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문학의 여러 갈래 중 서사 양식에 해당한다. 그런데 서사(敍事)는 이야기 문학 곧 인물과 그에 얽힌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은 인물과 그 인물에 얽힌 사건에 관한 기록이라는 말이 된다. 즉 소설은 어떤 인물의 삶의 기록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설이란 허구, 즉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을 모델로 한 역사소설1)에 관련시킬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이라면 그의 삶이 실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허구, 즉 거짓말이다. 따라서 역사소설이 문학 작품으로서의 소설이기 위해서는 실재했던 인물의 실재적인 삶에서 모티브를 취하여 작가가 살을 붙여 한편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의 삶을 실재했던 그대로 기록한다면 그것은 소설 즉 픽션이 아닌 논픽션, 곧 전기(傳記)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한 말이 되지만, ‘세종대왕’이라든가 ‘이순신’, ‘수양대군’, ‘임꺽정’, ‘장길산’ 등의 삶을 그린 역사소설 박종화의 「세종대왕」과 「임진왜란」,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 등의 작품에 나타난, 혹은 묘사된 그들의 삶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것과 똑같았을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역사적 실재 인물들의 삶 속에서 작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2)과 관련된 인물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만을 취사 선택하여 임의로 배열한 후 여기에 살을 붙여 한 편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민 것이 바로 역사 소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역사적 실재 인물들과 그들이 연관된 사건들을 어떻게 소설 속에 형상화해 내느냐에 있다. ‘수양대군’을 보자. 어린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수양대군의 행위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세종, 문종, 단종, 세조에 이르는 조선 왕조의 실체는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등극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에 나타난 ‘수양대군’의 모습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3)
어떻게 이러한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동일한 사건을 취재함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그리고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역사적 실재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단종애사」와 「대수양」에 형상화된 ‘수양대군’의 모습은 전혀 이질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는 이광수와 김동인의 역사의식 혹은 현실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태준의 역사소설 「황진이」4)도 마찬가지이다. 작가 이태준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조선 중종조 송도의 기생 ‘황진이’의 삶에서 모티프를 취해 그 나름대로 ‘황진이’라는 여인의 삶을 재구성해 낸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황진이’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고,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이태준은 ‘황진이’의 삶을 어떻게 허구화하여 「황진이」란 소설을 썼으며, 결과적으로 역사적 실재 모습과는 어떻게 다른 ‘황진이’를 만들어 냈는가. 이러한 문제에 답을 하면서 「황진이」라는 소설의 허구화 과정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우선 문헌상에 남아있는, 역사상 실재했던 ‘황진이’의 삶을 추적한 다음, 이를 이태준의 소설 「황진이」에 형상화되어 있는 ‘황진이’의 삶과 견주어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파악하여 그 허구화 과정을 밝히고, 나아가 이태준의 소설 「황진이」의 의미를 알아보기로 한다.
2. 황진이는 누구인가
조선 중종조의 송도(松都, 현재의 개성) 기생 ‘황진이’는 그녀가 남긴 몇 수의 시조와 송도삼절(松都三絶)이란 서경덕과의 일화, 그리고 백호 임제가 그녀의 무덤가에서 읊었다는 시조로 인해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인물이 되어 있다. 혹자는 ‘한국의 사포’5)라 했고, 어떤 이는 ‘애상 속의 여상’6)이라 했으며, ‘기발한 시상(詩想)의 소유자’7), ‘끝없이 흐르는 여자 나그네’8) 혹은 ‘이인(異人)’9)이라고도 했다. 어쩌면 기생이었던 그녀의 신분과 그녀가 남긴 시조로 인해 그간의 여러 시인 문객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생애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작 그녀의 생몰년대조차 미궁에 빠져있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10) 그녀가 남긴 시조 몇 수가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녀의 삶이 여러 편의 시와 소설11)의 소재가 되는가 하면, 현대에 들어와서는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무엇이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베일에 가려 있는 그녀의 삶은 미화되고 모든 남성의 영원한 연인인 양 그녀의 아름다움이 회자된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서, 실증 사학의 입장에서, 역사적 문헌에 기록된 그녀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실로 영성하기 그지 없다. 아니 역사적 직접 자료가 되는 정사의 기록은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 옳다. 유교를 덕목으로 내세운 조선조 사회에서 여성, 그것도 기생 신분이었던 ‘황진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으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오직 야사(野史), 즉 패설류(稗說類)의 기록과 여러 시조집이 그녀의 실재를 전해줄 뿐이다.
