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 권36 촉서6 <관장마황조 전> 중 <관우전>
- [삼국지] 권36 촉서6 <관장마황조 전> 중 <관우전>입니다. 원문은 한적전자문헌(중화서국 점교본)의 글을 인용했으며, 원문 중에 ()는 중화서국의 교감을 통해 삭제한 글자이고 []는 덧붙인 글자입니다.
關羽字雲長,本字長生,河東解人也.亡命奔涿郡.先主於鄉里合徒,而羽與張飛爲之禦侮.先主爲平原相,以羽﹑飛爲別部司馬,分統部曲.先主與二人寢則同牀,恩若兄弟.而稠人廣坐,侍立終日,隨先主周旋,不避艱險.[1]先主之襲殺徐州刺史車冑,使羽守下邳城,行太守事,[2]而身還小沛.
[1]蜀記曰 : 曹公與劉備圍呂布於下邳, 關羽啓公, 布使秦宜祿行求救, 乞娶其妻, 公許之. 臨破, 又屢啓於公. 公疑其有異色, 先遣迎看, 因自留之, 羽心不自安. 此與魏氏春秋所說無異也.
[2]魏書云 : 以羽領徐州.
관우(關羽)는 자(字)가 운장(雲長)이고 본래 자(字)는 장생(長生)이며, 하동(河東)군 해(解)현 사람이다. 망명하여 탁군(涿郡-유주 탁군)으로 달아났다. 선주(先主-유비)가 향리(鄕里)에서 도중(徒衆-무리)을 모으니 관우는 장비(張飛)와 함께 그를 위해 어모(禦侮-적을 막아냄.절충折衝)했다.
선주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고 부곡(部曲)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선주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侍立)했고, 선주를 따라 주선(周旋-떠돌아다님;적과 겨룸)하며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주1)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下邳城)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行太守事) (주2) 자신은 소패(小沛)로 돌아갔다.
(주1) [촉기]蜀記 – 조공(曹公-조조)이 유비와 함께 하비(下邳)에서 여포를 포위했다. 관우가 공에게 여쭈길, 여포가 진의록(秦宜祿)을 시켜 구원을 청했다 하며 그의 처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니 공이 이를 허락했다. 여포가 막 격파되려 할 때 또 여러 번 청하자 공은 그녀가 남다른 미색이리라 의심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 맞아들여 확인했다. 그리하여 그녀를 (자신의 부중에) 머물게 하니 관우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는 위씨춘추(魏氏春秋)가 말하는 바와 같다.
※ <명제기> 주 헌제전, <조상전> 주 위략 등에 의하면, 진의록의 처는 두씨(杜氏)이고 조조가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면서 그 아들 진랑(秦朗)은 이후 다른 의붓아들인 하안 등과 더불어 조조의 집안에서 함께 키워집니다. 한편, 처를 뺏긴 진의록은 여포가 패망한 후 조조에 의해 패국 질현의 현장으로 임명되었다가 유비가 서주를 점거할 때 유비의 설득에 넘어가 함께 뒤따랐는데, 곧 후회하고 되돌아가려다 장비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주2) [위서]魏書 - 관우에게 서주(徐州)를 다스리도록 했다
建安五年, 曹公東征, 先主奔袁紹. 曹公禽羽以歸, 拜爲偏將軍, 禮之甚厚. 紹遣大將(軍)顔良攻東郡太守劉延於白馬, 曹公使張遼及羽爲先鋒擊之. 羽望見良麾蓋, 策馬刺良於萬衆之中, 斬其首還, 紹諸將莫能當者, 遂解白馬圍. 曹公卽表封羽爲漢壽亭侯. 初, 曹公壯羽爲人, 而察其心神無久留之意, 謂張遼曰 : 「卿試以情問之.」 旣而遼以問羽, 羽歎曰 : 「吾極知曹公待我厚, 然吾受劉將軍厚恩, 誓以共死, 不可背之. 吾終不留, 吾要當立效以報曹公乃去.」 遼以羽言報曹公, 曹公義之[3]. 及羽殺顔良, 曹公知其必去, 重加賞賜. 羽盡封其所賜, 拜書告辭, 而奔先主於袁軍. 左右欲追之, 曹公曰 : 「彼各爲其主, 勿追也.」 [4]
[3]傅子曰 : 遼欲白太祖, 恐太祖殺羽, 不白, 非事君之道, 乃歎曰 : 「公, 君父也; 羽, 兄弟耳.」 遂白之. 太祖曰 : 「事君不忘其本, 天下義士也. 度何時能去? 」 遼曰 : 「羽受公恩, 必立效報公而後去也.」
[4]臣松之以爲曹公知羽不留而心嘉其志, 去不遣追以成其義, 自非有王霸之度, 孰能至於此乎? 斯實曹公之休美.
