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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1장 :내가 말을 더듬기 시작하다.
"숙제 다 해 왔는가?" "예" 아이들이 아주 똑똑합니다. 그 어려운 독립선언문을 어떻게 다 외울 수 있는가? 나는 아직 한줄도 외우지 못합니다. "자 그럼 먼저 외우는 학생이 먼저 집에 간다" 아이들이 선생님 앞에 나와 잘도 외우고 집에 갑니다. 나도 외우려고 책을 펴 놓고 안간힘을 씁니다. "오동은 아 자에 조선인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짚고 이를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성을 모두어 공표함이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전해일러 민족 자주의 권리를 기리 누리게 하노라.`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반 아이들이 72명인데 선생님도 지루한지 앞 부분만 조금 외워도 가라고 합니다. 이제 거의 다 집에 가고 몇사람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도 일어나 선생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 "해 봐" "............................." "해 보라니까?" "오오오오 도도도동은 아아아아아아 조조조조조거거건의...." 내가 갑자기 말을 심하게 더듬느라고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선생님이 보다 못해 "가 가"라고 합니다. 만일 ` 페스탈로치 ` 같은 훌륭한 선생님이셨다면 "아 네가 겁을 냈구나, 괜찮아 나 하고 같이 읽어볼까?"라고 나를 도와주었더라면 나는 그 후 말을 더듬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그후 평생 말을 더듬게 됩니다. 10대때는 100% 말을 더듬고 20대에는 80% 30대에는 50% 40대에는 70% 50대에는 80% 60대에는 90% 70대에는 100% 치유를 받습니다. 나는 깜깜한 학교 교정을 나오면서 "이 병신아, 그것도 못해? 이 바보야 엉엉....." 내 자존심이 다 망가지고 자신에게 저주를 퍼 부으며 펑펑 눈물을 쏟으며 집으로 옵니다. 내가 방에 들어가 전등을 켜니 큰형은 힘없는 목소리로 "너 왔니?"라고 하는데 형의 두 볼은 푹 꺼졌고 눈은 쑥 들어가 보기에도 처참해 보입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방에 불을 때고 솥 에 밥을 끓이면서 눈물을 펑펑 쏟습니다. |
제2편 1장 끝
제2편 2장:졸업식 날 큰 형이 죽다.
1951년 4월 18일
청주 교동 국민학교 제19회 졸업식날 입니다.
강당에는 4,5,6학년의 학생들과 선생님들과 많은 학부형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부모님들과 친척들이 와 있는데
나는 아무도 없습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 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좀 유치해 보이는 졸업식 노래인데 학생들도
선생님들도 학부형들도 다 웁니다.
내가 졸업장을 들고 집으로 왔습니다.
나는 큰 형에게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큰 형이 운명을 하고 있습니다.
형의 눈이 죽어가던 어머니의 눈과 똑같습니다.
"형 형 죽지마, 엉엉 형 죽으면 안돼 엉엉"
내가 울다가 청주도립병원에서 일 하는 작은 형에게 알리기 위해
나는 병원으로 달려 갑니다.
작은 형은 도립병원 서무실(그때는 사무실이 아니고 서무실이라고)에
서서 소사(심부름의 일본말)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형 ! 큰 형이 죽어가고 있어"
그러자 작은 형이 나를 자전게에 태우고
집에까지 3km를 달려 갑니다.
우리가 거의 집까지 왔을때 작은 형은 자전거를 꾸러 박습니다.
우리는 아픈 것도 잊고 다시 집으로 달려 갔습니다.
큰 형은 아직 숨을 쉬고 있지만 아까보다 매우 약해졌습니다.
"형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형 형 죽지마, 내가 잘못했어 엉엉"
작은 형이 오열을 합니다.
"세근아, 나 이모부에게 갔다 올께"
나의 친척 이모님이 2km떨어진 운천동에 살고 있고
이모부는 청주 시청에 다니고 있습니다.
큰 형의 마지막 숨이 멈추었습니다.
나는 마구 울고 있는데 옆집 아저씨가 들어와서
큰 형의 부릅뜬 눈을 감겨주고,이불을 들쳐 보며
"새옷으로 갈아 입히거라" 하시며 나가십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평생 조여졌던 항문의 힘이 빠지면서
항문이 열리고 배설물이 나온다고 하는데,
큰 형은 먹은게 없어서 그런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형의 옷을 다른 것으로 갈아 입혔습니다.
