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협성대 김수천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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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새로운 영성 운동: ‘하나님의 일하심을 주목하는 기도의 삶’을 모색하다
기독교 영성 전통에 “기도하는 법은 믿는 법이다.”(Lex orandi, lex credendi)라는 금언이 있다. 이 말은 내가 기도하는 목적이 곧 내 신앙생활의 목적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내 삶의 필요와 나의 뜻을 구하는 기도만 한다면 내가 추구하는 신앙생활의 목표는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를 입고 사는 우리는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당연히 인간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기도문의 핵심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동안 기도로 성장해온 한국교회는 성장이 정체된 위기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한국교회 영성생활의 근간인 기도의 삶을 성찰해보고자 한다.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첫째, 산업화 시대를 배경으로 융성했던 통성기도 중심의 기도 생활, 둘째, 기도의 모범자이신 예수의 기도 생활, 셋째, 웰빙의 시대로 불리는 21세기를 위한 다양한 침묵기도 방법이다.
한국교회가 계발한 ‘주여! 삼창’ 통성기도의 장단점
비록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인간적인 필요를 구하기 위해 통성기도를 하는 면이 있지만, 통성기도는 영성학적으로 좋은 기도이다. 먼저 통성기도의 유익을 살펴보자.
첫째, 한국교회가 계발한 ‘주여 삼창’ 기도는 성서적 근거가 분명한 기도이다. 이것은 다니엘 9:19에 있는 “주여!”를 세 번 부르는 기도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둘째, 두 손을 들고 “주여!”를 삼창하는 것은 온몸이 기도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초대교회에서는 두 손을 들고 서서 기도하기도 했는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펴고 머리를 하늘로 향하게 하였다. 이것은 온몸으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간구하며 의지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주여!”를 세 번 부름으로써 기도자는 자신의 생각을 빨리 집중할 수 있다. 깊은 기도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에게 모으는 것에서 시작된다. 영국 성공회의 영성학자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신비주의의 본질』이라는 책에서 “깊은 기도란 지(知), 의(意), 정(情)이 순차적으로 작용하는 기도”라고 말한다. ‘지’란 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에게 모으는 것을 말한다. 깊은 기도는 세상으로 흩어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에게 집중함으로 시작된다. 그런 다음, 의지인 ‘의’가 작용한다. 하나님에게 집중한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성령이 나를 지배하시기를 끈질지게 간구하며 갈망하는 것이다. 언더힐은 깊은 기도의 성패가 이 단계에서 좌우된다고 말한다. 통성으로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나를 지배하시기를 갈망하다 보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하신다. 그러면 기도의 세 번째 단계인 ‘정’, 즉 감정과 사랑이 작용하는 단계가 열린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는 단계가 되겠다. 그 사랑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게 된다.
넷째, 집단으로 통성기도를 할 경우 기도의 분위기로 인해 기도자들이 서로 영적 전이(impartation)를 경험하게 된다.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할 때 기도자들은 서로 기도의 불이 옮겨붙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모름지기 기도란 장작불에 비유할 수 있다. 잘 타는 장작불도 정작 흩어놓으면 타다가 만다. 하지만 생나무도 타오르는 장작불에 올려놓으면 곧 불이 붙는다. 따라서 배에서 나오는 목소리로 ‘주여!’ 삼창하며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깊은 기도를 위해 아주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현재 행해지는 통성기도의 아쉬움은 무엇일까? 성령의 임재에 자신을 맡기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는 능동적 기도의 단계를 지나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맡기는 수동적 기도의 단계에 머무는 것이 부족하다. 영성가들은 일반적으로 기도의 단계를 능동적 단계(능동적 관상)와 수동적 단계(수동적 또는 주부적 관상, infused contemplation)로 구분했는데 바로 우리가 하는 통성기도도 능동적 단계에서 수동적 단계로 나아가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드리다 보면 흔히 말하는 ‘기도의 줄’이 잡히는 것을 경험한다. 그것은 옆 사람의 기도가 방해되지 않는 단계로 성령이 내 기도를 지배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수동적 단계의 기도가 시작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성령께서 나의 기도 내용을 이끌어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성화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을 위해서는 침묵 가운데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맡기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그런 상태에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최대한 오래 그리고 깊이 수동적으로 머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성령은 우리 안에서 변화되어야 할 것을 조명해주시고 우리를 성화시키신다. 나아가 우리는 그 상태에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지할 수도 있다. 따라서 통성기도를 충분히 한 뒤에는 반드시 몇 분이라도 침묵 가운데 머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기도의 모범자이신 예수의 기도 생활
