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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会主义的本质是解放生产力,发展生产力,消灭剥削、消除两极分 化,最终达到共同富裕”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을 해방시키고, 생산력을 발전시키며, 착취를 없애고,
양극화를 없애고, 궁극적으로 공동의 풍요를 이루는 것이다
중국의 발전주의 욕망에 대한 연구
: 80후 베이퍄오(北漂) 청년세대의 미디어 재현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吳昶學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매년 평균 10%에 가까운 GDP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압축성장의 시대를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 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사회로 바뀌었고, 중국인들은 경쟁에서 이겨 ‘잘 살아보려’는 마음의 습속을 내면화하였다. 본 연구는 압축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마음의 습속을 ‘발전주의 욕망’으로 명명하고 중국 방송 프로그램에서 재현된 발전주의 욕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르네 지라르의 모방욕망이론을 활용하여 살펴보았다. 중국의 발전주의 욕망을 국가차원과 개인차원으로 나누어 분석하였고, 개인적 차원은 개혁개방 이후 포스트사회주의 첫 세대인 80후를 중심으 로 분석하였다. 이상의 논의에 근거하여 아래와 같은 연구문제를 제 시하였다.
[연구문제1]. 미디어에서 재현된 국가적 차원의 발전주의 욕망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연구문제2]. 미디어에서 재현된 80후 베이퍄오 청년의 발전주의 욕망은 도시공간을 통해 어떻게 표출되는가?
[연구문제3]. 미디어에서 재현된 80후 베이퍄오 청년세대의 발전주 의 욕망과 삶의 실천행태는 어떠한가?
국가적 차원의 발전주의 욕망을 살펴보기 위해 당과 국가 주도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国崛起)>, <부흥의 길(复兴之路)>, <휘황중국(辉煌中国)> 3편에 대한 텍스트 분석을 실시하였다. 또한 개인차원의 발전주의 욕망과 실천을 살펴보기 위해 80후 청년세대 의 삶을 재현한 대표적인 청춘분투 드라마 <개미족의 분투(蚁族的 奋斗)>, <베이징사랑이야기(北京爱情故事)>, <달팽이 집(蜗居)>, <분투(奋斗)>, <나혼시대(裸婚时代)> 5편을 르네 지라르의 모방욕 망 분석틀에 기초하여 텍스트 분석을 실시하였다. 연구결과를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국가적 차원의 발전주의 욕망은 대내외적으로 강한 국가를 향한 열망과 서양을 초월하려는 욕망으로 구성되었다. 서양 을 초월하려는 욕망은 부국강병으로 미국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 라 평화, 협력, 공생, 조화 등 사회주의 가치와 전통적 가치가 강조 되는 중국식 발전모델을 새로 정립하고 지난 500년 동안 지속되었 던 침략, 약탈로 점철된 서양의 발전모델을 대체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중국은 가치를 강조하지만 아직은 여전히 물질주의 발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둘째, 공간에 투영된 청년세대의 발전주의 욕망은 서구화와 개인화를 지향한 보다 나은 삶으로서의 ‘여유로운 생활’을 향한 욕망이 다. 또한 신분상승과 과시를 위한 욕망이기도 하다. 급속하게 진행 된 도시화 과정에서 공공성이 강조되었던 공간들은 개발을 통해 위계화 된 주거공간과 여가 소비 공간들로 탈바꿈한다. 인물들은 더 나은 공간을 소유하거나 점유하기 위해 분투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신분상승과 과시를 위한 욕망의 발현이다. 다양한 계층에 속한 인물들이 모두 별장을 소유하기를,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를 욕망하는데 이는 중국인들이 신분상승, ‘여유로운 생활’과 과시하기를 욕망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셋째, 드라마에 재현된 인물들의 욕망과 실천 그리고 정당화 기제 를 살펴보면 그 가운데 가족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인물들은 모두 대도시에 집을 소유하고 정착하는 것으로 사회적 신분상승을 욕망한다. 이는 개인의 성취와 더불어 궁극적으로 가족을 지키고 싶은 욕망이고 가족에게 더 나은 미래를 마련해주고 싶은 욕망이다. 인물들은 욕망의 실현을 위해 다양한 선택들을 하는데 드라마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우리와 가족의 위한 성장과 신분상승의 욕망이 아닌 나 혼자만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과 사회에 피해와 상처를 주는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실천이다.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추구행위를 정당화하는 명분을 가족을 지키는 것, 보다 풍요로운 물질생활을 통해 가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서 찾는다.
