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실 널 좋아해"
라는 내 물음에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내가 내민 신문지를 건네받은 손이 따듯하게,
손을 잡은 손이 조심스레 떨려와서,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깝게 다가운 거리에 닿은 따듯한 이마가 포근하게,
젖어드는 빗소리가 마치 나를 휘감으며 울음을 터트리는 듯 한 느낌으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들리는 그 시간에 승연이는 분명 울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가 내리는 날.
나와 내가 사준 하늘색의 머리띠를 하고 있던 승연이가 함께 신문지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던 하교길이였다.
굿바이는 없다
봄,
봄과 같은,
그리고 또 봄이라고 할 만한,
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한 가운데서,
파르르르 떨리는 몸.
뭐랄까 꽃의 잔해를 밟고 걷는 그 와중에 내가 그 것들과 혼연일체가 된 느낌이라고 해야할지,
떨어지는 꽃 잎의 잔해는 처절하다 못 해,
처참하다고 할 수 있을정도로 불쾌.
꽃이 아름다운 시기는 딱 거기까지,
화무십일홍.
그리고 그 십일의 끝자락 떨어지고 낙하하는 그 순간까지가,
원래 무엇이 되었던 끝은 그다지 보고싶지 않은 기분이라는 것.
대학교 졸업식이 몇시간 남지 않았던 그 시점.
졸업식에서는 졸업이라고 축하한다고 혹은 섭섭하다거나 혹은 왜 안나오냐고 이야기를 하는 그런 날 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졸업식에 참가 할 만큼 한가하냐고 묻는다면 노 코멘트.
코멘트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취직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 주고 싶은 느낌.
뭐든 시작 할 때와 끝의 이야기는 정반대 굿바이따위 존재하지 않으니까.
밤 하늘을 수 놓고 있는 폭죽놀이처럼,
끝이야라고 하는게 그다지 현실로 와 닿지 않는 기분이라고,
희뿌연 연기가 사라지듯이,
이대로 아무런 느낌도 없이 공중에 붕 뜬 것 처럼 졸업을 해도 되냐고 나 자신에게 은근히 쏘아붙이고 있지만,
어쩌면 이 쪽이 조금 더 현실적이라는 느낌이 강하지.
이미 멋지게 학교를 때려친 문예창작과 중퇴 출신의 판타지소설가 내 친우 구하라 선생에 의하면,
대학같은건 그저 명함에 불과한 직장을 구하기 위한 문패에 그치지 않아라고,
그런걸로 따진다면 확실히 나는 난 이 대학을 나왔습니다라는,
서울권내에서는 저렴하며,
전국으로 보자면 비싸다고 해야하는,
그런 애매모호한 문패를 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하니,
문패따위 알아보기만 하면 그만 아닌가라고 이야기하는,
그 측면에서는 또 다른 지극히 현실적인 길을 걷고 있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동정과 박애로 가득찬 미술과 허영지 후배님에 따르면,
같이 기념사진도 찍고 친구들하고 추억도 다지는 마지막 기회잖아요라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나도 저런 낭만적인 시절이 있었던가라고 푸념을 해 보기도 하지만,
낸들 안 그러고 싶겠냐고,
나도 학사모 쓰고 학사복 입고 모자 위로 휙 던지면서 사진이나 찍어보고 싶다이거지.
울어서 퉁퉁 부운 얼굴로 평생의 흑역사라도 좋으니까 사진 한 방 찍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하다니까.
연속해서 나 자신에게 강조하는 느낌이긴 하지만 굿 바이따위 현실에 존재하지않아라는 법칙에 의해,
나는 일생 일대의 졸업식을 제쳐두고 굿 스타트를 위해 오늘도 화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졸업후의 내 친구들의 행보도 각기 달랐던 것 같다.
대학교에 가서 반지의 제왕같은 대 서사시를 작성할거야 라고 하던 구하라는,
언젠가부터 덕질을 스타트하더니,
팬픽 - 동인 스토리라이터 - 판타지 라는 돌아올 수 없는 이세계의 강을 건넜지만,
나름대로 자기 자신의 뚜렸한 세계관을 지닌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나름 원래의 길로 잘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증거로 2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자기 집을 가지고 살고 있는 모습에,
확실히 트루 엔드 - 굿 스타트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해 줘야겠지.
반면 난 만화가 좋아요 언니라면서 나와 함께 덕질을 시작했던 허영지는 어느 틈 엔가 현실세계로 복귀.
화실에서 알바로 뛰며 돈을 모으더니,
무슨 변덕인지 갑자기 화실을 그만두고 프랑스로 유학.
지금은 2D의 세계에서 정 반대로 나아가고 나아가 미술과 건축 디자인을 전공하고 계시는 걸 보면,
시간이 주는 변화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머릿속에 그렸던 굿 엔드의 끝을 제대로 잡은건지 잘은 모르겠다라고 말해주고 싶은 느낌.
