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처럼 연결된 네 개의 이야기. 소설 속의 소설,자서전,회고록,일기. 이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화자의 욕망에 따라 때로는 진실을 때로는 거짓을 담보한다.
광란의 시대라 일컫는1920년대 미국의 금융시장과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다.부와성공이라는 신화, 돈과 사랑이라는 허상.남편과 아내라는 역할. 작가는 우아한 춤을 추듯 그 사이를 빠져나가며 우리에게 무엇을 믿느냐고 되묻는다.
첫문장: 태어났을 때부터 거의 모든 이점을 누려온 벤저민 래스크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몇 안 되는 특권 중 하나는 영웅적으로 부상할 특권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회복력과 끈기에 관한 것도 아니고,티끌로 황금의 운명을 만들어낸 불굴의 의지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ㆍ솔로몬이 성공을 거둔 핵심 요인은 상품의 질보다는, 물론 담배에 쾌락주의적 측면이 있긴 하나 대부분의 남자들은 다른 남자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담배를 피운다는 명백한 사실을 활용하는 능력이었다.
솔로몬 래스크는 가장 뛰어난 시가와 시가릴로, 파이프 담배
공급자였을 뿐 아니라 탁월한 대화와 정치적 연줄을 제공하는 사람이기도 했다.그는 사교성과
흡연실에서 다진 우정 덕분에 사업의 정점에 올라 입지를 다졌다.
ㆍ성공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솔로몬은 뉴욕 웨스트17번가에
타운 하우스를 지었다. 이 집은 벤저민이 태어날 때에 아슬아슬
하게 맞취 완공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뉴욕에 있는 가족의 집에 모습을 드러내는 적이 거의 없었다.
ㆍ솔로몬의 아내 윌 헬미나 래스크는 한 번도 남편의 쿠바 별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오랫동안 뉴욕의
집을 비우곤 했다.윌 헬미나는 솔로몬이 돌아오는 즉시 집에서 나가 그 계절 내내 허드슨강 동안에 있는 여름 별장이나 뉴포트에 있는 오두막 등 친구들의 집에서 지냈다.
ㆍ벤저민은 대부분 자기 방과 유모의 방에만 머물러야 했으므로, 어린 시절을 보낸 브라운스톤 저택의 나머지 구역은 어렴풋하게만 알았다.
벤저민의 모든 유모와 가정교사는 그가 모범적인 아이라 말했고,과외 교사들도 그 점을 확인해 주었다. 이 얌전한 아이처럼 태도와 지능, 순종적인 성품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는 아이는 없다고 했다. 어린시절 멘토들이 한참 찾아보고 나서 알아낸 몇 안 되는 결점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꺼리는 그의 성향이었다. 그에게 친구가 없는 이유는 겁이 많아서라고 하자, 솔로몬은 그저 자주적인 남자가 되어가고 있을 뿐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ㆍ벤저민은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 준비가되지 않은 채로기숙 학교에 입학했다.첫 학기에는 매일같이 벌어지는 모욕과 사소하지만 잔인한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같은 반 아이들은 괴롭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벤저민을 만족스럽지 않은 희생양이라 생각하고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벤저민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은 채
무감정하게 모든 과목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선생들은 그에게 모든 칭찬을 퍼부으며 그가 무척 특별한 존재라고 했다
그가 학교에 어마어마한 영광을 가져다줄 거라고 말했다.
