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아에서 가져온 정용섭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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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요한계시록 (75)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내가 속히 온다.’라는 문장에서 주어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추정되기는 하나 문맥으로만 보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지금 일곱 천사 중의 한 천사에게서 말을 듣고 그가 보여주는 환상을 따라가는 중입니다. 이런 문맥에서만 본다면 속히 올 자는 천사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 관점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맥락에서 본다면 속히 올 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느 쪽이 맞을까요? 요한이 문장을 정확하게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어린 양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실 것이다.’라고 써야 합니다. 요한은 글쓰기의 문법적인 정확성보다는 메시지 자체에 관심이 있기에 듣는 사람이 알아서 들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요.
‘내가 속히 온다.’라는 7절 문장은 12절과 20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재림 신앙이 그리스도교의 원초적 생명력입니다. 사도신경에도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의 재림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기다려야 할까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이미 재림은 일어난 것일까요? 예수 재림에 관한 이야기가 살전 4:13-18절에 나옵니다. 16-7절만 읽겠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걸 문자로서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단순히 상징이라는 말일까요? 저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반복해서 메타포와 상징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메타포와 상징이 사실은 아니나 사실보다 더 궁극적인 현실(ultimate reality)이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재림이 말하는 궁극적인 현실이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여기서 길게 다룰 수는 없습니다. 속히 온다는 문장에 한정해서만 설명하겠습니다. ‘속히’라는 부사로 번역된 그리스어 ταχύ는 영어 quickly에 해당합니다. 루터 번역 성경이 사용한 독일어 bald도 똑같은 뜻입니다. 이런 부사는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어떤 때는 1년이 길지만 어떤 때는 10년도 ‘곧’에 해당합니다. 제 나이도 이제 70이 넘었는데,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겁니다. 지구 나이가 45억 년입니다. 이런 시간도 더 긴 시간에 비하면 ‘속히’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늘 숫자로 시간을 계산하기에 너무 빠르다거나 너무 느리다고 생각합니다만 궁극적인 차원에서 시간은 숫자의 범주를 초월합니다. 숫자로서 긴 시간도 없고 짧은 시간도 없습니다. 종말에 일어날 새 하늘과 새 땅, 그러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경험될 것입니다. 138억 년 전에 발생한 빅뱅 창조가 종말과 동시적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종말이 들이닥치면 그제야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말씀을 실감하게 됩니다. 개인의 인생에서도 죽음의 순간이 오면 한평생이 정말 한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하듯이 말입니다.
두루마리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βιβλίον입니다. 비블리온은 책이라는 뜻 외에 ‘두루마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경이라는 영어 단어 Bible이 이 단어에서 왔습니다. 두루마리는 양피지로 만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두루마리의 내용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μακάριος)라고 했습니다. 마카리오스는 마 5장에 나오는 ‘팔복’에서 반복된 단어인 그리스어 Μακάριοι의 단수형입니다. 요한이 마태복음을 알고 있었을까요?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글을 쓴 이가 요한이라는 사실은 여기 계 22:8절만이 아니라 계 1:1, 2, 4절 등등에도 나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요즘도 영어 이름으로 ‘존’이 흔하듯이, 당시에도 흔해서 실제로 그가 누군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사람이라는 사실 정도만 분명합니다. 그는 ‘보고 들은 자’라고 했습니다. 보고 듣는 행위는 단순히 생물학적 현상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시원적이고 원초적인 깨달음이 바로 보고 들음에서 옵니다. 예를 들어서 물방울이 맺힌 거미줄을 보거나 누에가 뽕나무잎을 갉아먹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시다. 영혼의 눈이 열리고 영혼의 귀가 열린 사람은 존재의 신비를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리와 완전히 다른 눈과 귀가 있는 건 아닙니다. 영혼의 눈과 귀가 예민한 사람들이라서 하늘의 비밀을 보고 들은 것처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 앞에는 천사가 있습니다. 천사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에게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을 읽다가 불현듯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습니다. 보통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을 친구나 가족에게 설명해도 그들은 별로 이렇다 할 반응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만 주어진 깨달음은 천사 경험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니까요. 그런 천사 경험을 일상에서 친숙하게 이어가는 사람이 있고,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머리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혼의 눈과 영혼의 귀가 얼마나 밝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이런 눈과 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지만, 평소에 신앙 공부를 통해서 그런 차원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도 있고, 잘못하면 오히려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묵시적 상상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준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습니다. 일종의 오체투지(五體投地)입니다. 오체투지가 우리 인간의 가장 분명한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를 땅바닥으로 낮출 때만 세상의 만물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잘난 척하고 고개를 높이면 현실은 멀어지겠지요. 더 근본에서 보면 인간은 언젠가 땅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살아있는 동안 오체투지를 연습하는 게 바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22:9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천사는 요한에게 자신을 경배하지 말라고 말립니다. 천사 자신은 요한과 마찬가지로 경배받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할 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신출귀몰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지성이나 도덕성에서 존경받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경배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 대한 경배는 우상숭배니까요.