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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진 탐사기획 스크랩 100대 명산 두륜산 포토기행
유경/박노철 추천 0 조회 49 09.04.27 22: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한국의 100대 명산 두륜산을 만나려고 밤새 길을 달려 삼산면 구림리로 들어선다. 며칠 전에는 때아닌 눈이 쏟아지더니 오늘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게다가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와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한동안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어 한창 피어나던 꽃들이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에 얼어죽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두륜산 어느 골짜기에선가 봄처녀는 꽃샘추위를 견디면서 찬란한 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구림리 대흥사천변의 식당촌에서 보리밥으로 아침을 먹는다. 식탁에는 냉이를 비롯한 이른 봄철의 햇나물과 남도의 특산물인 젓갈, 구수한 된장찌개가 올라와 있다. 나는 보리밥을 좋아하는지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식당을 나오자 바람이 조금 잠잠해진다. 두륜산 계곡 입구에 식당촌이 있어서 사방의 산맥들이 바람막이를 해주기 때문이리라.

 

대흥사천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고계봉 능선이, 오른쪽으로는 향로봉 능선이 다가온다. 거의 20년만에 다시 찾아온 두륜산.....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두륜산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아줄까? 좋은 인연이란 만나면 만날수록 더 반가운 그런 인연이 아니던가! 오늘 두륜산과 나의 두번째 만남도 바로 그런 인연이기를.....   

 

*두륜산 지도

 

한민족의 영산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되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개마고원, 금강산을 지나 휴전선을 넘은 다음 설악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거쳐 전북 장수군의 영취산(靈鷲山, 1,075.6m)까지 치달려 내려와서는 서쪽으로 65km에 이르는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을 분기한다. 금남호남정맥은 영취산에서 장안산(長安山, 1,237m), 수분현(水分峴, 530m), 팔공산(八公山, 1,151m), 성수산(聖壽山, 1,059m), 마이산(馬耳山, 667m), 부귀산(富貴山, 806m)을 지나 전북 무주군의 주화산(珠華山, 565m)에 이르러 다시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 갈라진다.

 

금남정맥은 주화산에서 북서쪽으로 대둔산(大屯山), 개태산(開泰山)을 지나 계룡산에 이른 다음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널티(柄崎), 망월산(望月山)을 거쳐 충남 부여군의 부소산(扶蘇山) 조룡대(釣龍臺)에서 끝나는 약 120km의 산맥이다. 호남정맥은 주화산에서 남서쪽으로 내장산(內藏山, 763.2m)에 이른 다음 다시 남쪽으로 무등산(無等山, 1186.8m), 제암산(帝巖山, 807m)을 지나 사자산(獅子山, 666m)까지 뻗어내린 뒤 다시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조계산(曹溪山, 884.3m)을 거쳐 전남 광양시의 백운산(白雲山, 1217.8m)에서 끝나는 약 462km의 산맥이다. 호남정맥의 전남 화순군과 장흥군의 경계지점인 바람재(깃대봉과 삼계봉 사이에 있는 고개)에서 땅끝기맥이 갈라진다. 땅끝기맥은 남도의 명산인 영암군의 월출산(月出山, 809m)을 일으킨 다음 해남반도로 뻗어내려 역시 남도의 명산인 두륜산(頭輪山, 703m)과 달마산(達摩山, 489m)을 지나 토말(땅끝마을)에 이르는 약 123km의 산맥이다.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과 현산면, 북평면, 북일면에 걸쳐 있는 두륜산맥(해남산맥, 남령산지)은 땅끝기맥의 385.5봉에서 고계봉(638m), 노승봉(능허대, 685m), 가련봉(두륜산, 703m), 두륜봉(630m)을 지나 도솔봉(대둔산, 672m)에 이르는 북릉, 도솔봉에서 달마산으로 뻗어가는 땅끝기맥의 서남능선, 도솔봉에서 연화봉(613m), 혈망봉(379m)을 거쳐 향로봉(469m)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 두륜봉에서 위봉(533m)과 응봉산(209m)으로 뻗어내린 남동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륜산맥 주능선에 솟아 있는 여덟 개의 봉우리들은 연꽃 모양의 넓은 타원형을 이루면서 마치 산이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두륜산이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두륜이란 말은 산봉우리들이 왕관처럼 둥글게 원 모양을 이루며 솟아 있다는 뜻이다.    

 

두륜산은 대흥사(大興寺)로 이름이 바뀌기 전의 대둔사(大芚寺)가 있는 산이라 하여 처음에는 대둔산(大芚山)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대둔사가 대흥사로 바뀌자 한때 대흥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여덟 개의 봉우리들에서 흐르는 작은 골짜기들은 모여서 금당천과 장춘동계곡(長春洞溪谷)을 이룬다. 사시사철 옥류수가 흐르는 계곡에는 원시림에 가까운 숲이 우거져 있다. 두륜산의 명승지로는 노승봉 정상의 능허대(凌虛臺), 두륜봉 정상의 백운대(白雲臺, 구름다리)와 흔들바위, 북미륵암의 극락대(極樂臺)와 학사대(學射臺), 천불전 뒤편의 여의주봉(如意珠峰) 등이 있다. 두륜산 정상인 가련봉과 능허대, 백운대, 극락대, 학사대 등은 전망이 매우 뛰어나 웅장한 두륜산맥과 깊은 계곡, 남해의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두륜산 일대의 기후는 한일난대아구계(韓日暖帶亞區系)에 속한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난대성 상록활엽수들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 장춘동계곡 주변에는 유자나무, 차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 난대성 식물을 비롯해서 왕벚나무, 비자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북가시나무, 식나무, 굴참나무, 곰솔, 상수리나무, 보리수나무 등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대흥사 근처 산기슭에 있는 두 그루의 왕벚나무는 한라산 왕벚나무와 함께 한국의 특산종인 동시에 고유종으로 인정되어 천연기념물 제173호로 지정되었다. 동물은 수달과 청설모, 박새, 붉은머리오목눈이 등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두륜산 일대에는 유서깊은 사찰과 암자, 그리고 각종 문화유적이 많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을 비롯해서 백화암(白華庵), 청신암(淸神庵), 북미륵암(北彌勒庵), 남미륵암(南彌勒庵), 일지암(一枝庵), 진불암(眞佛庵), 상원암(上院庵), 남암(南庵), 관음암(觀音庵) 등 대흥사 산내암자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들 사찰과 암자에는 국가지정 문화재 여섯 점, 지방자치단체지정 문화재 일곱 점이 산재해 있다. 국가지정 문화재로는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大興寺北彌勒庵磨崖如來坐像, 국보 제308호), 탑산사동종(塔山寺銅鍾, 보물 제88호),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大興寺北彌勒庵三層石塔, 보물 제301호), 대흥사응진전전삼층석탑(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 보물 제320호), 대흥사서산대사부도(大興寺西山大師浮屠, 보물 제1347호), 대흥사서산대사유물(大興寺西山大師遺物, 보물 제1357호) 등 국보 한 점과 보물 다섯 점이 있으며, 자치단체지정 문화재에는 대흥사천불전(大興寺千佛殿, 전남유형문화재 제48호), 대흥사천불상(大興寺千佛像, 전남유향문화재 제52호), 대흥사용화당(大興寺龍華堂, 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 대흥사대광명전(大興寺大光明殿, 전남유형문화재 제94호), 대흥사정조친필서산대사화상당명(大興寺正祖親筆西山大師畵像堂銘, 전남유형문화재 제167호), 대흥사관음보살도(大興寺觀音菩薩圖, 전남유형문화재 제179호), 표충사(表忠祠, 전남기념물 제19호) 등이 있다.

두륜산은 산세가 빼어나고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식생, 울창한 수림, 유서깊은 사찰과 문화유적, 뛰어난 전망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1979년 12월 26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산림청은 두륜산이 '한반도의 최남단 해남반도에 솟아 있는 산으로서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있으며, 다도해를 조망하기에 적합하고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점. 봄의 춘백,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동백 등으로 유명하며 유자(柚子), 차(茶)의 산지로 알려져 있음. 보물 제320호인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는 대흥사(大興寺)가 있음.' 등을 감안하여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선정하였다. 두륜산은 사계절 어느 때 찾아도 좋은 산이다. 봄에는 산기슭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동백꽃, 여름에는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물, 가을에는 온산을 울긋불긋 물들이는 단풍, 겨울에는 산기슭에 하얗게 피어나는 상고대가 아름답다.   


*지면패랭이꽃

 

*두륜산 대둔사 일주문

 

식당촌 양지바른 곳에는 분홍색 지면패랭이꽃(꽃잔디)이 활짝 피어 있다. 꽃샘바람을 맞아 가녀린 꽃잎이 떨리듯 흔들린다. 오랫동안 가슴졸이며 기다리던 연인을 만날 때처럼 반가운 마음이 왈칵 몰려온다. 꽃잔디꽃은 키가 작아서 땅에 붙다시피 피어나 하마터면 무심코 지나칠 뻔 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 봄처녀는 얼마나 서운했을까? 

 

현무교(제1장춘교)를 건너 '頭輪山大芚寺(두륜산대둔사)'라고 쓴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난다. 단청을 하지 않아 다소 질박한 느낌을 주는 일주문은 대흥사로 이름이 바뀌기 전에 세워진 것이다. 현무교를 지나면서부터 장춘동계곡이 시작된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가 산기슭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녹음이 짙은 여름이나 단풍철에는 이 길을 걸어서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2,3,4장춘교를 차례로 건너서 올라가면 주차장이 나타난다.     


*이동주 시비

 

제5장춘교 바로 앞, 옛날 여관이 있던 자리에는 해남이 낳은 시인 이동주(李東柱, 1920∼1979)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동주는 1940년 6월 '조광(朝光)'에 시 '귀농(歸農)', '상렬(喪列)' 등을 발표하고, 이어 1950년에는 서정주(徐廷柱)의 추천으로 '문예(文藝)'지에 '황혼(黃昏)', '새댁', '혼야(婚夜)'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시집으로는 '네 동무'(합동시집, 1946)와 '혼야'(婚夜, 1951), '강강술래'(1955), '이동주시집'(1987)이 있다. 그는 주로 한국적 정한에 바탕을 둔 향토적 서정을 노래한 시를 많이 썼다. 시비에는 향토적 서정을 노래한 그의 대표적인 시인 '강강술래'가 새겨져 있다.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빙 돈다

가응 가응 수워얼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白薔微) 밭에
공작(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에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갈대가 스러진다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이동주)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뜰에서 처녀들이 강강술래를 하는 모습이 시청각적 심상을 통해서 환상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묘사된 시다. 강강술래를 하기 위해 모여든 처녀들을 여울에 몰려온 은어떼에 비유한 표현이 재미있다. 강강술래는 '달무리가 비잉빙' 도는 것처럼 원을 그리면서 서서히 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빨라진다. 나중에는 갈대가 스러지고, 기폭이 찢어질 정도로 빠르게 돌아간다. '백장미 밭'처럼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뜰에서 '공작이 취한' 듯 춤을 추는 처녀들의 환상적인 모습에는 '목을 빼면 설움이 솟'는 어떤 정한이 짙게 배어 있다. 한은 풀어야 하는 것......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도는 것처럼 처녀들의 강강술래는 숨가쁘게 돌아가다가 '술보다 독한' 달빛에 취해 무아지경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무아지경 속에서 설움은, 한은 마침내 풀어지고 극복된다. 한민족의 집단무의식에는 한의 정서가 뿌리깊게 남아 있다. 이 시는 대동세상을 여는 춤판 즉 강강술래를 통해서 한민족의 집단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처녀들이 강강술래를 하는 모습이 마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다.

 

이동주는 '현대시와 서정의 문제'(문학춘추, 1964)를 비롯하여 여러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 1967년부터 그는 실명소설(實名小說)이라는 분야를 개척하여 '박종화'(현대문학, 1967), '김영랑'(현대문학, 1967), '유치환'(현대문학, 1967) 등 문인들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유고집으로는 시선집 '산조'(우일문화사, 1979)와 실명소설집 '빛에 싸인 군무(群舞)'(문예비평사, 1979)가 있다.



*제5장춘교


*대흥사 숲길

 

제5장춘교 오른쪽에는 대흥사 탱화장(幀畵場)이 있다. 탱화란 청, 적 황, 백, 흑 오방색으로 불교 신앙의 대상인 부처나 보살의 초상 또는 경전의 내용을 그려서 벽에 거는 그림으로 존상화(尊像畵)와 변상도(變相圖)의 성격을 띤다. 불교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이 실체가 없다고 보기에 부처나 보살의 상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들을 표현하려면 가상(假相)으로 그릴 수 밖에 없다. 법신불(法身佛)과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을 일러 삼신불(三身佛)이라고 하는데, 이중에서 가상의 불신인 화신불은 진실한 불신(佛身)인 법신과 보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화신불은 곧 석가모니를 가리킨다. 그래서 탱화를 제작할 때는 화신불인 석가모니의 모습에 근거를 두고 부처나 보살상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대흥사 탱화장은 금어(金魚, 불화를 그리는 승려)인 낭월(浪月) 고재석(高在奭, 1924~2005, 전남무형문화재 제31호)이 한국 탱화의 맥을 이어온 곳으로 유명하다. 건축과 조각, 불화 등에 뛰어난 승려를 승장(僧匠)이라고 하는데, 이 가운데 불화(佛畵) 즉 탱화와 단청에 능한 승려를 가리켜 탱화장(幀畵匠)이라고 한다. 고재석은 바로 대흥사 탱화장이었다. 해남태생인 고재석은 1936년 12세에 출가하여 대흥사에서 사미승으로 지내던 중 불사를 하러 온 금어 김일섭(金日燮, 1900∼1975,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의 눈에 띄어 그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이후 10년간 그는 김일섭을 도와 개성의 안화사(安和寺)를 비롯한 제주도와 전라남북도 지역 사찰의 불사에 종사하면서 불화의 기초를 닦으며 금어의 길을 가게 된다. 이때 김일섭으로부터 시왕도(十王圖), 김일섭의 스승 김보응(金普應)으로부터 지장도(地藏圖) 초본을 전수받는다.

 

고재석은 조선조 말기의 금호(錦湖) 약효(若效)에서 김보응, 김일섭에 이르는 한국 불화의 전통을 계승하여 한국 근현대 불화의 제4대 금어가 된 사람이다. 고재석의 후배이자 김일섭의 또 다른 제자인 해봉(海奉) 석정(石鼎)은 정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으로 지정받았다. 고재석은 해남의 도장사(道藏寺) 산신탱과 지장탱(1949)을 비롯하여 전국각지의 불화 2백여 점을 제작하였다. 그의 불화는 화면구성과 도상배치, 선묘, 색채 등에서 전통 불화 형식에 충실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재석은 탱화만 그린 것이 아니라 단청 불사에도 참여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달마도와 같은 선화(禪畵)나 인물화, 초상화, 추사체풍의 서예에도 능했다. 

 

지금 저 탱화장에서는 어느 금어가 고재석의 뒤를 이어 불화를 그리고 있을까? 탱화장 입구에서 제5장춘교를 건너면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편백나무가 울창한 숲길이 나타난다. 꽃샘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동백꽃들이 패잔병처럼 길위에 떨어져 있다. 피안교 바로 전에 유서깊은 전통한옥 여관인 유선관(遊仙館)이 있다. 한문으로 쓴 편액이 걸려 있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 한가운데 정갈하게 가꾼 정원이 있고, 객실은 정원을 중심으로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을 따라서 길게 놓여져 있는 툇마루와 객실의 창호지문에서 시골의 정취가 물씬 배어나온다. 객실의 바깥 벽에는 붓글씨나 동양화가 한두 점씩 걸려 있어 이 여관의 풍격이 느껴진다. 유선관의 뒤로는 금당천이 흘러가고, 개울 건너편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유선관에는 이곳에서 묵은 등산객의 산길안내를 잘하기로 소문난 노랑이라는 진돗개가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유선관은 임권택이 감독한 영화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를 촬영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장군의 아들'에서는 김두환이 기생과 노는 장면, '서편제'에서는 암행어사 출도장면을 바로 이곳에서 찍었다. '장군의 아들'은 풍운아 김두한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고, '서편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판소리 소리꾼의 연대기를 통해서 한민족의 한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그려낸 이청준 원작의 소설을 영화한 것이다. '서편제'의 암행어사 출도장면을 촬영할 때, 잔치집의 판소리마당에서 추임새도 넣고 흥도 돋구는 객꾼들의 역할을 막걸리를 한 대포씩 마시고 얼콰해진 해남 현지주민들이 직접 엑스트라로 참여해서 실감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서편제'가 개봉된 뒤 임권택감독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해남주민들에게 시사회를 열어 주었다.