ㆍ사망한 부모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그는 졸업하고 뉴욕으로 돌아왔으나 대부분의 지인들이 성공을 거둔 분야에서 실패했다. 그는 서툰 스포츠맨이었고 무감정한 사교가였으며 열정이라고는 없는 음주가에 냉담한 도박사, 뜨뜻미지근한 연인이었다. 그는 담배 때문에 재산가가 되었으면서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그가 자나치게 인색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에게 억눌러야할 욕구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ㆍ시가공장은 벤저민에게 알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먼 세상이었다. 그는 회사 입장에서
자신이 경악스러운 대표라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인정했기에
운영을 아버지밑에서 이십 년 동안 충실하게 일해온 임원에게 맡겼다. 그렇게 몇 년의 정체가 흘렀다. 벤저민의 은행담당자는 남은 저축액과 함께 쿠바 별장을 판 돈을 주식 시장에 투자했다. 뉴욕시의 분위기는 미국을 집어삼킨 연쇄적 재정위기와 그에 따른 경제침체로 우울했다. 경기침체는 철도산업 버블로 시작됐고 은 가치의 폭락에 이어 금 가치가 폭락했으며, 1893년 공황으로 이어져 은행이 파산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금 보유고가 고갈되면서 금보유고를 복구하고자 발행된 채귄에 "연줄"을 통해 청약했다. 래스크는 일주일 만에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행운은 그렇게, 굳이 청하지 않았는데도 유리한
정치적 변화와 시장 변동의 형태로 찾아왔다. 덕분에 신경써서 불리려 하지 않았던 상당한 규모의 재산은 갑작스럽게, 또 겉보기에는
자연스럽게 불어났다. 일단 우연의 손길을 맛본 벤저민은 허기를 동하게 할 만한 큰 미끼를 보고서야 알게 된 어떤 굶주림이 자신의 핵심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ㆍ벤저민의 자산은 예전부터 래스크 가문의 일을 처리해 온
J.S. 윈슬로 회사라는 가족 승계회사를 통해 보수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머잖아 벤저민은 티커를 읽고 패턴을 찾고 그 패턴을 분해하고 겉보기에는 아무 관련이 없는 추세 사이 에서 숨겨진 인과관계를 찾는데 능숙해졌다.
윈슬로는 벤저민의 예측을 일축했으나 결국에는 그가 시키는 대로 일을 처리했다.
벤저민은 자문가의 융통성 없는 태도와 느릿한 속도에 질려 자기가 직접 거래를 하기로 하고 윈슬로를 해고했다. 일을 직접 처리할 권한을 가지게 되며 인생에서 처음 경험한 진짜 성취감에 더 큰 만족감을 얻었다.
ㆍ벤자민의 브라운스톤 저택 1층과 2층이 임시 사무실이 되었다. 사람들을 관리하는데 사업에 꼭 필요한 시간을 빼앗겼으므로 그는 조수와 회계사를 고용했다. 손도 대지 않던 가구들을 직원들이 함부로 다루었다. 페르시아 러너는 영원히 더럽혀졌다 부모의 방은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가본 적도 없는 꼭대기 층에서 잤다.
ㆍ아버지의 사업체를 매각하기 위해 제조사와 무역회사가 서로 입찰 경쟁을 하게 부추겨
영국회사가 이겨 담배회사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 즐거웠다. 정말로 큰 충족감을 주었던 건, 이 매각을 통해 얻었던 이윤으로 더 높은 차원에서 작업하고, 새로운 수준의 위험을 관리하고, 과거에는 고려할 수 없었던 장기 거래에 돈을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벤자민의 부가 증가하는 것과 정비례하여 그의 소유물은 줄어드는 걸 보고 혼란스러워 했다.
벤저민은 웨스트 17번가의 브라운스톤 저택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해, 남아 있던 가족의 모든 소유물 전부를 팔아 치웠다.
ㆍ벤저민은 돈의 뒤틀림에 매료됐다. 투기의 고립되고도 자족적인 성질은 그의 성격과 잘 맞았고, 경이감의 원천이자 그 자체로 목표였다. 벌어들인 돈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또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새로운 경험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고립된 영혼이 갈망하는 바는 아니었다. 벤자민에게 자본은 균 하나 없는 생물로 보였다.
자본은 움직이고 먹고 자라고 새끼를 치고 병들며 죽을 수도 있지만 깨끗하다. 투기의 규모가 커질수록 벤자민은 구체적인 세부사항과 멀어졌다.
