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오타와대학교 박정위 강사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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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죄와 교회의 사과: 북미 원주민 기숙학교
우리에게 알려진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는 유럽 이주민이 신대륙을 개척한 이야기이지만, 보다 공정하게 보자면 그것은 유럽에서 건너온 새로운 정착민들이 토착 원주민들을 침략하고 수탈한 식민지화의 역사일 것이다. 그 침탈이 얼마나 철저하고 조직적이었는지는 대륙의 주인으로 호령했을 수백의 원주민 나라, 수백수천만의 원주민 형제자매들이 지금은 캐나다 인구의 5%에 불과한 소수집단이 돼버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신생 연방국가 캐나다가 수립되어, 19세기 말 유럽인의 이주가 본격화된 이후 150여 년 동안 수천 년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이들이 귀퉁이로 밀려나서 사회 주변부의 가장 열악한 층을 이루고 살게 된 것이다.
문화적 인종학살(genocide)이라고 불릴 만큼 집요하게 유럽정착 정부에 의한 원주민 동화정책이 시행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것은 4세부터 16세까지의 원주민 아동을 대상으로 한 기숙학교 제도였다. 이 제도는 원주민들을 문명인으로 재사회화시키겠다는 미명하에 19세기 말에 시작하여 오래도록 존속했다.(마지막 학교가 문을 닫은 것이 1998년이다.)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1930년대에는 캐나다 전역에 80여 개의 기숙학교가 운영되었고, 원주민 아동의 거의 절반이 강제로 참여했다. 개개인 학생들에게 번호가 할당되고 번호가 찍힌 옷을 입고 물건을 배급받고 이를 어기면 가차 없는 처벌이 뒤따랐다. 학교라기보다는 강제수용소에 가까웠다.
원주민 아동들이 문명화되도록 새로운 문화만 접할 수 있는 환경에 그들을 밀어넣겠다는 것이 기숙학교의 이론적 배경이자 실천전략이었다. 원주민 기숙학교 프로그램의 핵심은 아동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기보다는 그들을 부모로부터 격리시키는 데 있었다. 19세기 말이라는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발언이 의회의 논의과정에서, 그것도 캐나다의 초대 수상 맥도널드(John A. Macdonald)의 입에서 나왔다. 이는 당시 원주민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편견과 그에 근거한 기숙학교의 설립 의도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보호구역에 있을 때 원주민 아동은 야만인 부모와 함께 산다. 즉 야만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습관과 사고방식은 여전히 인디안일 것이다. 읽고 쓸 줄 아는 야만인일 뿐이다. 원주민 아동을 부모의 영향력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려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정부가 관리하는 산업 훈련학교에 보내는 것이라는 점을 정부의 수장으로서 강하게 믿게 되었다. 그 학교에서 아동들은 백인의 습관과 사고방식을 습득할 것이다.1
하지만 현실적인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가족으로부터 떨어진 원주민 아동들은 아무런 보호망 없이 기숙학교의 무자격자들에게 훈육을 받도록 방임되었다. 그 과정에서 실업교육을 구실삼아 노동착취가 공공연하게 벌어졌고, 아이들에 대한 신체적·심리적 학대, 심지어 성적 학대마저 엄청나게 자행되었다.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알려지는데 정확한 수를 다 밝혀낼 수도 없다. 아무런 기록도, 표식도 없이 아이들의 시신이 암매장되었기 때문이다. 졸업 때까지 기숙학교 아동들의 사망률이 50%에 이르렀다고 한다. 비좁은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데다가 위생 상태가 열악하다 보니 천연두, 결핵 등의 질병에 의한 사망이 가장 높았다. 학교 스태프의 가혹행위에 의한 살상이 다수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기숙학교의 원주민 아동들의 높은 사망률 역시 원주민 동화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생명 보호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비인도적인 식민정책의 결과이자 한 부분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2
정부가 돈을 대고 교회가 돌리는(government-financed and church-run) 시스템
가장 놀랍고 부끄러운 일은, 식민주의적이고 비인도적이며 문화적 제노사이드라 할 수 있는 정부의 기숙학교 정책에 교회가 주도적인 운영 주체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식민주의자들이 추구하던 ‘원주민 문명화’에는 ‘그리스도인화’라는 개종의 의미도 포함돼 있던 것이다. 가톨릭, 성공회, 장로교, 감리교 등이 처음부터 참여했고, 1925년 설립된 연합교회는 이후 장로교 다수와 감리교가 운영하던 기숙학교를 이어받았다.
