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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19]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루카 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36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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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하느님을 만날 날 <독서 : 에페 2, 12 – 22 복음 : 루카 12, 35 – 38>
깨어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복음 말씀에 딴지를 걸고 싶습니다. 혼인을 하면서부터 12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저는 술잔치에서 돌아오는 남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아내로서 결코 행복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새벽 2시든, 4시든 술에 취해 제 흥에 겨워 휘청거리며 들어오는 남편은 얼마나 행복할는지 모르겠지만, 집안 구석에 소외되어 육아와 가사에 지친 저는 눈을 치뜨고 악에 받쳐 남편을 기다리든, 아니면 잠이 들었다가 남편의 기척에 놀라 깨든 결코 행복한 기분과 너그러운 마음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필이면 왜 주인이 밤중과 새벽을 분별함 없이 들이닥치시고, 종들은 분명 낮 시간 동안 일을 하느라 피곤할 텐데도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 저는 이런 복음 말씀을 읽으면 솔직히 미간이 찌푸려집니다.
3년 전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오신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반신불수가 되어버리셨습니다. 병상을 지키면서 저는 분명 어머니의 체질을 절반쯤 닮았으리라 짐작하며, 그 후부터 언제 찾아올지 모를 병과 건강에 예민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겠지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일상습관 같은 남편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는 것과 달리 불현듯 별다른 예고도 없이 찾아드는 병과 죽음처럼, 하느님을 만날 날은 갑자기 우리 눈앞에 닥쳐오겠지요..........◆
[말씀자료 : 유정원(가톨릭여성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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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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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 -
예수님,
당신께 제 삶과 가족과
민족의 어려운 상황을 말씀드립니다.
고통의 순간에도 실망하지 않도록
제 안에 믿음과 희망을 더해주소서.
당신의 이끄심이 세상의 악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시고
저희가 살아가면서 겪는 시련 가운데
용기를 내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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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결혼을 하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한 분이신 주님, 사랑으로 함께 살고픈 젊은이들을 축복하시어 그들이 가는 길을 밝혀 주시고,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겨 나가게 하시며 그들이 만든 가정의 소중함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오늘의 복음 : [다해]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루카 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36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8%2F09%2F00%2F52%2F489c6bb40b3d7%26filename%3Dda_icon05.gif)
영적독서 : 충만한 삶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며 살게 마련인 인간은 특히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외로움은 때때로 탁월한 창의력을 발휘하게 하지만 마약과 술의 유혹에 휘말려 무기력한 상태에 빠뜨리기도 한다. 때로는 사랑과 참된 성性에 눈뜨게 하는가 하면, 비인간적인 관계와 파괴적인 성욕에 빠져들게 한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고 더욱 충만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하면, 다리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고픈 충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로널드 롤하이저,「 안에 쉬게 하리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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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29주간 화요일(2010-10-19) I 복음묵상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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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공동체가 처음에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라고 선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이 돌아오면 곧바로 문을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하신다. 늘 깨어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깨어 있다면 주님을 기다릴 수 있고, 기다리는 사람이 결국 주님을 만날 수 있다(복음). |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준비와 기다림
준비와 기다림... 이 둘은 형제지간 쯤 된다. 준비는 미리 마련하여 갖추는 것이고, 기다림은 오거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을 미리 마련하여 잘 갖추고 있으면서 무엇이 오거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안성맞춤이다.
다가오는 수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한다면 수험생들은 사전에 그만한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고, 내일 단풍놀이를 가기로 했다면 계획에 따른 사전 준비를 꼼꼼히 해야 할 것이다. 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 했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인가.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내일이 세상의 종말이라 치자. 그렇다면 종말을 앞두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종말을 잘 맞이할 것인가? 오늘 복음이 마침 준비와 기다림에 관한 내용을 들려준다.