 

'서편제'는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로 관객 백만 명 돌파라는 신기록을 작성했고, 이어 대종상 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영화제에서 중요한 상들을 휩쓸었으며, 1993년 상해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과 최우수여우주연상을 받는 등 해외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여주인공 송화역을 맡았던 오정해는 이 영화를 통해서 일약 영화계의 샛별로 떠올랐고, 송화의 아버지로 소리꾼 유봉역을 맡았던 김명곤은 후에 문화부장관이 되었다. 교직에 있을 때 나는 김명곤으로부터 '마당놀이의 이론과 실제'에 대하여 강습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가 나중에 문화부장관이 될 줄이야...... 판소리와 마당놀이에 능한 광대이자 현장예술인이 한 나라의 문화예술정책을 책임지는 정부부서의 수장에 오른 것은 그가 처음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는 문화부장관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래서 사람의 앞일은 알 수가 없다. 김명곤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속세와 출세간의 경계인 피안교(彼岸橋)를 지나 청정무구한 불법의 세계로 들어간다. 차안과 피안의 사이에는 금당천이 흐르고...... 이 다리는 피안의 강을 건너서 열반에 이르는 길을 상징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피안의 강이 흐르고 있으니, 그 강을 건너고 못 건너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


*대흥사 부도와 부도비

 

피안교를 지나 금당천을 따라서 올라가면 '頭輪山大興寺'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는 대흥사 일주문을 만난다. 현무교 위에 있는 일주문과는 달리 이곳의 일주문은 단청이 화려하게 입혀져 있다. 대흥사로 이름이 바뀐 뒤 대둔사 일주문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 길가에 대흥사를 중흥시킨 청허 휴정(淸虛休靜)과 그의 문하에서 나온 13대종사(大宗師), 13대강사(大講師)를 비롯한 고승들의 부도(浮屠) 56기와 탑비 17기가 세워져 있는 부도전(浮屠田)이 나온다. 서산대사의 부도를 중심으로 늘어서 있는 13대종사와 13대강사의 부도와 탑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부도와 탑비는 그 자체로 사찰의 살아 있는 역사이고 문화유적이다. 부도전의 규모로 볼 때 대흥사가 얼마나 찬란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가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부도전 앞에 서 있으려니 역대 고승들의 법문이 귓가에 쩌렁쩌렁 들려오는 듯하다. 이곳의 부도와 탑비는 대부분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사이의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고승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부도와 그들의 행적을 적은 탑비는 당시의 사회와 역사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불교조각사와 불교사상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소중한 자료다. 

 

대흥사 부도전은 보물 제1347호로 지정된 휴정의 부도로 유명하다. 그의 부도는 1631년, 그의 비석은 1647년에 세워진 것이다. 휴정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에서 뒤로 5m 정도 떨어져 있는 부도는 높이가 2.6m인데, 전체적으로 팔각형을 기본형태로 한 팔각당식 계통이다. 상중하 삼단으로 이루어진 받침돌(基壇)의 밑받침돌(下臺石)에는 가늘고 긴 안상(眼像)과 아래로 향한 연꽃(覆蓮)을, 가운데받침돌(中臺石)에는 동물상을, 윗받침돌(上臺石)에는 위로 향한 연꽃(仰蓮)을 새겨놓았다. 받침돌 위에 놓인 몸돌(塔身)에는 '청허당(淸虛堂)'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 부도의 주인공이 휴정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지붕돌(屋蓋石) 아랫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을 조각하였고, 꼭대기(相輪部) 받침에 용머리를 조각한 머리장식은 높직한 꽃봉오리모양(寶珠)을 이루고 있다. 지붕돌 팔각(八角)의 귀꽃 자리에는 여섯 마리의 용과 한 마리의 쥐를 부조하였다. 이곳의 부도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는 휴정의 부도는 그 조각기법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장흥보림사서부도(長興寶林寺西浮屠, 보물 제156호)와 같은 계통의 작품이다.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호는 청허(淸虛), 법명은 휴정(休靜)으로 묘향산에서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으로도 불린다. 그는 성장하여 15세 때 과거를 보았으나 실패하고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과 청학동(靑鶴洞), 칠불동(七佛洞) 등지의 사찰을 유람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입문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화엄경(華嚴經)과 원각경(圓覺經), 능엄경(楞嚴經), 유마경(維摩經),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등 여러 불교 경전의 깊은 교리를 탐구하다가 문득 깨달은 바 있어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를 하였다. 1540년(중종 35년)에는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과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 육공(六空), 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靈觀)을 모시고 구족계를 받았다. 1549년(명종 4년)에는 승과(僧科)에 급제한 뒤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생각한 그는 1556년 그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 두류산과 같은 명산들을 찾아서 운수행각을 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감록(鄭鑑錄)에 따라 정여립(鄭汝立)이 왕위에 오른다는 도참설을 퍼뜨린 역모(逆謀)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역모에 가담한 승려 무업(無業)은 휴정과 유정(惟政)도 연루되었다고 주장하여 한때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직접 심문한 결과 곧 그의 무고함은 밝혀졌다. 선조는 그를 석방하면서 친필 묵죽(墨竹)그림 한 폭을 하사하였다. 감사의 마음으로 휴정은 즉석에서 선조에게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 올린다. 그의 시에 감동한 선조도 시 한 수를 지었는데, 이 시가 청허당집(淸虛堂集)에 실려 전한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피난한 선조는 묘향산에 사신을 보내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의 위기를 알리고 휴정을 부른다. 이에 휴정은 팔도에 격문을 날려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승병을 이끌고 권율(權慄)의 지휘하에 왜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유정은 금강산에서 천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휴정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직접 천오백여 명의 승군을 통솔하여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너무 많음을 이유로 사양하고 제자인 유정에게 그 직을 물려주었다. 선조가 한양으로 환도하자 그는 승군장직을 물러나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면서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이품 당상관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휴정은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한 뒤 결가부좌한 채 85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이때 그의 법랍은 67세였다. 휴정이 열반에 들자 묘향산의 안심사(安心寺),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에 그의 부도가 세워졌고, 해남과 밀양에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에 수충사(酬忠祠) 등 그를 기리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신라 법흥왕 원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대둔사를 창건한 이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초부터 강력하게 실시한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불교계는 그야말로 말법의 시대를 맞이한다. 성종(成宗) 때에 이르면 불교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불교계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박탈당하여 팔도의 사찰은 거의 다 폐사되고 극소수의 승려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사림의 등장으로 유교적 질서에 의해 사회체제가 재편성되는 과정에서 불교계는 제도권에서 탈락한 채 산간총림의 명맥만을 겨우 이어갈 수 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왕조의 운명은 그야말로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때 휴정은 의승군을 조직하여 조선왕조를 구함으로써 그 공로를 인정받아 불교교단을 존폐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으며, 억불정책의 완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  

휴정의 사상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석가세존이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이 선지(禪旨)가 되고 부처가 일생에 말씀한 것이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기에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고 간단명료하게 정의한 그의 선교관(禪敎觀)에 잘 나타나 있다. 이같은 정의는 ‘모든 사람은 불성이 있기(一切衆生悉有佛性)’에 누구나 마음을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성도문(聖道門)과 석가모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불교관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과 오교(五敎)로 설명하고 있다. 삼처전심이란 선지의 근원을 밝힌 것으로 석가모니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은 것(多子塔前分半座)과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인 것(靈山會上擧拈花), 사라쌍수 밑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인 것(沙羅雙樹示雙趺) 등 세 가지를 말한다. 오교란 교의 근원을 밝힌 것으로 석가모니가 49년 동안 설법한 가르침이다. 그것은 인천교(人天敎)를 비롯해서 소승교(小乘敎)와 대승교(大乘敎), 돈교(頓敎), 원교(圓敎) 등 다섯 가지다. 

 

선과 교의 근원은 석가모니로 삼처전심을 통해서 가섭존자(迦葉尊者)는 선의 등불을 이어 받았으며, 교를 널리 전파한 사람은 아난존자(阿難尊者)이다. 이것이 선교의 근원에 대한 휴정의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그는 선교가 지향해야 할 바를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요,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교이다. 마음은 선법(禪法)이요, 말은 교법(敎法)이다.'라고 설명하면서 선을 교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휴정은 선교양종을 제도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이론을 세울 필요에서 선교석(禪敎釋)을 썼다. 이 책은 그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론을 논리정연하게 설파하여 선이 교에 우선한다는 선교관을 정립한 것이다. 그는 교학을 선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써만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는 선과 교를 통합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선교일치보다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입장에 섰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선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능엄경과 반야경을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휴정은 염불을 인정하고 큰 관심을 가졌다. 여기서 염불은 사후의 서방정토 왕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아미타불 즉 부처를 찾는 자성미타(自性彌陀)를 위한 것이다. 즉 그는 염불도 선 수행의 방편으로 보았으며, 염불과 선을 일치시킬 목적으로 자성미타가 자심정토(自心淨土)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유심정토사상(唯心淨土思想)이다. 휴정은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참선법)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화두로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강조했다. 그 이후 경전공부와 선, 그리고 염불은 불교계의 공통된 수행방법으로 자리잡게 된다. 휴정은 유교와 불교, 도교는 이름만 다를 뿐 그 근본적인 가르침이나 궁극적 목적은 같다는 삼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휴정은 성리학의 의리적 도통관(道統觀)에 대하여 불교의 법통관(法統觀)을 제시함으로써 중국의 5가7종 가운데 한 종파로 선종인 임제종의 법통을 강조했다. 휴정은 스스로 자신의 법맥을 '벽송(碧松)은 조(祖)요, 부용(芙蓉)은 부(父)며, 경성(敬聖)은 숙(叔)'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의 제자인 편양 언기(鞭羊彦機)는 태고 보우(太古普愚)로부터 환암 혼수(幻庵混修)-구곡 각운(龜谷覺雲)-벽계 정심(碧溪正心)-벽송 지엄(碧松智嚴)-부용 영관(芙蓉靈觀)을 거쳐 휴정으로 법맥이 전해졌다고 하였으므로 휴정은 해동의 임제종조인 보우의 7대손인 셈이다. 휴정의 법통관은 나중에 이른바 법통논쟁과 종통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법통논쟁의 핵심은 보조법통설과 태고법통설이며, 조계종의 종통논쟁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계종의 종통관(宗統觀)은 석옥 청공(石屋淸珙)-태고 보우-환암 혼수-구곡 각운-벽계 정심-벽송 지엄-부용 영관-청허 휴정-부휴 선수(浮休善修)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한암(漢巖)은 원적 도의(元寂道義)-통효 범일(通曉梵日)-보조 지눌(普照知訥)-각엄(覺嚴)-졸암(拙庵) 연온-구곡 각운-벽계 정심으로 이어지는 종통관을 주장하였다. 현해(玄海)는 최근 한암의 견해를 수용하고 보완해서 원적 도의-보조 자눌-나옹 혜근(懶翁惠勤)-환암 혼수-구곡 각엄-졸암 연온-구곡 각운-벽계 정심-벽송 지엄으로 계승되는 종통관을 제시하였다. 한암과 현해의 종통관은 근대로 들어와 대두한 민족주의와 불교의 주체성을 자각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석가모니가 전한 불법의 전등은 제1조인 마하가섭(摩訶迦葉, Mahakasyapa, 인도)으로부터 제2조 아난다(阿難陀, Ananda), 제12조 마명(馬鳴, Asvaghosa), 제14조 용수(龍樹, Nagarjuna), 제28조 보리 달마(菩提達磨, 중국과 한국 선맥의 종조), 제33조 육조 혜능(六祖慧能), 제35조 마조 도일(馬祖道一), 제38조 임제 의현(臨濟義玄), 제56조 석옥 청공(石屋淸珙, 원나라), 제57조 태고 보우 또는 보조 지눌(고려), 제60조 벽계 정심(조선)을 거쳐 제63조 청허 휴정이 이어받게 된다. 휴정의 법통에 대해서는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로부터 63대째 법통을 계승한 고승에 걸맞게 휴정의 제자는 천여 명을 헤아렸으며, 그 중에서도 수제자는 70여 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특히 유명한 고승으로는 사명 유정(四溟惟政)과 편양 언기, 소요 태능(逍遙太能), 정관 일선(靜觀一禪), 현빈 인영(玄賓印英), 완당 원준(阮堂圓俊), 중관 해안(中觀海眼), 청매 인오(靑梅印悟), 기암 법견(寄巖法堅), 제월 경헌(霽月敬軒), 기허 영규(騎虛靈圭), 뇌묵 처영(雷默處英), 의엄(義嚴) 등이 있으며, 유정과 언기, 태능, 일선은 휴정문하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4대파를 이룬 사람들이다. 휴정의 저서에는 문집인 청허당집과 선교결(禪敎訣), 심법요초(心法要抄), 선교석,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설선의(說禪儀), 제산단의문(諸山壇儀文) 등이 있다. 

조선왕조의 억불숭유정책에도 불구하고 대둔사는 휴정의 문하에서 풍담 의심(楓潭義諶)에서 초의 의순(草衣意恂)에 이르는 13대종사와 만화 원오(萬化圓悟)에서 범해 각안(梵海覺岸)에 이르는 13대강사를 비롯한 수많은 고승과 명승들이 배출되었다. 휴정이 대둔사를 대가람으로 중흥시키면서 그의 문하에서 26명에 이르는 대종사와 대강사가 나오자 대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3대종사들은 누구인가? 제1대종사는 휴정으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은 제64대 조사 편양 언기에게 선을 닦은 뒤 '화엄경과 원각경(圓覺經) 등의 제소(諸疏)를 정리하여 해동 화엄종의 중흥조가 된 풍담 의심이다. 그는 언기의 법맥을 이어 제65대 조사가 된 인물이다. 제2대종사 취여 삼우(醉如三遇)는 뛰어난 담론(談論)으로 많은 사람들을 설복시켰으며, 제3대종사 월저 도안(月渚道安)은 화엄학(華嚴學)과 유불도 삼교에 두루 통달하고 화엄경을 국역하였다. 화엄경의 종지를 깨달은 뒤 묘향산의 월저로부터 육신보살(肉身菩薩)이라는 칭송을 받은 화악 문신(華岳文信)은 제4대종사, 계행(戒行)이 청정하여 추호도 계를 범하지 않았던 설암 추붕(雪巖秋鵬)은 제5대종사가 되었다. 추붕은 대흥사에서 화엄학을 강의하던 곳을 백설당(白雪堂)이라 하였다. 제6대종사는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던 환성 지안(喚惺志安)이다. 그는 조선후기 화엄사상과 선을 함께 닦는 전통을 남긴 환성파의 시조로 임제종의 선지를 철저하게 주창한 선사이기도 했다. 지안은 의심의 법맥을 물려받은 제66대 조사 월담 설제(月潭雪霽)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아 제67대 조사가 되었다. 

 

그리고 불교경전 뿐만 아니라 사서(史書)와 문집들을 두루 섭렵하여 그 학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벽하 대우(碧霞大愚)는 제7대종사, 검소와 청빈의 생활로 평생을 일관했으며 남방의 승려들로부터 선림종주(禪林宗主)로 불린 설봉 회정(雪峰懷淨)은 제8대종사, 문자를 떠난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의 본원을 찾도록 가르친 상월 새봉(霜月璽封)은 제9대종사가 되었다. 새봉은 '유가의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기상(氣像)은 불가의 여여(如如)한 이(理)와 같고, 유가의 태극(太極)은 불가의 일물(一物)과 같으며, 유가의 이일분수(理一分殊)는 불가의 일심만법(一心萬法)과 같다'고 주장하면서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을 천명하였다. 또한 그는 매일 자시에 북두칠성을 향해 절을 올리는 것으로 심증실천(心證實踐)의 법을 삼았다. 이것은 조선시대 불교의 고승이 북두칠성을 숭배한 최초의 사료로 오늘날 칠성신앙의 효시가 된 것으로 보인다. 대흥사의 정진당(精進堂)에서 늘 화엄법회를 열었던 제10대종사 호암 체정(虎巖體淨)은 지안의 법을 전수받고 휴정의 법을 지켜 제68대 조사의 법통을 이었다. 삼장(三藏)에 해박하고 인욕행이 남달리 뛰어났던 함월 해원(涵月海源)은 제11대종사, 휴정의 의발(衣鉢)을 전수한 선가의 대가이자 대승경전에 통달하여 많은 저술을 후세에 남긴 연담 유일(蓮潭有一)은 제12대종사가 되었다.

