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의 능선에 올라
현대시조의 능선에 오르니 현대시조의 능선이 어찌 가닥을 지어 내러 온 것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시조의 능선을 타고 오르다 보면 우리 시조가 지난날 조선 문학의 정화精華이며 시가의 본류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며 예술적 재산의 성형成形이라고 생각되어진다.
특히 근대 시조는 조국이란 어머니를 잃고 방황 할 때 비켜 설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나라를 사랑하고 다시 찾으려는 조국애로 불타는 충성심을 밝힌 시들이 많아 다른 시에 비해 국가관과 민족 사관을 온 국민이 바르게 담으라는 내용이 숨어 있는 시조들이 많았다고 본다.
돌아보면 시조는 16세기 무렵부터 노래로 아니 가곡으로 불리어지다 18세기경에는 시조창으로 노래하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초엔 가단歌壇 활동으로 깃을 단 김천택의 청구영언이 18세기 후반에는 김수장의 가곡원류가 편찬되기도 했다. 이들이 편찬한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는 다른 가집歌集 들에 비하여 수록된 작품의 수가 많고 그 편찬체제가 정연하여 3대 가집집이라 일컬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가집의 서문과 발문跋文은 공경대부에서 천민에 이르기 까지 누구나 짓고 부르는 서민의 노래로 한시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국민 문학이라고 보아진다.
한글이 반포되고 부터는 지난날의 한시를 번역한 국문시가가 나타나기도 했다.
국문시가로 불리어 진 것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선 한시로 다시 번역해 500여수가 한역漢譯되기도 했다.
한글이 반포된 이후 20세기에 들어와 창작된 것들은 노래로 부르지 아니 하고 문학 갈래로서의 특징을 살려 지금까지 어엿하게 이어지고 있다.
시조라는 명칭으로 불러진 것은 이조 영조 때로 추정되며 시조라는 명칭의 원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 그 뜻은 그 시절 당시의 불리어지던 가요라는 뜻이라 보아진다.
1920년대 후반의 최남선의 ,<조선, 국민 문학으로서의 시조>를 보면 끊겼던 맥을 다시 살려보고자 하는 시조부흥 운동과 더불어 문학 갈래의 새 옷을 입고 새집을 짓고 어엿하게 자리 잡고 살자는 뜻을 숨긴 것들로 나라를 잃고 허우적이면서도 우리이 근본을 되새기려 몸부림친 흔적이 길이 남아 오늘의 시조시인들의 가슴을 일깨워주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시조의 경우에는 거의 모두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되었던 것이며 문학으로서의 시조는 14세기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정제된 것으로 추정되어지며 1728년 영조 때에는 김천택이 전해 내려오는 시조를 모두 모아 청구영언이란 시조집을 내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최남선의 백팔번뇌가 개인 시조집으로 처음으로 태학사에서 정리 발행되게 되었다.
이 때 부터 시조의 제목을 붙이게 되었으며 시조라는 형식상의 문장보다 6구라는 시적 리듬을 타고 있음을 보고 있다. 당시 시조의 종장처리에서 남다르게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시조들은 종결어미의 꼬리를 잘라버리고 있었다. 3장 말미 3,5,4,3의 끝구가 생략되었던 것을 종결어미를 확실하게 살려 뜻을 실감나게 밝히게 되었다.
또 종장의 엄격한 규칙이 흔들리고 있다. 종장의 둘째 구절은 5자이어야 하던 것이 개화기 시조에서는 이런 제약에서 벗어나 사상事象을 옳게 표현하기위해 두어 자 더 늘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종래의 구태를 벗고 제목을 달고 종결 어미의 새로운 변화미를 살려 뜻을 옳게 밝히므로 현대 문학의 시조 시로 새 옷을 갈아입게 되었다고 본다.
