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와 연분홍이 부르는 5월의 합창
서리산, 축령산 철쭉
그런 까닭이었는지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하는 동안 보았던 관광버스들이
모두 이곳으로 온 듯 자그만치 1.5km정도는 꼬랑지를 물고 늘어서 있습니다.
요즘은 산행도 경쟁하는 시대.
버스에서 토해지는 산객들의 모습이나 차림새가
요란뻑적지근하니 화려하다 못해 휘황찬란한 세를 과시합니다.
이거 원 폼생폼사를 외치던 내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 때의 심정이야 어떻겠습니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3
요 조 사장이란 사람이 제 친구인데
저를 산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입니다.
그리고는 저는 정작 공이나 치러 다니는 것을
이제는 제가 산에 가자고 조르니
참 세상사라는 것이 돌고 도는 것인가 봅니다.
축령산의 푸르름이 걷다 지친 일행의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귀한 나무 흔한 들풀 할 것 없이 한데 모여 정답게 살아가는 숲.
가만히 귀 기울이면 숲의 속삭임이 들릴 것만 같습니다.
한여름에도 이곳은 물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같이 길을 걷는 이들의
속살거리는 소리까지 어울려 청량하기만 합니다.
자연의 소리에서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통해 삶을 위안 받는 일.
오래 전 이곳을 아꼈던 선인들의 뜻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산에서 만난 인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이
산 사람들의 운명 같습니다.
이렇게 산에서 만난 인연이 다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친하게 느껴질 만큼 부드러운 산길이 걷는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나무의 초록빛이 너무 연하고 부드러워서
그림엽서에 나오는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라면 하루 종일 걸어도 행복할 듯합니다.
위 세분이 우리 순금네 산행에 처음으로 같이 한 분들입니다.
앞으로 말 안 들으면 뚜드러 패면서 가르치지 마시고
말로 잘 타이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눌러 살 거 아니면 이제 그만 갑시다.”
푸르러가는 녹음 속에서
연달래 분홍이 만장처럼 나부끼던 일요일 오전
어디서부터 우리 가족의 산행기를 시작할까?
오동도에서 뚝뚝- 하혈을 시작한
동백 꽃 단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이야기부터 할까?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 동강의 전설 이행복 할머니의
강물처럼 유장한 아라리 노래를 부르는 것부터 시작할까?
그게 청승맞다면,
이 땅 낮은 산허리가 슬그머니 바다를 만나고
봉우리들은 꽃으로 남아 기어이 섬이 된 다도해부터 시작해도 될까?
그래, 그래, 오늘은 꽃 이야기부터 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산하는 충만한 봄기운에 그야말로 다투어 피는 꽃 싸움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세상은 울긋불긋 꽃 싸움입니다,
말 그대로, 그야 말로 온 산하에 봄이 무르익어 난리가 났습니다.
만남의 장소인 인천대공원에도 철쭉의 붉음은 정말 환장하게 피었습니다.
그러나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입니다.
그예 지고 마는 꽃그늘에서
눈을 들어 먼 산을 볼 줄 아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원엔 느티나무 잎뿐만 아니라 온통 나무들에 봄이 번져 푸르스름합니다.
놀라움입니다.
어디에 이런 예쁜 생명이 숨어 있었을까요?
연둣빛이 고와 보이면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고 하던데....
소래산에 이르는 길 따라 산등성이 밭에 <복사꽃>이 피었습니다.
산을 일궈 만든 작은 밭마다 온통 <복사꽃>이며 곳곳에 <배꽃>이 같이 피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아버님이 일구시던 복숭아밭은
튼실한 과실을 얻기 위해 솎아낸 복사꽃이 땅바닥을 온통 물들이는데
비라도 올라치면 빨갛게 더욱 빛났었습니다.
하얀 배꽃은 맑은 순백의 자태로 복사꽃과 묘한 대비를 이룹니다.
<복사꽃>이 이른바 도시 물이 든 조금은 속된 여자 같다면
<배꽃>은 아직 세상물정 모르고
그냥 가족에게 헌신하는 여자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주여!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아니 악에서 구하지 마시옵고 계속 시험에 들게 하소서
도심은 벌써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는데
햇볕 안 드는 음지에서 늦은 꽃을 피워 드문드문 남아있는 <산 벚꽃>은
바람 따라 꽃잎을 흘리기도 하고
산중에는 <연달래> 연분홍이 한창입니다.
온갖 봄꽃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꽃을 피웠습니다.
봄이 아름다운 건 바로 이 꽃들 덕분입니다.
과수원 배꽃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나
은하수처럼 피어 낮은 산등성이를 덮고 있습니다.
봄볕의 찬란함에 얼굴마저 붉힌 복숭아꽃의 바다.
눈높이에만 꽃이 있는 건 아닙니다.
행여 밟을세라 삼가졌던 연두색 제비꽃. 노란 민들레....
자연의 시계는 늘 정직하고 언제나 정확합니다.
한없이 가벼운 여린 초록 잎새가 일깨우는 자연의 순환을 보면서
사람 사는 세상은 너무 바쁘게 돌아감을 느낍니다.
비 온다고 우산 쓰고 나가는 유일한 동물이 사람이라 그런 건가요?
산행 때마다 나는 자연의 비밀스런 속삭임을 듣고 보려합니다.
짧지 않은 산과의 인연이지만
한 번도 똑 같은 느낌을 산속에서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뭐, 그렇다고 식물학이나 철학적 사유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땀을 흘리는 중에도 나무들을, 풀들을 유심히 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 미세한 변화를 관찰하는 것은
누가 시키지 않은 자유로운 사유이기에 행복합니다.