그는 단 한 장의 지폐도 만질 필요가 없었으며, 자신의 거래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생각하고 말하는 것, 그리고 어쩌면 글을
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자본이라는 생물이 움직이기 시작해 아름다운 패턴을 그리며 점점 더 추상적인 영역으로 들어갔다. 가끔은 벤저민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본자신의 식욕을 따라가기도 했다ㅡ 이 점이, 그 생명체가 자유의지를 행사하려 한다는 게 벤저민에게 또하나의 기쁨을 주었다. 그 생명체가 실망감을 안겨줄 때조차 그 놈에게 감탄했고, 그 놈을 이해했다.
ㆍ벤저민은 무척 탐탁지 않아했지만, 금융계에서 그의 이름이 존경심을 담아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는 금과 구아노(비료로 쓰이는 바닷새의 배설물) 다양한 화폐와 목화, 채권과 소고기를 거래했다. 그의 관심사는 더이상 미국에 국한되지 않았다. 영국, 유럽, 남아메리카, 아시아가 그에게 단일한 영토가 되었다. 그의 거래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운명이 뒤엉켜버린 수많은 국가의 국채를 유동화 했다. 때로는 발행된 국채 전체를 독차지할 수도 있었다. 드물게 실패하기도 했으나 그런 뒤에는 늘 엄청난 성공이 뒤따랐다.
ㆍ 벤저민의 뜻과는 반대로 점점 더 그의 "세계"가 되어가던 익명성 만큼 두드러지는 특징은 없었다. 괴짜로 여겨진다는 생각만으로도 굴욕감을 느낀 그는 자기가 서있는 위치의 남자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에 부합하기로 결정했다. 사회적 노력이란 들이면 들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는 존재라는 걸 이해하자마자 이런 시도를 포기했다. 결국 부자 역할을 하는 부자가 되었다.
1907년에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실패가 시장전체에 공포의 물결을 일으켰다. 튼튼한 현금 보유고를 가지고 있던 벤저민은 유동성 위기를 이용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저평가된 가격에 자산을 골라 챙겼다.
ㆍ공황 시기에 일으킨 쿠테타로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자신에게조차 정말로 놀라윘던
점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그를 알아보았다는 기색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벤저민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싼 웅웅 소리를, 그 떨림을, 그들을 벤저민과 멀어지게 하는 바로 그 존재를 알아챘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에 굶주렸다. 새로운 감정이었다.
ㆍ벤저민이 가장 신뢰하는 조수가 된 셀던 로이드는 여러 측면에서 벤저민이 혐오하는 금융계의 모습 대부분의 화신과도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렇듯 셀던에게도 돈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셀던은 돈을 써버렸다. 집, 탈것, 동물, 그림 같은 것을 샀다. 그런 것들에 대해 큰 소리로 떠벌 렸다. 여행을 하고 파티를 열고 몸에 자기 부를 걸치고 다녔다. 벤저민이 그를 유용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그런 경박함이었다. 그의 조수가 영민한 트레이더라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벤자민은 동시에, 고객과 스쳐가는 인연들이 보기에는 셀던이 "성공"이라고 여길만한 것의 전형적인 모습을 체화한 사람이라는 걸 이해했다. 셀던은 벤저민의 사업에 완벽한 대변인이었다ㅡ 여러 맥락에서
고용주인 벤저민 보다 휠씬 더 효과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자본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모든 기대치를 셀던이 너무도 충실하게 따랐으므로, 벤저민은 그에게 공식적인 업무 이상의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셀던은 벤저민의 집에서 만찬과 파티를 열어 투자자들로 북적거리게 만들었다. 1914년 셀던은 도이치 뱅크 및 독일 제약회사와의 거래를 마무리하고,고용주를 대리해 스위스에서 어떤 사업을 수행하고자 유럽으로 출장을 갔다. 지역 은행의 지분을 인수 하려고 취리히로 보낸 것인데 세계대전 때문에 셀던의 발이 그곳에 묶였다.