그에 비하면 원래 프랑스 유학을 계획하고 있던 나는 오히려 반대에 부딪쳐 떠나지도 못하고 리타이어.
그리고 그대로 덕질의 세계에 몰두하며 길도 보이지 않는 만화계에 입문.
생각했던 것 보다 희망도 보이지 않는 틈에서 한번 살아보겠다고 웹툰이며,
공모전이며 닥치는대로 응모.
심지어는 일본에 비자받고 떠나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것 마저도 낙선.
전공을 제외하고는 교양을 발로 관리해놨기 때문에 졸업도 힘들었고,
굿 엔드도,
굿 스타트도 제대로 실행해내지 못 한 나의 처지란,
씁쓸하기 그지 없는 느낌.
결국 그 알싸한 씁쓸함의 한 가운데에 스타트조차 끊지 못 했던 내게 굿바이는 없다.
그게 내 현재의 인생 모토이자 지론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굿 바이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사람 때문이겠지만"
한승연.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이자,
내가 아직도 질질 끌며,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어제의 꿈을,
오늘 다시 시작되는 과거를,
씁쓸함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들어서 내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빼앗아 간 사람.
"차라리 솔직하게 싫다고 말해줬다면 좋았잖아"
졸업식 날 난 한승연에게 빗 속에서 고백했다.
비에 젖지 않게 신문지를 뒤집어쓰고 그녀에게 또 다른 신문지를 건네면서,
로맨스나 분위기따위 전혀 없는 그런 광경.
솔직히 말하자면 그 충격때문이라고 생각 될 정도로,
한승연은 그 날 이후 이 지구상에서 증발.
원래 없었던 것 처럼,
때?로 그 흔적을 찾아 더듬어 보기도 하면서,
혹은 그 때의 결말이라도 제대로 내고 싶은 그런 마음에,
그 사람과 헤어지고,
있지도 않은 약속이 갑자기 생각난 사람처럼 정신없이 그 뒤를 쫓으면서,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떠들석한 번화가 사이를 해메이는 작은 소녀처럼,
걸어가면서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의 대답을 듣고 싶어서,
거절이라도 좋으니까.
그 대답을 듣고 싶어서,
마음 어딘가에서 계속 만나고 싶다고 외치는 것 처럼,
마치 하얀 눈 속에 찍혀있는 그 은빛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 같이,
사라질까봐, 보이지 않는 그 틈을 쫓아서,
혹은 푸른빛이 도는 새벽녘에 감춰진 투명한 그림자빛에 가린 것 처럼,
겨울의 끝자락에서 보이지 않는 그 끝을 잡기 위해서 몇번이고,
다시 또 몇번이고,
나아가는 발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질 정도로,
하지만 결국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맑은 봄의 하늘.
초록의 언덕에 우뚝 솟아있는 벚나무처럼,
나무 밑 잔디에 떨어져 있는 옅은 분홍빛의 잔해를 남기고,
아름답게 만발했던 겨울의 흔적을 덮어버리듯이,
떨어져 내린 꽃 잎 몇개가 비바람을 견디고 그 자리를 덮어버리면서,
결국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고 해도 그녀의 흔적은 거기서 끝.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아서,
결국 끝에는 만나지 않을까라고 예측했던 모습은 그 어느 곳에도 없이.
신중한 발걸음으로 쫓아간 그 곳은 결국 아무것도 없는,
가끔씩 꿈에 나오는 모습은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그 흔적을 잊지는 않을까 걱정이라도 하는 것 처럼,
나는 지금의 이 모습 그대로,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와 같은 그 때의 그 모습으로,
점점 선명해지듯이,
첫 날에는 맞잡은 손의 온기가,
두번째 날에는 따듯하게 감겨오는 이마의 촉감이,
세번째 날 에는 떨어지는 빗방울이 나를 휘어감는 듯,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
점점,
윤곽이 흐려져가고,
거기까지가 한계라는 듯이,
이젠 재현 할 수 없게끔,
기억에는,
그 날의 촉감도,
온기도,
그녀가 내 뱉던 숨결의 작은 떨림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
마치 흐드러지는 눈보라속에 파묻힌 것 처럼.
승연이의 이야기는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울리는 메아리로 산재,
소문도 종잡을 수 없고, 무성하기만 해서,
누가 먼저 이야기 했는지,
그게 진실인지도 모르고,
그냥 희미하게 유학을 가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 이라는 이야기만,
사실 프랑스 유학을 가야지라는 목적의 8할은 한승연에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 자신에게 단언.
나와 같이 만화나 그리던 주제에 무슨 프랑스 유학.
프랑스에 유명한 만화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일본 아니메 추종자잖아라고 비웃었지만,
1년이 지나고 1년 반쯤 지날 무렵부터는 초조해지기 시작.
그 소문이라도 붙잡고 믿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이미 다른 애들도 연락이 뜸해지는 시기라,
뭐가 사실인지,
아닌지도,
판단을 할 수 있는 경계선이 불분명해지니까.