복음은 우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35절)는 예수님의 명령을 보도하고, 이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발견된다.(마태 24,43-51; 마르 13,34-36) 여기서 준비와 기다림이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가 집필되기 전에 모든 복음공동체에 확실하게 퍼져있었던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와 하느님 나라의 왕으로 오실 것과, 다른 하나는 그 오심의 시각이 임박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급하게 닥쳐와야 할 재림사건이 자꾸 지체하자 초기 교회공동체 안에 초조함과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적절한 입장표명이 4복음서 저자 모두의 숙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과 원전(原典)을 토대로 제각기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시기에 맞추어 세상의 종말과 재림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마태 24,1-44; 마르 13,1-37; 루가 21,5-36; 요한 14,1-3; 16,16)
루가가 집필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1,6)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1,7) 하고 대답하신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왕국창건과 세상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날과 그 시각은 한밤중이 될지 새벽녘이 될지(38절)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림의 날과 시각이 아니라, 분명히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믿는 이의 태도는 준비와 기다림뿐이다. 교회는 그 동안 2,000년의 긴 세월을 준비하고 기다려 왔고, 최종적인 그 날과 그 시각을 향하여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난 세월동안 사라져간 사람들 안에서 그 날과 그 시각을 보았다. 이 말은 한 인간의 죽음이 바로 그 날과 그 시각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를 뿐,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죽음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살아가는 것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산다는 비유의 뜻은 항상 근면하게 일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말한다. 등불을 켜 놓고 산다는 비유는 자신 안에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게 살아가는 마음자세를 뜻한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가 생(生)을 마감할 때, 즉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 그를 기쁨과 평화의 식탁에 초대하여 도리어 그에게 봉사해 주실 것이다.(37절)..........◆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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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종말의 삶을 위해 항상 깨어 있어라
오늘복음의 앞부분입니다. 주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재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의식주에 대해서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까마귀를 먹이시고 나리꽃을 입혀 주시는 하느님께서 자녀들을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청하고, 세상에 재물을 쌓지말고, 하늘창고에 쌓으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혼인잔치에서 밤늦게 돌아와 문을 두드리는 주인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인에게 문을 열어주기 위해서 깨어 기다리는 종처럼 되라고 말슴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깨어 있는 사람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도둑같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도독이 올 줄 아는 사람은 도둑을 맞지 않도록 미리 준비할 것입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재림을 예비하고 있으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다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I. 깨어 있어라!
1. 항상 깨어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으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5-36)
주님은 제자들에게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허리에 띠를 매라!"고 하셨고, 둘째로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람들이 입는 옷은 길고 통이 넓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행을 할 때나 활동할 때에 허리에 띠를 매었습니다(탈출 12,11 ; 1열왕 18,46 ; 2열왕 1,8). 이러한 점에서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언제든지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는 말은 어둠 속에서 언제든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명령들은 우리 신자들이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고 살아가야 합니다(1베드 1,13).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주인이 혼인잔치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결혼식이 밤에 열렸기 때문에 주인이 밤늦게 돌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열고 영접하기 위해서 자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열렸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는 제자들에게 매우 실감나게 들렸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이 항상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마태 25,1-13)
2.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7-38)
주님은 주인이 왔을 때에 그 종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도 역시 '깨어있다'는 말(그레고레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사도 20,31 ; 1코린 16,13 ; 콜로 4,2 ; 1베드 5,8 ; 묵시 3,2-3).
주님은 깨어 있는 종들을 위해서 주인이 친히 허리띠를 매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힌 후에 시중을 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은 매우 놀라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혼인잔치 집에 다녀왔을 때에 종이 깨어 문을 열어준다고 해서 그 종을 대접할 주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친히 주인이 종을 위해 시중을 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원해서 섬기는 종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재림하실 때에 깨어서 주님을 영접하는 신자들을 극진히 대접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깨어서 주님을 기다리는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친구나 가족처럼 대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환영은 우리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 때에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임금노릇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묵시 20,4).
또한 주님은 "주인이 혹 밤중(이경)에 오든, 새벽(삼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로마식 시간 계산은 밤을 4경으로 누었습니다(1경: 오후6-9시, 2경: 9-12시, 3경: 12-3시, 4경: 3-6시). 그리고 유대식 시간 계산은 밤을 3경으로 나누었습니다(1경: 6-10시, 2경: 10-2시, 3경: 2-4시 / 참고: 판관 7,19 ; 애가 2,19).