벤저민은 전쟁으로 인해 하나의 기계장치로 융합된 사물과 사람에게 관심을 돌렸다. 광산업에서부터 제철, 군수품 제조, 조선 등 전쟁과 관련된 분야에 투자했다. 항공,화학회사, 엔지니어링 벤처기업에 돈을 댔으며 수많은 엔진 부품과 윤활유에 특허를 받아두었다.
유럽에 둔 대리인들을 통해 전쟁과 연관된 모든 국가에서 발행된 채권도 유동화 했다. 벤저민의 부는 위협적일 정도로
쌓였지만, 이는 그가 이룬 진정한 상승의 시작점일 뿐이었다.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는 과묵해졌다.
ㆍ그는 인생의 중간 지점을 지나면서, 혈통상의 책임을 어렴풋하게 느꼈고 사회적 적절함은 그보다 더 어렴풋하게 생각한 끝에 결혼을 고려하게 되었다.
ㆍ브레보트 가문은 명성은 있지만 그만한 재산은 없는 올버니의 오래된 가문이었다.
레오폴드는 이 지역의 지식인이자 도덕적 권위자로 널리 인정받았다. 브레보트 씨는
정치철학에 관한 책 두 권을 썼으나 그 작품이 맞이한 완벽한 침묵에 씁쓸함을 느꼈다. 헬런이 태어났을 즈음 브레보트씨는 실패해 가는 온갖 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아이에게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지만, 교육을 책임지기로 결정한 지금은 아이의 성격 모든 측면에서 기쁨을 느꼈다. 헬렌은 다섯 살 때 이미 독서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이가 조숙한 대화 상대라는 걸 알고 놀랐다. 두 사람은 호드슨 강을 따라 밤이 이슥할 때까지 걸으며 주변의 자연 현상에 대해 토론했다ㅡ 올챙이와 별자리, 낙엽과 그 낙엽을 실어 나르는 바람, 달무리와 수사슴의 뿔 같은 것들에 대해서.레오폴드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기쁨이었다.
둘의 교육 프로그램에서는 과학과 함께 문학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둘은 미국 초월론자의 작품과, 프랑스 도덕주의자의 작품,아이랜드 풍자극,독일 격언집을 읽었다.브레보트 씨는 예닐곱 살 된 헬렌이 난해한 대수학 문제를 우아하고 쉽게 푸는 모습에 기쁨을 느끼며, 수많은 성경구절에 대해 자세히 해설을 해주기도 했다. 아홉 살이 되었을 무렵 부터 헬렌은 불면증으로 긴 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뉴욕시에서 한 달을 살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몇 년 뒤 헬렌은 당시 뉴욕에서 보낸 시간을 뒤돌아보며 어머니와 산책하던
열한 살의 자신이 미래의 남편이 될, 이미 성공을 거둔 사업가를 보았을지 궁금해하곤 했다.
브레보트 부인이 아니었다면 가족은 유럽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헬렌은 나이를 먹었고 책도 많이 읽었고 교육도 충분히 받아 아버지가 헛소리 수집가가
되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헬렌은 친구이자 유럽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맞는 동반자였던 아버지를 잃어 마음이 무거웠지만, 영혼이 새로운 차원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가족이 마침내 저명한 교수나 신비주의 권위자와 만나면, 헬렌은 자신감으로 수정처럼 빛났다. 헬렌안의 무언가가 단단해져 반짝이고 날카로워졌다. 학자나 신비주의자 중 일부는 헬렌의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학업성취, 다양한 밀교의 교리에 대한 유창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ㆍ스위스 요양원에 남편을 입원시킨 브레보트 부인은 취리리에 혼자 남은 헬렌의 지인이 된 벤자민 래스크씨의 오른팔인 셀던을 만나그와 함께
제네바를 거쳐 뉴욕행 포르투갈
배를 탄다.