‘보는 것만큼 알고,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던데
이제는 나도 지나치기만 했던 길가의 꽃들이 조금은 보일 것만 같습니다.
상여꾼처럼 느리고 느린 걸음으로
산길을 걷습니다.
자연 그대로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의 숨어있는 감성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겨우내 눈 속에서 삭정이처럼 서있던 나무들이
이렇게 봄이 되면 여린 촉을 틔우고 여름 한 날 무성히 잎을 키웁니다.
그 작은 눈뜸도 경이롭지만 그 투명한 색감과 부드러운 촉감에
공연히 한번 쓱- 만져 볼 때가 있습니다.
발밑에 밟히는 작년의 상수리나무 낙엽은 얼마나 억세었나요.
등산화에 밟혀 서걱이는 낙엽들도
이렇게 태어날 때는 한없이 부드러웠을 것입니다.
조심스레 새순을 만지는 느낌은
꼭 어린 아가 볼을, 앙증스런 손을 만지는 것 같습니다.
4월이 끄트머리로 치달으니 또 숲의 색깔이 달라졌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좀 더 완강한 초록입니다.
눈에 드는 녹색의 산하가 여러 색깔 속에 하나로 넘칠 만큼 충만합니다.
철쭉이 만개하면 여름이 온다고,...
더워지는 햇빛과 잦은 비는
이제부터 숲을 좀 더 강인한 색감으로 키워갈 것입니다.
어떻게 이 촉감을 표현할까?
투명에 가까워 손대기가 두려운 보드랍고 여린 살결.
촉촉이 젖어 있는 피부는 금시라도 터질 것처럼 긴장 속에 팽팽하고.
그러나 나는 조심스레 그 살결을 쓰다듬습니다.
척추를 타고 전이 되는 황홀한 느낌과 환희....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어제와는 달리 하늘은 가을처럼 투명하고 높습니다.
숲속 바람은 끈적이지도, 서늘하지도 않고 삽상합니다.
온통 푸른 색깔로 눈에 드는 산하를 건너온 바람이라 그랬을 것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피곤함으로 흐리멍텅해진 내 눈은
초록 세상에서 한층 맑아집니다.
이 초록 화엄세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봄이 한창인 산을 오르며 나는 나에게 물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같은 봄 산의 녹음도 그 색깔이 제 각각 달라서
수백 수천 종류라 내가 아는 단어로는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어
어떻게 표현할까?”
물음을 들은 내가 간단히 정의 합니다.
“신록(新綠)이다.”
신록이라.... 새롭게 태어 난 초록빛이라....
그러나 난 선뜩 내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뭉뚱그려 초록이다, 혹은 푸르름이다. 라고 말하기엔 어딘가 속상합니다.
눈앞에 펼쳐진 초록 잎새들이 만든 초록 바다는
분명히 하나의 색깔이 아닙니다.
분명히 농담(濃淡)의 세계입니다.
묽고, 짙고, 무성한 듯하면서도 허허롭고 싱거운 듯 촉촉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며 일제히 손사래 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면 막막해집니다.
그 개체수를 셀 수 없어 무량대수(無量大數)입니다.
전체이며 하나로 독립한 생명체들이
저마다 손짓하는 언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분명히 눈에 보이는 다른 색감을 한 단어의 범주에 넣기에는 많이 섭섭합니다.
선홍색 꽃 사태 속에서 독야백백 하얀 철쭉이 멋진 포인트를 주는군요.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약간 어지럽기도 하고, 흥분되는 느낌도 있습니다.
꽃멀미라고 하나요?
꽃놀이란 다름 아닌 꽃멀미를 즐기는 거지요.
한 마디 더 하자면
선행대장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되는데
근데 앞질러 가는 겁 없는 행동 어느 분에게 배웠더이까?
산행에서 대장의 말은
법이요! 성경이요! 엿 장사 가위질이고
산행에서 선행대장을 앞지르는 하극상은 회칙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봄은 잡힐 듯 했지만 잡지 못한 첫사랑의 아련함입니다.
그래도 나는 매년 그 봄을 기다립니다.
봄은 짧습니다.
짧아도 너무 짧습니다.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고 마는 봄날은
첫사랑처럼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마음은 어디서든 따뜻한 곳으로 흘러가고
진한 우정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깊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지금 힘겹다고 해서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반전과 대박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니까요.
그냥 마음을 내려놓고 뚜벅뚜벅 가면 되는 것 같습니다.
from Me, from Here, from Now!
오늘이라는 시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테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는
한 가지 빠져서는 안 될 조미료에 그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바로 정성이란 것이지요.
꽃핀 자리에
꽃씨가 달리듯
사람의 마음도 그 영근 자리에
익은 마음씨가 보입니다.
인생 모 있습니까?
한 세상 재미나게 살다가 가는 거지.
비록 끼니를 걱정하며 고단한 삶을 이어갈지라도
앞산에 진달래꽃 붉게 타오르면
탁배기 한 잔 들이키고 흥타령 한 소절 멋드러지게 뽑아내었던
민초들의 삶이 구중궁궐 권력의 그늘에 갇힌 왕후장상보다
훨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가 그친 축령산을 내려 왔던 길을 반대로 갑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여 여
노래 -금잔디-
돌아보면 아쉬운 듯 살아가야지 살면 그 얼마나 우리 산다고
일일희비 아등바등 그 세월 속에 오늘도 우리 인생 분주로구나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애당초 뭣하나 달랐더냐.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야지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우리 인생 여여지
오늘은 오늘이라 좋은 날이고 내일은 내일이라 좋은 날일세
마음속에 무거운 짐 던져 버리고 오늘도 웃음으로 살아나 보세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애당초 뭣하나 달랐더냐.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야지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우리 인생 여여지
나그네 길은 여여(如如)로워야 됩니다.