교육과 함께 전도가 목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교회들의 참여를 복음전파의 순진한 열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근간으로 한 기숙학교 프로젝트에서 발생하는 이권을 좇아서 교단의 재원을 증식시키겠다는 욕망, 정부 지원을 실천하는 기관이라는 위세를 얻고자 하는 세상적 욕심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기숙학교에 대한 더 많은 정부 지원을 획득하기 위해 교단 간에 경쟁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이 관장하는 기숙학교가 아동에게 미치는 폐해가 크다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졌지만, 참여하는 교회들은 수십 년 동안 정부의 지원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어떤 획기적인 개혁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멈출 수 없을 만큼 정부 지원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선량한 의도가 있었지만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생겼다든가, 동기는 좋았지만 잘못에 맞설 만큼 지혜롭거나 용감하지 못했다는 주장들3은 사실상 설득력이 없다. 자신들의 과오를 회피하고 축소하면서 시대를 원망하는 책임 없는 핑계일 뿐이다. 기숙학교 생존자들-그들은 정말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어서 ‘survivor’, 즉 생존자라 불린다-의 일관된 증언에 따르면, 학교에서는 아동들에게 자신들의 부모, 가족과 문화를 미워하도록 교육하였다. 그리고 원주민 언어를 사용한 동급생을 밀고하면 상을 주는 등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했다. 또한 처벌과 교정이라는 이름 아래 폭력이 만연했다. 아동들의 질병, 학대, 살상에 학교의 스태프들은 깊게 연루되어 있었고, 이들 다수는 목사, 신부, 수녀 등 성직자들이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와 같은 증오의 교육과 폭력적인 훈육을 할 수 있을까? 교회가 참여한 기숙학교에서 어떤 선한 동기도 찾아보기 힘들다.
보다 근원적으로 살펴보자면, 교회와 식민주의는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결탁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15세기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침탈을 합리화하는 일련의 교황 교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면, 아프리카나 신대륙의 거주민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식민주의 열강들이 그 땅을 탈취하고 그곳 사람들을 정복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최초의 교서는 명백하게 15세기 신대륙 발견에 맞추어 교회가 당시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주의를 지지하며 권위를 주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 교서들이 기초가 되어 19세기에는 ‘발견의 원칙’(the Doctrine of Discovery)이라는 법적 개념이 자리잡게 된다. 즉 원주민은 땅의 소유권을 갖지 못하고, 그 땅을 ‘발견’함이 영토 박탈의 법적·도덕적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지난해가 되어서야 바티칸은 이 원칙을 공식적으로 불인하게 되었다.4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보면 식민주의 권력과 기독교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주민 식민화의 공동 입안자이자 협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 원주민 기숙학교 역시 그와 같은 식민주의적 출발이 초래한 결과이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 기숙학교에 관여하게 된 사실은 그렇게 놀랍지 않다.
기숙학교가 남긴 질긴 유산
캐나다 내의 성인인구 중 원주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5% 정도인데 수감자의 비율로 보면 전체의 30%, 여성만 보았을 때는 절반이나 된다. 원주민 25%가 중독 문제로 고통받고 있고, 청소년들의 자살률은 비원주민에 비하여 6배 이상이나 높다. 이렇게 일관되게 한 집단의 위험지표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을 그 집단의 내재적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대단히 불공정하고 부정확한 태도이다. 도리어 이러한 통계는 그 특정 인구집단이 고유하게 뿌리 깊은 취약성에 노출되어 있으며 오랜 역사적 기원을 지닌 구조적인 차별이 존재했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 캐나다 정부도 원주민 인구가 형사사법체계 내에서 과대표되는 현상을 크게 네 가지 요인과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영토를 탈취당한 역사, 문화적 소외, 조직적 차별, 사회경제적 주변성이다.5
구체적으로 원주민 기숙학교가 남긴 결과를 따져본다면 가장 심각한 것으로 원주민들의 고유 문화, 언어, 가족관계와 가족개념의 상실을 들 수 있다. 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듯이 기숙학교의 직간접 경험은 제도교육, 정부 정책, 캐나다 사회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 점은 다시금 원주민들의 온갖 삶의 조건을 취약하게 만드는 악순환으로 작용했다.