다큐멘터리든 드라마든 발전의 욕망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선을 취하고 있다. 반대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나 혹은 우리만을 위한 이 기적인 욕망,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과 사회에 피 해와 상처를 주는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실천이다.
주요어: 중국, 발전주의, 욕망, 80후, 베이퍄오, 청년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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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된 굴욕적인 근대사로부터 오늘날 미국과 경쟁하는 G2로 이르기까지 경제발전에 있어서 줄곧 국가 중심적인 경향이 강했다. 지난 200년 동안, 중국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줄곧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해 노력해왔다. 1861년 청정부가 중심이 되어 추진했던 양무운동, 1898년 입헌군주제로 민족을 구하려 했던 변법자강운동, 1911년 청정부를 뒤엎었던 신해혁명, 1949년 중국공산당 주도의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1978년 개혁개방 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혁과 변화의 중심에는 국가가 있었다. 경제발전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노력에는 연속성이 있으며 그 연속성 사이에는 단절도 있다. 청정부에서 중화민국으로 단절도 있고,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단절도 있다. 중화인민공 화국 역사에서는 또 두 개의 단절이 존재하는데 1949년부터 1978년 이전까지 사회주의 계획경제 발전전략을 추진했던 시기와, 1978년 이후 개혁개방으로 사회주의 시장경제 발전전략을 추진했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윤상우(2005)는 중국을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확립 이후 로부터 발전국가로 논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개혁개방 이전에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로서 시장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발전국가로 논의될 수 없고, 개혁개방이후부터 1992년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 확립 전까지는 계획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서서히 전환되는 과도기로 시장경제체제가 제도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요인은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압축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낙후한 후진국에서 벗어나 현재 미국과도 경쟁할 수 있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기 때문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중국의 거대한 인구를 고려할 때 GDP의 규모가 아무리 클지라도 실제 중국인 들의 생활은 선진국 수준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다. 국가중심론의 핵심적인 주장을 국가의 전면적이고 효과적인 개입, 집중화된 산업 정책, 구체적인 표준 성취 원칙의 설정 등으로 요약해 볼 때 중국의 경제성장 핵심요인은 ‘발전국가’에 맞추어져 있다. 국가는 금융제도 와 자본이동을 통제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추동하고, 산업구조와 가격 구조에 개입하며 국제경제와의 상호관계를 감독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는 성장 다변화, 안정된 성장 동력의 부여 등 모든 측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국의 발전국가 성격을 띤 국가 중심적 입장은 신권위주의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허씬(何新, 2001)은 정통 맑스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궁극적으로 무정부주의를 초래한다고 보고 제3의 길, 즉 신국 가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국가라는 실체를 그 어떤 단일계급의 독점물로 보지 않고, 단순한 국가통치기구라고 보기보다는 다민족, 다계 급, 다양한 이익집단들의 공동체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신국가주의는 국가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1 유능한 전문 관료의 국가 운영,
2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그에 대한 경제적 보상,
3 국가조절과 시장메커니즘의 병행 발 전,
4 교육, 의료체계 등 민생경제부문이나 중요한 경제적 자원에 대한 국가의 통제 확보,
5 국가역량을 동원하여 도덕 및 법제화를 통해 자산계급의 독선과 독점을 억제하고 국가의 자율성과 중립성 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좌파 지식인 왕후이(汪晖, 2010)는 중국의 굴기를 다섯 가 지로 분석하였다. 첫째, 중국의 독립 자주적 사회발전 노선을 개혁 의 전제조건으로 상정한다. 중국공산당이 획득한 반제국주의 노선은 소련과 주종관계가 아닌 새로운 독립모델을 형성한 것이 그 주 내용이다. 둘째, 자신을 포함한 중국학계의 논쟁이 부분적으로는 기존 의 당내 노선투쟁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당내의 이 론논쟁의 역사를 계승한 것이며 당내의 이러한 실천적 행동이 정당 과 국가의 자기조정의 기제였기 때문이다. 셋째, 농민의 강렬한 능 동정신이다.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중국사회는 여타 사회와 비교 해볼 때 불평등에 관한 호소와 부패에 대해 용인하기 힘든 의식이 더 강하므로 기층에서부터 강렬한 상호제어작용이 일어났다고 보았 다. 넷째, 국가의 역할이다. 왕후이는 중국개혁이 성공한 이유를 중 성국가에서 찾는데 이는 개혁개방에서 국가에 따른 국가자원의 분 배문제를 강조한다. 다섯째, 사회주의 시기 누적된 사회자원이다. 왕 후이는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중국이 안정 속 에서 고속성장을 할 수 있었는데, 그 핵심은 강력한 국가에 있다고 본다. 중국의 신권위주의론과 발전국가론은 국가가 권위적이고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시장의 성장을 위해서 사회를 억압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일맥상통하다.
