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놀이/최정란-
청테이프가 상자를 둘고 말고 있다 미라처럼
상자는 단단히 묶여 있다
함부로 풀리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풀리고 나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상자는 어떤 영웅도 퇴치하지 못하는 스핑크스
상자만큼 궁금한 것이 없다
상자만큼 안달하는 것이 없다
상자만큼 부끄러운 것이 없다
상자가 도착한다 이마에 이름과
주소가 적힌 라벨을 붙이고
역병과 괴물의 바다를 관통해서 상자가 도착한다
상자만큼 기다리는 것이 없다
상자만큼 애타는 것이 없다
상자만큼 설레는 것이 없다
상자는 파손주의 스티커를 훈장처럼 달고 온다
깨지기 쉽다는 듯
깨지기 쉬워 아름답다는 듯
깨지기 쉬워 성스럽다는 듯
벨이 울리고 상자가 남고 사람이 사라진다
상자만큼 찬란한 것이 없다
상자는 상자 그 자체로 기쁨의 기관, 나도
너에게 가서 상자가 되고 싶은 걸까, 나도
한때 너의 성자였을까
상자만큼 기쁜 것이 없다
상자를 개봉하는 순간만큼 기쁜 순간이 없다
상자를 개봉하면 그뿐, 오늘 몫의 기쁨이 다 한다
위안이 되지 않는 위안이라면
내일은 내일 몫의 상자가 도착한다
내일 또 내일, 성실하게 주문을 기다리는 상자들
상자만큼 완벽하게 비워지는 것이 없다
상자만큼 나를 비우는 것이 없다
상자만큼 내 안에 내가 없는 것이 없다
벨이 울리고 상자가 남는다
벨이 울리고 사람이 사라진다
낮의 상자에 밤을 넣고 밤의 상자에 낮을 넣는다
밤의 상자가 낮을 낳고 낮의 상자가 밤을 낳는다
상자 안에 몸을 넣는다
상자 안으로 마음이 따라 들어간다
상자 안에서 몸을 오그린다
상자 안에서 마음이 오그라든다
팔다리를 오그리지 않아도 되는 상자,
언제인가 길게 마음을 눕힐 상자가 도착할 것이다
상자를 들락거리며 상자를 연습한다
번갈아가며 서로를 낳는 자매처럼
상자만큼 아프게 하는 것이 없다
상자만큼 슬프게 하는 것이 없다
상자만큼 울게 하는 것이 없다
상자를 포장하는 것만큼 통곡하는 놀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