아래의 그래프는 기숙학교 생존자들이 스스로 밝히고 있는, 기숙학교가 자신들에게 미친 악영향이다. 80%가 넘는 생존자들이 가족으로부터의 격리를 악영향으로 지적했다. 문화, 언어, 종교, 영성의 상실도 높은 비율로 인식되고, 기숙학교 내에서 경험한 학대와 열악한 생활과 교육여건도 자신들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했다. 성적 학대에 대한 지적도 30%를 넘는다.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추출할 수는 없지만 개인의 건강과 관련된 많은 문제도 기숙학교 경험과 상관이 있음이 여러 경험적인 분석을 통해서 드러났다. 아래의 그래프는 다양한 종류의 만성질환 유병률을 보여준다. 나타난 수치들, 예컨대 기숙학교 생존자의 30%에 이르는 사람이 관절염을 앓고 있다는 말은 그 원인이 전부 기숙학교 경험 때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연령이나 생활 습관, 주거환경 등 다른 요인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프가 보여주는 핵심은 기숙학교 생존자는 기숙학교를 다니지 않은 다른 원주민들과 비교했을 때 거의 두 배나 높은 관절염 유병률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차이는 그래프가 보여주는 모든 질병에 대하여 유사한 패턴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숙학교의 경험과 트라우마가 이후의 건강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증명한다.
기숙학교의 경험이 생존자들의 건강에만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생존자 자손들의 건강과 행복에까지 세대를 초월하여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도 여럿 발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오타와 지역에 거주하는 18세 이상 성인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연구6에서 부모 중 한 사람 이상이 기숙학교 생존자인 경우, 성인 자녀들의 우울증 발생 가능성이 기숙학교 생존자를 부모로 두지 않은 사람들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하여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녀에게 나타나는 현상과 비슷하다. 기숙학교로 인한 가족과의 분리 때문에 부모의 문화전승 과정이 와해된 측면이 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녀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을 제공하는 양육의 기술과 지식이 결핍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기숙학교 생존자의 자녀들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 성인기의 트라우마, 차별의 인식이라는 스트레스를 겪었을 때 그 스트레스가 우울 증상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음을 밝혀냈다.
진실과 화해로 가는 길
캐나다교회가 온갖 인간적 해악을 끼치는 원주민 기숙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일견 놀라울 뿐 아니라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 일에 관여한 교단들의 과오에 대한 은폐가 그만큼 철처했기 때문이 아닐까?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교단 당국이나 당사자들은 부정적인 사실을 적극적으로 은폐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역사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거나 알면서도 침묵했다. 한편 원주민 피해자들의 문제제기와 대책 요구는 철저히 무시되어 왔다. 대다수의 기숙학교 생존자들이 트라우마 때문에 과거의 피해에 관해 언급하는 것 자체에 대해 강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진실은 감춰지고 사죄를 하고 화해를 도모하는 모든 시간표들은 한없이 늦춰졌다.
1981년 원주민 활동가이자 연합교회 여신도인 알버타 빌리(Alberta Billy)는 원주민 교회 대표로 연합교회 임원총회(Executive General Council)에 참석했다. 당시 원주민 대표들이 그 자리에 온 것을 의아해하는 백인 교회대표들의 분위기도 느껴졌다고 한다. 그 회의석상에서 빌리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말, 연합교회가 기숙학교의 과오를 캐나다 원주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용감하고도 돌발적인 발언을 했다. 모두들 화들짝 놀라면서도 아무 반응을 내어놓지 못했다. 이후 연합교회는 빌리가 제기한 사죄의 안건을 전 교단적으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수많은 토론과 성찰의 과정을 거친 끝에 다섯 해가 지난 1984년에서야 원주민들에 대한 연합교회의 사과가 나왔다.