발전국가의 정당성 근거인 경제성장, 기술관료 중심의 국가관료 기구, 전략적 경제.산업 등 발전국가의 핵심적 특징들을 기준으로 중국 성장체제를 분석한 윤상우(2005)는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확립된 이후 중국의 성장방식은 동아시아 발전국가 모델과 친화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일련의 제도개혁을 통해 자율성과 능력을 겸비한 기술관료 중심의 국가관료 체제를 구축하 고, 전략적 산업정책과 국가 통제적 금융정책의 틀을 체계적으로 확 립하였으며, 국가-기업관계도 ‘배태된 자율성’에 입각한 민관협력의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서상민(2007)은 발전국가론이 제기하고 있는 핵심구성요소라 할 수 있는 경제발전 우선주의라는 이념적 요소와 함께 국가에 의한 경제발전계획과 적극적 산업정책 그리고 이를 추진하는 선도기구라는 정책적.제도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서 발전국가론 틀로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의 국가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윤상우(2015)는 중국이 제3세계 발전도상국들과 달리 종속적 발전 이 아닌 탈종속적 발전으로 갈 수 있었던 원인을 분석하였는데 첫 째,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발전과정은 투자·생산, 기술도입, 수출·무 역의 측면에서 종속적 발전과 탈종속적 발전이 혼재된 성격을 지니 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둘째는 수출 및 무역종속의 측면을 제외한다 면 종속적 발전의 내용은 대단히 미약하게 나타나며, 중국의 경제발 전이 고도화되면서 탈종속적 발전의 측면들이 확대·강화되었으며 셋 째, 중국에서 탈종속적 발전이 지배적인 특성으로 나타나게 된 이유 는 내부적으로 중국 발전국가의 성공적 종속관리와 중국경제의 예 외성, 외부적으로는 중국유입 해외자본의 성격과 중국의 세계경제 편입타이밍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중 국의 경험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도 국가의 전략적 시장개입 과 경제관리 능력이 여전히 경제발전에 핵심적인 문제해결 방식으 로 가능했음을 강조하였다. 즉 중국은 경제에 있어서 국가의 영향력 이 크고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발전국가전략의 여전히 유효함을 주장하고 있다.
발전국가 관련 논의는 대부분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 루어졌다. 그러나 국가가 시장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발전국가로서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할 수 없다(이연호, 2009). 국가와 시장의 관계 외에 사회적 요소도 함께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정치사회적 요인의 측면에서 볼 때 발전국가는 개인의 이 익보다는 공동체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가치에 기초한다. 전 체적이고 집단적 이익을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개인의 특수성과 자유보다는 집단적 보편성이 더 강조된다. 서구적 복지국 가처럼 제도화된 사회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층 간 또는 지역 간 불균형이 발생할 경우 공동체적 이익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앞세워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정당화 된다.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사회세력은 국가의 정치적 통제력에 대 응할 만큼 강한 힘을 갖추지 못했다. 또한 시장주체들도 국가에 대 응할 만큼 독립성을 갖추지 못했다. 국가는 사회세력에 대하여 우위 를 점하여 통제권을 유지하려는 권위주의적 속성을 갖는다.
발전국가에서 권위주의는 정치사회적 요구로 인해 경제성장이 저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회 및 시장의 이기적 요구를 억압 하고 정치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적 권위주의와 자본주의가 병존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는 평등보다는 위계적 으로 배열된다. 국가를 성스러운 존재로 묘사하며 국가가 사회에 대 하여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특히 국가 엘리트 들에게 권위가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도덕적 권위를 바탕 으로 국가는 사회의 다양한 이익표출을 직접 조정, 중재하여 공동체 적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이익 표출행위가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데 국가의 역할을 한정하는 자유 다원적 모델과 구분된다. 아울러 경제의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경제정책 결정과정이 정치사회적 영향력 으로부터 차단되어야 하며 국가는 질서와 안정을 확보하는데 정책 의 우선순위를 두고자 한다(이연호, 2009).
한국과 중국은 모두 국가의 강력한 권위주의와 시장의 성장지상주의에 의한 사회의 억압과 불균형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비판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되었다. 발전국가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여서 약탈국가, 정치적 독재와 특권자본의 연합을 구성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이는 불균형을 조장하여 사회구조의 단층화를 가져와 경제가 궁극적으로 실패하게 된다는 점이다(이병천,2003). 발전국가가 근본적으로 국가의 실패를 유발할 체제 내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위기를 생산하는 구조여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민주주 의 기제를 도입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박태균, 2009). 발 전국가가 경제발전의 긍정적인 측면만 강조하고 생태파괴, 사회경제 적 불평등 등 부정적인 측면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하면 서 권위주의에 의한 약탈적 구조를 개선할 필요성을 제기했다(조희 연, 1997).