 

제13대종사는 선과 다도를 일치시키려는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유명한 초의 의순이다. 의순은 정약용으로부터 유학과 시문을 배웠고, 동년배인 김정희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김정희가 9년 동안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그는 다섯 번이나 위문을 하러 갔을 정도였다. 의순은 문인의 풍모가 있어 범패(梵唄)에 능했고 원예와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선과 시(詩)와 차(茶)를 하나로 일체화시킨 삶을 살았으며, 차를 마시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차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 등의 책을 쓰고, 후에 다성(茶聖)으로까지 추앙받게 된다. 그는 정약용과 함께 조선후기의 차문화를 부흥시킨 사람이다. 한편 선에 대한 의순과 백파 긍선(白坡亘璇)이 벌인 논쟁은 유명하다. 백파는 선문수경(禪文手鏡)에서 선을 선승의 근기(根機)에 따라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 의리선(義理禪)의 3등급으로 나누고 선종의 8개 종파를 분류했다. 이에 대해 의순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에서 백파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설법의 주체에 따라 조사선과 여래선, 설법의 내용에 따라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으로 나눌 수 있으며, 조사선은 격외선이고 여래선은 의리선이라고 주장하였다. 선을 둘러싼 의순과 백파간의 논쟁은 조선후기의 침체한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김정희를 비롯한 실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3대강사들은 누구인가? 13대강사는 모두 제10대 대종사였던 체정의 문하에서 나왔다. 제1대강사 만화 원오는 화엄경에 통달하여 사람들로부터 화엄보살(華嚴菩薩)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제2대강사 연해 광열(燕海廣悅)은 성품이 호방하고 담소를 잘하였으며, 마음이 넓고 커서 그의 인물됨을 헤아리기 어려웠다고 한다. 제3대강사 영곡 영우(靈谷永愚)는 경율론(經律論) 삼장에 두루 능하였고, 제4대강사 나암 승제(懶庵勝濟)는 그의 문하에서 삼담(三潭)으로 일컬어지는 춘담(春潭)과 화담(花潭), 운담(雲潭)을 배출하였다. 화엄학과 선, 염불에 모두 밝았던 제5대강사 영파 성규(影坡聖奎)는 연담(蓮潭) 이래 지식과 덕망이 가장 뛰어난 승려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결코 희로(喜怒)를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고,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비심으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보살폈다. 그는 평생 다른 사람의 시비를 말하지 않았으며, 옳은 것이 아니면 티끌만큼도 취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6대강사 운담 정일(雲潭鼎馹)은 12세에 출가하여 유일의 선맥을 이어받았고, 제7대강사로 화엄학의 대가인 퇴암 태관(退庵泰瓘)은 성품이 엄준하여 번잡한 것을 피해 지리산에 은거하면서 고요한 곳을 찾아 참선을 즐겼다. 제8대종사 벽담 행인(碧潭幸仁)은 휴정의 법제(法弟)인 부휴 선수(浮休善修)의 법손으로 대둔사 승당(僧堂)에서 항상 법회를 주관하였다. 

 

제9대강사 금주 복혜(錦州福慧)는 문신 대종사의 증손으로 성격이 호탕하고 대장부의 기개가 있었다. 그는 대둔사의 청으로 용화당(龍華堂)에서 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종풍을 드날릴 만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제10대강사 완호 윤우(玩虎尹佑)는 의순 대종사에게 법을 가르친 인물이다. 제11대강사 낭암 시연(朗巖示演)은 대흥사 약사전(藥師殿)에서 법회를 개설한 사람이고, 제12대강사 연파 혜장(蓮坡惠藏)은 불교는 물론 유교의 경전까지 통달하여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흥사 청풍당(淸風堂)에서 법회를 주관하였다. 그가 30세 때 두륜산 대둔사의 불교학술대회인 두륜회(頭崙會)에서 주석을 맡은 것을 보면 이미 선교 양종의 거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학식이 뛰어나 연담 유일과 종종 비교되기도 하였는데 연담은 대련(大蓮), 연파는 소련(小蓮)으로 일컬어졌다. 또한 그는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용과도 깊은 교우를 가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과 40세의 나이로 그는 대둔사 북미륵암에서 입적(入寂)했다. 제13대강사 범해 각안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경율논 삼장 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경전에도 능통하였다.   


*청신암 아미타삼존불과 후불탱화


*청신암 칠성탱화와 신중탱화

 

대흥사로 가기 전에 비구니들의 수도도량인 청신암(淸神庵)에 먼저 들러서 가기로 한다. 대흥사 산내암자인 청신암은 부도전과 본절의 사이를 흐르는 계곡의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인법당(因法堂)으로 들어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삼존불에게 합장삼배를 올린다. 불문에 들어왔으니 부처님과 보살님들에게 예를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 불단의 왼쪽 벽에는 칠성탱화와 신중탱화가 걸려 있다.

 

원래 청신암에는 후불탱화인 아미타탱화를 비롯해서 칠성탱화, 신중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868년(고종 5년)에 기연(錡衍) 금어가 그린 신중탱화와 1870년에 천여(天如) 금어가 그린 후불탱화다. 신중탱화는 화면 중앙에 새의 깃이 꽂힌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위태천(韋太天)이, 그 옆에는 칼을 든 무장들이 서 있다. 위쪽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합장하고 있고, 그 옆에는 천부중(天部衆)이 시위하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아미타삼존불 뒤에 걸려 있는 후불탱화는 연화대좌에 앉은 아마타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정병을 든 관음보살과 석장을 짚은 지장보살, 그 사이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합장하고 서 있다. 단순한 구성이지만 인물 주위의 바탕을 붉게 칠하고 금니(金泥)로 다소 복잡하게 화염과 구름을 그렸다. 산신탱화는 1935년, 칠성탱화는 1966년에 각각 봉안되었다. 

 

그런데 1999년 10월 10일 새벽에 도둑이 들어 왼쪽 벽에 걸려 있던 탱화 네 점을 잃어버렸다. 지금 걸려 있는 두 점의 탱화는 대흥사 박물관에서 새로 가져온 것이다. 몹쓸 도둑이로고! 나중에 죽어서 염라대왕님께 당할 고초는 어쩌려고..... 진불암에서 가져왔다는 범종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법당을 나오니 비구니 주지 경호스님이 좋은 물로 달인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들어오란다. 가야할 길이 멀기는 하지만 스님의 차공양을 어찌 뿌리칠 수 있으랴! 사방에 붓글씨가 걸려 있는 방으로 들어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반가부좌로 앉자 스님이 찻상을 내온다. 차를 따르는 스님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닦아온 법랍의 세월이 곱게 내려앉아 있다. 스님은 산문생활에서 얻은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스님에게 천식에 좋은 민간요법을 알려주고, 두륜산에서 돌아가면 한약을 보내주겠다는 언약을 한다. 찻잔에 어리는 작설차의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그윽한 차향을 음미하면서 선법과 다도는 하나라고 주장한 초의선사를 생각하다.

 

경호스님에게 범종의 행방을 물으니 본절의 박물관으로 옮겨갔다는 대답이다. 진불암 범종은 하부의 명문(銘文)에 ‘강희사십팔년기축사월일진불암대종(康熙四十八年己丑四月日眞佛庵大鍾)’이라 씌어 있어 1709년(숙종 35년)에 주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범종은 높이가 70㎝이고 아랫지름이 50㎝로 조선후기의 제종기법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다. 범종의 주조에 참여한 화주 수성(守晟)을 비롯하여 주공(鑄工)과 각공(刻工)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정상부에는 용뉴(龍 )와 용통(甬筒)을 두었으며, 용두(龍頭)는 단룡(單龍)으로 나타냈다. 종의 상대(上帶)에는 앙련(仰蓮)을 돌기시켰고 그 아래는 연화를 부조하였으며, 그 아래는 유두(乳頭)모양의 선을 돌려 부각하였다. 중앙부에는 4구의 보살상과 4개의 유곽(乳廓)을 사방으로 부조하였으며, 하부에는 아름다운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유곽 위의 원 안에는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다.

 

경호스님이 관세음보살상이 그려진 부적 하나를 주면서 몸에 지니고 다니라고 한다. 나는 이런 부적이 필요없는 사람이지만 스님의 보살심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지갑에 고이 모셔둔다. 경호스님의 배웅을 받으며 청신암을 나서다.


*대흥사 해탈문

 

*대흥사 대웅보전


*대흥사 백설당 현판


*대흥사 범종각



*대흥사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두륜산

 


 

*대흥사 응진전 앞 삼층석탑

 

해탈문(解脫門)에 이르자 맞배지붕 너머로 두륜산 노승봉과 가련봉이 굽어보고 있다. 대흥사는 해탈문이 사천왕문을 대신하고 있다. 해탈문에 서서 대흥사 경내를 바라보니 천년고찰 대가람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탈문을 지나 무염지(無染池)에 이른다. 무염지라는 이름은 참선문구인 처염상정(處染常淨)에서 유래한 것으로, 진흙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처럼 더러운 곳에 물들지 않고 항상 청정무구한 본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향로봉은 화기(火氣)가 넘치는 산이어서 대흥사는 언제나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한다. 그 화기를 누르기 위해서 무염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흥사 가람의 배치는 전체적으로 볼 때 네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 구역은 돌담이 둘러쳐져 있다. 동쪽에서 흘러내린 금당천(金塘川)을 중심으로 북원(北院)과 남원(南院)으로 구분되고, 남원은 다시 서산대사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으로 나뉜다. 표충사는 남원의 남쪽에 있으며, 대광명전은 남원에서 동쪽으로 3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죽미기(竹迷記)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 원년인 서기 514년 아도화상이 모후 소지부인을 위해 대흥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대흥사 창건설은 이밖에도 대둔사지(大芚寺誌)의 426년(구이신왕 7년)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하여 만일암(挽日庵)이라 하였다는 설, 만일암고기(挽日庵古記)의 508년 무명 선행비구(善行比丘)가 중건하였다는 설, 또 895년(헌강왕 11년)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백 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았던 혜장은 이들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다. 동국여지승람은 대흥사 앞마당에 고려시대의 승려인 신암(信菴)과 사은(思隱), 성유(性柔)의 부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절이 고려 이전에 창건된 것이 확실하다는 혜장의 주장에 따라 신라말 창건설을 수용하고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대흥사가 지금처럼 대가람의 규모를 갖추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당시 휴정이 지휘하는 의승군의 총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휴정은 두륜산을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영원히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로 보고 자신의 의발(衣鉢)을 대흥사에 전할 것을 부촉(咐囑)한다. 정감록에서 공주의 마곡사와 더불어 십승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대흥사터는 일찌기 휴정이 영원히 삼재가 미치지 않을 명당터로 지목하였던 곳이다. 1607년(선조 40) 휴정이 묘향산에서 입적하자 제자들은 그의 사리와 장삼을 이곳으로 모셔왔다. 휴정이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 곳에 전한 뒤부터 대흥사는 크게 중창되었으며, 배불(排佛)의 분위기 속에서도 많은 대종사와 대강사들을 배출하는 등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 후 1665년(현종 6년)에는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고, 1669년에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대흥사의 부속암자가 한때 백여 개를 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홉 곳에 불과하다. 

 

대흥사는 휴정의 문하에서 13대종사와 13대강사가 나올 만큼 조선후기 불교문화의 산실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三十一本山)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만큼 사세를 드날렸다. 31본산이란 전국의 사찰을 31개 구역으로 나누어 본산을 두었던 제도이다. 본산을 본사라고도하는데, 본사(本寺)는 한 종파의 종무(宗務)를 통할하는 본부로 구역 내의 말사(末寺)를 관할하는 큰 사찰을 말한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에는 25교구 본사가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기까지는 11종에 이르는 종파가 있었다. 조선 태종은 1407년에 이들 종파들을 7종으로 감축하였고, 세종은 1424년에 이들을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하였으며, 명종은 1565년에 선교양종제마저 폐지하였다. 그러다가 한일합방 이후 불교탄압정책의 일환으로 1911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조선사찰령에 의해 전국의 사찰을 30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하나의 본산을 두었으며, 1924년에는 본산을 하나 더 추가하면서 31본산제도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대흥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22교구 본사로 해남을 비롯한 목포와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등 8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고 있다. 또 사찰 일원은 문화재 자료 제78호로 지정될 만큼 문화유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대흥사는 지난 1992년 대둔사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최근에 다시 대흥사로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당우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해서 응진전(應眞殿), 침계루(枕溪樓), 명부전(冥府殿), 나한전(羅漢殿), 백설당(白雪堂), 세진당(洗塵堂), 대향각(大香閣), 천불전, 용화당(龍華堂), 도서각(圖書閣), 표충사, 서원, 서산대사유물관, 대광명전(大光明殿), 보련각(寶蓮閣) 등이 있다. 대흥사에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등 조선후기의 명필들이 쓴 각종 현판도 남아 있다.

 

북원을 먼저 돌아보기로 하고 돌담을 돌아서 금당천에 가로놓인 삼진교를 건넌다. 원교체(圓喬體) 또는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이광사의 글씨가 현판으로 걸려 있는 침계루 아래 대문을 지나 대웅전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대흥사 대웅보전은 1665년 봄에 심수가 중건을 시작해서 1667년 가을에 완성한 건물인데, 1899년(고종 광무3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새로 지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정면 계단 아래 소맷돌(계단의 난간 끝부분)에는 표정이 풍부한 돌사자상이 앉아 있다. 대웅보전은 귀기둥을 제외한 전면의 기둥 상부에는 용두를 새기고, 쇠서에도 연꽃을 새겨 조선후기의 불교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 전면에는 각 칸마다 빗살무늬의 2분합문을 달았는데, 특히 살창의 밑부분에 그려진 태극문양이 아름답다. 대웅보전의 내부에는 조선후기의 작품인 목조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삼존불 뒤에는 광무연간에 제작된 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대웅보전 현판의 글씨도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이광사가 쓴 것이다. 원교체의 진수는 날고 뛰는 행서에서 볼 수 있는데, 반전이 심한 반면 필자의 성품과 개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원교체에 대하여 다산 정약용은 '글씨의 모양이 가증스럽다.'는 혹평을 하였으며, 추사는 '원교가 먹을 가는 법과 붓을 잡는 법도 모르고, 구양순과 안진경의 글씨를 일률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원교체에 대한 두 사람의 이러한 비판은 사실과 다른 측면이 많고 또 지나친 것이다. 이 현판에도 추사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1840년(헌종 6년)에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길에 이곳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났다. 그는 대웅보전의 현판을 보고 초의선사에게 '원교는 조선의 글씨를 망쳐놓은 사람인데 어떻게 그가 쓴 현판이 대웅보전에 걸려 있는가?'라고 하면서 역정을 냈다. 그의 성화에 못이겨 초의선사는 원교의 글씨를 내리고 추사의 글씨로 현판을 걸었다. 

 

그로부터 8년 뒤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자신의 글씨를 내리고 원교의 현판을 다시 찾아서 걸도록 초의선사에게 부탁했다. 제주도에서의 외롭고 쓸쓸한 귀양살이를 통해서 추사는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그는 바로 서예의 필법을 초월한 서체의 개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원교와 추사의 일화를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대웅보전의 현판을 바라본다. 보면 볼수록 날씬하면서도 꼿꼿하고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글씨다. 대웅보전 앞 세진당 지붕너머로 노승봉과 가련봉, 두륜봉이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침계루 왼쪽에는 백설당, 오른쪽에는 요사채인 세진당이 자리잡고 있다. 백설당은 제5대종사 설암 추붕이 화엄학을 강의하던 곳으로 지금은 큰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걸려 있던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편액은 광주비엔날레에 전시중이어서, 그대신 '백설당(白雪堂)'이라고 쓴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 글씨도 추사가 쓴 것이다. 무용수의 경쾌한 춤동작처럼 날아갈 듯 운필하는 붓놀림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박규수가 '바다를 건너간 뒤 다른 사람에게 구속받거나 본뜨는 일 없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한 것처럼 추사는 오랜 동안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추사체라는 그만의 독특한 필체를 완성하였다. 대웅보전 동쪽에는 팔각정 건물인 종각과 석가여래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 응진전이 있다.

 

응진전 앞에는 보물 제320호인 삼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라고 한다. 1967년 1월 해체 수리 때 상층기단 내부의 자연석 판석 위에서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가 발견되었다. 높이 4.3m인 이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석탑이다. 아래층과 위층의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의 처마는 두텁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다. 지붕돌의 받침은 각층 4단으로 되어 있으며 추녀의 밑은 직선이다. 탑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비교적 큰 노반(露盤) 위에 복발(覆鉢)과 앙화(仰花), 보륜(寶輪) 등의 상륜부가 남아 있다. 이 탑은 북미륵암에 있는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한반도의 서남해안 지방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대흥사 천불전


*대흥사 천불전에 봉안된 천불상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을 마지막으로 감상하고 다음은 남원을 돌아보기로 한다. 삼진교를 건너 돌계단을 올라오면, 초서에 능했으며 창암체로 유명한 이삼만의 글씨가 현판으로 걸려 있는 가허루(駕虛樓)를 만난다. 허공을 올라탄다니...... 나에게는 하나의 화두다. 가허루의 문지방은 특이하게도 아래를 향해서 휘어져 있어 멍에와 비슷한 형상이다. 그래서 가허루의 '가'자를 '멍에 가(駕)'자로 쓴 것일까? 이 문지방을 오른쪽 발로 먼저 밟고 넘어가면 아들, 왼쪽 발로 밟고 넘어가면 딸을 낳는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아들을 낳기를 원하는 부녀자들은 저 문지방을 넘을 때 오른쪽 발을 먼저 디디고 넘었으리라. 한민족의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의 잔재를 여기서도 목격한다.

