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이화여대 김세희 강사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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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8:22-31의 의인화된 지혜의 정체는 무엇인가
"Anat as a Precursor of Lady Wisdom in Proverbs 8:22-31”
Boston University School of Theology, 2020
1. 필자가 박사 논문 주제를 정하게 된 것은 박사 과정 2년 차에 캐서린 다(Katheryn P. Darr) 교수의 ‘잠언’ 수업을 들으면서이다. 그전까지 에스겔서를 주요 연구 분야로 하고 있던 다 교수는 당시 시니어 시기를 지나며 ‘속담 퍼포먼스’(Proverb Perfomance)라는 분야에 심취하여 화자와 청자, 그 사이에 행해지는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잠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잠언 퍼포먼스를 보며 그렇지 않은 본문이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게 되었다. 주로 어머니가 젊은 아들에게 주는 교훈책이라고 알려진 잠언에 굉장히 다채로운 본문이 등장한다는 점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잠언 8:22-31의 의인화된 지혜는 가장 흥미로운 주제였다. 잠언 8장에서는 ‘지혜’가 사람처럼 움직이고, 말을 하며, 의미심장한 내용의 자기 제시(self-presentation)를 한다. 내용은 더욱더 신비롭다. 잠언의 다른 부분과는 매우 다른 원시적인 분위기로 창조 시기에 하나님이 지혜와 세상을 창조하신 일 그리고 그 창조 시기에 지혜가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했는지를 그려내고 있다. 필자는 이 본문이 흔히 잠언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지혜’뿐 아니라 창조의 세계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이뿐만 아니라 의인화되고 여성형 명사이면서 굉장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잠언 8장의 지혜를 보면서 고대 근동의 신화 속 여신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필자의 순수한 흥미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여태까지의 의인화된 지혜에 대한 연구사를 탐구하게 하였고, 필자는 그러한 유의미한 연구들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태껏 거론되지 않은 우가릿 여신 ‘아낫’(Anat)을 그 문학적 정체성의 모델로 제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필자의 박사 논문을 살펴보겠다.
2. 논문 1장에서는 먼저 여태까지의 의인화된 지혜에 대한 연구사를 짧게 담았다. 의인화된 지혜의 정체성이나 혹은 그 모델에 대한 연구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1) 의인화된 지혜가 순수한 문학적 창작물이라는 주장, 야웨의 위격이라는 주장, 포로기 이후 실제 고위층 여성의 초상이라는 주장, 메소포타미아 현자인 우마누(ummânu)라는 주장, 고대 근동 여신(아스타르테, 아세라, 마앗 혹은 이시스)이 그 모델이라는 주장이다.
필자는 지금껏 거론된 많은 이론이 숙녀지혜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는 크게 공헌하고 있지만 그중 하나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우며, 또 의인화된 지혜가 비단 어떤 한 존재나 텍스트에서만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전제하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위의 다섯 번째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바로 잠언 8장이 우가릿의 문헌, 바알 신화(Baal Cycle)와 많은 요소를 공유하고 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잠언 8:22-31에서 나타난 의인화된 지혜의 역할이 우가릿 여신 ‘아낫’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다는 점이다.
의인화된 지혜는 일반 히브리어 명사 ‘지혜’(호크마)와 동일한 형태로 쓰여 있으며, 우리말 성서에서는 단순히 ‘지혜’라고 번역된다. 대명사로는 보통 ‘그녀’가 아닌 ‘그’라고 칭하여 ‘의인화된 여성형 지혜’라는 것을 일반 독자들이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학계에서는 보통 그 지혜를 공통적으로 ‘의인화된 지혜’(personified Wisdom)라고 칭하고 ‘지혜’가 히브리어로 여성형이기 때문에 ‘여성지혜’(Woman Wisdom), ‘숙녀지혜’(Lady Wisdom)라고도 부른다. 필자의 논문에서는 의인화된 지혜가 아낫이라는 여신과 많은 문학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의인화된 여성형이지만 ‘사람’보다는 더 권위를 가진 어떤 특정할 수 없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의인화된 지혜를 ‘숙녀지혜’라고 칭하고 있다.
3. 논문 2장에서는 의인화된 지혜와 관련된 구약성서 구절, 즉 잠언 1:20-33, (3:19-20), 8:22-31, 9:1-6, (욥기 28장)에 대해 살펴본다.1 잠언 1장에서 숙녀지혜의 등장은 강력한 첫인상을 남긴다. 여기에서 숙녀지혜는 성문에 나타나 ‘나이브한 사람들’에게 부르짖으며 ‘언제까지 단순할 건지’ 책망한다. 1:29의 ‘여호와 경외’는 잠언 전체의 모토인데, 이 주제는 1:7에 이미 먼저 등장했다.(“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이는 잠언의 첫 번째 섹션인 1-9장뿐 아니라(1:7, 9:10) 잠언 전체를 감싸는(1:7, 31:31) 주제이다.