이 시조의 능선에 올라 보면 구태의연하던 종래의 시조를 어떻게 하여 옛 탈을 벗어 던지고 정격시조라는 시가가 문학의 본 갈래로 인정받게 되었는가를 또 뚜렷하게 시조가 문학이란 큰 갈래로 새로운 기치를 내 걸고 어떻게 달려오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이렇게 탈을 바꾸어 문학의 본 갈래로 자리 잡게 한분이 누구인가 찾다가 백팔번뇌라는 시조를 대하고야 바로 이분이로구나 하고 우리 시조시단의 현대시조 100인선 제1호로 실린 백팔번뇌를 찾아 읽다 그를 꼽게 되었다.
백팔번뇌의 작자 소개
최남선 1890년 서울 출생 호는 육당 10세 이전에 한문과 한글을 모두 익혔으며 그의 세거지 서울에서 관상감 차남 최헌규의 2남으로 태어나 본시 자질이 총명하고 영특해 6세부터 천자문을 떼는 등 남달리 재질이 뛰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문 경전을 비롯해 신약성서를 비롯 천로역정 등 기독교 계통의 서적을 탐독했으며 서양문명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12,3세 때부터 붓을 들어 기우는 나라에 대한 비장한 글을 써서 황성신문 및 독립신문에 내기도 하였으며 일본어를 독학으로 깨쳐 대판조일 신문을 구독하기도 했다
1902년에 경성학당 입학 1904년에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 부림 제일 중학교에 들어갔으며 일행 50명중 유일하게 일어를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06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고등 사범부 리학과에 들어갔으나 모의국회사건(조선왕 내조에 관한 건)으로 그것이 국치임을 깨달아 그를 학교에 연명으로 항의 하는 안건에 서명을 받아 학교에 제출해 마침내 발의한 안건을 철회 한다는 약속을 얻어내고 학장명의로 잘못 했음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각 신문에 게재할 것을 요구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참가자 70여명 전원이 동맹 퇴학을 감행했다.
이 모든 일에 최남선이 앞장을 섰었다. 이리되어 3개월만에 일본 유학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돌아와 관인 신문관을 세우고 1908년 종합월간지 소년을 창간했으며 그 창간호에 한국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를 발표하였다.
海에게서 少年에게 처.....ㄹ썩,처.....ㄹ썩,척, 쏴.......아,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요것이 무어라,요게 무어라,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분순다.무너버린다,처....ㄹ썩,처....ㄹ썩, 척, 듀르릉, 꽉,신체시를 육당 최남선이 제일 먼저 현대시로 쓴 분이다 신시新詩의 최초라고 알려져 있는 신체시는 그가 경영하던 소년 창간호에 실린 작품인데 오늘날의 눈때로 보았을 땐 조금 서툰 시로 보이나 한문으로만 시를 쓰고 정형시인 시조시로만 쓰던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상당이 의의가 있고 혁신적인 용단勇斷이었으며 퍽 낮선시였다.그 첫연을 보면 밀려오는 새로운 물결이 낡은 사상을 무너트리고 이상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외침이었다.이 신체시가 나오게 된 연유는 당시 서양문명의 영향을 받아 발랄한 자유율自由律에 의한 사상의 표현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암담한 구름에 쌓인 민족주의를 내 세우고 신문화 운동에 앞장서는 선구자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시로 이 시도 보여진다.
처...ㄹ 썩 처...ㄹ썩 쏴....아 같은 의음어擬音語의 사용이 각 연마다 사용되고 있으나 이것은 한 실험에 지나지 않고, 못하네,굽히도다, 없도다 등은 오늘날에는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 한문 투의 시에서 벗어나 어문일치語文一致의 시를 썼다는데서대혁신이라 할 수 있다.우리나라 시사詩史에 중대한 역할을 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리라 생각는다.그의 글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샛별, 청춘, 등을 계속 간행하여 그는 신문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 선언서를 작성한 책임을 물어 체포되었다가 그 이듬해 출옥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동명)社(사) 세우고 동명을 발간하여 국사 연구에 심혈을 기우렸다.
1924년에는 시대 일보를 창간 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으나 바로 사임하고 동아일보 논설을 썼다
그의 나이 3,40대에는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을 찾아 국사를 비롯해 국학연구에 몰입하였으며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그는 민족주의자다 그리고 조선주의자다 그의 시를 보면 어디까지나 국토의 예찬이다 둘째로 민족예찬이다 셋째가 문호예찬자였다 그렇게도 나라와 민족과 곳곳의 숨어 있는 우리의 님과 문화를 사랑한 그였다.
