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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타리쉼터 스크랩 이성원 -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동요 모음곡)
백한진 추천 0 조회 56 13.06.23 20: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반달

2. 클레멘타인

3. 고드름

4. 과꽃

5. 섬집아기

6. 파란 마음, 하얀 마음

7. 등대지기

8. 비

9. 꽃동네 새동네

10. 고향의 봄

11. 종소리

12. 겨울밤

13. 우리의 소원

14. 노을

 

 

이 사람이 사는 법 - 이성원

 

 

음악에의 첫사랑, 그리고 평생동지 기타와의 만남

이성원(李晟原·42). 경남 진해 생.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어른들을 위한 동요를 부르는 가수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요는 어떤 의무감에서 부를 뿐 딱히 동요만 부를 이유는 없으며, 자신은 로커이고, 그것도 뭐하면 그냥 ‘노래 부르는 사람’ 정도로 불러 달라고 했다.

“언더 중의 언더, 언더라는 의식조차 없다”는 그는 1980년대 한국의 포크 음악이 탄생시킨 주목받는 싱어송라이터 중 한 사람으로, 서구의 대중음악 언어인 통기타 음악의 문법에 한국적 정체성이라는 통찰력의 깊이를 제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음악에서는 도시의 삶에서 초월적 이상의 전원을 꿈꾸는 진솔한 자기고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불행히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지 못해 그의 이런 음악세계를 깊이 있게 전달하지 못함이 안타깝지만,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고 일단 그의 삶으로 돌아가 보자.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지금의 그의 삶은 고단할 것이 뻔하지만 어린 시절 그는 누구보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신문기자를 거쳐 사업을 하시던 그의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주말마다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댄스파티를 열 정도로 멋을 아는 분이었다. 매주 열리던 댄스파티는 그 멋을 지탱할 만한 재력도 충분했음을 말해준다. 그때 음악은 CCR라고 불리는 전축에 루이 암스트롱 등의 소위 ‘양키판’을 틀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초등학교 시절 음악 시간에 풍금을 옮기는 일이라도 맡게 되면 풍금을 만지는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다 첫소리가 울려 퍼지면 그때부터는 다른 세상이었다.

그러나 유복한 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순간부터 그와 그의 가족의 삶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다. 안살림만 하시던 어머니는 남은 재산마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할 정도로 바깥살림에는 문외한이어서 당연히 모든 재산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날아가 버리고 남은 것은 맨몸뚱어리뿐이었다. 결국 중학교 때는 등록금을 내지 못해 수차례 정학까지 당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때 그를 지켜준 것이 또한 음악이었다. 그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면 혼자 들로 나가 초등학교 5학년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러면 어린 가슴에 시퍼렇게 들었던 멍도 어느덧 눈 녹듯 사그라지고, 혼자 흥에 겨워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그때부터 그는 무엇엔가 몰입하고 명상하는 버릇이 들었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의 어느날, 그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틀어쥘 평생동지를 만나게 된다. 그 동지를 만나는 과정은 조금 외설(?)스럽고 그래서 무엄하지만, ‘화장실 낙서’ 같은 풍경으로 펼쳐진다.

하루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대학에 다니던 친구의 누나가 띄엄띄엄 기타를 튕기며 ‘고향의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1970년대 한창 유행했던 포크와 통기타의 열풍이 채 사라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 누나의 기타 솜씨는 연주는커녕 겨우 음이나 맞추는 정도였지만 그의 눈에는 누나도 예쁘고, 기탓줄을 튕기는 누나의 하얀 손가락도 예쁘게 보이고, 무엇보다 기타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얽혀 그에게는 황홀한 천상의 멜로디로 다가왔다. 한눈에 확 불이 붙은 ‘음악(?)에 대한 첫사랑’이었다.

