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관한 시모음 72)
겨울 삽화 /홍해리(洪海里)
Ⅰ
석유 파동 이후
연탄이 빨갛게 타는
난로 주변
주택복권 얘기가 꽃피고
조간신문 7면
잉크에 젖어 있는
매몰 광부의 구겨진 유서.
Ⅱ
사람들은 다 어디 가 숨고
보드라운 혓바닥만 살아
뱀도 되고 은어도 된다
헐벗은 가슴의 사내들이
값싼 유행가를 부르는
이 깊은 밤 갑갑한 시대
밖에서 젖고 있는 궂은 빗소리.
Ⅲ
불만과 적개심을 데리고
할딱이는 기대의 화살을 뽑아내고
죽은 입에서 귀를 주어내고
썩은 살 속에서 눈알을 추려내고
너무 높이 있어 닿지 않는
너의 손을 적시고 있는
몇 방울의 피 뜨거운 피.
겨울, 거울 /길상호
그는 빈 골목 담장에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얼굴 가득 피어난 성에를 닦아주자 입을 열었다. 거긴
바람이 많지? 그의 옷자락도 분명 흔들리고 있었는데, 바람은 아닌 듯했다. 깨진 모서리 어디에서도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퍼런 입술을 움직여 만들어내는 그의 말들도 사실 맺혔다가 흐르
는 물방울이었다. 얼어버리기 전에 읽지 못하면 영영 놓치고 말 목소리에 대고 입김을 불어대며 서
있을 때, 가까이?더 가까이 와봐! 나의 목에 낚싯바늘을 꿴 그의 시선이 줄을 잡아 당겼다. 시간의
뒷면에 발라놓은 수은 때문에 결코 들어설 수 없는 곳에 그는 있었지만, 유리의 간격을 두고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 우리는 쩍, 달라붙고 말았다. 서늘한 온도의 접착력에 놀라 뒷걸음을 쳤지만 입
속의 혀까지 이미 얼어버린 뒤였다. 그가 유리에 찍힌 핏자국을 핥으며 처음으로 웃었다. 미소 짓
는 얼굴에 검은 띠를 둘러주자 허름한 영정사진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골목에 눈발
이 하얗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겨울은 가고 봄은 오고 /古松 정종명
앙탈 부리며 영원불멸할 것 같았던
찬 겨울은 노쇠한 몸 피골이 상접한
송장이 되어 훈풍이 풍장을 치르며
뒷산 고갯마루를 넘으니
뒤따라 오는 봄바람의 배웅에 멋쩍은 듯
하직 인사할 겨를도 없이 꽁무니 감춘다
새벽을 여는 은은한 바람에 후끈 달아오른
들녘에는 서멀 되며 기지개 소리 요란하다
여린 가지마다 물오르는 속살거림에
내 몸도 스멀스멀 요동을 치며 아직도
건재함을 외치며 봄을 부른다
자연의 흐름은 막힘없이 순환을 이어가고
생명 가진 수많은 인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고 오며 묵묵히 제 길을 간다
겨울은 꽁무니 감추며 줄 행 냥치고
봄은 부푼 꿈 안고 꽃향기 휘날리며 온다.
그 시절 겨울은 따스했습니다 /주응규
지금은 아스라이 멀어져 간
그 시절 겨울은 따스했습니다
초라한 행색으로 오갈 데 없이
떠돌 던 외톨이 찬 바람이
비틀거리는 겨울 햇살에
기댄 채 스러져 갈 무렵
잡목 곁가지 한가득 묶어 맨
나뭇짐 지게 짊어지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로새겨진
그 시절 겨울은 따스했습니다
어머니, 부엌아궁이 불 지펴
가마솥에 안쳐놓은
보리밥 뜸들이는 정겨운 소리와
쇠죽 끓는 구수한 내음이 풍기는
그 시절 겨울은 따스했습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졸던, 기력 잃은 해는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에 드러눕고
온돌방에 흐르는
어머니 아버지, 삶의 숨결이 듬뿍 밴
인심 넘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그 시절 겨울은 참으로 따스했습니다.
떠나가는 겨울 /정찬열
연청빛 하늘
저편 산천 아래
아직은 찬바람을 보듬어
남쪽 들녘으로 품어 보낸다.