길 떠남은 약속이 아니기에 님 찾아가듯
혹은 기다리듯 바쁜 마음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목월의 싯귀대로 구름에 달 가듯 천천히 흐르듯 가야 됩니다.
세월은 바람을 몰고, 비를 뿌리고,
사람을 갈등하게 만들고, 더욱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게 세월의 속성이지요.
시간이 지나 푹 익고 숙성된 농축액을 우리 함께 마셔보시렵니까?
주저리 주저리 쓴 글 끝까지 읽어주시어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도 T.V 속에서 개판보다도 못한 정치판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좋지요.
고운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오늘 저녁도 봄꽃들이
인천대공원에는 또 한 번 무수히 피어 날 것입니다.
아침 4시 반에 기상하여 제법 날렵하게 산행을 부산하게 준비를 하였는데도
시간은 나보다 더 빠르게 흘러 늦을까봐 마음이 콩당콩당 조마조마합니다.
덕소역에 도착하여 약속 시간에 맞추려나 몇 번이나 시계를 들여다보고
전철 안에서도 설렘이 한껏 묻어 있는 다른 산객들과는 반대로
여유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내 시간관념을 탓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들에게 맞추려다보면 산행은 곧 고행이 됩니다.
산에서 맞춰야 할 것은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오고 있는지 뒤를 돌아보고 살피게 되는 것을 보면
동행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렇게 정다운 존재입니다.
군데, 군데 적송들이 바위틈을 비집고 나와서 아름다움을 배가시켜주고
먼 산은 시원함을 더해주니 산행의 맛은 절정입니다.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는 곧 분홍 미소를 날릴 철쭉이 젖몸살을 앓고,
연달래 꽃잎이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듯 퇴색하여 나뒹굴고,
나무에 남은 꽃잎들은 산 꾼들에게 하직 인사를 합니다.
점심식사 후 남아있는 풍경이 있기에 일행은 발길을 재촉합니다.
그동안 숨 막히는 절경들을 보여주느라 지쳤는지
하산 길에서의 조망은 나무 군락으로 뒤덮여 있어 시원하지 않습니다.
건너편 산자락 아래 밭 가랑이 사이 높은 분지에 터를 잡은
안산안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있습니다 .
안산안마을로 이어진 시골 농부의 허리처럼 휜 마을길이
주변의 짙은 녹음과 대비되어 그 풍광의 수려함이 결코 가볍지가 않습니다.
산은 성취감보다‘자연에서의 행복’을 느끼는 곳입니다.
초록으로 치장한 산과 즐거움이 묻어 있는 일행 여인네들 얼굴의 어울림에서
초여름의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등산이라는 말에는 정상에만 오르면 된다는
너무 목적지향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하산이 더 중요할 수도 있으며
또한 집에 돌아와 일상과의 연계성이 훨씬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산행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산에서 삶의 용기를 되찾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며
“삶의 의미와 희망을 다시 북돋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산이었다.“는
이도 있습니다.
우암 선생의 말씀대로 바윗길 속에 '도'를 찾아낸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한 대 꼬나물고, 한 숨 돌리고 긴 장거리 귀로에 오릅니다.
버스에 올라 뒤쪽은 주점을 차리고
앞에는 뽑아내고 싶은 곡조를 누에고치처럼 한 줄씩 뽑아냅니다.
가진 것은 없어도 나눌 줄 아는 이들은
술 한 잔에 정을 나누고 노래에 마음을 담습니다.
여행은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행의 기억은 그것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기억입니다.
걷고. 생각하고. 털어놓고. 내려놓기를 반복했던 짧았던 단양에서의 시간
이제 그 시간을 뒤로 하고 또 다시 치열한 생의 도열 속으로 들어갑니다.
또 다시 각자의 시간이 흐르다
삶의 허름한 모퉁이를 만나는 날
소박한 술잔을 기울이며 즐거웠던 오늘을 기억할 것입니다.
또 한 장의 추억, 그 기억으로 오랫동안 마음이 따뜻할 것입니다.
풍부한 술 인심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오른 차내에선
모든 회원들의 표정이 밝습니다.
앞좌석부터 돌리는 잔이 뒷좌석에 도달하기 전 이미 중간 지점에서 바닥이 나자
뒷좌석 개포주점은 꾼들로 여전히 성업 중입니다.
가입 일을 기준으로 군대를 빙자한 쫄병이 불려지고
까라면 까라고 눈을 부라리고,
제발 수류탄은 던지지 말아달라는 주문이 나오고,
그거 순전히 장난이데.
올림픽대로를 거쳐 서하남을 통과한 버스는
가평에서 잠시 쉬고는 내처 달립니다.
의암댐을 지나면서 시작되는 구불구불한 호반길.
생동하는 힘찬 도약조차 아련한 과거에 머물고,
무심한 버스는 계속 달려 비포장길로 들어섭니다.
오늘은 하만산동→비래바위→비래바위산정상→상만산동의 'ᄃ'형 산행입니다.
산은 온순한 평지로 그 모습을 바꿉니다.
무사히 세상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힘든 순간을 함께 했던 이가 가장 고맙고
무엇보다 역경을 이겨낸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는 살아가면서
“아니 못 해”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단순한 것이 편안한 인생길입니다.
숫재 돌이면 돌, 흙이면 흙......
돌길도 아닌 것이 돌처럼, 흙길도 아닌 것이 흙처럼
잡다한 것이 모이면 모일수록 복잡하여 인생살이가 고달픕니다.