건안 5년(200), 조공(曹公-조조)이 동쪽을 치자 선주는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
원소가 대장(大將) 안량(顔良)을 보내 동군(東郡)태수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은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先鋒)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刺)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諸將)들 중 당해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공(曹公)이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 (※)
※ 한수정후 / 형주 무릉군의 속현 중에 한수(漢壽)현이 있으므로 이 한수(漢壽)현의 한 정(亭)(이름 불명)을 식읍으로 받은 것으로 보는 설이 많은데, 정후(亭侯)의 명칭에 현 이름을 붙이는 것은 통례에 어긋나므로 한수정(漢壽亭)이라는 별개의 정(亭)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군-현-향-정) 더 자세한 설명은 삼국지집해 참조.
당초 조공은 관우의 사람됨을 크게 여겼으나 그의 심신(心神-마음)에 오래 머물 뜻이 없음을 살피고는 장료에게 이르길 “경이 시험삼아 그의 뜻을 물어보시오”라고 했다.
그 뒤 장료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조공께서 후히 대우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장군(劉將軍-좌장군 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
장료가 관우의 말을 조공에게 보고하니 조공이 이를 의롭게 여겼다. (주3)
관우가 안량을 죽이게 되자 조공은 관우가 필시 떠날 것임을 알고 포상을 더욱 무겁게 베풀었다. 관우는 하사받은 것을 모두 봉해놓고 작별을 고하는 서신을 올린 후 원소군에 있던 선주(先主)에게로 달아났다. 좌우(左右)에서 이를 추격하려 하자 조공이 말했다, “그는 각기 자신의 주인을 위한 것이니 뒤쫓지 말라.” (주4)
(3)[부자]傅子 - 장료는 태조(太祖-조조)에게 고하려니 태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려웠고, 고하지 않으려니 주군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므로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공(公)은 군부(君夫)이고 관우는 형제로다!” 결국 태조에게 이를 고했다. 태조가 말했다. “주인을 섬김에 그 근본을 잃지 않았으니 천하의 의사(義士)로다. 언제 떠날 것 같소?” 장료가 말했다, “관우가 공의 은혜를 입었으니, 필시 공을 세워 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입니다."
(4)신 송지가 보건대(주석자인 배송지裵松之의 논평), 조공은 관우가 머물지 않을 것을 알고도 마음으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떠나는 관우를 추격하지 않아 그의 의(義)가 이루어지게 했다. 스스로 왕패의 도량(王覇之度)을 품지 않고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실로 조공의 훌륭한 행동이다.
