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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문서를 작성하기 위한 한국어 초본이라 어색함이 있습니다. AOC는 Active Obedience of Christ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약자이고, CAO는 Christ's Active Obedience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약자이고, CW는 Covenant of Works(행위언약)의 약자입니다. )
St. Augustine of Hippo (354-430)
어거스틴과 the doctrine of AOC의 관련성에 대한 Woo 교수의 주장의 타당성을 논의하기 전에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사실 하나를 말하고 싶다. The doctrine of AOC에 관한 다른 표현이나 유사한 개념이 이미 어거스틴에게 있었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사실상 의미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CAO 이론에 대한 논쟁은 종교개혁이 로마교회로부터 회복해 낸 이신칭의 신학을 확실하게 견지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발생된 논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에게 전가되는 의로 인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칭의를 믿는 신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논쟁이다.
루터를 예로 말해보자. 루터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의는 인간에게는 전혀 속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루터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의는 인간에게는 없는 외래적이고 낯설은 의라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단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전가되어진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이다 (Mcgrath 1994, 134; Jo 2018, 85).
루터, 칼빈, 그리고 다른 종교개혁자들은 신자를 의롭게 만드는 의를 인간이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고, 또 인간에게 내재하는 의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도에게서 믿는 자들에게 전가되어진 그리스도의 의라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자들이 죽은 후 종교개혁 신앙이 유럽의 개신교회들에게 설명되고 정착되는 과정에서 The doctrine of AOC가 등장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의 원리를 종교개혁 직후의 개신교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과정에서 The doctrine of AOC가 등장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믿음으로 얻어지는 칭의를 개신교 신자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The doctrine of AOC가 대두되었다 (Cunningham 1979, 404).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대략 1500년대 후반부터 중립적이고 무흠 상태로 창조된 아담이 영생을 얻기 위해 율법준수를 요구받았다는 the CW 이론의 초기 형태가 유럽과 영국에서 출현했다 (Perkins 1626, 1:32; Won 1998, 48).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칼빈의 후계자 Theodore Beza에 의해 그리스도가 모든 율법들을 완전하게 준수 공로에 근거하여 죄인들을 위해 영생을 청구했다는 이론이 등장했다 (De Campos 2009, 90).
중요한 사실은 죄인이 의로워지는데 필요한 모든 의가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이론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능동적 순종 이론 형성의 초기 인물인 베자를 비판하면서 죄용서 받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 (롬 1:17, 3:22; 고후 5:21)의 전가를 배척하고, 단지 죄용서를 주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의의 전가만을 주장한 요한 피스카토르 (De Campos 2009, 90; Kim 2016, 172-175; Woo 2022, 11; Lee 2021, 180)가 거기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이후의 실천적 행위를 더 중요한 칭의의 요건으로 강조한 리차드 백스터 (Packer 1990, 158; Shin 2016, 163), 존 웨슬리 (Murry 1991, 18-19; Yoo 2021)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과 칭의의 관계, 즉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자체를 부정하는 새 관점 학파 학자들인 E. P. Sanders (2003, 492), T. Wright (2003, 14-15)도 마찬가지이다.
그 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면서 동시에 조금 충격을 주는 내용이 하나 있다. 칭의 신학에 있어서 어거스틴도 위 인물들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대해 Zach Howard (2022)가 한 말이 그 사실을 말해 준다: "존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외의 다른 어떤 저자보다 어거스틴을 더 많이 인용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어거스틴이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은혜라는 진리를 옹호한 것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는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그들이 원하는 명료함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칭의의 의미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교리를 다루는 데 모호한 점이 드러납니다."
Howard의 말은 칼빈이 여러 분야에서 어거스틴의 글을 많이 인용하고 그의 신학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 이유는 어거스틴이 구원을 인간의 공로와 연관시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에 관해서는 어거스틴의 글을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Howard (2022)의 또 다른 말을 보자: “칭의에 관해 글을 쓸 때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반복적으로 인용하거나 언급하면서 행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강조했습니다. 어거스틴에 대한 이와 같은 동의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어거스틴이 칭의 신학이 성경에서 벗어낫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Howard에 의하면 칼빈은 어거스틴의 칭의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했다. 과연 칼빈이 어거스틴의 칭의 신학이 성경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했을까? 놀랍게도 칼빈이 그 시대의 스콜라 학파의 칭의 신학을 비판할 때, 동시에 어거스틴의 칭의 신학도 스콜라 학파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언급하는 내용이 확인되었다:
“스콜라 학파들은 점점 더 타락해서 드디어 파멸에 빠지게 되었고 일종의 펠라기우스주의로 전락하였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칭의에 대한 어거스틴의 정서(분위기)와 그가 칭의를 설명하는 방식은 그대로 수용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칭의로부터 인간의 공로를 벗겨내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은 대단한 박수를 받아야 할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중생되는 은혜(칭의)를 성화의 영역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해 성경은 우리를 다른 방향을 인도합니다. 우리 자신의 행위(성화)로부터 시선을 돌려서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기독교강요, 3.11.15).