셀던의 도움으로 파크 애비뉴의 아파트에 살게 된 브레보트 부인은 파티에 헬렌을 내보내기 시작한다. 한편 신비주의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셀던의 고용인 래스크 씨의 집에서 열리는 적십자 행사의 주최자 셀던을 이용해 혈렌을 그 행사에 보낸다. 어머니의 계략을 잘 이해하는 헬렌은 자신은 결혼생활이나 물질적 생활에 대해 아무런 야심이 없었으나 결혼을 통해 어머니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은 다른 사람들의 돈에 의존하는 생활을 그만두고 마침내 정착할 유일한 기회였다. 헬렌은 저녁 식사 자리에 로이드 씨와 래스크 씨 옆에 앉았다. 디저트 시간에 래스크 씨가 관심의 흔적을 보이자 놀랐다. 응접실에 모이는
때를 노려 헬렌은 몰래 빠져나와
저택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거실로 이어지는 문 앞에서 벤저민 래스커를 만난 헤렌은
의례적 인사를 주고 받았다. 벤자민은 문장을 맺을 수 없어
침묵이 길어지자 표정이 굳었다. 조용해진 방안의 석양 속에 앉아 헬렌은 벤저민 래스크가 자신을 아내로 맞아들이리라 확신했다.
벤저민의 외로움이 자발적인 것이라면 그는 헬렌을 무시할 테고, 타의에 의한 것이라면 혤 렌이 좋은 동반자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 고마움 을 느낄 터였다. 어느 쪽이든, 헬렌은 남편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토록 갈망하던 독립을 손에 넣는데 성공하리라고 확신했다.
평생 자족적으로 살아온 사람은
축복을 발견하면 그 축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과연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권리가 있는지 의심한다. 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의 숭배를 지루하다고 느낄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상대에 대한 갈망이 그들로서는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드러났을지 몰라 두려워한다. 그들은 이 모든 의문과 걱정의 무게에 허리가 굽어져 자신의 내면을 보게되고, 동반자 관계에서 새로 발견한 기쁨 탓에 이제는 떨쳐버렸다고 생각했던 고독을 더욱 깊이 표현하게 된다. 헬렌은 결혼식이 끝나고 남편에게서 바로 이런 두려움을 감지했다. 무력함은 적의로 변하고,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결국 그런 가치 절하를 남 탓으로 둘린다는 걸 알기에 헬렌은 벤자민의 불안을 해소해주려 최선을 다했다. 그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결국 그녀 자신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 해도, 헬렌의 동기가 오로지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머잖아 벤저민과 그의 조용한 습성에 진정한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다만 그녀 자신도 조용한 성품이었기에 적절한 단어와 딱맞는 몸짓, 심지어 친절한 감정을 표현할 충분한 수단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런 헤렌의 감정은 어느모로 보나 벤저민의 소심한 열정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이점이 둘의 관계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ㆍ저택에 일어난 한 가지 변화는 응접실 하나를 작은 콘서트홀로 바꿔놓은 것이었다. 그들은 콘서트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되었다. 둘 다 실내악에 대한 취향이 생겼다. 이런 연주회는 그들의 가장 친밀한 순간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교행위 행사가 길어지자 벤저민은 누구보다 먼저 모두에게 작별을 고했다.
처음에 벤저민은 후계자가 생기길 바랐지만,둘은 아이가 생기지 않는 이유를 따져 묻거나 이야기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 했다.
ㆍ벤저민은 새로운 차윈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럴수록 헬 렌의 자선사업의 규모는 커져갔다. 벤저민이 새로운 정상에 올라서면서 헬렌의 상태는 나삐졌다.
결국 그녀는 무너졌다. 지구가 가라앉았다.
ㆍ밑줄
ㆍ버건디색 ㅡ 와인빛이 나는 붉은 색, 밤색, 자주색
ㆍ여름의 마지막 헐떡이는 숨결이 가을의 첫 호흡과 섞여들었다.