從先主就劉表. 表卒, 曹公定荊州, 先主自樊將南渡江, 別遣羽乘船數百艘會江陵. 曹公追至當陽長阪, 先主斜趣漢津, 適與羽船相値, 共至夏口[5]. 孫權遣兵佐先主拒曹公, 曹公引軍退歸. 先主收江南諸郡, 乃封拜元勳, 以羽爲襄陽太守、盪寇將軍, 駐江北. 先主西定益州, 拜羽董督荊州事. 羽聞馬超來降, 舊非故人, 羽書與諸葛亮, 問超人才可誰比類. 亮知羽護前, 乃答之曰 : 「孟起兼資文武, 雄烈過人, 一世之傑, 黥、彭之徒, 當與益德並驅爭先, 猶未及髥之絶倫逸群羣也.」 羽美鬚髥, 故亮謂之髥. 羽省書大悅, 以示賓客
[5]蜀記曰 : 初, 劉備在許, 與曹公共獵. 獵中, 衆散, 羽勸備殺公, 備不從. 及在夏口, 飄颻江渚, 羽怒曰 : 「往日獵中, 若從羽言, 可無今日之困.」 備曰 : 「是時亦爲國家惜之耳; 若天道輔正, 安知此不爲福邪!」 臣松之以爲備後與董承等結謀, 但事泄不克諧耳, 若爲國家惜曹公, 其如此言何!羽若果有此勸而備不肯從者, 將以曹公腹心親戚, 實繁有徒, 事不宿構, 非造次所行; 曹雖可殺, 身必不免, 故以計而止, 何惜之有乎!旣往之事, 故託爲雅言耳.
선주(先主)를 따라 유표(劉表)에게로 나아갔다. 유표가 죽고 조공이 형주(荊州)를 평정하니, 선주는 번(樊)으로부터 장차 남쪽으로 가 장강을 건너려 하며, 따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타고 가게 해 강릉(劉表)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공이 추격하여 당양(當陽) 장판(長阪)에 이르렀고, 선주는 한진(漢津)으로 비스듬히 나아가다 때마침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어 함께 하구(夏口)에 도착했다. (주5)
손권(孫權)이 군대를 보내 선주를 도와 조공을 막았고 조공이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郡)을 거두어들이고는 원훈(元勳-으뜸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을 봉배(封拜)하니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가 서쪽으로 익주(益州)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董督荊州事-형주의 사무를 지휘감독)로 임명했다.
관우는 마초(馬超)가 항복해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고인(故人-친분, 내왕이 있는 이)이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가 호전(護前-호승심이 강함)함을 알았으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孟起-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雄烈-굳세고 맹렬함)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경포(黥布), 팽월(彭越)과 같은 무리입니다. 응당 익덕(益德-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수염) 그대의 절륜(絶倫) 일군(群羣-출중함)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賓客)들에게 보여주었다.
(주5) [촉기]蜀記 – 당초 유비가 허도에 있을 때 조공과 함께 사냥한 적이 있는데, 사냥 중에 무리가 흩어지자 관우는 유비에게 공(公-조조)을 죽이도록 권했으나 유비가 따르지 않았다. 하구(夏口)에 있으며 강 가를 전전함에 이르자 관우가 화를 내며 말했다, “지난날 사냥 중에 만약 저 관우의 말을 따랐다면 가히 오늘의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유비가 말했다, “그때는 또한 국가를 위해 그를 아꼈을 뿐이다. 만약 천도(天道)가 보정(輔正)된다면 이것이 복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느냐!” / 신 송지가 보건대, 유비가 뒤에 동승(董承) 등과 결모하였으나 다만 일이 누설되어 성공시키지 못했을 뿐이니, 국가를 위해 조공을 아꼈다는 어찌 그가 이 같은 말을 했겠는가! 만약 관우가 참으로 이처럼 권했으나 유비가 이를 따르지 않았다면 이는 장차 조공의 복심(腹心-심복), 친척과 따르는 자가 실로 많았고 일이 숙구(宿構-미리 계획됨)되지 않아 다음에 할 바를 정하지 못한 것이다. 비록 조공을 죽일 수 있다 해도 자신이 화를 면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이를 헤아려 계책을 멈춘 것이지, 어찌 조공을 아껴서였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가탁하여 아름다운 말을 했을 뿐이다.