부풀어 오른
시냇가 버들강아지
찬바람에 열병을 치르고
남풍은 연회색 구름을 몰고 간다
봄을 갈구하는
이름 모르는 새들은
짝을 찾아 부르는 소리 애절하게
겨울이 떠나라며 계절을 찬미한다.
눈 녹은 산골
얼음장 아래 풀린 시냇물에
졸졸 구르는 봄을 갈구하며
버들개지 눈 비비며 머리 감는다.
겨울 잎 새 /장수남
깊은 하늘 긴 물결
은빛하얀 섬 이마에 걸쳐놓고
늦가을 쪽빛 웃음이 너를 손짓 할 때
넌 죽음이
그렇게 행복한 꿈이었을까.
넌 사랑이야.
출렁이는 겨울 여울 숲 지나
걸어온 시간들
영혼 뜨겁도록 하얗게 불 지펴놓고
넌 꿈을 꾸고 있을지 모르지.
채색된 황금빛 오선지에
한 잎씩 한 잎씩 남은 시간
고운 꿈 곱게 접어 돛배 먼 강 띄우면
산과 들녘에는 핏빛세상.
이름 새긴 잎 새 마다
겨울 강물은 선율을 타고
붉은 석양은 지울 수 없는 그리움으로
깊이 빠져들고
꽃상여 타고 꽃길 걷는 가을 잎 새
한 잎의 겨울편지 그리움 속에서 넌
다시 태어날 거야.
겨울 변주곡 /박현자
바람은 참 도도 하구나
꺼이꺼이 문풍지가 울고
가슴 한 켠 자꾸만
눈을 뜨는 혹한
콘크리트 건물로 반듯하게
포장된 도시는
고무공처럼 팽팽하게
추위와 맞서는데
우린 어디쯤에서
이 얼어붙은 계절을
이해 할 수 있을까
지상의 모든 것들을 깨울 수 있을까
동면하는 겨울에
바람은 여전히 살아 야무지구나
겨울의 잔상 /은파 오애숙
언제까지
을씨년스럴런가
대지가
머지않아 동면에서
기지개 켜며 깨련만
설 지나고
정월 대보름 지나서
2월 등지고 가련만
머지않아
‘벌레도 입을 떼고서
울기 시작한다는데’
언제까지
버팅기고 있으런가
겨울노래 /허형만
이 한 몸 하얗게 씻어 말려
저 푸르른 허공중에 걸어두고
한 생애의 잉걸불 같은 뜨거움도
첩첩 쌓인 눈 속에 묻어두고
한 오백 년
차고 맑은 바람으로나 흐를까
눈에도 녹지 않는
사금파리처럼 빛났던 사랑이여
또 다시 한 오백 년
훠이훠이 구름으로나 흐를까
소리 없이 흔적 없이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떠다니는 꽃잎처럼
겨울 장고항 /이심훈
장고항 사람들은 그물을 내렸다
몇몇은 거친 물살을 헤집던 준치처럼 떠나고
몇몇은 보상금 날리고 낙지처럼 들어앉아
폐선 스크루 녹슨 햇살의 비늘 바라보며
포구 건너 굴뚝처럼 담배를 빤다
파도는 느물대며 바위 모서리에도
굴 잔등에도 철떡철떡 기름때를 붙였다
쪽빛 물길을 뛰던 숭어 준치들
방파제 언저리 폐선으로 드러누운
물억새 나문재만 널브러진 염전 지대
긴 휴식에 돌아누운 수차들의 늑골 위
쇠기러기 청둥오리 날아드는 염전 바닥
사금파리 사이사이 뼛가루같이 돋는 소금기
발목에 하소연하듯 들러붙는 뻘밭에
빈 소금창고가 섬으로 떠 있다.
