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에 관한 시모음 2)
겨울잠, 대밭에서 /김주대
내 안에 무슨 말이 저리 많아서
바람은 그치지 않는 것이냐
나의 사방이 바람이고
내가 바람인 언덕에 서서
댓잎 뿌려 울다보면
뉘우침은 뿌리에도 바스락거릴랑가
먼 대밭 떨리는 어깨 위에
헌옷같이 얼굴 기댄 하늘
뜯어져
눈내려
내 안에서 청죽의 무리가 쓰러지고 있으니
뉘우침의 시끄러움도 잠들어야 하리
기다렸는지도 모르지
눈발 속에 숨 파묻고
소식 끊은 채 몇 날을
나를 껴안고 내게로 돌아오는 부끄러움
바람뿐인 사방에
이부자리 깔리는 시간을
한 마리 곰이 되어 /박성우
한 마리 곰이 되어 겨울잠에 들고 싶어 으음 나흘만 더 잘게요, 잠꼬대도 해대면서 코를 드르렁드르렁 지치도록 자고 싶어 음냐 음냐, 달콤한 꿈을 꾸는 동안 함박눈은 펑펑 내려 동굴 입구까지 쌓이겠지 정말이지 한 마리 곰이 되어 겨울잠에 들고 싶어 알람시계 따위는 동굴에 가져가지 않을 거야 아침 잔소리도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할 거야 알람 소리도 잔소리도 없는 깊은 동굴에 들어 잠만 잘거야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깊은 산속 동굴에 들어 곰곰 생각하지 않는 미련한 곰이 되어 실컷 잠만 잘 거야 자다가 자다가 지치면 기지개를 켤 거야 내가 쭈욱쭉 기지개를 켜며 울면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리겠지 푸릇푸릇한 봄이 성큼 와 있겠지
겨울잠 /한용국
추억은 추억의 문을 열고
행자는 아궁이를 자주 뒤적여 본다
추억은 추억의 울음을 태우고
아궁이에서는 한겨울의 감자가 익는다
추억은 추억보다 먼 곳에 있고
아이는 오래도록 눈에 숯불 빛을 담는다
추억은 왜 죽음보다 멀고
엄마는 왜 나를 절에 보내셨을까
추억은 추억의 팔꿈치를 올려 보이고
행자는 탄 감자를 골라 밭에 던진다
추억은 추억의 눈시울을 적시고
아이는 검댕이를 묻히며 감자를 먹고
산 속의 겨울은 하염없이 한낮이고
추억은 추억만큼 그림자를 넓히고
눈밭에서 축구를 하던 아이들이 돌아와
아궁이에서 하나씩 감자를 꺼내 들면
눈매가 선한 행자는 안경을 고쳐 쓰는데
추억은 추억끼리 눈밭 위를 뒹굴며 놀고
아이들은 아랫목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행자는 고무신을 나란히 댓돌 위에 놓는다
하염없이 눈 내리는 날들이 올 거야
하염없이 지나가게 되는 세월이 올 거야
추억운 추억으로 추억을 반짝이고
아이들은 꿈결인 듯 잠 속에서 누이들을 만나고
전나무 숲길은 싸르락 싸르락 고요를 쌓아 올리고
겨울잠 /박목월
천장 구멍에서 쥐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두 개의 수염이 짝 뻗은
쪼붓하고 조그맣고 놀란 얼굴
쩡쩡 얼음이 어는 밤
얼음 위에 바싹바싹 달빛이
부서지는 밤
오오, 추워라
아랫목 이불 속에 우리 아기가
고개를 푹 파묻었다
방에는
일렁일렁 흔들리는 그림자,
아직도 아버지는
글을 쓰시는데
저절로 전등이 흔들리는 밤
천장 구석에 쥐가
쥐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새까만 두눈이 또록한
쪼봇하고 조그맣고 놀란 얼굴
오오, 추워라
쩡 울린 저 소리는
추위에 날무대가리가 터진 게지
추위에 독이 갈라진 게지
