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운세] 3월 11일 월요일(음력 1월 30일 丙子)입력 : 2013.03.10 18:00
528 (신라 법흥왕 15) 법흥왕, 이차돈 순교로 불교 공인 1617 (조선 광해 9) <동국신속삼강행실> 간행 1886 서양화를 개척한 최초의 화가 춘곡 고희동 출생 1893 보은 장내리에서 동학 집회 개최 1906 응용화학자 안동혁(安東赫) 출생 1954 근화여자초급대학 졸업식 1958 원자력 법률 제483호 공포 1959 한국 -스웨덴 국교 수립 1961 원내외 야당 반공법 반대 극한 투쟁 선언 1971 유일한 박사 사망 1976 서울 지검, 3.1민주구국선언을 정부전복사건이라 발표. 김대중 등 11명 구속 1978 주한 멕시코대사관 개설 1985 노태우 민정당대표. 현대통령 임기중엔 대통령직선제개헌에 반대한다고 회견 1986 청주-중문간 고속화 도로 개통 1996 전두환 가족, 법정에서 강민조 씨 폭행 전치 2주 상해 1997 한국 이동통신 말로 거는 휴대폰 서비스 실시 1997 미·EU “한국 WTO제재” 경고 2004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 자살 2006 대한민국의 코메디언 김형곤 사망 2010 은하단서 구상성단 거대구조 첫 발견 2011 봉하마을 사저 설계한 건축가 정기용씨 별세
해 외
222 로마 제국의 황제 엘라가발루스와 그의 어머니 율리아 소애미아스 피살 1444 화가 보티첼리 탄생 1544 이탈리아 시인 타소(Torquato Tasso) 출생 1908 이탈리아 소설가 데아미치스 사망 1912 원세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 1917 러시아 3월혁명에 군부 가담 병기고 습격, 정치범 석방 1941 리비아를 누빈 '사막의 여우' 롬멜 1967 스탈린의 딸 스베트라나 알리루예바 망명 1977 브라질. 미국 인권외교에 반발 대미 군사협정 폐기 1990 리투아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을 선언하다. 1995 전 멕시코 대통령 카를로스 살리나스 미국으로 망명 1997 일본 핵재처리장 사고 발생 2000 칠레 대통령 리카르도 라고스 취임 2001 미르코스 멕시코 반군지도자 .3.000Km평화대장정 끝내고 멕시코시티에 도착 2003 영국 맨체스터법원, 남자의 넥타이 착용 강요 는 性차별이라고 판결 2006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 취임 2006 발칸의 도살자. 前유고대통령 밀로셰비치 옥중 사망 2009 독일 학교총기 참사 16명 사망 2011 日 강진‘쓰나미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2011 - 日 강진‘쓰나미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11일 규모 8.8의 대지진에 이어 일본 동북부 해안에 밀어닥친 쓰나미는 미야기(宮城)현 해안 마을을 송두리째 집어 삼켰다. 항공촬영에 잡힌 광대한 진흙 물결은 마치 대지를 덮은 용암을 연상케 했다.
주변 도로에는 몰려오는 바닷물을 피하려는 차량의 행렬이 이어졌지만 물결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가용보다 빨랐다. 최소 두 척의 해안 순찰용 보트와 20대 이상의 차량이 떠내려가는 것이 TV화면을 통해 확인됐다. 쓰나미 피해가 가마이시(釜石), 미야코(宮古), 이와이즈미(岩泉) 등지로 확산되는 동안 적지 않은 인명 희생이 동반됐다. 일본 당국은 태평양 연안 주민들에게 해안을 떠나 고지대로 대피할 것을 경고했지만 인명피해를 피할 수는 없었다. 특히 100명이 승선한 배가 쓰나미에 휩쓸려간 뒤 행방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쓰나미는 미야기현을 넘어 후쿠시마(福島)현의 소마항, 이와테(岩手) 현의 가마이시항에서도 관찰됐다. 정부 관련 연구소 소속 쓰나미 전문가인 다카하시 시게오는 이번 재난의 피해 규모와 범위가 일본 역사상 가장 크고, 넓은 축에 속한다면서 "한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경향신문 2011년 03월 11일 22:45:03 거대한 ‘괴물’이 덮치는 듯… 東北해안 2100㎞ ‘쑥밭’ㆍ센다이 공항·가옥 순식간에 삼켜 ‘재난영화’ 방불 영화 속 장면이 아니었다. 11일 오후 4시쯤 일본 ‘도호쿠 강진’이 발생한 뒤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동북 지방 해안선 2100㎞에 달하는 지역에 대형 쓰나미가 덮쳤다. 쓰나미는 동북부 해안도시를 한순간에 집어삼키는 ‘괴물 같은’ 괴력으로 몰아닥쳤다. 건물과 차량은 물론 토지 전체가 물길에 쓸려갔다. 8.8 강진·10m 쓰나미, 일본 삼켰다 동북부 해저서 발생…일 관측사상 최대 일부 원전서 이상신호 ‘원자력 긴급사태’ 주검 잇따라 발견…인명피해 엄청날듯 일본 열도가 충격과 슬픔에 잠겼다. 11일 규모 8.8의 강진과 뒤이은 대형 지진해일(쓰나미)이 일본 도호쿠(동북) 지역을 삼켜버렸다. <엔에이치케이>(NHK)는 밤 10시 현재 사망자가 91명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 아라하마에서 200~300구의 주검이 한꺼번에 발견됐다고 <교도통신>이 미야기현 경찰을 인용해 보도하고 행방불명자 수가 상당해 사상자는 급증할 전망이다. 