 

가허루 문지방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가면 남원의 중심건물인 고색창연한 천불전(千佛殿, 전남유형문화재 48호)이 정면에 자리잡고 있다. 천불전 현판의 글씨는 이광사가 쓴 것이다. 천불전을 바라보며 그 고아한 건축미에 흠뻑 빠져든다. 건물의 정면 세 칸에는 빗꽃살과 소슬빗꽃살창을 달고, 왼쪽 벽에는 한짝 창호를 달았는데, 특히 문살에 조각된 국화와 연꽃, 무궁화 문양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천불전은 1811년(순조 11년)에 남원의 주요 전각들이 불에 탄 뒤 2년 뒤에 제10대강사이자 초의의 스승인 완호 윤우와 제성(濟醒)이 중건한 건물로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이다. 가구(架構)는 앞뒤 평주(平柱)에 올린 대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樑)를 걸었고, 종보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천장을 가리고 있다. 양쪽 옆의 어간기둥에서는 용머리로 장식한 충량(衝樑)을 대들보 위에 걸었다.

 

천불전의 문을 열고 봉안한 금박의 목조석가여래삼존불과 삼존불 뒤로 장엄하게 배열되어 있는 천구의 옥조여래좌상 즉 천불상(千佛像, 전남유형문화재 52호)에 합장삼배를 올린다. 천불이란 과거세에도 천불, 현세에도 천불, 미래세에도 천불이 있다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부처가 두루 존재하고, 또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누구나 차별없이 부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천불상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모두 다르다는 것에 놀란다. 목이 짧고 등이 약간 굽은 듯한 불상의 상호(相好)는 풍만해서 대체로 사각형에 가깝다. 머리에는 중간 계주와 정상 계주가 있으며, 귀는 길고 큰 편이다. 수인(手印)도 여러 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모든 불상의 표면에는 호분(湖粉)을 발라서 흰색을 띄고 있으며, 노란색의 대의(大衣, 설법이나 걸식할 때 입는 옷)를 걸치고 있다. 이 불상들은 19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후기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천불상은 천불전을 중건한 완호의 의뢰로 제자 풍계(楓溪) 등이 경주지역에서 나는 옥돌을 쪼아 6년에 걸쳐 만든 것이다. 1821년 풍계가 쓴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천불상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1817년 풍계는 천불상이 완성되자 세 척의 배에 나눠 싣고 경주 장진포를 출발해서 바닷길을 따라 울산을 거쳐 해남의 대흥사로 향했다. 항해 도중 부산 동래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 한 척이 표류하다가 일본 나가사키현 대도포에 닿았다. 불상을 반갑게 맞이한 일본인들은 서둘러 절을 짓고 봉안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인들의 꿈에 불상들이 나타나,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 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될 수 없다.'고 계시를 하였다. 일본인들은 부처의 뜻을 깨닫고 불상을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 지금처럼 대흥사 천불전에 무사히 봉안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 불상들을 떠나보낼 때 아쉬운 나머지 불상의 어깨나 밑바닥에 일(日)자를 그려 놓았는데 지금도 그 표시가 남아 있다고 한다.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와 동사열전(東師列傳)에도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고재석 금어는 생전에 '내가 몇십 년 전 천불전의 천불상을 분칠할 때 이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니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천불전의 좌우에는 불경을 공부하는 학승들이 거처하는 선방 겸 강당인 용화당(龍華堂, 전남유형문화재 93호)과 학승들을 지도하는 강사들이 머무는 건물이 있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익공식(翼工式) 팔작지붕인 이 건물은 초의의 스승인 완호가 1811년(순조 11년)에 착공하여 1813년에 완공하였다. 건물의 오른쪽은 지붕 옆면이 단순한 맞배지붕이고, 왼쪽은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내부는 서쪽에 온돌방 세 개와 부엌, 중앙부에 큰 선방, 동쪽에 작은 방 두 개가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선방의 앞뒤로는 큰 퇴와 툇마루를 두었고, 부엌쪽에는 꽤 넓은 다락방이 있으며 부엌 한쪽에 계단을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양식으로 일부 기둥 위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천불전과 용화당의 남쪽으로 별도로 담이 둘러쳐진 구역이 있어 들어가보려고 하였으나 입구에 '이곳은 수행도량이오니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쓴 팻말이 세워져 있다. 발길을 돌려 표충사로 향한다.


*두륜산 표충사


*표충사 서산대사 영정


*표충사 사명대사 영정


*표충사 처영대사 영정


*표충사에서 바라본 서산대사유물관과 향로봉

 

표충사(表忠祠, 전남기념물 19호)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휴정과 그의 제자 유정, 처영 등 세 사람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조선 1788년(정조 12년)에 천묵(天默)이 세 사람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조정에 상소하자 정조는 친히 표충사라 사액하고, 이듬해 사당을 건립하였다. 정문인 호국문(護國門)을 들어서면 2층 누각인 의중당(義重堂)이 나온다. 의중당은 봄과 가을에 표충사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차리던 곳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중문격인 내삼문은 정면 세칸의 맞배지붕 솟을삼문으로, 예재문(禮齋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예재문 안으로 들어가면 정조가 쓴 친필 '表忠祠' 편액이 걸린 사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表忠碑閣)과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사당은 정면 세칸, 측면 세칸으로 내부는 마루를 깐 통칸이다. 공포는 주심포계의 2익공(翼工) 양식이며, 지붕은 맞배집이다.

 

사당의 안에 모셔진 서산대사와 처영대사, 유정대사의 영정에 합장삼배로 예를 표한다. 휴정의 영정 왼쪽 위에는 한문으로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는 뜻의 글귀가 적혀 있다. 인생무상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말이다. 사당 왼쪽에 있는 조사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우물마루를 깐 2익공 양식의 맞배집이다. 조사전에는 대흥사 출신 고승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 창건주인 아도화상과 휴정의 문중에서 법손이 가장 번창한 편양 언기, 소요 태능의 영정도 이곳에 있다. 비각에는 1791년에 세운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와 그 이듬해 세운 표충사건사적비(表忠祠建事蹟碑)가 있다.

 

의중당의 동쪽에는 휴정의 유품을 비롯한 사중유물(寺中遺物)을 보관하는 보장각(寶藏閣)이 있었는데, 지금은 서산대사유물관으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선조의 하사품인 옥발(玉鉢)과 비취옥발(翡翠玉鉢), 수저, 금란가사(金襴袈裟), 금자병풍(金字屛風), 표충사총섭사령패, 서산대사의 친필, 교지, 신발, 초의가 그린 관음도, 대광명전 상량문, 승군단(僧軍團)의 표지물, 철제방패, 금과 은으로 쓴 불경, 금동불상 등 총 24종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서산대사유물은 2002년 12월 7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357호로 지정되었다.

 

표충사를 나오니 서산대사유물관 지붕너머로 향로봉이 솟아 있다. 유물관은 다음에 찾기로 하고 대광명전으로 향한다. 남원과 표충사 사이로 난 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대광명전이 나오는데, 이 지역을 동국선원(東國禪院)이라고도 한다. 이곳에도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표충사 동쪽으로 3백미터 지점에 있는 대광명전(大光明殿, 전남유형문화재 제94호)은 제13대종사인 초의선사가 1841년(조선 헌종 7년)에 세웠다. 이러한 사실은 대광명전을 수리할 때에 나온 ‘道光二十年辛丑四月十三日巳時上樑’이란 상량문에서 알 수 있다. 대광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맛배지붕 건물로,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삼신불을 봉안하였다.

 

불단의 위에는 우물 정자(井字)로 된 천장을 높게 달고, 연화문과 운학(雲鶴)문양을 그렸다. 초의선사가 직접 단청을 했다고 전해지는 연화문과 운학문양은 그 색채와 문양이 특이하면서도 아름답다. 벽화의 문양도 뛰어난 작품이다. 또 두 개의 대들보는 가운데가 자연스럽게 위로 휘어진 곡선을 그대로 살려서 얹었다. 외부 포작(包作)의 기법은 초익공으로, 기둥 사이의 화반(花盤)과 창방, 평방, 장여(長舌), 굴도리에는 연화문과 운학의 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창호는 전면 가운데 칸에는 솟을빗살문의 삼분합문, 좌우 협칸에는 솟을빗살문의 이분합문을 달았는데 그 세공기법이 매우 정교하다. 대광명전 옆에는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정면 9칸의 보련각(寶蓮閣)과 요사채가 있다. 

 

대광명전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금당천의 상류인 금강골 삼거리를 지난다.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일지암으로 가려면 여기서 오른쪽 길로 가야 한다. 산을 오를수록 점점 더 가파라지기 시작한다. 산기슭에는 곳곳에 동백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꽃샘추위만 아니었다면 붉은 동백꽃들이 만발했을 텐데..... 진달래도 연분홍 꽃봉오리가 올라오다가 말고 잔뜩 웅크린 채 추위에 떨고 있다. 산기슭에는 상록수인 후박나무도 많이 보인다. 이 나무의 껍질이 바로 한약재로 쓰는 후박(厚朴)이다. 방향화습약으로 분류되는 후박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쓰면서 맵다. 12경맥 중에서 비위와 폐, 대장경으로 들어가 기의 순환을 돕고 습기를 말린다. 또한 정체된 기를 잘 내려가게 하고, 기침을 멈추게 하며, 통증을 완화시키는 효능이 있다. 그래서 후박은 기가 막혀서 오는 일체의 증세와 설사, 습담, 기침 등에 매우 자주 처방되는 중요한 한약재다. 나도 임상에서 후박을 많이 쓰는 편이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북미륵암에서 바라본 도솔봉과 연화봉 능선


*북미륵암 삼층석탑


*북미륵암 극락대에서 바라본 가련봉


*북미륵암 극락대에서 바라본 두륜봉

 

노승봉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의 중간쯤에 자리잡은 북미륵암(北彌勒庵, 일명 북암)에 올라서니 비로소 전망이 탁 트이면서 두륜산의 계곡과 산봉우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북암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용화전(龍華殿)의 마애여래좌상(국보 308호)과 두 기의 삼층석탑(보물 301호)으로 유명한 암자다. 북암에는 지금 마애여래좌상의 전실인 용화전의 보수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다. 용화전은 미륵불상(彌勒佛像)을 모시는 전각이니 이 마애여래좌상의 주인공은 바로 미륵불이다. 이곳의 주민들도 이 불상을 미륵불로 부르고 있다. 용화전은 미륵전(彌勒殿)과 같은 말로 미래불인 미륵불이 용화세계(龍華世界)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전각인데,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모신다고 해서 장륙전이라고도 한다. 용화전 안에는 도솔천에서 설법중인 미륵보살이나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게 될 미륵불을 봉안하며, 한국에서는 주로 미륵불을 봉안한다. 김제의 금산사(金山寺) 미륵전(국보 62호)에도 거대한 미륵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신발을 벗고 용화전 안으로 들어가 경건한 마음으로 미륵부처님께 합장삼배를 올린다.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용화세계에 태어나기를......

 

이 미륵불상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으니..... 아주 먼 옛날 천동(天童)과 천녀(天女)는 죄를 짓고 하늘나라에서 쫓겨났다. 그들이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하루안에 바위에다 불상을 만드는 것으로 속죄하는 길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루만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해가 지지 못하도록 천년수에다 해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나서 천동은 남쪽 바위에서 불상을 조각하고 천녀는 북쪽 바위에서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천녀는 미륵불좌상을 새겼기 때문에 미륵불입상을 새긴 천동보다 먼저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불상을 다 만든 천녀는 천동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싶은 욕심에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잘라 버렸다. 서산 너머로 해가 지자 천동은 더 이상 불상을 조각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하늘나라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쌍한 천동..... 전설이 맞는 것일까! 북미륵암의 미륵불상은 완성된 모습인데 비해 남미륵암의 미륵불상은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해를 걸어 놓았다던 천년수는 ‘해를 잡아맨다(挽日)’는 뜻의 만일암(挽日庵)터에 지금도 살아 있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가 제자인 미륵(Maitreya)에게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고 수기(授記)한 것과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을 근거로 나타난 신앙이다. 삼부경에 의하면 미륵보살을 일심으로 믿고 덕을 닦으면 죽어서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세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따라 염부제(閻浮提, 사바세계)로 내려와 가장 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한다. 미래불인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빠짐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사상을 근거로 출현하였다. 미륵하생경과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에 따르면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의 교화를 받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죽은 뒤 56억7천만 년이 지나면 미륵보살은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밑에서 성불하며, 세 번에 걸쳐 사제(四諦)와 십이연기(十二緣起) 등을 설법(龍華三會)하여 272억 사람을 교화하고, 이로부터 6만 년 뒤 열반에 든다고 한다.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은 바로 재림할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을 품고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하는 도솔천의 미륵보살을 표현한 것이다.

 

미륵불이 재림했을 때의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미륵불 세상인 용화세계가 도래하면 이 땅은 상카(Sankha)라는 전륜성왕이 정법으로 다스리는 이상적인 불국토로 변하여 꽃과 향이 뒤덮여 있고, 인간의 수명은 8만4천세나 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찬 풍요롭고 안락한 세상이 된다. 즉 이 세계는 억압과 착취와 차별이 사라지고 자유와 평등과 평화가 넘치는 그런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화회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보시하거나,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자비심을 내거나, 분쟁에 휩싸인 사람들을 화해시켜 주거나, 지혜와 계행(戒行)을 닦고 인욕을 길러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또 경전을 열심히 독송하거나, 부처님을 공양하거나, 절을 세워 설법하거나, 탑과 사리를 공양하거나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불경에 나오는 보살들 중에서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러기에 미륵보살에 대한 민중들의 신앙은 그만큼 뿌리깊은 것이었다. 미륵신앙에는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도솔천 상생신앙과 미륵불이 내려와 말세로부터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미륵하생신앙의 두 가지 흐름이 있다. 이중에서 미륵하생신앙은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메시아 즉 구세주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미륵신앙은 승려중심의 이론에 치우친 불교에 대하여 민중중심의 구체성과 운동성을 띤 신앙형태라고 할 수 있다. 미륵신앙은 미래세의 이상적인 불국토를 염원하는 희망의 신앙이요,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현실을 뒤엎고 이 땅에 불국토를 실현하려는 사회개혁의 신앙이자 혁명의 신앙이었다. 특히 말세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미륵하생신앙은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되고 핍박받는 민중들에게 복음으로 받아들여져 사회적 모순을 일거에 타파하고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 구세주로서의 미륵불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사회개혁이나 사회혁명의 이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미륵신앙은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피지배층이나 하층민들에게 희망의 신앙이 되어 갔다.

 

미륵신앙은 인도를 비롯하여 중국과 티베트, 한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삼국시대에 미륵신앙이 전래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신앙은 한국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지명이나 산이름, 절이름에서 미륵, 용화, 도솔이라는 명칭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미륵신앙의 영향이다. 많은 사찰에 세워진  미륵전이나 용화전,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미륵불상, 민간에 널리 퍼져 나간 미륵불과 관련된 설화 등도 미륵신앙의 영향이다.

 

한국은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고구려에 순도(順道)를 파견하면서 불교가 들어오게 된다. 부견은 서역으로 사신을 보내 미륵불상을 구해 왔던 인물이다. 이것으로 보아 아마도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부터 미륵신앙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에서 발견된 신묘명금동삼존입상(辛卯銘金銅三尊立像)의 명문에 '죽은 어머니가 미륵삼회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발원하면서 미륵불상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미륵불광사(彌勒佛光寺)와 미륵사 등의 창건시기나 미륵반가사유상의 조성이 성행했던 시기로 보아 6세기 이후부터 미륵신앙이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불광사는 성왕 때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으며, 그의 재위 30년(552년)에는 불경과 미륵석불을 일본에 보내 주기도 하였다. 위덕왕 때 신라의 승려 진자(眞慈)가 미륵화신(彌勒化身)을 친견하기 위해 웅진의 수원사(水源寺)를 찾았다는 미륵선화설화(彌勒仙花說話)는 미륵신앙이 이미 공주지역에서도 유행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익산을 중요시하여 별도(別都)로 삼은 무왕은 634년(무왕 35)에 미륵삼존이 출현했다는 용화산 아래의 연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였다. 삼국에서 그 규모가 가장 컸던 미륵사는 백제 미륵신앙의 중심이었다. 미륵삼존 출현설은 백제의 미륵신앙이 하생신앙이었음을 알려 준다. 백제에서는 미륵신앙이 주로 왕권의 강화와 국가통치이념으로 작용하였다.

