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텍사스 오스틴장로교신학교 정동현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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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에 나타난 부활 신앙의 신비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탄생했다.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을 목격한 이들은 부활의 메시지를 로마제국 곳곳에서 선포했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은 공동체에서 부활하신 분의 현존을 경험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은 고대 신조들(니케아 신경, 사도신경 등)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오늘날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으셨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도 마침내 부활할 것임을 고백한다.
예수가 매장된 무덤이 비었다는 선포, 그리고 일으키심을 받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초기 기독교 전승은 그의 초인적 비범함을 자랑하기 위해 발전된 것이 아니었다. 부활에 대한 현대인의 역사적, 과학적인 변증이 기독교 신앙고백의 진리 됨을 더욱 강화해주는 것도 아니다. 셜리 거스리(Shirley C. Guthrie)가 잘 지적했듯, “설령 예수 부활을 확증하는 의학적 기록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셨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며, 예수의 부활이 죄와 악의 권세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는 점을 증명해주지도 않는다.”1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세력이 힘을 잃었으며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신앙의 신비이다.
이 글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현현, 죽은 자들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로 시작된 종말의 시나리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 그 몸의 특성에 관한 바울의 긴 담론인 고린도전서 15장 가운데서 대표적인 두 단락(15:3-8, 20-24)을 살펴보고, 더불어 고린도후서 5:13-15를 숙고함으로써 설교자들의 부활절 설교를 돕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신앙의 신비를 과거(부활 현현의 목격자들)와 미래(부활과 세계의 종말), 그리고 현재(부활하신 분과 더불어 사는 삶)라는 시간의 축에 맞추어 생각해볼 것이다.
과거: 부활 현현의 목격자들
나도 전해 받은 것을 내가 여러분에게 최우선으로 전해 드렸으니까요. 그리스도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성경대로 죽으셨다는 것과, 그분이 무덤에 모셔졌다는 것과, 3일째 날에 성경대로 일으킴받아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 보이셨고 다음으로는 열둘에게 나타나 보이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다음으로 그리스도님이 500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한꺼번에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습니다. 더러는 잠들기도 했지만요. 그런 다음으로 야고보에게 나타나 보이셨고, 그다음으로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이른둥이나 다름없는 나에게도 나타나 보이셨습니다.(고전 15:3-8, 이하 새한글성경)
고린도전서 15장의 첫 부분은 바울이 곳곳에 전하고 다닌 초기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추측하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본문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전에 구두로 전해주던 복음을 편지로 한 번 더 상기시키고자 한다.(고전 15:1) 그 복음은 바울 역시 다른 누군가로부터(즉 바울보다 앞서 신자가 된 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전승이다.(고전 15:3)2 그 복음의 내용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죽음, 매장, 부활에 대한 선언이다.3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매장되셨으며, 삼 일째에 일으킴을 받으셨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이 모두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4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다고 말하는데, 이 역시 바울이 전해 받은 전승일 것이다. 차례대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 매장, 부활에 이은 이 네 번째 행동(현현)에 대해서 바울은 “성경대로”라는 말을 붙여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목격한 이들이 누구인지를 길게 나열한다. 필자는 여기 언급된 목격자의 목록을 다음 표와 같이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 소괄호 안의 내용은 고린도전서 15:3-8에 나오는 것은 아니고, 필자가 추가한 것이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재림, 곧 최종적인 현현은 임박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3-8은, 짧은 글에서는 다 다룰 수 없는 다양한 주석적, 역사적, 신학적 질문을 야기한다. 세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첫째, 바울은 게바, 즉 베드로를 부활 현현의 첫 목격자로 꼽는데, 이는 복음서에서 여인들을 빈 무덤의 첫 목격자(막 16:1-8, 눅 24:1-10) 혹은 예수 현현의 첫 목격자(마 28:9-10, 참조. 요 20:11-18에서는 한 명)로 내세운 것과 긴장 관계에 있다. 이는 서로 다른 전승의 증거일까? 아니면 동일한 전승을 바울 편에서, 또는 복음서 저자 편에서 의도적으로 재진술한 것일까?