날이 어두어 졌는데 작은 형이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은 형이 갑자기 무서워 집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방에 불을 때면서 엉엉 웁니다.
한참 후에 작은 형과 이모부가 다른 한 사람과 같이 와서
죽은 형을 염해서 관에 담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와서 형을 데리고
성당에 가서 장례미사를 지낼 것이다"라고
이모부가 말씀하시고 돌아가십니다.
다음날 아침에 이모부와 또 다른 한 사람이 형의 관을 들고
밖의 골목으로 한참 나가서 트럭에 태우고 우리는 모두 성당으로 갑니다.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시며 관에 성수를 뿌리고 향을 피우십니다.
"네 형은 성 금요일에 죽었으니 천국에 가셨을 것이다"
라고 이모부가 말씀 하십니다.
聖 금요일이란 부활전의 금요일을 말하며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입니다.
우리는 죽은 형을 공동묘지에 묻었습니다.
"세근아"
"예 이모부"
"너는 오늘부터 우리집에 와 있거라"
제2편 2장 끝
제2편 3장:이모님집에서 쫓겨나다
이모님네 식구는
할머니
아들이 3명
딸이 5명
이모 부부
나 까지 12명인데
이모부 혼자 버는 돈으로 그 많은 식구들이 먹고
학교에 교육비,옷 값등을 내면 많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세째딸인 살자는 국민학교 5학년인데 나를 보고
"오빠 가!"라고 합니다.
내가 미워 나 보고 가랍니다.
3일 후 이모님도 나를 보고
"무극에 가면 너의 삼촌이 있잖으냐? 그리로 가거라"고 하여
나는 그날 오후 이모님네 집을 나와 130리(52km)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가는데, 돈이 한 푼도 앖어서 차를 타지 못하고 걸어서
가야 합니다.
초행길이라서 물어 물어 찾아가는데 시골 길이라서 찾아 가기가
어렵습니다.
청주에서 오후에 떠났기에 40리(16km)를 가니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데, 어디에서 잠을 자야하나 ?
어느 초가집이 10여호되는 작은 마을에서, 내가 잘곳을 찾아다니느라고
기웃 거리자 한 청년이 나를 붙잡고 "너 간첩 아니냐?"라고 합니다.
"전 무극 삼촌집을 찾아가는 중인데 잘곳을 찾으러 다니고 있어요"
라고 하자
"거짓말 하지마, 너는 간첩이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듭니다.
아마 6.25때 인민군들에게 많은 시달림을 받은 동네인가 봅니다.
이때 점잖아 보이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오시자,
사람들이 물러나며 예를 갖추는데 양반인것 같습니다.
"왜들 그러느냐?"
"얘가 간첩입니다. 동네를 살피고 다녀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어린애 간첩도 있다더냐?"라고 하시며
나에게 "따라 오너라"고 하십니다.
다른 집은 다 초가집인데 할아버지집은 기와집입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안방으로 들어오게 하고, 나의 나이와
이름과 주소를 물으시고 부모님은 뭘 하시느냐 물으시기에
"아버지는 제가 3살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피난가다가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해 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물으시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저녁 밥상을 들고 오시는데 식구가 두식구밖에 없어 보입니다.
한국인의 가정은 대개 6~7명이 보통인데,
왜 가족이 없는가? 라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6.25때 인민군들에게 잡혀 죽었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내가 후에 알았지만 전쟁으로 400만명이나 (유엔군 포함)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양반은 혼자
먼저 식사하고식사가 끝나면 가족 모두가 식사를 할만큼
양반의 세도는 대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나까지 겸상이라니 !
나는 어려워 무릎을 꿇고 밥을 먹는데 하얀 쌀밥이라서 나는
너무 배가 고프고 밥이 맛있어서 밥 한톨 남기지 않고 다 먹었습니다.
나도 양반집 가문이라서 예법을 잘 알기에 밥 먹기전에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을 하였고 , 다 먹은 후에도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밥상을 물리자 할머니가 할아버지 옆에 요와 이불을 펴 주는데,
요나 이불이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이불입니다.