그리 오랜 시간 홀로 바라보던 경치와 고독이 밟히던 길을
이제는 우리 순금이 가족과 함께 나눕니다.
푸르게 젖은 지리산으로 하나같은 식구들이 갑니다.
봄꽃을 수놓은 여인의 손수건을 연상케 할 만큼
많은 꽃이 자라납니다.
연두색 여린 나뭇잎은 오월의 햇살에
실핏줄 같은 잎맥을 드러내고
반투명한 볕 가리개가 되어
자외선을 걸러내고 나면
지면에 닿는 볕은
친근하고 다정하기만 합니다.
* 산의 호흡이 들리고 산의 표정이 보입니다.
산은 그렇게 온몸으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길은 언제나 가파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시간에 걸친 산행 끝에 축령산의 백미가 드러납니다.
그 풍경의 끝에 천마산이 보입니다.
간만에 나타난 푸른 숲에 한여름 볕을 잠시 피합니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붙잡고 오를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스스로 누워 계단이 되어주는 나무가 있어 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나무도 자신을 위해 그늘을 만들진 못합니다.
약간의 양념도(와이담) 쳐가며
그렇게 한참을 오르다보니
책의 끝부분에 배치된 '클라이밍과 비즈니스', 나는 이로 해서
내 안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자기초월의 물꼬를 틀 수 있었습니다.
산사나이들 역시 산에 묻히지 못한 이상,
언젠가는 평지에서 새로운 정상을 찾아야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누구에게나 안나푸르나는 있습니다.
“봉우리에 오르고자 하는 의욕과 어려운 암벽을 등반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
험난한 곳을 인지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능력,
탐험을 위해 갖추어야 할 준비의 필요성,
대원들과의 어려운 인간관계...” 가 어찌 등반과 사업에만 필수적이겠습니까?
살아가는데 그것 없이는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쓰디쓴 나이입니다....
'재능을 환전{換錢}하라' 이 책은 내게 이 문장으로 남았습니다.
높은 곳에 서면 더 넓은 세상이 보이는가?
**산 정상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살아 있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
아침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노래가 있어 행복하고
꿈이 있어 행복하고
사랑을 베풀 수 있어 행복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기쁨도 슬픔도 맛볼 수 있어 행복하고
더불어 인생을 즐길 수 있어 행복하고
누군가가 그리워 보고픔도
그리워 가슴 아리는 사랑의 슬픔도
모두 다 내가 살아있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누굴 사랑하기 전에
이런 행복을 주는 내 자신을
먼저 사랑으로 감싸줬는지요.
왜 우리는 산을 오르는가?
그것은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통한다고 생각됩니다.
서양인들은 자연을 인공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동양인에게 산 또는 자연은 신(神)의 또 다른 이름인 도(道)입니다.
하늘과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동화의 대상, 경외의 대상, 몰아일체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들판의 벼들을 보면서
농부들의 땀방울을 생각합니다.
누렿게
고개 숙인 벼가 될 때까지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를 아흔 아홉 번을 들어야 고개를 숙인다고 합니다.
요즈음
게으름으로 멍청해 있는 바보 같은 내 정신 상태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농부처럼 부지런한 손발이라 자부했었는데
무슨 까닭일까?
제대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흘린 침은 ,,,.내일의 눈물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이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흐르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시간 몰입에 게으를 수 없는 나의 시간은
어느 때 보다 더 소중하게 사용되어야 하기에....
남쪽 축령산(825)과 북쪽 서리산(879)은 두개의 산이면서,
산행을 하는 입장에선 하나의 산으로 여겨집니다.
굳이 산행을 않더라도 울창한 잣나무 숲을 산책하며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기엔 여기만한 곳이 또 있을까요?
특히 5월이면 서리산 능선부에 군락을 이룬 철쭉들이
일제히 연분홍 꽃문을 열어 행락객들의 혼을 쏙 빼어놓습니다.
게다가 능선을 따라서 뻗어있는 방화선은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아름다운 길로 손 꼽을만하며
그 주변에는 온갖 야생화들이 다투어 피어납니다.
그래서 이즈음 5월의 화원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축령산입니다.
산행코스는 휴양림 주차장을 출발하여 축령산, 절고개, 서리산,
질마재를 거쳐 원점회귀 하거나
동편 기슭에 자리 잡은 아침 고요수목원 방면에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잣나무 숲 임도를 따라 올라오는 방법이 있습니다.
휴양림으로 운영되는 이곳은 주차장이 넉넉하고
대중교통편도 비교적 원활하여 접근성이 좋습니다.
초반 된비알만 잘 견뎌내면 능선 길은 거저먹기여서
그 축령산은 거의 매년을 들락거리다가,
2009년을 마지막으로 걸음을 끊었었습니다.
그래도 매년 5월 철쭉이 필 무렵이면,
필경 축령산 토양에는
세상에서 가장 고운 분홍빛을 자아내는 성분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여차저차 산행을 미뤄왔던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 하는 길이니
이거야 말로 1타 2피!
그동안 줄곧 축령산부터 산행을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서리산부터 시작합니다.
나도 모르게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립니다.
이 노래 정말 좋아합니다.
특히 장사익 선생 창법이 가슴에 가장 절절하게 와 닿습니다.
3절까지 외워서 노래방에 갔는데,
중간에 고음부가 있어 우리 같은 사람이 부르기엔 영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예가 노래방이 아닌 관계로 콧노래로 흥얼거리는데,
어라 여기서도, 저기서도 똑같은 흥얼거림이 들려옵니다.
사람의 마음은 다 비슷한가봅니다.