캐나다교회 최초라는 의미와 상징성이 있었지만, 사과의 내용은 상당히 두루뭉술했다. 사죄의 주체로서 ‘캐나다연합교회’라는 타이틀이 언급되지도 않았고, 일반적인 식민주의에 대한 사과는 있었지만 ‘기숙학교’라는 단어는 등장하지도 않았다. 이 사과에 대하여 원주민 대표들은 인정은 하면서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대신 양측은 그 만남의 자리(온타리오주 서드배리시의 로렌션대학교 캠퍼스)에 완성되지 않은 돌무더기를 세워놓았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과는 회개이고 변화된 삶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연합교회의 사죄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양측이 함께 지켜보자는 뜻을 담은 언약 표시였다.
부족했지만 연합교회의 사과 이후, 캐나다에서 기숙학교 운영을 가장 많이 담당했던 가톨릭의 오블라티선교수도회(Missionary Oblates of Mary Immaculate)의 공식 사과(1991)가 있었다. 이어 성공회(1993), 장로교(1994) 등의 사과가 이어졌고, 1998년에 연합교회는 처음보다 훨씬 구체적인 두 번째 사과문을 발표했다.7
교회의 사과와 맞물려서 기숙학교 생존자들은 정부를 대상으로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2007년 정부와의 배상 협의가 종결되었고, 이듬해에 캐나다 수상 스티븐 하퍼는 처음으로 정부를 대표해서 기숙학교 생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집단소송을 통한 합의는 생존자들에게는 배상금을 받는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진실과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구성해서 캐나다 사회가 기숙학교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기회도 부여받은 것이었다. 진실과화해위원회는 가해자 측의 비협조와 초창기에 위원장이 몇 차례 교체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원주민 출신 판사 머리 싱클레어(Murray Sinclair) 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6년간의 조사활동을 성실히 마쳤으며, 2015년에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방대한 분량의 최종보고서(요약문만 500쪽, 실천 권고사항 92개)를 발표했다. 진실과화해위원회의 요구 중에는 바티칸의 교황이 캐나다에 와서 직접 사과하라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가장 많은 기숙학교를 운영했던 가톨릭의 책임 있는 반응을 요청한 것이었는데, 이전에 있었던 베네딕트 교황의 유감 표명이나 주교나 운영 수도회 차원의 사과로는 불충분함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원주민 기숙학교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두고 최근 수십 년간 늦은 걸음이지만 진일보한 변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교회의 일련의 사죄가 부분적으로나마 이와 같은 변화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정부의 책임과 배상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는 생존자들과 교회가 협력한 점도 기억할 만하다.8
진정한 사과를 위해서는
종교학자 제러미 버겐(Jeremy Bergen)은 교회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사죄와 사과에 대해 중점적으로 연구해왔다.9 그에 따르면 ‘공식 사과’ 역시 일종의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에 화자가 주도권을 갖고 내용의 주제, 부제를 정하고 무엇을 넣고 뺄지를 통제한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도움까지 받아서 자기들의 사과가 어떻게 해석될지 예상하고 거기에 맞춰서 프레임까지 만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화자(사과하는 사람)가 전체 이야기를 통제할 많은 기제를 갖고 있다. 그런데 버겐은 사과하는 사람이 그 통제의 기제들을 포기할 때 사과의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계산에 근거한 기제들을 포기하는 것이 사과의 진정성을 제고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원주민 기숙학교 생존자들에게 전한 사과는 진정한 것이었을까? 어떤 부분이 통제적 기제들이고, 어떤 부분은 진정한 사과였을까? 진정한 사과가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요소를 생각해보자.