잠언 3:19-20은 지혜가 직접 의인화되어 나오지는 않지만, 숙녀지혜와 창조의 연관성을 살펴볼 때 빼놓을 수 없는 본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잠 3:19-20)
여기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묘사하는 데에 쓰인 동사들은 주로 집이나 건물을 지을 때,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가장 커다란 프로젝트인 천지창조에 쓰이는 동사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집을 짓는 개념과 가깝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후 잠언 8:22-31과 9:1-6이 연결되는 부분에서 더 자세히 드러난다.
학자들은 대부분 잠언 8:22-31의 창조에 관한 시가 편집자에 의해 삽입되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8장의 나머지 부분과 그 스타일, 내용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둔 이유인지, 칠십인역은 특별히 21절에 ‘만일 내가 너희에게 날마다 일어나는 일을 선포하려면, 나는 매우 오래된 일을 잊지 않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라는 의미의 구절을 삽입함으로써 22-31절의 시가 21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보일 수 있도록 했다. 앞선 잠언 8:1-21에서 지혜가 다시 한번 교차로와 높은 곳 그리고 성문에서 사람들에게 연설하던 분위기와 다르게, 22-31절에 나오는 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며 창조 당시 자신이 어떠한 존재였는지 말해준다. 이곳에서 지혜는 본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선포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가 태초에 세상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에게 지음을 받았고(22-26절), 또한 ‘창조자’(아몬)2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는 것이다(30-31절). 이는 실로 대단한 선언이다. 왜냐하면 지혜의 창조가 세상의 창조보다 앞섰다는, 그 선재성에는 엄청난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히브리어 ‘아몬’이라는 단어의 번역에 대해 필자는 ‘장인’을 선호하는데, 어떠한 형태이든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며 기뻐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살펴볼 바알 신화의 시놉시스와 연결되는 부분이 많다.
잠언 8:22-31의 태초의 원시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9장에서 숙녀지혜는 집을 짓고 나이브한 사람들을 그녀의 잔치에 초대한다.(9:1-6) 지혜가 집을 짓는 모습은 잠언 24장에도 등장한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잠 24:3-4)
흥미로운 점은 잠언 24:3-4는 앞서 살펴본 잠언 3:19-20과 구조와 어휘에서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창조(3장)와 집 짓는 것(24장)이 유사한 어휘와 내용, 구조를 지니는데, 이 둘이 구약성서에서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된 개념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욥기 28장을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여기는데, 욥기 28장에는 잠언에서 본 익숙한 어휘들, 즉 “지혜와 명철”의 페어링(짝, 12절), 태초에 관한 어휘들(14절), 금과 은 그리고 다른 보석들(15-19절)에 대한 어휘가 등장한다. 사실상 이곳에는 문자 그대로 지혜의 의인화된 모습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학자들이 이 본문을 의인화된 지혜와 연결하는 이유는 함께 등장하는 ‘깊은 물’(14절), ‘멸망’(22절), ‘사망’(22절) 등 주로 태초와 관련된 추상명사가 의인화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28절)에는 잠언에서 숙녀지혜가 한 선포가 그대로 재현된다.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이를 통해 욥기 28장이 잠언의 창조 전통, 그리고 숙녀지혜와 그 개념을 긴밀히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언 8:22-31과 욥기 28장이 각각의 책에 삽입된 사실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두 본문은 굉장히 분위기가 비슷하다. 시의 형태이고, 굉장히 원시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아마도 나머지 문서보다 더 오래된 운문의 형태라고 추정된다. 오래된 창조전통인 만큼 비신화화 과정이 덜 된 본문일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고대 근동의 다른 본문들과 비슷한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4. 논문 3장에서는 잠언 8:22-31과 바알 신화의 연결고리라고 볼 수 있는 창조와 카오스캄프(Chaoskampf, 신들과 괴물들의 싸움)에 대해서 기술한다.