비단 이불이라서 사람들은 금침이라고 하는데,
나는 너무 깨끗하고 이불이 아름다운데 내 모습은 옷도 더러운데
어떻게 이 금침을 덮고 잘 수 있는가 하고 망설입니다.
"괜찮다 들어가 자거라"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아마 결혼 준비했던 자식이 덮을 이불 같아 보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절을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금방 잠이 듭니다.
너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새벽에 일찍 잠을 깼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벌써 일어나셔서 책을 보십니다.
나는 이불과 요를 개고 밖으로 나가 세수를 하고 다시 들어와서
할아버지에게 엎드려 절을 합니다.
"기체후 일향망강 하시옵니까?"라고
어머니에게서 배운 인사를 드리자
할아버지가 "오냐, 너도 잘 잤느냐?"라고 하십니다.
"예 할아버지"
아침밥도 우리 셋이 겸상을 하였습니다.
나는 아침밥도 맛있게 다 먹고,
나는 다시 엎드려 절을 하며
"제가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래 잘 가거라"
나는 다시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무극을 찾아갑니다.
먼 훗날, 내가 어른이 되었을때 이때 일이 생각이 나서 한 번 찾아가
봐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내가 옛 기억을 더듬어 그곳을 가 봤는데 지형이 바뀌어
어디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 하느님께서는 그때 1951년을 기억하실 것이며,
저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 그 할아버지는 이제 돌아가셨을 것인데
틀림없이 천국에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분에게 안부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69년이나 지난 후 이 글을 쓰면서도 한 번 제대로
찾아가 보지 못한 것에 대하여 미안해 합니다.
제2편 3장 끝
제2편 4장:또 쫓겨나다
내가 물어 물어 찾아 드디어 충북 음성군 무극면 도신리의
삼촌집을 찾아갔는데 바로 신작로 옆의 초가집입니다.
그런데 가을에 지붕을 새로 이으지 않아 그런지 볏지붕이 다 썩고
변색이 되어 시꺼멓고 곧 집이 쓰러질 것 같아 보입니다.
내가 들어가자 삼촌 식구들이 모두 반가워 하면서도 식구들이
너무 많아 걱정을 하며, 전쟁중에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는
들었으면서도 한 번도 찾아오지 못한 것을 미안해 합니다.
그곳에서 며칠 지나는데 먹을것이 없어 좁쌀로 죽을 쑤어 먹는데,
그것도 멀건 물 같습니다.
어느날 작은 어머니가
"얘 세근아 !"
"예 숙모님"
"네가 보다시피 우리가 살기 어렵단다.
여기에서 30리(12km) 가면 네 외삼촌이 사는 장호원인데
거기는 부자란다, 그러니 그리로 가거라 !"고 하시며 나를 또 쫓아냅니다.
나는 다시 30리를 걸어 나의 고향 장호원에 이르렀는데 멀리서부터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매산 중턱에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성당입니다.
1920년 경에 프랑스 임신부님이 지으신 명동성당 같은 대성당인데
1920년 경의 장호원은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주 한적한 시골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시골에 고틱식의 대성당을 왜 지었을까?
우리나라 마지막 정부 대한제국의 국모이신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살해 당하고, 황후의 가족들을 찾아 삼족을 멸하려 한다고 하여,
민비의 가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숨느라고 경기도 용문산과 용인과
충북의 장호원과 충주로 흩어져 피신하였다고 하는데
나의 외삼촌이 바로 민비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의 친 오빠입니다.
아마 프랑스신부님은 후에 민비 가족들이 다시 정권을 잡을지 몰라
장호원에 그런 대성당을 짓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장호원 시가지에는 강이 흐르고 큰다리가 있는데,
다리를 건너기 전을 충북 음성 장호원이라고 하고,
다리를 건너면 경기도 이천 장호원이라고 합니다.
내가 다리를 건너 이천 장호원으로 가니 중심부에는 기와집이 있지만
그 주위에는 모두 초라한 초가집들입니다.
외삼촌 집은 솟을 대문이고 늘늘이 기와집입니다.
내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두 나를 알아보지만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 어머니와 와 본 곳) 별로 반가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외삼촌은 장호원의 읍장이라고 합니다.
자기동생 우리 어머니가 총에 맞아 돌아가신 것을 알텐데
우리 청주집에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습니다.
