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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젖빛 그리움’, 젖빛 그리움
내겐 젖빛 그리움이 있다.
뚜렷하진 않지만, 그러나 왠지 포근한 그런 그리움 말이다.
내 60 나이에 이르러, 내 삶의 길목에 수두룩하게 깔아 놓고 온, 바로 그 젖빛 그리움들을, 이제 책 한 권에 담아 놓으려 한다.
물론 젖빛이어서, 그때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이 꼭 아닐 수도 있고, 그 포근함이 좀 덧씌워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쓰는 이 책은, 나의 과거를 온전하게 기록하는 자서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또 아무렇게나 상상을 꾸며내기만 하는 그렇고 그런 류의 소설도 아니다.
내 그동안의 삶을 바탕으로 해서, 있었던 일들을 그냥 생각나는 대로도 쓰고, 그리고 있었던 그 일을 아름답게 꾸며보고 싶은 대로도 쓰는, 그렇게 거침없는 시원한 글을 한 번 써 보려는 거다.
누군가가 청자연적의 그 이파리 하나가 살짝 꼬부라진 것이 반듯하게 가지런한 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했듯, 내 인생에도 그렇게 꼬부라진 질곡들이 있었다.
나의 그 질곡의 삶도, 내 지금에 이르러, 그 삶은 아름다운 추억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내 떨치지 못한다.
반듯한 삶이란 것은, 때론 그 주위를 질식하게 하고, 또 주위에 그렇게 보이고 싶지는 않겠지만, 그 생각과는 달리 현실에 있어선 그 자신을 야누스의 두 얼굴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늘 따른다.
일찌감치 질곡의 삶을 시작한 나는,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로 그 야누스의 두 얼굴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했었다.
비록 반듯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그러한 이중인격적인 삶이, 지금껏 내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켰고, 고운 며느리 지영이까지 얻어, 새롭게 지금의 건실한 가족을 이룰 수 있는 그 바탕이 되었음을, 내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그동안의 내 삶은 덧칠만 덕지덕지한 싸구려 유화 한 폭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잘못 그려진 유화 한 폭에서,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또 다른 삶이 빚어지는지, 난 바로 그것을 그 어딘가에 꼭 담아놓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의 고심 끝에, 내 이 책 한 권을 쓰기로 작정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이곳은, 필리핀의 두 번째 도시인 세부의 상그릴라 막탄 리조트호텔 8066호실이다.
호텔을 끼고 있는 해변이, 그 얼마나 맑고 상큼한지, 그냥 이곳에서 오래 머물러버리고 싶은 그런 곳이다.
내가 내 아내와 함께 이곳에 오면서, 읽을거리로 딱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지금으로부터 40년도 더 전인, 1965년도에 출판이 되어, 그때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맹목적인 사랑의 굴레를 씌워줬던, 박계형의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이 바로 그 책이다.
윤희라는 서른둘 나이의 청순한 여인이, 불치의 병에 걸려 그 삶의 벼랑에 섰을 때, 돌이켜 머무르고 싶었던 남편 성호와의 지난날의 그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생각 속에서 그려보며, 종내에는 남편의 그 안은 팔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어야만 하는, 그래서 아름답긴 하지만 너무나 슬픈 그런 줄거리였음을 내 얼핏 기억한다.
그 소설은 내게만 그렇게 아름답고 슬프게 다가온 것이 아니다.
지금 내 옆의 아내도 중학생이었을 때 그때, 공부시간 중에도 책상 밑에 감춰 놓고 읽을 정도로 그 소설에 푹 뼈져, 많이도 눈물을 흘렸다 한다.
내 사춘기 때 그때 나를 울렸다는 바로 그 이유 하나로, 난 그 책을 쓴 여류 소설가 박계형을, 내 기억 속에서 결코 지우지 않는다.
나의 박계형에 대한 젖빛 그리움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젖빛 그리움은 그렇게 뚜렷하지 않음으로 인해, 잘 지워 지지도 않는다.