사실 한승연 뿐 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지금은 연락이 끊겨,
연락이 닿는 사람은,
같이 만화 동아리를 하던 하라와,
영지를 제외하면 없으니까.
물론 그 둘도 승연이에 대해 물으면 자기도 잘 모른다면서 머리를 긁적이기 일수지만,
사실 한승연을 마주친다고 해도 뭔가 편안하게 말 할 수 있는 그런 사이는 아니지.
고백한 쪽과 고백받고 사라진 쪽의 만남이니까.
그거 그냥 차인거 아니야? 라고 물을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차인거고 뭐고 그냥 대답이 듣고 싶을 뿐.
어색하게 본 다음 헤어질게 분명한 관계라고 해도,
이상하게 그 대답을 듣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을 못 만날 것 같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7년이 지난 지금 얼굴도 안보고 소식도 안 들으며 사니까.
내 안에서 한가지 변한게 있다면 좋아한다에서,
집착합니다라는 것 으로 스위치가 변경되었다는 것.
지금 다시 만나면 그 때의 대답을 듣고 그냥 차분하게 바이바이하고 헤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 관계다.
생각을 해보면 한승연은 확실히 묘한 여자이긴 한 것 같다.
그녀의 증발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나 혼자뿐이 아니였으니까.
확실하게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가벼운 기분으로 안녕하고 사라지는 사람은,
이별의 괴로움을 단 한번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의 배려심없는 행위라는 것.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꼬박 1년이 지난 후,
겨울 초.
어쩌면 겨울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기에,
아슬아슬함과 따듯함을 넘나들던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던 때.
짙은 녹색을 뿜어내며 싱그럽게 돋아나는 새싹을 밟으며,
허영지가 우리 학교로 입학.
입학기념 축하파티를 하기로 했던 어느 날.
그리 좋지 않는 날씨에,
온 몸을 코트로 꽁꽁 싸매며,
진눈깨비를 가르고 나가던 그 어느 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풍경 속 에서도 천천히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무표정으로 중얼거렸던 걸로 기억.
역시 저 녀석들 결국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라고,
걷게 된 루트는 달라도 결국 사람은 그대로였다고나 할까.
자신의 미래는 말라 비틀어져가는데도 낭만이나 찾는 한심한 녀석의 눈빛과,
그리고 모든 구도가 빤히 보이기 때문에 항상 제 3의 길을 찾으며 걸어가는 방랑자.
그런 걸 보면 인간의 성격같은 건 그렇게 쉽게 변하는게 아닐지도,
세살 어린아이의 영혼은 백 년이 지나도 그대로라고,
그러고 보면 한승연도 마찬가지,
모두의 사이에 둘러쌓여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정말로 어느 날 이 세계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라고,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정말로 사라져버렸잖아 그녀석"
"그러니까요 승연언니 만화과 모임인데도 연락도 없고"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내가 뭐?"
생각해보면 세살 영혼이 백살까지 간 다고 한다고 할 때,
내 세살버릇은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는 것 이다.
확실히 한승연은 그 때 이미 내가 말하기 전 부터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 시절에는 내가 만지는 것.
그녀가 접촉하는 스킨쉽.
모든 게 다 처음이였으니까.
숨기지 못하는 나는,
들떠서,
금방이고,
흥분해버려서,
얼굴에 쓰여 있었을거라고,
아마 널 좋아한다고,
그런 표정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구하라가 불만스레 내는 불멘소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야 너 한승연 안 좋은 얘기 한다고 그렇게 얼굴 찌푸리는거냐?"
구하라는 막걸리를 사발에 따르며 새끼 손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욕이라도 한 사발 걸쭉하게 퍼 부을 것 같은,
빨간 볼과,
이미 꼬여버린 혀로 풀려버리고,
새어버리는 발음을 내면서,
그 연락도 안하는게 뭐가 친구라면서 괜히 나한테 불만.
언제나 빤히 보이는 위치에서 제 3자 역활을 톡톡히 하는 쿨한 아가씨 하라가 무너지는 광경을 보면,
이 녀석도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좋은 녀석이였어라는 과 일지도,
한승연에게 섭섭한 마음을 고대로 내 뱉기라도 하듯이,
승연이의 얘기가 나오자 말이 거칠어지는 하라를 보면서 불편한 마음에 괜히 말 없이 술만 들이켰던 걸로 기억한다.
지하철 역 앞에서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웅성거리는 것을 느꼈다.
대 낮이라고 하기에도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떠드는 그 모습에,
살며시 이어폰에 음악을 크게 틀고 무시.
라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싶었으나 이른 아침부터 졸업식장에서는 내가 나타나지 않을 걸 미리 예감이라도 했다는 듯,
전화벨을 울려 내 귀를 괴롭히면서,
나름대로 무겁게 내려앉은 졸업식이라는 것을 마음 한 켠으로 묻어두면서,
적막을 깨부수고 울려퍼지는 진동과,
벨소리에,
그 무게만큼의 불쾌감과 더불어 이거 정말로 피할 곳 없겠지라는 생각에 전화를 살며시 음소거.