예수는 요한복음 5:19-20에서 ‘기도를 토대로 한 사역 원리’를 잘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이 본문에서 핵심 구절은 “일을 보지 않고는”(ἐὰν μή τι βλέπῃ)인데 원어적 의미는 ‘만일 계속해서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이라는 뜻이다.1 이 ‘봄’의 원리에 대해 빌헬름 미카엘리스(Wilhelm Michaelis)는 이 구절이 요한복음에서 물리적 봄이 아닌 것으로 사용된 유일한 예라고 강조한다.2 성부의 일하심을 주목하는 똑같은 사역 원리를 예수는 요한복음 8:38에서도 말씀하셨다.(“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이에 대해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성자에게는 성부에 대한 지속적인 관상(a continual contemplation)의 관계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방해받지 않는 연합의 원리이다.”라고 말한다.3 마바 돈(Marva Dawn)은 성자가 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성부의 일하심을 수용하는 태도가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4 그런데 복음서 전체는 예수가 성부의 일하심을 보는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기도에 헌신하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한편 누가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주목한 군중의 태도를 묘사하는 누가복음 23:48(“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에서 ‘관상’(θεωρίαν, θεωρία의 대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영어 성서(NIV)에서는 ‘sight’로 번역하였고, 우리말 개역개정 성서에서는 ‘구경’으로 번역한 이 단어를 누가는 ‘관상’으로 기록하였다. 사실 누가복음은 물론이고 신약성서 전체에서 ‘구경’이라고 묘사할 장면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누가가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만 유일하게 ‘관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단지 물리적으로 어떤 장면이나 사건을 보는 것과는 달리 예수의 죽음 과정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본문에서 ‘관상’은 단순한 구경이 아니다. 이 단어의 신학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이를 구경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태도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 놀랜드(John Nolland)는 이 구절에 등장한 인물들이 누가복음 23:27의 무리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5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는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예수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자들로 십자가 처형을 그냥 구경한 자들과 전혀 다른 방식, 즉 사랑의 방식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누가는 23:47에서 특별히 백부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여기에서 백부장이 본 것은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과 예수가 원수들에게 하신 행동(23:34), 좌우의 죄수들에게 하신 말씀(23:43), 원수들을 위해 아버지께 드린 기도(23:46),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께 위탁하는 기도(23:36)였다.
다시 말해 백부장은 예수가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행악자에게 낙원을 허락하고 자신을 처형하는 원수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며, 악이 활동하는 한가운데서도 사랑과 용서로 악의 세력을 극복하는 예수의 신적인 행위를 본 것이다. 그 결과 백부장은 십자가 위에서 일하신 성부의 신적 계시 사건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영적인 조명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백부장의 이름은 페트로니우스(Petronius)로, 그는 그 후에 십자가 사건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순교하였다.6 따라서 누가가 사용한 ‘관상’이란 단어는 단순히 물리적 봄이 아니라 ‘지극한 사랑의 눈으로 봄으로써 성부의 신적 계시를 경험하는 관상적 차원의 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성부의 일하심을 지극한 사랑의 마음으로 주목하는 것’이라는 이 개념은 예수가 요한복음 5:19-20에서 말씀하신 원리와 흡사하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가 보여주신 기도는 관상적인 기도였다고 할 수 있다.