그날부터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기타에 빠져들었다. 남들은 모두 대학 진학 준비에 몰입해 있을 때 그는 매일같이 그 친구네 집에 들락거리며 기타에 매달렸다. 여동생이 “우리 오빠는 눈을 뜨자마자 기타를 잡아 잠들 때까지 놓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말 반한 것이 기타였는지 아니면 친구의 누나였는지 묻자 그는 피식, 웃음으로 답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나니 졸업이었다. 대학은 생각지도 못할 처지였으니, 그렇다면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서 돈을 벌어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부양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는 음악을 한답시고 기타 하나 달랑 메고 온종일 다운타운가를 휩쓸고 다녔다. 그러다 문득 “아하! 내가 가장이었지” 하는 생각에서 가구점 점원부터 시작해 신문배달이니 볼링장 핀보이니 음악다방 디스크 자키(DJ)까지 안 해 본 것 없이 다 거치며 돈벌이도 해 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일들이야 그저 아르바이트거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실은 돈이 안 된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었고 그 스스로 음악이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약과 같은” 음의 세계가 주는 강렬한 느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천박하지 않고 인생의 깊이를 담은 좋은 노래들이 많이 있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말 끝에 그는 노랫말이 가슴에 닿아 특히 좋아했다는 노래 하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유석이 부른 ‘친구야’라는 노래라고 했다.
‘작게 생긴 이내 한 몸 설움도 많고
떠가려도 발목까지 사슬에 묶여
헤는 마음 하나도 없이 홀로 서러워
오, 친구야 어디로 갈까.‘
7절까지 있는 이 노래를 그는 아직도 단 한 구절도 잊지 않고 그대로 외우고 있다고 했다.

결국 그는 진심으로 행복하려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다시 기타를 들었다. 이런 그를 주위에서는 당연히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망나니였다. 그래도 그는 기타만 있으면 행복했다.

“한번은 기타를 치다 12시가 넘었는데 음 하나가 아쉬운 거예요. 그 음을 찾기 위해 신발 신는 것조차 잊고 맨발로 집을 나섰지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어요. 맨발로 노래를 부르며 파출소 앞을 지나자 경찰이 따라붙었나 봐요. 그것도 모르고 나무 아래 앉아 끝까지 노래를 불렀지요. 경찰은 플래시를 비춰 주며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순순히 보내주더군요. 무엇엔가 몰입한 것을 인정해준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으로 치부한 것인지는 모르죠.”


“음악은 사람들 마음 속에 촛불 하나씩 켜는 것”

그러기를 5년여, 웬만큼 음악에 느낌이 닿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 전에도 간간이 서울로 올라와 일종의 가수 등용문으로 여겨지던 명동 ‘쉘부르’의 경연에 참가한 적이 있었지만 매번 실패를 거듭하던 끝이었다. 1984년의 일이었다.

물론 그의 주머니에는 돈 대신 음악을 하겠다는 열정만 가득한 신세였다. 신촌 봉원사 뒤에 마련한 자취방은 겨울이면 머리맡에 둔 물조차 얼어붙을 정도였고, 단무지 쪽을 일일이 세어가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식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때까지 신촌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하덕규·시인과촌장· 임지훈·해바라기 등 한다 하는 포크 연주자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추위와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

1987년, 그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판을 내게 된다. 그 무렵 그는 먹고살 방편으로 주위의 추렴을 받아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 ‘쉼표’라는 카페를 열었는데, 온통 가난한 문화판 인사들이 모여들자 돈벌이는 고사하고 아예 이들의 사랑방으로 내주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맺은 한 인연의 끝이 모 레코드사와 닿았던 것이었다.
오디션을 통과하고 ‘거기 왜 있나’ ‘선인장을 보라’ 등의 자작곡을 담은 판이 나오던 날의 흥분을 그는 지금도 가끔 꿈에서 만난다.

그러나 ‘거기 왜 있나’가 제법 방송을 타고 막 뜨려는 순간 한영애의 ‘거기 누구 없소’라는 비슷한 제목의 노래가 뜨면서 그의 노래는 졸지에 ‘아류’로 여겨져 무대 뒤로 사라지는 처지가 됐다.

이 무렵 그의 음악에는 커다란 전기가 왔다. 어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국악방송을 듣게 됐는데, 악기 가운데 으뜸이어서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불리는 거문고의 음을 “연잎에 비 듣는 소리”라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에는 왠지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대신 소리 없이 내리는 보슬비가 떠오르면서 한 깨달음이 왔다. ‘음악이란 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빈 소리를 듣는 것’이라는….

국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그에게 또 한번의 결정적 계기가 왔다. 당시 하치라는 일본인 로커가 한국음악을 공부하러 왔는데 그와 어울리면서 ‘사물’을 접하게 됐고 나아가 록과 한국음악이 통한다는 것을 느끼게 됐던 것. 하치와의 작업의 결과는 1988년 울림터 극장에서 발표됐다. 일련의 작업을 거치면서 그는 자신이 평생 가야 할 길을 찾았다고 했다. 기타를 통해 한국적 가락을 새롭게 발현시키겠다는 것. 이후 그는 통기타와 전자기타로 한국음악을 표현하는 데 몰입해 1992년과 2002년에 다시 발표회를 갖는다.