새성경은 오늘복음에 언급된 시간이 로마식인지, 유대식인지는 알 수 없기에 밤중과 새벽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이 돌아올 시간대를 언급하고 있는 점과, 그 시간이 기다리기에 매우 힘든 때라는 사실입니다. 늦은 밤이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수면을 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깊은 영적 수면에 빠져들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영적인 잠에 빠져서 세상 조류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마태 24,9-12)....<이상이 오늘복음입니다>
3.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주님은 제자들이 깨어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또 다른 비유를 해주셨습니다. 앞에서는 "깨어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이 강조되었다면, 이 비유는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재림은 갑자기 침입하는 도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주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집들은 흙 벽돌로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도둑들은 종종 이러한 흙 벽돌을 뚫고 들어와서 물건을 훔쳐 갔습니다.
도둑은 일반적으로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도둑으로부터 집과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들이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예고 없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재림일시를 정확히 아시는 분는 오직 하느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림이 언제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매일 깨어 있어서 항상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영적 파수꾼이 되해만 할 것입니다(시편 130,6).
II.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1. 슬기롭고 충실한 집사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루카 12,41-44)
깨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교훈을 들은 베드로는 주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이 비유가 자신들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들에게 하는 것인지 약한 혼동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교훈은 어떻게 보면 제자들에게 주신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이러한 질문을 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주님은 이 교훈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 교훈은 집사(청지기)의 위치에 있는 제자들에게 더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같이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많이 찾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원리는 베드로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집사 비유"를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집사'(오이코노모스)는 주인을 대신해서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집사 중에는 자유인도 있었고, 또 종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된 집사는 종으로서 남의 집사가 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혜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이 내용에서 보듯이, '집사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실'(1코린 4,2)과 '슬기'(16,8)였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종들'(데라페이아)은 '주인을 돌보는 식솔'이나, '주인을 섬기는 자'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집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일은 슬기롭게 생활을 꾸려 나가고, 종들이 각자에게 맡겨진 임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사였던 엘리에젤이나(창세 15,2), 보디발의 집사였던 요셉은 그 직분을 잘 수행한 충실한 집사였습니다(창세 39,4.6). 주님은 지금도 이와 같이 슬기롭고 충실한 복음의 청지기들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님은 충실과 슬기로 일하는 종에게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집사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되어야 하며, 주님은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결코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분명한 목표와 약속을 가진 것입니다(1코린 9,26). 주님은 복음에 대해서 충실하고 슬기롭게 일하는 집사들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겨주실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들은 더 큰 것을 받을 것이며, 장차 올 하느님 나라에서 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충실한 사도들은 장차 12보좌에 앉아서 세상을 심판하는 권한를 얻게 될 것입니다(마 19,28).
2. 충실하지 못한 집사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45-46)
주님은 슬기롭고 충실한 집사에게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동시에 주님은 충실치 못한 집사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악한 종들은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늦게온다"는 말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지체한다'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악한 종들은 항상 주님의 재림이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은 악한 종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고 "하인과 하녀를 때리고, 먹고 마시며 취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오실 때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맡겨진 일을 불성실하게 행할 것입니다. 폭력, 무절제, 방탕스러움 등은 집사로서의 임무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불충실한 종들에게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날"과 "그들이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처단한다"는 말(디코토메세이)은 '토막으로 자른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 재물을 토막내는데 사용되었으며(탈출 29,17), 참혹한 처형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구절로 보면(47-48), 이 말은 아마도 매우 준엄한 형벌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맡겨진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고, 불의한 삶을 사는 집사에게 내려질 형벌은 매우 엄한 형벌이 될 것입니다.