첫째, 사죄의 내용을 밝힐 때 추상적인 태도를 버리고 디테일을 자세히 말하는 것이다. 역사와 현재에서 악행을 저지른 일,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한 일들을 상세히 언급할 때 사과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이는 사과자 자신과 그가 속한 조직의 과오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이며 진정한 사죄를 할 기본적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1986년 연합교회의 첫 번째 사과가 지나치게 일반적이었던 것을 제외하면, 모든 교회들의 사과는 대체로 내용이 자세하다. 안 하려고 버티다가 마지못해 한마디 하고 넘어가는 면피용 제스처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스스로 부끄러운 사항들을 구체적으로 일일이 들고 있다. 공식 사과를 한 모든 교회들은 자신들이 관여한 기숙학교에서 육체적·심리적·성적 학대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또 제국주의, 식민주의, 우월 콤플렉스, 동화정책 등의 용어를 직접 써가면서 자신들이 원주민들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한 악한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참여한 점을 그대로 밝혔다. 또한 원주민 기숙학교 제도가 오늘날 원주민들이 겪는 실업, 중독, 자살, 폭력 등의 원인임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 같은 악이 다시는 결코(never again)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둘째, 과오를 자세하게 밝히는 것은 중요하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내용을 사과문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 한마디로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불필요한 언급은 자칫 사과자의 동기나 이해에 의문을 갖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과 내용 중에 뜬금없이 정말 헌신적인 좋은 기숙학교도 있었다고 언급하는 것이다. 장로교의 고백문에도 그런 구절이 나오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과에도 “기독교적 자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아이들에 대한 헌신과 보살핌의 뛰어난 사례가 많이 있었지만”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좋은 예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나빴다는 식의 표현은 실망스러운 사과이다. 선한 예외 몇 가지로 원주민에게 저지른 해악이 경감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식민주의 정책으로 출발한 프로그램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또 1998년 연합교회의 두 번째 사과문 중에는 당시 교회 내의 사죄 반대 의견을 염두에 둔 문구가 있다. 역사적 과오에 대해 사과할 때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기는 하다. 즉 왜 내가 하지도 않은 선대의 잘못을 지금 우리가 비난받고 사죄하여야 하느냐는 것이다. 연합교회의 사과문에는 “우리는 선대로부터 많은 축복을 물려받은 수혜자인 만큼, 그들의 짐 또한 짊어져야 한다.”라고 사죄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치에 맞는 말이지만 사과의 내용에 포함되어야 할까? 사과로 인한 내부 불만을 염려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고, 직접적인 책임이 없음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셋째, 가장 중요한 대목인데, 사과의 주체가 자신들이 행한 과오의 원인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하는가의 문제이다. 역사적 사죄의 경우에는 그 뿌리가 되는 원인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거의 모든 교회들의 사과문이 식민주의의 문제점, 교회가 식민주의 통치에 참여하고 기여한 점 등을 말하지만 다분히 추상적이다. 왜 식민주의에 동조하는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혼돈이 있었다”(연합교회의 1986년 사과) 식의 표현이 있다. 서구의 방식과 문화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혼돈’하여 자신들의 문명을 복음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순진한 착각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는 뉘앙스를 준다. 교회가 전적으로 식민주의와 협력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책임 있는 사과의 의도는 잘 읽히지 않는다. 교황의 사과에도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식민주의 정서를 지지했다.”라거나 “교회와 종교공동체의 다수 구성원들이 협조했다.”라는 등 가톨릭교회의 전적인 책임을 표현하기보다는 잘못은 정부가 했고 거기에 교회의 개별 멤버들의 동조와 참여가 문제였던 것 같이 기술하고 있다. 상당히 아쉬운 유체이탈적 태도이다.