둘째, 게바 다음으로 언급된 목격자는 “열둘”이라는 숫자로 표시되는데, 이는 아마도 예수의 열두 제자를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복음서에 따르면, 가룟 유다는 이미 스스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에 열한 제자만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다.(마 28:16, 막 16:14, 눅 24:33) 그렇다면 바울은 왜 열두 명이라고 했을까? 두 번째 그룹에 나오는 “사도들”은 열두 제자와는 전혀 다른 그룹인가?
셋째,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보이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목격자 명단 맨 끝에 집어넣어서, 비록 순서적으로 늦고 또 자격 면에서 미달일지 모르지만(고전 15:9), 자신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임을 역설한다. “예수께서 바울에게 보이셨다.”라는 내용은 바울이 물려받은 복음 전승의 일부가 아니라, 바울 자신이 추가한 부분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게바에서 시작해서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을 동일한 동사(오프테, ὤφθη, “그가 보이셨다”)를 사용해서 표현한다.7
그런데 바울은 부활한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그분을 만나지 않았던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이야기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비롯한 몇몇 이들에게 몸으로 나타난 이후 승천하셨고(눅 24장, 행 1장), 바울의 그리스도 체험과 회심(사도행전의 기사에 따르면 빛과 소리로 경험)은 그 이후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발생한 일로 이해된다.(행 9장)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나타나 보이신 것을 그 이전의 다른 증인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것과 동일한 단어로 묘사한다.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본 것일까? 사도들도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설교자들이 단일 설교에서 이러한 주석적, 역사적, 신학적 질문을 모두 다 다룰 것까지는 없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탐구가 부활절 설교의 주된 초점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5:3-8에서 바울의 논점은 무엇인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쓸 때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이들을 설득하려 함이 아니었다. 바울은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는 말을 명시적으로 하지 않으며,8 더구나 부활하신 예수의 몸이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도 자세히 서술하지 않는다.(그러나 고린도전서 15:35-57에서 성도들의 부활체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한다.) 다만 15:12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킴받아 부활하셨다는 것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말하기를,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즉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 고린도교회의 쟁점은 과거의 사건인 그리스도의 부활 여부가 아니라, 죽은 사람들이 장차 부활할 것인지에 대한 여부였다.9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점을 이미 받아들였다. 이 대전제를 가지고 바울은 15:12-19에서 ‘어떻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으면서도 장차 여러분이 부활할 것은 믿지 않는가?’라고 물으며 그 문제점을 교정하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은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질문하도록 이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며, 바울 역시 이 본문에서 자신을 포함하여 부활하신 분의 목격자를 나열한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듯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특별한 인물에게 일어난 단회적인 사건에 국한되지 않는다. 부활의 실재는 우리의 미래를 약속한다.