羽嘗爲流矢所中, 貫其左臂, 後創雖愈, 每至陰雨, 骨常疼痛, 醫曰 : 「矢鏃有毒, 毒入於骨, 當破臂作創, 刮骨去毒, 然後此患乃除耳.」 羽便伸臂令醫劈之. 時羽適請諸將飮食相對, 臂血流離, 盈於盤器, 而羽割炙引酒, 言笑自若.
일찍이 관우는 화살에 맞아 왼팔을 관통당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비록 상처는 치유되었으나 몹시 흐리며 비오는 날이면 늘 뼈가 아팠다. 의원이 말했다, “화살촉에 독이 있어 이 독이 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응당 팔을 갈라 상처를 내고 뼈를 깎아내 독을 제거해야 하니 그 연후에야 이 통증이 없어질 것입니다.”
관우는 이내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르게 했다. 이때 관우는 때마침 제장들을 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함께 하고 있었는데, 팔에서 피가 흘러 반기(盤器-대야, 접시)에 가득찼으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잔을 끌어당겨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했다.
二十四年, 先主爲漢中王, 拜羽爲前將軍, 假節鉞. 是歲, 羽率衆攻曹仁於樊. 曹公遣于禁助仁. 秋, 大霖雨, 漢水汎溢, 禁所督七軍皆沒. 禁降羽, 羽又斬將軍龐德. 梁郟、陸渾群盜或遙受羽印號, 爲之支黨, 羽威震華夏. 曹公議徙許都以避其銳, 司馬宣王、蔣濟以爲關羽得志, 孫權必不願也. 可遣人勸權躡其後, 許割江南以封權, 則樊圍自解. 曹公從之. 先是, 權遣使爲子索羽女, 羽罵辱其使, 不許婚, 權大怒[6]. 又南郡太守麋芳在江陵, 將軍(傅)士仁屯公安, 素皆嫌羽(自)輕己. [自]羽之出軍, 芳、仁供給軍資, 不悉相救. 羽言「還當治之」 , 芳、仁咸懷懼不安. 於是權陰誘芳、仁, 芳、仁使人迎權. 而曹公遣徐晃救曹仁[7], 羽不能克, 引軍退還. 權已據江陵, 盡虜羽士衆妻子, 羽軍遂散. 權遣將逆擊羽, 斬羽及子平於臨沮[8].
[6]典略曰 : 羽圍樊, 權遣使求助之, 敕使莫速進, 又遣主簿先致命於羽. 羽忿其淹遲, 又自已得于禁等, 乃罵曰 : 「狢子敢爾, 如使樊城拔, 吾不能滅汝邪!」 權聞之, 知其輕己, 僞手書以謝羽, 許以自往. 臣松之以爲荊、吳雖外睦, 而內相猜防, 故權之襲羽, 潛師密發. 按呂蒙傳云 : 「伏精兵於<舟+冓><舟+鹿>之中, 使白衣搖櫓, 作商賈服.」 以此言之, 羽不求助於權, 權必不語羽當往也. 若許相援助, 何故匿其形迹乎?
[7]蜀記曰 : 羽與晃宿相愛, 遙共語, 但說平生, 不及軍事. 須臾, 晃下馬宣令 : 「得關雲長頭, 賞金千斤.」 羽驚怖, 謂晃曰 : 「大兄, 是何言邪!」 晃曰 : 「此國之事耳.」
[8]蜀記曰 : 權遣將軍擊羽, 獲羽及子平. 權欲活羽以敵劉、曹, 左右曰 : 「狼子不可養, 後必爲害. 曹公不卽除之, 自取大患, 乃議徙都. 今豈可生!」 乃斬之. 臣松之按吳書 : 孫權遣將潘璋逆斷羽走路, 羽至卽斬, 且臨沮去江陵二三百里, 豈容不時殺羽, 方議其生死乎? 又云「權欲活羽以敵劉、曹」 , 此之不然, 可以絶智者之口. 吳歷曰 : 權送羽首於曹公, 以諸侯禮葬其屍骸.
건안 24년(219년), 선주(先主)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前將軍), 가절월(假節鉞)로 삼았다.