‘황진이’에 얽힌 일화들이 전하는 야담, 패설류에는 허균의 「식소록(識小錄)」,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 이덕형의 「송도기이(松都記異)」, 황준량의 「금계필담(錦溪筆談)」, 김이재의 「중경지(中京誌)」, 홍중인의 「동국시화휘성(東國詩話彙成)」 김택영의 「소호당집(韶濩堂集)」 그리고 「조야휘언(朝野彙言)」, 「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패설류를 통해 추정된 황진이의 실재 생존 연대는 가장 가까운 것이 5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즉 이러한 패설류들이 과연 신뢰할 만한 자료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직접 자료가 없는 형편이고 보니 이들 패설류에 나타난 기록을 토대로 그녀의 삶의 궤적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우선 이들 패설류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황진이’의 삶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1) 출생과 신분
위에 열거한 패설류에 따르면 ‘황진이’는 ‘황진사의 서녀’12)이거나 아니면 ‘맹인의 딸’13)이다. 기록상으로는 ‘황진사의 서녀’라는 것이 다수를 차지한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가 진현금(陳玄琴)이라는 기록도 보여 사실감을 더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에는 그녀가 출생할 때, ‘이상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거나, ‘선녀가 나타나 찾았다’거나 아니면 ‘물을 떠 주었더니 반쯤 마시고 돌려주기에 먹어 보니 물이 아니고 술이’었고, 이것이 ‘합환주’가 되었다는 등 전설같은 기록이 보여 신뢰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맹인의 딸’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그 맹인이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며 양반들의 술자리에 자주 어울렸다 하니 이를 계기로 기적에 오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황진이’의 출생은 ‘황진사의 서녀’라기 보다는 ‘맹녀지자’에 신뢰감이 간다.14)
한편 그녀의 신분에 관해서는 위의 기록들 모두 ‘명기(名妓)’ 혹은 ‘명창(名娼)’으로 일컫고 있는데, 조선조의 기생들 중 ‘명기’ 혹은 ‘명창’이라 불리우는 여인의 숫자를 감안해 볼 때 그녀가 송도의 뛰어난 기생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하겠다.
2) 총각의 상여에 얽힌 일화
황진이가 열다섯 나던 해에 인근 동네의 총각이 죽어 그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을 지날 때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그녀가 속적삼을 벗어 관을 덮어주니 그제야 움직였다는 기록이 있다.15) 흔히 이를 근거로 그녀가 양반의 서녀에서 기생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일종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이다. 게다가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문헌이 오직 「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 하나뿐인데다가 이 문헌 또한 신빙성이 희박한 자료로 야담적인 성격이 짙다.
3) 벽계수와의 인연
종실(宗室)의 벽계수(碧溪水)란 자가 황진이가 명기임을 알고 한 번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그녀는 ‘명사(名士)’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았으므로 친구 손곡 이 달(遜谷 李達)에게 청을 하였다. 이달은 꾀를 내어 벽계수에게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협금수후(挾琴隨後)케하여 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일곡(一曲)을 부르면 진이가 와 그대 곁에 앉을 것이다. 그 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니 취적교(吹笛橋)를 지나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이라’고 했다. 벽계수가 그 말대로 누 위에서 일곡을 부르고 일어나 취적교로 향하니 진이는 소동에게 물어 벽계수인 줄 알고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의 시조를 읊었다. 이를 듣고 벽계수는 취적교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낙마(落馬)했다. 진이가 이를 보고 웃으며 ‘이는 명사가 아니라 풍류낭(風流郎)이다’하고 곧 돌아가 버렸다.16)
정사에 기록된 벽계수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어 이 기록에 나타난 바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는 시조와 이달의 등장, 그리고 이달과 「금계필담(錦溪筆談)」의 기록자인 황준량과의 관계로 미루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이 일화는 황진이의 인물됨을 엿보게도 하는 것이다.