또 젖빛 특유의 포근함이, 나로 하여금 굳이 지울 필요도 없게 만든다.
내게 있어 젖빛 그리움의 한 예를 들어본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으로 열여덟의 나이에, 서른셋 나이의 울 엄마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집은 갑자기 가난해져서, 내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공부는 거기서 끝이었고, 그래서 대학교 진학은 한낱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때 그 순간을 두고, 혹 사람들은, 엄마 잃었다고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것은, 그 향학의 의지가 박약한 것일 뿐이라고, 나를 향해 말없는 눈빛 폄하를 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훗날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어떤 윗사람은 자신의 어쭙잖은 학벌을 들먹이며, 대학을 다니지 못한 나를, 코앞에서 면박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의 그 젖빛 그리움의 순간으로, 내 다시 한 번 돌아가 본다면, 그때의 내 처신을 내 스스로도 탓 할 수가 없다.
그때 우리 집 대들보 같은 울 엄마가, 그 꽃다운 나이에 저 멀고 먼 하늘나라로 가셨고, 또 그 때 어린 난 그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심정적 파탄이 일어, 공부를 더 계속할 수도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오면서, 그래도 어느 한 순간엔 전교 수석을 한 이력도 갖고 있는 내가, 그러기로 마음만 먹었으면, 어디 좀 허술한 학교라도 진학할 수 없었겠느냐만, 내게 있어서는 그때의 현실의 삶이 더 급박했었다.
억척같은 울 엄마에게 얹히다시피 살아온, 소위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주위 칭송을 들으시던 소극적인 우리 아버지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엄마를 잃은 내 동생들은, 나보다 더 불쌍해보였다.
그래서 그때의 내겐, 그 동생들을 보살피는 것이, 내가 공부를 계속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 생각했었다.
누군가 그때 내 옆에서 나의 다가오는 내일에 대한 도움말을 조금이라도 해줬었다면, 내 혹 그때 대학 진학을 해서, 공부도 좀 더 하고, 또 누구 못지않은 신분에 올랐을 런지도 정말 모른다.
그러나 난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때로서 이루기 쉽지 않은 꿈은, 먼 뒷날의 운명으로 미루어 놓고, 우선 급박한 현실에 빠져들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지금껏 정상적인 길을 걸어온 주위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독단적인 내 특유의 삶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내 삶의 길을, 지금 이 순간에 서서 결코 돌이켜 후회하지 않으며, 또 그럴 생각조차도 없다.
그 삶의 길목에 남겨둔 사연들 그 모두가 이젠 젖빛 그리움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인 젖빛 그리움들은, 오늘의 내 마음에 감당키 어려운 새로운 행복한 순간들로 되살아나고 있다.
젖빛 그리움에서 새로운 행복으로의 이어짐은, 그냥 우연한 것들이 아니다.
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꿈을 꿨기 때문이다.
그 꿈들은 내 까까머리에 소똥이 눌어붙어 있던 그 어릴 때부터, 이순의 지금 나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살지를 않았던 남들이라면 몰라도, 같이 살았던 내 사랑하는 가족들, 특히 내 사랑하는 우리 큰며느리 지영이가, 나의 이와 같은 절절한 꿈의 그 기록을 모른 채, 그냥 넘어가게 놔둘 순 없었다.
한 권의 책으로 될 나의 이 기록은, 지영이와 그 짝지 우리 든든한 큰아들 재윤이 뿐만이 아니라, 내 가족 모두의 앞으로의 삶에도 투영되어, 그 길고도 긴 그 삶의 길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이렇게 나의 젖빛 그리움의 이야기들을 써 남겨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2008년 5월 15일 아침 6시 30분, 저 먼 남쪽나라 필리핀 세부의 상그릴라 막탄 리조트 호텔 8066호 실에서 이 첫 글을 쓴다.-
♣기원섭♣
내 그렇게 한 편 글을 쓴 적이 있다.
거슬러 11년 전인 2008년 5월 15일의 일이다.
