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서 인물(성격)에 대한 고찰 (2)
김종완
수필의 등장인물의 특징
수필의 등장인물은 소설에서처럼 성격(인물)끼리 부딛혀 갈등하다가 성격이 성장하기도 하면서 갈등을 접고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과의 갈등을 겪어서 성장하거나 이미 성장한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오월>은 인생의 허무라는 화두를 가지고 존재의 이유와 갈등하는, 그러나 그는 이미 성숙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화자인 ‘나’다.
다시 말하면 수필은 서로 다른 색깔의 성격들이 갈등하고 화해하는 플롯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윤오영의 <달밤>에 나오는 두 인물도 이미 달밤의 풍치 정도는 감상할 수 있는 내면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수필의 인물은 인물끼리 서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내면에서 갈등을 겪은 다음의 성숙하거나 성숙한 인물이다. 그들은 작가가 보고자 하는 인물, 어떤 면에선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필의 인물을 말하는 것은 결국 바로 작가가 화자로 나선 “나”다.
수필의 인물에 리얼리티를 부여하자
윤오영의 <방망이 깎는 노인>에서 거리에서 방망이 깎는 그 노인은 마치 산에서 방금 내려온 노인처럼 그려졌다. 도사란 붙박이로 항상 한 장소에 있으면 안 된다. 순간 만나지 못하면 사라지는 존재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나중에 가보니 노인은 사라졌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예수께서 서울의 도심에 현현한 것인가? 그는 도심에까지 나와서 왜 방망이를 깎나? 방망이 깎는 노인에게 생계를, 생활을 빼버리면, 그는 도사가 되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작가가 등장인물을 탈색시키면 수필의 인물에서 리얼리티가 사라지고 만다. 오늘의 수필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수필인물에서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인물은 단색(mono tone)으로 통일 되었다. 수필이 본격적인 문학장르로 발전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첫 관문이 수필의 인물에게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수필인물의 장본인인 화자에 대해서 연구해야 한다.
수필의 화자론
수필 화자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 먼저 시의 화자에 대해서 알아보자.
시의 화자를 시적 자아, 서정적 자아, 서정적 화자, 상상적 또는 가상적 자아 등으로 부른다. 북한에선 ‘서정적 주인공’이라고 한다. 화자와 시인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시는 수필과 마찬가지로 가장 주관적이고 고백적인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의 화자는 낭만주의를 거쳐 주지주의로 변하면서 바뀌었다. 이것은 곧 개성론에서 몰개성론으로 변화다. 낭만주의 시관에선 화자와 시인이 일치했다(개성론). 그러나 주지주의 시관에선 시적 화자를 실제의 시인과 엄격히 구별한다(몰개성론). 시가 하나의 창조물인 이상 ‘탈’이란 시적 화자를 “자전적으로 동일시 할” 것이 아니라 “상상적으로 동일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적 화자는 제재에 대한 태도를 표명하기 위해서 창조된 극적 개성이기 때문에 시는 어디까지나 허구적이고 극적이라는 것이다. ‘작품 속의 시인’은 시인의 경험적 자아가 시적 자아(persona)로 변용·창조된 것이지 시인의 실제의 개성 그 자체는 아니다. 소월의 <진달래 꽃>의 화자는 여성이고 <강변 살자>의 화자는 어린 아이다.
구조주의자들의 담화의 구조
시에서의 화자론을 예비지식을 가지고 수필에서의 화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먼저 문학작품을 담화로 보았던 구조주의자들의 담화의 구조를 살펴보자.
서사텍스트
실제작가 → 내포작가 → 화자 → 청자 → 내포독자 → 실제독자
문학작품이란 작품 속의 화자가 청자를 향해서 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텍스트 속에서 화자에게 말을 시키는 사람이 내포작가다. 내포작가는 실제작가인 현실적인 남성이나 여성보다 지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인 표준에서 훨씬 우위에 있다는 것이 분석되었을 뿐 거의 분석된 바 없다(Booth). 여하튼 이 둘은 동일인물일 필요도 없으며 실제에 있어서 흔히 동일인물이 아니다.
내포작가는 화자와도 구별된다. 화자는 서술하는 <목소리> 또는 <발언자>라고 밖에는 정의할 수 없지만 내포작가는 목소리가 없고 말이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포작가는 텍스트의 모든 성분으로부터 독자에 의하여 추측되고 집성된 하나의 구성물로 보아야 한다.
태백산맥의 전편에 걸쳐서 빨치산들의 투쟁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그 어떤 시선을 만날 수 있다. 그 텍스트 안에서만 살아 있는, 그 텍스트의 전편에 두루 펼쳐져 있는 그 시선의 임자, 작가 조정래가 아니지만 실제작가를 <대표하는>, 그 인물이 내포작가이다. 실제작가는 반공주의자이어도 괜찮다. 작가는 실인생에서의 것과는 다른, 또는 대립되기까지도 하는, 사상이나 신념이나 정서를 작품 속에 구체화할 수도 있다. 그는 또 작품에 따라서는 또 다른 사상이나 신념이나 정서를 구체화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육신을 가진 실제작가는 실인생의 여러 가지 변화에 지배를 받지만 어떤 특정한 작품의 내포작가는 안정된 실체, 이상적으로는 그 작품 내에서 시종일관하는 실재로서 파악된다.