4) 판서 소세양과의 교유
판서 소세양(蘇世讓)이 소시(小時)에 여색(女色)에 대해 강장(剛腸)하기로 자처하여 늘 친구들에게 장담하여 말하기를 ‘여색에 혹(惑)함은 남자가 아니다’라고 해왔다. 듣건데 개성에 절창 진이가 있다 하나 만일 나 같으면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그리고도 추호도 미련을 안갖겠다고 했다. 그러나 진이와 만나 30일을 살더니 그 마지막 되는 날 진이가 작별을 서글피 여겨 남루(南樓)에 올라가 주연(酒宴)을 베풀고 한 편의 시17)를 지었다. 이에 소 판서가 ‘吾其非人哉 爲之更留’라고하여 자기의 장담을 스스로 탄하면서 마음이 동하여 다시 머물렀다.18)
소세양은 윤임과 더불어 여러 상소를 통해 정쟁을 하다가 결국 향리로 물러난 기록이 중종실록에 있다. 이를 토대로 그의 사람됨과 40세 전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황진이의 미색을 짐작하게 해 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5) 화담 서경덕과의 교유
황진이는 평생 화담 서경덕을 흠모했다고 한다.19) 물론 처음에는 서경덕을 유혹하려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화담의 인물됨을 알아본 황진이는 책을 끼고 그를 찾아가 배우기까지 했으며, 그녀 스스로가 서화담과 박연폭포, 그리고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칭했다고 한다.20) 그러나 서경덕의 문집에는 황진이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전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이는 양반 사대부의 문집에 기생과의 교유를 기록한 예가 없어 그럴 수 있는 문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식소록의 저자인 허균의 아버지가 허엽(許曄)이며, 그가 화담에게 사사한 것21)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나는 황진이와 관련된 화담에 관한 내용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6) 면앙정 송순과의 교유
면앙정 송순(宋純)은 조선조 시조 문학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다.
송순이 하루는 소연(小宴)을 베풀었는데 황진이가 나타나 모든 남정네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관서명기(關西名妓)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송공의 실내부인(室內夫人)을 질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한편 송순 대부인(大夫人)의 수연(壽宴)에 참석한 모든 기생들이 가지각색의 오색찬란한 비단 옷차림과 노리개와 분연지 등으로 미색을 다투고 있는 가운데 황진이만이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광채가 사람을 움직일 정도로 그 존재는 한떨기의 청초한 국화꽃과도 같이 이채를 띄었으며 외국의 사신들까지 ‘汝國有天下絶色’이라 감탄하였다고 한다.22)
이를 근거로 하여 후대 연구자들은 황진이가 송순에게서 시조를 사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23)그러나 송순이 송도유수로 부임하기 전에 그의 대부인이 죽었으며, 송도유수 부임도 황진이의 추정된 생존연대와 맞지 않는다.
7) 지족선사와의 교유
지족선사(知足禪師)는 송도 근교 깊은 산 속의 암자에서 30년 동안 면벽수도해 온 스님이었다. 송도 사람들은 그를 모두 생불이라 존경하였다. 황진이는 소복을 하고 그를 찾아가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청상이라 소개하고는 제자로 삼아달라고 애원하였다. 지족선사는 미녀의 출현에 어쩔 줄 몰라했고, 자신의 수양이 부족한 것으로 알고 귀신을 쫓는 주문을 외웠다. 황진이는 나중에 속옷 차림으로 비를 맞고 살결을 다 드러낸 모습으로 다시 그를 찾아갔다. 결국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고 30년 면벽 수도도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24)
면벽 30년이라면 조선조 불교의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정사 혹은 불교사에 ‘지족선사’에 관한 기록은 없다. 파계승이라는 면을 고려할 수 있으나, 이러한 기록들은 자신의 미색을 미끼로 남자들의 인격을 저울질했던 황진이의 면모를 미화하면서 다소 과장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8) 이사종, 이언방, 이생, 엄수와의 교유
선전관으로 있던 이사종(李士宗)은 명창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황진이의 명성을 듣고는 그녀와 교유하기를 원하여 그녀의 집 부근에 있는 천수원 냇가로 가 노래를 불렀다. 이윽고 황진이가 그의 노래 소리를 듣고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이사종임을 알아내었다.