3.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주님은 계속해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맞는다'는 말(다레세타이)은 '가죽을 벗긴다', '때린다', '뜯어내다'는 뜻을 가진 '데로'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는 사람이 받는 형벌은 매우 엄할 것입니다. 성경은 '알고 지은 죄'에 대해서 매우 엄한 형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히브 10,26-27 ; 야고 4,17 ; 2베드 2,21).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1) 하느님의 공의는 심판과 형벌에 있어서도 만인에게 공정하게 적용된다. 2) 특권에는 항상 그에 합당한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특권을 받은 자인 동시에,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것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 사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은 더욱 엄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할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알고 지은 죄와, 무의식적으로 지은 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민수 15,30 ; 신명 17,12 ; 시편 19,13). 알고 지은 죄는 그 형벌이 매우 중하지만, 모르고 지은 죄는 적은 추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이 내용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고 싶었던 핵심이었습니다. 앞에서 베드로는 종의 비유가 "누구에게 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 이 교훈이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처럼 더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주님께 돌려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일반 신자도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들 역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면 추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받은 자들은 교만하지 말고, 두려운 마음으로 남보다 더 많이 충실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많이 받았든지, 아니면 적게 받았든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최선을 다해서 충성해야 합니다.............◆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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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준비하고 있어라!
우리를 구원하시려 이 땅에 오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으며 그 후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가? 우리는 날짜에 너무 민감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틀림없이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데 그 때 나는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를 놓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1. 기다리는 삶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즉, 주인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문 곁에 대기하고 서 있는 종의 자세를 우리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가 쫑긋해지고 드디어 똑똑 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에 너무 기뻐 급히 문을 열어 주인을 맞아들이는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들에게서 기대하십니다. '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이 내용은 긴장감이 감돌고 지체됨 없이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문 뒤에서 완전한 준비 자세를 갖춘 모습이 마치 출발 신호와 함께 앞으로 박차며 뛰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달리기 선수를 연상시켜 줍니다. 바로 그런 모습이 마지막 날 우리 주님을 맞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다른 세상 일에 마음을 쓰며 분주하게 오가다간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없습니다. 문 뒤에서 기다리는 자의 모습은 오로지 마음이 이제나저제나 돌아오실 주인에게 가 있습니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대상에 대한 마음이 온통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은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주님을 맞기 위해 마음을 다하여 기다리는 모습은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2. 깨어 있는 삶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37ㄱ절).... 주인이 바깥에서 일을 마치고 피곤한 심신을 쉬기 위해 집에 돌아오니 종들이 모두 쿨쿨 자고 있다면 그 주인의 심정이 어떠할까요? 문을 두드려도 좀처럼 열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눈을 비비며 종이 반응을 합니다. 자다가 일어났기에 차림새도 볼썽 사납습니다. 이런 종을 주인이 좋다고 여기리 만무합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주인을 맞을 자세를 보이고 있는 종들을 대하면 주인은 크게 기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기대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는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있는 자는 돌발 사태가 발생하여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초저녁에 주인이 와도 아니면 늦은 밤에 와도 혹은 이른 새벽에 와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항상 주인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음으로 시간에 상관없이 자기 임무를 다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모습을 우리는 주님에게 보여들여야 합니다. 자고 있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댑니다. 또한 자는 모습은 열심을 다하여 자기 임무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늘 깨어 기도하며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우리 주님이 마지막 날 보실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복이 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는 '언제'(when)를 놓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how)를 놓고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 맞을 준비를 합니다. 기다려라! 깨어 있어라!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3. 준비하고 있으라!
왜 우리가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맞기 위해 깨어서 기다려야 합니까? 왜 우리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상태로 있어야 합니까?
(1) 생각지 않은 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40절). 이 내용에서 '생각지 않은 때'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이 뜻밖에 닥친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성부 하느님만 그 날과 그 시간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마태 24,36). 다만 우리는 그 시대가 이루어지는 징조를 보면서 그 날이 가까웠음을 분별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깨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다라는 점입니다.
만일 어느 가정에 도둑이 든다고 합시다. 온 가족이 알고 있는 유일한 정보는 오늘밤에 도둑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시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둑이 든다는 것을 뻔히 알고도 두 다리 쭉 뻗고 잠자리에 누울 수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밤새도록 눈을 부릅뜨고 가정을 지킬 것입니다. 바짝 긴장을 하고 손에 몽둥이를 들고 집을 지킬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십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언제 어느 시간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긴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간 오시는 주님을 제대로 맞을 수가 없기에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서 있습니다.
