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9월 251991년 9월 25일 홀연히 세상을 등진 마일즈 데이비스, 어둠의 제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가 지나온 고집스런 음악 항로는 재즈 역사 그 자체로 평가받고 있다. 단 한번도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다음을 향해 돌진해나가는 그의 모습은 단순한 연주자라기보다는 범인을 비웃는 건방진 선지자의 모습이었다. 모던 재즈의 향방을 결정해 놓은 마일즈 데이비스, 그가 걸러온 길을 더듬어본다.
데이비스는 일종의 문화적 상징
주로 중역대의 음을 소재로 한 간결한 솔로, 정교하고 구축적인 악상, 음량과 스피드에 선행하는 음색과 텍스처, 그 이전 메인 스트림의 기본 원칙과는 상당 부분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은 언제나 그럴 듯하게 형태를 유지해나갔다. 확실히 마일즈가 이루어낸 재즈 스타일은 다른 스타일과 명확히 구분되는 독특한 것이었다. 그는 50여년에 걸친 활동 기간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대부분의 음악적 주면 환경을 변화시켜 버렸다. 물론 쿨, 선법 즉흥 연주, 재즈락, 평크로의 끊임없는 변신에 대해서 수많은 비방자가 있었지만 한 시기가 지나면 대부분 자신의 과거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데이비스는 단 한차례도 자기 자신 이외의 외적 요소에 의해 굴복해 본적이 없었다.
데이비스는 그 옛날 듀크 엘링턴, 존 콜트레인, 루이 암스트롱 등과 마찬가지로 자기 고유의 장르를 초월해버림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켜왔다. 70년대와 80년대를 통해 그는 프린스, 신디 로퍼, 마이클 잭슨 등과 연주함으로써 팝계의 인물로 떠 오름과 동시에 팝 전문지인 <롤링스톤>지에 패셔너블한 자태를 드러냈고 유명한 팝 공연장인 필 모어이스트에서 연주하면서 <마이아미 바이스>라는 유명한 TV 드라마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행동 덕택에 그는 전통을 중요시하는 문화 순수주의자들로부터 무시와 조홍을 받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인종적인 관점에서 찬양해왔던 인물들조차 그를 꼬집어대기 시작했다.
한편 마일즈는 자신의 반항적인 이미지를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자주 자기 자신을 과장시켰으며 주군가의 질문에 엉터리 답변을 함으로써 논쟁을 촉발시키곤 했다. 그러나 모둔 부정적인 이미지나 견해에도 북구하고 데이비스의 경력을 살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밴드 리더로서, 그리고 연주가로서의 그의 위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이 재즈의 거장은 50년대와 60년대 발표한 자신의 작품을 통해 결과적으로 놀라운 음악적 성과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음악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의 상징이 되어버린 데이비스는 80년대에 들어서서는 음악적으로 최악의 상태를 보냈으나 부분적으로 주목할 만한 부분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과거의 승계에 대한 무관심과 미래와 정면으로 대결하려는 그의 천성적 의지는 그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신봉자 가운데 그의 성 차별적인 발언에 치를 떠는 사람이나 그가 다른 뮤지션을 끌어내리는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도 끼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줄이어드를 집어치우고 52번가로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에서 성장한 데이비스의 음악 이력은 13세 때 아버지로부터 트럼펫을 선물받으면서 시작된다. 가난과 고통이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비평가들의 말에 그는 자신의 부유했던 유년 시절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데이비스는 다른 연주자들과는 성장 배경부터 차이가 있었다. 40년대 초반에 그는 로컬 밴드에서 연주하며 본격적으로 음악 무대에 발을 들여놓는다. 무명 시절이기는 했지만 다른 뮤지션들과 친분 관계를 맺기도 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당시 그와 마찬가지로 초년병이었던 트럼피터, 클락 테리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무렵 그의 이력에 또 하나의 전기가 마련된다. 빌리 엑스타인 밴드의 공연을 계기로 그 유명한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후일 데이비스의 음악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쨌든 데이비스는 1945년 뉴욕으로 가서 재즈 뮤지션으로는 특이하게도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흥미가 학구적인 체제에 머물 수 없음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이치였다. 학교에서의 레슨은 뒤로하고 그 유명한 52번가에서 재즈 뮤지션들과의 연주에 여념이 없었다. 운좋게도 찰리 파커, 콜맨 호킨스를 비롯 유명 뮤지션들과 연주할 수 있었던 그는 1947년 빌리 엑스타인과 베니 카터의 밴드에 일단 둥지를 틀게된다. 그리고 이 해에는 파커, 호킨스, 일리노이즈 자켓과 함께 사보이에서 레코딩을 했으며 테드 다메론과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 하기도 했다.