웰빙의 시대인 21세기를 위한 다양한 침묵기도 방법
한국교회에서 통성기도의 열정이 식어가는 이유 중 하나는 기도의 목적이 인간적인 간구 중심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사에서 증명된 것으로 신자들이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 기도의 열정은 그에 반비례한다. 그러면 산업화 시대에 통용되었던 통성기도를 웰빙의 시대인 21세기에 보완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이를 위해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인간적인 간구를 넘어서 예수가 보여주신 기도의 목적을 지향하는 기도의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여야 한다. 둘째, 기도를 위한 동기부여를 고려해야 한다. 통성기도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보릿고개 그리고 1980년대 말까지 이어진 산업화라는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 신적 도움을 위해 부르짖고자 하는 동기부여에 부합하는 기도방식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는 웰빙의 시대에 사람들이 기대하는 종교적 필요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중심으로 통성기도를 보완할 수 있는 네 가지 침묵기도를 성찰하고자 한다.
먼저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실천해온 동서방 교회의 관상기도를 생각해보자. 서방 가톨릭교회에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기도를, 동방정교회에서는 예수기도(The Jesus Prayer)를 실천하고 있는데 두 기도는 모두 성서적 근거가 분명한 기도이자 교회사를 통해 그 가치가 입증된 기도이다. 두 기도의 역사나 방법은 많이 알려졌기에 생략하고, 이 기도들의 성서적 근거와 영적 유익만 살펴보고자 한다.
렉시오 디비나(말씀묵상 침묵기도)의 성서적 근거는 구약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읊조리는 영성훈련, 즉 율법 신비주의(Torah-mysticism)에 근거한다.(시 1편, 119편) 율법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으로 신자들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종일 되새김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 기도는 다음과 같은 유익을 제공한다. 첫째, 늘 스스로 무언가 일을 하는 우리의 생각에 올바르고 거룩한 일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둘째, 말씀묵상 침묵기도는 큐티(QT)와 유사하기에 실천이 용이한 동시에 QT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 은혜받은 내용을 적용하는 것에 집중하지만 상대적으로 말씀 가운데 머무름을 덜 강조하는 QT의 아쉬움을 보완해준다. 셋째, 말씀 묵상을 통해 누구나 정화와 조명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사에서는 영적 진보의 길로 정화, 조명, 연합의 세 단계를 실천하고 있는데, 신자들은 말씀묵상 기도를 통해 구체적인 정화와 조명의 은혜를 경험하며 이를 통해 영적인 성숙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정화와 조명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연합하며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연합의 과정까지 나아간다.
예수기도 역시 성서적 근거가 있는데, 누가복음 18:38의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이라는 구절에서 성서적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바울이 강조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순종하는 방법이다. 동방정교회 신학자 칼리스토스 웨어(Kallistos Ware)는 예수기도의 신학적 의미를 네 가지 정도로 설명한다. 첫째, 예수기도는 가장 건강한 기독교적 인간관을 표현하는 기도로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존재라고 고백하는 기도이다. 둘째, 준성례전적인(semi-sacramental) 기도로 성례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 성찬과 세례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이를 통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름을 반복하며 기도할 때 신자는 성례처럼 우리에게 임하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셋째, 특별히 정해놓은 기도 시간은 물론이고 일하는 시간이나 쉬는 시간 등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할 수 있는 기도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실제적으로 실현된다. 넷째, 이 기도는 모든 기도의 일차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머무르게 한다. 신자가 머릿속으로 예수기도문의 단어 하나하나를 생각하고, 마음으로는 죄를 통회하는 슬픔의 느낌에 집중하며 기도할 때 사고와 감성이 하나로 통합된다. 그리고 생각이 성령이 계시는 마음 바닥에 이르러 그곳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 마음에 실현된 하나님의 생명(롬 14:17)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다.