누군가 지하철 역을 가르고 바삐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을때,
내 머릿속에는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처지는 아닐까라는 문득 떠 오르고,
그 발소리가 멀어져감에 따라서 내 의식도 점점 옅어진다고 해야할지,
내가 앉아있는 의자 머리맡에 놓여져 있는 꽃 한송이를 바라보면서,
저혈압 박규리의 상태도 아랑곳하지 않고 너무 일찍나와버린건가? 라는 생각으로,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이대로 간다고 해 봐야 머리가 멍해서 어떻게 되지도 않을 것 같은데 라면서 자신에게 물음.
오른손을 심장부위에 얹고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맥박을 느끼면서,
"역시 약속시간 두시간전부터 나오는 건 이상하겠지?"
라며 지하철 역 게이트 바로 앞 벤치에서 발걸음을 돌려 2시간 쯤 족히 남아있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그리고 멀쩡한 맨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
지하철이 아닌 도보를 선택하기로 결정.
아니,
솔직히 말한다고 하자면 아침부터 술 먹고 주정과 난동을 부리는 저 무리틈에 섞여가기 싫어서가 더 크지만,
하얀 역 건물 몇 걸음 앞 까지 나오자,
회색빛으로 물든 거리에,
해가 중천에 걸리기 직전,
출근시간의 끝 쯤에 다다라서 나 혼자 걸어가는 거리에 도달하자,
역 내에서 웅성거리며 울려퍼지는 불쾌한 소란스러움이 오히려 귀에 거슬리는 느낌,
큰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머리 위로 올리고,
주체가 되지 않는 발 끝을 세우며 갈 지자의 걸음으로,
몸은 살짝 옆으로 기울이면서,
나도 모르게 역 안의 풍경을 상상을 하니 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
사거리 앞의 횡단보도 끝은 알 수 없는 외국말로 쓰여진 간판이 즐비.
간혹 생각해보면 여기가 한국인지,
어딘지 갈피를 못 잡겠다 싶을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인사동의 그 여기는 코리아타운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그런 느낌을 받고 싶은 건 아니지만,
길을 건너가면서 보이는 잿 빛 하늘에는 아직까지 투명한 유리같은 달이 떠 있고,
그 달 사이를 애워싸듯,
저 너머 햇 빛을 반사하며 네온사인처럼 빛나는 빌딩숲이 우거져있고,
그 중에서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여기,
저기,
라고 가리켜봤자,
알 리가 있나,
구분조차 안 되게 다 똑같이 생긴 건물인데,
핸드폰을 켜서 네비를 키고 가는 길을 검색.
예전에는 이런 길 어떻게 찾아갔는지 몰라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 때는 한승연이 옆에 있었으니까.
한승연의 능력이라고 해야할지,
감이 좋다고 해야할지,
내가 어딘가 중요한게 고장나서 그냥 흘려버리는 것 일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길을 참 잘 찾고는 했었지,
그저 어린애처럼 바보같이 헤메이는 나를 비웃는 것 처럼,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빌딩 숲 속을,
흐릿한 발자국 소리로 가득 메우면서,
결국 정신을 차렸을때는 도착지.
바로 곁에서 천천히 거닐던 그 가냘픈 몸을 따라서,
역시나 한승연에게서 익숙해지고 끝맺음을 하지 못 한 불쾌감은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나의 세살 영혼에 딱 맞는 반 쪽의 다른 영혼이 한승연이였을지도 모르고,
별 시덥지않은 잡생각을 하면서,
핸드폰을 꺼냈을때 또 다시 울리는 전화벨소리.
또 졸업식 안오냐는 그 소리인가? 라는 생각에 끊어버려야지 라고 했지만,
끊어버릴 수가 없는 어쩐지 질기게도 이어져가는 그 번호위에 뜬 작은 이름을 보면서,
고요한 오전의 적막을 깨우는 시끄러운 신호음을,
전화기를 들고 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받을까 말까 하고 망설이다가,
"아침부터 뭐야"
"규리언니!!"
결국은 영지의 전화를 받고 말았다.
"나 오늘 화실 어시스턴트 면접보러 가야한다니까 너 오늘 졸업도 아니면서 왜 전화질이야"
"제 졸업은 아니더라도 우리 동아리 방 선배님들 졸업이잖아요 차기 장으로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거에요"
"그거 때려치는게 낫지 않냐?"
"에헴!! 나름대로 유서깊은 만화동아리의 대장이 되었는데 왜 포기하라는거에요?"
"유서는 개뿔 그거 내가 1학년때 만들어진거잖아"
"언니 나이 벌써 27이거든요 7년이나 지났으면 충분히 유서깊은 동아리인거에요"
"건축 디자인으로 옮긴 주제에 아직까지 대체 왜 만화를 붙들고 있는건데?"