그 얼마후 그는 갑작스럽게 낙향한다. 1993년. 10년 만의 낙향이었다. 빌딩이 정체를 묻기 시작하더라는 것, 산이 사라지고 빌딩만 가슴을 압박하더라는 것이었다. 자연에 대한 관심의 출발이었다. 얄팍하고 진정한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회의도 들었다.
“지금도 저는 밤무대는 안 뜁니다. 가수가 밤무대를 외면하면 먹고살 길이 막막하지만 화려한 무대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진지하지 않고 가볍다고 할까. 그렇다고 여느 가수들처럼 자기 열정에만 빠져 부르고 싶지는 않아요.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촛불 하나씩을 켜는 것이어야 하고, 나는 그들 눈 속에 별을 하나씩 심고 싶은 마음에서 최선을 다하는데 그들은 자기들끼리 얘기나 하고 반응이 없어요. 마치 약장수가 약을 파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구경거리에 불과하지요.”
그렇게 내려간 고향이지만 진해에는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약간의 유명세가 생겨 서울에서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고향 역시 변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심성도 변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변해가는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하릴없이 지방 문화활동에도 참여하면서 그 무언가 근원적인 것을 찾기 위해 헤매는 세월이었다. 이 무렵 친구의 소개로 그는 뒤늦은 결혼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음악이나 환경 문제 등에 대해서는 소리 높여 말하면서도 가족에 대해 캐물을 때면 교묘하게 말머리를 돌리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동안 가족 고생을 많이 시켰지요.”
대답 대신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조금의 번잡스러움도 피해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딴은, 가장인데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그것으로 족할 뿐, 돈을 벌려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다는 그였다.

가장이면서도 숫자에 어둡고 돈이 뭔지 모르고 살아왔다는 그였다. 그로서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살려고 했다지만 그로 인한 주위 사람들의 마음고생까지 잊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가족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안타까움, 자신의 꿈과 자꾸 부닥쳐 오는 모진 현실, 그 세월들을 그는 어떻게 참아낼 수 있었을까.

“태평이지요.”
“….”
“나에게 고민을 주는 원인도 내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막히면 다른 물골로 돌아가면 되지요.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가지면 됩니다. 축지법을 못 하니 기차 타고 타니면 되고, 꼭 농사를 안 지어도 먹고살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이 많이 벌리면 좋겠지만 그것을 위해 내 가치를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솔직하게’ 돈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주어야 할 것은 있다고 했다. 어디에 초대받아 가면 자신의 가치만큼 인정해 주면 좋고, 그러면 그만큼의 가치를 주고 와야 편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돈으로 계산할 뿐이란다. 그래서 미리 얼마 하고 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못나지는 않은 것 같으니 부림당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지요. 내 음악에 향기가 있다면 그것은 내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전달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의 이런 태평스러움은 가수라는 직함으로 40평생을 살면서도 아직 악보조차 볼 줄 모른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음이 들릴 뿐 악보로 그 음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만 보는 악보를 만들어 사용하고, 음반 작업을 할 때도 테이프에 담아 주거나 직접 노래를 불러 음을 전달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미처 기록하지 못한 즉흥곡이 수천 곡쯤은 될 것이라고 한다.

그가 악보 보는 법을 익히고자 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배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경기도 남양주군 수동면, 속칭 물골이다. 천마산이 지척에 있고 동네 앞으로는 이름처럼 깨끗한 내가 흐른다. 그 골짜기 안쪽으로 아름다운 전원주택단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그가 사는 집이다.

 

 


“음악이란 새로운 數의 강물”

“그동안 돈을 많이 벌었나 보죠?”
“1999년 다시 상경해 하남에서 살다가 좀더 싼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의정부쪽으로 가는데 남양주라는 표지판이 보이더군요. 뭔가 끌리는 것이 있어요. 무조건 차를 돌려 농막이라도 하나 구해 보려고 했지요. 아침 일찍 출발해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석양 무렵 한 부동산에 들렀는데 ‘좋은 집이 있기는 한데 한번 가 볼까요’ 하고 심드렁하게 말해요. 동네로 들어서자 큰 내가 나오고, 그 냇가에 석양빛이 반사되는데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냇가에는 큰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도착해 보니 이건 너무 좋은 집이었다. 뛸 듯이 기뻐하다 그는 흠칫 놀라 주위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자기 처지에서는 쳐다보지도 못할 좋은 집이었다. 낙담하고 돌아서려는데 복덕방 아저씨가 어깨를 잡아 세웠다.

