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까는 남자/이복희-
흙의 뿌리들이 사라진 지 오래다
한 소쿠리 땅콩을 앞에 두고 등 구부린 중년 남자, 동물의 왕국 속으로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을 옮긴다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남자는 딱, 딱, 딱, 리듬에 맞춰 손가락을 놀
린다
나무 그늘에 늘어져 있는 수사자
측은한 눈빛으로 남자를 내다본다
남자는 신문지에 땅콩을 수북이 까놓고, 방바닥의 벼룩시장 구인광고를 곁눈질한다
잠깐씩 눈을 감고 포효하는 밀림의 왕인 양 입을 벌린다
4050세대 된바람에 휩쓸린 남자
목덜미 늘어뜨린 수사자가 화면 밖으로 뛰쳐나와 남자를 덮칠 것 같다 노란 땅콩꽃이
형광등 불빛에 파르르 떤다
땅에 맞닿듯 허리 굽힌 암사자, 가젤 목털미를 물고 클로즈업된다 새끼 사자들이 앞다
투어 풀숲을 헤치고 나온다
언덕 위의 수사자, 지평선에 저무는 노을빛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