1990년대 이후 중국에서는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을 가져오면서 많 은 부분에서 표준화가 일어났는데 그 표준화는 낙후된 국가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을 더 선진화시키지만 그와 동시에 그 사회의 다른 부분과 단절을 가져오게 했다. 즉 중국은 빈부격차로 도시와 농촌, 취업자와 실업자, 중산층과 하층민의 단절을 가져왔다(孙立平, 2003). 발전과정에서 벌어진 빈부격차, 도농격차, 지역격차 앞에서 중국은 조화로운 발전정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뿐 국가의 권위 주의 성격의 개선에는 무관심하다. 오히려 권위주의 성격을 더 강화 시킴으로서 효율적인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전형적인 발전국가 사례로서 박정희체제를 분석한 조희연(2010)은 박정희 시대의 구조적 성격을 ‘근대화를 향한 동원’체제로 파악했다. 이를 ‘개발 동원 체제’로 규정하였는데 이는 개발, 산업화, 발전을 함 축한 근대화라는 국민적, 민족적 목표를 향해 국가가 위로부터 사회를 강력하게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 체제는 높은 효 율성과 위기성을 모두 내재하고 있다. 조희연의 개발 동원 체제 모 형이 중국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유효한 부분이 있다. 개혁개방 이전 까지 중국은 공산주의를 실현을 위한다는 구호로 개인보다는 집단 과 국가를 우선시하였고 개인의 사욕을 경계하면서 압축 성장을 위 한 모험을 강행하였다. 대약진운동도 대표적인 하나의 사례이다. 개혁개방이후에는 시장화, 산업화, 도시화를 중심으로 현대화 발전 프 로젝트를 가동하였다. 이 시기의 동원은 신자유주의 흐름에 따라 개 인을 집단으로부터 해방시켜 국가와 국영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고 개인의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동원된다. 기존 발전국가 논 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어서 신자유주의적 발전국가 혹은 발전주의적 신자유주의국가 등 포스트발전국가론으로 발전하였지만 국가가 경제발전을 과제로 시장과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점과 보다 발전된 선진국을 모방하고 따라잡으려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중국은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개혁개방을 시작하였지만 1990년 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가 확립된 이후에야 비로소 발전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권위적인 강한 국가는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통해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그와 반대로 극심한 빈부격 차도 함께 가져왔다. 순리핑(孙立平, 2003)의 주장처럼 선진적인 부 분은 더 선진화가 이루어졌고 낙후한 부분은 더 낙후되면서 사회가 단절되었다.
2절 중국사회 압축근대화와 마음의 습속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압축 성장과정에서 중국사회의 도농격차, 지 역격차, 빈부격차는 더욱 확대되었다. 순리핑이 주장했던 대로 단절 되어가는 사회에 직면하여 중국인들의 마음의 습속에는 어떤 변화 가 있었는가? 중국사회의 압축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마음의 습속의 변화에 대한 기존문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 연구들에서는 중국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또는 개혁개방 이후 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환경을 배경으로 중국 인들의 마음의 변화에 대해 논의하였다(周晓红, 2009; 易伍林, 2012;沈杰, 2003; 杨丽霞,贾丽颖, 2015; 徐胜, 2009). 이 연구에서는 개혁 개방을 기준점으로 중국인민공화국 역사를 두 개의 시기로 구분하 였다. 그리고 중국사회 변혁의 상징인 개혁개방의 의미를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중국이 계획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의 계기로 보았으며, 다른 하나는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전환으로 보고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개혁개방 이후를 대체로 1980년대, 1990년대, 21 세기 이후 세 가지의 시기로 구분하고 각 시기의 사회정치적 변화 와 그 시기 중국인들의 마음상태를 살펴보았다. 시대의 전체적 흐름 을 살펴보면 전통적 가치가 퇴조하였고, 현대화의 이상을 가지고 개 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였고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늘어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周晓红, 2009). 