앞서 언급했듯 2015년 진실과화해위원회 보고서에서는 교황이 직접 방문하여 사과할 것을 요구했는데, 많은 시간이 흐른 2022년에서야 그것이 이루어졌다.10 그의 사과를 오랫동안 기대한 원주민들에게는 교황의 사과 방문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이었고, 객관적으로도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사과문의 내용은 많이 제한적이었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보다 몇 달 앞서 캐나다를 찾아와 사죄한 성공회(영국국교회)의 수장 저스틴 웰비(Justin Welby) 캔터베리 대주교의 사과는 근본 원인에 대한 통찰을 훨씬 명료하게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겠다는 열정이랍시고 이해하거나 경청하려는 노력 대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데려왔다’는 오만한 가정을 했던 것, 그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를 범했음을 사죄합니다. 이미 이곳에 계셨던 하나님이 더 화를 내실지, 그 하나님을 벌써 알고 있던 여러분이 더 화를 낼지조차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비슷하게 캐나다장로교회는 자신들의 잘못된 가정을 고백하며 속죄했다. 자기들의 우월성을 제멋대로 설정해놓고 원주민들이 “우리와 같아진다면(우리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일한다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복받을 것”이라고 단정했음을 사과하고 자신들의 복음 이해도 결국에는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졌다는 점은 보지 못한 채 원주민에게 자기들의 방식을 강요함으로써 복음과 예수의 사랑을 왜곡시켰다고 회개하고 있다. 이런 사과의 내용은 과오에 대한 단순한 반성을 넘어 신학적 성찰이 느껴진다. 교회의 사죄에서 꼭 필요한 부분 아닐까.
넷째, 사죄는 끝이 아니고 시작이며 앞으로의 변화를 지켜봐야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공수표 날리듯 책임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것은 진정한 사과와는 정반대되는 행동일 것이다. 이는 사과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처한 위치를 만회하려거나 의도적으로 사과의 의미를 확대 선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측면에서 볼 때 성공회의 사과에는 인상적인 측면이 있다. 1993년에 성공회에서 내놓은 사과는 자신들이 반성하고 일방적으로 미안하다고 발표한 것이 아니라 원주민들과 워킹그룹을 만들어 거의 2년간 대화한 후에 나온 결과였다. 캐나다성공회를 대표하는 주교가 그 그룹을 통해서 원주민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이제 교회가 사죄할 준비가 되었냐고. 성공회는 섣부른 사과를 하기보다는 스스로 충분히 역사의 과오를 이해하고 진정한 사과를 할 수 있는 준비에 집중했고 “이제 내가 사죄할 준비가 된 걸까요?”라는 물음을 사과를 받을 사람들에게 한 것이다. 웰비 대주교 역시 사죄마저 자랑의 재료로 삼으려는 태도를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이 사죄를 들어주려는 시도를 해준다는 것, 회복과 화해의 긴 여정에 우리를 끼워준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고, 그로 인해 더할 수 없는 겸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결론
모든 역사적 사죄는 언제나 늦고 부족하다. ‘이런 사과를 들으려고 그토록 오랜 세월을 기다렸을까’라는 감정을 원주민 기숙학교의 고통을 겪은 생존자들은 느꼈을 것 같다. 이 글에서 나눈 캐나다교회의 사과 역시 부끄러운 수준이다. 부족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표현의 문제도 있겠지만 어떤 사과문으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교회가 지은 역사의 죄가 너무나 커 보이기 때문이다. 교회들의 사과는 모범도 아니고 어떤 전형이 될 수도 없다.
그래도 한 가지 남는 사실은 캐나다교회들이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최소한의 성실성이 인정될 만한 사죄의 시작을 이루었다. 사과가 만들어지고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 보았어도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이 세상으로 더 많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믿는다.
최근 수십 년간의 시간이 캐나다 사회에서는 원주민 기숙학교의 역사에 관한 성숙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같은 과제를 안고 있을 미국 사회에서는 아직 덜 이루어진 진보라고 생각한다. 한편 모든 시민에게 화해와 정의의 실천이 책임으로 나누어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몇 주 전 벤쿠버를 방문하던 중, 주일을 맞아서 캐나다연합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의 첫 부분에 목사님이 ‘원주민 영토인정’(Land Acknowledgment) 선언을 했다. 영토인정 선언은 우리가 살아가고 일하고 있는 이 땅은 ○○○ 원주민 부족/국가의 전통적 영토임을 인정하고 원주민들과 그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을 천명하는 행위이다. 한 사람이 문장을 읽거나 말하듯이 할 수도 있고, 부르는 사람과 응답하는 청중이 서로 대화하듯 할 수도 있다. 또한 원주민의 색상(검은색, 빨간색, 흰색, 노란색)을 모티브로 현수막이나 촛불 등화를 통해 시각적으로 할 수도 있다. 연합교회는 2015년부터 예배 시간에 영토인정 선언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은 다른 교회의 참여도 늘어나고 있고, 다른 여러 공식 행사에서도 순서로 자리 잡고 있다. 학교 수업에서는 보통 매 학기 첫 시간에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화해의 행동이자 기억의 의식이다. 수백 년 전 식민주의를 편들던 ‘발견의 원칙’을 뒤엎는 반성일 것이다. 이렇게 작은 것이지만 그래도 변화는 있다.
