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립동`(草笠童)과 `화류춘몽`(花柳春夢)
‘가거라 초립동’(草笠童 1941)
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노래 이화자
1. 어리광도 피웠소, 울기도 하였소
紅甲紗 댕기를 사달라고 졸라도 보았소
아리 살짝궁 응응응, 스리스리 응응응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간다간다 초립쟁이 간다간다 초립쟁이
아저씨 떠나간다.
2. 가지 말라 잡았소 발광도 부렸소
고무신 한 켤레 사달라고 응석도 부렸소
아리 살짝궁 응응응, 스리스리 응응응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간다간다 초립쟁이 간다간다 초립쟁이
아저씨 떠나간다.
3. 노자돈도 뺏었소 봇짐도 뺏었소
嶺 넘어 오백리 가는 사람 신발도 뺏었소
아리 살짝궁 응응응, 스리스리 응응응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나를 두고 못 떠나요
못가못가 초립쟁이 못가못가 초립쟁이
날 두고 못 떠나요.
※ 노래를 멈추려면 ■를 누르세요.
‘화류춘몽’(花柳春夢 1940)
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 노래 이화자
1. 꽃다운 이팔소년 울려도 보았으며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연지와 분을 발라 다듬는 얼굴 우에
청춘이 바스러진 낙화 신세.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다.
2. 점잖은 사람한테 귀염도 받았으며
나(나이) 젊은 사람한테 사랑도 했더란다
밤 늦은 인력거에 취하는 몸을 실어
손수건 적신 연(사연)이 몇 번인고?
이름조차 기생이면 마음도 그러냐?
3. 빛나는 금강석을 탐내도 보았으며
겁나는 세력 앞에 아양도 떨었단다
호강도 시들하고 사랑도 시들해진
한 떨기 짓밟히운 낙화 신세.
마음마저 썩는 것이 기생의 도리냐?
▲ 이화자 노래 - '화류춘몽'(1940)
▲ 김부자 노래- '화류춘몽'과 '가거라 초립동이' (2013. 01. 14 KBS 가요무대)
[이야기로 듣는 옛노래] '초립동(草笠童)'에 얽힌 사연①
'서민의 恨 서린 문경새재 노래를 배경으로'
[충청투데이] 2006년 08월 04일 (금) cctoday@cctoday.co.kr
이화자(1915~1950)
초립동(草笠童)
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노래 이화자
<1>
어리광도 피였소 울기도 하였소
홍갑사 댕기를 사달라고 졸라도 보았소
아리살짝쿵-응- 스리스리-응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간다간다 초립동이 간다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2>
가지 말라 잡았소 발광도 부렸소
고무신 한컬레 사달라고 응석도 부렸소
아리살짝쿵-흥- 스리스리-흥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간다간다 초립동이 간다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3>
노자돈도 뺏었소 봇짐도 뺏었소
영(嶺) 넘어 오백리 가는 사람 신발도 뺏었소
아리살짝쿵-흥- 스리스리-흥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나를 두고 못 떠난다
못가못가 초립동이 못가못가 초립동이
날두고 못떠나요
'초립동' 이 노래는 1941년 5월 OK레코드사에서 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으로 이화자가 불러서 크게 히트한 또 하나의 명곡으로 알려진 노래다. 이 노래는 원제목이 '가거라 초립동'으로 발표됐다가 다시 '초립동'으로 제목을 바꿔 지금까지 널리 애창되고 있는 노래다.
처음에 이화자가 이 노래를 불러서 세상 사람들이 "이화자는 노래에는 신과 같은 여자"라고까지 그녀를 높이 평가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노래다. 그리고 이 노래는 현장감이 넘치는 가사로서 당시에 가요팬들은 이 노래를 듣고서 노래 가사에 나오는 지명을 알게 됐다.
당시에는 작가들이 특수한 곳을 찾아다니며 그곳에서 느끼는 감동을 받아 작사가들은 그곳을 배경으로 노래 작사를 많이 했다. 지금도 지명과 지역의 노래를 배경으로 하여 작사를 하지만 그 당시와 같이 가요 팬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질 못한 예가 많다. 필자도 여러 곳의 지명을 배경으로 하여 작사·작곡도 했지만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질 못했다.
그러나 이 노래 '초립동'에 나오는 노래 가사 '문경'이라는 곳은 그만치 노래로서 국민들에게 알릴 만한 곳이다. 그래서 문경에 대한 노래 가사가 탄생하지 않았나 생각을 하게 된다.