개혁개방 이후의 시기에 대해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첫 번째 시기인 1980년대는 문화대혁명이 남겨놓은 정치적 문제들을 청산하고 서서히 상품경제를 모색하는 단계였다. 1978년부터 농촌은 인민공사 체제에서 가족도급 체제로 바뀌었고 1984년부터 ‘사회주의 상품경제’를 도입하면서 농촌과 도시의 경제 가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대외개방정책과 더불어 중국에서는 현대화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청년 세대가 현대적인 가치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들은 과학, 시장, 문화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개 인의 사회적 역할, 자아실현을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시장이 다시 출현하고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시간이 돈이고 효율이 생명이 다’와 ‘이념혁신’ 등 구호들이 확산되면서 희망적인 태도를 취했다 (周晓红, 2009). 정치 지향적 가치는 물질지향적인 가치로 바뀌면서 과거 정치적 이상은 사라졌고 집단이익 중심에서 개인이익 중심으 로 변화하기 시작하였고 개인적인 요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 장경제가 도입되고 경쟁이 강조되면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평균주의 심리가 경쟁의 충격을 받기 시작하였다(徐胜, 2009). 이우린(易伍 林, 2012)에 따르면 오랫동안 금욕주의 문화가 지속되어오던 상황에 서 초기 정부의 시장화 개혁에 대해 많은 중국인들은 의심과 관망 의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사적재산이 보호 받을 수 있을 지에 대한 의구심과 문화대혁명이 재차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 었다. 그러나 국가가 적극적으로 부자들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 면서 서서히 시장경제체제를 인정하는 분위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둘째 시기인 1990년대는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하 고 본격적으로 시장화, 도시화 개혁을 실시하면서 압축적인 성장 시 기를 맞이한 때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흥분’과 ‘곤혹’을 동시 에 경험하게 되었다. 흥분은 시장경제시스템이 완벽하기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간 기업이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과 관련이 있다. 개인들의 사회 이동성, 취업 기회, 수입이 급속도로 증가하여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많은 공무원들과 지식인들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샤하이 (下海)라는 단어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흥분과 함께 곤혹스 러움도 함께 공존했다. 중국인들의 가치관이 배금주의로 바뀌면서 사회적 관계와 도덕적 가치들이 적지 않은 충격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치영역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시장에서는 짝퉁 제품 유통이 성행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서로에 대해 냉담한 분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易伍林, 2012). 시민들은 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새로운 질서를 기대하였지만 스스 로 질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공평경쟁을 강조하면서도 관계를 동원하는 편법이 성행했다. 오직 이익만 추구하면서 경쟁에서 수단 을 가리지 않는 등 사회적으로 신뢰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다(徐 胜, 2009).
셋째 시기인 21세기에 들어와서 중국은 WTO 가입, 올림픽과 상하이엑스포 개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효과적인 대처, 2010년 에는 GDP가 일본을 능가하여 명실상부한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중국사회 내부에서 빈부격차가 확대되었고 소외계층이 출현 하였으며 물질지상주의 가치가 만연하였고 개인화가 진척되면서 전 통문화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周晓红, 2009). 사회전반에 초조함, 들뜸, 증오 분위기가 만연하였다 (沈杰, 2003; 徐胜, 2009; 沈晖, 2012). 이우린(易伍林, 2012)은 중국인 들의 초조한 원인을 투기행위와 사회적 불안감에서 찾았다. 자본이 분배에서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투기가 늘어나 들뜬 분위기가 사 회에 만연하였다. 관료들과 결탁한 개발상들에 의해 이루어진 폭력 적인 개발과 식품안전문제 그리고 빈부격차에 따른 부에 대한 증오 감정들이 사회적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쉬성(徐胜, 2009)은 빈부격차 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평과 정의의 토대 부재에 의해 사회전반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빨리 성공하고 싶은 초조함과 대부분 중국인들이 개혁개방의 성과에서 제외됨에 따른 박탈감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주장했다. 선후이(沈晖, 2012)에 따르면 빨리 성공하고 싶 은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경제가 발전되었지만 그와 더불어 불균형 발전, 식품안전, 부패, 빈부격차, 집값, 물가, 환경보호, 강제개발, 실 업 등 심각된 빈부격차, 국가와 시민 충돌, 사회갈등을 야기하는 많 은 문제들이 발생했고 이런 사회적 문제들 때문에 중국사회는 초조 하고 들떠있는 분위기에 젖어있었고 더 나아가 증오의 감정과 폭력 적인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상의 문헌들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중국은 현재 세계 제2의 경 제대국으로 부상하였지만 중국사회는 오히려 초조함(焦虑), 들뜸(浮 躁), 증오(仇恨)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절 왜 80후 포스트-사회주의 세대에 주목하는가