이 해,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번(樊)에서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조공이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가을, 큰 비가 내려 한수(漢水)가 범람하고 우금이 이끌던 7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고,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양(梁-예주 양국), 겹(郟-영천군 겹현) 육혼(陸渾-홍농군 육혼현)의 군도(群盜-뭇 도적)들이 혹 멀리서 관우의 인호(印號-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지당(支黨-일당,도당)이 되었고 관우의 위세가 화하(華夏-중국)를 진동했다.
조공이 허도(許都)를 옮겨 그 예봉을 피할 것을 의논했는데,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 장제(蔣濟)가 말하길,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필시 원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사람을 보내 손권이 그 배후를 치도록 권할 만 합니다. 강남(江南)을 떼어내어 손권을 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번(樊)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라 했고 조공이 이에 따랐다.
그 이전에 손권이 사자를 보내 자신의 아들을 위해 관우의 딸을 청한 일이 있는데, 관우가 그 사자를 모욕하며 혼인을 허락치 않으니 손권이 대노했었다. (주6)
(주6) [전략]典略 – 관우가 번(樊)을 포위하자 손권은 사자를 보내 그를 돕기를 청했는데 명을 내려 속히 나아가지 않도록 하고는 또 주부(主簿)를 먼저 보내 관우에게 명을 전하도록 했다. 관우는 그의 엄지(淹遲-지체하고 늦음)함에 분노하고 또한 스스로 이미 우금 등을 붙잡았으므로 이에 욕하며 말했다, “학자(貉子-오소리 새끼)가 감히 이처럼 구는구나. 번성이 함락되고 나면 내가 네놈들을 멸하지 못하겠느냐!” 손권이 이를 듣고 관우가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을 알고는, 거짓으로 손수 서신을 써서 관우에게 사죄하고 몸소 갈 것을 허락했다. / 신 송지가 보건대, 형(荊)과 오(吳)는 비록 겉으로는 화목했으나 안으로는 서로 시기하고 방비하니 이 때문에 손권이 관우를 습격할 때 은밀한 군사를 몰래 일으켰다. 여몽전(呂蒙傳)에 의하면 ‘구록([舟+冓][舟+鹿]-큰 배의 일종;워드로 표기가 안되어서 파자해서 적었음)에 정병(精兵)을 엎드리게 한 채 백의(白衣-평민)에게 노를 젓게 하고 상고(商賈)의 복장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 말대로라면 관우는 손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손권은 필시 응당 갈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서로 원조하기로 했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형적(形迹-거동,행적)을 숨겼겠는가?
또 남군태수 미방(麋芳)이 강릉(江陵)에 있고 장군 사인(士仁)이 공안(公安)에 주둔했는데 (※)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자(軍資)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 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 장군 사인(士仁) / <관우전>에는 “傅士仁”으로 적혀 있지만 <양희전>의 계한보신찬, <손권전>, <여몽전>에서는 모두 “士仁”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에 의거해 傅를 잘못 삽입된 군더더기 글자로 보고 중화서국 점교본에서 傅를 삭제했습니다. 즉, 성이 사(士), 이름이 인(仁)
한편, 조공은 서황(徐晃)을 보내 조인을 구원했고(주7) 관우가 이를 이기지 못하자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거하고 관우 사중(士衆-사졸)들의 처자를 모두 사로잡자 관우군이 마침내 흩어졌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을 임저(臨沮-형주 남군 임저현)에서 참(斬)했다. (주8)
(주7) [촉기]蜀記 – 관우는 서황과 더불어 예전부터 서로 경애했다. 멀찍이서 함께 대화했는데 다만 평생(平生-평소)의 일만 말할 뿐 군사(軍事)는 언급하지 않았다. 잠시 뒤 서황이 말에서 내리며 영을 내렸다, “관운장의 머리를 얻어오는 자는 금 1천 근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관우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서황에게 말했다, “대형(大兄), 이 무슨 말이오!” 서황이 말했다, “이는 나라의 일이오.”