나도 말은 그렇게 해놓고,
한 발짝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연분홍 철쭉에 미쳐버렸습니다.
신구 선생처럼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니들이 천상의 화원을 알아?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아무리 방화선도 연두색 불이 번지는 것은 막지 못하네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길 열개를 꼽는다면
서리산과 축령산 사이 방화선이 그중 한 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소원을 빌었습니다.
축령이라는 이름이 그런 뜻이라서....
서리산과 축령산을 연계 산행 했는데도
산행 시간은 간식과 휴식시간 다 합쳐서 채 다섯 시간도 안 걸렸습니다.
진사들끼리 왔다면 필경 남이바위에서 석양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여기선 등산로를 벗어나 숲속으로 한 발자욱만 들어가도
온갖 야생화들이 나 좀 바라보라고 손짓을 해대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들을 마주보고 악수는 고사하고 눈인사만 나눈다 하더라도
하루해로 부족하겠습니다.
이번 산행에서는 그럴 겨를이 없었지만,
꽃을 보면 환장하는 나는
강아지 마냥 쭈욱 뻗어있는 길을 빤듯하게 걸어가지 못하고,
계속 들락거리다보니 몇몇 예쁜이들과 겨우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밭두렁이나 인적 없는 언덕에 한 무더기 외로이 피어난.
조팝나무도 나는 좋아합니다.
그대가 홀아비바람꽃?
이름과 생김새를 아무리 연관시켜 봐도...
상상력의 한계인가 봅니다.
옛날에 귀한 집 자식 오래 살라고 개똥이라 한 것처럼,
이리 예쁜 친구에게, 쥐오줌이라니?....
5월 숲의 대세는 누가 뭐라 해도 피나물입니다.
그래도 최고의 미인을 꼽으라면 나는 앵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서리산 등성이 연분홍 치마는 아직도 펄럭이고 있으니
혹 마음이 땡긴다면 이번 주에 서둘러 다녀오시길....
지난 시절 봄은 보릿고개라 할 정도로 고단하고 빈곤했지만
그래도 저마다 품은 뜨거운 희망의 열기로 거리엔 활력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봄은
당시에 비해서 여유롭고 풍성할지는 몰라도
좋은 세상을 위한 변화도 목숨 걸고 이루려는 희망도 없이
너 잘났네, 나 잘났네 하는 나른한 목청들만 난무합니다.
20여 분의 능선길 내내 가파른 숨.
돌아보면 늘 그랬습니다.
다 왔다고 생각했을 때 늘 거칠게 다가서던 걸림돌.
마지막 한 걸음이 늘 가장 어렵습니다.
꽃이 피고지고 새잎이 돋아 푸르러지고 햇살도 도톰해지는 5월입니다.
무리지어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햇빛을 받으면 눈부시게 반짝이기도 하면서
서로 어우러지고 포개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
그렇게 우리는 모두 하나의 꽃과 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봄에 어찌 사랑을 노래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온통 주변을 돌아보면 사랑할 것만 보이는 이 봄을 주체할 수가 없어
다들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인가 봅니다.
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
또 거리에는 사랑이 넘쳐납니다.
그렇게 이 봄이 분주하게 또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분주함 속에 우리 *** 가족들이 엉켜들러 갑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언젠가 묻혀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인생살이가 참 별개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나와 잠시 머물다 갈 시간들인데
지지리도 지루한 세월 속에 갇혀 있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서글플까요?
나에게는 산사모산악회 새내기의 첫 산행일이라
다가가 친구 넘의 소개로 인사를 건네니 모두들 반갑게 맞아줍니다.
얼마나 반가운지요.
타지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는 그런 반가움입니다.
모두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청초한 풀잎처럼
상큼해 보이며 환한 얼굴들입니다.
언제나 똑 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한 달에 한 번쯤 하루만이라도 등짐을 메고 마음 내키는 대로
새처럼 자유롭게 날았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눈앞의 모든 것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만남,
그것은 무엇일까요?
기억의 편린들, 그것들의 새로운 조합.
삶의 어느 시점에서 꼭꼭 챙겨 두어야 하는 세월의 간이역 같은
더러는 성긴 모습이겠고, 더러는 의도치 못한 변수이겠고
또 아주 특별하게는 상호의존관계가 되어서 좋은 열매가 되겠지요.
또 각자 치러 낸 세월의 와류에서 만난 삼각주 같은 것인지도요...
어느 것이 되었든, 만남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라 생경스럽기도 하겠지만
갓난장이 근반 심장의 신기하고 오묘한 질서 같은 것이기도 하여
틀에 목메어 지쳐가는 우리네 삶 중에
신선한 산소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늘 다니던 익숙한 길과
가보지 않은 낯선 길에서
언제나 고민하는 우리들.
갈등의 순간 산을 오르다보면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산은 사람을 어질게 만드는 스승입니다.
저 산 너머에 또 산이 있고
숲 뒤에 또 숲이 있습니다.
높이 오를수록 길은 더 좁고 가파르게 나 있습니다.
길이 가파른 것은 서두르지 말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오르라는 것입니다.
부지런한 걸음이면 30 여분쯤이면 족할 거리를 한 시간여가 걸렸으니
한 발, 한 발 남겨놓은 발자국엔 추억의 이야기가 쌓여가고 ......
자연이 빚어 놓은 아름다운 풍경에 머리끝이 쭈뼛한다면
당신의 E. Q 는 만점.
좋은 사람, 좋은 풍경 속에서 이 겨울이 더 따뜻해져 갑니다.