1. 80후 세대의 정의 및 특성
중국에서 특정세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80 후’이다. 80후는 흔히 1980년대에 태어난 세대를 지칭하지만 학자들 마다 조금씩 다르게 정의한다. 왕샤오팡(王效仿, 2009)은 80후를 1980년부터 1989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로 정의하지만 자오펑(赵 丰, 2007)은 개혁개방 이후의 세대로 1978년부터 1989년 사이에 출 생한 제4대로 정의한다. 80후라는 용어와 더불어 70후라는 용어까지 나타났다. 보편적으로 80후는 주로 1980년에서 1989년 사이에 태어 난 사람들로 개혁개방 이후에 태어난 젊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개념 으로 사용된다. 1980년부터 1989년 사이에 태어난 80후의 규모는 2.2억 명에 달한다. 80후는 1979년 개혁개방과 맞물려 시작된 한 자 녀정책(独生子女), 30년간 지속된 고속 경제성장, 인터넷 보급 등 중 국이 빠른 경제성장과 사회가 급속하게 변화하는 시기에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80후 부모세대는 ‘신중국세대’라면 80후는 ‘신중국 국가 형성’의 역사라 할 수 있다(李春玲, 2013). 80후 부모세대인 ‘신중국 세대’는 혁명세대라고도 불리는데 이들은 성장기 때 어려운 경제 상 황을 겪으면서 절약하며 간고하게 생활하였고 소비보다는 혁명을, 개인보다는 단체를 우선시하면서 포스트사회주의 청년세대와는 다 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80후는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바로 직후에 태어 나, 중국의 경제발전과 함께 성장한 세대로서 부모 세대와 비교하면 풍요로운 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다. 신중국세대로서 80후 부모세대 는 신중국에서 태어났지만 1950년대 대약진운동에 따른 자연피해로 3년간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잃어버린 10년과 농촌하방을 겪으면서 배움이 없는 중학생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으며 대학입시와 경제건설이 시작되어서야 비로소 결 혼하고 배움을 시작했다. 이들이 자식을 낳을 때쯤 인구통제정책과 산아제한정책이 실시되었다. 1990년에 하나뿐인 자식이 성장할 즈음 본격적인 시장화개혁이 시작되었고 기업은 경쟁력을 중요시하기 시 작하면서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风笑天, 2004). 이런 고난을 겪은 부모세대는 80후한테 인생의 좌절을 대물 림하지 않으려고 가장 훌륭한 성장환경을 마련해주려 했고 조부모 들은 한명 뿐인 손자와 손녀에 대한 사랑은 지나칠 정도였다.
1980년대부터 이어진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은 80후에게 물질적 인 풍요를 안겨주었고 역사 이래 그 어느 세대와도 다른 생활환경 에서 성장했다. 80후는 ‘80후’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부정적 인 이미지가 강한 ‘소황제’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왜냐하면 이들 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할 때 과연 중국을 이끌 수 있는 세대 가 될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들이 성인으로 성장하고 나서는 ‘방탕한 청춘, 전통에 대한 반항’의 대명사로 치부되었다(张有平· 赵 广平, 2008).
80후는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가족의 사랑 속에서 성장하였지만 동 시에 중국이 한창 발전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어려움도 함께 겪은 세대이다. 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항일전쟁에 대한 혁명 교육이나 뢰봉(雷锋)4) 봉사정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1997년 홍콩 반환과 1999년 마카오 반환을 지켜보면서 중국의 발전에 대한 자긍 심을 느끼고, 미국에 의한 유고슬라비아 중국대사관의 폭격사건은 이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반미정서을 갖게 하였다. 9년제 의무교
4) 뢰봉(雷锋)은 1962년, 22살 나이로 군부대에서 공무로 순직한 평범한 군인이다. 1963년 3월 5일, 마오쩌둥 주석이 뢰봉 따라 배우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60~80년 대 사이 뢰봉은 중국인들이 따라 배울만한 모범이 되었다. 뢰봉 정신 따라 배우 기 캠페인의 핵심은 뢰봉 정신에 있다. 뢰봉 정신은 인민을 위한 봉사정신인데 이는 공산주의 인생관이자 사회주의와 집단주의 가치관이다.