구약성서의 창조전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은 단연 창세기 1:1-2:4a일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지만, 사실 어휘적인 면이나 주제적인 면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보기는 어렵다. 창세기 1:2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구절이 마치 하나님의 창조 활동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느껴지게 만들지만, 사실 히브리어 토후와 보후는 ‘무(無) 혹은 비어 있음’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들의 함축된 의미는 ‘형태나 질서가 없음’이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뒤에 등장하는 구절,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도 비슷한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여기에서 어둠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반절에 등장하는 테홈은 “깊은 지하의 물, 원시 바다 그리고 심연”을 의미하는데 구약성서에서 테홈은 정관사가 붙지 않는다. 이는 테홈이 에누마 엘리시의 어머니이신 티아마트에서 유래되어 고유명사로 취급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혼돈’, ‘공허’, ‘흑암’ 그리고 ‘깊음’ 모두 활동적이고 부정적인 것이어서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제압해야 할 존재들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를 다시 해석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위대함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강력한 것들을 제압하고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그 힘을 증명하고 세상을 창조하신다.
시편에 있는 창조전통에는 훨씬 더 원시적이고 자세한 카오스캄프적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편 104:26에 바다 용 리워야단이 나오는 부분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리워야단은 구약성서 중 오직 운문에서만 등장하는데(욥 3:7, 41:1, 시 74:14, 사 27:1) 그것은 운문이 더 원시적이고 우가릿 전통과 더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시편 104:24에서 우리의 담론과 깊게 관련된, 즉 지혜와 관련된 부분을 볼 수가 있는데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라는 이 구절은 다시 한번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의 도구로 쓰인 잠언 3:19-20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시편 74:13에서는 리워야단 외의 다른 용들이 등장한다. 결국 하나님은 바다와 리워야단 그리고 용들을 물리치신 후 왕위에 등극하신다.(시 29, 93편 참고)
5. 논문 4장에서는 바알 신화와 우가릿 여신 아낫에 대해 소개한다. 바알 신화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바알의 왕권 획득, 계절의 변화 그리고 세상의 창조이다. 바알 신화는 내용상으로 크게 세 부분 ‘바알과 얌’(KTU3 1.1-2), ‘바알의 집’(KTU 1.3-4), ‘바알과 모트’(KTU 1.5-6)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비의 신 바알과 바다의 신 얌의 전투이다. 바알과 얌은 둘 다 엘의 아들이다. 그때까지 세력을 잡고 있던 얌은 기술의 신, 코타르와하시스에게까지 도움을 받아서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바알에게 지고 만다. 두 번째 부분은 바알이 얌과 리워야단, 그 밖의 바다 용들을 이기고 나서 연회를 열고 바알의 집을 짓는 내용이다. 바알은 다른 신들 위에 가장 높은 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집이 없었다. 그래서 누이인 아낫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이자 최고 신인 엘에게 집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받는다. 또한 코타르와하시스와 아낫의 지극한 도움을 받아 집을 완성한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바알이 죽음의 신인 모트에게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때에도 역시 아낫은 그녀의 형제를 구하기 위해 죽음의 세계에까지 가서 모트를 처단하고, 마침내 살아난 바알은 모트와 다시 싸워서 결국 왕위에 오른다.
바알 신화에서 아낫의 비중이 너무도 커서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바알-아낫 신화’라고 제목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낫은 바알의 집을 지을 권한을 얻기 위해 아버지 엘을 찾아가 심지어 협박하고, 또 죽음에서 바알을 구해낸다. 분명 아낫은 바알이 집을 짓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아낫이 창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알 신화에서 아낫은 바알의 훌륭한 창조 조력자이자 동시에 죽음에서 바알을 구원한 구원자이다.
바알 신화와 구약성서의 창조전통에서 바다(얌), 리워야단 그리고 용들을 물리치는 카오스캄프적 요소를 살펴본 뒤 다시 잠언의 창조전통으로 돌아오면, 8:22-31에도 비신화화된 싸움의 흔적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핵심 구절은 8:29의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인데, 이곳에서는 하나님이 ‘물들’을 제압하여-그 자세한 방식이나 전투가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그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앞서 살펴본 시편 104편이나 74편에서는 리워야단 혹은 용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지만 여기에서는 원시적인 카오스캄프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바다를 향한 하나님의 압도적인 권위가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비교적 정적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재료로 ‘물들’을 사용하는 창세기 1:1-2:4a보다는 하나님과 물들의 관계를 ‘제압하는 자와 제압당하는 존재’로 풀어내고 있다.