 

신라에서도 미륵신앙은 왕실과 화랑도를 중심으로 폭넓게 수용되었다. 눌지왕 때 세워진 신라 최초의 사찰이었던 흥륜사(興輪寺)의 주불은 바로 미륵불이었으며, 진흥왕은 왕자의 이름을 금륜과 동륜으로 지어 전륜성왕의 이상적인 정치를 계승하고자 했다. 진평왕 때 흥륜사 승려 진자가 미륵불상 앞에서 미륵불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출현해 줄 것을 발원한 결과 미시(未尸)라는 화랑이 나타나 7년 동안이나 국선(國仙)으로 받들었다는 미륵선화설화에서 화랑도와 미륵신앙의 깊은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진평왕 때의 화랑이었던 김유신은 그의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는데, 용화란 미륵보살이 미래에 성불할 용화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화랑 죽지(竹旨)의 탄생설화에도 미륵신앙이 나타나 있다. 술종공(述宗公)이 죽지령(竹旨嶺)의 길을 닦는 한 거사를 북봉에 장사지내고 무덤 앞에 미륵석상을 세우고 난 뒤, 그의 부인이 임신하여 죽지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라의 미륵신앙은 하생신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라는 왕실과 귀족세력 등 지배층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통해 불교적 이상세계를 신라사회에 실현하려고 하였으며, 미륵불의 출현을 고대하는 민중들의 구원론적 열망을 이용하여 화랑도에 미륵신앙을 수용함으로써 정치적 안정과 삼국통일을 이루려고 했던 측면이 발견된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불교학의 발달과 더불어 미륵신앙에 대한 저술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미륵사상은 학문적 체계를 갖추게 된다. 원효는 미륵상생경에 대한 종요(宗要)와 소(疏), 원측(圓測)은 미륵상생경약찬(彌勒上生經略贊), 의적(義寂)은 미륵상생경요간(彌勒上生經料簡), 태현(太賢)은 미륵삼부경에 대한 고적기(古迹記), 경흥(憬興)은 미륵상생경소(彌勒上生經疏)와 미륵하생경소(彌勒下生經疏), 미륵경수의술문(彌勒經遂義述文), 미륵경술찬(彌勒經述贊)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미륵경전들이 대량으로 유포된 결과, 삼국유사의 백월산이성설화(白月山二聖說話)에서 보듯이 미륵하생경에 나오는 미륵의 부모 이름(수범마와 범마월)이 신라인의 이름에까지 등장하고, 수행을 통하여 미륵불이 되었다는 등 미륵하생성불사상의 신라적 변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경덕왕 때의 승려이자 화랑이었던 월명(月明)은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꽃으로 하여금 미륵좌주를 친히 모셔 줄 것을 노래함으로써 미륵하생을 기원하였으며, 월명과 동시대인이었던 충담(忠談)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 두 차례 선덕왕 때 승려 생의(生義)가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남산 삼화령(三花嶺)에 모신 미륵세존에게 차공양을 올렸다. 경덕왕 때의 진표(眞表)는 지장보살로부터 현신수계(現身授戒), 미륵보살로부터 점찰법(占察法) 두 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받고 독특한 미륵신앙을 세운 뒤,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봉안하여 법상종의 근본도량이 된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미륵신앙은 신라의 승려들에게 이미 보편적인 신앙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진표와 같은 시대 사람인 유가종의 개산조 태현이 용장사(茸長寺) 미륵장륙석상을 돌 때 불상도 그를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설화, 죽은 아이를 묻었던 땅에서 미륵석상이 나왔다는 조신(調信)의 설화 등 미륵사상과 관련된 설화들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던 것은 미륵신앙이 신라인들의 정신세계에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증거다.

신라는 말기에 이르러 무열계와 내물계의 왕위쟁탈전과 지방호족세력의 반란, 농민경제의 몰락으로 멸망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말세적 혼란기에 궁예(弓裔)는 미륵불을 자칭하고 901년 후고구려를 세운다. 미륵하생신앙을 원용하여 그가 미륵불이라 자칭한 것은 신라 말기의 혼란한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민중들은 이미 신라 왕실과 지배귀족층이 더이상 그들의 희망이 아니라 혁명의 대상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궁예는 미륵불로 자처하여 그들에게 자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인식시킴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는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 태평시대가 도래한다는 미륵하생신앙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기에, 궁예는 그들에게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 현실을 개혁하러 온 혁명가로 비쳐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금관을 쓰고 가사를 입은 궁예는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관세음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 아미타불)이라 하여 협시보살로 삼았다.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모시는 신라의 법상종파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중요시하였으므로 궁예는 미륵을 주존으로 하는 법상종 계열의 승려였던 것이 확실하다. 그는 이미 세달사(世達寺)에서 선종(善宗)이라는 법명을 받은 승려였기에 신라 법상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또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만들고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행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태봉으로 국호를 바꾼 궁예는 918년 왕건을 추종하는 홍유(洪儒)와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 등의 반란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다가 부양(斧壤, 지금의 平康)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궁예는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탄생설화를 보면 그는 엄연한 신라의 왕족이었으나 왕실의 내분으로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였던 듯하며, 유모의 손에 의해 키워지다가 출가하였다. 이런 까닭에 그는 성장하면서부터 신라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한편 신라 말기의 거듭되는 흉년과 과도한 세금으로 몰락한 백성들은 유망하여 초적(草賊)이 되었다. 이들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사람은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었다. 궁예는 처음에는 기훤의 부하가 되었으나 그의 홀대로 양길의 휘하로 들어갔다. 세력을 쌓은 궁예는 부하들에 의해 장군으로 추대된 뒤 양길을 패망시키고 한강유역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초적의 무리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휘하로 몰려들었으며, 그의 세력은 신라 고대사회를 무너뜨리는 촉매제가 되었다. 궁예는 한강유역 전역을 평정하면서 후삼국의 하나인 태봉을 건국할 만큼 정치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는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초적의 무리를 근거로 나라를 세운 궁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하들을 항상 의심하고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송악에서 철원으로 천도한 것과 왕건에 대한 견제도 그의 자위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는 삼국을 통합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우선 지방호족들처럼 자신의 기반도 없이 도적의 무리로 출발한 궁예의 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궁예의 세력은 국가를 운영하거나 질서를 회복할 만한 경륜도 부족했고, 조세제도를 개선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요역과 세금을 무겁게 하고 궁궐을 크게 짓는 등 더욱 가혹하게 백성들을 수탈했다. 이러한 궁예의 통치는 신라사회의 모순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민심이 등을 돌리는 원인이 되었다. 궁예는 나라를 세운 뒤에도 국호(후고구려-마진-태봉)와 연호(무태-성책-수덕만세-정개)를 자주 바꾸었는데, 이것은 그가 한 나라를 이끌어 갈 정치적 이념이나 능력의 한계를 말해준다. 그는 호족세력을 포용하지도 못했으며 신라 말기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의 불교인 선종과 6두품 지식인들이 새로운 나라의 건설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라 말기의 사회적 모순을 혁파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부하들의 반감을 초래하여 그가 완전한 국가체제를 갖추고 왕권을 강화하기도 전에 축출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죽은 지 천 년도 더 된 궁예를 지금도 미륵불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포천의 반월성터에 있는 궁예 미륵상이나 안성 국사봉의 궁예 미륵이 바로 그것이다. 궁예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미륵불로 살아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궁예에 대한 역사서의 기록은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고려의 역사가들이 궁예를 폭군으로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 했던가!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시대로 접어들자 사찰을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것은 미륵신앙이 승려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미륵신앙을 중시하는 법상종(法相宗)이 선종(禪宗)이나 화엄종(華嚴宗)에 밀리면서 나타난 결과다. 그러나 미륵불에 대한 고려 왕실의 신앙은 여전히 독실하였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면서 개경의 미륵사에 공신당(功臣堂)을 두고 매년 10월 법회를 열어 개국공신들의 명복을 빌었고, 현종은 모후(母后)의 원찰로 금당에 미륵불을 봉안한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하고 법상종 승려들을 주지로 임명하였다. 그 결과 현화사를 중심으로 한 법상종은 고려 중기의 대표적 교단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현화사에 머물렀던 고승에는 대지(大智)와 혜소(慧炤), 지광(智光), 영념(英念), 혜덕(慧德) 등이 있으며, 이 절에서는 현종의 발원으로 매년 초파일부터 3일 동안 왕실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미륵보살회와 미타불회가 열렸다. 1070년(문종 24년)에는 흥왕사에 미륵불을 모신 자씨전(慈氏殿)이 창건되었고, 예종은 1109년 4월 미륵사에서 법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충렬왕 때인 1301년 9월과 그 이듬해 2월 두 번에 걸쳐 광명사(廣明寺)에서 용화회(龍華會)가 열렸으며, 조계산에서는 일주일 동안 왕사 무외(無畏)가 주관하는 용화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려 왕실의 미륵신앙은 왕실의 안녕과 왕권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고려 왕실과 마찬가지로 미륵신앙은 민중들에게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민중들은 주로 지방의 미륵사원을 중심으로 미륵불을 신앙하였다. 미륵불을 주불로 모신 금산사나 현화사 말고도 광종 때 혜명(慧明)은 논산 반야산에 관촉사(灌燭寺)를 창건하였으며, 성종 10년(991년) 현탄(玄坦)은 용두산(龍頭山)에 금장사(金藏寺)을 창건하고 금당에 미륵삼존불을 모셨다. 창건연대와 창건주가 불명인 도솔사(兜率寺)는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전한다. 일기에 의하면 옥구에서 장사(長沙)로 가는 길가에 도솔사가 있었고, 그곳에 미륵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목종 9년(1006년)에는 관촉사에 미륵석불상을 세웠는데, 이 불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충선왕 2년(1310년) 왕사 진감(眞鑑)과 그의 제자 굉지(宏之)는 금장사 미륵삼존에 다시 금을 입혔다. 관촉사 미륵석불상에 전해오는 여러 가지 영험설화는 당시 고려사회의 민중들 사이에 미륵신앙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자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으로 민중들은 더욱더 미륵신앙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미륵신앙이 불안정한 사회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민중들은 용화회에 참석하여 미륵불에게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발원하면서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어 두는 풍속이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1309년에 세워진 고성삼일포매향비(高城三日浦埋香碑)와 우왕 13년(1387년)에 세워진 사천매향비(泗川埋香碑)에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고려 민중들의 미륵신앙은 미륵불이 출현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여주기를 염원하는 메시아적 미륵하생신앙이었다.  

고려 말기의 말세적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우왕 때 강원도 고성출신의 이금(伊金)이라는 승려가 미륵불을 자칭하고 나타났다. 그는 '나는 신통력으로 석가모니불을 강림하게 할 수 있다. 다른 귀신을 믿고 제사를 지내거나 소와 말의 고기를 먹는 자, 재물을 남에게 보시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며, 내 말을 믿지 않으면 해와 달이 빛을 잃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그는 또 '내가 술법을 부리면 푸른 꽃이 피어나고 나무에서 곡식이 열릴 것이며, 곡식을 한번 심어서 두번 거둘 수 있다. 나는 산천귀신들을 일본에 보내 왜적들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고 미륵하생경에 나오는 예언도 하였다.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이금의 예언을 믿고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고 14세기 후반 거듭된 왜적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도술로써 왜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그의 예언은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이금을 미륵불의 화신으로 믿은 백성들은 쌀이나 비단, 금, 은 등을 보시하고, 소나 말의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재물이 있는 사람은 남에게 나누어 주었다. 심지어는 무당들도 그를 미륵불로 믿고 공경하여 성황당과 사묘(祠廟)의 신위를 철거하고 그에게 복을 빌었다. 이금의 일행이 이르는 곳마다 이들을 맞이하여 객사에 머물게 하는 수령도 있었다. 그러나 1382년 이들이 청주에 도착했을 때, 청주목사 권화(權和)는 이금을 비롯한 지도자급 5명을 체포하고 사형에 처했다. 비슷한 시기에 사노(私奴) 무적도 미륵불을 자칭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이금과 무적의 사건은 고려말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유교로 무장한 지식인들에게 불교를 탄압할 수 있는 절호의 구실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고려사 열전의 권화전에 매우 간략하게 요민(妖民)으로 나오는 이금의 기록만으로 그를 제대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금을 추종하는 신도 중에는 고위관리들까지 있을 정도로 신앙집단의 규모가 매우 컸으며, 당시 사회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석가모니불을 강림하게 할 수 있다거나 나무에서 곡식을 열리게 한다거나 곡식을 한번 심어서 두번 거둘 수 있다고 한 것이나, 재물을 남에게 보시하라고 한 것 등은 당시 사회의 질곡에 빠져 신음하며 구세주를 고대하던 민중들에게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또 고려말까지도 성행했던 무속의 무당들까지 이금을 믿고 개종하고, 일부 수령들이 그의 무리를 환대하고 신도가 된 사실에서 그가 뛰어난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금은 고려왕조를 대체할 수 있는 정치적 이념이나 능력이 없었다. 이금의 예에서 보듯이 고려 말기의 미륵신앙은 민간신앙의 무속과 결합되면서 점차 주술적인 성격과 기복신앙의 형태로 변화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조선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적 이념에 의한 지배체제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불교에 대한 탄압으로 조선 중기에 이르면 공인된 종파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 일부 왕의 호불정책과 왕실의 원찰이 있기는 했지만 상류층의 불교신앙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조선왕조의 억압이 계속되자 불교는 점차 민중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미륵신앙은 하층민이나 노비층과 같은 민중들의 가슴속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미륵신앙은 민간신앙화되면서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민중들은 사찰의 미륵불뿐만 아니라 산과 들의 입석이나 바위조차도 미륵불로 인식하고 수복강녕(壽福康寧)이나 득남(得男), 치병(治病), 수호(守護) 등의 발원을 하고 치성을 드렸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거대한 미륵불상은 거의 조성되지 않았고, 대체로 규모가 작고 조잡한 불상들이 주로 만들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쟁의 참화가 두 차례나 휩쓸고 지나갔음에도 조선왕조는 무너지지 않았으나 백성들의 삶은 비참한 것이었다. 숙종대에 이르면 붕당정치가 극도에 달하여 당파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유학자들은 백성들을 위해서 정권쟁탈전을 벌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속한 당파만을를 위해서 투쟁하였다. 숙종은 당파싸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였지만 민중들의 삶은 조정과 지방관리들의 가렴주구로 더욱더 피폐해져만 갔다. 도탄에 빠진 하층민과 노비층에게는 신라왕조나 고려왕조나 조선왕조나 다 그 놈이 그 놈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미륵불이 나타나기를 염원하며, 착취와 억압이 사라진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민중들의 가슴에 미륵하생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면서 바야흐로 혁명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바로 이때 승려 여환(呂還)은 1688년(숙종 14년) '석가불이 다하고 미륵불이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라고 부르짖으면서 자신을 미륵불이라 자처하고 나섰다. 석가불은 현세불로 숙종 나아가 조선왕조를 겨냥한 것이었으며, 미륵불은 미래불로 여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아내인 원향(遠香)과 무녀 계화(戒化), 아전 정원태(鄭元泰), 그리고 황회(黃繪) 등을 주축으로 경기도 양주군 청송면을 중심으로 미륵하생신앙을 유포하면서, 황해도의 구월산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장길산(張吉山)의 활빈도(活貧徒)와 연합하여 부패한 조선왕조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의 휘하로 모여든 사람들은 주로 하층민과 노비층, 그리고 무당들이었으며, 그 세력은 황해도와 강원도에까지 미칠 만큼 대단히 컸다. 거듭되는 전쟁과 흉년으로 인한 기아와 질병, 중앙정부와 지방관들에 의한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며 지옥같은 삶을 견디면서 미륵불이 출현하여 해방시켜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민중들에게 여환은 그들의 희망이자 메시아였다.

 

여환은 미륵신앙에 민간신앙의 용신앙을 수용하여 '이제부터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예언하면서 그의 아내를 용녀부인, 정씨 성을 가진 무당 계화는 정성인(鄭聖人)으로 불렀다. 여환은 '7월에 큰 비가 와서 도성이 무너질 것이다.'라는 예언을 하고 추종자들에게 무기와 군복을 준비시켰다. 여환은 폭우로 도성이 무너질 때 궁궐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7월 13일 무장한 신도들을 양주 대전리(大田里)에 집결시켰다. 여환을 비롯한 지도부는 7월 15일 먼저 상경하여 폭우가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폭우가 내리지 않자 '아직은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아 하늘이 응하지 않는다.'고 탄식하면서 7월 16일 양주로 돌아갔다. 이들의 혁명계획은 결국 발각되어 여환과 추종자 11명은 처형되고 장길산은 잠적하였다. 여환은 미륵하생신앙을 원용해서 조선왕조를 위협할 만한 큰 세력을 형성했지만, 그의 거사는 준비도 부족했고 초월적인 힘과 천재지변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까닭에 실패하고 말았다. 여환이 사라진 뒤에도 미륵불을 일컫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민중들의 신앙은 미륵신앙과 더불어 타력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민중성이 강한 아미타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사회가 민중들에게 매우 절망적인 사회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민중들이 아무리 지극정성으로 기도하고 피눈물나는 노력을 기울여도 현실은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절망적 상황으로 치다를 때 미륵불은 민중을 구제하고 소원을 이루어줄 메시아였던 것이다. 미륵불의 화신으로 일컬어졌던 화랑이나,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에 미륵불을 자처했던 궁예와 고려말의 이금, 석가불을 능가하는 미륵불의 하생을 부르짖으면서 미륵불을 자칭했던 여환 등은 현실의 질곡과 사회의 혼란을 혁파하고 이상사회를 가져다 줄 힘과 권능의 상징으로 미륵불에 주목하였다. 미륵불은 그들에게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을 능가하는 힘과 권능의 상징이었으며, 민중들에게는 미래의 희망으로서 현실적 고난과 공포를 극복케하는 원동력이었다.