육 그리고 1999년 이후 대학의 학생증원이 실시되면서 대학생 출신 도 늘어났고, 인터넷의 발전으로 다양한 정보를 직접 접할 수 있었 다. 이러한 성장 배경에 의해 80후는 윗세대의 우려의 목소리와 다 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2008년 쓰촨성 원촨 대지진 재해 복구 과정에서 80후는 적극적으로 지원활동에 참여했고, 같은 해에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국가대표와 자원봉사자로 활약하면서 긍정적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80후가 청년기에 접어든 2000년대는 WTO 가입, 베이징 올림픽 개최, G2로의 부상으로 이어져 중국이 강대국으로 굴기하는 시기였 다. 중국이 세계에 굴기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80후의 마음속에는 대 국적 심리, 즉 중국이 세계 강대국으로서 국제 사무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고 중국과 중국인은 국제 사회로부터 존중받아야 한다 는 심리 등이 싹트게 되었고 이는 민족적 자부심으로 이어졌다(李春 玲, 2013).
80후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 취업난과 주택가격의 폭등이라는 사회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 던 대학생 정원 확대 정책의 영향으로 대졸자들의 취업경쟁은 보다 치열해졌고, 2000년대 초부터 주택가격이 폭등하면서 소득의 상당부 분을 월세로 부담해야 했다. 또한 여전히 남아있는 남존여비 전통관 때문에 남녀성비 불균형, 빈부격차와 주택가격의 폭등 등을 원인으 로 결혼을 포기하거나 혹은 동거만 하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혼을 하더라도 부부 두 명이 자녀 양육 및 네 명의 부모 를 부양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이 늘어났다.
80후는 성장기에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한 사회변화 를 겪으면서 이전 세대가 겪지 않았던 다양한 사회문제에 직면하였 다. 80후는 시장경제에 완전히 노출된 세대다. 이들은 사회에서 시장 경쟁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더 이상 ‘별종’, ‘반항’의 수식어로 불리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분투하는 청년’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방 노예’, ‘개미족’, ‘자식들의 노예’ 등은 80후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2009년 80후 출신 연구자는 베이징에서 떠돌고 있는 80후 저소득 층을 대졸자를 대상으로 현장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고등교육을 받 고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타향에서 고군분투하는, 개미처럼 작지만 악착같이 생활하는 대학생들이 처음으로 주류 사회로부터 주목받게 되었을 때, 그들은 안정된 직장을 찾지 못했고 찾았더라도 수입이 낮은 직종에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도시의 비싼 집세와 비싼 물가 때문에 도농복합지역이나 도시 변두리 지역에 모여 생활 한다. 연구자는 극도로 참담한 그들의 생활 상태를 “생존보다는 낫지만 생활보다는 못한 단계”로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라고 판단했 다. 따라서 그들을 농민, 농민공, 명예퇴직 노동자에 이어 ‘4대 약자 집단’으로 분류하였다(廉思, 2009).
격변하는 중국사회에서 성장한 80후는 자아정체성과 소속감이 결 핍되어 있다. 80후는 부모세대와 달리 전통가치관에 집착하지 않으 면서도 ‘90후’와 ‘00후’ 세대들처럼 전통과 완전히 결별하지도 않았 다. 전통과 탈전통의 결합으로 인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삶의 지침 을 잃고, 궁극적으로 불확실한 자아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지적한 다. 또한 개인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통일된 가치관을 형성하기 어렵 고, 자신이 속한 단체를 정의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자아정체성 결핍 이 심화되었다. 또한 고향을 떠나 먼 타지에서 취직을 하고 생활하 면서 자아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지만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 로 ‘이방인’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해 삶에 대한 허탈감을 느끼고 심 리적 방황을 하게 된다고 설명하였다(冯琼莹, 2013).
80후의 가치관을 부모세대의 것과 비교하면 부모세대는 유가의 ‘자기억제(克己)’를 중심 가치로 두고 있는 반면, 80후 세대는 도가의 ‘자아실현’을 중심 가치로 삼고 있다. 이와 비슷한 결과로 중국청 년보(中国青年报)가 베이징에 거주하는 만 명의 청년세대에게 이들 의 가치관과 관련된 설문을 실시했는데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문항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집과 차를 구입하기 위해’, ‘이상적인 생활을 위해’, ‘부자가 되기 위해’,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평등하 고 조화로운 사회를 위해’, ‘약자를 도와주기 위해’, ‘나라를 더 부강 하게 만들기 위해’ 순으로 응답하였다. 이는 80후가 물질주의적 자 아실현을 위해 노력하지만 동시에 많은 현실적 문제에 직면해 있음 을 보여준다(王立嘉, 2005).