1927년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식민정책의 하나인 조선사 편수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32년에는 중앙 불교전문학교 강사로 강의하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만주 장춘으로가 만몽일보의 고문을 지내다가 만주에 있는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교의 교수를 지낸 뒤 1942년 귀국하였다
1943년 11월14일과 20일 이틀 동안 이광수와 함께 일본 동경 메이지 대학에서 열린 대동아 전쟁 학생 총 궐기대회에서 연사로 나가 대동아 전쟁에 조선인 학생은 모두 이 성전에 참가해 꼭 승전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 것은 그가 죽어도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된다.
내 나이 열 살 때 나의 아버님께서 이 사실을 전해 들으시고 이를 어쩌나 하시며 통분해 하시던 모습을 영 지울 수 없다.
그는 1945년 3월 7일 일제 패망직전에 (매일신보)에 쓴 전력증강 최후수호의 진로라는 그의 친일 논설은 아무리 자기를 흠집 내는 것은 무고라고 변명 하드라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된 뒤 그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기소되어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 되었다.
수감 중 그가 쓴 옥중 자백서를 보면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무고 하고 있다며 진실은 그러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나 자기의 과오를 뉘우치기 보다는 자기를 변명하는 해명서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50년 6,25때에는 해군전사 편찬 위원회 위원으로 또 서울시 사 편찬 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며 그는 한국 신문학 운동의 선구자로서 자주독립과 새로운 교육 등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그는 친일 행위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를 어쩌랴 옛 말에 대지자 약우大智者 若愚란 말이 그를 두고 한 말만 같아 가슴 아프다. 역시 사람이라 먼 날을 내다 보지 못했구나 하고 자위를 해 본다
그의 저서로는 백팔번뇌(1926) 백두산 근 참기 (1927) 시조유취,(1928) 조선독립운동사(1946) 조선역사(1946)등이 있다.
여하튼 그가 문학적으로 우리에게 남겨준 나라사랑의 얼과 혼을 가슴에 담아보려 그의 저서 백팔 번뇌를 한번 들어가 보기로 한다.
百八煩惱
백팔번뇌는 작자의 서문과 제어라는 표제아래 박 한영 홍명희 이광수 정인보 등의 발문이 붙어있고 모두 108수의 시조인데 제1부 동청나무에서는 궁 거워,안겨서, 떠나서, 어쩔까 4개의 제목아래 각각 9수씩 36수가 실려 있고 제2부 구름 지난 자리에는 단군굴에서, 석굴암에서 만월대에서 천왕봉에서 등 12개의 제목아래 각 3수씩 36수 제3부 날아드는 잘새 에서는 동산에서, 새봄, 새 잔디, 봄길 등 12의 제목아래 36수가 실려 있다
작자는 서문에서 한문자 놀이의 구렁에서 건져내 우리겨레의 엄숙한 사상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어 보려 한다, 라고 했으며 자신의 주된 사상을 불함문화를 거양擧揚하는데 온 정성을 다 바쳤다고 밝혔다.
이 시조집은 현대시 최초의 창작집으로 고시조에서 근 현대 시조로 발전하는 교량적 구실을 했던 과도기적 작품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어찌 예술성이라는 잣대 하나가지고 개화기 육당의 시조를 논할 수 있겠는가?
