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편지] 32. 거미 – 날씨가 더울수록 활개 치는 동물
날씨가 더울수록 활개 치는 동물이 있다. 거미. 이놈들의 번식은 참으로 대단하다. 지금 내 방에는 거미 한 열대여섯 마리 정도가 천장에 거미줄을 쳐 놓고 서식 중이다. 한 평짜리 방의 상층부는 거의 거미가 장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거미가 이렇게 많게 된 것은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사실 조금 게으르지만) 그놈들을 차마 죽이지 못해서 내버려 두었더니 그리된 것이다.
오늘 나는 엄청난 거미 살육을 하고야 말았다. 태풍이 분다고 해서 청문을 끼려고 창틀을 청소하다가 창틀의 오목진 곳에 거미줄로 칭칭 감긴 고치 같은 게 붙어 있길래 무심코 확 잡아 뜯었더니 우수수하고 마치 명태알처럼 생긴 거미알 수백 개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휴지로 쓸어 담아 버렸지. 자세히 보니 그런 게 또 하나 있길래 역시 휴지로 싸서 버렸다. 그런데 그 옆에 또 하나가 있었다. 손으로 뜯어보니 이번엔 알이 아니라 이미 부화 된 새끼거미들이 새까맣게 엉겨 있는 것이었다. 부화 된 지 얼마 아니 된 듯 알에 다리만 붙어 있는 형상이었다. 이놈들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꽁무니에 거미줄을 붙여서 바둥대는데 참으로 가관이었다. 이 엄청난 수의 새끼거미를 놔주었다가는 내 잠자리가 엉망이 될 것 같아 할 수 없이 또 휴지로 싹 닦아 내었다. 이렇게 해서 난 오늘 수백 마리의 새끼거미들을 살육했던 것이다. 제발 오늘 밤 꿈자리가 사납지 말아야 할 텐데…….
요즘 내 방에 붙어 있는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창문을 보고 있노라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야말로 먹고 먹히는 살육전이 벌어지는 삶의 전쟁터이지. 저녁 어스름이면 낮에 창살 구석에서 쉬고 있던 거미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제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자리에 집을 짓는다. 많이 칠 때는 2제곱미터의 공간이 빽빽할 정도로 치니 가히 우리 방의 방공망은 완벽하다 할 수 있지.
신기한 것은, 거미들은 결코 남의 집 앞에 얌체같이 자기 집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큰 놈 둘이 마주치면 집짓기 전에 자기들끼리 싸워서 그중 이긴 놈이 좋은 자리에 집을 짓는다. 그러면 작은 거미들이 나머지 공간을 제각각 차지한다. 거미들이 어떻게 하여 날벌레들이 가장 잘 다니는 코스를 골라서 그 자리에 정확히 집을 짓는지 그 측량 기술이 신기하기만 하다.
이렇게 거미줄을 완전히 쳐 놓으면 눈먼 날벌레들이 내 방의 형광등 불빛을 보고 달려들다 죄다 걸려들고 말지. 물론 재주 좋은 놈들은 곡예 하듯이 거미줄 사이를 넘나든다. 날파리나 하루살이 따위가 걸려들 때마다 창살에 이마를 기대고 들여다보면 거미란 놈들은 참으로 잔인하고 게걸스럽기 짝이 없다. 먹이가 잡혔다 하면 거미줄로 돌돌 말아 꼼짝 못 하게 해 놓고는 대개는 꽁무니 쪽에다 주둥이를 들이박고 쭉쭉 빨아 먹는데, 어떨 때는 자기 몸집보다도 큰 노린재 따위도 겨우 몇 분 사이에 속을 다 빨아 먹고 껍데기만 남길 정도야.
내 방에는 창문과 시찰구에 모두 방충망을 해 놓아서 날것들이 별로 들어오지 않지만 그것이 그다지 튼튼하지 못해서 가끔가다 풍뎅이나 날개미, 노린재 따위가 방충망 틈새를 낮은 포복으로 기어들어 와 활개 칠 때가 있다. 보통은 방충망을 통과한 것이 대견해서 내버려 두지만, 이놈이 겁대가리 없이 내게 달려들어 귀찮게 굴면 할 수 없이 손으로 잡아 방안에 쳐 있는 거미줄 위에 척 걸쳐놓는다. 그러면 거미란 놈이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금세 빈껍데기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니까 내 방 안에 있는 거미들은 내가 고용하고 있는 외부 침입자에 대한 사형 집행인인 셈이지. 그런데 이 고용된 거미들이 나를 귀찮게 하는 때가 종종 있다. 책을 보고 있는데 줄을 타고 쓰윽 내려와서는 코앞에서 아른거리다 올라간다거나, 어떨 때는 집을 짓다 추락하여 내 얼굴을 마구 짓밟고 다닌다거나 할 때이지. 대부분 관대히 보아 넘기지만 내 기분이 영 좋지 않을 때나 좀 심하게 가부는 놈은 내가 고용하고 있는 또 다른 사형 집행인인 사마귀에게 갖다 바친다.
그런데 때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놈을 만나기도 한다. 큰 거미들은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니까 내 앞에서 지나치게 까불다가는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지만,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거미들은 그런 것을 전혀 몰라.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거지. 한번은 진짜 코딱지보다 작은 새끼거미 한 놈이 천장에서 뚝 떨어지더니 내 안경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거야. 그때 마침 나는 책을 읽고 있었으므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내버려 두었지. 한참 있다 보니 이놈이 안경 언저리를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길래 도대체 무얼 하나 하고 안경을 벗어 보았더니 글쎄, 안경다리와 몸체 사이의 각진 곳에다 집을 짓고 있는 게야!
황대권. 야생초 편지. 도솔
황대권은 1955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사회과학대학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제3세계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학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01년 6월 8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국가기관에 의한 조작극이었다고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널리 밝혀졌다. 동생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이어지는 《야생초 편지》는 풀 향기 가득한 식물 일기이고 생명 일기이며, 감옥에서도 자유로운 한 구도자의 사색 일기이고 수련 일기이다. 야생초에 대한 그의 관찰과 연구는 전문가 수준이며, 이 관찰은 식물적인 견해를 넘어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 인간관계에 대한 묵상으로까지 확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