 

근대로 접어드는 조선말기 즉 구한말에 이르러서도 자칭 미륵불은 계속해서 나타난다. 이 시기 미륵신앙은 미륵불을 자처하는 엘리트들에 의해서 신흥종교운동으로 나아가는 특징을 보인다. 구한말의 영적인 천재나 종교운동가들은 그들의 교리속에 미륵신앙을 절충해서 증산교(甑山敎)나 미륵불교(彌勒佛敎), 용화교(龍華敎) 등과 같은 신흥종교를 창시한다. 19세기 말 증산교를 창립한 증산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은 천자미륵이라 자처하면서 임종할 때 제자들에게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 불양탑(佛養塔)이나 차지하리라.', 또는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들어와서 미륵불을 보라.'는 등의 예언을 하기도 하였다. 증산은 다가올 미륵세상에 대하여 '세상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고 밤과 낮이 막힘없이 환하게 통하고 100가지 곡식을 오래도록 거두어들이고 만 가지 과일이 굵고 크며 풍성한 음식이 저절로 생기고 아름다운 옷이 스스로 이른다.'고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대체로 미륵하생경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증산은 평소 금산사의 미륵불로 강림할 것이라고 말해 왔기에 그의 제자들은 금산사를 차지하여 후천세계(後天世界)를 주재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증산교도들의 미륵신앙은 순수한 불교의 미륵신앙이 아니라 증산의 가르침에 따른 미륵불의 강림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증산교의 탄생은 1894년(고종 31년) 호남에서 일어난 동학혁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소외되었던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켰던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여기에 참가하였던 급진적 개혁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개혁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이 증산을 중심으로 일으킨 신종교운동이 증산교였던 것이다. 당시 증산은 동학혁명이 실패하리하는 것을 간파하고 전투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은 채 동학군을 수행하면서 혁명의 진행과정을 살펴보기만 했다.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사회적 불안과 혼란이 계속되자 그는 세상을 구제할 길이 기성종교로는 불가능하며, 신명(神明)에 의한 도술(道術)만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1901년 전북 김제 모악산(母岳山)의 대원사(大願寺)에서 수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듬해부터 그가 도를 깨쳤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추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주문을 외우는 수련을 시켰으며, 환자들에게는 한약치료와 함께 주문을 외우게 하거나, 부적사용과 안수치료를 병행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천지인(天地人)의 삼계대권(三界大權)을 가지고 있으며, 신통력으로 천지를 개벽하고 선경(仙境)을 열어 고통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설교하였다. 병을 고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추종자들은 그를 신인(神人)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온 구세주라 믿게 되었다.

 

증산교가 빠른 시간에 하나의 큰 종교집단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동학혁명이 실패한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정감록의 도참설, 불교의 미륵불출세사상,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 재림설 등이 민중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민족의 전통적 사상을 계승하여 새롭게 체계화시킨 인존사상(人尊思想)과 해원사상(解寃思想), 그리고 민족주체사상 등의 증산교의 사상(일명 증산사상)이 당시의 민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것에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증산의 추종자들은 거의 전라북도 출신으로 동학혁명에 직접 참여하였던 농민 등 하층민들이었으며,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증산은 1902년부터 7년 동안 동학혁명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전주와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 등 전라북도의 7개 군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그가 주로 활동한 곳은 자신이 광제국(廣濟局)이라는 한약방을 열었던 모악산 인근이었다. 1907년 증산이 의병을 모의한다는 혐의로 고부경무청에 체포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사건은 그의 권능에 대한 추종자들의 회의를 불러왔다. 또 신도들 가운데는 천지개벽이 지연됨을 원망하거나, 조속히 선경을 이루어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1909년 증산이 사망하자 그의 허망한 죽음을 목격하고 크게 실망한 추종자들은 차경석(車京石), 김형렬(金亨烈) 등 소수의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증산이 사망한 2년 뒤인 1911년 그의 아내였던 고부인(高夫人)이 증산의 생일치성을 드리던 중 갑자기 졸도하여 반나절만에 깨어난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고부인은 증산의 성령(聖靈)이 자신에게 내려왔다고 주장하면서 증산의 언행과 비슷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증산의 재림을 믿던 사람들이 다시 고부인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하나의 집단을 이루자, 이들은 1914년 증산을 교조로 하고 고부인을 교주로 삼아 선도교(仙道敎)를 세웠다. 선도교의 교세가 점점 번창하면서 증산의 추종자이자 고부인의 이종사촌동생인 차경석은 고부인과 신도들의 접촉을 막은 채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로 바꾸었다. 차경석은 보천교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자 1919년 전국에 60방주(方主)라는 교구를 두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교단에서 발급하는 인장(印章)과 교첩(敎帖)을 얻기 위해 포교활동에 열중하면서 많은 헌금을 바쳐야만 했다. 차경석은 보천교라는 교명을 사용하기 전인 1921년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명과 시국(時國)이라는 국호(國號)를 선포하고 자신이 황제가 될 것처럼 선전하였으며, 제자들은 그를 폐하(陛下)라고 불렀다.

 

차경석 천자설이 유포되자 조선총독부는 보천교에 대한 강력한 탄압책을 구사하는 한편 그를 회유하여 친일화시키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이에 차경석은 교단의 재산과 교권을 지키기 위해 1924년부터 친일단체인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는 등 친일행위에 나선다. 보천교의 친일행위에 분노한 사람들이 신도들을 비난하고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총독부는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고, 1929년 전북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본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중앙교당 십일전(十一殿)의 준공식에 대하여 이것이 차경석의 천자 등극식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총독부는 소요 가능성을 이유로 불허함으로써 그의 천자등극은 불발로 끝나고 교단분열이 가속화된다. 보천교에 대한 총독부의 정책은 친일화하여 사회적으로 고립시켜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또 차경석이 자신의 권위를 앞세우고 증산의 권위를 무시하자 일부 간부와 신도들은 보천교를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을 세웠다. 태을교(太乙敎)나 동화교(東華敎), 서울대법사(大法社), 삼성교(三聖敎), 천인교(天人敎), 증산교객망리교단(甑山敎客望里敎團), 수산교(水山敎), 홍로교(烘爐敎), 보화교, 선도교, 무을교(戊乙敎), 임무교(壬戊敎), 인천교(人天敎), 원군교(元君敎) 등이 바로 보천교에서 떨어져 나간 교단들이다.

 

차경석이 선도교의 실권을 잡자 고부인은 김제시 백산면 조당리로 거처를 옮기고 추종자들과 함께 교단을 분리하여 1919년 태을교의 교주가 되었다. 차경석과 고부인의 갈등 이후 증산의 추종자들은 이 교단을 떠나거나 증산으로부터 교통(敎統)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교단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915년 모악산 금강대(金剛臺)에서 득도했다는 증산의 제자 김형렬은 별도의 교단을 세웠다. 그는 1921년 서울에서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를 조직한 뒤 이듬해 미륵불교로 이름을 바꾸고 금산사에 본부를 두었다. 김형렬과 그의 신도들은 금산사의 미륵불을 증산의 영체로 신봉하였다. 그는 증산교의 태을주(太乙呪)를 쓰지 않고 동학의 시천주(侍天呪)로 신도들을 수련시켰으며, 신도들의 생년지(生年支)에 해당하는 동물을 그린 물형부(物兄符)에 그 동물과 각자의 성명을 새긴 인장을 찍은 뒤 불사르게 하였다. 그러나 교주의 예언이 여러 번에 걸쳐 빗나가면서 교세가 약화되다가 1932년 그가 사망하자 미륵불교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후 미륵불교는 유제봉(柳濟奉)의 용화계(龍華契)와 증산교의 김자현파(金自賢派) 등 여러 분파로 갈라졌다. 유제봉의 용화계는 최선애(崔善愛)의 미륵계(彌勒契)로 이어지고 1970년에는 대한불교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이 되었다. 증산교 김자현파는 다시 김사모파(金師母派)가 재분열되어 나갔다.

 

용화교는 1931년 서백일(徐白一)이 창시하였다. 그는 1931년 구례 구고미에서 금산사미륵불교포교소를 열고 증산을 미륵불로 신봉하는 미륵불교를 포교하다가 1947년에 용화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1950년 서백일은 전주 완산동에 원각사(圓覺寺), 완주군 우전면에 남일사(南一寺)를 세워 남녀 수좌 2백여 명을 상주시키고 포교활동을 하였다. 1960년대에는 김제의 모악산 기슭에 대한불교용화사를 세우고 전국의 신도 수백 세대를 용화동으로 이주시켰다. 그는 용화동이 후천개벽시 병겁(病劫)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장소라고 주장하면서 신도들에게 재물을 갖다 바치게 하였다. 여수좌들과의 성추문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던 서백일은 결국 1966년 3월 27일 한 수좌의 칼을 맞고 죽었다. 용화교는 그후 대한불교용화종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종단에 가입하여 불교화되었다. 용화교도들은 증산을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3천 년 뒤에 올 미륵불이 출현한 것으로 믿었다. 용화교는 후천개벽으로 용화선경(龍華仙境)이 이루어지면 천지운화(天地運化)의 조화로 천지인신(天地人神)이 일체화되는 세상이 오지만, 이런 선경이 오기 전에 대병란(大病亂)이 세상을 휩쓸어 소수만이 살아남아 후천선경의 주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금산사 주변의 용화동에는 용화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밖에도 안내성(安乃成)은 1914년 여수에서 태을교를 세운 뒤 1925년에는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로 개명하였으며, 이치복(李致福)은 1916년 금구(金溝) 원평(院坪)에서 제화교(濟化敎)를 만들고 다시 경남 하동에서 삼덕교(三德敎)를 세웠다. 박공우(朴公又)는 태인에서 태을교를 만들었고, 문공신 (文公信)은 정읍과 김제, 고창, 부안을 중심으로 한 교단을 세웠으며, 김광찬(金光贊)은 남원에서 증산교도리원파교단(甑山敎桃李園派敎團)이라는 교단을 세웠다. 1950년대에는 강성태(姜聖泰)를 중심으로 미륵존불숭배회(彌勒尊佛崇拜會)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증산의 제자의 제자들도 태극도(太極道)나 순천교(順天敎) 등 새로운 교단들을 세우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에 증산교 교파는 한때 백여 개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경석의 천자등극 실패와 그에 따른 교단의 분열, 1938년 총독부가 실시한 유사종교해산령과 강경한 탄압정책으로 각 교단의 신도들이 체포되어 옥사하면서 증산교는 점차 약화되어 갔다. 해방이 되자 증산교의 각 교파들은 교단을 정비하는 한편 교리를 체계화하여 민족종교로서의 성장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증산교는 교리해석의 차이로 인해 각 교파간의 통합이 아직도 어려운 실정이다. 이와 같은 증산교단의 난립은 증산의 생존시에 제자들의 서열을 정하지 않고 후계자 선정도 하지 않았던 것에 그 원인이 있다. 또한 증산의 중요한 관심이 기성종교의 교리통합과 민족사상의 재정립이었기에 제자들의 관점에 따라 불교계나 선도계, 유교계 등으로 교리해석을 달리 할 수 있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증산교의 교단은 지금도 증산도(甑山道)를 비롯해서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 증산진법회(甑山眞法會), 증산미륵도(甑山彌勒道), 용화교, 단군성주교(檀君聖主敎), 홍익교(弘益敎), 선도교, 증산교본부(甑山敎本部), 보천교(普天敎), 법종교(法宗敎), 삼덕교(三德敎), 태극도(太極道), 증산진법회(甑山眞法會), 보화교(普化敎) 등 약 60개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교단 가운데 대한불교미륵종(大韓佛敎彌勒宗)과 대한불교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 증산미륵도, 용화교 등은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고, 단군성주교(檀君聖主敎)와 홍익교(弘益敎) 등은 단군교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선도교 등은 선도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 중에서 증산도와 대순진리회, 증산진법회 등 1970년대 초에 창립된 교단들의 교세가 두드러진다. 이처럼 금산사 미륵전을 중심으로 민중의 소망을 미륵불의 하생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던 미륵신앙은 증산교 계통의 신흥종교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증산교 계통의 미륵신앙은 개혁성과 혁명성을 띤 민중화된 미륵신앙과는 다른 형태로 변질된 측면이 있다. 한편 증산교 계통과는 달리 불교의 전통적인 미륵신앙을 부흥하기 위해서 이종익(李鍾益)은 불교십선운동본부(佛敎十善運動本部)를 만들었고, 송월주(宋月珠)는 미륵정신회(彌勒正信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와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호남지방은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륵신앙이 이토록 호남지방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호남지방은 예로부터 백제의 옛땅이었다. 오랜 전쟁끝에 백제를 정복한 신라는 복수심을 배경으로 이 지역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일관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보듯이 호남지방은 여전히 차별의 대상이었다. 왕건은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942년에 훈요십조를 남겼는데, 훈요8조에 '차현(車峴, 車嶺) 이남, 공주강(公州江, 錦江) 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 금강의 유역이 남에서 북으로 역류함을 가리킨 듯)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 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후백제의 합병)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官奴婢)나 진역(津驛)의 잡역(雜役)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을 면하거나, 혹 왕후나 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이 직접 이런 휴훈을 남겼으니 고려왕조의 호남지방에 대한 차별이 어느 정도였을 것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신복룡은 '한국사 바로보기'에서 고려가 개성과 호남세력의 연합으로 탄생하자 호남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신라계인 최재안이라는 자가 훈요십조를 조작했다는 설을 주장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호남에 대한 지역차별은 여전하였는데, 신복룡은 그 원인을 조선창업의 주도세력이었던 호남과 이북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영남세력이 호남과 서도지역을 반역의 땅으로 몰아 세운 데 있다고 보았다. 해방이후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에는 호남에 대한 지역차별이 더욱 심화되면서 망국적인 지역감정까지 발생하게 된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차별과 억압에 신음하던 호남의 민중들은 역대 왕조나 정권이 더 이상 그들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전복시켜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차별과 억압이 사라진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호남의 민중들은 힘들고 고통스런 현실세상을 뒤집어 엎고 자유롭고 평등한 새세상을 열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미륵불에 그들의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리하여 미륵신앙은 호남지방의 민중들을 중심으로 역동적으로 전개되어 갔던 것이다.      
   

호남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미륵신앙은 해남에서도 성행하였다. 해남지역에 아직도 남아 있는 10여 기의 미륵불이 그 증거다. 사찰에 세워진 사찰미륵불은 대흥사 북미륵암의 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대흥사 남미륵암과 해남읍 신안리의 석불입상이 있다. 산과 들판 그리고 동네어귀에 세워진 마을미륵에는 해남읍 고도리 마애불과 계곡면 성진리 마애불, 해남읍 남천리 미륵, 산이면 업자리 미륵바위, 황산면 연당리 미륵불 등이 있다. 그밖에 미륵신앙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으로 마산면 맹진리 매향비, 득남을 위해 신앙되었던 북일면 오심재 미륵이 있다. 미륵석불이 아닌 자연석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입석도 다수 발견되는데, 현산면 증산리와 읍호리 입석, 옥천면 송산리와 화촌리 입석, 옥천면 화당리 입석, 북평면 묵동리 입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마을미륵의 형태를 띠고 있어 미륵불은 해남지역에서도 민중신앙의 형태로 광범위하게 신앙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신앙이 민간신앙화 하면서 해남의 미륵불도 토속적이고 순박한 형상으로 이 지역 민중들의 모습을 닮았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해남의 미륵신앙도 오랜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미륵하생신앙이 좌절하면서 점차 개혁성과 역동성을 잃고 기복신앙화되어 갔다. 

 

해남의 여러 미륵불 중에서 북미륵암의 마애미륵불상은 그 규모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조형미가 뛰어난 것으로 볼 때 이 지역 미륵신앙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때 이 미륵불상 앞에 모여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도 이 미륵불을 신앙하며 새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을까? 사회적 혼란기와 말세적 민심을 이용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미륵불을 자칭하고 나타났지만 과연 이들 가운데 진정한 미륵불이 있었던가? 용화전에서 마애미륵좌상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민중들이여 미륵불의 강림을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스스로 활활 타오르는 미륵불이 될지어다. 나도 때가 되면 그대들과 함께 기꺼이 미륵불이 되리니......