영적 상태가 긴장 상태입니다. 잠시라도 생각을 늦추고 방심할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바로 그 시간에 우리 주님이 오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알 수 없음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긴장하게 만듭니다. 반면에 알지 못한다 하여 자신의 판단으로 지금은 아닐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 가운데 엉뚱한 일에 열심을 내거나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자세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 현상은 하나님 없는 즉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나타납니다. 두 번째 경우는 믿는 자들 가운데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영적 긴장의 끈을 늦추고 방심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깨어 있으라 하신 주님의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스스로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판단하고 엉뚱하게 처신합니다. 세 번째 경우는 지금 이 자리에 우리 주님이 임하신다는 영적 긴장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이 기대하는 모습은 세 번째 경우입니다. 중대한 일이 틀림없이 벌어지기는 하는데 알 수 없다 라는 긴장 가운데 자기 자신을 살피며 항상 예비하고 있는 자를 우리 주님은 원하십니다.
(2) 완전 무장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35절)....이 말씀을 묵상하면 어떤 그림이 눈앞에 그려집니까? 지금 당장 무슨 일을 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지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대처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앉아 있지도 않고 두 발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은 결코 한가롭다거나 방심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에 비추어 보면 어떻습니까? 주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차림새가 어떻습니까? 자세는 어떻습니까? 누워서 TV 리모콘을 손에 들고 바뀌어지는 화면에 시선이 따라다니고 있습니까? 침대 속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까? 영적 상태가 어떻습니까? 영적 완전 무장이 필요한 때입니다. 긴장의 끈을 바짝 쥐고 있어야 할 때입니다. 깨어 근신하며 기도할 때입니다. 맡은 일에 충성할 때입니다.
생각지 않은 때에 우리 주님이 오신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긴장을 해야 하고 얼마나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지는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가 갈 겁니다. 항상 주님을 즉각 맞이할 수 있도록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합니다!..........◆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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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주님의 재림에 대해 준비하는 신자들의 자세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일을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의 초림과 똑같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재림의 신앙입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신 말씀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일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일을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인류의 종말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이 세상은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이란 이 세상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일을 말합니다. 그날이 이 세상의 최종적인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지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는 하느님이 내리시는 불의 심판을 받아 모두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며 성경에서는 이 세계를 천년왕국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1. 재림에 관한 주님의 경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하나의 비유적인 경종입니다. 여기서 비유적으로 표현된 혼인잔치 집이란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 혼인잔치 집에서 돌아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처럼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까요? 이에 대해 36절에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종들이 기다리는 자세에 대하여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자세를 예수님은 깨어 있어라는 뜻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37절에서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행복은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는 복으로 새로운 세계에서 주님과 함께 누릴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세상 사람은 무조건 두렵고 떨리는 불의 심판을 받게 되며 하느님의 교회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한 사람은 행복하여라고 선언된 축복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축복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태 25,21절에서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고 하는 행복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경우는 30절에서 이어서 나오는 말씀,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고 불행선언을 하셨습니다. 쓸모없는 종이 내어쫓긴 바깥 어두운 곳이란 종말에 인류들이 겪어야 할 대환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십니다.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을 가르십니다. 열매를 맺은 자와 맺지 못한 자를 가르십니다. 세상에 속한 자와 하느님께 속한 자를 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 16,2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시없는 영광의 시간이요, 모든 신자들이 간절히 열망해야 할 희망의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날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2베드 3,10-1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소망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인류가 심판을 받고 세상에 종말이 오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날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려아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일로 인하여 환난과 시련과 박해를 받고 있는 그의 백성들을 최종적으로 건지시고 그들에게 영광의 나라를 상속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나 가라지들의 심판은 바로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이루시기 위한 불가피한 하느님의 방법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날이 조금도 두려울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트모스섬에서 종말의 계시를 받은 사도 요한은 그토록 두려운 주님의 재림의 계시를 바라보면서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고 기뻐하며 감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에서는 교회에 대하여 주님의 재림에 관한 경종을 끊임없이 주시는 것입니까? 