일련의 활동으로 점차 높은 지명도를 얻게 되자 데이비스는 드디어 그 특유의 리더쉽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마일즈 데이비스 올스타스(찰리 파커를 포함해서 9인조 밴드였음)라는 타이틀로 세셧을 감행, 레코딩은 물론 방송에 출연하는 등 재즈 신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어 1949년과 50년에는 편곡자 피트 루골로의 제의로 캐피털 레코드사에서 녹음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뮤지션이 교대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제리 멀러건, 존 루이스, 주니어 콜린스, 존 바버, 리코니츠, J.J.존스, 맥스 로치, 케니 클락 등이 그 면면이며 멀리건, 질 에반스, 루이그 등은 편곡도 함께 맡았다. 여기서 그들이 추구한 음악은 정교하면서 느리고 상호 교감이 별로 없었으며 솔로는 대단히 느슨했다. 따라서 이들이 연주한 앨범 'Birth of Cool'은 성공적이었다고는 하지만 당시에는 대단하지도 않았고 적절하지도 않았다는 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오늘날 이것은 '참신한' 재즈 연출의 토대로, 하나의 이정표적인 세션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데, 바로 이것은 데이비스의 선구자적인 안목과 직결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이 '참신한' 연출의 결과물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을 향해 곧바로 움직였다. 하나를 이루어내면서 동시에 다음을 향해 질주하는 데이비스의 음악 항로가 시작된 것이다. 50년대 초반이 되자 그는 프레스티지 레이블에서 케니 클락, J.J.존슨, 럭키 톰슨, 호레이스 실버, 퍼시 히스, 델로니어스 몽크, 모던 재즈 쿼텟과 레코딩을 한다.
이어서 50년대 중반에 그가 행한 프레스티지 캄보 세션은 대단히 훌륭한 것으로서 재즈사에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1955년 그의 오리지널 쿼텟 멤버는 오스카 페티포드, 레드 갈랜드, 필리 조 존스였다. 한편으로 데이비스는 찰스 밍거스, 재키 맥린과 함께 또 다른 세션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주도로 이루어진 50년대 최고의 세션은 폴 챔버스, 존 콜트레인과의 연주를 손꼽는다. 이 라인업이 바로 'Working', 'Steaming', Cooking' Relaxing' 등 일련의 'ing'시리즈의 주인공들이다. 데이비스는 'Blues By Five'라는 곡을 직접 쓰기도 했으며 'If I Were a Bell' 'I Could Write a Book'과 같은 스탠다드 넘버에서도 인상적인 해석을 보여주었다.
이 퀸텟(레드 갈랜드, 필리 조 존스, 폴 챔버스,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은 재즈의 거장들, 예컨대 소니 롤린스, 델로니어스 몽크 등의 작품을 훌륭하게 재 창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지적이고 애처로운 리리시즘은 진취적인, 마치 작열하는 듯한 콜트레인의 연주 스타일과 큰 대조를 이루었으며, 각각의 멤버는 모두 뛰어난 리듬 섹션을 바탕으로 고도의 음악적 상호 소통을 이루어냈다.
길 에반스와의 공동 작업으로 새로운 전기 맞아
50년대 중반 무렵 데이비스는 콜럼비아 레이블로 이적, 거의 30년 동안 재적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더 조직적인 프로모션과 재정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1958년에는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 몽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 큰 인기를 얻었는데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연주는 그 때문인지 대단히 유니크한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무렵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다름아닌 편곡자 길 에반스와의 공동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에반스의 정교한 편곡과 함께 데이비스의 연주는 또 한 차례의 전기를 맞게 된다. 그들은 인각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오랜 동안 깊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데이비스는 '올스타' 멤버들과 함께 파리 공연을 가졌으며 캐논볼 애덜리의 음반에도 게스트로 참여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낸다. 파리 공연으로 인해 그는 색다른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는데, 프랑스 영화 ,사형대 위의 엘리베이터에서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것이다. 마일즈의 신경과민적이고 긴장감 팽배한 음악은 이 영화가 의도하는 메시지와 정확하게 부합하고 있다.
데이비스의 그룹은 간혹 멤버 교체를 단행하기도 했는데, 한때 콜트레인이 소니 롤린즈로 교체(1958년 다시 돌아왔다)되기도 했으며 빌 에반스가 갈랜드로 바뀌었고 지미 콥은 존스를 대신해서 새 드러머로 영입되었다. 바로 이 라인업이 길 에반스의 뛰어난 편곡이 돋보이는 걸작 'Porgy &Bess'의 주인공들이다. 이와 함께 그는 영화음악의 거장 미셸 르그랑과 음반을 발표했으며 멤버들과 함께 일본 순회 공연을 떠나 몇몇 트랙을 레코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1959년 발표한 앨범 'Kind of Blue'(한 트랙에서 에반스 대신 윈튼 켈리가 피아노를 맡고 있다)였다. 이 앨범의 발표는 재즈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모드 주법으로 인해 유명해진 이 앨범은 솔로 연주의 가능성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 앨범에 수록된 다섯 곡 가운데서 모드에 의거한 곡은 두 곡으로서 'So What'과 'Flamenco Sketches'가 그것이다. 전자는 길 에반스가 도입부에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며, 후자는 빌 에반스의 입김이 상당 부분 반영된 곡이다. 그밖에 12마디 블루스 'Freddie Freeloaker'에는 베니 굿맨/찰리 크리tm찬의 리프가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데이비스의 아이디어였다. 어쨌든 이 앨범에 삽입된 대부분의 곡들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뮤지션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연주될 정도로 아이디어의 참신함이나 구조적 완성도가 뛰어나다. 이 앨범 직후에 발표된 'Sketches of Spain'역시 길 에반스의 편곡에 의한 또 하나의 명반으로 로드리고나 파야 같은 클래식 작곡가의 작품을 소재로 독특한 재즈를 들려주고 있다.