"동아리잖아요 취미생활!!"
"그래서 다른 애들은?"
"다 오셨어요"
"아 그래? 그거 섬뜩한 얘기네"
"언니 혹시 오늘 저녁에 송별회는 오실거에요?"
"미친.... 내가 그럴 시간이나 돈이 어디있냐"
허영지와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재잘거리면서 통화하기를 수 분.
그래도 시간이 나면 꼭 오라는 확답을 받아내고 나서야 전화를 끊는 영지.
하아, 그렇다라고 확답을 하긴 했지만,
확답을 위한 확답이 아닌 일시적인 회피를 위한 확답.
분명히 저녁이 되면 다시 전화가 오겠지만,
이걸로 한 동안은 핸드폰이 울리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게 회피를 하고 나서도,
역시나 조금은 가고 싶다라는 욕구가 마음 한 구석에는 남아 있다라는 것 일지도,
한동안은 한참이나 핸드폰의 바탕화면과 전화번호부를 번갈아 가면서 교체.
체크.
결국 주변에 있는 편의점에 들려,
음료수와 과자를 집을 때 까지,
내 손에서 핸드폰을 놓아지지 않은체로,
과자와 음료수를 계산하는 계산대의 리더기 소리가 울려퍼질때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이후에도,
멍하니, 지도를 종종 확인하면서,
그래 누가 보면 외국인이 지도를 살피면서 관광이라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하는 모습으로,
그러고 보면 지금의 내 처지는 외국인과 다를바가 없지.
솔직히 말해서 지금 방문하는 화실도 누가 있는건지,
어떤 사람이 있는지도 잘 모르니까.
그냥 호칭을 정리한다고 하면 선생님.
만화를 그리는 작가지만,
팬 네임을 쓰고 있으니까.
호칭도 편의상 선생님이라고 부를 뿐 이지.
본명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 누구도 모른다고 해야하려나.
소개를 받은 선배에게서도 본명이 뭐냐고 물어봤을때 팬 네임외에는 모른다고 했으니까.
바깥 외출도 잘 안하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신비주의 컨셉이 아니냐는 소리도 있지만,
뭐 확실히 화풍을 생각해보면 선생이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긴 하지.
그 분의 그림에 대한 기억을 되새길 ? 마다,
자연스럽게 선생이라고 말이 나올법한 화풍이였어라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드니까.
물론 전화할때도 선생님.
상대방쪽에서는 그런 서먹서먹한 단어를 그리 반기지는 않는 분위기였지.
첫 통화때는 긴장해서 뭐라고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확실히 그 쪽도 수줍어하는 분위기가 강했었는데,
하고 생각을 하며, 손에 든 에너지음료를 한모금 쭉 들이키면서,
어젯밤 긴장으로 잠을 설친 탓 인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기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도보를 선택하다니,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싶을 지경.
확실히 어딘가 아침부터 머리를 조이고 있는 나사가 어디선가 훅 하고 빠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낯선 길을 걷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아까전부터 오만가지 잡생각을 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오히려 각성상태일지도,
확실히 피로하다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의식하지 않고 집은 에너지음료지만,
그렇다고 해서 졸려, 자고 싶어 같은 기분은 아니니까.
그냥 어젯밤부터 잠을 자지 못 했다는 것.
그래서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약속시간 세시간전부터 준비 두시간전부터 출발.
결과적으로 보면 각성상태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캔에 든 음료를 그대로 쭉 하고 들이키면서,
아직은 하얗게 나오는 부드러운 입김을 저 멀리까지 내 뱉으면서,
가늘게 옅어진 눈꺼풀 틈 으로 들어오는 엷으 빛의 장막을 보면서,
저혈압의 문제가 아니라 확실히 각성의 문제였나? 라고 나 자신에게 되물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지하철에 올라탄다라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이 거리를 걸어왔는데 지하철을 다시 탄다고 하면 이제는 돈의 문제.
아깝잖아 그런거.
약속장소는 여기서 약 15분정도의 거리.
이러네 저러네 하고 잡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이만큼이나 왔네라고 나 자신도 놀랄지경.
빌딩 숲을 지나서 슬며시 보이는 호수.
이 근처에 이렇게 많은 한가한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침의 호숫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는 풍경.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라곤 단 항 명도 없는 나도,
왠지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보고 싶은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란한 느낌.
그런 단란한 풍경의 호숫가를 바라보면서,
나 자신도 눈치채지 못 할 만큼 각성의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있는 몸에 정지신호를 넣어주면서,
애써 진정.
몇 분 후에는 정말로 중요한 면접장에 도착하니까.
아침부터 이렇게 난잡한 정신상태로 가서 실수하고 싶지는 않다.
가방속에서 손거울을 꺼내 살피는 모습.
각성상태야라는 걸 자각하긴 했어도,
아까 역에서 느꼈던 저혈압이야라는 것도 영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
피곤했는지 빨갛게 충혈된 눈.