“전세로 나온 집이라고 하더군요. 마을 위치가 너무 외져 공사를 끝냈는데도 분양이 안돼 건설업자가 알거지가 될 판이라고 해요. 그래서 전세로라도 내놓아 빚을 갚으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쁘다는 조건들이 제게는 오히려 좋은 조건들인 셈이었죠. 지금도 현관문을 들어설 때마다 집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살기에는 너무 근사한 집이죠.”

사진을 찍자, 하고 그 집 근처 축령산이 멀리 마주 바라보이는 언덕배기로 올라갔다. 그가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맞은편 산 능선을 가리키며 “자연스럽게 오르내리는 저 산 능선은 그대로 음악이고 선율입니다” 하고 툭 던지더니 다시 능선을 잘라내고 허리를 마구 파헤치는 개발의 폐해에 대해 열을 올릴 태세다. 말머리를 돌리기 위해 시비조의 질문을 하나 던졌다.

“민요 음반을 구상중이라고 했죠? 그것도 기타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아들었다는 듯 그가 대답한다.
“악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죠. 어떤 악기로 연주해도 굿거리 장단이 나온다면 한국음악이겠죠? 문제는 얼이 들어 있느냐가 중요해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얼’을 주제로 열을 올린다. 어린이라는 말은 그냥 붙여 읽지 말고 ‘어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지식은 없지만 모든 생명체의 유전인자는 다 가지고 있고 또 생생한 얼을 가지고 무엇엔가 어려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여기에 외부에서 못된 것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얼간이, 어리석다는 말은 곧 이렇게 해서 얼이 간 사람, 얼이 썩은 사람을 말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환경파괴도 바로 이런 얼간이들이 자연이나 후손들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밖에 모르고 저지르는 행위라는 데까지 나간다.

“저는 얼든돌이 얼든순이를 만들고 싶어요. 얼찬이를…. 그래서 여건만 된다면 전국의 학교를 돌며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동요를 불러주었으면 해요. 동요를 부르는 것은 잃어버린 옛것을 찾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거든요. 문화 고양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닌가요? 이창동 장관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꼭 이 말을 물어 보고 싶어요. 그리고 저를 많이 썼으면 좋겠다고요.”

그의 말은 동요 속에는 환경운동까지 내재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만큼 그는 자신의 이 말을 이미 얼마간 실천에 옮기고 있다.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여서 전적으로 나서지는 못하지만 방학때거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원도 등 시골 초등학교를 돌며 어린이는 물론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동요를 함께 부른다.

“동요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따라 불러요. 그런 면에서 동요는 일종의 타임머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세대가 나뉘어 자기 세대 노래만 알지요. 모든 세대가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어요. 그런데 동요를 부르다 보면 세대를 초월해 한마음이 되죠.”

한 마디로 동요가 가지고 있는 무게가 지금 우리 사회에 많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이 같은 생각에서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동요를 불렀고, 이것이 그를 동요가수로 알려지게 했다. 그러다 그의 동요를 들은 어느 음반사의 제안으로 1999년 ‘이성원이 부른 어른들을 위한 옛 동요’ 1집에 이어 지난해 2집까지 냈다.

그는 어렸을 때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꿈은 과학자. 사물을 보면 생각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음악은 계산되지 않은 또 다른 수학이며 곧 과학”이라는 생각이다. 음악이란 새로운 수(數)의 강물이라는 것이다. 그 강물을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자신, 즉 이성원이라는 가수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출처 : http://blog.daum.net/sbee4821/28

 

 

 

 

 

말레이시아 공식 초청 국내 1호 가수가 된 동요포크가수 이성원

통기타 동요로 말레이지아 꿈의 무대에 서다

 

지난해 말 한국 대중 가수로는 처음으로 김수철이 UN본부의 기념식 무대에 초청됐다. 86 아시안게임, 88올림픽, 2002한일 월드컵 등을 통해 국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온 그가 ‘전자기타 산조’라는 대중 음악 어법으로 세계인들에게 새로운 국악의 세계를 선보여 "한국 대중음악의 또 다른 지평을 외국에 알렸다"는 호평을 이끌어 냈다.

그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은 지난 1월 말. 이번에는 국악을 통기타에 담은 이성원의 공연이 동남아에서 열렸다.