기막힌 절경을 만나기 위해서는
멀리 떠나거나 높이 올라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늘 크고 유명한 곳만 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까이에, 조용히 있는 것에 소홀했던 것이지요.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픈 마음이 누구에겐들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토록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 그리움은 사라질까요?
그 사람을 만나면 내 영혼이 채워질까요?
분명 그리운 사람을 만났는데 왜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을까요?
왜 그리움은 영원한 목마름으로 있을까요?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물음 투성이인 게 인생이 아닌가 생각게 합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여행.
호수가 사물을 담아내는 거울이 되듯이
그렇게 길 위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보는 것입니다.
나무가 겨울이라는 혹독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고
여름에 그늘을 드러내듯이
나 또한 절망이라는 세월을 견뎌낸 자세로 그늘을 드러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나무그늘에 앉아 내가 편히 쉬듯이
다른 사람이 내 삶의 그늘에 앉아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
이번 산행기도 작은 머리로 그려 넣다보니
언제나 그렇듯이 몇 번을 읽으면서 교정하여도
별빛이 보일 듯한 엑스터시를 끝내 터치하지 못한 감질 맛만 납니다.
고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고 한 마디의 충고라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해주셔야 다음 태백산의 하얀 그리움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삶속에서 용광로처럼 끓던 열정과 투지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영원히 재워둘 것이냐 아니면 깨울 것이냐는
네 선택에 달려있다."
아마도 계룡산을 다시 찾을 때쯤에는 그 답을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수성찬은 반찬 가지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것.
어느새 허기진 뱃속에 따뜻한 국물을 들이켜니
세상 시름이 모두 잊혀집니다.
길에서 만나는 낯선 풍경과 사람들,
여행을 하며 느끼는 삶에 대한 짙은 페이소스는
내게 위안이고 기쁨이며 삶의 활력소였습니다.
여행이라는 것이
때론 방황과 같고....
때론 배회 같기도 한
그 목마름에 이끌리어 어딘가로 홀연히 나서는 마음이라지요.
여전히 이토록 끊임없이 일어나는 떠남에 대한 동경과 설레임은
무엇이란 말인가?
돌이켜보면 여행은 언제나 내 삶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지지자였고
둘도 없는 벗이었고 사랑하는 임이었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아득할 때는
서해바다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나를 찾았었고
마음이 어지럽고 평정심을 갖기가 쉽지 않을 때면
담양의 소쇄원과 죽녹원을 거닐며 내 마음을 달랬었습니다.
그리움과 애달픔으로 밤잠을 설칠 때는
섬진강의 일몰을 보며 그 마음을 오롯이 느끼며 간직하려 애썼습니다.
길
새벽에 보는 섬진강의 모습과 일몰에 보는 섬진강의 모습이 다르며
어제 걸었던 월정사 전나무 숲과 오늘 걷는 전나무 숲이 다릅니다.
선운사의 꽃무릇이 그리워
며칠 동안 가슴앓이를 하다가 떠난 그 신새벽....
네 시간이나 달려 만나고야 마는 그 열정이 아직 남아 있으니
하여 .... 나의 길 떠남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다가올 가을 ....
부석사 은행나무 길과 맑은 기운 가득한 청량산.
그리고 지리산 피아골의 핏빛 단풍을 꿈꿉니다.
지구촌 저편에 지진이 일고 산사태가 나는 이치를
나약한 인간으로서야 어찌할 수 있으랴....
마주보면 직선거리로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은 정상.
산은 실날 같은 인간의 길을 알려주며 훠이훠이 돌아가라 말을 합니다.
세상근심이 저 산보다 높느냐? 내려놓으라 말을 합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갈망하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바로 저기에 세상사에 지친 이들의 의지와 속을 대변하는
긴 독백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에게 험하다는 것은
자연에겐 때로는 제 모습대로 살기 좋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그러기에 산행을 하면서 부지런히 따라잡아야 할 것은
공간의 거리이기도 하고 산이 버텨온 시간의 거리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산에 올라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보며 낮아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산은 꽃과 나무만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자라게 하는 곳입니다.
산이 내주는 숨결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산은 바람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머물게 하는 곳입니다.
미국의 어느 조사기관에서 90대 노인들을 상대로
인생에서 가장 후회로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답니다.
그런데 응답자의 90%가 좀 더 모험을 해보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는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모험을 찾아가는 살아있는 시간을 산에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떠신지요?
높은 산을 오르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데
그 높은 산은 우리를 시험하는 무대가 되기도 합니다.
오르락내리락 하여온 삶의 애환을 보아온 태양은
쨍쨍한 빛을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발하고 있는데
환한 웃음과 슬픈 눈물은 내가 선택한 나의 몫이고 결과일 뿐입니다 .
낭떠러지 앞에서의 환한 웃음소리는 기암에 부딪혀 메아리를 낳고
모두 하나 된 몸뚱이는 우정의 늪 속으로 서서히 잠겨듭니다.
이렇게 밝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인생의 등불이 꺼지는 먼 훗날
아득히 걸어온 삶의 뒤안길을 뒤돌아보아도 삶을 후회하지 않을 텐데
한 때의 실수로 구겨져버린 나의 실상이 애처롭습니다.
떠날 때는 말이 없는 법이지만 헤어짐의 아쉬움이 커서인지
차 안에서는 다음은 어디에서 번개모임이라도 만나서 커피 한잔할 것을 확약하며
풍경에 취하고, 한 잔 술에 취하고, 또한 우정에 취해
그 색채가 짙음으로 인해 약간의 오버액션(?)이 뒤따랐지만
깊어가는 밤길을 달리니 추억의 열매가 조금씩 영글어 갑니다.
어찌보면 같은 길에 있는 사람은 다 같은 동행자처럼 느껴집니다.
