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機械소리를 노래삼아
二等 客車에
佛蘭西 詩集을 읽는 少女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朴正熙 著
'國家와 革命과 나' 에서---
전 육사교장(김충배님)의 편지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을 짊어진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들이여!
여러 분들은 5, 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 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5, 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 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릎쓰고 1억 4000 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명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하루 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 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갔다.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한국을 도와 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미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어디가세요,고향에 가고 싶어요.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앞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3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 소득 170불.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여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 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 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은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가발 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면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www.vietvet.co.kr "살아가는 이야기" #10401 '육사 교장(장군님도 맹호부대 츨신)님의 편지'(2013/9/13)에서 발췌
(전 육사 교장(예- 육군 중장), 평화통일 국민포럼 대표이사장 김충배님이 새마을중앙연수원 초빙강사시 함께)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투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됐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국장병, 열사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 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 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 60대들을 수구세력으로 폄훼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 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낳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 소득 4만불대의 고지달성 때까지는 우리들 신, 구 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길 길이 너무 멀다.이제 우리 모두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 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미국 육군사관학교 '웨스트 포인트' 를 방문했다. 미 육사에서는 외국의 국가 원수가 방문을 하면 몇 가지 특권을 주는 전통이 있다.
그 특권은?
※ 1. 즉석에서 미 육사생들의 퍼레이드를 요청 하든가,
※ 2. 미 육사생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든가,
※ 3. 미 육사에서 주는 선물을 받든가 하는 것이다.
미 육사에서 박대통령에게 특권을 말하라고 하니, (대부분 주로 즉석에서 생도들의 퍼레이드를 요청 하거나, 기념품 등을 받아 가거나, 생도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던 많은 국가 원수들과는 달리)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 교정에서 벌을 받고 있는 생도들을 사면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미 육사 교장은 점심 시간에 이를 생도들에게 "지금 교정에서 학칙 위반으로 벌을 받고 있는 260명의 생도들의 벌을 박 대통령의 요청으로 특별사면 한다"고 특사령을 발표한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미 육사생들은 이 방송을 듣고 일어서서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에 박 대통령도 같은 식당2층에서 점심을 먹다가 일어서서 손을 흔들어 화답 했다. 1965~1970년에 미 육사를 다닐 때 박수를 보냈던 생도들은 졸업 후, 당시에 기피하던 한국 파병 근무를 자원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 육사에서는 박대통령의 사면이 역사적 사실로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 후에도 미 육사를 졸업한 장교는 한국 근무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다.
"새마을운동 50주년을 축하하면서"
내가 "새마을운동" 에 관여한것은 우리 장암동이 마악 고층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던 '93년이었다. 당시 의정부시는 장곡동을 장암동과 신곡동으로 분동하며 입주민중 요리조리 훑어보며 물색하던 통장에게 발각(?)되어 새마을지도자로 시작했던게 지금까지 28년째이다.
그때 장암동 통장대표이던 박병찬통우회장에게 발각 아닌 발탁된게 아직까지 한번도 후회한적이 없을만큼 명예스럽다. 가끔은 시간이 모자라 짜증난적도 있지만 중학시절부터 적십자봉사단장 역임을 비롯 선청적으로 남에게 봉사하려는 내맘은 변함이없다.
언젠가 새마을지회 사무실을 찾아 무엇이던 무료봉사할터이니 아무것이나 맡겨달라고 며칠간을 사무실에 눌러앉아 떼를 쓴적도 있지만 노국장님을 비롯 여사무원들이 달가워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미군무원으로 사무행정(특히 매니저 직책만 23년)본 후 은퇴해 줄곧 회장직을 고사하며 부회장직만 고집한 나이많고 고급인력이란 생각에 내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여담이지만 아무말없이 가장 지저분한 화장실 청소와 주위의 담배꽁초. 쓰레기 치우는일 등을 시작하여 무엇이나 남에게 도움이 되는일이 없을까하고 시작한게 지금은 봉사도하고 용돈도 벌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교회의 관리집사로 자리매김 하고있다.
어쨋던 내가 기억이 남는일은 새마을운동 사업을 하나하나 정성드려 글로 남긴 일천여편이 역사에 남을것이며 특히 문화원에서 시작한 "의정부마을기록자" 중 내가 쓴 25편의 1편인 "박건하이사님의 새마을 활동"(cafe,daum.net/4usmu 자유게시판 #1591(2020/5/15)글이며 1993년 당시 함께 새마을지도자로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봉사하시는 최종대이사님께서 대통령표창을 받으신 점이다.
나역시 그분을 본받아 한번 새마을지도자면 영원한 새마을 가족으로 남아 남은 생, 힘 닫는데까지 봉사하고저 한다.비록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것은 없어도 아빠가 이렇게 세계에서 두번째 못살던 나라를 10위권으로 도약시킨 박정희대통령의 영도아래 새마을운동을 시작했던 1970년이 바로 홍하사는 세계평화와 빈곤탈피를 위해 머나먼 이국땅에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게 자랑스럽다.
(맹호 1연대 1대대 2중대 1소대 3분대장 시절 - 각자 수류탄 4발, 수통만 서너개씩 갖고다님)
홍집사는 저 윗글 박대통령의 "땀을 흘려라~ " 와 일맥상통한 글이지만 평소 무척 즐기는 성경구절이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던 먹지도 말게하라" (살후 3:10)
첫댓글 10교구의 백덕기권사님이 첫아들 징가보내는 시간(2020/12/5일 오후 5시) 홍집사 근무라 못가지만(뱐포 예식장)항상
우리가 순찰도는 마지막 집(초원가든)이라 커피와 사이다도 한잔씩 주시던 사장님이셨는데~(윗글 회장님(80세)께도
저와 같이 허리수술로 심 6개 박음)같은 농협임원이셨고 친했지요. 오늘도 통화했는데 또 병원에서 수술을 하셨데요.
코알라
21.01.05 15:41
(2015/10/21일 순찰중 (좌로부터 새마을부회장, 새마을총무.새마을 협의회장 그리고 초원가던의 백덕기사장)
네사람 중 우측 최종대협의회장님은 홍집사와 더불어 장곡동시절부터 28년째 봉사하시고
남어진 모두가 광명교회에 다닌다. 초원갈비의 백덕기권사님은 10교구이시며 고인이되신
1단지의 최병태집사님도 총무를 맡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