‘80년대 3대 언더그라운드 포크 가수’로 불리는 이성원은 말레이시아 왕실이 지원하는 국제문화재단 SGM의 공식 초청으로 수도 콸라룸프르의 유일한 예술극장 이스타나 부타야에서 1월 17일부터 22일까지 5일 동안 두 차례공연을 가졌다. 한국의 대중가수가 공식 초청을 받고 말레이시아 최고의 무대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류 열풍의 주역 안재욱이나 국민가수 조용필에 비한다면 차라리 무명에 가까운 이성원이 아시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국제적 문화재단 SGM(Soka Gakkai Malaysia)의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말레이시아 최고의 예술극장 '이스타나 부타야'는 클래식과 세계 유수의 뮤지컬 그리고 품격 높은 3세계 문화공연을 주로 소개, 우리의 세종문화회관과 비슷한 위상의 공연장이다. 현지의 대중음악인들조차 "이 무대에 한번 서 보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할 만큼 꿈의 무대이다.

 

타국서 인정 받은 언더 포크 가수

 

비록 이성원이 김두수, 곽성삼과 더불어 소위 80년대 3대 언더포크가수로 가요 마니아들의 추앙을 받고 동요 포크 가수로서 대중의 사랑을 제법 받고 있긴 하지만 '말레이시아 최고의 무대에 초청 받은 한국대중가수 1호'로 기록된 것은 의외다.

하지만 SGM관계자들은 "국적이 분명치 않는 저급 대중음악보다는 아시아 각 국의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존중하고 나아가 아시아의 문화교류를 위해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한국의 유명가수들 보다 국악을 모던포크라는 대중음악어법에 담아온 이성원의 가락이 진정한 한국대중음악으로 받아들여 진 것이다.

외롭게 한국 포크의 명맥?이어오며 돈과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노래꾼 이성원은 오히려 외국에서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은 박수를 보내지만 한편으론 부끄러운 우리 대중가요계의 자화상을 보는 듯 씁쓸하기만 하다.

금년 들어 말레이시아의 첫 외국인 초청 공연으로 기록된 "Korea Youth Recorder Concert". 이성원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학생 58명으로 구성된 한국 청소년 리코더 합주단과 함께 초청을 받았다.

공연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몇 년 전부터 민간문화사절단으로 스위스, 헝가리, 태국, 일본등 유럽과 아시아를 돌며 한국의 문화를 알려온 한국 청소년 리코더 합주단의 공로 덕분이다. 이들의 명성을 전해들은 SGM문화재단 관계자들이 말레이시아 문화부 장관의 허락을 얻어낸 것.

1년 전부터 이 공연을 추진해온 합주단의 지휘자 이재만씨는 이성원 음악의 열렬한 지원자. 그는 "이성원의 음악은 지극히 한국적이다. 또한 그의 동요는 어린이보다 어른들이 다시 한번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음악에 매료되었기에 말레이시아 공연을 추진하면서 그의 음악을 소개했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작년에 이성원이 두 번째 동요 음반을 작업할 때 이루어졌다. 이성원의 노래를 접하고 반했던 지휘자 이재만씨가 그의 녹음실로 찾아가 리코더 연주를 해주면서 두 사람은 서로 팬이 되었다.

이후 서로가 공연을 할 때마다 특별 게스트로 초청을 하면서 음악적인 연결고리를 이어왔다. 이성원은 "작년의 한국 청소년 리코더 합주단의 양평, 수원, 연세대 백주년기념관 공연부터 올해 건국대에서 치른 정기연주회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를 해왔다"고 밝힌다.


폭우 속 감동의 무대

 

이스타나 부타야의 1천 5백석은 두 차례 공연 모두 만원사례를 이뤘다.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연령의 현지 관객들이 몰렸다. 이례적으로 말레이시아 국영방송인 TV3에서 이들의 공연 안내방송을 몇 주전부터 홍보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공연 첫 날 궂은 날씨에 비까지 억수처럼 쏟아졌다. 공연장에 도착한 이성원은 차에서 내린 곳부터 공연장까지 20여m 길에서 현지인들이 우산을 받쳐들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감동했다.

"초청한 공연단이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 숲을 만들어준 현지인들 사이를 지나면서 너무도 정성스런 대접과 친절함에 감격스러웠다"고 이성원은 감회에 젖는다. 공연을 앞두고 대기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을 때 현지 아가씨 몇 명이 문밖에서 호기심 가득한 모습으로 기웃거렸다. 연습을 멈추고 사인을 해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더니 무릎을 끓고 노래를 경청하는 모습에 이성원이 오히려 민망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한국 전통가락에 기초한 이성원의 맑은 목소리와 통기타 가락은 이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까바바이"라는 말레이시아 말로 인사를 건네 친근감을 안긴 그는 30여분동안 '군밤타령'과 창작곡' 보아라 수야' 그리고 '휘모리''등 개량 민요와 즉흥곡 '원 리틀 인디언' 등을 불렀다.