이날 오후 2시46분23초 미야기현 센다이 동쪽 130㎞, 후쿠시마현 후쿠시마 동북동쪽 178㎞ 떨어진 바닷속 깊이 24.4㎞ 지점에서 규모 8.8의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 규모로는 일본 관측 사상 최대이며, 지진 에너지로는 1995년 60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한신 대지진의 180배에 이른다. 우선 대형 쓰나미가 강타한 이와테현, 미야기현 연안지역 피해가 컸다. 1993년 10월 홋카이도 지진 이후 처음 발령된 대형 쓰나미 경보는 일본 북단의 홋카이도 연안부터 도쿄 근처 해안까지, 또 쓰나미 경보는 중부인 와카야마현 해안까지 이어져 사실상 일본 동쪽 해안을 망라했다. <엔에이치케이> 등은 대형 쓰나미가 빠져나가면서 자동차들과 창고, 컨테이너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휩쓸려가는 모습을 계속 중계했다. 센다이 부근에서 최고 10m까지 실제 관측된 쓰나미는 한차례에 그치지 않고 반복될 때마다 규모가 커져갔고, 지진 발생 이후 수시간이 지나도록 추가 경고가 이어졌다. 일본 기상청은 연안지역 주민들에게 높은 곳으로 대피해 경계가 해제될 때까지 돌아오지 말 것을 호소했다. 이날 일본의 강진 이후 러시아와 대만, 필리핀은 물론 오스트레일리아와 남미까지, 사실상 태평양 연안국 전체에 쓰나미 경보와 주의보가 한때 발령됐으나 피해는 없었다. 특히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을 우려해 이날 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현 원전 반경 3km 이내의 주민들에게 대피요청을 내리는 등 원자력 긴급사태를 발령했다. 아직까지 방사능이나 유해가스 유출 보고는 없지만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1, 2호기가 냉각기능에 이상을 일으켰고, 지바현과 미야기현의 정유시설에 화재가 발생하거나 폭발해 불안감이 커져가고 있다. 센다이공항은 폐쇄됐고 도쿄의 관문 나리타공항 및 하네다공항도 폐쇄됐다가 저녁 일부 운항을 재개했다. 일본 정부는 간 나오토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긴급재해대책본부를 꾸리고 방위성 항공기 300대와 함정 40척을 재난구호에 배치하고, 주일미군에도 구조 협조를 요청했다. 김영희 기자, 도쿄/정남구 특파원 dora@hani.co.kr /한겨레 2011-03-11 오후 07:51:58 일본 대형 쓰나미 강타, 해안선이 밀려들어왔다 마치 일본이 잠겨버리는 듯 했다. 11일 규모 8.8의 강진과 이에 이은 대형 쓰나미가 일본 동북부 지방을 휩쓸었다. 쓰나미가 공장과 집 등을 완전히 삼켜버리고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 도쿄를 포함해 미야기현, 이와테현, 후쿠시마현 등이 완전 마비되어버렸다. 이날 오후 2시46분23초 혼수 센다이 동쪽 130㎞, 후쿠시마 동북동쪽 178㎞ 지점의 해저 24.4㎞에서 규모 8.9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미국 지질조사국(USGS)이 밝혔다. 지난 9일 도호쿠 지방 연안 동쪽 150~160㎞ 바닷속에서 규모 7.3의 강진이 발생한 지 불과 이틀만이다 지진 발생 뒤 규모 7 이상의 여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을 강타한 것은 대형 쓰나미였다. 지난 1993년 10월 홋카이도 지진 이후 처음으로 발령된 대형 쓰나미 경보는 일본 북단의 홋카이도 연안부터 중부인 와카야마현 해안까지 이어졌다. <엔에이치케이>(NHK) 등은 미야기현 센다이시, 이와테현 가마이시시 등을 강타한 대형 쓰나미가 빠져나가며 자동차들과 창고, 컨테이너 등이 휩쓸려나가는 모습을 계속 중계했다. 실제 4m 이상의 쓰나미가 연안 곳곳에서 관측됐고 이와테, 미야기, 아오모리는 물론 도쿄 부근인 이바라키현 연안에 최고 10m 이상의 쓰나미까지 예상된다고 일본 기상청은 밝혔다. 일본 기상청은 이날 “상당히 강한 지진에 쓰나미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며 연안지역 주민들의 긴급 대피를 호소했다. 도쿄에서도 지진 발생 뒤 수시간 동안 여진으로 빌딩이 강하게 흔들리며 오다이바의 빌딩에서 화재가 나는 등 피해가 이어졌다. 고층 빌딩의 엘리베이터 운행이 중단됐고 도쿄 시내에선 한동안 전화가 불통됐다. 또 후쿠시마현에 있는 원전 2기가 지진에 따라 작동이 멈추고, 도쿄의 관문 나리타 공항은 잠정폐쇄됐으며 동북부 지역의 열차가 운행을 정지하는 등 동북지역이 모두 멈춰서버렸다. 일본 정부는 전 각료에게 각 부처별로 지진과 쓰나미 피해 축소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고, 방위성도 대책본부를 설치했다. 김영희 기자, 도쿄/정남구 특파원 dora@hani.co.kr /한겨레 2011-03-11 오후 03:34:30 거대한 파도가 불도저처럼…집·자동차 순식간 싹쓸이 동북부해안 쓰나미로 초토화 <엔에이치케이>(NHK) 등 방송들의 화면이 중계하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 연안지역은 대형 재난영화에서나 본 듯한 모습이었다. 