미래: 부활과 세계의 종말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으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들어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죽는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만 저마다 자기 순서에 따라 그렇게 될 겁니다. 첫 열매인 그리스도님이 첫째이시고, 다음으로는 그리스도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다음에 끝이 옵니다. 그때에 그리스도님이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겁니다. 그때에 모든 지배와 모든 권력과 세력을 없애 버리실 겁니다.(고전 15:20-24)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일종의 귀류법(歸謬法)을 통해 논증하는 고린도전서 15:12-19에 이어서, 바울은 15:20-24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시작된 종말의 시나리오 진행을 묵시적이고 우주적인 용어로 그려낸다. 로마서 5장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는 것과 유사하게 여기서도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각각 인류의 대표 격으로 그리면서 그들이 인류에게 가져온 효과를 묘사한다. 아담을 통해 죽음이 들어왔고 모든 이들은 그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은 자들의 부활이 들어왔으며, 따라서 모든 이들이 그 안에서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점과 같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신비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열어놓으셨음을 선언하는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에 있을 일련의 사건들이 이제 곧 전개될 것임을 알려주는 신호탄과 같다. 첫 열매인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곧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들 역시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곧 끝이 오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넘기실 때이며 땅 위와 하늘의 모든 권세가 폐하여질 때이다.(고전 15:24) 바울은 마지막으로 멸망받을 원수가 다름 아닌 “사망”이며, 마침내 아들 자신도 아버지의 권세 아래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실 것임을 선언하며 장엄한 곡조를 마무리한다.(고전 15:25-28)
고린도전서 15:20-24의 묵시적 메시지는 우주적 종말의 긴박성과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에 다시금 설교자와 그리스도인의 시간표를 동기화하도록 권면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반복되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은 질적인 차원에서 차이가 없다. 생명체는 탄생과 성장, 노화와 사멸을 겪지만 ‘세상은 어제와 같고’ 다시 그 시간은 되풀이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20-24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의 시간이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시간’에 살고 있다.10 그리고 “우리가 믿기 시작했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있다.(롬 13:11)
비록 우리가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와 정치적·군사적 불안정성 속에서, 대규모 전염병의 위협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인류 문명의 파국을 염려하는 시대를 살아가지만, 이 본문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을 전한다. 이것은 세계가 멸망할 동안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안전하게 건짐받을 것이라는 탈출의 약속이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피조세계 전체가 새롭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전한다.(롬 8:18-22) 이 굳건한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현재를 빚는다.
현재: 부활하신 분과 더불어 사는 삶
우리가 정신이 나갔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이며, 정신이 멀쩡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님의 사랑이 우리를 휘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분이 모두를 위해 죽으셨고, 그래서 모두가 죽었다고 판단합니다. 곧 그리스도님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산 사람들이 더는 자신들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5:13-15)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미래에 있을 종말의 완성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성큼 끌고 들어온다. “그래서 누구라도 그리스도님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옛것들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들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바울은 이 구절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개인을 새로운 창조물로 볼 뿐 아니라,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님께서 개시한 새로운 창조의 영역 안에 있음을 선언한다. 새로운 창조를 바로 지금, 손에 닿을 거리에 있는 실재로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고통과 일그러진 현실에 눈을 감고 아름다운 측면만을 떠올리고자 하는 ‘정신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겪은 고난에 대해 그 어떤 서신에서보다도 더 자세히 보도한다.(고후 4, 6, 11장) 언제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지고 여기저기로 다닙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고후 4:10)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세상의 시간에 질적인 변화가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현재는 사망 권세에 붙잡힌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시간, 그리스도의 시간, 새 창조의 시간이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그 확신에 의지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13-15에서 담대하게 말한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곧 모든 이들을 위한 죽음이고, 이는 모든 이들이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왜 ‘모든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이들의 죽음’과 동일시되는가? 왜 그리스도가 모든 이들을 대표하는가? 바울은 어떤 논리적 추론의 결과로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먼저 바울을 찾아오셨기 때문에, 혹은 바울의 용어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바울 안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갈 1:15-16) 바울은 그 빛에 의해 그리스도의 수치스러운 십자가 죽음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의 경전을 다시 읽고 해석하게 되었으며, 이방을 향한 소명을 발견했다. “그리스도님의 사랑이 우리를 휘몰기 때문”(고후 5:14)에,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든 아니든 간에 자신의 삶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붙들려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이는 바울 자신에게뿐 아니라 그의 수신자들, 나아가 여전히 부활신앙의 신비를 경험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 그리스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것은 산 사람들이 더는 자신들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는 것”(고후 5:15)이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도 동일한 논점으로 권면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으니까요. 곧 죽은 사람들과 살아 있는 사람들 모두의 주님이 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가, 왜 그대의 형제자매를 비판합니까? 또 그대가, 왜 그대의 형제자매를 업신여깁니까?(롬 14:8-10)
형제자매를 업신여기는 이는 곧 부활의 신비를 업신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활절 설교 본문으로 고려할 수 있는 고린도전서 15장과 고린도후서 5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의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이제 부활주일로부터 시작하여 7주간 동안 지속되는 부활절기의 끝에 성령강림절이 찾아온다.11 다음 글에서는 성령강림절의 설교를 돕는 바울서신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註)