현지 관객들은 싱겁게 불러본 즉흥곡들을 특히 좋아했다. "중국계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군밤타령'을 부를 때는 나중에 함께 따라 불러 너무 기분이 좋았다. 우리 가락은 세계적으로 통하는 음악임을 처음 느꼈다"

공연 후 이성원은 앵콜 세례를 받아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오블라다 오블라디' 등 그들에게 친숙한 외국 히트 팝송을 들려주었다. 흥겨운 싱어롱 한마당처럼 모든 관객들이 함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성원과 지휘자 이재만은 1천 여명의 사인 공세를 받았다. 새로운 한국 가락에 감동한 모든 관객들이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장사진을 이룬 것이다. 20여분 간 사인공세가 지속될 만큼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국내로 이어진 감동의 물결

 

SGM관계자들은 "올 해 첫 이벤트로 꾸며진 무대가 너무도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한국 가수로는 이성원씨가 처음인데 너무 음악이 훌륭해 다시 한번 초청하고 싶다"며 만족감을 전해왔다. 실제로 SGM문화재단 고위관계자들은 공항까지 이례적으로 따라와 극진한 환송을 했다.

이성원은 "어제 저녁의 공연을 하루만에 사진첩으로 만들어 전해주는 정성인 인상적이었다“며 “우리 노래를 너무 좋아해 마치 한국에서 공연을 하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편안했다"고 말했다. 이성원은 SGM측으로부터 재 초청 의사뿐 아니라 인근 브루나이 왕국의 초청 의사까지 전달받고 귀국했다. 그는 한국대중음악을 말레이시아에 전파하는 민간 음악전도사 역할을 한 것이다.

귀국 후 이성원은 곧바로 KBS 제1 FM의 신년 첫 국악공연 무대 <새해에 열어보는 국악신세계>무대에 초청 받았다. 공연장인 호암아트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그의 국악포크와 동요. 민요 가락에 매료되며 사인공세와 함께 "음반을 꼭 사서 듣겠다"며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이 무대에 선 이성원은 특별히 긴장하고 있었다. 존경하는 선배 포크가수 김의철씨가 참관을 왔기 때문. 양희은의 스승으로 1970년대의 명 포크곡 ‘저 하늘에 구름따라’를 지은 그는 공연 후 이성원을 만나 "프로다운 좋은 공연이었다. 앞으로도 우리 포크의 감동을 남겨달라"며 격려했다.

어린 시절부터 김의철의 음악세계와 순수한 정신을 존경해온 이성원은 "오늘 한국 포크의 정신인 김의철 선생님과 만나 음악적 교감을 나누니 더없이 행복하다. 금년엔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삼청동의 한 식당에 자리한 이성원은 김의철곡 '저하늘에 구름따라'를 즉흥적으로 김의철과 함께 불렀다.

범상치 않은 두 사람의 멋진 화음이 식당에 울려 퍼지자 시끌벅적하던 식당은 어느덧 적막감이 감돌았다. 노래가 끝나자 손님들은 힘찬 박수로 답례를 했다. 상상하지 못한 즉흥적인 무대였다. 이성원은 "김의철 선배님과 함께 음악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전하자 한국 가락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온 김의철은 "우리의 포크정신을 잃지 않은 이성원씨 같은 후배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음악을 남겨야 한다"고 격려했다.

세계 최초로 클래식 포크를 발표했던 김의철은 어둡고 저항적인 포크 곡들로 군부정권의 요주의 감시를 받고 암울한 1970-80년대를 살아야 했던 비운의 포크가수이다.

그의 노래는 이 땅에서보다는 독일과 미국 등 외국에서 오히려 환영을 받았었다. 이성원 또한 국내에서는 음악 능력에 걸맞지 않는 푸대접을 받아오다 이번에 말레이시아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니 닮은 꼴 가수들인 셈이다.

과연 이 땅에서 진지하게 우리의 가락을 노래하는 것은 대중가수에겐 천형일까! 포크의 정신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묵묵히 걸어 온 두 사람의 만남을 보며, 외국 곡을 표절한 히트곡이 판치는 작금의 가요계에서 진정한 우리 포크 가락의 르네상스를 꿈꿔보는 것은 성급한 기대일까.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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