내가 그곳에서 꼭 20일을 머물었는데
외숙모님이 나에게 돈 120환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하나 주시면서
"여기를 찾아가거라. 네 누나란다"
"예? 저에게 누나가 있어요?"
"그래 , 배 다른 누나다"
나는 '배 다른'이라는 뜻도 모릅니다.
나는 또 쫓겨나 버스터미널로 갑니다.
제2편4장 끝
제2편 5장:여기가 묵리인가요?
나는 장호원에서 버스를 타고 경기도 용인으로 갔습니다.
"이동면으로 가는 버스는 몇시에 가나요?"
"오후 4시에 간다"
나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이동면으로 가는 길목에
지켜 서 있다가 지나가는 트럭을 세웠습니다.
내가 트럭 위로 올라가자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동면 입니다"
조수가 나와서 소리칩니다.
"차비는 20환이다"라고 내게 말 합니다.
그 무렵에는 차가 귀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조수`로 써 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차를 공짜로 타고
여행도 하고 운전도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고 돈도 생깁니다.
내가 내려 100환짜리를 내 밀자
"잠깐 기다려 내 잔돈 좀 거슬러 와야 해"라고하며
학교앞의 구멍가게에 가서 물건을 하나 사고 잔돈을 거슬러 옵니다.
외숙모가 나에게 준 120환에서 20환은 이미 버스비용으로 썼기에
큰돈 100환만 남은 것입니다.
조수가 와서 나에게 80환을 주고 차에 뛰어 오르며
"오라잇 !"하자 차가 떠납니다.
나의 한 손에는 100환이 그냥 쥐어져 있고 다른 손에는 거스름 돈
80환이 쥐어져 있는데, 조수는 돈 100환을 받았다고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나는 조수가 다시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뜻밖의 돈이 생겼으나 조금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 돈은 내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묵리로 가려면 어디로 가나요?"
라고 내가 동네사람들에게 묻자
"그리고 똑바로 가면 된다"
라고 하는데 좁은 신작로가 길게 멀리까지 뻗어 있습니다.
내가 그 길로 한참 걸어가도 집이 나오지 않습니다.
길 양쪽은 논과 밭의 연속이고 멀리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계속 갈수록 그 야트막한 산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산이 점점 높아집니다.나는 자꾸 산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저 멀리 길이 솟아오르듯 언덕이 보입니다.
내가 언덕을 넘자 바로 언덕 밑에는 초가집들 10여호가
옹기종기 붙어 있는데 동네가 아주 깨끗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지 않는지 사람이 보이지 않고,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가 바로 묵리라고 생각하였고 주위는 온통 높은 산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앞으로는 동네가 없고 여기가 마지막 동네라고
생각해 보며,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내가 한참 길에서 서성이자 바로 옆집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풍채가 좋고 깨끗한 한복을 입은 부인이 나오기에
"저 여기가 묵리인가요?"라고 묻자
부인의 눈이 갑자기 왕방울만 하게 커지더니
"너 세근이 아니냐?"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예"
제2편5장 끝
제2편6장 내가 네 누나란다.
그 부인이 갑자기 나를 부여 안고 대성 통곡을 하는게 아닌가?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네가 어떻게 여길 찾아왔느냐?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내가 네 누나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라고 통곡을 하시는데
`아이고`라는 말은 꼭 4번 반복합니다.
부인이 나의 손목을 잡고 언덕위에 있는집으로 가면서
계속 통곡을 하십니다.
그곳에는 초가집이 있고 넓은 마당에는 멍석이 깔려 있는데
나를 앉으라고 하고는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
계속 대성통곡을 합니다.
동네사람들이 놀라 달려옵니다.
"얘가 내 동생이라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얘 어머니가 피난 가다가 충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면서 한 번도 가 보지 못해 죄송했는데 얘가 어떻게
여길 찾아왔느냐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배다른 누나라는 분이 바로 이분이시구나 라고 생각하며
나도 괜히 눈물이 납니다.
"얘 어머님은 지체 높으신 분이시기에 나와는 나이 차이가
얼마 되지 않지만 나는 깎듯이 `어머님` 이라고 불러 드렸는데,
그렇게 돌아가시다니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불쌍하신
우리 어머니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손바닥으로 멍석을 탁탁치시며 우십니다.