내 그 글에는 ‘젖빛 그리움♤그래서 시작하고’라는 제목이 붙여졌었고, 그날로 바로 내가 카페지기인 지금의 우리들 Daum카페 ‘아침이슬 그리고 햇비’의 전신인 Daum카페 ‘참 아름다운 동행’ 사랑방에 게시를 했었다.
그 해는 내 나이 예순으로 환갑이 되던 바로 그 해였다.
그래서 가족들 사이에서 환갑잔치에 대한 이야기가 솔솔 피어나고 있었다.
그때 바로 그 전 해인 2007년 겨울에 우리 집안의 대들보 같은 존재인 맏며느리로 들어앉은 지영이가 제안 하나를 하고 나섰다.
나의 환갑잔치를 대신해서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제안이 나오자마나, 내 득달같이 흔쾌히 동의를 했고, 그래서 지영이 뜻대로 따라간 것이 필리핀 세부 여행이었다.
우리 집안 식구 된 지가 아직 반년도 채 안 된 상황에서, 시아버지인 나의 환갑을 챙기는 그 마음이 하도 고마워서, 내 그렇게 흔쾌히 동의를 했던 것이고, 함께 어울린 일주일 정도의 그 여정이 너무나 행복해서, 내 그렇게 한 편 글로써 그 기록을 남긴 것이다.
일주인 내내 비가 오다 말다하는 날씨였고, 그 날씨로 하늘은 늘 젖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기억이 어렴풋한 지난날 추억들을 떠올려봤었고, 그 추억들에 그리움을 실어봤었다.
그렇게 지난날 추억들을 곱씹으면서 문득 작정한 것이, 바로 그 추억들을 담은 장편소설 한 편 쓴다는 것이었고, 이왕 작정한 김에 ‘젖빛 그리움’이라고 아예 그 제목까지 미리 정해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그때 그 젖빛 하늘 풍경이 바다 건너의 것임에 착안해서, 그 제목 외에 다른 제목 하나를 예비적으로 정해놓기도 했었다.
그 예비 제목, 곧 이랬다.
‘옥빛 바다에 띄우는 그리움’
그러나 내 그 작정은 그때로 실행에 이르지 못했다.
대학을 진학하지 않았으니, 문학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고, 그래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필력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수임을 내 스스로 자각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냥 세월만 흘렀다.
그 흐르는 세월 속에, 그저 무심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은 때가 있었다.
그때로 3년 세월이 흐른 2011년 5월의 일이었다.
그 딱 한 해 전에 세상에 태어난 내 사랑하는 손녀 서현이의 그 경이로운 탄생과, 또 그 즈음에 사법시험 도전을 접은 막내의 그 슬픈 선택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도전의 불씨가 됐었다.
서울에서 반 천리 길인 내 고향땅 문경까지 걸어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먼 길 걷는 것이, 마치 우리들 인생길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는 내 발걸음에, 내 혈육 모두가 앞으로 다가오는 삶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내 간절한 마음을 담기로 했다.
그 여정에서, 바로 그 ‘젖빛 그리움’이라는 그 소설에 대한 구상을 할 작정까지 했었다.
그러나 사흘째 충주로 향하는 길에서 물집이 생긴 발은, 내 그 작정을 그날로 깨뜨리고 말았다.
하도 아파서 그랬다.
물집으로 시작한 발은, 그 다음날로 피 칠을 한 발이 되었다.
그러나 그 발로서도 걷기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문경시청까지 당도할 것이라고 이미 공개선언하고 나선 판에, 도중의 포기는 나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걸어야했다.
고통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작은 왕모래 한 알을 밟아도 깜짝 놀랄 정도로 통증이 엄습했다.
얼마나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어떻게든 그 통증을 피해보려고 평평한 기찻길 침목을 밟으며 걷기도 했다.
소설의 구상은 멀찌감치 날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흐른 세월이 9년이다.
최조의 작정으로부터 12년 세월이다.
이제는 쓴다.
핑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