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58년 개띠 인생 | |||||||
| |||||||
′58년 동갑내기들의 우정과 인생역전을 그리고 있는 ‘마이너리그’에 등장하는 작중 인물 형준의 독백이다. 아직 710만 명이 생존해 있는 전후 베이비부머(1955년~1963년생) 세대의 한 중간에 태어나, 베이비부머 세대 중 생존 인구는 ′61년생이 가장 많지만, 사람들은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존재로 61년 소띠나 57년 닭띠, 59년 돼지띠를 꼽지 않고, 58년 개띠를 상징적 존재로 부른다. 46년 개띠도 있고, 70년 개띠도 있지만 그 어떤 띠도 이렇게 유별나게 구분되지는 않았다. 58년 개띠인 필자가 다녔던 당시 호서남국민학교는 한반에 75명이 수업을 듣는 콩나물 교실이었고, 그래도 교실이 모자라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 다녔던 저학년 과정, 초등학교 4학년 때 글자 수 393자의 국민교육헌장이 만들어지고, 이를 암기 하지 못하면 언제나 청소 당번이 되었고, 문경에서도 중학교 입시제도가 무시험 평준화로 바뀐 첫 해, 당시 점촌 인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문경중학교를 진학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당시 점촌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고 계셔서 ‘너는 누가 뭐라 해도 점중으로 진학해야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본인의 선택의지와는 상관없이 ‘뺑뺑이 세대’ 1회로 문경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당시 지역 최고의 명문으로 입시를 치르고 들어 온 선배들을 가르치시다가 우리들이 학력차가 많이 난다고 생각했던 선생님들은 언제나 선배들과 우리를 비교하며 말씀 하셨고, 명찰에서부터 선배들은 흰색 바탕인데, 우리는 노란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이름을 새겨 선배들 보다 눈에 확실히 띄는 1.5배나 큰 규격의 명찰을 달고 다니다 보면 이는 선배들과 우리를 구분 시켜주는 확연한 신분증이었다. 일설에는 당시 동갑내기인 최고 권력자의 아들 때문에 입시제도가 바뀌었다고 했지만,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는 서울에 연합고사가 처음으로 시행되어 서울로의 고교 진학이 막히고, 고교 때는 학생회가 학도호국단으로 조직되고, 총검술 등 교련 수업을 열심히 받았고, 우리가 입학한 몇 년 뒤에는 대학이 졸업 정원제로 바뀌어 입학이 쉬웠지만 우리는 대입시에서도, 취업에서도 사상 최고의 경쟁률과 늘 좁은 문이었다. 대학시절에는 유신의 마지막 시기를 보냈고, 19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데모와 긴급조치로 대학에는 무장군인이 배치되어 출입이 통제되었고, 수업을 전혀 안 받고 리포트 제출만으로 학점이 나오고 졸업장을 받았다. 직장에서 중견 간부가 되었을 때는 세계화와 정보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짧은 외국어와 독수리 타법으로 힘겹게 살았고, 1998년 IMF 외환 위기에는 40대 초반에 실직하는 친구들도 나왔다. 그런 58 개띠가 아직 직장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뒤늦게 복이 터졌다. ‘60세 정년 연장법’으로 정년이 58세인 직장에 다니는 58 개띠는 내년이 정년이지만 2018년까지 정년을 연장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금 피크제 등이 시행 되지 않으면 자식들이 취업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 질 것 같은 고민도 있다. 1958년생은 어딜 가도 많이 마주친다. 아직 약 80만 명이 활동하고 있고, 사상 최고의 취업난과 입학난을 뚫고 생존한 까닭에 경쟁력이 강한 까닭이다. ′58 개띠는 힘든 인생 여정을 같이 걸었기에 어딜 가도 동질감이 있다. 58년 생 시인 이진영의 시 ‘58년 개띠’가 내 가슴에 와 닿는다. 내안에/ 개 한 마리 사네/ 멍, 멍, 짖으며/ 오늘도 하염없이/ 지평선 흘러가네. | |||||||
|
첫댓글 그러하니 더욱 ... 항상 즐겁게 일하고 맛있게 사세요 ^ㅎㅎ^
감사합니다. 선배님 잘 지내시지요. 더운 여름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