일본 열도를 경악에 빠뜨린 대형 쓰나미는 동북부 미야기현과 이와테현 해안지방을 단숨에 삼켰다. 바닷물은 해변을 거쳐 육지 깊숙이 휩쓸었다. 달리던 자동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파도가 덮치며 집과 논밭, 공장지대는 마치 거대한 불도저에 밀려나듯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빨려들어갔다. 주민들이 얼마나 떠내려가고 죽었는지는 아직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일본의 긴급 재난방송은 “되도록 튼튼한 콘크리트 건물의 3, 4층으로 대피하라”는 얘기만 숨가쁘게 쏟아냈다. 예상을 뛰어넘는 대지진과 쓰나미의 급습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해대비체제를 갖춘 일본 정부 관계자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오후 2시46분께 일본의 대표적인 지진 발생 지역인 산리쿠(아오모리·미야기·이와테현) 바다 밑에서 거대한 지진이 일본 열도를 강타한 지 6분 뒤. 쓰나미의 첫 파도가 미야기현 해안에 도달했다. 50㎝ 높이였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자 대형 쓰나미의 진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번 대지진의 직격탄을 맞은 미야기와 이와테현에선 7m를 넘는 파도가 마을과 도시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센다이 앞에는 10m가 넘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강력한 에너지를 품은 바닷물이 휩쓸며 사람들의 공포가 더해갔다. 재해상황에 대비해 설치해둔 <엔에이치케이> 카메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이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장면을 생생하게 중계했다. 이와테현 가마이시에선 기우뚱한 선박이 둑에 부딪치고, 마치 거대한 불도저가 밀어내듯 목조주택과 건물, 선박, 자동차 등이 흙탕물에 섞여 휩쓸려갔다. 지진에 익숙한 일본인들이 이번 대지진에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지진의 규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강력한 쓰나미의 가공할 위력 때문이다. 게다가 충분한 대비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터여서 더욱 큰 피해가 우려된다. 산리쿠 지진은 역사적으로 쓰나미를 동반했다. 이번 쓰나미도 1896년 2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메이지 산리쿠 대지진 때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 일부 해안지역에선 파도의 높이가 20m를 넘었다. 이 일대 바다 밑에는 부드러운 퇴적물이 대량으로 쌓여 있어 판의 충돌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진행되는데, 이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지진파보다 바닷물에 훨씬 큰 에너지가 집적된다. 지역신문인 <도오닛포>는 전문가 말을 인용해 “쓰나미의 크기나 피해지역 넓이 모두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최악”이라고 말했다. 쓰나미란 말도 산리쿠에서 유래했다. 1896년 당시 지진에 이은 거대한 바닷물의 습격을 받은 일본인들은 “집채만한 파도가 덮쳤다. 쓰나미다”라고 소리쳤다. 이후 쓰나미가 지진해일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하게 됐다. 이후에도 일본 동북해와 동해에서 쓰나미로 몇천명씩 숨졌으며, 미국 알래스카와 필리핀, 파푸아뉴기니에 이어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로 23만명이 숨졌다.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 /한겨레 2011-03-11 오후 08:15:15 게센누마 도시전체 ‘불바다’…도호쿠 등 850만가구 ‘암흑’수도권 마비…도쿄전철 멈춰 신칸센도 운행 중단 ‘대혼란’ 도시 곳곳 참화 확대
