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012939 예수님 만나야 전도합니다. 20090208 1남선교회 헌신예배
서론
여러분 가족을 사랑하십니까?
중앙사역훈련을 받으시는 분들과 성경공부 중에 가족전도가 쉽습니까. 아니면 불신이웃전도가 쉽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누구 전도하는 것이 쉬울까요/
답은 둘다 어렵습니다.
그런데 더 힘든 것은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족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구요.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럴 것입니다.
오늘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시골동창의 전화입니다. 그는 지금 인천순복음교회에 출석한답니다. 올해는 교구전체를 관활하는 총교구장의 직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말을 하더군요. 자식이 5명인데 모두가 딸이랍니다. 그런데 하나만 출가한 상태이지만 하나님이 전도한다고 교회에 매일 나가는데도 잘 자라게 하여 선교하러 외국을 다니는 자녀들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봉사와 헌신도 그렇습니다만, 전도도 결코 그 열매가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전도방법입니다. 전도는 복음이 필요로 하는 자가 나타났을 때 즉시 망설임 없이 하는 태도가 참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제1남선교회 회원여러분 올해 헌신예배를 통해 가장 급하게 전도 받아야 할 복음이 필요한 분들을 만나면 망설임 없이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총회에서는 올해 300만명 전도열매를 위해 발대식을 갖고 전도열매를 위해 온 교회들이 동참하여 줄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4월12일에 전도주일로 정하였습니다.
출산율이 저하되어 전도가 잘 안된다고 하지만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열정이 높아진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하여 확장될것을 믿습니다.
간혹 들려오는 기독교인 대상으로 하는 조사를 통해 얻은 자료는 우리를 긴장하게 합니다. 향후 10년 후의 교회의 모습을 생각했을 때 유럽의 교회가 떠올라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역사는 한철 피었다지는 들꽃과 같아서는 안되지요. 사시사철 부르른 소나무처럼 항상 같은 생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겨울에도 자라고 여름에도 자라는 나무처럼 자라야 합니다. 겨울같이 힘들 때도 자라고, 여름처럼 좋은 조건에서도 자라야 합니다. 지금은 겨울과 같은 시기입니다. 지금 손 놓고 복음전하는 일을 멈춘다면 여름엔 더 많이 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겨울과 같은 지금 복음에 냉냉한 분위기를 발판삼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도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도 치료하여 복음을 확장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하고 가겠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서는 4 복음서 중에 최초의 책입니다.
그 만큼 원시적 복음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시적 복음일수록 단순합니다. 단순하다고하는 것은 사건에 대한 해석이 복잡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시간별로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충격적으로 기억되는 사건이 가장 먼저 기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셨던 일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제일먼저 기록했습니다. 그것 중에 한 개인의 장모를 고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서 자라나던 과정이 없었던 것은 사적인 것이기 때문일거라면 오늘의 기록은 의외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공적인 사역을 중심으로 3년 반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인류를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개인적인 사건을 주목할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으셨습니다. 시간을 쪼개고 밤에 이동하는 등 분주한 일정을 보내셨기에 한 제자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낸다는 것은 의외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사람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주님이 그와 만나는 최초의 대면은 많은 신비감을 줍니다. 사무엘과 만나는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기드온을 만나는 하나님의 천사가 그랬습니다. 무명인의 삶을 살 때 그들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었는지를 전해줍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엔 그는 무명인입니다. 무명인이라기 보다 열병으로 병석에 누워있는 환자였습니다. 자유롭게 손님을 위해 주방을 분주하게 오가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아무것도 할 수없는 환자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점검해 볼 수 있으면 합니다.