불신자들에게가 아니라 믿는 우리에게 이 같은 경종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재림은 성경적 징조만 예언되어 있을 뿐, 그 구체적인 시기에는 예고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신다는 그 시기를 미리 성경에서 예고해 주셨다면 이 세상은 종말이 오기도 전에 말할 수 없는 혼돈 속에 빠질 것이며 수많은 이단과 잘못된 종파에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 일은 지난 1992년 10월 28일 주님의 공중 재림설을 주장한 시한부 종말론 자들의 등장으로 우리가 친히 목격하고 경험했던 바입니다. 그래서 루카 12,40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재림 시에는 이미 모든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가 끝이 나기 때문에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2천년 전에 세상에 오셨지만 이 세상 끝에 가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초림의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 아기 예수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예수는 심판주로 하늘의 군사들을 거느리시고 영광의 모습으로 위엄 있게 오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도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으면 미련한 처녀의 반열에 들어가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는 무서운 '큰 환난' 가운데 떨어져 그 환난을 이 세상에서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는 환난의 시기입니다. 이 환난의 기간이 7년이기 때문에 보통 "7년 환난"이라고 부릅니다. 이 큰 환난 기간 중, 후3년 반에 속하는 1260일간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인 적 그리스도가 온 세계를 통치하게 되며 이 자에 의하여 이 세상에는 말할 수 없는 환난과 시련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간 마지막 시기에 가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데 이 때 일어날 일곱 대접 심판은 이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인류들에게 견딜 수 없는 환난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태 24,21절에서 "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이 날에 대하여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시험의 때"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 시험의 때에서 건짐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시험의 기간을 통과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예수님은 필라델피아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땅의 주민들을 시험하려고 온 세계에 시련이 닥쳐올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하라고 하신 말씀은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을 준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장차 닥쳐 올 이 시험의 때를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시험의 때를 준비한 성도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땅의 주민들을 시험하려고 온 세계에 시련이 닥쳐올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재림을 준비하는 신자의 자세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들의 자세에 대하여 3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35절에 있는 말씀대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고 하신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37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깨어 있는 일이 곧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일이란 사실을 40절에서 밝히셨는데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잠에서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잠들게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우리들로 깊은 신앙적인 잠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생활이란 이 세대를 본받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변화 받은 생활이어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생활은 우리들로 세상 잠에 취하게 하며 영적인 잠 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
로마 12,2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결코 세상적인 생활을 본 받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고 권고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의 신자들의 형편에 대하여 서너 가지로 경종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마태 24,37-39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고 하신 것입니다.
롯의 처는 하느님이 불로 심판을 내리는 중에도 세상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세상 생활에 분주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롯의 처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도 우리가 보통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의미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는 믿음, 신부의 단장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믿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노아는 세상에 나아가 하느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의 범죄로 인하여 홍수를 내려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메시지를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노아의 경종을 듣지 않고 하느님의 심판을 준비하는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상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노아의 끊임없는 경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육신적인 쾌락을 위한 세속적인 생활에 몰두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이 세상 형편이 그렇다고 경종하신 것입니다.