맥그리거 (2005, 47) 도 어거스틴의 칭의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고 지적하였다:
“칭의에 대한 어거스틴의 기본적인 정의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그 전체적인 의미가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을 의롭다 하신다는 의미가 하나님께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실제로)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심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게 만드신다는 의미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Augustine, De spiritu et littera xxvi, 45).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영적, 도덕적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분명히 일어나는 것으로서, '의롭다 여겨진다', '의로운 상태로 취급된다'는 순수한 의미의 칭의에 대한 개념이 어거스틴에게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의가 사람에게 침투하는 것 같은 어거스틴의 칭의 이론은 매우 모호하다: 어거스틴에게 칭의는 불경건한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원인을 포함하는 과정이다. 어거스틴에게 칭의는 불경건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확실히 어거스틴의 칭의에 대한 이해는 믿는 자에게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변화와는 아무 상관 없이 주어지는 종교개혁의 칭의 신학과 다르다. 칼빈 (1559, 3.11.11, 3.11.21) 은 신자가 의를 얻는 것은 곧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칼빈은 신자의 성품이나 행위의 변화를 칭의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종교개혁 신학에서 칭의는 인간의 내면적 상태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칭의이다. 루터에게 칭의는 인간에게 전혀 내재하지 않는 외래적이고 낯설은 의가 전가되어 이루어지는 칭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은 사람의 성품이나 행위와 무관하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사람에게 전가되는 의로 이루어지는 칭의이다 (Luther 1978, 136; Jo 2018, 85). 그러나 어거스틴은 성화 속에 칭의를 두었고, 외부에서 전가된 의가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되어 인간 속에 내재하는 의를 말하였다 (Jo 2018, 64).
그러므로 Woo 교수의 어거스틴에게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의 흔적이나 유사한 개념을 찾으려는 시도는 시작부터 타당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에게서 전가되는 의로만 인간이 의인이 된다는 의의 전가 칭의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주입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내면의 변화를 칭의에 포함시키는 어거스틴의 신학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이론은 같은 방향의 신학이 전혀 아니다. 다시 말해 어거스틴의 신학 구조는 죄인을 의롭다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사람 대신 율법을 다 지켰다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
Woo 교수가 어거스틴에게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개념이 나타났다고 설명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Woo 교수는 “지상에서 율법을 다 지키신 그리스도에 대한 어거스틴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어거스틴의 율법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의 ‘전체 그리스도(totus Christus)’ 사상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Woo 2022, 20)라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의 전체 그리스도 이론은 그리스도의 몸이 지상의 신자 전체로 구성된다는 이론인데,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어거스틴의 독특한 표현이다 (20). 간단하게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들이 곧 우리 자신들이 행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다 (21).
Woo 교수는 어거스틴의 totus Christus 사상이 그의 시편 55편으로 설교할 때 잘 나타났다고 했다. 어거스틴이 말한 ‘율법의 마침’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준수하신 것이 곧 우리 모두가 율법을 준수하신 것과 같다는 totus Christus 이론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에 대한 어거스틴의 다른 표현이라고 은근하게 주장하였다 (Woo 2022, 22-23).
Woo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어거스틴의 율법의 마침 개념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개념과 같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여기의 마침은 소진이 아니라 완성을 뜻한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기에, 그분의 완성은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는 무엇을 행하든지 그분께 가져간다. 그러면 그분 안에서 완성을 경험한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신자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았다” (Woo 2022, 24).
로마서 10:4절의 “율법의 마침” (the end of the law)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관한 논쟁의 최고의 이슈이다. 찬성자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율법 조항들을 일일이 완전하게 지켰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반대자들은 죄인에게 죽음을 요구하는 율법의 정죄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심으로 죄인들에 대해 율법의 요구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만들었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Woo 교수는 그리스도께서 율법 조항들을 완전하게 지키신 것이 곧 우리 모두가 율법준수한 것과 같으므로 우리에게 영생의 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어거스틴이 이해했다고 추론하였다 (Woo 2022, 24).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율법 조항들을 일일이 완전하게 지켜서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로마서의 저자에 의해 쓰여진 갈라디아서의 3:13절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었는지 잘 설명하여 준다: “Christ has redeemed us from the curse of the law, having become a curse for us (for it is written, “Cursed is everyone who hangs on a tree)”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NKJV). 그리스도는 죄인들이 받아야 할 율법의 요구, 다시 말해 죄인에게 하나님이 부과하시는 정당한 죽음을 대신 당하심으로 자기를 믿는 죄인들에게 더 이상 율법의 요구가 남지 않게 만들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율법의 마침의 의미이다 (Suh 2018a, 28, 124; 2018c, 167).
어거스틴이 이것을 몰랐을까? 어거스틴이 이 방식으로 율법의 마침을 해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아담을 스스로 율법준수의 공로를 통해 영생을 얻어야 하는 임시적이고 중립적인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보지 않았다. 또한 어거스틴은 또한 아담을 일정 시간 후에 죽어야 할 사람으로 창조되었다고 보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는 한 죽음이 없는 사람으로 창조되었으나, 그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보았다 (Bawuman 1998, 9).
이것은 어거스틴이 아담이 자기에게 찾아올 죽음을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율법 준수에 성공한 후 그 공덕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 영생을 청구해야 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비슷하거나 다른 종류의 표현이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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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른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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