조정래가 국가보안법으로 고발되었다. 태백산맥에 그려진 내포작가의 용공성의 책임을 실재작가인 조정래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작가인 조정래가 아니었으면 그 내포작가는 탄생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실제작가와 동일인물인가? 그는 무죄였다. 그러나 몇 해 전 마광수와 장정일이 음란물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고 하여 실형을 받았다. 그 음란의 실제인물은 실제작가인가 아니면 내포작가인가? 물론 내포작가이다. 그러기에 문학의 표현상의 문제일 뿐이라고 변호했지만, 법원은 텍스트 속에서만 실재할 뿐 현실세계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내포작가를 잡아넣을 수 없으니 그 글을 쓴 실제작가라도 잡아 형을 살게 하는 야만을 저질렀다. 마광수나 장정일이 실제로 음란한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이 소설이 아닌 다른 대중매체에 드러나는 것을 보면 그들은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더 청교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체트먼의 도식에서 내포작가의 맞은편에 있는 내포독자란 무엇인가? 내포독자의 개념은 우리의 독서경험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독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텍스트에 빠져 감정상 여러 가지 변화를 겪는다. 『태백산맥』을 몰입해 읽을 때, 독자가 빨치산들의 주장과 삶의 태도에 동감했다고 하여 독서가 끝난 후 독자가 친공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는 독서가 끝난 후 바로 현실세계의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기독교 신자가 아랍문화의 작품을 읽으며 그 세계에 빠져 있다가도 현실로 돌아오면 언제 그러했냐는 듯이 그는 여전히 기독교인이다. 영화관에서 영화에 빠져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영화 속의 시간과 장소에서 울고 웃고, 마음 조였다가 극장을 나오면서 현실의 나로 되돌아온다. 텍스트에 빠져 흥분했던 바로 그 내가 내포독자이다. 내가 흥분하고 동감을 표시했던 것은 무수히 많은 경험과 사고(思考) 등에 의해서 형성된 나의 가치관 중 그 어느 하나가 내포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주장 또는 어느 느낌에 동의했던 것에 불과 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포독자와 실제독자가 엄연히 구분되듯이 텍스트 속에서만 사는 내포작가와 텍스트 밖에 사는 실제작가는 엄연히 구분된다는 것이고, 그 어떤 서사물에서도 이것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 속에서의 나는 실제의 나인가
서사물에서 실제작가와 내포작가의 문제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 반면에 시에선 실제시인과 화자와의 관계에 더 주목해 왔다. 짧은 길이인 시에서는 대부분은 화자에 의해서 내포작가의 성격과 의도가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의 시에서 내포시인과 화자는 동일시(同一視)되어도 큰 무리 없이 이해되기 때문이다(내포작가〓화자). 수필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시와 수필은 소설이나 희곡에서처럼 타자(他者)를 모방하는 장르가 아니라, 시인(수필작가)이 직접 등장하여 자기의 사상이나 감정을 토로하는 장르라는 표현론적 관점이 오랫동안 지배해 왔기 때문에 화자와 시인(수필작가)의 관계를 재정립한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로 받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수필에서의 관계는 어떠할까?
수필이란 작가가 체험한 사실이나 감정을 고백하는 장르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경우, 수필의 화자는 작가 자신인 일인칭인 ‘나’다. 여기에서 문제는 화자인 내가 과연 실제의 나(실제작가)이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필에서의 화자인 ‘나’는 작가 본인인 실제작가로 의심 없이 인식되어 왔다. 내가 겪은 바를 글로 쓴 것이므로 ‘나’는 당연히 실재의 나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이다. 여기에서 한국수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발생했다. 고백의 문학 장르라고 하지만 정작 고백해야 할 내용은 자기의 모습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아 차마 고백하지 못한다.