ㆍ"베벨 죽다"
조용한 혼란이 이후의 며칠을 일그려뜨렸다.
나는 여러 대목을 옮겨다니고 무작위로 문단을 뽑아 교정하고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내고 버리면서,베벨이 어떻게 편집할지 상상하면서 계속 베벨의 회고록 작업을 했다.
『트러스트』는 크게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소설, 자서전, 회고록, 일기의 형식으로 동일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작품을 여는 첫 챕터 ‘채권’은 해럴드 배너라는 가상의 작가가 쓴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채권’의 주인공은 담배 무역으로 성공해 커다란 부를 축적한 집안의 후손 벤저민 래스크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담배 사업을 처분하고 가문의 부와 타고난 수학적 감각을 활용해 금융계에 뛰어든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교 모임에 나가기보다는 은둔자에 가까울 정도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하는 벤저민에게 투기의 고립되고도 자족적인 성질은 너무도 잘 맞았다. 그는 단 한 장의 지폐도 만질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거래로 영향을 받는 사물이나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는 금융계에서, 주가를 조작하거나 시장의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개인적 이득을 올리는 등 비윤리적 선택도 마다하지 않으며 어마어마한 부를 쌓아나간다. 인생의 중간 지점을 지나면서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결혼을 고려하게 되고, 이때 그의 앞에 명성은 있으나 재산은 없는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의 헬렌이 나타난다.
해외를 떠돌며 어린 시절을 보낸 헬렌은 혼자 있는 시간과 외로움이라는 감각에 고양감을 느끼는 사람으로, 벤저민의 고독 속에서 그녀 자신의 고독과 자유를 찾는다.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친밀감 속에서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을 해나가고, 벤저민이 월 스트리트에서 천재 투자자로서 명성을 얻어가는 동안 헬렌은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를 집으로 초대해 작은 음악회를 여는 등 예술계의 후원자로 활동한다. 그러나 1929년 미국에 전례없는 대공황이 찾아오면서 부부의 삶에도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채권’에 뒤이은 두번째 챕터에서는 ‘나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미완성 자서전이 펼쳐진다. 앤드루 베벨, 즉 ‘채권’에 등장한 벤저민 래스크의 실제 모델인 인물이 자신의 삶과 일, 아내 밀드레드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한 것이다. 앤드루 베벨은 자신의 삶에 대한 소문과 허구에 반박하고자 이 자서전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며 “개인의 이득은 국가의 선과 일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선조의 가르침을 토대로 자신이 개인적 성취를 이룬 동시에 국가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펼친다. 불완전한 문장과 개요, 지시사항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이 자서전에서 앤드루의 아내 밀드레드는 예술을 사랑하고 꽃꽂이를 좋아하는, 연약한 천성을 가진 섬세하고 가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이어지는 세번째 챕터 ‘회고록을 기억하며’는 아이다 파르텐자라는 작가가 쓴 글로, 그녀는 젊은 시절 앤드루 베벨의 비서이자 자서전 대필 작가로 일했던 경험을 회고록으로 풀어내며 그녀의 시각에서 본 베벨 부부의 모습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챕터 ‘선물’에서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만 그려졌던 인물 밀드레드 베벨이 직접 쓴 일기가 등장해 독자에게 놀라운 반전을 선사한다.
소설 속의 소설, 자서전, 회고록, 일기.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신뢰하겠는가?