1 Shirley C. Guthrie, Christian Doctrine, 50th Anniversary Edition (Louisville: WJK, 2018), 273.
2 그러나 복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고 어떠한 인간적 전승의 가능성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갈라디아서 1:11-12도 참고하라. 이 점에서 고린도전서 15:3과 갈라디아서 1:11-12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한다.
3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더 상세한 재구성은 Udo Schnelle, Apostle Paul His Life and Theology, trans. M. Eugene Boring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5), 404-405를 참고하라.
4 여기에서 성경은 물론 유대인의 경전(우리에게는 구약성경)을 가리키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책이나 어떤 본문을 가리키는지 자세히 밝히지는 않는다.
5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가 아니라, 주의 형제 야고보(갈 1:19, 2:9)를 가리킨다.
6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초창기의 제자들과 예수의 추종자들(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은 계속되는 예수의 현현에 이어서, “그 왕국의 도래인,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그리스도 현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파울라 프레드릭슨, 정동현 옮김, 『바울, 이교도의 사도』(도서출판 학영, 2022), 194[원서: Paula Fredriksen, Paul The Pagans Apostl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7), 79]. 시간이 흘러 기원후 50년대 중후반에 편지를 쓰고 있던 바울은, 편지의 수신자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고전 1:7)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7 칠십인역에서 이 동사의 쓰임을 고려할 때, 바울은 그리스도 현현을 일종의 하늘로부터의 신현(Theophany)과 유사한 유형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Michael Wolter,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trans. Robert L. Brawley (Waco: Baylor University Press, 2015), 26.
8 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부활 현현에 대해서만 나오고, 빈 무덤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오랫동안 지적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한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이 예수 부활에 관해 사용하는 동사들(ἀνίστημι나 ἐγείρω)의 의미론을 살펴볼 때, 예수가 묻힌 무덤이 비었다는 점은 이미 바울의 부활 이야기에 전제되어 있다. John Granger Cook, “Resurrection in Paganism and the Question of an Empty Tomb in 1 Corinthians 15,” NTS 63 (2017): 56-75.
9 어떻게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부활은 믿지 못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이는 이방인 출신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이교적 신화 속에 익숙했다는 점을 가정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세계의 신화적 이야기 속에서는, 특별한 영웅들이 죽음 이후 소생하거나 신들의 영역으로 승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교적 환경에서 온 고린도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별한 인물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말에 있을 보편적인 부활(이는 독특하게 유대 묵시적인 사상이다.)의 경우, 이러한 이교적 환경에서 온 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했을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Paul J. Brown, Bodily Resurrection and Ethics in 1 Cor 15 Connecting Faith and Morality in the Context of Greco-Roman Mythology, WUNT II/360 (Tübingen: Mohr Siebeck, 2014).
10 L. Ann Jervis, Paul and Time Life in the Temporality of Chris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23).
11 주님의 부활을 송축하는 것은 부활주일 단 하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활주일 이후로 7주에 걸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선포하는 시기 전체는 부활절기(Eastertide, Easter season)라고 불린다. Presbyterian Church(U.S.A.), Book of Common Worship (Louisville: WJK, 2018), 316.
정동현|미국 에모리대학교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텍사스주의 오스틴장로교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Pauline Baptism among the Mysteries: Ritual Messages and the Promise of Initiation이 있으며, 역서로는 『바울, 이교도의 사도』, 『신약학 연구 동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