눈에 선 빨간 실핏줄들은,
잔잔하게 흐르는 호수처럼 뿌연 빛으로 흐르는 느낌으로,
이런 모습으로 괜찮을려나? 라고 나 자신에게 되물었지만,
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잘 모를테니까.
깔끔하기만 하면 된거지,
깔끔하기만 하면,
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문득 거울 너머로 비친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었다라는 것은 내가 잘 못 본게 아닐지.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괜히 그 머리칼을 유심히 지켜보고 싶었지만,
머리카락은 내가 지켜보는 그 순간부터 마치 의지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듯.
내 눈을 가리려는 것 처럼,
바람에 흩날리면서,
나와 거울 사이에 그 모습을 가리려는 것 처럼 수 없이 많은 검은 머리카락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할까.
아아 그래 예전부터 머리손질에는 자신이 없었으니까.
카페에 들어가면 자리를 잡자마자 차분하게 머리손질부터 시작해야겠지.
그렇게 바람에 흩날리면서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날뛰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호수 너머를 보니 호수의 끝 부분이 남청색에서 주황빛으로,
그 것보다 좀 더 땅에 가까운 부분은 주홍빛으로,
그리고 그 윗부분은 노란빛으로 물드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파란 그림자의 윤곽이 언뜻 언뜻 눈에 간신히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아침이라고 인지하고 있던 시간이 사실은 점심이 아니였나하고,
아까 지하철 역에서 나올때만 해도 창백한 새벽 빛에 노출된 파란 풍경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틈 사이에서,
마치 거품처럼 점점 부풀어오른 이질적인 숲과 호수의 풍경.
곡선의 둘레길을 따라 도는 빛의 윤곽에 눈이 부셔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 정도의 느낌으로 살짝 현기증이 나면서,
내 앞을 파고드는 무거운 바람.
눈 앞에 흔들리는 긴 갈대처럼 시리도록 떨리는 옷자락.
빌딩 숲 사이를 파고 들다가 넓은 곳으로 막 나와서 방금 전 까지 몰랐던건데,
호숫가는 내 예상보다 훨씬 추운 바람이 불어왔고,
어째서 해가 이렇게나 내리 쬐는데 날씨가 이렇게나 추운거야라고,
화를 내고 싶을 정도로,
살을 베어내기라도 하듯 불어오는 시린 바람.
따듯한 봄 이잖아.
꽃이 떨어질 정도로 완연한 봄 이잖아 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바람에 눌린 몸은 입을 때기도 힘들 정도로 시려서,
이런 추위인데도 호수가 얼어붙지 않는게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얼어붙은 풍경속에 발을 내 딛는다는 것 자체가 살얼음판을 걷는다라는 느낌.
"역시 안되겠어"
약속장소까지 5분거리를 남겨놓고 리타이어.
집에 돌아갈래라는 마음 한가득.
하지만 그런게 용납이 될리가,
환절기의 아침을 우습게 본 나에게 내려지는 철퇴를 단단히 맞으며,
쇼통편을 머리속에 되새기고 길 가에 왔다갔다거리는 택시에 몸을 실으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까 그 역에서 지하철을 타는건데라고,
의미없는 후회를 반복.
택시의 흔들림에 몸도 가늘게 떨리면서,
덜컹거리는 차체의 흐름 때문 인 것 인지,
아니면 얼어붙은 몸이 녹아가고 있는 것 인지,
둘 중 어느쪽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풀리는 몸이 노곤노곤한 기분에 사로잡혔다는 것에,
정신은 묘하게 냉수마찰이라도 한 것 처럼 멀쩡했지만,
몸은 물을 먹은 솜 마냥 무거워서 노을빛에 하얗게 물들기라도 하는 기분으로,
택시의 창문 틀에 네모나게 쪼개어 보여지는 풍경들은 참 느리게도 지나가는 모습으로,
확실히 차가 막힐 시간이니까.
희뿌옇게 서리가 낀 창문 바깥의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아,
손을 살며시 문지르면서 보는 바깥의 풍경은 꽃이 다 떨어진 봄의 끝 이니까.
얼음을 부수어 날리는 것 같은 바깥의 추위를 생각해보면,
나뭇가지만 처다 보았을때는 누가 봄이라고 생각하겠어라고 괜히 투덜투덜.
봄의 끝자락에서 보는 낯선 풍경에 영 감성적으로 되는 것 같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데 중간에 멈춰버린 택시.
"도착했습니다"
택시기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고,
그리고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그대로 나를 뒤로 한 체 왔던 길을 다시 돌아서,
연기를 뿜으며 나를 추월해가는 모습.
스쳐 지나가는 모습에,
불투명한 유리에 남아있는 나의 손자국이 마치 손을 흔드는 모양새로.
택시니까 표정까지는 확인 할 수 없었지만,
확실히 웃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
겨울을 뒤집어 쓰고 있는 아침속에 녹아들어가는 택시가 상당히 작아졌을때,
살짝 손을 흔들어주면서 가는 길을 배웅.