2. 베이퍄오(北漂)의 정의 및 특성
베이퍄오는 수도 베이징 출신이 아니고 베이징 호구(户口)와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베이징에서 근무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지 칭한다. 베이는 베이징을 의미하고 파오(漂)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 하고 유랑한다는 의미이다(陈泽, 2012; 杨金花, 黄大庆, 于海涛, 2015; 石颖芳,蒋红艳, 2017). 베이퍄오는 이미 3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 다. 1980년대 중후반, 중국에서 호구제도와 인구유동에 대한 관리가 느슨해지면서 적지 않은 지역출신들이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목표 로 베이징으로 이주하였다. 그 가운데서 시인, 작가, 예술인들이 정 착하지 못하고 떠다닌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베이퍄오라고 불렀다. 그러나 베이징으로 이주하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기회를 찾아 베이징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베이퍄오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베이퍄오는 베이징의 유동인구(流动人口)에 속하지만 고등교 육을 받은 사람들로 한정하기 때문에 농민공은 포함되지 않는다(杨 金花, 徐华, 黄大庆, 于海涛, 2016).
베이퍄오는 기본적으로 대졸이상의 학력에 개인의 전문기술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 중고급 인력에 속한다. 그들은 개인 이 소유한 문화자본을 바탕으로 대도시(베이징)에서 생존은 가능하 지만 대도시에 부동산 구입하고 정착하여 생활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베이퍄오가 출현한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베 이징이 중국의 정치경제문화 중심도시이고 규모가 크기 때문에 취 직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수입도 상대적으로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과거보다 사회적 분위기가 개방되었고 호구와 인구이동에 대한 국가의 관리가 느슨해져 보다 쉽게 이주할 수 있 었다. 세 번째는 베이징이 개인을 발전시켜줄 수 있는 기회도 많을 뿐만 아니라 80~90년대의 초기 베이퍄오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서 베이징에 가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성공신화의 영향도 무시 할 수 없다(陈静, 2008).
베이퍄오는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자아실현을 위해 성공의 꿈을 안고 대도시에 이주하여 열심히 일하면서 성공의 기회를 찾고 있다. 그들은 임대비용이 싼 도시 변두리에서 생활하면서 성공을 갈 망한다. 보다 높은 사회계층에 진입하고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분투한다. 질식할 것 같이 빠른 생활리듬 속에서 쉬지 않고 치열하게 분투한다.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부지런히 분투하 고 있기 때문이다(石颖芳,蒋红艳, 2017).
80후 베이퍄오의 특징은 높은 학력, 비교적 많은 전문지식과 전문 기술을 갖추고 있고 직장은 안정적이고 베이징의 유동인구 가운데 서 도시생활에 가장 적응을 잘하는 집단이다. 또한 이들은 베이징시 시민으로 신분을 전환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집단이기도하다. 이들 의 경제수입은 중간계층에 속하는데 이들의 근무경력과 능력에 따 라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할 정도로 기업에서 중견역할을 한다(陈泽, 2012; 杨金花, 黄大庆, 于海涛, 2015).
하지만 이들의 이직률은 다른 집단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들은 회사가 자아실현의 욕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면 보다 쉽게 회사를 그만둔다. 이직원인에 대한 조사에서 29.9%가 ‘자아실현하기 어려울 때’로 답했고 21.5%가 ‘회사경영실적이 안 좋아서’, 18.1%가 ‘하는 일이 재미없어서’로 답할 만큼 이들은 자아실현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陈泽, 2012).
양진화 연구팀(杨金花, 黄大庆, 于海涛, 2015)은 80후 베이퍄오의 행복감과 도시정체성에 대해 조사에서 이들의 행복감은 농민공을 포함한 기타 이동인구과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생활에 대한 만족 도는 오히려 그들보다 낮았고 도시정체성 항목에 있어서도 매우 낮 았다. 이는 호구에 등록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 의료 등 모든 복 지시설 이용할 때 경험하는 불편함과 관련되어 있다.
베이퍄오에 대한 연구는 80후 세대 연구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 다. 많지 않은 베이퍄오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면 베이퍄오가 문화자 본을 가진 집단으로서 성공에 대한 야망은 매우 강렬하다. 이들은 자아실현에 충실하고 자아실현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한 다. 이들이 갖고 있는 문화자본 때문에 생존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 되었지만 베이징에 정착하기엔 여러모로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하지만 성공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중국사회의 압축근대화 과정에서 베이퍄오의 삶의 변화 와 80후 청년세대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의 내용에 대한 기존 연구들 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도시로 이주한 베이 퍄오 청년세대들은 주어진 삶의 조건을 넘어서서 도시민으로 정착 하고자 했다. 이러한 삶의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본 연구에서는 이 들 베이퍄오 청년들의 삶을 이끄는 힘은 무엇이고, 온갖 고단한 삶 을 넘어 이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고, 자신에 대해 그리고 가족, 이웃과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고자 하는 지등의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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