사랑이란 같은 길을 함께 바라보며 걷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산사모 가족들 다음 여행지인 사량도에서 다시 뵐 것을 소원하며
제 고향 영광 법성포 출신 1 년 선배인 박남준 시인의 시를 한 편 싣습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길입니다.
봄이면 봄대로, 겨울이면 겨울대로 색다른 운치가 있을 것 같아서
계절마다 다시 찾고 싶습니다.
이런 길은 스님과 함께하며 화두를 나눔이 제격일까요?
아니면 가인과 함께 가끔씩 눈으로만 얘기를 나눔이 어울릴까요?
마을 입구 작은 다리 옆에는 산행 출입을 금하는 안내 표지판이
장승처럼 꼿꼿이 서있고, 위반 시에는 ‘공원법에 의거 과태료 200만 원 이하’
라는 위엄 있는 문구에서 시선을 떼는 10시쯤 출발을 합니다.
첫 걸음부터가 오뉴월의 상팔자 개(犬)걸음이 아닌
무슨 소 잡을 일이 있는지 큰 소(牛) 걸음으로 시작합니다.
오전의 햇살을 등지며
엔진이 가열하는 5분 동안 부지런히 앞 사람 엉덩이만 보고 따르니
대문짝만한 입산금지 플래카드가 길섶에서 펄럭펄럭 대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멀리 떠나간 줄 알았던 앞선 일행들은 능선의 찬바람을 등지고
이제나 저제나 하며 동네 어귀에서 대감 집 규수를 기다리는 도령마냥
옷깃을 여미며 서성이고 있습니다.
상월봉 아래에선 기럭지가 엄청 긴 일행 중 한 명이
애인을 기다리며 한없는 망중한에 빠져 있는 모습이 포착됩니다.
“망부석 될라 정신 단단히 차려라~~”
비로봉에 오래 머물다 가라고 날씨가 봄날입니다.
연분홍 철쭉이 등산로가 뭐야? 온 능선을 덮고 있습니다.
초록색 숲 속에 무덤무덤 피어 난 모닥불처럼 철쭉은 피어났습니다.
별로 놀랄 것 없는 세상 보았다고 생각한 나에게
귀싸대기 한방 후려갈기는 놀라움이었습니다.
뱃속 불편한 탓에 상경길 천재형이 준비한 홍주가 아쉬웠으나,
어제의 산행에서 신의 축복을 말하지 않는다면 진정 인간의 교만이리라.
어쩌면 산행에 최적인 날씨가 뒷받침 되었기에 무사산행을 마쳤는지 모릅니다.
더하여 정자공주도 괜찮다니 말입니다.
정상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와 다시 순천만을 걷는 시간,
하늘은 정상에서 보던 선홍빛 노을에서
층층이 옅은 물방울의 입자로 그린 캔버스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퍼집니다.
투자한 시간보다 행복하였느냐고.....
개와 늑대의 시간을 향해 가는 지금.
잔 여울에 비친 대칭의 구조로 서있는 순천만의 풍경 속을 보며
나도 나를 비출 그 무엇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빠져봅니다.
아름다운 순천만
우리네 생은 어찌 이리 감사할 것이 많은지.....
이 아름다운 세상 두 눈 속과 렌즈에 고이 담아올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생의 방점을 찍는 순간 여전히 살아있는 나를 만날 수 있어서입니다.
크지 않은 땅덩어리에도
산만큼은 모자람이 없는 우리나라....
왔던 길을 반대로 돌아갑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집을 나설 때의 그 마음은 아니지만 훗날을 기약하는 마음이 너무 좋습니다.
오 월
꽃이 피고지고 새잎이 돋아 푸르러지고 햇살도 도톰해지는 5월입니다.
자연은 신록에서 초록으로 가는 중으로
사람으로 치면 막 사춘기를 벗어나
풋내와 성숙한 내음이 뒤섞인 묘령의 나이입니다.
오월의 나뭇잎들은 눈부시게 푸릅니다.
무리지어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햇빛을 받으면 눈부시게 반짝이기도 하면서
서로 어우러지고 포개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렇게 우리는 모두 하나의 꽃과 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기쁘고 행복한 날이나 힘들고 슬픈 날에도
의연하고 푸르른 나뭇잎처럼 한결같이 푸른빛의 마음 하나
잔잔한 호수에 반짝이는 물결처럼 작은 기쁨하나 간직하고 싶습니다.
하늘의 별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 발아래의 아름다운 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데
그 전에 눈이 빠지고 모가지가 떨어지겠습니다.
이놈의 해거름은 왜 이리도 더딘 건지
할 수만 있으면 손으로 확 당겨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곁에 말을 걸어주는 가인이 있다면
더 좋겠지.
뭐 그러나 혼자라면 또 어떠랴.
여자만 짭짜롬한 갯바람을 으스러지게 안아볼 테니까.
제가 순천만에서 하고 싶은 것들
당신이 먼저 해도 됩니다.
질투하지는 않을께요.
최근 들어 여행 기회가 많아져서 좋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 속이 후련해져야 하는데 왜 이리 답답한지요.
필경 내 생각이 핍절해졌거나, 여행을 무슨 의무감으로 받아드려서 그럴 것입니다.
이런 증상 역시 여행으로 치료를 해야 합니다.
일상에서 나를 단절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념의 틀에 갇혀 있는 나를 방목해서 자유롭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엔 이런 저런 스케줄? 그런 줄은 다 잘라 버리고
간척지 제방위에 허허로이 서 있는 나무들처럼
등짐 대신 텅 빈 시간만 들고 찾아올 것입니다.
