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김현주 교수님의 글입니다.
-----------------------------------------------------------------------------------------------------------
본회퍼 사상의 수호자: 에버하르트 베트게
이번 호에서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45)의 신학사상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관계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중 세 번째로 에버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 1909-2000)를 다루고자 한다.
본회퍼 전기 작가
에버하르트 베트게는 가장 공신력 있는 본회퍼 전기를 쓴 작가이다. 베트게가 1967년에 쓴 『디트리히 본회퍼: 전기』(Dietrich Bonhoeffer EineBiographie)는 본회퍼의 생애와 사상,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 활동 등을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고 2014년 우리말로도 번역되었다.1
본회퍼의 주요한 삶의 궤적은 베트게의 전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필자를 비롯하여 본회퍼 학자들이 인용하는 상세한 본회퍼의 생애, 가족 관계, 학업, 해외 활동, 옥중 생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등은 대부분 베트게의 본회퍼 전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본회퍼 학자들이 베트게의 전기를 신뢰하는 이유는 바로 베트게가 본회퍼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친구이자 증언자이기 때문이다. 본회퍼보다 세 살 아래인 베트게와 본회퍼의 관계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우선 그들은 학생과 스승 관계였고, 이후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다. 또한 고백교회의 일원으로서 나치 정권에 항거하던 동지이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베트게는 훗날 본회퍼의 저작물들을 보존하고 그의 신학을 연구한 본회퍼 신학자이기도 하다. 본회퍼가 독일의 플로센뷔르크 수용소(Flossenbürg concentration camp)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이후 베트게는 본회퍼의 모든 글을 보존하고 분류하여 출판하였다. 이를 통해 본회퍼의 저작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베트게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본회퍼의 수많은 저작과 옥중 서신들, 주옥같은 시 모음을 읽어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본회퍼의 옥중 시에 곡을 붙인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라는 찬송은 예배당에 울려 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베트게는 본회퍼 신학이 알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또한 본회퍼는 베트게의 신학 형성과 이후의 삶의 방향을 인도하는 스승이 되었다. 그들은 나치 정권에 함께 저항하였고 본회퍼가 투옥되었을 때는 서신을 통해 고통을 나누고 신학적 사색을 공유하는 친구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다층적 관계성은 그들의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고 서로의 삶을 밀고 당겨주는 인생의 동반자 역할을 했다. 이번 호에서는 이들의 관계를 학생과 스승, 친구이자 동지, 본회퍼 사상의 수호자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학생과 스승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베트게는 1909년 바르샤우(Warchau)라는 지금의 폴란드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브레슬라우(Breslau)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베트게와 본회퍼는 베를린대학교에서 처음 알게 되었으며, 1935년 본회퍼가 나치 정권의 통제를 피해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의 목사 후보생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지하 신학교인 핀켄발데신학교(Finkenwalde Seminary)를 설립하자 베트게는 그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아리안(Aryan) 민족주의를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아리안 혈통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독일 내에 거주하는 아리안 이외의 타민족 공동체의 권리를 박탈하기 시작했다.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토지와 혈통’(soil and blood)이라는 슬로건은 아리안 이외의 혈통,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배제로 이어졌다. 이러한 내용은 ‘아리안 조항’(Aryan Paragraph)이라는 규제로 알려져 있다.2 이 조항은 공무원, 변호사, 의사, 교수, 목사 등 사회의 주요 분야에서 아리안 혈통이 아닌 사람들의 취업을 제한하는 규정을 담고 있었다. 이 인종차별 정책은 사회의 공공 영역뿐 아니라 교회에도 적용되었다. 교회 내에서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은 목사와 같은 직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나치 정권이 기독교 신앙과 인종차별적인 혈통 이데올로기를 결합하려고 시도하자 이에 반대하는 칼 바르트와 일부 신학자들은 1934년 〈바르멘 선언〉(The Barmen Declaration)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선언은 한마디로 교회의 유일한 권위는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임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최종 권위는 하나님과 성서에 있으며 어떠한 인간이나 정치 그룹도 교회의 최종 권위로 인정할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 당시 독일 상황에서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내용이었다. 당시 주류 교회인 독일개신교교회(German Evangelical Church)마저 나치 정권에 협력하자 본회퍼를 비롯한 목사들을 중심으로 고백교회가 설립되었다.