사회를 바라보면 세상이 열병에 걸린 사회와 같아 보입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처방을 내려 보지만 잠시잠깐 그 효과가 나타날 뿐입니다. 공적자금을 아무리 많이 쏟아 부어도 침체된 경제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소비는 점점 더 굳어만 갑니다. 경기는 점점 패색이 짖은 경기를 치루는 선수와 같이 지쳐만 갑니다. 의사도 약도 그 효과가 미미해지듯 용기를 주는 경제학자들의 그라프와 수치로 떠드는 희망의 노래에도 더 이상 박수를 치지 않습니다. 과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 미래전문가들의 분석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이젠 유명한 경제학자가 와도 위기를 탈출시켰던 어떤 정치가의 지혜도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루한 터널을 걸어가듯이 걸어도 걸어도 끝날 것 같지 않은 미로를 걸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와 참 많이 어울리지 않는 사건을 기록한 듯 보입니다. 베드로의 입김이 이렇게 쎘나 할 정도로 예수님이 베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생길 지경입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 었길래 성경의 중요한 내용을 다 뒤로 하였을까요
그의 열병이 예수님의 앞으로의 사역과 무슨 관계가 있길래 중요하게 다루고 있을까요?
베드로 장모의 경제력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을까요.
베드로의 아내가 간절히 예수님께 애원했기 때문일까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나요?
저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준 사건을 시작으로 주님의 전도와 말씀선포와 예수님에 소문이 확장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고, 그 후에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동네의 환자들이 몰려들어서 문으로 사람들이 오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들었을 테고 예수님은 다른 마을로 서둘러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사건은 많은 병인들과 귀신들린 환자를 고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 개인의 질병고침은 많은 인류를 고치는 일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사소한 것을 잘 다루어야 큰 것에도 그 책임과 의무를 잘하게 됨을 교훈하기도합니다.
작은 일을 시작 할 때도 기도로 시작하였고, 기도로 마치듯이 주님의 사역은 늘 기도와 함께 시작하고 마쳤음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과 함께 예수님을 만나야 전도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을 통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논지: 예수님을 만나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진단설교
본론
예수님은 안식일 아침 성전을 찾아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길을 걸어 어디론가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길을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성경에 유일하게 아내와 함께 선교사역에 동참하였던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베드로의 이러한 동행을 통해 자신도 동행할 자격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만큼 지금도 베드로에게는 아내가 함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2,30미터정도 떨어진 곳이므로 함께 걸어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과 같이 점심은 베드로의 집에서 먹으려고 집에 들어선 것입니다. 베드로의 집에는 베드로의 장모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참 효자입니다. 장모님을 모실정도니 말입니다.
예))
어떤 성도님이 에덴동산이 가장 좋은 이유는 시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라고 하더랍니다.
시청도 가기 싫은 것은 시자로 시작하여서 그렇다던데 베드로는 장모님까지 모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모님은 요리를 잘하는 모양입니다.
그가 고침을 받고 난 후 즉시 손님대접의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를 수종들더라”는 말씀은 그의 정상적인 건강한 상태에 늘 하던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저도 장모님댁에 가면 쫄떼기라고 돼지껍질과 비곗살이 어울린 곳을 일부러 잘 요리하는 그 맛을 늘 잊지 못합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점심을 먹으려고 집에 들어섰는데 반갑게 맞아주실 줄 알았던 장모님이 계시질 않는 것입니다.
장모님이 몸져 누우신 것입니다.
회당에가서 제사를 마치고 돌아온 시간으로 봐서는 장모가 아파서 몸저 누우신 것이 오래된 것은 아닌듯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우리 장모님이 병환중이니 고쳐달라고 하지 않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집에는 사람들이 늘 많이 찾아왔던 것 같아요. 예수님이 베드로와 함께 그곳에 도착하여 병석에 계신 장모님을 바라볼 때 주변에 그를 알고 있는 군중들이 그를 고쳐줄 것을 부탁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저녁을 맞도록 환자를 돌보게 된 것을 보니 계획된 일이 아니고 장모를 고치므로 동네의 환자들이 몰려들어 장모의 집 문이 막힐 정도가 되었음을 통해 그 사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전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증상 베드로의 장모가 누워있습니다.
표면적/육체가 건강하던 사람도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에 의해 누울 수 있습니다.
사건을 보는 눈이 남자와 여자가 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합니다. 남성은 종합하여 보는 반면 여성은 개별적으로 따로 따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남성은 큰 것에 관심이 있고 여성은 작은 것에 세밀하게 보는 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견의 차가 생기지 않아도 될 일이 성의 차이로 인해 이해의 폭이 나는것을 경험합니다.