6. 논문 5장에서는 아낫과 숙녀지혜가 공유하는 요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먼저 아낫과 숙녀지혜는 둘 다 ‘샘’과 연결되어 있다. 아낫은 우가릿어로 ʿnt인데, ‘눈’ 또는 ‘샘’을 의미하는 여성명사 ʿn의 복수형이다.[이는 히브리어 아인에 상응한다.] 여신 아낫은 우가릿 문헌에서 ‘샘’과 연결되기 때문에, 아낫의 이름은 ‘샘들’이라는 뜻이 유력하다.(KTU 1.3.IV.42-44, 1.3.II.38-41). 지혜의 ‘샘’과의 연결은 구약성서와 제2경전에 잘 드러나 있다.(잠 18:4, 집회 15:3) 숙녀지혜는 사람들에게 그녀가 제공하는 음식과 물을 취하라고 권면하며, 집회서에서는 심지어 그녀 자신을 마시라고 권면한다.(집회 24:19-22) 샘물은 구약성서와 고대근동 문헌에서 제압해야 하는 악인 바닷물과는 반대적 개념이다. 샘물은 사실상 생명의 근원이며, 그러므로 지혜는 생명을 의미한다.
다음은 세상의 창조에서 바알 신화에 등장하는 기술신, 코타르와하시스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이는 단어가 잠언 8장에 ‘아몬’(창조자/장인)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알 신화에 등장하는 기술신 코타르와하시스는 이름 자체가 의미하듯이 ‘숙련되고 지혜로운’ 신이다. 바알 신화에서 그는 바알의 집에 창문을 내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창문은 세상의 창조와 연관되어 바알의 비가 땅으로 흡수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코타르와하시스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바알과 함께 세상을 창조한 동료였다. 잠언 8:30에 나오는 ‘아몬’은 굉장히 방대하게 연구된 단어인데, 그 이유는 이 단어가 구약성서 중 이곳에서 단 한 번 쓰인 데다가 그 뜻이 명확하지 않고, 그 의미의 모호성에 반비례하게도 숙녀지혜가 본인의 결정적인 정체성을 이 단어에 함축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혜서 14:1-4에서는 후대에 어떻게 숙녀지혜에 대해서 해석하고 있는지 엿볼 수가 있는데, 14:2에서는 “배란, 이득을 추구하는 욕심이 생각해내고 조선공의 지혜가 만들어낸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장인’, ‘디자이너’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테크니티스(τεχνῖτις)로 숙녀지혜를 표현했다. 바알 신화의 코타르와하시스와 아낫은 다른 캐릭터이지만, 세상 창조 시 ‘건축가/조력가’로서의 콘셉트를 바알 신화와 잠언 본문이 공유한다는 사실은 간과할 만한 점이 아니다.
바알 신화와 잠언 9:1-6은 ‘집을 지은 후 연회’ 테마를 공유한다. 바알 신화에서는 여러 번(KTU 1.1.IV.2-35, 1.3.I.1-28, 1.4.VI.38-59) 전쟁에서의 승리와 바알 집 완성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를 벌이는데, 우가릿 연회의 세 단계는 바로 “음식의 준비, 손님 초대 그리고 식사”이다. 바알은 집을 지은 후 직접 음식을 준비하고, 친척 신들을 초대하고, 함께 음식을 먹는다. 잠언 9:1-6의 연회에서도 같은 공식을 볼 수가 있다. 첫째, 숙녀지혜는 음식과 와인을 준비하고, 둘째, 그녀는 손님을 초대하기 위해 여종 7명을 보내며, 마지막으로 손님들에게 음식을 권한다. 어휘적으로 숙녀지혜의 집 짓기와 연회 때 쓰인 히브리어, 바나(짓다), 타바흐(잡다), 카라(부르다)가 바알 신화의 우가릿어와 일치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한 가지 중요한 다른 점은 숙녀지혜가 초대한 특별한 손님인데, 그녀는 귀한 연회에 ‘어리석은 사람들’을 초대한다. 이는 그녀가 잠언 1:20-33에서부터 가져오는 주제로, 그녀의 주요 타깃은 권면해도 듣지 않은 나이브한 사람들이다. 숙녀지혜는 그들이 그녀가 준비한 음식을 먹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성숙해지기를 바란다.(9:5-6)
7. 논문 6장에서는 경계성 존재로의 아낫과 숙녀지혜의 의미에 대하여 서술한다. 숙녀지혜는 잠언 1장과 8장에서 ‘성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연설하는데, 고대 근동에서 성문은 공통적으로 사회, 정치,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우가릿 문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KTU 1.119.26-36, 1.14.V.3-8) 이처럼 숙녀지혜는 마을에서 가장 중요하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성문을 골라 연설을 한다.