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 성경에 묘사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가 이에 해당합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뜻을 사람에게 알리는 신입니다. 헤르메스라는 이름에서 해석학(hermeneutics)이 나왔습니다. 해석학은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제 생각에 천사가 자신과 동급인 종으로 언급한 요한과 요한의 형제 선지자들과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도 모두 천사의 역할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묵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 전하는 일이 바로 천사의 일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설교자에 해당합니다. 성경 텍스트의 문자는 진리를 은폐의 방식으로 담고 있기에 해석이 필요합니다. 해석은 기계적으로 발생한다기보다는 역동적으로 발생하기에 해석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설교자에게 해석학적 훈련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설교자가 성경 문자가 가리키는 어떤 깊이를 알지 못하면 변죽만 울립니다. 변죽만으로 영혼의 만족이 안 되니까 자극적인 이야기 소재를 끌어들입니다. 선지자의 길에서 탈선하는 것이겠지요.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사람도 넓은 의미에서는 천사입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천사처럼 여겨도 됩니다. 아니 천사로 살아야 합니다.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은 두루마리를 ‘인봉하지 말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인봉이라는 단어는 계 5:1절에도 나옵니다. 거기에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편에 있는 두루마리가 나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인봉되었습니다. 아무도 그 두루마리의 인봉을 열지 못합니다. 어린 양만이 그 인봉된 두루마리를 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22:10절에서 언급된 두루마리는 인봉되면 안 됩니다. 이유는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때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καιρὸς(time)입니다. 카이로스는 일반적인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시간은 그리스어 크로노스(χρόνος)입니다. 크로노스는 달력에 표기될 수 있지만, 카이로스는 영혼으로 경험됩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사람에게 4월16일은 일 년 365일 중의 하루이지만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들에게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날입니다. 앞사람에게는 4월16일이 크로노스로서의 때이지만 뒷사람에게는 카이로스로서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당연히 늘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카이로스는 은혜의 시간이고, 구원의 시간이며, 종말 완성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말씀은 이미 7절에 나왔고, 이어서 12절에도 나옵니다.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는 앞에서 설명했으니까 여기서는 임박한 재림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만 짚겠습니다. 예수 재림이 지금 여기에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바로 재림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의 재림은 연대기적인 시간인 크로노스가 아니라 의미 충만한 시간인 카이로스이기에 1억 년 후에 발생해도 지금 여기서 발생한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1억 년 후에 벌어질 그 사건이 선취의 방식으로 이미 오늘을 견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삶과 인류 역사와 우주 전체의 역사도 실증적인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궁극적인 미래의 힘에 지배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관념적으로만 들릴 겁니다. 다시 일상의 예를 들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커플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이전에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상대방을 만나게 하려고 일어난 것으로 경험합니다.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그 사실, 또는 그 사건이 과거의 일들을 벌어지게 했다고 말입니다. 이런 관점을 냉소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으나 공감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관점을 종말론적 사유 방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래 지향적 종말의 능력으로서 오늘의 삶에 개입하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빌리면 그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로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2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어린 양이신 재림주 예수께서 ‘속히 오실 것’이며 ‘때가 가까웠기에’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바꿀 여유가 더는 없습니다. 불의한 자와 더러운 자는 그대로 불의하고 더럽게 살게 하고,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는 그대로 의롭고 거룩하게 살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런 명령은 어딘가 이상하게 들립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오히려 불의한 자는 더 시급하게 의로워져야 하고, 더러운 자는 더 시급하게 거룩해져야 하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은 아버지의 유산을 챙겨 멀리 떠나서 방탕하게 살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 분이 아닙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구원하라는 게 하나님의 지상명령이 아닌지요. 하나님께서는 단 일 초만으로도 사람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분이 아닙니까.
본문은 물론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사람과 그 삶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붙들고 살았던 생각과 행동의 패턴을 바꾸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돈벌이와 세상살이에 바쁘다는 이유로 전혀 책을 읽지 않던 사람이라면 늙어 시간이 많아져도 책을 읽지 않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심리적인 만족을 느끼는 사람도 그런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알코올중독자가 거기서 벗어나기 힘든 이유는 술이 그의 몸 전체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책을 읽으며, 무슨 음식을 먹고, 어떤 사람과 어울려 지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 자체가 결정됩니다. 예외의 경우가 있기는 하나 전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에 속한다는 건 단순히 신앙 여부를 떠나서 삶 자체를 결정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말이 공연한 게 아닙니다.
이런 설명이 일종의 숙명론적인 세계관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기도 하나 분명히 변하기도 합니다. 조금씩 변하기도 하고 크게 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변하는 순간이 마냥 지체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삶을 바꿀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암이 자라서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통해서도 완치될 수 없는 한계점이 오듯이 말입니다. 그 한계점 이전에 치료받아야겠지요. ‘그대로 하게 두라.’라는 본문은 다른 이의 운명을 방관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벌어질 그 긴박성에 대한 강조라고 봐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