문경이라는 곳은 원래는 경상북도 문경군이었다. 그러던 곳이 행정개편으로 인하여 지금은 문경시로 승격이 된 곳이며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사연들이 많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경은 지역이 부분적으로 평야를 이루고 있으며 시내는 높은 산들이 뺑 돌아가며 병풍과 같이 시내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지형이기도 하다. 특히 문경새재는 해발 642m의 높은 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남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하여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는 아주 중요하고 큰길이였다.
다시 말한다면 이 길은 영남사람들이 전용으로 다니는 전용 도로라고도 할 수 있는 길이다.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새재를 올라가려면 보통 힘든 길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빼곡하여 길 옆에 사람이 숨어 있어도 잘 보이질 않았다. 그런 산길이다 보니 산적들이 없을 리가 있으랴. 그래서 산적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산 밑 주막에서 술 한 잔씩 마시면서 서울가는 사람들을 기다리다 서울가는 사람들이 4-5명 정도 모여지면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술 한 잔씩을 주고 받으면서 그곳 문경새재에서 일어났던 지난날에 산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며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일 처음 만났지만 그날만은 서로 간에 오랫적 친구같은 감정으로 이들은 친해진다. 이렇게 만난 사람들은 문경새재를 넘어간다. 이렇게 사람의 숫자가 많을 땐 산적들도 감히 이들에게 덤벼들지를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피하여 산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이날 문경새재를 잘 넘어간 운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또 그와 반대로, 서울로 가는 사람이 없을 때는 문경새재를 넘질 못하고 같이 갈 사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해는 넘어가고 같이 갈 사람이 없을 때면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다. 그리고 그 이튿날도 역시 서울 가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렇게 기다리다가 서울 가는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씩 모이게 되면 앞에서 이야기 하듯이 새재를 넘게되는 무척 험한 산길이였다.
그러다 보니 문경새재를 넘기 전에 으레히 그 산 밑에 주막에서 술도 먹고 때에 따라서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유하게 됨은 당연한 일이였다. 문경새재는 이렇게 험한 산길이며 영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이렇게 어려운 고비를 겪게 되는 산길이다. 당시에는 앞에서 밝혔듯이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해야 되지만 다른 길로 서울을 가게 되면 몇 곱절 돌아서 가게 되니 쓰나 다나 할 수 없이 문경새재를 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필자가 말했듯이 문경새재는 그렇듯 우여곡절도 많았던 고갯길이다. 지금이야 사방으로 길이 나 있으며 또한 교통수단이 발달하였고 자동차 문화가 좋은 시절이라 문경새재를 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를 생각해 볼 때 얼마나 넘기 어려운 산길이며 또한 얼마나 험한 길인지는 이해가 갈 것이다. 그 당시 우리 선인들을 생각할 때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갈 때 꼭 문경새재를 넘어야만 하는 어려움 때문에 평소보다 며칠 앞당겨서 집을 나서야 되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야만 가다가 피로하면 쉬었다 가며 앞에서 밝혔듯이 문경새재를 넘지 못할 때는 새재 밑 주막에서 며칠 밤을 투숙하면서 서울가는 사람이 모이면 그때에야 산을 넘게되니 집에서 출발을 앞당길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특히 이 길은 영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넘게되며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로 가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래서 이 고개 문경새재는 영남에서는 '청운(靑雲)의 고개'라고 하며 과거에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한(恨)의 고개'라고도 불렀다.
[글: 김명환/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kmh4647@yahoo.co.kr]
[이야기로 듣는 옛노래] '초립동(草笠童)'에 얽힌 사연②
'문경새재 넘어 움트는 슬픈 사랑'
[충청투데이] 2006년 08월 11일 (금) cctoday@cctoday.co.kr
이렇게 문경새재는, 아니 조령(鳥嶺)으로도 불리는 이 고개는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역사적인 고개다. 수많은 과객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웃으면서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갔다가 과거에 낙방하여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한이 담긴 슬픔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이 고개에 대해 여러가지 한맺힌 구전 민요들이 탄생하기도 한 고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는 구전민요인 노래비도 건립하여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길을 끈다.