또한 성문의 경계에서 나아가, 아낫과 숙녀지혜 모두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하다. 아낫은 앞서 살펴봤듯이 ‘샘’ 그 자체로서 모든 생물체에게 생명을 뜻하지만, 그녀의 형제인 바알을 구하기 위해서 죽음의 세계로 넘어가 전투를 벌인다. 그녀의 전투는 비단 바알만 구한 것이 아니라, 바알과 함께 만든 세상을 함께 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삶과 죽음을 둘 다 통제하며, 그 어느 지경에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다.
숙녀지혜도 마찬가지로 삶의 세계와 그 지경 너머의 어떠한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로 보인다. 욥기 28:22에서 살펴보았다시피, 그녀는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다. 인간들이 삶의 세계에서 그녀를 찾을 수 없지만, 멸망과 죽음은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그녀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있지만, 적어도 그녀가 어떤 한 곳에 속해 있지 않고 어떤 두 지경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처럼 숙녀지혜는 하나님과 인간 세계를 이어주고, 또한 삶의 경계를 넘나든다.
8. 논문 7장(결론)에서는 숙녀지혜의 정체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해본다.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단 하나의 모델을 통해 숙녀지혜의 기원이나 정체성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연구가 방대해질수록 후보는 하나로 좁혀지지 않고 늘어날 뿐이다. 우가릿 여신 아낫은 그동안의 구약성서 연구에서 숙녀지혜와 관련해서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그동안 바알 신화가 성서 전통에 끼친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 히로인인 아낫에게 많은 관심을 두지 않은 점은 매우 의아한 일이다. 살펴보았듯이 바알 신화와 성서의 창조전통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히로인인 아낫과 숙녀지혜의 연결은 한번쯤 생각해볼 만하다.
의인화된 지혜는 구약성서에서 특별한 존재이다. 창조와 지혜를 이어주는 존재, 창조 당시 하나님을 돕던 존재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존재이다. 만약 숙녀지혜를 하나의 역할로 설명한다면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누군가는 그녀를 ‘선생’으로, 누군가는 ‘여선지자’로 정의한다. 필자는 그녀의 역할을 ‘선포자’라고 정의하고 싶다. 잠언에 수많은 가르침이 나오지만 사실 숙녀지혜는 우리에게 그다지 자세한 가르침을 주지는 않는다. 그녀는 다만 크게 두 가지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하나는 ‘여호와 경외’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 두 가지를 강조하기 위해 분노를 표출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며, 심지어 경고를 듣지 않을 시엔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그녀는 특별히 나이브한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외친다. 그녀를 따르는 자에게는 생명이 주어질 것이다.
9. 필자가 다룬 의인화된 지혜를 요한복음 1장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전통적인 해석이 아직도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지배적이라는 것을 귀국 후에 깨닫게 되었다. 두 본문의 유사성은 분명히 존재하고 필자 또한 두 본문을 함께 묵상하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잠언 8장의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장과 잠언 8장의 관계를 굳이 말한다면, 필자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잠언 8:22-31의 시의 존재를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도로 언급하고 싶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필자는 이 논문을 의인화된 지혜의 정체성에 대한 수많은 연구에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라고 여긴다. 또한 잠언 8장의 지혜가 고대 근동의 여신들을 닮았다고 해서 결코 이 지혜가 고대 근동의 여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신 의인화된 지혜는 비신화화가 덜 된 오래된 운문의 문학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지혜에 대한 숭배나 예배의 흔적이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성서의 야웨가 바알과 엘 등 고대 근동의 위대한 신들의 특성을 많이 닮았음을 인정하듯, 이 본문의 지혜도 “고대 근동 문헌들과 비슷한 요소를 공유할 수 있겠다” 정도의 끄덕임이 있다면 필자의 논문은 그걸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註)
1 개역개정의 번역이다. 새번역에서는 “창조의 명공”, 공동번역개정판에서는 “조수”로 각각 번역되어 있다.
2 의인화된 지혜는 제2정경인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에도 등장한다. 이 문장에서 괄호 친 구절들은 의인화된 지혜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지만, 본문에서 분명하게 의인화된 형태를 보이지 않는 구절을 뜻한다.
3 ‘KTU’는 ‘Keilalphabetische Texte aus Ugarit’의 줄임말이다. 우가릿의 쐐기문자를 영문 음가로 음역한 우가릿 텍스트 본문이다.
4 J. B. Lloyd, “The Banquet Theme in Ugaritic Narrative,” UF 22 (1990): 170.
김세희|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B.A.), 하버드 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한 뒤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기독교학과 소속 강사로, 대한성서공회 성서번역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