교회에 놓인 원주민의 상징색 장식을 보면서 무지개의 호(弧, arc)를 연상했다. 킹 목사의 말대로, “도덕적 세계의 호는 길지만, 그것은 정의를 향해서 굽어 있다.”(The arc of the moral universe is long, but it bends toward justice.)
주(註)
1 John Macdonald, “House of Commons Debates.”
2 정부 기록 공문서에 1910년 인디언부 차관 스코트(Duncan Campbell Scott)의 관련 언급이 남아 있다. “기숙학교 내에서의 거주공간의 밀접성으로 인해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상실되고 학교 밖 거주지에 비하여 훨씬 높은 사망률을 보이는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본 부서의 정책, 인디언 문제의 최종 해결을 향한 정책기조(동화)에 변화를 주는 것은 합리화될 수 없다.” “Superintendent D. C. Scott to Indian Agent General Major D. McKay,” Library and Archives of Canada, Department of Indian Affairs, 10 April 1910.
3 David Kim-Cragg, “How the United Church got into the business of residential schools,” Broadview (2022. 9).
4 2023년 3월 30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거듭된 원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발견의 원칙’과 그것의 근간이 된 교황 교서들이 원주민들의 인간 존엄과 인권을 보장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그 문서들을 공식적으로 부인(repudiate)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 결과를 취소(rescind)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원주민에 대한 가톨릭 공식 사과의 확대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다음 자료를 참고하라. “THE FUTURE IN CONTEXT: What the Repudiation of the Doctrine of Discovery Means for Indian Country,” Governing, April 9, 2023.
5 Scott Clark, “Overrepresentation of Indigenous People in the Canadian Criminal Justice System: Causes and Responses,” Research and Statistics Division, Department of Justice, Canada (2019).
6 Amy Bombay, Kimberly Matheson, Hymie Anisman, “The impact of stressors on second generation Indian residential school survivors,” Transcultural Psychiatry 48/4 (2011. 9): 367-391.
7 각 교단의 사과문은 웹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https://caid.ca/church_apology.html)
8 Donna Sinclair, “A question of repentance,” The Observer (1997. 10).
9 Jeremy M. Bergen, Ecclesial Repentance The Churches Confront Their Sinful Pasts (New York: T&T Clark International, 2011).
10 교황의 방문은 2021년 5월 이후 이전의 기숙학교였던 몇 장소에서 연이어 어린아이들의 유해가 발견된 일과 관련이 있다. 말로만 전해지던 원주민 기숙학교 아동들의 사망과 암매장이 확인된 것이었다. 캐나다 사회 전체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고, 대부분의 도시들은 계획했던 7월 1일 캐나다데이 연례축제를 취소하고 애도의 모임을 가졌다. 이로 인해 원주민 기숙학교에 참여했던 교회에 대한 비판이 다시 거세게 일었고 몇몇 교회 건물에 붉은 페인트를 끼얹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런 분위기가 전해지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도 방문과 사죄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위|미국 브라운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인구학을 공부했다. 현재 캐나다 연방정부 통계청에서 사회통계분석관으로 건강, 이민, 노동, 종교 분야의 주제를 연구하고 있으며, 오타와대학교 사회학과 외래강사로 사회통계, 건강사회학, 소수집단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공저)로 『신데카메론』,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