예)))
“밤하늘에 떠있는 둥근달을 보면서 달도밝다”이렇게 남자가 말한다면 여성은 “저기보이는 북극성이 너무 반짝이네”이렇게 반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제게도 관점의 차이로 인해 아내에게 못할 짓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내가 지난밤의 꿈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난 제 반응은 그것은 자네가 기도가 작아서 그런거야 하고 말해주었습니다. 사실 아내의 답은 지금의 심리적으로 힘들어서 위로받고 싶었는데 쌩뚱 맞은 답을 들었으니 여간 마음이 상한 것이 아니죠. 이럴 때 몸은 더 힘들고 피곤하며, 스트레스는 더 쌓이는 것입니다.
작은 것일지라도 쉽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건강한 삶을 살려면 작은 것이라고 무시하고 지나가면 큰 담장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잘 해주는 일을 계속하다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는지 건강을 잃고 누워있게 된 것입니다.
이면적 믿음생활에는 매일매일의 경건을 연습하지 않으면 불신앙이 됩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누구나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때문에 힘든일도 넉넉히 이깁니다. 그러나 힘들지도 않고 문제 같지도 않은 일 때문에 믿음을 팔아버립니다. 마귀의 종이 됩니다. 고난이라고 여기면 이기려고 힘을 다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것쯤이야 하고 무시하면 넘어집니다.
예)))
삼손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힘을 너무 믿었습니다. 그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눈은 뽑혔고, 여호와하나님은 다곤신 앞에 조롱을 받았습니다.
육체가 건강하려면 매일매일 규칙적인 운동이 도움이 됩니다. 경건의 삶을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매일매일 경건의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장모가 왜 누워있습니까.
진단 베드로 장모의 질병은 열병입니다.
열병은 계절적으로 유행하는 감염성 질환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열은 몸 안에 침투한 병원균에 대한 인체의 방어기전의 결과이므로, 37.5℃ 이상 의 열이 2~3일 이상 지속되는 경우 일단 바이러스나 세균들에 의해 유발되는 감염성 질환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밖에도 열은 암, 근골격계 질환, 약물 사용 시 부작용 등 에 빈번히 수반되는 증상이다.
표면적/1)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두었더니 열병이 되었습니다.
몸이 조금만 감기기운이 돌면 즉시 생강을 달여 먹거나, 인삼차 등을 찾아서 뜨끈하게 데워먹고 따뜻한 방에서 땀을 냅니다. 그러면 감기로 고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독감주사를 미리 맞으면 되지요. 그러나 여러분 몸 에 감기기운이 왔는데도 이것쯤이야 하고 방치하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든지 예방약을 처방하지 않으면 오래도록 고생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린 것도 결국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서 온 것입니다. 별 것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더니 몸 저 누워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방문을 건강한 몸으로 영접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갖게 됩니다.
적용) 믿음이 병들게 되는 것은 작은 부주의에서 시작됩니다. 산불로 인해 수십 헥타의 울창한 산림을 태우는데 그 원인을 찾아보면 등산객이 버린 담배가 원인이 됩니다. 산 밑에 폐 농사용 쓰레기를 소각하겠다고 하는 작은 생각이 큰 불로 번지게 됩니다. 믿음에 큰 허점이 들어나는 것은 아주 작은 나태함을 용납하는 순간 벌어지는 참극입니다. 믿음생활에 작은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고칠 수 있을거라는 자만이 누워 있게 합니다.
부지런한 장모의 성격으로 그는 분명 잠깐 찾아온 바이러스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러다가 말겠지 하고 잊었던 것입니다. 내 믿음으로는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만만한 분들이 사실 넘어집니다. 작은 질병에도 의원을 찾는 환자는 큰 병에 걸릴 확률이 적지만 병원을 멀리하는 자신의 육신을 과신하는 사람은 큰 병에 약하다고 합니다. 날마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것은 오랫동안 시험에 빠지지 않을 예방약을 먹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주님도 바쁘고 힘들고 지친 날 저녁, 아침일찍 서둘러 떠나야 하는 날 새벽에도 어김없이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바쁠수록 기도한다”는 말은 흘려 넘겨서는 안될 보화입니다.