1세기전의 작품을 현재 우리의 눈높이에서 평가 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안목으로 바라보아야 하리라 생각는다.육당이 아직은 고시조의 구투舊套를 완전히 벗지는 못했지만 행간에 넘치는 그의 정신과 패기와 용기를 보아야 하리,
그는 서구문명에 대항하는 자주적인 자세와 결의에 찬 민족주의 정신과 우리 문화의 사랑정신과 우리 민족 보존을 위해 붓을 놓지 않았던 그의 결단과 용기를 보아야 하리,
그의 시대정신인 계몽운동과 눈을 떠야 산다는 계몽 정신으로 일관돼 있지 아니 한가,자칫하면 어미와 집을 잃고 떠나야 하는 절대 절명의 벼랑끝에서 바로 눈을 뜨라고 외치는 시국선언문이요 피토하는 애국 혼이 담긴 시조요 담화였다
개화기로부터10여년이 지난 1926년에 개인 시조집을 낸 분이 바로 육당최남선님이시다.국권을 상실한지 16년이 되는해요,기미독립운동으로부터7년이 되는해였다
당시는민족말살정책이진행되는무렵이었다. 이때 문단에는 kapf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깃발이 한참 나부낄 때였다. 그들은 민족을 뛰어넘어 범 세계 노동자계급의 해방을앞세워 민족이나 민족문화는아예 돌보지않았다.
제1부 동청나무 그늘에서
과연 동청나무란 어떤 나무인가? 내 생각으로는 어떠한 고난에도 절대로 끊어지지 않고 영원하게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 것이라 생각된다.
동청冬靑 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절대로 얼어 죽지 아니하고 늘 푸른 잎을 간직한 채 곧게 자라는 나무로 알고 있다.
생각해 보면 꽃동산 같은 세상을 아무 구애받지 아니하고 살아왔다. 어떠한 간난의 구비에도 님의 빛이 마음에서 떠나지 아니했음은 우리의 태양이신 그 임이 계셨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임은 바로 우리의 단군 성조라고) 여기에 실린 글들은 내 마음의 정곡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라, 절대로 거짓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임이 내 사랑하던 그 이는 이미 낡아버렸고 소망을 앗아가 버려 잡을 수 없는 나라로 멀리 가 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으며 그러나 그 님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을 지울 수가 없다 늙고 쇠퇴한 것은 임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 까지도 그리 되고 마는 것 같다고 술회述懷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도 조그마한 세계가 있다. 내 자신을 조용히 하늘 거울에 비추어보다 망령된 생각을 지우려고 했으며 삿되고 비뚠 생각을 바로 잡으려 시조라는 그릇에 내 생각을 담아낸 것이라. 이글이 누구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고 오직 내 글로서 생각해 본 것이라고 작자는 말 했지만 그자신은 나에게는 끔직하고 대단한 구슬(정도가 지나치게 놀라운 것들)이었다고 하며 이 세간에 괜히 내 놓게 되었다고 그간의 사실들을 밝히고 겸양의 글로 술회하고 있다
내가 쓴 이글을 꼭 서랍에 감추어두고 싶었는데 이 세상 서랍에서 뒤 늦게 빛을 보게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시 그것으로 무슨 보잘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시조를 한문자 유희遊戱의 구렁에서 건져내 엄숙한 애국사상의 그릇에 담아보랴 애쓴 점이나 살펴 주기 바란다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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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구름지난자리
조선 국토 순례를 마치고 지은 36수, 다 낡아 볼품이 별로 없는 것들이라 해도 그 속에는 우리의 얼이 배 있고 넋이 숨어 있어 우리 조상의 숨결이 붙어있고 애쓴 흔적이 살아 있어 묵고 묵을수록 새롭고 향기로운 조선의 냄새는 어떤 것 보다 끔직한 내 양식이다. 라고 했으며 어떤 것이라도 우리 조상님들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그를 소홀이 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 것을 아끼고 잘 보존 해 우리 선조의 얼이 밴 것들을 자손만대에 전해주어 길이 숨겨진 얼을 밝혀 보고자 하는 숨은 뜻이 배 있는 것을 밝힌 글로 보아진다.
바로 이 강산을 순례해 감격과 찬미하는 축문의 글이라고 생각된다.
제3부 날아드는 잘새
안두삼척 案頭三尺에 제가 저를 잃어버리는 36수)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본 것이 아니라 지나다 눈앞에 나타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보고 느낀 것들과 잠시 생각에 잠겼던 것들을 적어본 것이라 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머리 앞에 에 나타난 조그마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아니하고 직관이 움직일 때 그를 적어든 것이 아니었나 생각 되었다.