다음으로 기도에 대한 동기부여를 위해 현대인의 관심과 접목된 기도 방법을 고려할 수 있겠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마음의 힐링을 위해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며, 특히 건강하고 복된 노년을 위해 ‘웰빙! 웰다잉!’(Well-Being! Well-Dying!)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자연과 인생(죽음)을 묵상하는 영성훈련은 성서적 근거와 영성사적 근거가 분명한 기도 방법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에 생소한 기도이기에 구체적인 기도 방법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자연묵상 침묵기도의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자. 첫째, 창조물을 묵상하기에 좋은 장소를 정하는데 조용한 공원이나 산책로 또는 옥상도 괜찮다. 실내의 꽃이나 식물도 묵상할 수 있기에 꼭 야외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 묵상할 장소를 정했으면 그곳에서 묵상할 창조물을 하나만 정한다. 나무, 꽃, 풀, 새소리, 벌레, 하늘, 구름, 햇빛, 바람, 기온 등이 있다. 셋째, 그 창조물이 보낸 한 해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창조물은 대개 한 해를 주기로 형태를 반복하기에 한 해의 삶을 묵상하면 좋다. 이를 묵상하며 평소에 깨닫지 못한 삼라만상의 이치를 통해 삶에 대한 지혜를 얻는 것이다. 넷째,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대상을 돌보시는 창조주의 손길을 묵상한다. 그리고 예수가 말씀하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 6:30)라는 구절을 묵상한다.
마지막으로 인생과 죽음을 묵상하는 침묵기도의 실천 방법을 소개한다. 이것은 모세가 쓴 시편 90편을 묵상하며 드리는 기도인데 기본적으로 세 단계로 실천할 수 있다. 첫째, 시편 90:1-11을 읽고 이제까지 살면서 지은 죄악의 목록을 떠올리며 하나님에게 회개하는 기도를 한다. 둘째, 시편 90:13-16을 읽고 삶의 굴곡마다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기도한다. 셋째, 이 시의 결론인 시편 90:17을 읽고 이제까지 뿌린 삶의 씨앗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우리가 죽음을 묵상하며 죽음을 삶의 동반자로 여기고 살 때 우리는 ‘죽음이 없는 죽음’(the death without a death)을 맞이할 수 있다. 죽는데 왜 죽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음(a death)이 없다는 의미는 두려움, 후회, 사별의 고통이 적은 죽음(the death)을 맞이한다는 말이다. 불신자들은 복되고 존엄한 죽음을 소망하여 ‘웰빙! 웰다잉!’에 관심을 갖지만 신자들은 그것을 넘어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죽음을 묵상한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영적 스승 중 하나인 헨리 나우웬은 “죽음에 대한 묵상은 우리 삶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나가며
이제까지 한국교회의 변화를 위한 기도생활을 성찰해보았다. 한국교회가 계발한 통성기도는 성서적 근거가 분명한 기도로 지속해도 좋으나 통성기도 후에 침묵기도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 하지만 경제적 풍요로 인해 인간적 간구 중심인 통성기도에 대한 열정이 식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주목하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러한 목적을 위한 기도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이다. 그래서 필자는 전통적인 관상기도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신자들이 관심 가지는 주제인 친자연적 삶 그리고 복된 삶과 죽음에 관련된 두 가지 기도 방법을 소개하였다. 더 자세한 안내를 원하는 독자들은 필자가 인도하는 ‘열 번의 물러남 기도학교’의 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일제강점기 등 역사의 질곡에서 이 땅의 빛이 되었다. 마음이 힘든 21세기, 예수가 보여주신 기도의 삶을 추구하며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를 소망한다.
주(註)
1 제자원 옮김, 『옥스포드 원어성경대전(109): 요한복음(1-6장)』(제자원, 2000), 450.
2 Wilhelm Michaelis, “”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V, eds.,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1), 343-344.
3 Leon Morri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5), 312.
4 Marva Da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n The Renovare Spiritual Formation Bible, eds., Richard Foster, Dallas Willard, Walter Brueggemann, and Eugene Peterson (New York, NY: HarperCollins Publishers, 2005), 1947.
5 존 놀랜드, 김경진 옮김, 『WBC성경주석시리즈35하-누가복음(18:35-24:53)』(솔로몬, 2005), 520-522.
6 위의 책, 636.
김수천|미국 풀러신학대학원(Ph.D.)을 졸업하였으며 현재 협성대학교 기독교영성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열 번의 물러남 기도학교’의 대표이자 감리교 한국영성형성아카데미 이사이다. 지은 책으로는 『성서에 펼쳐진 영성의 세계』, 『침묵기도-하나님을 만나는 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