이때 그이 아들 둘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누나가
"얘들아 인사드려라 네 외삼촌이란다"
"안녕하세요?"
"그래, 이름이 뭐지?"
"저는 민영국이고요"
"저는 민영천입니다."
"몇살이고 몇학년이냐?"
"저는 12살 4학년이고요"
"저는 10살 2학년이예요"
저녁에는 매형이 돌아오셨는데 누나로 부터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래 잘 왔다, 그동안 너무 고생을 하였구나,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여기에서 우리와 같이 살자"라고 하십니다.
나는그날부터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아주 마음 편하게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제2편 6장 끝
제2편7장: 내가 자연을 배우는시기
매형은 이곳 동네의 천주교신자들의 회장님이십니다.
주일이나 축일에는 신자들을 모아놓고 기도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데 매형의 얼굴은 항상 웃는 모습입니다.
주무실때도 보면 웃으시며 주무시는 것 같은데,
전에 우리나라 통기타시대의 유명가수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나는데 그와 같습니다.
매형은 아침에 논 밭에 일하러 나가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집에는 나와 누나만 남아 있는데, 누나는 나를 산과 들로 데리고 다니며
나물을 뜯거나 도라지를 캐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나에게 그 이름들을
다 가르쳐 줍니다.
나무 이름
풀 이름
새 이름
곤충과 벌레 이름
물고기 이름
산짐승 이름
이것은 먼 훗날 내가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더불어 살게되는
기초가 될줄 그 누가 알았는가?
1951년 가을에서부터 1952년과 1953년의 이곳 생활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꿈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오염이 되지 않고 그 무엇으로부터도 때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입니다.
이곳 마을 앞에는 두 군데서 내려오는 골짜기 물이 하나로 합쳐져
큰 내를 이루고 흘러가는데 그래서 그런지 개울의 폭이 100m가 넘습니다.
그 안에는 갈대 숲이 많고 어느 갈대 숲 속에는 하얀 눈부신 모래가
너무 깨끗하여 그곳에 물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 인데
물이 나의 무릎밑에 까지 차고 물 속에는 작은 붕어 새끼들이
100여 마리가 유유히 놀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평화스러워 보여 장난을 치고 싶어서 소뼉을 `딱` 치면서
`얏 !` 하고 소리지르자 붕어새끼들이 그만 놀라 어디 숨을 데가
없으니까 모래속에 얼굴을 꾸러 박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으워서 깔깔 거리다가
손으로 모래채 붕어를 움켜쥐니 꼼짝도 못합니다.
"아 미안해 내가 너희들의 평화를 깼구나 이제 안 그럴께"
정말로 미안합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한번도 그 무엇으로부터도 놀래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날은 내가 떡가루 치는 둥근 체를 하나들고 물고기를 잡는데,
갈대가 넘어져 그위로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이 많이 보입니다.
나는 거기에 체를 대고 손바닥으로 훑어내리자 손바닥에 뭔가가
미끌거려 손을 떼고 보니, 내 팔뚝길이보다 더 큰 메기 한마리의
등허리에 낀 푸른 이끼가 벗겨져 해맑은 메기의 모습이 보이는게 아닌가?
나는 저 큰 메기를 어떻게 잡을까 머리를 굴립니다.
모래사장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고 나는 메기 머리에 체를 대고
한 손으로 베기의 꼬리 부분을 가만히 밀자 메기의 머리가
체 안으로 들어가며 몸이 휘어집니다.
나는 이때라 생각하고 메기를 확 체 안으로 들이밀며
동시에 메기와 체를 하늘 높이 날려 버렸습니다.
그러자 메기가 하늘 높이 떴다가 모래사장에 떨어져
"꽥꽥꽥"소리를 내는게 아닌가?
나는 메기가 소리를 낸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습니다.
메기는 펄떡펄떡 뛰면서 물가로 다가가는데
나는 무서워 잡지 못하고 두발로 막았습니다.
이때 그곳을 지나던 이웃 동네 농부가 지게를 지고 가다가
이것을 보시고 다가와서 손가락을 메기의 아가미에 끼고
풀대를 꺾어 손잡이를 만들어 줍니다.
"네가 이걸 어떻게 잡았느냐?"라고 하시며 놀라워 합니다.
나는 메기를 들고 집에 오는데 너무 무거워 여러번 쉬면서
동네를 지날 때는 자랑스러워 으스대며 집으로 왔습니다.