곡선을 그리며 커브를 돌아서 사라져가는 택시에서 눈길을 돌려,
올려다 본 회색 건물 2층에는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가 있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한참이나 남았지만 일단 추우니까.
라는 생각으로 종종걸음으로 올라서는 계단.
그 곳에 천천히 들어섰을때 눈에 띄는 것은 카페 안 쪽에 앉아있는 커플.
카페가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른시간이라서 그런건지,
텅 빈 가운데 유난히 남자쪽이 시끄럽게 떠드는 커플쪽으로 나도 모르게 시선이 향했고,
내 자리를 잡고 나서도 여전히 그 시선은 커플쪽에 고정이 된 그대로,
주문을 하고 나서도,
주문한 음료가나온 후 에도 그 커플쪽으로 시선집중.
눈길을 사로잡은 이유가 있다면,
아마 혼잡한 가운데서라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커플이라 딱히 주목 할 거리는 없었을거라 확신하지만,
텅 비어있는 한가한 카페 안 에서 전세를 낸 것 같은 남자의 큰 목소리와,
그 남자가 서양인이라 알아듣지 못 할 외국어로 떠들고 있었다는 것 정도.
그 서양인의 유난히 하얀 피부는 내가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내 주의를 확실하게 집중시켰다고나 할까.
남자의 앞에 있는 사람도 한국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한국인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이니까 조금 놀란 기분으로.
서양인과 동양인의 커플이 금기나 터부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흔한 풍경은 아니니까 나도 모르게 시선이 꽂혔다고 해야할지.
입고 있던 자켓을 의자위에 팽개쳐둔 채 팔짱을 끼고,
호수쪽을 향해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평범한 커플처럼 호숫가를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추측중.
영어라면 그나마 좀 알아들을 수 있겠지만,
영어는 아니니까.
느낌을 말하자면 불어 혹은 이탈리아어 같은 느낌.
부드럽게 이어지는 걸 보면 독일어는 아닌 것 같고,
그 남자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알 수 없는 언어로 실 컷 떠들다가,
곧 여자쪽을 돌아보더니,
뭐라고 한 두 마디를 한 이후,
의자위에 있던 자켓을 걸치고 카페의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설마 싸운건가?"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정말로 난데없이 웃고 있다가 갑자기 나가버린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 이상해 보여,
계단을 끝까지 내려갈때 까지 그 뒷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면서 묘한 스토리를 상상.
나름 만화가 지망생의 본분에 충실한 시간으로,
세상을 모두 공과 수로 구분짓는 정도는 아니지만,
저런 모습을 볼 때 마다 이런저런 묘한 상상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고 해야할지.
그러고 보면 승연이랑 친해진 계기도 그런 것 이였을지도,
분명 승연이는 처음 볼 때 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와 함께,
반에서 고립되어 있었으니까.
좋게 말하면 수줍음이 많은 내성적인 사람.
나쁘게 말하면 반에서 고립되어 여자도 남자와도 변변찮게 입을 놀릴만한 친구가 없는,
왕따.
이제 와서 말하지만,
승연이 그 때 분명히 왕따에 가까운 존재였지.
직접적으로 따돌림당하는 것은 아니였지만,
하지만,
그래서 그저 눈짓하고 서로 쓴 웃음 지어보이는 그런 관계에 상당히 끌렸었던 것도 사실.
그 애의 친한 사람이 오직 나 하나라는 그 사실 자체가 조금 설레였었다라는 과거의 나는,
"변태같았구나 과거의 나"
그 시절의 나 꽤나 나쁜 성향을 지니고 있었네라고 허탈한 웃음.
물론 그 이후에는,
하라나 영지가 그 관계에 끼어들면서,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한승연 이라는 관계는 성립되기 힘들게 되었지만,
시덥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저 멀리 날려버리고,
가방에서 안경과 책을 꺼내놓고 무릎위에 담요를 덮으며 책갈피를 뽑아내며 독서를 하기 시작.
아직까지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가방 맨 위에 있는 손거울을 바라보면서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그건 그거 나름대로 뭐 상관없잖아라면서,
최근 눈이 좋지 않아진건지 안경의 도수가 제대로 맞지 않는 기분에,
언뜻 자주 보이는 깨알만한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기분.
혹은 카페의 조명이 그다지 좋지 않은건가?
그래도 이따금 들리는 바람소리 외 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기분이 좋은 느낌으로,
독서를 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환경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서오세요"
하는 종업원의 기계적인 인사와 더불어 출입구에서 부터 들려오는 시끄러운 목소리.
아아,
아까의 그 외국인인가? 그리고 그 소동을 눈치 챈 것 인지,
그 외국인의 일행이였던 동양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여자를 향해 나도 모르게 쏠리는 시선.
어딘가 초점을 잃은 것 같은 까맣게 죽어버린 시선.