/3)질병에 걸릴 때 속히 의원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장모는 열병에 누워있으면서도 자신의 질병을 고쳐달라 주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고쳐주실거라 믿어서 였을까요.? 주님도 고쳐달라 청하지 않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질병에 걸리면 의원을 찾아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상담을 청해야 합니다. 기도거리가 생기면 중보기도 팀에 부탁해야 합니다. 혼자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지만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가 하셨습니다.
이면적/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게 된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을 너무 믿는 교만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별 것 아닐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좀 지나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주님이 고쳐주시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될거라 생각했습니다. 교만은 자신이 해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교만은 주님을 찾지 않는 마음입니다. 교만하면 그 머리에 숯불을 쌓아두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교만한자를 미워하십니다. 교만한자를 흩으십니다.
주님을 찾지 않은 것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만한자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해결하려 합니다.
찬송-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여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받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이렇게 주님의 치료를 받을 수도 없을 장모가 열병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주님이 그 집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없이 들어가고 만나고 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 맘에 들어가야 됩니다. 주님이 그의 마음에 역사하셔야 됩니다. 주님이 역사할 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처방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면 1. 주님의 손이 닿는 곳에는 치유가 일어납니다. “잡아 일으키니”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8;15에서 본문은 예수께서 “그의 손을 만지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저앉은 사람을 억지로 일으킬 때 잡아 일으키다 표현합니다. 열병으로 꼼짝도 못하는 장모의 손을 잡고 일어나도록 했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열이 올라있을 때 일어나 앉는다는 것은 힘든 일 입니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태적 표현으로는 장모의 손을 잡고 주무르고 격려하듯이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4장에서는 38절에 주님이 열병을 꾸짓어서 병을 쫓아냈다고 말합니다.
가장 의학적 지식이 많은 누가는 열병을 꾸짖어서 고치고, 의학적 지식이 없는 마태나 마가는 손을 잡거나 어루만져주면서 고쳐주셨다고 말합니다. 마태와 마가의 표현으로 말하면 주님이 질병을 고치는 방식 중에 열병처럼 일상적으로 쉽게 나을 수 있는 질병 앞에서 주님은 위로와 격려를 주면서 안스러운 마음으로 질병을 고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주님도 매일의 기도로 무장하였기에 치유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전도는 마음으로 정하였으면,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영적인 열병에 빠진 불신자를 구원하려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 맘속에 들어가도록 간구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회복이 일어납니다.
결론
1. 주님만나 육체의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복음을 영접하면 건강하게 됩니다. 귀신들린 청년이 예수를 만나서 귀신이 떠나가므로 건강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던 시각장애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는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위암에 걸렸던 사람이 위암에서 벗어납니다. 예수를 만나면 건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만나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님만나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수종드니라” 이 말씀은 그가 질병에서 건강하게 되었더니 그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목이 곧아서 섬김을 받았습니다. 자신만 섬겨주기를 바랬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았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나니 자신은 죄인 중에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자는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주님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중앙교회 여러분, 그리고 1남선교회 여러분
주님을 만나 남선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난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섬기는 자의 본이 됩니다. 주님을 만난 삶이 나타내어지는 헌신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부닥합니다.
3. 주님만나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고침 받은 장모로 인해 마을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고침 받은 장모가 자신의 고침을 많은 사람들 앞에 고백하였기 때문 일 것입니다. 그를 지켜보던 마을사람들도 하나가되어 주님의 복음증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복음을 경험하면 혼자가 아닙니다. 복음을 경험하면 함께하는 자들도 변화하게 합니다. 복음을 경험하면 자발적으로 증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청주 청북교회 김영태목사님의 설교중에 들어있는 예화입니다.
한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더니 열심을 내어 새벽기도회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하고 난 후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할머니, 왜 교회에 안 나오십니까?” “몸서리 나. 몸서리 나.”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 영감도 몸서리나는데 내가 두 영감을 어떻게…….” 부흥 강사 목사님이 ‘간절히 기도하면 영감의 갑절을 받고 산다. 그 말을 오해 한 거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갑절의 영감을 사모하여 복음의 증인된삶을 살아가는 2009년 1남선교회 회원들이 되시고 함께 예배드린 모든 주의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