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천사’ 마가렛 간호사 영면
향년 88세
20대부터 소록도서 봉사…40여년간 한센인 위해 헌신
소록도 성당, 월말까지 추모 기간…고흥·서울에 분향소
시신은 기증…녹동초 학생들 바자회 성금 끝내 못 전해
평생을 고흥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을 돌봐온 마가렛 피사렉(Margaritha Pissarek·한국이름 백수선) 간호사가 지난달 29일 고향인 오스트리아 현지에서 선종했다. 향년 88세.
소록도 성당과 한센인들은 10월 한 달을 마가렛 간호사 추모 기간으로 정하고 매일 마가렛을 위한 위령 기도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의 영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 중구 쌍림동에 있는 간호협회회관 앞과 고흥 도양읍에 있는 마리안느와마가렛기념관에는 애도를 표하기 위한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3일 김연준 나주빛가람동성당 주임신부(전 사단법인 마이안느와 마가렛 이사장)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오후 3시 10분께 마가렛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한 요양원에서 급성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장례미사는 고인이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낸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시립 요양원 내 경당에서 현지 시각으로 오는 7일 오후 3시 30분께 열린다.
마가렛은 1966년부터 39년간 소록도 병원의 간호사이자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한센인들을 위해 묵묵하게 사랑과 봉사, 나눔을 실천해왔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오스트리아 의과대학에 기증될 예정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국적인 마가렛은 1955년 인스브루크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12월, 경북 왜관 한센인 정착지에서 일했다. 이어 1966년 10월 벨기에 ‘다미안 재단’에서 파견한 의료진의 일원으로 소록도에 오게 됐다.
그는 1962년 2월 소록도에 온 마리안느 스퇴거(여·89)간호사와 함께 평생을 이곳에서 헌신했다.
20대에 소록도에 왔던 마가렛은 2005년 건강이 악화되자 부담을 주기 싫다는 이유로 70대 ‘할매’가 돼 오스트리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의 재활치료를 도왔고 관련 의료시설을 건립하고 영아원과 보육시설 도입에도 힘썼다.
푸른 눈의 두 ‘할매 천사’는 소록도 한센인들을 편견 없이 대했다. 한센병을 천형(天刑)으로 여겨 모든 이들이 한센인들을 외면할 때 두 사람은 환자들의 환부를 맨손으로 만졌으며, 무엇보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한센인들을 돌봤다.
간호사인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수녀가 아니지만 ‘수녀’로 불렸다. 소록도에 온 초창기에 두 사람의 삶이 거룩하고 성스러워서 누군가 ‘수녀님’이라고 부르면서 호칭이 ‘수녀’로 굳어졌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큰 할매’(마리안느), ‘작은 할매’(마가렛)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이들과 함께 지내며 봉사해 온 김 신부는 “마가렛 간호사는 한센인들의 어머니이자 누나이자 언니, 동생과 같은 존재였다”며 “한센인들을 주인으로 온전히 섬기며 끝없이 도왔던 분”이라고 회상했다.
김 신부는 ‘사단법인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설립하고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 마가렛’을 제작했다. 이 영화를 관람한 녹동초 학생들은 마가렛의 방을 보며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평생을 옷 한벌 사입지 않고 욕심없이 살아온 마가렛의 삶에 감동받은 학생들은 최근 바자회를 열어 마가렛을 위한 돈을 모았다. 학생들은 지난달 27일 모은 돈으로 마가렛과 마리안느를 위한 옷 2벌과 마가렛에게 전달할 50만원을 오스트리아에 택배로 발송했다.
옷과 돈은 28일 오스트리아에 도착했지만 마가렛은 옷을 입어보지도 못한 채 하루 뒤 숨을 거뒀다.
정부는 마리안느와 마가렛에게 1972년 국민훈장, 1983년 대통령표창,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여했다.
전남도는 지난 2018년 마가렛과 마리안느를 명예 전남도민으로 선정했다. 또 같은 해 전남도는 노벨평화상 범국민 추천위원회를 꾸려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고흥군과 (사)마리안느와 마가렛, (사)대한간호협회 등은 사택 등록문화재 지정, 기명우표 발행 등 다양한 홍보사업도 펼쳤다. 고흥군은 ‘마리안느·마가렛 봉사대상’을 제정해 올해 3회째 시상식(10월 27일)을 계획중이다.
한편, 대한간호협회는 (사)마리안느와 마가렛, 고흥군, 전남도 등 4개 기관과 서울 중구 쌍림동에 있는 간호협회회관 앞과 고흥 도양읍에 있는 마리안느와 마가렛기념관 등 2곳에 이달 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국민분향소를 설치할 예정이다.
< 광주일보 /김다인 기자 kdi@kwangju.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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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2015년 8월 12일 참나에 실었던 글입니다.
[ 소록도에서 사랑을 베푼 두수녀의 감동적인 이야기 ]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온
외국인 수녀 2명이 편지 한장 달랑 남기고 떠났습니다.
소록도 주민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채일손을 놓고 성당에서
열흘이 넘게 두 수녀님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
그리고 마가레트(70)수녀가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떠났습니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내 디뎠습니다.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안 은채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습니다.
또 외국인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주고 한센녀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에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습니다.
두 수녀는 이른 새벽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란 평지 한 장만을 남겼습니다.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말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때라 생각했다" 고 했습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용서를 빈다"고 했습니다.
김명호(56)소록도 주민자치회장은
"주민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 두 수녀님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였다"며
"작별인사도 없이 섬을 떠난 두 수녀님 때문에
섬이 슬픔에 잠겨있다"고 말했습니다.
43년간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한 두 수녀는 오스트리아 간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이 소속 수녀회에
전해지자 1962년과 66년에 차례로 소록도 에 왔습니다.
환자들이 말리는 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습니다.
오후엔 손수 죽을 쑤고 과자도 구워 바구니 담아들고
마을을 돌아 다녔습니다.
소록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습니다. 꽃다운 20대부터 수천 환자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 왔는데,
지금은 일흔 할머니가 됐습니다.
10여년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습니다.
병원측이 마련한 환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습니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온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되어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습니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때 가져 왔던
헤진 가방 한개만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외로운 섬, 버림의 섬, 건너의 섬에는
두 성녀가 다녀가신 곳인가요
상처받은 사람들을 반세기 가깝게 보살핀 두 수녀님의 사랑의 향기는
바람에 날려 어두운 곳을 밝히고 추운 세상을 덮혀 주리라고 믿습니다.
두 분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는 날,
멀어지는 섬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20대부터 40년을 살았던 소록도였기에,
지금 수도원 3평 남짓방 한 칸에 살면서,
소록도가 그리워
방을 온통 한국의 장식품으로 꾸며놓고
오늘도 '소록도의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방문 앞에는 그분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말로 써 있다고 합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돼라'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요!"
헌신하신 두분 수녀님께 감사드립니다
<출처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