본회퍼가 핀켄발데에 세운 신학교는 1935년 설립되었으나 1937년 독일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 지하 신학교는 본회퍼의 지도하에 비밀리에 신학 훈련을 하였는데 이때의 신학 훈련 내용을 엿볼 수 있는 책이 『신도의 공동생활』(Life Together)이다. 1938년에 출간된 이 책은 본회퍼가 핀켄발데에서 실행한 신학 훈련을 기초로 하고 있다. 신학교 학생들은 예배, 기도, 성서 읽기, 봉사, 고백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연합을 이루는 공동체 훈련을 하였다. 비록 나치 정권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지만 본회퍼의 공동체를 강조하는 신학사상이 투영된 훈련의 장이었다.
본회퍼와 베트게는 이곳에서 생활하며 우정을 쌓았다. 두 사람은 공동체 생활 속에서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 신학적 주제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나치 정권에 대항하는 일련의 활동을 함께하며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후 본회퍼가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이러한 관계는 계속되었다.
친구 그 이상의 친구
본회퍼의 체포 이후 베트게와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1943년 처음 테겔(Tegel) 감옥에 투옥된 후 여러 곳에 이감되었다가 마침내 1945년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처형될 때까지 본회퍼는 수많은 서신을 베트게와 주고받았다. 본회퍼가 베트게를 비롯해 가족, 약혼녀, 친구, 동료 신학자들 등 수많은 지인들과 주고받은 옥중 서신과 신학적 사유의 단상들은 1951년 『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 Briefeund Aufzeichnungen aus der Haft)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이 옥중 서신들에 담긴 신학적 사유에는 본회퍼 후기 신학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는 2년의 수감 기간 동안 투옥 전의 삶을 회고하고, 기독교 신앙의 미래에 대하여 진솔한 소회를 밝히며, 인간의 오만한 모습 이면에 가려진 나약하고 굴종적인 본성에 대하여 통찰하였다. 이 기간에 본회퍼는 베트게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자신의 풍전등화와 같은 삶의 끝을 예측하며 자신의 저작물의 처분에 관해 유언을 하기도 했다.
본회퍼는 1939년 5월 27일 두 번째로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유언장을 작성했는데,3 이 유언장에서 본회퍼는 모든 재산에 대한 처분권을 베트게에게 준다고 적었다. 수감 생활을 시작한 테겔 감옥에서 쓴 유언장에서도 본회퍼는 베트게에게 자신의 저작 등 모든 재산을 일임하였다.4 본회퍼가 베트게를 재산 처분권자로 지정한 것은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친구를 넘어 영적 동반자임을 시사한다. 본회퍼의 소유물 중 가장 중요한 저작물들과 옥중 글들과 서신들은 본회퍼의 신학사상과 그의 삶 전체의 여정이 담겨 있는 응축물이기 때문이다. 본회퍼가 베트게를 지정한 것은 본회퍼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그의 신학 여정과 고뇌, 윤리적 결단의 순간들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 왔기 때문이었다. 이는 동시에 본회퍼 삶을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하는 단계를 넘어서 본회퍼 신학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베트게는 본회퍼가 남긴 방대한 글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베트게가 미처 알지 못한 본회퍼의 신학사상을 반추하고 더 깊이 이해하려 노력하며 본회퍼 사상의 후견인이 되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본회퍼의 신학적 유산과 베트게
2022년 여름, 필자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을 두 번째로 방문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의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다. 역대 왕의 대관식 장소로 왕족을 비롯해 영국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는 거대한 실내 무덤이라는 생각과 함께 한때 세계를 호령한 대영제국의 역사를 집약해서 전시해놓은 느낌이 들었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 보면 역사책에서 들어봄 직한 왕족들의 무덤과 저명한 사람들의 이름이 벽면과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대부분 영국의 철학자, 종교인, 과학자, 소설가 등 각 분야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진화론으로 널리 알려진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82)의 이름도 보이고, 『폭풍의 언덕』을 쓴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1818-48)의 이름도 발견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현대과학의 거장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2018)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 영국인이 아닌 다른 나라 유명인들의 이름이나 조상(彫像)이 있다는 점이 처음에는 의아했다. 