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한 시옷/이병룡-
빛 사라지고 맨몸 드러나 모두가 절망이라고 돌아설 때,
날마다 허리가 짧아지고 키가 줄어드는 그림자는 불투명을 겹쳐놓느라 각도를
시옷에 맞추지
음지 안으로 들어와 그림자를 밟아봐
분신이 노출되면 붉게 타버리니까 은밀히 밟아봐
얼마 전에는 빛으로 나갔다가 낡은 이념이 뭉개지는 운동권의 슬픔을 보았어 아
주 오래전에는 7번 시다 3번 미싱사 1번 오야로 이어지는 노동의 방식에 맞서던
앳된 여공이 지하실 음지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어
그런데 그 기억이 왜곡되어 내가 시옷의 그늘로 끌려가는 거야
새들은 제 불투명이 싫어서 투명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는 거야
제 심장을 부여잡고 투명해지고 싶은 거야
가장 투명해졌을 때,
서로가 포개져 사이시옷처럼 물들을 때, 핀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닐 때 아이들은
휘청거리는 거야
다들 하늘로만 뻗어가면 시옷의 밑바닥은 어떻게 지탱하라고, 다들 빛으로만 나가
면 시옷에서 자란 아이들은 슬픔밖에 더 배우겠어
슬픔은 청보리밭 물결처럼 누워버리지 않겠어
시옷의 밑바닥 본 적 있어?
물결의 밑바닥 본 적 있어?
슬픔과 불투명을 사이시옷처럼 이어주는 오월 청보리밭 이랑에 멈춰 서 있다 물결
도 벗어나지 못하는 시옷에 갇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