누나도 놀라며 메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인다고 하는데,
메기가 또 꽥꽥꽥 거립니다.
그날 저녁은 메기 매운탕이 너무 맛있어서 나는 두 그릇을 먹었는데
누나는 "메기가 커서 아직 반이나 남아 있는데
내일 동네사람들과 먹을란다"라고 하십니다.
제2편 7장 끝
제2편 8장:누나가 아들을 낳다.
누나가 또 하나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매형은 어린 3명의 아들의 장래가 걱정이 되었는지 돈 벌기위해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내가 할 일이 생긴 것인데 그것은 내가 나무를 해야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무를 해 본 적이 없고 지게를 져 본 적도 없고 낫이나 톱을 사용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게를 지고 낫과 톱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의 마른 가지들을 톱으로 자르거나 낫을 쳐 가지고 지게를 지고 오는데, 나의 아픈다리가 짧아 지게의 중심이 잡히지 않고 기울어져 한 손으로 지게의 중심을 잡고 오느라고 무척 힘이 듭니다. 내가 나무를 해 온 것은 매우 작아 한끼밖에 땔 수가 없어 하루에도 몇번을 더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무도 자꾸 하다보니 익숙해 지면서 더 많은 나무를 하게 됩니다. 내가 산위에서 나무를 하고 내려오다가 지게를 진 채 밑에까지 굴러떨어지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일년이 넘게 나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아기도 자라 아장 아장 걷기에 이르는데 아이 이름은 영우라고 지었습니다. "영우야 이리와봐 "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와 나의 두 팔에 안깁니다. `나도 이만할 때가 있었지` 영우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그러나 나는 1살과 2살적의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는게 없습니다. 내가 내 어렸을 적의 생각이 나는것은 내가 3살 때 내가 모르는 어떤 일로 나의 다리를 다쳐 피투성이가 된 나를 포대기에 싸 안고, 장호원 시내를 돌아다니던 어머니의 모습 그 한가지 뿐입니다. 나는 이 나의 조카 영우에게는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기지 않고 훌륭히 자라기를 바랬습니다. 1954년 봄이 돌아왔고 서울가신 매형이 돌아왔습니다. "세근아 그동안 고생 많았구나!" "아녜요 고생은 무슨 고생이요? 메형이 서울에서 더 고생하셨지요" '아니다 네가 힘든 일을 하여 나는 늘 미안해 한단다. 세근아?" "예" "우리 서울로 이사가는데 너도 같이가자" "예? 서울로 이사가요?" "그래" "와 !" 나는 깜짝 놀랐고 너무 신이 납니다. 그때는 시골 사람들이 모두 서울을 동경하여 누가 서울을 한 번 다녀오면 동내방내 다니면서 서울 자랑하느라고 입에서 침이 튀깁니다. 그런 곳에 내가 간다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나도 이제 서울 사람이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이미 서울 사람이 다 된것 처럼 어깨가 으쓱해 집니다. |
제2편 8장 끝
제2편 9장: 서울로 이사가는 날
1954년 3일초입니다. 매형은 용달차 같은 아주 작은 차를 하나 불러 이삿집을 싣는데 침구와 취사도구 뿐입니다. `아 매형은 서울에 이미 다 준비해 두었나 보다 . 그러기에 시골의 지저분한 살림살이를 가지고 가지 않는구나 !`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정이 들었던 묵리를 떠나자 뭔가 마음을 두고 가는 듯이 허전합니다. 우리는 안성을 지나는데 공장과 큰 건물들이 다 망가진 것이 보입니다. 우리가 안양을 지나는데 이곳은 더 처참하게 망가졌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영등포입니다. 나는 학교에서 우리나라의 최고의 공업도시가 바로 영등포라고 배웠는데 비참할 정도로 다 망가졌고 불에 타고 무너지고 수많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곳이 한개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 악한 인간들이여 !`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매형이 우리들에게 국밥을 사 주는데 뚝배기에 고기가 가득하여 우 리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시장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강으로 가는데 길 가운데에는 말로만 듣던 전차가 다니는데 종을 딸랑딸랑 치고 지붕위의 전기에서 파란 불꽃이 반짝입니다. `나도 언젠가는 타 보겠지` 한강을 지나는데 한강물이 눈이 시리도록 파랗고 철교 하나가 무너져 철로가 강물 속으로 늘어져 있습니다. 