百八煩惱
제1부 동청나무그늘, 첫수
궁 거워 (궁금하여)
위하고 위한 구슬(끔직히고 끔찍하게 거둠)
싸고 다시 싸노애라
(지나치게 놀랍고 놀라와 거둔 구슬, 싸고 또 싸옵니다)
때 뭇고 나빠짐을 (이지러지고 떨어짐)
임은 어이 탓 하시는고(흠잡음)
(헤어지고 떨어져 볼품없음을 임은 어이해 흠잡으시나
바칠 제 성하옵도록
나는 애써 가 왜라
( 임께 드릴 제 괜찮다 말씀 하시도록 저는 애 쓰고 있습니다)
낡아 찢기는 조국 님을 오로지 사랑하는 마을을 담아 쓴 백팔번뇌를 낡은 사상이요 볼품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게는 더 할 나위 없는 소중한 구슬이라고 하며 이것을 소장함은 나무라시지 아니하시니 계속 뜻을 밝혀 가겠다고 하는 소신에 찬 님의 뜻을 밝힌 것이라 생각는다.
안겨서의 첫 수
임 자체(때문에) 달도 밝고 임으로 해 꽃도 고아
진실로 임 아니면 꿀이 달라 쑥이 쓰랴
해 떠서 번(밝아옴) 하기로 임 탓인가 하노라
여기서 임은 바로 조국이다, 단군으로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를 거쳐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임 때문에 오늘 내가 있고 내일이란 소망의 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모든 것 조국인 님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제2부 구름이 지난자리에서. 첫수
단군굴에서 묘향산
아득한 어느 제에 임은 여기 나립신고
뻗어난 한 가지에 나도 열림 생각하면
이 자리 안 찾으리까? 멀다 높다 하리까?
성군 단군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요 우리의 뿌리이며 그 나무의 열매는 바로 우리임을 역설하고 있다. 여러 말 하지 말라 우리의 피, 우리의 사상의 근원은 바로 성군 단군임을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본원을 이야기 하고 있다.
제3부 날아드는 잘새
혼자 앉아서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는 이가 임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도다.
언듯 보면 서정시 같은 데 속내는 임을 기다리는 임, 조국 광복을 기다리는 참뜻이 숨어 있다. 자기 지신을 자조自照하는 뜻 깊은 시라고 보아진다.
육당의 시조는 형태상으로는 연작시조이다. 애국하는 사상성을 담기 위한 수단으로 시조가 선택된 것이다. 어려운 고어를 사용했다.
고풍스러운 맛에 우리 겨레의 갈급한 애국사상을 담아내기 위해 쓰인 것이라 보아진다, 이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주석을 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 보아진다.
이 모두 후학을 위한 돌보심이었다고 생각 된다.
이광수가 백팔번뇌를 두고 사뭇 주역周易이로구료 (풀기 난해 하다는 뜻)라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함이라 생각는다.
그러나 육당의 시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시조가 전통으로 꼭 있어야 할 요체는 우리가 꼭 지녀야할, 없어서는 아니 될 조국 님이란 거룩한 것이라, 잊어서도 아니 되고 남에게 내 둘려서도 아니 된다고 역설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는 것이다.
최남선의 시조를 국풍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시조를 중국의 시경의 국풍에 해당하는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가요로 보고 있음을 뜻 하는 것이라 생각 된다.
특히 밝히고 싶은 것은 최남선의 시조는 문학적 의미보다는 그 사회적 기능을 우선시 하는 교술 문학적 성격이 있다고 보아지며 그의 시정신은 어디 까지나 朝鮮心을 잊지 않은 것이라 보아진다.
우리의 민족문학 아니 민족문화 진영이 직면했던 간난의 고빗 길에서 육당은 어느새 장년이 되어 개화사상이나 계몽사상에 매달릴 그런 시기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 문학이나 문화에 매달릴 그런 시대를 뛰어넘어 민족문학전반에 뜻을 둔 사회 개조 운동에 그는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먼 날을 내다보고 가늠하는 혜안이 열려 지어낸 것이 백팔번뇌라고 생각는다
또 그가 발표한 백팔번뇌가 최선의 문학양식은 아닐 지라도 조선 국토와 조선인의 마음 조선어 조선의 음률을 통하여 조선적인 것의 요건을 두루 갖춘 것으로 그는 보았다.