11일 일본 동북부 태평양 연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미야기현 게센누마시를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불이 났고, 도쿄를 포함한 광역수도권의 도시기능이 마비됐다. <엔에이치케이>(NHK)는 이날 밤 게센누마시의 시가지와 그 일대가 온통 화염에 휩싸였다고 육상자위대 도호쿠 방면대를 인용해 보도했다. 육상자위대가 헬리콥터에서 영상을 찍은 시각은 저녁 8시께로, 도시 전체가 화염에 뒤덮였고 간간이 폭발음이 들렸다. 이날 화재는 오후 5시30분께 항구에 몰아닥친 쓰나미에 어선 연료용 탱크가 뒤집혀 불길이 일면서 시작됐다. 이 불길이 부유물에 옮겨붙었고 부유물이 다시 주택가로 흘러들어 민가로 옮겨붙으면서 불길이 전 도시로 확대됐다고 <아사히신문>은 전했다. 게센누마시의 인구는 7만4천여명에 이르러 큰 피해가 예상된다. 도호쿠 지방 440만, 간토 지방 405만 등 850만 가구와 건물의 전기 공급이 끊기면서, 밤이 되자 동북부 해안 일대는 암흑에 휩싸였다. 도쿄의 관문인 나리타공항과 하네다공항은 한때 폐쇄됐다가 부분적으로 운항을 재개했다. 동부 연안의 모든 항구도시들에선 선박 입출항이 금지됐다고 <교도통신>이 전했다. 이날 지진은 도쿄 도심의 고층 건물들이 첫 충격파가 밀려온 지 30분이 넘도록 흔들리고 선반의 물건들이 떨어져내릴 만큼 강력했다. 지진경보 사이렌이 도시를 휘감았고, 빌딩 엘리베이터는 가동을 중단했다. 공포에 질린 직장인들과 시민들은 건물 붕괴를 우려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교통·통신도 제 기능을 잃었다. 수도권 전철뿐 아니라 도쿄와 도호쿠 주요 도시를 잇는 고속철 신칸센도 운행을 멈췄다. 특히 퇴근시간이 되면서 혼란은 더 심해졌다. 도쿄에서 교외나 위성도시로 출퇴근하는 직장인 수만명이 전철 운행 중단으로 발이 묶이자 쉴 곳을 찾아 거리를 헤매거나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전철이 끊겨 자동차들을 몰고 나와 밤 11시가 넘도록 시내 도로는 주차장이 되다시피 했다. 밤이 되면서 기온까지 크게 떨어졌다. 도쿄에서 가장 붐비는 신주쿠역에선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승객 수백명을 인근 신주쿠구청과 학교, 도쿄도청에 분산시켰다. 일본 정부는 집으로 급하게 돌아가려고 서두르다가 더 큰 일이 있을 수 있다며, 되도록 귀가를 자제하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동부 연안의 고속도로와 국도도 군데군데 길이 끊기거나 노면이 파손돼 통행에 차질을 빚었다. 피해 지역에 사는 지인들의 안부를 묻는 전화통화와 문자메시지가 폭증하면서 휴대전화 서비스가 불통되는 사태를 빚자, 일본 재난당국은 피해상황 파악과 대처를 위해 통화 자제를 호소하기도 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 2011-03-11 오후 10:48:55 다급한 경보 끝나자마자 땅·건물 ‘흔들흔들’ 특파원이 전하는 당시 상황 11일 오후 2시46분, 참의원 결산위원회를 중계방송하던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에서 ‘지진 경계경보’가 흘러나왔다. 미야기현을 중심으로 도호쿠 지방에 강한 지진이 곧 발생할 것이라는 다급한 목소리의 안내가 채 끝나기도 전 땅과 건물이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틀 전 미야기현에서 일어난 지진의 여진인가 생각했지만, 흔들림은 훨씬 심하고 오래 이어졌다. 책꽂이에서 책이 떨어져내렸고, 책상 위의 프린터가 미끄러졌다. 센다이 동쪽 해저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곧 방송을 통해 전해졌다. 기상청은 미야기현을 비롯한 도호쿠 지방 태평양 연안에 3~6m가량의 큰 쓰나미가 일어날 것이라며, 연안지역 주민은 긴급 대피하라고 경고했다. 다행히 도쿄에는 큰 쓰나미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첫 지진과 다를 바 없는 강한 여진이 몇 분 간격으로 이어졌다. 기자도 몇 번이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 진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렸지만, 요동은 멈추는가 싶다가 다시 시작되곤 했다. 3시 조금 넘어 도쿄 남쪽 하늘에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고토구 아오미의 한 빌딩 고층에서 불이 난 것이었다. 더는 건물 안에 있을 수 없었다. 문밖으로 나가자 가스관이 터졌는지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엘리베이터는 멈춰서 있었다. 건물 관리인이 바쁜 걸음으로 비상계단으로 이어지는 문이 제대로 열려 있는지 점검하고 있었다. 근처 작은 공원엔 벌써 수십명이 피난해 있었다. 일부는 머리에 헬멧을 쓰고 있었다. 차량들은 길가에 길게 멈춰서 있었다. 땅이 또다시 심하게 흔들리자 지진을 많이 겪은 일본인들의 입에서도 “스고이”(엄청나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상청은 지진이 도쿄에서 300㎞ 떨어진 센다이 앞바다에서 일어났다며, 미야기현과 이와테현에서 거대한 쓰나미가 선박과 차량을 휩쓸고 있다고 전했다. 라디오를 듣던 사람들의 얼굴에 짙은 불안이 스쳤다. 휴대전화는 이미 통화가 되지 않았다. 불이 난 아오미에서는 오다이바에서 신바시로 이어지는 유리카모메 고가철로 위를 걸어서 도심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도쿄에는 큰 쓰나미가 밀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녀들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학부모들은 학교로 와달라는 비상연락이 취해졌다. 