준비에도 최고!!!!!
PDF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30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찬찬히 살펴보면 어렵지 않은 문제였네요.
혹시 몰라 오답을 지워가는 소거식으로 풀었구요.
ㄴ의 별기군은 임오군란의 빌미가 됐던 신식군대고
ㄹ의 대동상회, 장통회사는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민족자본이니
답이 아니라고 금방 찾았네요.
해설이 잘 나와있어서 공부하기 편할 것 같아요!
문제만 보고 지레 겁먹었는데 해설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모바일이라 전부는 못보고 휙넘겼는데 피씨로 다시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유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단 분은 등업 안됩니다.
해설을 알기 쉽고 자세히 적어주신 것 같아요!
한번 읽고서는 헷갈릴 수 있으니 몇번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고있던 지식으로 문제를 풀혀니 오답이 많네요.. 처음부터 기초부터 다져야겠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듭니다
단어나 사건같은 명칭은 들어본것 같은데 전체적인 흐름이나 내용중에서 모르는게 많네요 열심히 해야겠어요~
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해둘걸 .지금와서 보니까 까막눈이 따로없어요ㅋㅋ많은 도움 받고 갑니다^^
대한제국이 이뤄진 과정을 생각해보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네요. 개화정책으로 일어난 임오군란의 내용과 임오군란으로 인한 청과 일의 간섭 그에 대응하기 위한 조선의 노력을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던 문제같습니다^^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던 지식은 문제 접근시 오히려 방해만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문제들인것 같네요.. 앞으로 확실하게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능친 이후에 한국사 공부를 안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ㅠㅠ 고등학생때처럼 열심히 공부해야될 것 같아요ㅠㅠ 자료나 해설이 자세히 풀이되어있어서 공부할 때 많이 도움될것같아요~
28회 고급 39번문제는 (가)는 단발령(을미개혁)으로 쉽게 알수 있고 (나)는 이토히로부미가 외교권을 박탈한 제2차한일협약(을사늑약)이라 할수있습니다. 년도는 (가)는 1895년 (나)는 1905년입니다. 이 사이에 유인석,이소응,허위 등의 유생이 주도하고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이 가담한 을미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이 문제는 년도와 흐름을 잘 알고 있다면 쉽게 풀겠지만 모른다면 까다로운 문제일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근대사 파트는 국사 보다 짧기 때문에 년도를 외우는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어렵지는 않네요ㅎㅎ
고등학교때 배운건데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ㅠ 이제 한국사 시작햇는데 분발해서 다른 문제는 꼭 맞추도록 해야겟어요!!
공무원시험공부하면서 한국사 꾸준히 공부한것이 기억이 나네요. 이번에 반드시 1급 따겠습니다.
몇년전에 1급 붙었었는데 유효기간 문제로 다시 공부하려니 기억이 안나네요 벌써 ㅠㅠ 하나 같이 어려워 보이는데 해설 보니 조금씩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열공해야겠어요~
대한제국에 관해 확실히 알아둬야겠어요
더 열심히 살펴봐야겠어요!
너무나 오랬동안 공부를 하지 않았네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하여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을 가슴속 깊게 새길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역사 공부를 참 싫어했는데 이번에 우리 나라 역사에 대해 올바르게 알수 있도록 공부해 보고 싶네요. 저렇게 자세히 해설까지 써주시고 정말 상드려야 합니다. 감사하게 공부하겠습니다
와,, 까페 관리하시는 분들의 노고가 느껴집니다. 너무나 정성스럽습니다.
공부하는데 많은 자극이 될듯해요. 문제 좋아요!^^
너무나 훌륭하네요
이렇게 알찬 해설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맞춰서 기분좋다요
알기쉬운 설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