특히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은 1926년에는 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대항하여 국민문학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으며 이와 맞서기 위해 시조부흥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시문학의 새로운 장을 연 육당의 시조에서는 단군이 우리의 뿌리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서구의 근대 문명이 동아시아를 타고 든 충격에서 그는 새로운 눈을 떴다 새로운 세계관이 그를 눈뜨게 했다 그래서 그는 달라졌다. 단조로운 율격. 통제된 그늘 아래서 자유로운 옷을 입고 운신 할 수 있었다. 그의 海에게서 파도소리를 철썩 철썩 연거푸 냄으로 모든 것을 휩쓰는 의성어擬聲語의 반복미를 살려 낼 수 있었던 것이 특이 하게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시조에 있어서도 국풍 4수에서는 새로운 기법을 좀처럼 쉽게 터득할 수는 없었지만 재래의 전통적인 운율에 새로운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백팔번뇌의 시조로 과감한 변화(제목 붙이기,와 3장 끝구의 살려내기 등 )를 그가 처음으로 시도 했다고 보아진다.
정형율의 파괴였다고 하기 보다는 그를 바르게 변혁했다고 보아진다. 육당은 조선 정신을 일깨우는 일에 앞장섰다고 나는 본다. 그래서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애국자다 특히 주체적인 정신을 밝히는 형식으로서의 시조라고 보아지며 그는 낡은 왕조를 비판하고 서구적인 것으로 경도傾倒되는 소박한 계몽주의 태도에서 빗겨나 현실적인 이데오르기로 다듬고자 했다.
특히 육당은 단군의 존재는 우리 민족의 시조인가 아닌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 이유를 거기에서 자신이 태어나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우리민족의 뿌리이고 스스로 나를 지키는 자존심의 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1920년 KAPF 계열에 대립한 민족문학파의 감각을 나타내기 위한 것뿐만이 아님이 시조 속에 드러나고 있다.
춘원은 시조야 말로 삼국시대보다 더 멀리서 발원한 국풍으로서 우리민족 특유의 시가체 라고 말했다 단군사상을 부활시키는 기수였다고 말했다.
벽초碧草 홍명희도 조선 사람으로 조선인으로서의 임에 대한 바른 노래라고 그의 발문에서 칭송하고 있다
백팔번뇌와 국토순례
벽초 홍명희는 발문에서 육당의 단군 논이나 백팔번뇌나 조선이라는 임을 사랑한 것은 똑 같다고 말했다 육당은 강산순례에서 이 산하에 숨어 있는 문물 모두 선조들의 얼이 모두 밴 것들이라며 그를 소중히 보전해야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조선의 낡은 구태를 모두 벗고 문물 모두 바르게 잡아가자는 운동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신천지 개조운동의 기조基調를 이루는 지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어디까지나 시조는 자기를 살리는 사상이어야 하며 우리 민족 전체를 안고 가야할 새 그릇이라고 그는 궁거워 에서 또는 안겨서 에서 말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조선의 국토는 산하 그대로가 우리의 역사며 철학이며 시며 정신이라고 말했다
그의 시조는 우리자신의 주체적 정신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슬픔과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로 잡아야 할 남다른 번뇌를 곱씹다가 새 하늘을 밝히는 데서 나온 시조시라고 보았다.
그것은 시조의 형식 자체가 아니라 임을 숨긴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님의 체취이며 임의 멀어진 모습이며 부서져 가는 우리의 얼굴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에 없어져가는 민족혼의 자취를 비춰볼 수 있는 서정적인 거울이기도 했다
자신의 비탄의 젖은 얼굴을 이 거울에 비춰 노래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서글픔 속에서도 조선 사랑의 열정이 솟구치고 있었으며 반대 해석자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숨겨진 것이란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사유를 알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고문헌 : 육당 시조의 의미 ...신범순
한국민족문학 대 백과 사전
백팔번뇌의 소고 ......최순향
한국학 카폐...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