경찰은 아다치구에서 건물 네 동이 불에 타는 등 이날 지진으로 도쿄에서만 오후 4시까지 13건의 화재가 일어났다고 밝혔다. 도쿄 중심부에 있는 한 건물 일부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여럿 다쳤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마쓰다시에서는 콘크리트벽이 무너져 차 3대를 덮쳐 1명이 중상을 입는 등 다수의 부상자가 생겼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도시가스 공급이 끊겼지만, 지진 이후 수도권의 전철·지하철 운행이 전면 중단된 것에 견주면 그런 불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중전화는 즉시 무료 개방됐지만, 통화량이 너무 많아 전화는 제대로 걸리지 않았다. 정부는 역 주변에 몰려 있는 시민들에게 “무리하게 귀가하지 말고, 안전지대에서 밤을 보내라”고 권고했다. 밤에도 간헐적인 여진이 이어졌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jeje@hani.co.kr /한겨레 2011-03-12 오전 01:24:52 일본 8.8 강진…“사망자 1000명 넘어” 11일 일본을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는 1000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고 교도통신이 12일 보도했다.
이 통신은 방위성을 인용해 후쿠시마 현에서 쓰나미로 1800여 채의 가옥이 무너지고 자동차와 선박들이 휩쓸려 내려갔다며 이같이 전했다.
경찰청은 12일 0시30분 현재 태평양 연안 8개 현에서 133명이 사망하고 531명이 실종됐으며 수백 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미야기 현 경찰은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에서 200∼300구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센다이시에서는 6만∼7만 명이 200여 시설로 대피했다 【도쿄=로이터·신화/뉴시스】정진탄 기자 /한겨레 2011-03-12 오전 03:29:36 일본 내 대지진 피해 상황 사망자는 천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돼, 일부 지역 괴멸 상태 11일 오후 2시 46분, 산리쿠 해안을 진원으로 하는 일본 관측 사상 최대 지진이 발생, 일본 북부에서 관동지방에 걸쳐서 강한 진동과 함께 최대 10미터에 달하는 쓰나미가 육지를 덮쳐 큰 화재가 발생했다.
또한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현 등 3개 현 내에서는 일부 지역에 쓰나미가 몰아 닥쳐 마을이 괴멸 상태가 됐다. 약 110만 명이 사는 태평양 연안 산리쿠 지역을 중심으로 수백명의 사상자와 다수 행방불명자가 생겨나는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최종 사망자 수가 10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서는 진도7, 센다이 시 등 미야기현 각지, 후쿠시마, 이바라키, 도치기 각현에서 진도6강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진도6,7은 모두 건물이 무너질 수 있는 강도의 지진이다.
진원지의 깊이는 약 10km로, 지진 규모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대지진과 같은 8.8을 기록했다. 그 후에도 진도 6약 이상의 지진이 이어지고 있다. 12일 요미우리 신문은 산리쿠 해안부터 이바라키현 해안에 걸친 4개 이상의 진원지가 연동되어 암반을 광범위하게 파괴했고, 이 때문에 지진이 연달아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한편, 경찰청에 따르면, 이번 일본 동북부 거대 지진으로, 12일 오전 0시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이바라기, 도치기, 치바, 도쿄, 가나가와 등에서 사망자가 117명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고, 부상자, 행방불명자 또한 다수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후쿠시마현 경찰에 따르면, 후쿠시마현 내에서만 336명이 행방불명이라고 한다. ▲지진보다 더 무서운 '쓰나미' 쓰나미로 인해 일부 마을 '괴멸적 상태' 11일 오후, 센다이 시에서는 해안선에서 약 2km 떨어진 지점에서도 쓰나미가 덮쳐 빌딩, 가택 및 자동차가 물살에 휩쓸렸다. 미야기현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에서는 익사한 것으로 보이는 시신 200~300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미야기현 게센누마시에서는 쓰나미로 인해 기름 탱크에 들어있던 중유가 유출돼 시가지에서는 큰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와 쓰나미가 동시에 발생하는 바람에 시가지 전체가 초토화됐다고 한다.