20세기 초 월 스트리트의 거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그 실제 모델이 소설의 내용을 반박하기 위해 쓴 자서전, 그 자서전을 대필한 작가의 회고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의 세 글에서 계속 타인의 관점으로만 서술될 뿐 한 번도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아내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 에르난 디아스는 하나의 이야기를 네 개의 서로 다른 형식의 글로 변주하며 각각의 이야기에 걸맞은 문체와 분위기를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소설 ‘채권’은 마치 이디스 워턴이나 피츠제럴드가 쓴 지난 세기의 고전 같은 느낌을 풍기고, 미완성 자서전에서는 스스로가 얼마나 큰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남자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탁월함은 정교하게 구축된 네 개의 글이 서로서로 영향을 끼치며 매끄러우면서도 힘있는 하나의 내러티브를 완성한다는 데서 나온다. 당연하게도 하나의 이야기는 서술자가 누구냐에 따라 조금씩 내용이 달라지고 네 개의 글 중 어느 것도 전체적인 상을 보여주지 않는데, 그렇기에 독자는 하나의 글이 끝나고 다른 글이 시작될 때마다 이전의 서술자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과연 무엇이 ‘진짜’ 이야기이고 누구의 이야기를 믿어야할 것인지 끊임없이 추측하며 퍼즐을 맞춰나가듯 소설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차곡차곡 쌓인 이야기가 마지막에 진실을 드러낼 때 독자는 훌륭한 문학작품이 주는 감정적 충만함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이 작품에서 확실한 것은 오직 작가 디아스의 탁월함,
그리고 꼭 읽어야 하는 이 책의 가치다.” _워싱턴 포스트
‘트러스트’라는 제목이 신뢰와 믿음이라는 가치뿐 아니라 기업합동이라는 경제적 개념을 의미하듯, 이 소설 또한 여러 영역의 ‘트러스트’를 모두 탐구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텍스트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어떤 내러티브를 믿을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의 결혼생활을 통해 부부 사이의 신뢰를 이야기하며, 인간사 전체에서 신뢰와 배신이라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그러는 한편으로 작가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전능함을 가졌지만 동시에 비실재적이고 허구적인 존재로서의 ‘돈’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철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20세기 초 주식시장과 금융계를 사실적으로 그리며 월 스트리트로 대변되는 금융자본의 특성과 그 추상적인 구조를 파헤치고, 부와 권력이라는 신화의 허상을 우리 앞에 낱낱이 드러낸다. 그리고 자본주의, 금융, 권력, 계급과 같은, 시대를 초월해 현재에도 여전히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들을 이야기한다.
소설 속에서 앤드루 베벨은 자신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아이다 파르텐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 일은 정답을 맞히는 거야. 언제나. 조금이라도 틀리면, 나는 모든 수단과 자원을 동원해서 내 실수가 더이상 실수가 아니게 되도록 하네. 현실을 조정해서 내 실수에 맞도록 구부리지.”
『트러스트』를 통해 작가 에르난 디아스는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듯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누군가의 손에서 조정되고 구부러지는 현실 속에서 당신은 과연 누구의 이야기를 신뢰하겠느냐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독자는 그 질문을 곱씹으면서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네 개의 글을 다시 한번 읽어나가게 될 것이다. 독특하면서도 정교한 형식,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문제를 직시하는 통찰력 있는 시각, 겹겹이 쌓인 절묘한 레이어와 아름다운 문장, 놀라움이 가득한 황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음미하면서.
[추천사 이어서...]
독창적인 구성의 역사소설로 포스트모던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즉 독자는 읽고 있는 이야기에서 그 어떤 것도 완전히 믿을 수 없게 된다. NPR
디아스는 서로 다른 여러 타래를 한데 엮어내,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 변화가 어떻게 “현실을 조정하고 구부리는” 부의 능력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뉴요커
완벽하게 쓰인 문장을 통해, 그리고 확실성이라는 것을 솜씨 좋게 파헤침으로써 『트러스트』는 변화의 세기 뉴욕의 초상을 훌륭하게 그려냈다. 작가로서 디아스의 노련함에 대한 증거 같은 소설. 가디언
자본주의, 계급, 탐욕, 그리고 돈의 의미를 예리하게 해체하는 동시에,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눈부신 성취를 이루어냈다. 놀라움이 가득하고 황홀하면서 시의성 있는 소설. 꼼꼼한 자료 조사와 흥미진진한 내러티브, 이야기를 펼쳐나간 작가의 독특하고 뛰어난 방식 덕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소설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