새끼 있는 구멍으로
어서 가 자거라
겨울잠 /오탁번
요즘 나는 나비와
겨울잠을 잔다
꿈결에 원색도감『한국의 나비』를 펼치면
별별 나비가 함박눈처럼 흩날린다
네발나비과에 속하는
봄처녀나비, 도시처녀나비, 시골처녀나비와
살뜰히 데이트를 즐긴다
앞다리가 퇴화한 네발나비는
오직 흘레밖엔 몰라
동지섣달 다늙은이 힘을 쏙 빼 간다
팔랑나비과에 속하는
수풀떠들썩팔랑나비,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는
크기는 작은데 머리만 커서
날아오를 때 팔랑팔랑 법석을 떨며
한겨울 심술꾼 눈보라 되어
다독다독 덮은 마늘밭 솔잎을
몽땅 다 날려 버린다
겨울잠 /김사인
그의 방에는 좋은 시 96 · 삶과 꿈의 앤솔러지와 녹색평론 2001년 3·4월 통권 제57가 꽂혀 있다. 개정판 현대시론 정한모 지음이 있다. 화솔 1, 2,3의 법칙 데일 카네기 들녘 미디어가 있다. 金一葉 靑春을 불사르고 중앙출판공사가 있다. 청년문예의 새 열매 8 내 마음이 다 환해지는 시읽기 오철수 지음이 있다. 그 곁에는 Aromatherapy(peppermint) 5ml가 놓여 있고, 또 그 곁에는 꿈풀이대백과 유덕선 지음 동방인과 동아現代活用玉篇이 있다. 의사가 못 고치는 환자는 어떻게 하나?② 황종국 지음 우리문화 곁으로 쓰다 만 '깨끗한 나라' 미용티슈 증정용이 누워 있다.
어디로 갔을까.
이 적막한 시간들을 어두운 방에 가두어두고
어디로 자러 갔을까 그는
도토리만 한움큼 모아놓은 채.
긴 겨울잠 /강기원
너는 지상에서 가장 온도가 낮은 자
빙하구혈만큼 눈이 깊은 자
이기적이도록 과묵한 자
너에 대해 쓰려니 벌써 손이 곱는군
서리 같은 소름이 돋는군
네게서 나오는 드문 말들
내게 오기 전 고드름처럼 얼어 붙어
허나, 난 그걸 막대사탕처럼 빨아먹지는 않겠다
설표 한 마리 품지 않는 막막한 설산 같은 너
네 굴곡진 곳에 로프를 걸고 오르려 하나
나의 밧줄은, 핏줄은 너무 뜨거워 걸리지 않는다
낡은 쇄빙선 같은 나의 사랑
버릴 수, 부술 수 없는 얼음 애인
널 바라볼수록 나는 사라져가……
너와의 아이는 이목구비가 없을 것 같다
오늘도 너는 창백한 손가락 움직여
너와 나의 빙하기로 눈보라를 불러내는구나
백색잡음 같은 눈보라의 소나타
G#과 Ab의 차이는 무엇일까
몇 개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널 연주하려 하나 나는 설해목처럼 무력해
얼음 사막 위
심장을 쏟아 부은 듯 피로해
검은 씨앗처럼 남은 두 눈 뜨고
네 깊은 백색 골짜기
입김도 얼어붙는 그 곳에서
마지막 긴 겨울잠에 들려 한다
겨울잠 /설원 이화숙
겨울이 되어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니 잠이 늘게다
꿈 꾸기 싫어 잠을 많이 안 자지만
에너지 재충전을 위해 늦잠꾸러기가 되어야 한다
겨울이 되어 숲속 동물들은
긴 겨울잠을 자야한다
풀도 없고 도토리도 열매도 없어
다람쥐, 너구리, 사슴, 산토기들은 어쩌나
배고픔을 견뎌야 하고 추위를 이겨야 하는데
넓은 들판에서 굴을 파고 겨울잠을 자야하는지
한참 생각해도 잘 모를 일이다
세상을 정복한 사람은
새벽형 인간이라고 한다
남보다 먼저 일어나 머리를 굴린다
하루 여덟시간을 자야하는데 좀 길다
수면장애만 없다면
긴긴 겨울밤 늦잠꾸러기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
늦잠 자는 미인이 피부미인이 아닌가
잠 잘 챙겨자고 멋진 님 기다려야 할 듯.