철도 피해도 막심하다. JR 센세키선의 경우, 4량 전철이 물에 떠내려가 선로로부터 떨어진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시노마키시에서는 총 140명이 탄, 건조중인 배 3척이 쓰나미에 떠내려갔다고 한다.
또한 리쿠젠다카다시는 시가지 반 이상이 쓰나미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가마이시에서도 쓰나미로 집 수백호와 다수의 자동차가 떠내려갔고, 야마다쵸에서도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
오후나토시의 호소우라 지구도 괴멸상태라고 한다. 후쿠시마현 소마시의 해안선에서도 토사 붕괴가 잇따라 후쿠시마현에서 적어도 수십명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야기, 이바라키, 그리고 치바현 이치하라시 등에서도 석유 유출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고, 일부 지역 석유 화학 공장에서도 큰 폭발이 일어났다.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 유출 위험 발전소 반경 3km 이내 주민 대피 명령 정부는 긴급재해대책 본부를 설치, 11일 밤 후쿠시마 제 1원자력발전소 2호기 원자로의 냉각수 수위가 계속 저하되고 있어 발전소 반경 3km 이내의 주민들에게 피난 명령을 내렸다.
냉각수 수위 저하가 지속돼 연료봉이 노출될 경우, 방사능이 유출될 수 있다. 12일 오전 0시까지 약 6000명이 대피했다고 한다.
12일 오전 3시 경, 도쿄전력은 제1원자력 발전소 1호기 원자로 내 압력이 상승하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원자로 내 압력이 상승하면 격납고 자체가 손상을 입게 된다.
이 때문에, 도쿄전력은 원자로 내 압력을 저하시키기 위해 내부 공기를 빼내는 작업을 검토하고 있다. 실시한다면, 방사능 물질이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어 도쿄전력 측은 쉽사리 작업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다. ▲ 동북지방, 관동지방 각지에서 정전 일어나 통신 및 교통시설 마비 한편, 동북지방, 관동지방의 화력, 수력, 원자력 발전소 50곳 가량이 운행을 중단했다. 때문에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450만 세대, 도쿄전력 관할 내 지역도 약 400만 세대가 정전됐다.
센다이 공항 활주로는 수몰된 상태로 운행이 전면 중단됐다.
고속도로는 수도 고속도로와 도호쿠(동북) 고속도로, 죠반 고속도로 등 동북지방과 관동지방의 거의 전역에서 통행이 중단됐다.
센다이 역에서는 고속철도인 신칸센이 탈선됐으며 수도권, 동북 지역을 지나는 철도 노선은 대부분 11일 내내 운행이 중단됐다. 때문에 수도권에서는 집에 돌아갈 수 없는 '귀택 난민'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일부 운행이 가능했던 버스와 극히 일부 전철 노선에서는 차량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크게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전화 회선도 일부가 불통됐으며, 휴대전화 또한 동북지방과 관동지방을 중심으로 통화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자위대 구조활동 시작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3개 현에서는 재해파견 요청했고, 현재 육상, 해상 자위대가 이 지역에 출동해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편, 기상청은 이번 지진을 '동북지방 태평양 해안 지진'이라고 명명했다.
<한겨레>가 일본 뉴스 전문 포털사이트 <제이피뉴스>(JPnews.kr)와 제휴해 일본 소식을 전달합니다. 전여옥 의원과 ‘일본은 없다’ 재판을 벌여 지난 1월13일 2심에서 승소한 재일 언론인 유재순씨가 <제이피뉴스>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시고자 하시는 분은 아래에 있는 바로가기를 누르시면 <제이피뉴스>의 해당 기사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2011-03-12 오전 04:26:10
2011 - 봉하마을 사저 설계한 건축가 정기용씨 별세 - 봉하마을 사저 설계한 건축가 정기용씨 별세 건축가 정기용씨(성균관대 석좌교수)가 11일 오전 11시40분 서울 명륜동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2010년] 법정 스님 입적 ![]() 법정(法頂·78) 스님이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 51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入寂)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저자로 잘 알려져있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 스님은 1954년 당대의 선승(禪僧) 효봉(曉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송광사·쌍계사·해인사 등에서 참선수행했다. 1960년대에 불경의 한글번역 사업에 참여했으며, 1970년대 들어서는 에세이와 저서를 통해 불교적 가치관을 독자들에 전하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96년 김영한 보살로부터 서울의 대표적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기증받아 2007년 길상사(吉祥寺)를 창건하고 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법정 스님은 수필집 '버리고 떠나기', '무소유', '산방한담(山房閑談)', '아름다운 마무리', '산에는 꽃이 피네' 등 20권이 넘는 대중저서를 출간해 불교계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997년 창건한 길상사에서는 2003년까지 회주를 맡기도 했다. 생전에도 '무소유'를 강조하던 법정 스님은 '사리를 찾지도, 탑을 세우지도 말라.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법정 스님은 지난 2007년 폐암으로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2009년 재발해 그동안 삼성서울병원에서 투병해 오다가 이날 서울 성북동 길상사로 거처를 옮겨 열반에 들었다./조선 법정 스님 ‘무소유’ 마저도 ‘소유’ 말라 열반한 법정 스님 "내 모든책 더 이상 출간말라" 산문집 <무소유>의 작가로 친숙한 법정 스님이 11일 오후 1시52분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5살. 세수 78살. 지난 2007년 10월 폐암 진단을 받고 제주도 서귀포 등에서 요양해오다 최근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온 법정 스님은 이날 열반 직전 길상사로 옮겨졌다. 