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자연의) 절규, 91*73cm, 1893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는 80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약 25,000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 많은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고독과 불안이다. 그냥 쓱쓱 그렸을 것 같은 뭉크의 절규는 인간 내면의 불안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한다.
뭉크는 어느 날 다리 위를 지나가다가 석양을 보았는데 불길한 기운으로 현기증이 나면서 쓰러졌다가 나중에 이때의 감정을 그렸다고 한다. 사실 노을 지는 바다는 아름답다.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석양은 변산반도 채석강에서 바라본 노을이었다. 빙하 침식으로 만들어진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해안에서 맞이하는 석양은 그야말로 장관일 것 같은데, 정작 뭉크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피를 토하는 것처럼 공포를 느꼈고 그 두렵고 불안한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바다가 잔잔하지 않다.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검푸른 바닷물은 작은 배들을 금방이라도 삼킬 것만 같다. 태양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붉은 노을은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으며 보는 이들의 심장을 울렁거리게 한다.
화가는 여기서 비명 소리를 듣는다. 자연이 내는 처절한 고통의 소리다. 원래 제목은 자연의 절규인데 화가가 줄여서 그냥 절규라고 했다. 하늘과 태양과 바다와 자연이 온통 죽음의 비명 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들은 화가의 얼굴이 충격적이다. 뭉크는 그때 자신의 감정을 아무 것도 없이 일그러진 얼굴로 표현했다.
다리 위 두 친구는 무심하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러기에 이 전율과 공포는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고독하고 두렵다.
어쩌면 뭉크의 삶 자체가 절규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가족사는 비통했으며 삶은 고독하고 불안했다.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가족들 건강은 좋지 않았다. 뭉크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돌아가셨고, 9년 후인 열세 살 때 두 살 위인 맏이 누나가 같은 병으로 죽었다. 뭉크 본인도 어려서부터 류마티스를 앓았고 커서는 각혈도 했다. 그뿐 아니라 여동생은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거기서 죽었고, 남동생도 결혼한 후 자살했다. 그리고 아버지마저도 뭉크가 서른여섯일 때 자살하고 만다. 뭉크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죽음의 공포가 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회피하는 것보다 정면으로 맞붙어 그림으로 표현했다. 19세기말 유럽은 세기말 사조가 만연해서 퇴폐적인 자유가 유행했다. 뭉크 개인의 어두운 삶과 시대의 그 음습한 기운이 작품 속에서 더욱 불안하게 만났다.
19세기 말 뭉크의 절규에 21세기 새로운 인류 역시 깊은 눈길을 주는 것은 그가 던진 고독과 불안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니, 과학기술과 물질의 급속한 발전에 반비례하여 오히려 더 무거워진 고독과 불안이라고 할까. 그리고 지구 공멸을 느끼게 하는 기후위기 시대에 개인의 절규가 아니라 원래의 제목처럼 자연의 절규라는 사실도 더욱 우리의 마음을 떨리게 사로잡는다.
이 날카롭고 영혼을 후벼 파는 절규-비명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첫댓글 보통 사람들에겐 견디기 힘든 불행을 겪으며 예술로 승화시킨 뭉크가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