용산에 이르니 큰 건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드디어 서울역에 이르렀는데 서울역이 웅장하고 모양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의 건축술은 남대문같은 기와집뿐인데 일본인들이 지은 서울역은 생전 처음 보는 마치 궁전같습니다. 지붕위의 돔 한쪽 귀퉁이가 폭격에 맞았는지 파괴된것 외에는 아주 멀쩡합니다. 그리고 아래의 끝 부분이 조금 허물어진 것이 보입니다. 매형은 차를 골목에 세우고 우리를 안내할 사람에게 전화를 겁니다. 나는 남대문이 보이는 길 가로 나와 서울 구경을 하는데 왼쪽의 남대문으로 이르는 길에는 건물들은 하나도 없이 다 망가졌고 오른쪽에는 망가진 건물에 가건물을 세워 장사를 합니다. 길에는 사람들로 발디딜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드럼통을 펴서 만든 소형 중형 대형 버스들이 줄지어 왔다가 가버립니다. 그때는 버스의 앞과 뒤쪽에는 두명의 차장들이 있는데 "용산가요, 영등포가요 흑석동가요"라고 소리치고 사람들이 타면 손바닥으로 차를 탁 치면서 "오라잇 !"하면 차가 바로 떠나고 그 자리에 또 다른 버스가 옵니다. 길 가운데에는 처음보는 고급 승용차들이 지나다니는데 나는 `저런 차를 타고 다니는 자들은 누구인가? `지체높고 돈 많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부러워 집니다. 10살이나 12살쯤으로 보이는 어린이들이 목에 멜빵을 하고 가슴에는 상자를 들고 다니는데 거기에는 껌, 쵸컬릿, 양담배등이 담겨져 있고 아이들은 "담배나 쪼꼬렛또나 끔을 사세요.........오"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신기해 보입니다. 한참 후에 우리를 안내할 사람이 오자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그이 뒤를 따라가는데 서울 역을 지나 옆으로 해서 중구 중림동 쪽으로 갑니다. 제2편 9장 끝 제2편 10장: 판자집 |
우리들 차가 멈춘곳은 아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밑이 중림동 언덕 밑 입니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보니 차 옆에는 높은 축대를 쌓은 집들이 가득하고 마치 궁궐같이 멋져 보이는데우리들 차가 멈춘곳은 아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밑이 중림동 언덕 밑 입니다. `아 여긴가 보구나 !`라고 생각하며 내 어린 가슴에 행복감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히 솟아납니다. 그 옆에는 들어가는 골목길이 있는데 우리가 그 골목으로 들어가자 길 가에는 판잣집들이 길게 들어서 있습니다. 우리는 영등포에서 부터 이곳에 이르도록 길가에서 수많은 판자집을 봤습니다. 판자집이라는 것은 이름 그래도 나무 판자쪼가리와 상자나 함석 쪼가리들을 사방에 붙인 거지들이 사는 집입니다. "여기 4번째 집입니다." 라고 우리를 안내한 사람이 판잣집을 가리킵니다. `뭐야? 우리집이 판잣집이라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세근아 실망했니?" "예? 아 아녜요" "지금은 다 어려울 때다, 우리도 언젠가는 잘 살때가 있을꺼나" "그럼요"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1평도 안되는 마루가 나오는데 마루 뚜껑을 열자 거기에 연탄 하나가 들어가는 구멍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취사를 다하고 안으로 밀어 넣으면 방이 따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방은 2개인데 아주 작습니다. 매형 가족들은 방을 하나 쓰고, 나도 방 하나를 씁니다. 서울 집들이 다 폭격에 맞아 부서지고 불에 타고, 그것은 서울만 그런게 아니고 전국이 그러니 지방에서 살 수가 없어 서울로 많이 올라와 판잣집을 짓고 삽니다. 화장실은 그 위로 올라가 공동 변소를 사용하는데 사람들이 많이 기다려야 합니다. 나는 여러가지가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 모두 고생이기에 오히려 매형이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 서울에 올라와 판자집을 마련 할 정도로 매형은 사실 배운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아직도 몇년동안 자전거에 물건을 싣고 배달을 합니다. 그래도 이나마 판잣집이라도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날 밤 나는 편하게 잘 잤습니다. 새벽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 옵니다. 그러자 매형이 모두를 깨우며 "자 성당에 가자"라고 합니다. 밑으로 70m쯤 내려오자 중림동의 약현성당이 보이는데 나의 고향 장호원의 성당 보다 오히려 더 작아 보이고, 장호원 성당과 비슷한 고딕식이지만 장호원 성당이 더 크고 더 아름답습니다. 그날부터 우리는 매일 새벽 미사를 합니다. 매형은 일하러 나가시고 아이들도 이곳 학교에 다닙니다. 그러면 나와 누나와 아기만 남습니다. "누나 저 서울 구경하고 올께요" "그래 항상 차 조심하고" "예" |
제2편 10장 끝
제2편 11장:서울을 구경하는데 건물들이 크고 작고 간에 거의 폐허입니다.