한국 불교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상고를 거쳐 전남대 상과대를 다니다 1956년 당대의 고승인 효봉 스님을 은사로 비구가 됐으며,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낸 뒤 1970년대 이후 조계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직접 지어 홀로 살았다.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현실 참여가 전무하다시피했던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으로 씨알의 소리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도록 활기를 불어넣었고, 1970년대에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 지난해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과도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1994년부터는 순수 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마음과 삶을 맑히는 운동을 펼치며, 고독한 수행 생활을 해왔다. 1997년엔 서울 성북동에 길상사를 창건했고 2005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내려가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가끔씩 길상사에서 법문을 해왔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밤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해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법정스님은 머리맡에 남아 있던 책을 저서에서 약속한 대로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해줄 것을 상좌에게 당부했다. 아울러 법정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법정 스님은 맑고 정갈한 필치의 산문인 <무소유> <오두막 편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산방한담> <텅빈 충만> <아름다운 마무리> <일기일회>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등의 책을 남겼다. 법정스님은 평소에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했다. 이에따라 조계종과 송광사, 길상사 등은 이런유지를 받들어 별도의 공식적인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기로 했으며, 다비식 이외 일체의 장례의식을 치르지 않기로 했다. 또 조화나 부의금도 접수하지 않기로 했으며 조문객을 위해 길상사와 송광사, 스님이 17년간 머물렀던 송광사 불일암 등 3곳에 간소한 분향소만 마련했다. 다비식은 13일 오전 11시 전남 순천 송광사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겨레 2010-03-11 오후 02:28:20 ▲1932년 10월 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1954년 =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 출가 ▲1956년 7월 15일 =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년 3월 15일 =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 15일 =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이후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1960∼1961년 =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 ▲1967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1973년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 참여 ▲1975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충격,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감 ▲1976년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1984∼1987년 송광사 수련원 원장 ▲1985년 경전공부 모임 법사 ▲1987∼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위원회 발족 ▲1993년 10월 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1994년 1월 1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199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기념 첫 대중법문을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지에서 하며 지부 발족 ▲1995년 김영한(법명 길상화)씨의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여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조계종에 등록 ▲1997년 1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1997년 12월 14일 대법사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바꾸고 창건 법회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 축석 100돌 기념 초청 강연 ▲2003년 10월 '맑고 향기롭게' 창립 10주년 기념 강연, 파리 길상사 개원 10주년 기념 법문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서울=연합뉴스) cherora@yna.co.kr /한겨레 2010-03-11 오후 02:28:20
2010 - 은하단서 구상성단 거대구조 첫 발견 서울대 이명균 교수 사이언스지 발표 우주거대구조 연구 새 가능성 열어 구상성단은 일반적으로 은하에서 발견된다. 은하단에서는 구상성단이 무거운 은하 주위로 몰리기도 하고 은하와 은하 사이를 떠돌기도 한다. (서울=연합뉴스) 김영섭 기자 kimys@yna.co.kr /연합뉴스 2010/03/12 04:00