겨울 미로 /사윤수
눈은 내리지 않았다 마른 나무에 휘감아 놓은 루미나리에가 나무에게 빛나는 축복인지 뜨거운
사슬인지, 내가 그것을 보는지 그 무수한 불의 눈이 나를 보는지 유행이 지난 인식론의 입구에
서 나는 잠시 헤매었다
잘못 찍힌 사진처럼 날씨는 종종 섬세한 봄날이 출력되었다 버스 정류장 근처‘폰값 똥값’이라고
현수막 매달아 놓은 핸드폰 가게가 폐업을 했다 많이 팔리기를, 팔아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
고 구조 요청을 했으나 기지국과 교신하지 못한 채 끝내 통신이 끊긴 모양이다 나는 폰과 똥의
상관관계가 몹시 미끄럽게 느껴졌다 잘 살려면 잘 싸야 하는 법, 밑으로 빠지는 똥이 없으면 위
로 들어가는 밥도 없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의 주소는 어디인가 내 기다림은 성탄이나 눈(雪)이 아니다 암묵적인
합의의 신호와 숫자들, 지금은 503번 버스를 기다린다 다른 등번호를 달고 누가 먼저 달려와 준
다면 나는 기다림의 대상을 바꿀 수 있을까 겨울이 봄날 같으면 축복인지 난감한 일인지 어룽거
리는 햇살 속에 진눈깨비 흩날린다 버스는 오지 않고 여기, 늙은 눈물이 시큰거리는 겨울 오후
* 김소진 소설『내 마음의 세렌게티』가운데
겨울의 첨단(尖端) /윤삼하
한겨울 얼어붙는 가슴
갈라놓는 날선 바람
잔가지 잔뿌리들을
더욱 움츠리게 하는 강바람이여
빙판 위를 굴르든지
거친 들판 질러서 가다오.
잿빛 하늘도 쏟아지게
흰 눈이나 펑펑 내려다오.
처마밑에 쌓이는
눈의 나랫소리
새벽이 와도
정갈한 눈의 마음.
이 겨울의 첨단에서
아등그러진 노래들은 거두어다오.
아직 얼음에 덮힌 개울가
가시나무에 물이 오르는
봄은 까마득 보이지 않고
저만치 앞서가는
외로운 절기여
겨울 /조서연
하얀 겨울이 왔네
자꾸만 무언가
기다려지는 계절
어떤 따뜻한
그리움이
찾아올 것만 같은 셀 레임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
꼭 올 것 만 같은 두근거림
가슴에 담아둔
그리움으로 약속하고
쓸쓸함으로 기다리며
눈이 내리는 날
마침내
추억을 만나게 되는 계절
겨울의 방 /정성수(丁成秀)
내리던 눈 그치고
어둠 속
손아귀에 차오르는
울음의 바다
끝없이 침몰하는
나의 그림자
어디선가 마지막 비명소리
울려 나오고
아랫목에 둘러앉은 몇 개의 뼈마디
시퍼런 불을 켠다.
첫겨울 /오장환
감나무 상가지
하나 남은 연시를
까마귀가
찍어 가더니
오늘은 된서리가 나렸네
후라딱딱 훠이
무서리가 나렸네
겨울색 /윤민순
문 닫아 보이는색
눈 감아 보이는색
하늘에 내려오는 은빛
색들 바라보니 무색의 편안함이요
겨울에 피는 차가운가슴
한 아름 안고 빙글빙글
추위는 따뜻한 겨울색이다
따뜻한 가슴
열정에 피어난 추위
천천히 칠해가는 지금
따뜻한 날 그리면서
겨울은 참 고운색이다
겨울은 참 포근했다
포근히 안기는 색들
고요히 내려서 간다
이 순간에도 ........
기억해야 할 겨울 /박인걸
내가 뚫고 간 겨울은 생일 횟수보다 많다.
여름에도 겨울을 만났고
가을에도 가슴에는 얼음이 얼었다.
그 해 새벽어둠이 제 1한강교를 파묻었지만
강바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역류했다.
빈털터리의 가슴에는 꿈도 얼어붙고
지향점을 향해 걷는 발길은 휘청거렸다.
띄엄띄엄 서있는 가로등은
흐릿한 불빛을 내 발 앞에 던졌고
온기 하나 없는 형광등이지만
내가 가는 길에 표지판으로 삼았다.
빈창자는 허기를 채우라고 재촉하는데
가년스러운 새의 주머니는 늘 적자였다.
허나 주린 얼굴은 늘 창백해도
빼앗길 것 없는 처지가 오히려 자유로웠다.
앞만 보며 걸어가던 그 해 겨울은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나를 잡아당기는 절망의 늪지대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가곤 했다.
이제는 기억해야 할 겨울도
간직해야 할 소중한 추억이다.
지금은 사라진 용산시장 터널이
나의 기억장치 속에 저장되어 있다.
이맘 때 그해 겨울은 참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