독일의 베토벤이나 바흐,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도 시인의 영역(Poet’s corner)에서 추모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서쪽 바깥벽에는 20세기의 순교자를 기리는 조각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인권과 정의를 위해 투쟁하다 암살된 엘살바도르의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1917-80),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1929-68) 그리고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의 조각상 등 20세기에 세상을 떠난 열 명의 순교자 상이 설치되어 있다.5 아마도 영국인들은 이 사원을 영국의 역사와 더불어 전 세계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인물들을 위한 추모 공간으로 조성하여 영국이 세계의 중심이었음을 모두에게 알리고자 한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필자가 처음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서문 위쪽 벽에 올려져 있는 본회퍼 조각상의 존재에 대하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가,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에는 잊지 않고 그의 조각상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영국의 런던 사원에 있는 본회퍼 조각상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런던’이라는 특정 지역과 아무 관련이 없더라도 나치에 대한 본회퍼의 저항 정신과 이것이 전 세계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본회퍼의 조각상이 그곳에 설치된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사실 본회퍼는 1933년부터 1935년 사이에 런던에 머물며 독일인 교회를 섬겼다. 그리고 『런던』(London)은 본회퍼 전집 중 열세 번째 책의 제목이다. 그래서인지 런던에 있는 본회퍼의 조각상은 그리 동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순교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던 사람들이다. 본회퍼는 39년 10개월이라는 삶을 살았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한다면 그 이후의 시간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얼마나 될지 모르는 남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본회퍼가 1943년 4월 5일 베를린의 테겔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하여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질 때까지 2년의 투옥 기간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그 기간 본회퍼는 한편으로는 베트게에게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불행한 미래 이후를 부탁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자로서 지금까지 이해한 것을 정리하며 미래를 위한 신학적 구상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베트게는 1944년 6월 26일 본회퍼에게 편지를 보내 옥중 원고 중 일부에 대한 공개 여부를 물었다.(『저항과 복종』, 서신 168) 당시 베트게는 본회퍼의 서신들을 비밀리에 안전하게 보관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일부는 베트게 자신의 안전을 위해 폐기하기도 하였다.6 그가 보존한 옥중 서신들을 모아 본회퍼 사후인 1951년에 출판한 『저항과 복종』은 본회퍼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본회퍼 전집의 주석자이자 제1세대 본회퍼 학자인 일제 퇴트(Ilse Töet)가 설명한 것처럼 『저항과 복종』에 대한 관심은 이후 다른 저작들이 빠르게 출판되는 환경을 제공했다.7 본회퍼의 저작을 보존하고 이것이 세상에 빛을 보도록 절대적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베트게이다. 베트게에 대한 본회퍼의 절대적 신뢰와 베트게의 충실한 헌신이 없었다면 『저항과 복종』의 많은 글들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본회퍼의 옥중 서신은 본회퍼 신학의 가장 특징적인 면을 많이 담고 있는 글들이다. 단 2년의 기간이었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신학적 사유에 집중하였고 다가올지 모를 죽음이라는 개인적 종말을 염두에 두면서 세속적인 야심이나 욕망이 차단된 상태에서 훗날 자신의 신학이 가진 전형적인 특징(hallmark)으로 논구되는 후기 신학사상을 채워 나갔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인해 본회퍼는 자신의 신학적 사유를 충분히 더 발전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본회퍼 후기 신학에 담긴 “아래로부터의 관점”(the perspective from the below), “비종교적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 “성인이 된 세계”(the world come of age)와 같은 신학적 사유들은 근대 이후의 세계와 그 너머 종말론적 기독교의 미래를 암시하는 통찰이 담겨 있다.