몰려드는 젊은 뮤지션들-마인즈 패밀리
콜트레인이 떠난 60년대 데이비스에게는 보다 많은 변화가 있게 된다. 콜트레인에 이어서 애덜리마저 그의 곁을 떠나자 행크 모블리, 조지 콜맨, 소니 스팃, 샘 리버스 등이 자리를 메꾸게 되지만 모두 훌륭한 뮤지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그 누구도 제 2솔로 주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소 이가 어긋났던 이 시기를 넘어서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론 카터, 웨인 쇼터, 토니 윌리암스, 허비 행콕을 맞이하면서 그는 60년대를 자신의 시대로 만들기 시작한다. 이들은 결성 초기 유렵과 뉴욕에서 레코딩을 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몇몇 트랙은 음반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60년대 중반이 되자 이 새로운 라인업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데이비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입증시켰다. 이제 그는 과거와는 달리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밴드를 지향했으며 느슨하고 여백이 많은 연주는 역사 속에 묻어버렸다.
행콕이나 쇼터는 모두 활기차면서도 감성적인 뮤지션들었다. 이들은 카터, 윌리엄스와 상의 하는 가운데 직접곡을 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들이 발표한 'MilesStones' 'Nefertiti' 'Fille de Kilimanjaro' 등은 데이비스가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도달하게 될, 더 자유로운 음악을 향한 과도기적 작품들이었다. 데이비스는 간혹 카터 대신 데이브 홀랜드를 기용하면서 한편으로는 행콕으로 하여금 일렉트릭 피아노를 사용하고록 했다. 69년이 되자 다시 젊은 유지션들이 대거 영입된다. 카터, 홀랜드, 행콕 등의 기존 멤버에 칙 코리아, 조 자비눌, 존 맥클러플린 등 당시로서는 신진 뮤지션들이 가세하게 되는데 쇼터는 이때부터 테너 색소폰 대신에 소프라노 색소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젊고진보적인 연주자들과 함께 하면서 데이비스의 스튜디오는 듀크 엘링턴이 그랬던 것처럼 스튜디오가 아니라 일종의 실험실이 되어 버렸다.
계속되는 이들의 세션은 속속 앨범으로 제작되었는데, 'In a Silent Way' 'Bitches Brew'등은 음악이기에 앞서 하나의 충격이었다. 전자악기의 강렬한 음향과 오프 비트를 지양한 4/4 록 비트는 록, 팝, 리듬 & 블루스 팬들을 열광시켰으나 수많은 재즈 팬들, 과거의 데이비스의 팬들은 어리둥절한 채로 대부분 그의 곁을 떠나가버렸다. 데이비스의 들뿍 날쭉하고 멜랑콜리한 프레이즈, 긴 휴지부, 반복 프레이즈 등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리프, 백비트, 타악기의 음향이 마치 소용돌이치듯 뒤섞여 있었다는 점이었다 순수주의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Top-40에까지 올랐던 'Bitches Brew'는 오늘날 인기를 끌고 있는 푸전 재즈의 토대로서, 대중 음악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역사적인 앨범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모여든 뮤지션들, 베니 모핀, 잭 디조넷, 빌리 콥햄, 스티브 그로트 코시 등은 명실공히 마일즈 패밀리의 일원으로서 오늘날 재즈계의 중추적인 인물들이 되었다.
70년대에 발표한 데이비스의 앨범들은 그의 트럼펫과 키보드 솔로로 이루어진 일종의 몽타쥬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록, 리듬 & 블루스, 소울, 컨템포러리를 보다 노골적으로 수용, 점차 대중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물론 그의 고전적인 비밥과 쿨 사운드를 기대하던 순수주의자들이 다시 한번 그를 경멸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병과 개인적인 문제들로 데이비스는 온전한 음악 행진을 계속할 수 없었다. 결국 이와 같은 분위기 때문에 그가 80년대에 발표한 음반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잊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80년데 활동이 아무리 부진하다 하더라도 그가 60, 70년데에 발표한 음반들을 평가 절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앨범 들은 그 어떤 재즈 뮤지션이 만든 앨범보다도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끊임없이 재 발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데이비스가 만든 최악의 앨범도 평범한 뮤지션이 만든 범작보다는 훌륭하다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