 

북암의 마애여래좌상은 거대한 암벽에 도드라지게 새겼으며, 전체 높이 약 8m, 너비 약 12m, 본존불의 높이만 4.85m에 이른다. 연화좌(蓮花座)에 결가부좌한 본존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모두 표현되어 있어 신비감을 더해준다. 삼중(三重)의 원으로 표현된 두광과 신광의 밖으로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하늘로 치솟는 화염문(火焰文)을 선각하였으며, 그 안에 네 구의 비천상(飛天像, 천인상)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여 장엄한 느낌을 준다. 연화좌에 앉은 비천상은 오른쪽 무릎은 세우고 오른손은 지물(持物)을 들고 있으며, 왼쪽 무릎은 꿇고 왼손을 그 위에 얹은 자세로 얼굴을 위로 향하고 있다. 상체는 옷자락을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돌려 가슴 앞으로 묶어 내렸고 하체는 치마를 입었는데, 그 뒤로 옷자락이 휘날리고 있어서 하강하는 비천상임을 알 수 있다.

여래상은 민머리(素髮)에 상투(육계)가 뚜렷하다. 둥글넙적하고 살집이 있어 보이는 얼굴은 우아하면서도 다소 근엄한 표정이다. 위 아래가 좁은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뚜렷하고, 두 눈은 앞을 바라보고 있다. 코는 반듯하고 입은 작고 도톰하며, 세밀하게 표현된 귀는 지나치게 길어서 어깨에 닿을 정도다. 목이 굵고 짧아서 삼도(三道)는 가슴에 형식적으로 표시되었다. 이 불상은 옷에 그 시대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양쪽 어깨에는 두꺼운 통견의(通肩衣)를 걸쳐 입고 그 위에 겉옷까지 걸쳤으며, 평행계단식의문(平行階段式衣紋)이 퇴화한 듯한 굵은 띠주름의 평행단상밀집문(平行段狀密集衣紋)의 옷주름이 전신을 감싸고 있어 국보 제63호인 철원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그 수법이 같다.

 

가슴에는 주름이 잡힌 내의가 드러나 보인다. 왼쪽 어깨에는 띠 매듭이 있고, 매듭에는 가사를 묶는 띠가 달려 있으며, 어깨 뒤쪽의 고리에서 어깨로 내려와 팔꿈치에 닿아 있다. 이 가사 띠는 8세기 중엽의 경주 남산의 용장사장륙미륵존상 등 몇 예를 제외하고는 불상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왼손은 오른쪽 발바닥 위에 올려놓고, 여성의 손처럼 가냘프게 표현된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으며, 발도 세부묘사가 빈약하다.  대좌는 앙련문(仰蓮紋)을 간략하게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풍만하게 표현된 이 불상은 어깨가 넓은 상체에 비해서 하체가 빈약하게 처리되어 안정감이 다소 부족하다. 이처럼 신라시대와는 다른 특징이 많이 나타나 있는 북암의 마애여래좌상은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그 수법이 미려하여 당시의 거대불상군(巨大佛像群)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북미륵암의 남쪽과 북쪽 언덕에는 삼층석탑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북미륵암의 터는 게가 기어가는 형국이라고 한다. 게의 몸통자리에 해당되는 자리에 여래좌상이 앉아 있어 게가 움직이면 불안할 수 밖에..... 그래서 게의 집게발에 해당하는 양쪽 능선에 탑을 쌓아 지기를 누른 뒤 북미륵암을 지었다는 것이다. 북쪽에 있는 삼층석탑은 용화전 보수를 위한 건축자재가 잔뜩 쌓여 있어 접근이 곤란하다. 이곳의 학사대는 전망이 뛰어나 고계봉 능선과 대흥사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곳인데....... 용화전 남쪽 능선의 암릉으로 올라가 보물 301호인 삼층석탑을 마주 대하고 선다. 석탑 뒤로 고계봉이 보인다. 

 

북미륵암 삼층석탑은 대흥사 응진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과 그 형태가 대체로 비슷하며,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의 양식을 취하였으나 보다 간략화된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는 각각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표현하였다. 탑신은 몸돌(옥신)과 지붕돌(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의 네 모서리에도 우주가 새겨져 있다. 지붕돌의 받침은 상층으로 오를수록 적어져서 4, 4, 3단으로 받침수의 변화를 보인다. 옥개의 사방 전각에는 경미한 반전을 주어서 매우 느린 곡선을 유지해 주고 있다. 옥개 상부의 경사는 완만하고 낙수면도 직선에 가깝게 처리하였는데, 우동(隅棟, 옥개석의 귀마루)에서 느린 반전이 나타난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고, 그 위에 노반형과 앙화형(仰花形)의 석재가 올려져 있다. 

 

삼층석탑이 있는 바위봉우리에 서서 휴정 문하의 수많은 고승들이 배출된 대흥사와 용화세상을 실현하려던 민중들이 모여들었을 북미륵암의 묘한 역사적 아이러니를 생각하다. 임진왜란 당시 휴정과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승군은 조선왕조를 위해서 싸웠지만, 여환 등 미륵생불과 그의 추종자들은 미륵하생신앙을 신봉하면서 조선왕조를 전복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대흥사가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 선승들에 의한 엘리트불교의 중심지였다면, 북미륵암은 하층민과 노비층 등에 의한 민중신앙의 중심지였다. 대흥사가 선종의 메카였다면, 북미륵암은 미륵신앙의 진앙지였던 것이다.

 

삼층석탑 뒤에 있는 산신각에서는 중년의 두 여인이 치성을 드리고 있다. 저 두 여인은 무슨 소원을 산신령님께 저리도 간절하게 빌고 또 비는 것일까? 여인들이여, 그대들의 소원이 자리이타한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산신각 바로 앞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이 바로 극락대로 두륜산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 가운데 한 곳이다. 극락대에서는 두륜산의 연봉들과 금강골 계곡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특히 가련봉과 두륜봉의 웅장한 산세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두륜산의 경치는 정말 절경이다. 극락세계가 따로 없다.     


*오심재에서 바라본 고계봉


*오심재에서 바라본 노승봉


*노승봉 정상부


*노승봉 정상표지석


*노승봉에서 바라본 오심재와 고계봉

 

북미륵암에서 노승봉 산허리를 돌아가는 바위투성이 길을 따라서 오심재로 오른다. 오심재(소아령, 쐐기재) 정상의 꽤 넓은 평지 주변에는 억새가 우거져 있다. 오심재 북쪽에는 고계봉(노성봉, 638m), 남쪽에는 노승봉이 솟아 있다. 산기슭의 숲은 활엽수들이 주종을 이룬 가운데 조릿대가 깔려 있고 군데군데 소나무도 보인다. 노승봉 정상부 아래에 이르면 옛날에 절터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공터가 있는데, 이곳에는 '북미륵암 1.2km, 노승봉 0.2km'라고 표기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정상부 암릉지대에 이르자 바람이 얼마나 강하게 불어오는지 몸이 날아갈 것만 같다. 가파른 암릉길에는 밧줄과 발받침대가 설치되어 있어 정상에 오르기가 그리 힘들지는 않다. 구멍바위를 통과하여 노승봉(능허대, 688m) 암봉 정상에 올라서니 동쪽의 강진 앞바다와 고흥반도, 남쪽의 완도와 다도해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또 북쪽의 고계봉으로부터 노승봉을 지나 남쪽의 가련봉, 두륜봉, 도솔봉으로 뻗어가는 두륜산맥과 도솔봉에서 대흥사 계곡을 감싸안고 북서쪽으로 달려가는 능선위에 솟은 연화봉, 혈망봉, 향로봉도 한눈에 들어온다. 오심재 건너 고계봉 정상에는 케이블카 정류장인 전망대가 세워져 있고, 왼쪽 능선 너머로 해남읍이 바라다보인다. 노승봉 바로 앞에는 가련봉이 병풍처럼 솟아 있다. 사방이 막힌 곳이 없는지라 바람은 더욱더 거세게 불어와 정상에서 오래 머물 수가 없다. 노승봉을 내려가는 암릉길도 거의 수직암벽이라 밧줄과 철제 발받침대가 설치되어 있다.  

 

*노승봉에서 바라본 가련봉



*가련봉 정상표지석


*가련봉에서 바라본 고계봉과 노승봉


*가련봉에서 바라본 강진만과 장흥반도

 

*가련봉에서 바라본 장흥반도와 다도해


*가련봉에서 바라본 완도와 다도해

 

*가련봉에서 바라본 만일암터의 천년수와 오층석탑

*가련봉에서 바라본 대흥사

 

*가련봉에서 바라본 두륜봉과 도솔봉

 

잡목과 조릿대가 우거져 숲을 이룬 길을 따라 가련봉으로 향한다. 가련봉 정상부 암릉길에도 밧줄과 철제 발받침대가 설치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가련봉(두륜산, 703m) 정상은 두륜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 중 하나다. 북쪽의 고계봉에서 남쪽의 도솔봉으로 뻗어가는 땅끝기맥 두륜산맥의 산세가 힘차고 웅장하다. 두륜산맥 동쪽으로 바닷가를 따라서 펼쳐져 있는 해남군 북일면과 강진군 신전면의 너른 들판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온 들판을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초록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내 마음도 어느덧 푸릇푸릇해진다. 강진만을 따라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다산(茶山) 정약용(鄭若鏞)이 10여 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그는 만덕호반의 산정(山亭)을 다산초당이라 이름짓고 이곳에 머무는 동안 목민심서를 비롯한 실학서들을 저술하면서 실학을 대성하였다.  

 

강진만 건너편 장흥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고 하여 신산(神山)이라고도 불리는 천관산(天冠山, 723m)이다. 장흥반도와 완도 사이의 강진만에는 완도군에 속하는 고금도(古今島)와 조약도(助藥島, 약산도), 신지도(薪智島)가 떠 있고, 조약도 동쪽 뒤로 금당도(金塘島), 평일도(平日島), 생일도(生日島)도 보인다. 고금도의 북쪽에는 덕암산(德巖山, 246m), 서쪽에는 봉황산(鳳凰山, 215m)이 앉아 있고, 그 뒤에 보이는 산이 조약도의 삼문산(三門山, 397m)이다. 신지도에는 동서로 뻗은 능선에 상산(象山, 324m)과 노학봉(老鶴峰, 225m), 범산(虎山, 151m), 기선봉(141m) 등 네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고금도와 완도 사이에 떠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이 해상왕 장보고가 군마를 길렀다는 고마도(古馬島)와 완도 북서쪽의 딸도(達島)에 대하여 사위도라는 뜻을 가진 사후도(伺候島)이다. 고금도와 조약도는 다리로 연결되었고, 강진의 마량포구와 고금도를 잇는 교량건설도 올해 안에 완공될 예정이어서 내년부터는 자동차로 두 섬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조약도의 삼문산 뒤로 왼쪽에 있는 산은 평일도의 망산(望山, 235m), 오른쪽에 솟아 있는 산은 생일도의 백운산(白雲山, 483m)이다. 

 

남쪽의 위봉 너머로 보이는 가장 큰 섬이 완도(莞島)다. 이 섬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상황봉(象皇峰, 644m)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는 숙승봉(宿僧峰, 432m)과 백운봉(白雲峰, 462m)이 솟아 있다. 신지도와 완도 사이로 섬의 북쪽에 대봉산(大鳳山, 379m), 남쪽에 매봉산(梅峰山, 385m)과 보적산(寶積山, 330m) 등이 있어 물도 푸르고 산도 푸르다는 청산도(靑山島)가 어슴푸레 보인다. 완도는 달도를 사이에 두고 남창교와 완도교로 해남과 연결되어 있으며, 신지도는 2005년 12월 14일 신지대교가 개통되면서 완도와 연결되었다. 완도읍 죽청리는 신라 흥덕왕 3년(829년)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곳이며, 완도의 남동쪽에 있는 완도항은 하루에 한 번 제주도행 카페리호가 운항한다. 몇 년 전 나는 완도의 상황봉에 올라 두륜산과 달마산을 바라보며 그 산세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감탄한 적이 있다.    

 

가련봉 서쪽 바로 아래 산기슭에는 천년수와 오층석탑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만일암터다. 두륜산에서 대흥사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중간쯤에는 일지암(一枝庵)이 있다. 이 능선과 금당천이 만나는 곳에 터를 잡은 대흥사는 두륜산의 여덟 개의 연봉에 둘러싸여 마치 연꽃의 암술 자리에 앉아 있는 형국이다. 또한 사방의 산줄기와 물줄기들은 이곳으로 모여들고, 물이 흘러나가는 곳은 보이지 않으니 사람으로 말하자면 여성의 자궁이요, 불꽃으로 말하자면 화심(火心)에 해당하는 터다. 풍수지리설로 볼 때 대흥사터는 잉태의 땅이요, 발흥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대흥사가 13대종사와 13대강사를 비롯한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것은 이런 명당의 지기(地氣)를 받았던 때문일까? 혈망봉에서 오도재를 건너뛰어 향로봉으로 뻗어가는 능선 너머로 해남반도 서쪽 바다가 아스라이 보인다. 날이 맑으면 진도가 보일텐데 오늘은 바다에 연무가 끼어서 오리무중이다. 가련봉 세 개의 연봉 중 마지막 암봉에 이르면 만일재와 두륜봉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두륜봉은 산봉우리에 마치 왕관을 두르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만일재에서 바라본 가련봉


*만일암터의 오층석탑


*만일암터의 천년수

 

만일재로 내려오니 평평하고 넓은 공터가 있고, 공터 주위로는 억새밭이 우거져 있다. 이 재를 서쪽으로 넘으면 대흥사 계곡을 따라서 삼산면 구림리로 내려갈 수 있고, 동쪽으로 넘으면 북일면 흥촌리 삼성마을에 이른다. 만일재에서 바라보는 가련봉은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련봉을 내려올 때는 밧줄과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별로 힘든 줄 몰랐는데, 여기서 바라보니 상당히 험준한 산세를 가지고 있다. 만일암터에 들렀다가 두륜봉으로 가기로 한다. 만일재에서 서쪽 계곡으로 5분 정도 내려가면 만일암터가 나온다. 만일암터에 이르자 무성한 대나무숲에 둘러싸인 빈터에 암자는 간곳없고 오래된 오층석탑(전남문화재자료 246호)만 덩그러니 서 있다.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탑 주위에는 주춧돌과 연자맷돌, 석등 등이 흩어져 있어 이곳이 옛날 암자가 있던 터라는 것을 알려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쓴 만일암지(挽日庵志)에 따르면 이곳에는 아육왕이 세웠다고 해서 아육왕탑으로 부르는 칠층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이 오층석탑의 상륜부에는 석등의 옥개석이 올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에는 칠층석탑이었을지도 모른다. 석탑의 한쪽에 남아 있는 샘터에는 기나긴 세월과 함께 낙엽이 뒹굴고 있다. 

 

만일암지에 의하면, 만일암은 백제 426년(구이신왕 7년) 신라의 승려 정관이 창건하였고, 508년(백제 무령왕 8년) 무명의 선행비구가 중건하였으며, 875년(신라 헌강왕 1년) 도선이 크게 중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영토에 신라 승려가 들어와서 사찰을 지었다는 점과 연대의 불일치 등은 만일암지의 사료적 신빙성을 상당히 떨어뜨리지만  필적만은 정약용의 친필로 인정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다산이 실제로 대흥사에 오래 머물면서 차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의 창건설에 대하여 만일암은 1675년(강희 14년)에 융신선사가 중건하고, 강희 말년에 현기화상의 중수, 건륭년간(1736~1795년)에 응명 두타의 중수를 거쳐 1809년(가경 14년)에 자암 전평과 은봉 두예가 다시 중건했다는 설도 있다. 만일암은 제1대강사 만화 원오를 비롯하여 제2대강사 연해 광열, 벽파 찬영(碧波贊英) 등 여러 고승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만일암 창건 설화에도 해를 묶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만일암을 창건할 때 정관존자는 암자보다 석탑을 먼저 세웠다. 탑을 다 쌓고나서 암자를 지으려고 하는데, 해가 서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정관존자는 해가 지지 못하도록 탑꼭대기에 붙잡아 매어 놓고 암자를 지었다. 그래서 암자 이름을 잡을 만(挽)자와 해 일(日)자를 써서 만일암이라고 지었다는 이야기다. 남,북미륵암의 미륵불상과 천년수에 얽힌 '천동과 천녀'의 전설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이다. 천년수는 만일암터 바로 밑에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다. 원래는 암나무와 숫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한 그루만 살아 있다. 지름 2.15m, 둘레 9.6m, 높이 22m에 달하는 이 나무의 나이는 약 천백 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년수는 만일암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보았으리라. 


*만일재에서 바라본 두륜봉


*두륜봉의 구름다리


*두륜봉 정상


*두륜봉에서 바라본 고계봉과 노승봉, 가련봉

 

*두륜봉에서 바라본 도솔봉

 

*두륜봉에서 바라본 완도와 다도해

 

만일암터를 떠나 만일재로 도로 올라와 두륜봉으로 향한다. 두륜봉으로 오르려면 동쪽의 바위절벽 밑으로 돌아서 남쪽에 있는 구름다리(백운교)를 통과해야 한다. 구름다리는 양쪽의 암벽에 길다란 암괴가 걸쳐져 있어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진 두륜봉(630m) 정상은 북쪽과 동쪽이 까마득한 바위절벽이라 전망이 매우 좋다. 고계봉은 저만치 멀어져 있고, 노승봉과 가련봉의 바위봉우리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웅장하다. 남쪽으로는 띠밭재(해림령)와 도솔재 건너편으로 도솔봉과 연화봉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땅끝기맥은 저 도솔봉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져 달마산으로 뻗어가고, 두륜산맥은 도솔봉에서 연화봉과 혈망봉을 지나 향로봉으로 달려간다. 두륜봉과 띠밭재 중간쯤에서 산줄기가 하나 남동쪽으로 갈라져 위봉과 응봉산으로 이어진다.