이러한 문경새재를 우리 가요작가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있으랴? 그래서 '초립동(草笠童)'이라는 노래가 탄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험한 산길이 지금 우리들에게 좋은 신민요로서 '초립동'이라는 노래를 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른 이화자(李花子)는 당대 신민요가수로서 '화류춘몽'에 이어 또다시 히트를 친 노래가 되었기에 문경새재는 우리들에게 더욱 좋은 전설과 애절한 노래를 듣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화자의 애절한 음색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현실감이 강하게 다가와 지금도 우리들이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문경새재는 당시에는 참으로 험한 산이었다. 필자가 험하다고 표현함은 산이 나빠서 험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산이 높고 굽이가 많다 보니 당시의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는 데 그만치 어려움이 뒤따랐기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개를 넘는 데는 앞에서 밝혔듯이 산적이 간혹 출현하여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을 위협하고 돈을 뺏는 등 각종 범행으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고개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문경새재를 넘어야 할 선비나 또는 장사꾼들은 공포감에 떨면서 새재를 넘게 된다. 그래서 혼자는 이 고개를 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러 사람이 모여서 떼를 지어서만 넘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산적 때문에 고개를 넘기가 어려운 시대에 '초립동'이란 노래가 탄생하여 공포감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다소나마 안정감을 찾게 했다. 이 노래가 발표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문경새재가 더욱 명성을 얻게 됨은 물론이요 말로만 듣던 산적들이 존재했던 사실을 알게 되였다. '초립동'이란 노래가 탄생한 것은 1941년 5월에 OK레코드회사에서 발표가 됐다. 이 노래는 당시 문경새재가 높고 꼬불꼬불한 굽이가 많다 보니 작가들이 보는 시적인 영감이 떠오르게 됐으며 또 산 밑에 는 주막들이 많이 있다 보니 거기에서 낭만적인 사건들이 머리에 떠올라 '초립동' 같은 가사가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초립동(草笠童)이란 뜻은 풀초자, 갓입자, 아이동자로 글자 그대로 해석된다. 초립은 당시에 머리에 쓰고 다니던 모자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은 장사꾼이 아니면 평민들이 많이 쓰고 다니는 모자였다. 그리고 양반들은 갓을 쓰고 다니던 시절이다 보니 이 모자의 뜻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초립동이란 장사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노래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당시 주막집에서는 으레 직업여성들을 고용하여 술을 팔던 시대였다. 그래서 화류계 여성들이 손님을 시중들며 접대를 할 당시였다.
화류계 아가씨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남자와 헤어짐이 아쉬워서 남자를 붙잡고 못 가게 사정을 하는 아주 순진한 여인의 마음을 그린 작품이 '초립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초립동이 노래를 설명하자면 남자는 장사꾼인 노총각이였으며 여자는 앞에서 밝혔듯이 술집 화류계 여자다. 이 두 사람은 하룻밤 풋사랑으로 인연을 맺고 총각은 그 주막을 떠나서 서울로 장사를 하러 가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화류계 여자는 그 총각을 놓아주기가 싫어서 못 가게 애원하며 붙잡는 그 안타까운 여심을 잘 묘사한 노래다. 노래가사를 살펴보면 '어리광도 피웠소 울기도 하였소 홍갑사 댕기를 사달라고 졸라도 보았소 아리살짝쿵-응-스리스리응-응 문경새재 넘어간다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못가못가 초립동이 못가못가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
이 노래가사에서 보듯이 여인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묘사를 한 노래다. '홍갑사 댕기를 사달라고 졸라도 보았소' 이 얼마나 여자의 솔직함을 잘 표현한 것인가? 얼마나 한 남자, 그러니까 노총각을 사랑했는지는 알 만한 일이다. 거기에다 이화자의 떨리면서 애띤 목소리에 흐느끼는 바이브레이션 하며 살짝 꺾어 넘기는 그야말로 숨막히는 그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자신도 모르게 숨이 멈추는 감을 실감할 것이다.
그리고 '못가못가' 떼 쓰는 한 여인의 애절한 호소는 현실적인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치 초립동(草笠童) 노래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준 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초립동이 아저씨 떠나간다에서 떠나간다는 이 대목에서는 한숨과 눈물이 겹쳐서 잠시 멈췄다가 콧소리로 살짝 꺾는 데에서 우리의 가슴을 찡하니 울려주는 대목이다. 아니 어쩌면 노래를 듣는 사람의 심장을 잠시 멈추게 하는 대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첫댓글
[3대 악재를 딛고
<마쓰시타 고노스케>
=마쓰시타가 얘기하는 하늘로부터의 3가지 큰 은혜
1)가난한 것:가난함은 부지런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2)허약한 것:허약함은 건강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3)못 배운 것:배우지 못 함은 배움의 절실함을 일깨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