2006 -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 취임 칠레 첫 여성 대통령 취임한 바첼레트 “남녀 평등 실현 노력할 것”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인 미첼 바첼레트(54)이 11일(현지시각) 대통령에 공식 취임했다. 이른 아침부터 모네다 궁 앞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떠나는 리카르도 라고스 전 대통령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라고스 전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이어 받은 바첼레트 대통령은 공식 행사를 마치고 오후 6시30분 모네다 궁 발코니에서 칠레 국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바첼레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전임 라고스 대통령의 시장경제정책을 이어받아 모두가 함께 발전하는 나라를 만들 것을 다짐했다. “남녀 모두 동등한 기회를 갖는 나라를 만들고 균형적인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러분은 리카르도 라고스 전 대통령 같은 훌륭한 대통령을 한번 더 갖게 되는 것이다.” 바첼레트 대통령 취임은 여전히 남성 우위의 보수사회인 칠레에 문화적 충격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2년 전에야 이혼이 합법화된 칠레에서는 여전히 낙태는 불법이고, 여성들이 동일한 노동을 하는 남성에 비해 40% 이하의 월급을 받고 있다. 바첼레트 대통령은 이미 정당들과 지루한 협상을 생략하고 9명의 여성 장관과 14명의 여성 차관을 포함한 20명의 장관과 31명의 차관급 인사 등 정부 내 250개 주요 직책에 남녀 동수를 임명하는 인사혁신을 단행했다. 장관급 20명에 여성이 9명, 차관급 31명 가운데 여성이 14명이 포함됐다. 그는 또 정당별로 일정 비율의 여성후보를 강제하는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해왔다. 취임식에는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페루 등 30여국의 정상들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 등이 참석했다. 대통령 취임 축하 행사는 바첼레트 대통령이 모네다 궁 정원에서 첫 공식회견을 하게 되는 13일까지 계속된다. 산티아고/민원정 통신원 wonjung_min@naver.com /한겨레 2006-03-12 오후 06:25:56
2006 - 대한민국의 코메디언 김형곤 사망 김형곤(金亨坤, 1957년 6월 23일 ~ 2006년 3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코미디언이다. 뚱뚱한 외모로 공포의 삼겹살이란 별명으로도 유명했다. 동국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 TBC의 개그콘테스트에서 은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연예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1980년대 한국방송의 코미디 프로그램중 하나였던 유머 일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탱자 가라사대〉 등의 코너에서 당시 드물었던 시사풍자를 시도했으며,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코너에서는 ‘잘 돼야 될 텐데…’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하지만, 유머일번지의 거침없는 시사풍자는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미움을 받아 중간에 프로그램이 방영을 중단당하는 일을 겪었다. 1999년에는 자유민주연합의 명예총재특별보좌역을 하였고, 2000년 무소속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뮤지컬에 참여하는등 다양한 연기자로서의 활동을 했다. 2006년 3월 11일 운동 직후 사우나에 갔다가 화장실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숨졌으며, 사후 시신은 연구용으로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병원에 기증되었다 데뷔 /위키백과
2004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 자살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TV로 노무현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끝까지 지켜본 뒤 오전 11시 30분경 승용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이어 남 씨는 오전 11시 50분경 대우건설 법무팀장 신 모 씨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모두 짊어지고 가겠다. 차는 한강 남단 에서 찾아가라”고 말했으며 신 팀장은 이 같은 내용을 남 씨의 변호인인 신 모 변호사를 통해 검찰에 알렸다.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기도 했다.
2001 - 마르코스 멕시코 반군지도자, 3000km 평화대장정을 끝내고 멕시코시티 도착 중남미에서 제2의 `체 게바라`로 영웅시되고 있는 멕시코 반군지도자 마르코스 /조선 - 마르코스 멕시코 반군지도자, 3000km 평화대장정을 끝내고 멕시코시티 도착 멕시코 원주민인 인디오의 권익 보호를 요구하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지도자 24명이 보름 동안 3000km에 걸친 평화대장정을 마치고 2001년 3월 11일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도착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이끈 평화행렬이 광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기다리고 있던 약 20만명의 환영인파는 `마르코스`를 연호하며 비무장 평화행진의 성공을 축하했다. 이들의 평화행진에는 이탈리아 인권단체 회원 5백여명의 외국인들이 참가했으며 멕시코 정부는 수천명의 연방경찰과 군병력을 동원, 이들을 보호해 우려할 만한 사고는 없었다. 마르코스는 이날 열린 평화대행진 종료 선언 및 원주민 권익보장 촉구대회에서 원주민 권리보호를 주내용으로 하는 산안드레스 협정의 의회 비준, 반군의 근거지인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에서의 정부군 전면 철수, 수감중인 반군포로 및 동조자 전원 석방 등을 요구했다. 중남미에서 제2의 `체 게바라`로 영웅시되고 있는 마르코스의 본명은 라파엘 세바스티안 기옌으로, 백인이다. 그는 멕시코 명문 국립자치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 유학한 인텔리다. 부드럽고 하얀 손에 검은 복면,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상류층 스페인어와 영어, 불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뛰어난 논리와 해박한 지식, 유머와 재치로 신비로움을 불러일으켜왔다. 부정부패에 신물이 난 멕시코 국민들은 실상이든 허상이든 그를 `현대판 로빈후드`로 여겨왔다. 그가 농민운동에 가담하게 된 계기는 대학 졸업 후 치아파스주 라칸돈 정글에서 사회활동을 하면서부터. 1983년 사회학과 철학을 전공하며 느꼈던 현실에 대한 갈등, 하층민에 대한 연민을 이기지 못해 산악지대로 올라갔다. 인디오의 권익을 주장하지만 어줍지 않은 정치 구호는 내세우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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