본회퍼 신학사상의 수호자
본회퍼의 죽음 이후 베트게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본회퍼 전기를 통해 소상히 밝히고 있다. 베트게라는 충실한 증언자이자 청지기로 인해 본회퍼의 신학사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인의 자산이 되었다.
본회퍼는 1944년 8월 28일 편지에서 베트게의 생일을 축하하며 〈친구〉(Der Freund)라는 시를 전했다. 이 시에서 본회퍼는 친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맑고 시원한 시냇물과 같이,
거기서 정신이 하루의 먼지를 씻어내고,
거기서 정신은 작열하는 더위를 식히며
피곤의 시간에 훈련한다.
위험과 혼란 이후에
정신이 돌아가고
피난처와 위로와 격려를 발견하는
성채와 같은 것,
친구란 친구에게 이런 것이다.-『저항과 복종』, 서신 196, 시 〈친구〉중에서8
본회퍼는 성채(城砦)와 같은 존재 베트게에게 자신의 죽음 이후를 맡겼고, 이러한 신뢰 속에서 베트게는 신학적 사상의 충실한 안내자 역할까지 했다. 본회퍼로 인해 베트게의 나머지 삶의 방향은 정해졌다. 베트게는 본회퍼가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그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었고 그가 죽은 이후에도 본회퍼 사상의 수호자로 안전한 성채가 되어주었다. 루터가 작사·작곡한 곡으로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우리의 하나님은 강한 성)라는 찬송시처럼 루터파에 속한 두 목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예수가 되어준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본회퍼 사상의 조력자들에 대한 전반부 연재를 마무리하고, 이어지는 글에서는 본회퍼 신학사상의 주요 이슈를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미친 운전자’라는 표현으로 유명한 본회퍼의 신학사상과 이에 얽힌 이야기를 21세기 사회적·정치적 맥락에서 살펴보겠다.
주(註)
1 『디트리히 본회퍼: 신학자, 그리스도인, 동시대인』(복 있는 사람, 2014)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2 다음 웹페이지를 참조할 수 있다.(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aryan-1)
3 Dietrich Bonhoeffer, DBW15 Illegale Theologenausbildung, Sammelvikariate 1937-1940, hg. von Dirk Schulz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haus, 1998), 175.
4 Dietrich Bonhoeffer, DBW8 Widerstand und Ergebung, hg. von C. Gremmels, E. Bethge, R. Bethge in Zusammenarbeit mit Ilse Tödt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haus, 1998), 163-164, 163의 각주 1.
5 웨스트민스터 사원 홈페이지에서 관련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www.westminster-abbey.org/ko/history/explore-our-history/modern-martyrs)
6 에버하르트 베트게 외, “편집자 서문,” 본회퍼, 손규태·정지련 옮김, 『저항과 복종』(대한기독교서회, 2014), 22.
7 Christiane Tietz (Hg.), Bonhoeffer Handbuch (Tübingen: Mohr Siebeck, 2021), 2. 김성호, “독일어권의 디트리히 본회퍼 연구사 및 새로운 연구과제들,” 「기독교사회윤리」 제57집 (2023): 133에서 재인용.
8 본회퍼, 손규태·정지련 옮김, 『저항과 복종』(대한기독교서회, 2014), 748.
김현주|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학위(Th.M.)를 받았으며, 스코틀랜드 애버딘대학교에서 본회퍼의 죄론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 초빙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Bearing Sin as Church Community: Bonhoeffer’s Hamartiology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