현대시론에서는 시인이 서정적 자아를 자기로 하여 자기가 겪은 바를 노래했다고 하여도 그 서정적 자아를 실제시인으로 보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왜냐하면 그 서정적 자아는 실제보다 윤색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필 속의 내가 나의 실제의 모습보다 더 지성적이거나 더 사색적이거나 더 합리적이거나 더 도덕적이거나 더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이거나 하지 않던가? 그 내가 과연 실제하는 나인가? 아니다. 나보다 더 잘난(또는 드물게 더 못난), 윤색된 나이다. 나의 대자적 존재이다. 내가 아닌 나이다. 나의 어떤 면을 극대화시킨 나이다. 3인칭으로 객관화시킨 나인 그다. 그 나는 텍스트 속에서만 살아 있는 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그 나를 텍스트 밖으로 끌어내어 나의 실재의 모습이라고 우겼던 것이고 이제는 그를 그의 집인 텍스트 속으로 보내 주어야만 한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췄을 때,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아무리 나를 닮았다고 해도 그는 거울의 평면에 납작하게 비친 나이다. 우리는 거울 속의 상이기에 의심 없이 나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 보면 그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거울에 따라 내 모습이 얼마나 변하던가. 옷 장사가 보여 주는 내 모습은 항상 더 늘씬해 보인다(과연 볼록거울이나 오목거울에 비친 나를 어디 나라고 말할 수 있던가). 그 상象은 나의 상像이지만 분명 거울 속에서만 살아 있는 나이다. 악수하자고 오른 손을 내밀면 그는 왼손을 내밀어 결코 나와 악수할 수 없는, 내가 아닌 나의 상이다. 절대로 거울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거울 속에서 사는, 나를 닮은 또 다른 인물이다. 이때의 ‘거울 속’은 ‘텍스트의 세계’를 은유한 말이다.
수필 속에 나타나는 ‘나’는 실재의 내가 아니라 텍스트의 주인공인 ‘나’다. 등장인물인 ‘나’다. 3인칭인 ‘나’다.
수필 속의 현실은 텍스트 속의 현실
이제 우리의 논의는 다시 텍스트로 돌아왔다.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의 법칙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했다. 흔히 소설가들이 자기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가는 대로 그냥 따라갔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텍스트는 자생하는 유기체인 것이다. 수필의 작품세계는 실재하지만 실제가 아닌, 그 자체가 완벽한 또 하나의 살아있는 세계인 텍스트인 것이다.
‘실제의 나’와 ‘텍스트속의 나와의 거리두기’. 다시 말하면 실제작가와 화자(내포작가)와의 거리두기. 어떤 의미에선 이 둘 사이의 알맞은 거리를 인식하는 능력이 수필작법의 시작이고 끝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수필의 작품 세계는 내가 경험한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니라는, 거울 속으로 들어가 버린 다른 현실이라는 것이다. 텍스트 속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텍스트란 분명 내가 만든 것이지만 결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의 힘과 질서에 의해서 자생하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화단에 이 꽃 저 꽃을 내가 심었지만, 그 꽃들은 빛과 물과 공기에 의해서 자력으로 나름대로 성장하여 서로 갈등하고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화단이 되는 것과 같다.
결론
어쩌면 우린 괜히 어렵게 너무 많은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수필가들이 생각해 왔듯이 수필에서 화자인 ‘나’는 실제의 작가인 나라고 하자. 그러면 우린 ‘나’를 정확히 그리고 있는가? 포스트모던의 시대에서 나란 누구인가? 현대에서 인간이란 한 마디로 욕망하는 주체다. 욕망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결핍에서 온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결핍의 덩어리이다. 우린 결핍의 날 그린 적이 있었나? 어그러진 나, 미끄러지는 나를 그렸는가? 지금까지 수필에서 ‘나’는 완성된 인격체로 다루어졌다. 우리가 그리고 있는 인물은 현대인이 아니라 충일한 삶의 조건을 가진 농경시대의 인물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린 현대인의 소외를, 불안과 초조를 그리지 못했다. 현대인의 천박함을 그리지 못했다. 현대를 지배하는 신은 물신(物神)이다. 교회에 가서 절에 가서 성당에 가서 물질적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물신을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린 그 물신의 자식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리지 못했다. 현대인은 다중인격자다. 그 현대인이 누군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인가? 아니다. 바로 나다. 수필의 화자인 바로 ‘나’다.
언제 수필에서 ‘나’를 욕망과 결핍의 덩어리로 해부하듯 다루고 있는 작품이 있었을까?
나는 그 흐름을 요즘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읽고 흥분한다. 그들은 충만한 삶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그 상처의 고백이 그를 구원하고 그런 상처를 안고 있는 많은 독자를 구원한다(이귀복, 김종길, 안정혜의 특집).
김병기가 <잠재>: 내 속에 있는 폭력성을 고발했다.
이혜숙의 <태양초>: 핵가족화 사회에서 노인의 죽음에 대한 자기 고발
“나”란 다중 인격물이다. 욕망하는 자아. 결핍의 덩어리다. 수필쓰기란 그 결핍을 끝끝내 물고 늘어져 그 상처의 치유책을 스스로 찾는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의 갈등을 실감나게 그리자. 실감나게 그리기 위해서는 문학의 접근법이 달라져야 한다. 문학은 ‘어떻게’의 문제가 아니라 ‘왜’의 문제다. 심층적 사회과학적 심리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감성만으로 글을 쓸 생각을 버려라.
지금 수필에서 가장 긴급한 문제는 리얼리티의 확립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문으로부터의 탈출해야 한다. 그리고 수필가들의 대책 없이 마냥 착하기만 하는 착한시선의 극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