뭔가 붙들고 있는 것이 많은 것들....
가령 할 필요도 없는, 하지 않아도 될 이런 저런 걱정들입니다.
오늘저녁에는 모텔에서 잘까? 펜션에서 잘까?
짱뚱어탕을 먹을까? 매운탕을 먹을까?
내일 찾아가게 될 선암사에 매화는 피었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작심하고 여행을 온 것입니다.
많이 여유로워지긴 했지만
순천만 갯바람에 마음을 맡기기엔
왜 그런지는 몰라도 물고기를 못 잡아먹어
한참 굶은 펠리칸처럼 절박한 표정들입니다.
이렇게 분위기가 살벌할 때는 처신 잘못하다간
뺨까지는 아니라도 눈총 호되게 쏘일 수 있겠습니다.
고운 채로 거른 순수 정예로 구성된 다산산악회!
날이 갈수록 즐거운 산행으로 이어져 가니
하늘아래 구차한 회색도시인들로서
이만큼 멋진 전설을 쌓아가는 모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같이 서로를 위하고 배려하는 아름다움으로 도배된 멋진 회원들!
진정 이게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람 세찬 신불산 정상에서 펼친 홍탁이 사람 잡습니다.
#2
아직 짙푸른 녹음으로 변하기 전
초여름의 숲은 온통 고운 연둣빛입니다.
물과 바람, 햇빛과 나무가 살고 있는
숲속의 공기는 향기롭고 달기까지 합니다.
짙푸른 녹음에 온 몸에 푸른 물이 번져 마음이 들뜹니다.
어느 색의 마술사가 이토록 정교하게 초록물감을 뿌려낼 수 있을까요?
우리들의 재미난 얘기에
꼬실한 햇살이 융단처럼 펼쳐진 길가에 핀 꽃들도
화~아 ㄴ하게 웃습니다.
젊을 때는 몰랐던 인생의 푸른 시간들을
산의 초여름을 보며 뒤돌아봅니다.
푸른 바람소리 따라 오르는 길에
자연의 깊은 울림을 담은 축령산이 있습니다.
산이 깊어질수록 주변의 색도 짙어갑니다.
오늘 축령산은 청량한 공기가 대박입니다.
십여 년 산행을 하였지만 이처럼 좋은 공기는 처음입니다.
나뿐만이 아니고 일행 중의 많은 사람들이 하는 감탄입니다.
어느 해 찾았던
서리산 능선을 흐드러지게 수놓았던
눈에 밟히던 그 매혹적인 연분홍빛은 색이 조금 바랬지만
휴양림에서는 달력에나 등장하는 그런 쭉쭉빵빵한 잣나무 숲을 만나고
충분한 산행의 맛을 느낀 서리산, 축령산이었습니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언덕
물안개 피어오르는 방죽
갈대숲이 드넓게 펼쳐진 삼각주를 끼고 도는 경운기길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달리고 싶은 포플러 나무가 서있는 강둑
물비늘이 눈부신 저수지의 긴 뚝방.
외진 산기슭 옛 제각과 수호신처럼 지키고 선 벚나무 고목
눈 덮인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외따로 자리 잡은 산기슭 아담한 고택
수백 살 묵은 소나무에 둘러싸인 어느 댁의 산소
도시를 벗어나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들은 입에 오르내리는 명소보다는
이런 곳에서 더 강렬하게 감성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할 때마다 고개를 두리번거려보지만
우리나라 어디든 농어촌과 산골짜기이나 도회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온갖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고
눈에 닿는 곳이면 어디나 전깃줄이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어
감성을 오롯하게 사로잡는 그런 풍광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 같은 산쟁이들에게 5월은 최고의 산행계절이지요.
전국 명산마다 철쭉이나 진달래를 비롯한 각종 야생화 다투어 피어나고
기다렸던 주요 국립공원의 산방기간이 풀리는 것도 5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맘때면 서리, 축령산 보다는
좀 더 멀고 큰 산에 눈길이 가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축령산과 서리산을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 시간들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상경길은 예상보다 빨라 벌써 8시에 출발지에 도착했습니다.
비님 오시고, 시간님 이르니, 꼭 만나야 할 분이 주님이 아니던가?
뒤풀이가 거나해질 무렵,
우리에게 산은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정신을 놓아두고 육체로만 행동하다보면
정신도 맑아지고 육체도 싱그러워질 것입니다.
이는 도시생활에서 찌든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일 것입니다.
복잡한 일상을 사는 도시인들에게 산은 완벽한 휴식처입니다.
또한 바람에 뒤틀리고 꺾이어도
수백 년을 푸르게 살아있는 나무에서 강한 생명력을 느끼며
인간도 모진 바람에는 몸을 낮추어야 한다는 지혜를
작은 바람에도 몸을 누이는 이 나무와 작은 풀들에게서 배웁니다.
그래서 자연은 우리 인간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선생님입니다.
산은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곳입니다.
산에 오르면 인생관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나무와 바람, 수만 년 동안 서 있던 바위조차
살아있는 삶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모진 바람 불어오는 길 위에 주저앉지 않고
삶의 모퉁이에서도 자신의 짐을 지고 가는 힘.
산에 오르는 것도 결국 인생을 배우는 배움의 길입니다.
일행은 같은 산을 걸어와 하나의 풍경을 마주합니다.
어느새 같이 산을 올랐다는 공감에 정이 새롯합니다.
서로 다른 방향 위에 놓인 삶 위에 나란히 걷는 일행들의 걷는 모습이
앞으로 다가올 삶이 어떤 모습일지라도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겠다는
또 한 번의 다짐과 약속을 보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