나는 남대문으로 가 봤습니다.
남대문 벽에는 총탄의 흔적이 많습니다.
남대문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시청이 보입니다.
4층의 시청은 군데 군데 총상들이 보이지만
그렇게 큰 건물치고는 깨끗한 모습니다.
그런데 시청 뒤의 건물은 아주 폭삭 허물어져 벽돌만이 가득합니다.
바로 길 건너에는 국회의사당의 시계탑이 간신히 솟아 있는데
마치 고기를 다 뜯어먹은 뼈만 남아 있는 듯한데
그것도 곧 무너질듯이 보이고 그밑의 큰 국회의사당은
아예 폭삭 주저 않았습니다.
멀리 중앙청이 보입니다.
그곳에 가 보니 돌로 지은 아주 견고하고 아름다운 일본의
정부 청사보다도 더 크고 아름답게 지었는데
일본은 한국을 일본화 하기위해 일찌기 중앙청, 시청, 한국은행,
우체국, 신세계 척식주식회사를 지어 우리나라 땅을 관리하고,
서울역처럼 많은 중요한 건물을 아주 견고하게 지은 것은
한국을 천년 만년 일본으로 만들어, 지진이 없는 일본으로 만들
계획으로 서울을 크게 발전시켜놨습니다.
중앙청 내부에 불이 났었는지 시꺼먼 그을림이 보입니다.
지붕의 돔 한쪽에 폭격에 맞았는지 허물어진 것 외에는 멀쩡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그당시 우리나라의 건축술은 기와집 정도 뿐이지만
일본의 건축술은 세게 최고 입니다.
중앙청 앞의 광화문은 폭격을 맞았는지 다 망가졌습니다.
나는 종로도 가 봤는데 큰 건물이 하나도 없고
길 가의 가게들을 고쳐 장사를 합니다.
그리고 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우중충해 보이는 기와집들로
빼곡이 들어차 있는데 그 가운데에 초가집도 보입니다.
나는 너무 많이 돌아다녀 다리가 아파 집으로 돌아가려고
청계천을 가 보는데 북악산에서 흐르는 냇물 가에는 판잣집들이
층층히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냇물에서 빨래를 하거나 물을 길어 먹는데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은 위생관념을 모릅니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악한지 우리나라를 일본화 하기 위하여
선진화된 세균학을 가르쳐 주지 않아, 한국인들이 병에 걸려
빨리 죽어 한국 인구수가 줄어들기를 바랬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 전국의 가정에는 부엌 부뚜막에는
자싯물 그릇이라는 옹기로 만든 작은 양동이가 하나씩 있는데
그 양동이에서 비누도 없어 기름끼 묻은 그릇등을 씻고 ,
다시 맑은 물에 헹구지도 않고, 시꺼멓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행주로 물기를 쓰윽 닦으면 설저지 끝입니다.
그러기에 어린 아이들이 병이 들어 많이 죽어나가고
어른들도 항상 배앓이를 하고 설사를 하며 지내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60살만 되어도 장수한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한국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본말을 사용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세균`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위생관념이 없기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모두 힘들게
병이 들거나 죽어나갑니다.
을지로를 지나 집으로 옵니다.
내일은 남산도 가 보고 명동성당도 가볼 생각이고
전차도 한 번 타 볼 생각입니다.
(계속해서 제2편 12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2월8일(금) 형광등등 씀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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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