겨울에는 겨울잠을 자야하지 않나
긴 동면의 시간
다음해 새로운 에너지가 재생산이 되어
건강한 날들을 창출해 내야 하니까.
겨울잠 /이규옥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저마다 분주히
오가는데 오가는데
잠을 잔다 잠을 잔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제각기 어디론가 총총히 떠나는데
떠나는데 눈 뜨고 잠을 잔다 잠을 잔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잠 속 깊숙이 눈이 내린다
눈이 뿌리내린다 뿌리내린다 눈 뜬 잠 속으로 하얀
눈이 푸른 뿌리내린다 붉은 뿌리내린다 새하얀 눈이
푸른 꽃 내린다 붉은 꽃 내린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겨울잠 /오탁번
요즘 나는 나비와
겨울잠을 잔다
꿈결에 원색도감 『한국의 나비』를 펼치면
별별 나비가 함박눈처럼 흩날린다
네발나비과에 속하는
봄처녀나비, 도시처녀나비, 시골처녀나비와
살뜰히 데이트를 즐긴다
앞다리가 퇴화한 네발나비는
오직 흘레밖엔 몰라
동지섣달 다늙은이 힘을 쏙 빼 간다
팔랑나비과에 속하는
수풀떠들썩팔랑나비,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는
크기는 작은데 머리만 커서
날아오를 때 팔랑팔랑 법석을 떨며
한겨울 심술꾼 눈보라 되어
다독다독 덮은 마늘밭 솔잎을
몽땅 다 날려 버린다
겨울잠 /김수잔
햇살 한 줌 인색하게
진회색, 아니 까맣게 덮고선
칼바람 불어 재끼더니
기어이 저질렀어
윙윙 울며 그 산고
밤새 치른 끝에
하얀 세상 낳았구나
지금껏 잘 버티면서
눈만 뜨면 조잘대던
뜰의 파란 잔디도
솜이불에 긴 겨울잠 들려는데
나도 그들처럼 하얗게 덮고
긴 밤을 곱게 잠들 수 있을까..?
내 마음 훔친
창밖 세상이 하얗게 웃는다.
민들레 겨울잠 /노정혜
한 세상 살다가는 민들레
돌아가는 모습 아름답다
마지막 가는 길
홀씨 돼 바람에 나른다
겨울 어둡고 차디찬 땅 속
깊은 잠에 드는구나
태양빛 들면
노란 꽃 고개 내밀지
밟히고 찢긴노라
겨울잠 깊이 들라
얼마나 고단했나
환영받지 못했지
봄에서 가을까지
피곤하고 지쳤을 텐데
노란 미소 잃지 않았던 민들레
겨울잠 푹 쉬어라
봄이 오면
산에도 들에도 민들레꽃 핀다
겨울잠 /김경미
가을 햇빛에 깨끗이 말려진 하늘
그 빛에 눌려 나뭇잎들 납작하게 내려앉으면
다 내려앉은 다음
겨울 비단뱀이 된다면
석달치 식량
계란 껍질째 깨지도 않고 삼켜
삭고 삭아 계란껍질이 우유처럼
묽어져
몸 안에서 아무 사금파리 상처도 찌르지 않을 때쯤
일어나
그새 돋은 발
거뜬히 새 신발 사러 뛰어다녔으면
겨울잠 /이은춘
찔레 덩굴 뒤집어쓰고 있던 검바위
모래집 허물어지듯 잘게 부서졌다
우레처럼 착암기가 돌고
난폭하게 박히는 철근
개구리 울음소리 덤프트럭에
채이고
그린아파트, 언덕배기 깔고 앉았다
부동산 유리문엔
숲세권
로얄층 다수
전광판의 글자가 불티처럼 날린다
오래전부터 그랬듯이
아파트 야외 조명등이 배경이 되어버린
산우물 언덕
부리에 스티로폼 한 조각 물고 지빠귀 날아갔다
찔레순 피지 않고
두꺼비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와글거리는 사람들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