 

띠밭재는 옛날 대흥사와 북평면을 오가던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던 고개였다. 도솔재도 띠밭재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흥사에서 완도나 제주도로 가려는 사람들은 저 고개를 넘어 북평면의 이진포구에서 배를 타야만 했으며, 북평면 사람들은 대흥사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저 고개를 넘어다녔다. 띠밭재는 바로 대흥사와 이진포구를 연결해주는 지름길이었다. 이진포구는 남창포구가 개발되기 60년 전만 하더라도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의 여러 도서지방을 연결하는 포구였다. 대흥사 천불전에 봉안된 천불상도 일본에서 돌아올 때 저 고개를 넘어왔을 것이다. 1840년 일지암에서 초의와 이별한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기 위해 넘던 고개도 저 고개이리라. 금석학의 대가이며 시서화에 있어서도 당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던 추사와 13대종사의 한 사람으로 일상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고자 한 진취적인 고승이었던 초의의 우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동갑내기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를 알아보고 의기가 투합했을 것이다. 55세 되던 해 추사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가 해남땅에 이르렀을 때 어찌 일지암의 초의를 만나보고 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띠밭재 고개마루에서 추사를 배웅하는 초의선사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위봉과 도솔봉 사이로 북평면 동해리 동해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다. 완도의 서쪽 바다에는 수많은 섬들이 떠 있다.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와 완도를 연결하는 남창교와 완도대교 사이에 있는 섬이 달도다. 해남군 송지면 통호리 사구미해수욕장 남쪽 가까운 바다에는 화도 또는 꽃섬이라고도 하는 동화도(東花島)와 신안 주씨(新安朱氏)가 많이 거주하는 백일도(白日島), 해안의 모래사장이 검은색인 흑일도(黑日島) 등 세 개의 섬이 있는데, 여기서는 해남군 북평면에 속하는 조막만한 감토도 뒤로 동화도만 보인다. 해남반도의 남쪽과 완도의 남서쪽 해상에는 횡간도(橫看島), 노화도(蘆花島), 소안도(所安島), 보길도(甫吉島), 넙도, 당사도(唐沙島) 등 제법 큰 섬들과 마삭도(馬朔島), 마안도(馬鞍島), 노록도(老鹿島), 서넙도, 가덕도(嘉德島), 구도(鳩島), 송도, 육도, 석도, 남도, 기도, 삼도, 갈도 등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여기서는 횡간도와 노화도, 소안도만 보인다. 완도 남쪽 해상에는 소모도와 대모도가 있다.

 

해는 어느덧 서산에 기울고 이제 산을 내려가야 할 때다. 생각 같아서는 도솔봉과 연화봉, 혈망봉, 향로봉으로 이어진 산길을 걸어서 내려가고 싶지만 다음을 위해서 남겨 두기로 한다. 두륜봉에서 진불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산기슭에는 동백나무를 비롯한 아름드리 상록수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내려가는 길에 미륵불입상이 있다는 남미륵암과 상원암을 들를까 생각하였으나 남미륵암은 위치를 모르겠고, 상원암 입구에는 수행정진도량이라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알림판이 나무에 걸려 있다. 남미륵암과 상원암은 40여 년간 토굴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면서 하루에 한 끼의 식사만 한 것으로 유명한 청화(淸華)스님이 머무르기도 했던 암자다. 나야 세상을 바람따라 구름따라 대충 살아가는 사람이라 작은 암자의 불목하니도 못되지만 그런 청화스님을 생각만 해도 등골에서 시퍼런 칼날이 느껴진다.  
  

 

*진불암 응진당


*진불암 응진당의 석가모니본존불과 16나한상


*진불암 응진당의 신중탱화와 칠성탱화

 

두륜산 중턱에 자리잡은 대흥사 산내암자인 진불암(眞佛庵) 입구에는 수백년 묵은 은행나무와 정교하게 쌓은 석탑 두 기가 있어 이 암자의 역사를 짐작케 해준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진불암은 옛날 남인도에서 불상과 16나한상, 그리고 금강경과 법화경을 싣고 온 배가 강진의 백도방(白道坊)에 도착하면서 창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조를 비롯한 대흥사 승려들이 명당지를 찾아 인도 불상을 봉안하던 날 밤, 꿈에 한 도인이 나타나 '이곳은 후세에 진불이 출현할 가람이니라.'는 계시를 받고 진불암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처럼 진불암은 창건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630년(인조 8년) 수월 극현(水月克玄)과 덕호(德浩)의 중건, 1693년(숙종 19년) 이홍록(李弘錄)과 덕탄(德坦)의 중건, 1740년(영조 16년) 위일(位一)의 중건, 1750년(영조 26년) 북미륵암을 중수한 바 있는 온곡(溫谷)과 우일(宇一) 의 중건, 1791년(정조 15)에 정능(定能)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불암은 규모는 작지만 채미(採薇)의 기록에 의하면 제3대강사 영곡 영우와 제5대강사 영파 성규, 제74대 조사 만화 보선(萬化普善), 제6대강사 운담 정일, 제12대강사 아암 혜장 등 고승들이 머물렀던 유서깊은 암자이다.

 

진불암에 들어서니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고요한 정적만이 감돈다. 향적당(香寂堂) 툇마루 아래 섬돌에는 흰 고무신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인 응진당(應眞堂)으로 들어가 석가모니부처님께 합장삼배로 예를 표한다. 석가모니불 앞에는 조각수법이 특이한 조선시대 초기의 목조 16나한상(羅漢像)이 배열되어 있다. 원래 이 나한상은 50m 정도 위에 있었던 고진불암(古眞佛庵)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불상 뒤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협시불로 그린 삼세후불탱화가 걸려 있고, 왼쪽 벽에는 신중탱화와 칠성탱화가 걸려 있다. 신중탱화는 대개 화폭을 2단으로 구분해서 상부에는 제석천과 범천을 중심으로 비무장의 천신을 그리고, 하부에는 날개의 깃이 올라간 투구를 쓴 위태천을 중심으로 무장한 천, 용,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등 팔부신장을 그린다. 칠성탱화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한 다음 북두칠성의 변화신인 일곱 명의 성군(星君)을 그리는데, 성군은 관을 쓴 왕이나 도인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보통이며, 여기에 이십 팔수를 추가하기도 한다. 산신탱화도 있다고 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진불암에는 1709년에 조성된 범종이 있었는데, 암자가 폐허가 될 때 청신암으로 내려보냈다가 다시 대흥사 박물관으로 옮겼다.

 

나한신앙에 의해 조상되는 나한전은 오백나한상을 모신 오백나한전과 16나한상을 모신 응진전으로 구분된다. 그러니까 진불암의 응진당은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하고 16나한상을 모시는 전각이다. 석가모니불의 좌우에는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하고,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배열하며, 끝부분에 범천과 제석천을 함께 봉안한다. 16나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성자의 반열에 오른 아라한(阿羅漢)들 중 말세의 중생들로 하여금 복덕을 이루게 하고 그들을 정법으로 인도하겠다는 원을 세운 성자들이다. 그런데 불단에는 28나한상과 문관상이 모셔져 있다. 무슨 까닭일까? 대둔사지에는 고진불암과 16나한상의 유래에 대하여, "고진불암은 현재의 진불암 근처에 있다. 옛기록에 강진의 백도방에 서씨라는 어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바다 한 가운데서 고기를 잡다가 서쪽 나라의 배를 만났다고 한다. 배 안에는 16대아라한상이 실려 있어 '그것을 두륜산방에 봉안하고 편액을 진불이라 하라.'고 했다 한다. 진불은 곧 응진으로서, 나한을 뜻하는 것이다. 그 후에 정사(精舍)를 산방 곁에 건립하여 이름을 진불이라 했으며 또 달리 고진불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로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이라고도 한다. 나한신앙에서 아라한은 삼명(三明)과 육신통(六神通), 팔해탈법(八解脫法)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천인과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한국에서는 주로 석가모니의 10대 제자와 16나한, 오백나한을 신앙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특히 오백나한이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이루게 해준다고 믿었기에 많은 나한전이 생기게 되었다. 대사찰에서는 영산전(靈山殿)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 제자 또는 16나한, 18나한, 오백나한을 봉안하고 있다. 16나한은 빈두루 바바라타사, 가락가발사, 가라가바리타사, 소빈타, 낙구라, 발타라, 가리가, 벌사라불다라, 술박가, 반탁가, 라호라, 나가사나, 인게라, 벌라바사, 아시다, 주다반탁가 등이고, 여기에 제빌다라, 빈두루 두 존자를 더하여 18나한이라고 한다. 나한전은 보물 730호인 울진의 불영사(佛影寺) 응진전과 영천의 거조암 영산전(靈山殿), 청도의 운문사 오백나한전이 유명하다. 

 

진불암 마당에 있는 들마루에 앉아 대흥사를 바라보며 최창호 행자를 생각하다. 최행자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 중엽 진불암에서 동안거에 든 70여 명의 승려들이 참선 정진하고 있던 어느 날 최창호라는 종이장수가 종이를 팔려고 왔다. 그런데 승려들이 법당에서 조실스님의 결제법어를 듣고 있는 중이라 그는 누구에게도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그는 그냥 돌아가기도 뭐해서 법당 안으로 들어가 맨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실스님의 법문을 끝까지 듣고 큰 감명을 받은데다가 또 승려들의 경건한 모습이며 법당 안의 장엄한 분위기에 마음을 빼앗긴 그는 출가의 원을 세웠다. 그 길로 최씨는 조실스님을 찾아가 자신의 출가를 청하였다. 그러나 조실스님은 그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실망한 최씨가 돌아가려고 일어서자 조실스님은 그제서야, '거기 앉거라. 간밤 꿈에 부처님께서 큰 발우 하나를 내게 주셨는데 자네가 오려고 그랬구나. 지금은 비록 종이장수지만 자네는 전생부터 불가의 인연이 지극히 무거우니 열심히 공부해서 큰 도를 이루도록 해라.'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아 주었다. 그날부터 최행자는 불목하니가 되어 염불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불목하니의 일은 잘했으나 무슨 영문인지 염불은 통 외우지를 못했다. 염불을 아무리 외워도 돌아서면 까먹고 외우지 못 하는 그를 대중들은 바보라고 놀려댔다. 반년이 지나도록 천수경도 못 외우고 수계도 받지 못 했다. 그는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하면서 하산하기로 결심하고 조실스님께 하직인사를 하러 찾아갔다.

 

조실스님은 옛날 인도에서 석가모니를 찾아가 수행하던 판타카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그를 격려했다. 판타카도 건망증이 심하여 석가모니의 법문을 듣고도 도무지 기억하지를 못 했다. 대중들로부터 바보라는 놀림을 받은 판타카는 울면서 떠날 결심을 하고 석가모니를 찾아갔다. 석가모니는 '판타카야, 내 말을 기억하거나 외우는 일은 그렇게 소중한 일이 못된다. 오늘부터 너는 절 뜰을 말끔히 쓸고 대중 스님들이 탁발에서 돌아오면 발을 깨끗이 닦아 주거라. 이처럼 매일 쓸고 닦으면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라.'는 말로 판타카를 격려했다. 판타카는 그날부터 '쓸고 닦는' 일을 열심히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매일 정사의 뜰을 쓸고 승려들의 발을 씻어 주었다. 판타카가 그 일을 잊고 있으면 승려들은 대야에 물을 떠 와서 거만스럽게 '쓸고 닦으라.'고 하면서 더러운 발을 내밀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아침 판타카는 마당을 쓸다가 마침내 '알았다, 알았어!' 하고 소리치면서 크게 깨달았다.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빗자루를 내던지고 석가모니에게 달려갔다. 석가모니의 '무엇을 알았단 말이냐?'는 질문에 그는 '부처님께서 제게 쓸고 닦으라신 말씀은 매일같이 저의 업장을 쓸고 마음을 닦으라는 뜻이었지요.'라고 대답했다. 석가모니도 기쁜 마음으로 대중들 앞에서 '판타카는 깨달았다.'고 인정하였다. 

조실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은 최행자는 판타카와 같은 수행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후원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천수경을 밤낮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조실스님이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환한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실스님이 기쁜 마음으로 빛을 따라서 가보니 깊이 잠든 최행자의 머리맡에 놓인 천수경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글 한줄 못 외울 정도로 건망증이 심하던 최행자가 천수경 뿐만 아니라 무슨 불경이든지 한 번만 보면 줄줄 외우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훗날 대흥사 13대강사가 된 범해 각안이다. 조실스님은 진불암의 창건유래를 생각하며 또 한 분의 진불이 출현했다고 생각했다. 

 

완도에서 출생한 각안(1820∼1896)은 조선말기의 선승으로 1833년 두륜산 대둔사에서 출가하였다. 1835년 호의 시오(縞衣始悟)를 은사로 삼고 하의(荷衣)에게서 사미계를 받았으며, 초의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1846년 그는 호의의 법맥을 이어 진불암에서 개당하고 화엄경과 범망경(梵網經)을 강설하고 선법을 가르쳤다. 22년간 강당에서 학승들을 가르치다가 조계산과 지리산, 가야산, 영축산 등지에 있는 사찰을 순방한 뒤, 1873년에는 제주도, 1875년에는 한양과 송악을 거쳐 묘향산과 금강산을 순례하였다. 순례를 마치고 대둔사로 다시 돌아온 그는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속세의 나이 77세, 법랍 64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제자에는 교법을 전한 3인과 선법을 전한 81인이 있으며, 그 중에서 성윤(性允)과 예순(禮淳)이 가장 뛰어났다. 그의 저서로는 고승전인 동사열전(東師列傳)을 비롯하여 범해선사유고(梵海禪師遺稿), 범해시고(梵海詩稿), 경훈기(警訓記), 유교경기(遺敎經記), 사십이장경기(四十二章經記), 사략기(史略記), 통감기(通鑑記), 진보기(眞寶記), 박의기(博儀記), 사비기(四碑記), 명수집(名數集), 동시선(東詩選), 은적사사적(隱跡寺事蹟) 등이 있다.

 

불현듯 어디선가 각안대사가 나타나 죽비로 내 등짝을 후려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시간은 말없이 흘러 해는 이미 서산에 많이 기울어 있다. 오늘은 그저 진불암이 스쳐 지나가는 인연인지라 나그네는 운수행각으로 산길을 내려간다. 나는 어느 한곳에도 머무름이 없고 자취도 남기지 않는 바람이라.....


*두륜산 심적암터


*두륜산 남암


*두륜산 관음암

 

진불암에서 남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두륜봉과 도솔봉에서 발원하는 물텅거리골이 나온다. 계곡을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에 덕지덕지 앉아 있는 마음의 때를 씻는다. 물텅거리골에서 비탈길을 오르면 대흥사에서 도솔봉 중계소로 이어지는 산간도로와 만난다. 삼거리에서 조금 내려가니 길가 산기슭에 심적암터가 있다. 심적암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항일의병들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당시 일본군은 의병 60여 명을 학살한 뒤 암자에 불을 질러 완전히 타버렸다고 한다. 축대만 남아 있는 절터에는 대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심적암터를 떠나서 대흥사로 내려가다가 길가에  있는 남암에도 들른다. 암자에는 인기척도 없다. 정원에는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나 있다. 절마당에서 고계봉과 노승봉, 가련봉, 두륜봉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담는다. 남암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관음암이 있다. 관음암으로 오르는 길에는 키가 큰 편백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인기척이 없기는 관음암도 마찬가지다. 편백나무 사이로 해가 산봉우리 끝에 걸린 가련봉이 다가온다.  

 


*피안교에서 바라본 금당천


*두륜산 백화암



*백화암에서 바라본 혈망봉

 

*백화암의 부도


*백화암에 핀 매화

 

해탈문으로 내려와 대흥사 경내를 다시 한번 바라보고 부도전과 일주문을 지난다. 피안교를 건너 다시 속세로 돌아오다. 박모가 아직 남아 있어 비구승들의 수도처인 백화암(白華庵)에 들러서 가기로 한다. 백화암 입구에는 세운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부도탑 세 기가 나란히 앉아 있다. 저물어가는 백화암 뒤로 땅거미가 내려앉은 혈망봉이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백화암 차밭 한가운데 있는 매화나무에 눈처럼 하얀 매화꽃이 피었다. 매화꽃 봄처녀가 수줍은 듯 말없는 미소를 산길 나그네에게 보내온다. 두륜산에도 봄은 그렇게 와 있었다.    

 

불교의 선종과 미륵불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깨닫고 두륜산을 떠나다. 하산.......

 

2007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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