(주8) [촉기] – 손권은 장군을 보내 관우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을 붙잡았다. 손권이 관우를 살려 유비와 조조에게 대적하려 하자 좌우에서 말했다, “낭자(狼子-이리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공이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이에 관우를 참수했다. / 신 송지가 오서(吳書)를 살펴보건대, 손권은 장수 반장(潘璋)을 보내 관우의 도주로를 끊고 관우가 당도하자 이내 참수했다. 게다가 임저에서 강릉까지 2-3백리 거리인데 어찌 관우를 때에 맞춰 관우를 죽이지 않고 바야흐로 그 생사를 의논할 여유가 있었겠는가? 또 이르기를 ‘손권이 관우를 살려 유비와 조조에게 대적하려 했다’고 하니 이런 터무니없는 말은 가히 지자(智者)의 말문을 막히게 할 만하다. / [오력]吳歷 – 손권은 관우의 수급을 조공에게 보내고 제후(諸侯)의 예로 그 시해(屍骸-시신)를 장사지냈다.
※ 관우의 죽음
1.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舊城, 關羽所築, 羽北圍曹仁, 呂蒙襲而據之. 羽曰:此城吾所築, 不可攻也, 乃引而退. / [수경주] 권34 강수江水)
2. (장수漳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임저현(臨沮縣)의 장향(章鄕) 남쪽을 지난다. 옛날 관우가 맥성(麥城)을 보전하다 거짓으로 항복하여 달아났는데 이곳에서 반장(潘璋)이 그를 참수했다. 장수(漳水)는 또 남쪽으로 흘러 당양현(當陽縣)을 지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맥성(麥城) 동쪽을 지난다. (又南歷臨沮縣之章鄕南, 昔關羽保麥城, 詐降而遁, 潘璋斬之于此. 漳水又南逕當陽縣, 又南逕麥城東. / [수경주] 권32 장수漳水)
追諡羽曰壯繆侯[9]. 子興嗣. 興字安國, 少有令問, 丞相諸葛亮深器異之. 弱冠爲侍中、中監軍, 數歲卒. 子統嗣, 尙公主, 官至虎賁中郎將. 卒, 無子, 以興庶子彝續封[10].
[9]蜀記曰 : 羽初出軍圍樊, 夢豬嚙其足, 語子平曰 : 「吾今年衰矣, 然不得還!」 江表傳曰 : 羽好左氏傳, 諷誦略皆上口.
[10]蜀記曰 : 龐德子會, 隨鍾、鄧伐蜀, 蜀破, 盡滅關氏家.
관우에게 시호를 추증해 장무후(壯繆侯)라 했다. (주9) 아들 관흥(關興)이 후사를 이었다. 관흥의 자는 안국(安國)이고 어려서 영문(令問-명성, 좋은 평판)이 있었고 승상 제갈량은 그를 심히 기이(器異-높이 평가하고 중시함)하게 여겼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시중(侍中), 중감군(中監軍)이 되었다가 몇 해 뒤에 죽었다. (관흥의) 아들 관통(關統)이 후사를 이었다. 공주를 아내로 맞았고 관직이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에 이르렀다. 관통이 죽은 후 자식이 없어 관흥의 서자(庶子)인 관이(關彝)가 봉작을 이어받았다. (주10)
(주9) [촉기] – 관우가 처음 출군해 번(樊)을 포위했을 때 돼지가 그의 발을 깨무는 꿈을 꾸고는 아들 관평에게 말했다, “내가 올해 쇠약해졌으니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 [강표전]江表傳 - 관우는 좌씨전(左氏傳)을 좋아하여, 이를 암송하면 거의 모든 구절이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주10) [촉기] – 방덕의 아들 방회(龐會)는 종회(鍾會), 등애(鄧艾)를 따라 촉을 정벌했고, 촉이 격파되자 관씨 일가를 모두 멸족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