무척이나 관리가 잘 된 것 같은 결이 좋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살랑하고,
어쩐지 무기력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얼굴.
까맣고 짙은 밤색의 눈동자는 탁하게 번져있는 모습으로,
초점이 또렷하지 못 한 눈빛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나와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다 보일 정도로,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멀다고 하기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한 동안 이 쪽으로 던지는 시선.
여유라고 해야할까.
그렇다기 보다는 무기력함.
어딘가 비어보이는 것 처럼 보이지만 밝게 빛나는 미소.
무 방비 상태의 그 미소가 분위기와는 걸맞지 않게 귀여워 풍기는 묘한 뉘앙스.
남자가 뭐라고 계속 투덜대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떤 움직임이건 동작이 크지 않게,
가는 선의 느낌으로,
장난처럼 웃어넘기는 표정 뒤에 뺨을 문지르면서 어째 부끄러워 하는 느낌.
짙고 어두운 피부 톤은 만지면 미끄러질 듯 반질거리면서,
언제나와 같은 서투른 화장덕분에 얼굴과 목의 색이 미묘하게 다르잖아라고,
시선이 교차하고,
입김이 절로 새어나오면서,
난 도대체 지금까지 뭘 했던건가라는 무기력함.
꿈을 꾸는 듯 한 몽롱한 느낌.
온 몸에 오한이 스며들 정도로 느껴지는 묘 한 매력.
까맣고 짙은 그 눈동자를 한참이나 지켜보면서,
조금 로맨틱함이 부족한 우연.
섬세하고 가늘게 어딘가 부서지기라도 할 것 처럼 움직이는 모양새가 제법 귀엽게 느껴지면서,
소리없이 웃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따라 지어지는 미소.
가늘고 작은 어린아이가 장난이라도 치는 것 처럼 움직이는 손가락에 또 다시 새어나오는 웃음.
큰일이야.
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면서,
그제서야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뭔가 시선을 눈치 챈 느낌으로,
나쁘지는 않은데 놀려주고 싶은 기분.
잔뜩 짖궂은 표정으로 웃고만 있으니 이쪽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어오면서,
언제나와 같은 바른 걸음걸이.
또 한가지를 이야기하자면 마치 기계와 같은 일정한 보폭.
특이한 사람.
내 근처까지 다가왔을때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국적이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나와 정 반대라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외모.
언제나 내가 동경하던 스타일이라고 할까? 하지만,
빈틈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꽤 추운 봄의 날씨인데도 짧은 핫 팬츠에 킬 힐을 신고 있는 것만 봐도,
이런게 취향이였나? 확실히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내 눈 앞의 그녀를 바라보면서 살짝 쓴 웃음을 뱉었다.
"한승연...."
그녀였다.
그녀가 있었다.
바람은 잔잔했다.
꽃을 잃어버린 나무들이 연주하는 희미한 술렁거림과 함께.
눈에 보일 정도로 차이가 나는 기온.
길어진 낮.
짧아진 밤.
조용하고 천천히 변해가는 계절.
그리고 마찬가지로 변하기 시작한 나.
변하기 시작한 일상.
그런 가운데 변하지 않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지금 잘 못 본건가? 라고 마음속으로 부정하면서 중얼거려보지만,
오히려 그 사실을 부정.
틀림없어.
분명히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한승연.
이유도 없는 확신이 가슴을 메우고,
그 모습을 쫓듯이,
일정하지 못 한 공기의 흐름이 깨어지고,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발걸음.
탁해진 시야가 순간 또렷한 느낌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면서도,
역시 여전히 귀여운 얼굴이라고 여러 번 생각했다.
"승연아...."
"......"
목소리가 간지럽다.
말 끝을 뭉그러트리며 옅게 웃는 얼굴에,
또렷하지 못 한 발음은 속으로 삼켜지면서,
나도 모르게 천천히 다가가는 발걸음.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다.
역시 오랜만이라서 조금 어색한 느낌인건가?
확실히 마냥 반갑기만 한 내 쪽이 이상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상관하지 않고 다가가는 내 발걸음.
그런 발걸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이쪽으로 다가오며 희미한 반응을 보이고,
놀람의 기색과 함께 보이는 슬픈 눈동자.
나의 말이 어떤 결말로 이어져 있는지를 모두 알고 있는 듯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면서,
한승연은 몇 년만에 만난 나에게 첫 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다가오지마!! 이 변태야!!"
"에?"
한승연의 갑작스러운 뜬금없는 발언에,
카페 안의 몇 안되는 사람들의 시선에 전부 내게 쏠린 가운데,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나를 분노에 차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한승연은 기세좋게 높이 치켜든 오른손으로,
"죽어버려!!"
라며 내 왼 쪽 뺨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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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부분이 상당히 난잡하면서 진지하지만
실은 장르가 일상개그물
첫댓글 뭐...뭐지 내가이해를잘못하고있는건가 @-@
앞 부분이 너무 진지해서 설마 개그물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요...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