이 경종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방주에 들어가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노아와 그의 가족 여덟 명에 불과했지만 구원받을 하느님의 백성들이 노아의 여덟 식구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노아의 경종에 귀를 기우리지 않고 세상에 속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세상과 함께 홍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 시에도 구원은 받았지만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세속적인 생활에 몰두한 신자들은 시험의 때에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고 환난 가운데 던져저 그 두려운 큰 환난의 시기를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경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난의 날에 하느님의 특별하신 보호를 받아 환난의 때를 면하게 하려고 우리에게 이 같은 비유를 통해서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 25장에서 열 처녀의 비유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비유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를 더 구체화시킨 말씀입니다. 열 처녀는 교회에 나오는 구원받은 신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는 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국에는 신랑을 맞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들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그릇에 기름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있었지만 다른 그릇에 기름이 담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랑이 온다는 밤중에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였던 자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문밖에서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여기서 어리석은 처녀들로 비유된 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세상적인 생활, 다시 말하면 기복적인 생활로 만족했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마태 24장에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과 못된 종을 구분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누구를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라고 칭찬하셨고 누구를 못된 종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까? 주인에게 맡은 주님의 양 무리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므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게 한 종들을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못된 종들에 대해서는 48-51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주님의 재림에 전혀 관심이 없이 주님으로부터 맡은 양 떼들에게 세상에 속한 생활로 만족시키는 사목자들에 대하여 못된 종이란 이름을 부치신 것입니다. 지금은 노아의 때와 같이 교회마다 그의 양 떼들에게 주의 재림을 외치며 신랑을 맞을 준비를 시켜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경종하신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그 같은 사실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어느 교회를 둘러보든지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시키는 교회가 없습니다. 양들에게 먹이는 하느님의 메시지도 지금은 평화로운 때다, 지금은 지상의 축복을 받을 때다, 이렇게 외치며 그리스도인들로 세상 생활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잘먹고 마시는 생활을 하면 하느님이 주시는 최상의 복을 받은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표준을 세상적인 축복과 결부시켜 모든 신앙적인 정성을 세상에서 복을 받는 일에 쏟고 있는 것입니다.
시집 잘 가도 복, 장가 잘 들어도 복, 취직이 잘 되어도 복, 장사 잘 되도 복, 하느님의 복을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일과 결부시키는 시대가 오늘 우리가 당면한 교회의 형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세속적인 생활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눈이 열립니다. 이 눈이 열릴 때 주님 재림에 소망을 가지게 되며 그날을 열망하는 생활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우리가 이처럼 세속적인 생활에 물들지 않으려면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야 합니다. 허리에 띠를 매는 모습은 주인을 맞을 자세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신자가 깨어 있어야 할 모습을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세속에서 탈피하여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생활을 하려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 세대를 본받는 생활인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 받는 생활입니다. 이런 생활은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탄의 시험에 들면 먼저 우리는 성별된 생활을 못합니다. 우리의 생활이 성별되고 세속화되지 않기 위해 기도하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묵시 16,15절에서 예수님은 "보라, 내가 도둑처럼 간다. 깨어 있으면서 제 옷을 갖추어 놓아, 알몸으로 돌아다니며 부끄러운 곳을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죄는 우리의 의로움의 옷을 벗겨 우리들로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을 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로 벌거벗은 수치를 들어 내게 하는 죄를 멀리하고 죄를 범하면 곧 회개하여 추하고 더러운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등불을 켜놓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은 주님의 재림의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예언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 등불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주님 재림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도둑이 와서 구멍을 뚫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마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가 나서 그 홍수로 심판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하느님의 심판인 줄 모른 것처럼 큰 환난의 때가 와도 인류의 종말인줄 모르며 주님의 재림의 징조가 보여도 어두어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재림의 소망을 안겨 주며 그 재림을 준비케 하는 예언의 등불을 켜 들고 서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묵시 1,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 맺음글 :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습니다. 주님께서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대는 참으로 주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신랑을 맞을 준비를 서둘러야 할 그런 시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열망한다면 종말에 임할 그 어떤 큰 환난도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살아서 맞이하는 신자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다가 죽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그러했으며 우리의 모든 믿음의 선조들의 생활이 다 그러했습니다. 우리의 생활도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애 중에 오신다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신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의 때에 보호를 받으므로 결코 종말에 있을 환난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 공중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므로 땅속의 모든 것이 들어나 불로 심판을 받는 일곱째 대접 심판에서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새로운 세계를 이룬 지상에 내려와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서 천년 동안의 에덴의 축복된 생애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 후에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홀연히 변화 받아 영화로운 몸으로 영원한 천국에 올라가 영원토록 우리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이 소망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값진 보물처럼 깊이 간직하십시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구심점으로 삼으시고 주의 오심을 간절히 열망하십시오.
우리 묵상공간은 바로 신랑을 맞이하기를 준비하는 공동체로써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그 주인이 혼인잔치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문을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영적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 함께 크게 외칩시다. "아멘이시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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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