두 사람은 6년 동안의 계약으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먼저 3년은 이사종의 집에서, 나중 3년은 황진이의 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에서 산 3년 동안은 각기 생활비의 일체를 단독으로 부담했다. 약속한 6년이 지나자 황진이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헤어졌다고 한다.25)
한편 황진이는 이언방(李彦邦)이란 명창과도 교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언방의 노래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황진이가 그를 찾아간다. 마침 노래를 하고 있던 이언방은 자신이 이언방의 동생이라 속인다. 그러나 황진이는 그의 손을 잡으며 노래 소리로 보아 이언방이 틀림없는데 어찌 속이려 드느냐고 하여 둘의 교유가 시작된다.26)
재상의 아들이라고만 알려진 이생(李生)과의 교유는 매우 특이하다. 이생은 그 사람됨이 호탕하여 황진이가 금강산 탐승의 동행을 요구했을 때 자진해서 나섰다. 곧 식량을 준비하여 단 둘이 떠났는데, 여러 곳을 구경하는 동안 식량이 떨어지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이 절 저 절로 구걸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황진이가 중들에게 몸을 팔았다. 그러나 이생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27)
이들 세 사람과의 교유는 황진이의 애정행각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로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또한 호사가들에게 회자되면서 윤색된 것은 물론, 이사종과 이언방은 동일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28)
한편 가야금의 명인이라는 엄수(嚴守)와의 교유는 송도 유수 송공의 대부인 수연에서 이루어진다.29) 황진이의 노래를 듣고 있던 70이나 된 엄수가 그녀를 선녀와 같다고 극구 찬양했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명창과 명인의 연령을 초월한 교유가 이루어진 것으로, 두 사람의 직업으로 보아 이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9) 죽음
앞에서 밝혔지만 황진이가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패설류에 황진이의 죽음은 특이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죽으면서 집안의 사람들에게 ‘곡을 하지 말고, 상여가 나갈 때에는 북이나 음악으로 인도하라’고 했다고 한다.30)또한 ‘생전에 성격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였으니 사후에는 산에다 묻지 말고 대로변에 묻어달라’고하여 지금도 송도의 대로변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31) 게다가 ‘나 때문에 천하의 남자가 자신들을 자애(自愛)하지 못했으니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시체를 동문 밖 사수(沙水)에 그냥 내쳐두어 개미와 벌레들이 내 살을 뜯어 먹게 함으로써 천한 여자들의 경계를 삼으라’하여 그 말대로 버려두었더니 한 남자가 거두어 장사지냈다는 기록도 있다.32)
한편 백호 임제(白湖 林悌)가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다가 그녀를 그리는 시33)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하여 조야(朝野)의 비난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34)
3. 소설 속의 ‘황진이’ - 역사적 인물의 소설적 형상화
이태준의 장편소설 「황진이」는 1936년 6월 2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다가 그해 9월 4일 연재 중단35)된 후, 1938년 2월 동광당서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해방 후인 1946년 8월 같은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
상편, 중편, 하편 전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황진이」의 서사적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황진이는 황진사의 서녀로 어머니 현금와 함께 송도에 산다. 그녀는 글과 글씨에 능하며 자색이 아름다웠는데 한양의 양반인 윤판서와 김참판의 자제 등과 혼담이 있었으나 서녀라는 이유로 몇차례나 거절당하고 만다. 이에 그녀는 자신의 신분적 결함을 통탄한다.
한편 옆 동네 총각이 황진이의 자태에 반해 혼자 그리워하다가 상사병으로 죽는다. 그런데 그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고, 우여곡절 끝에 황진이가 자신의 적삼을 벗어 덮어주자 움직인다. 이를 계기로 황진이는 기생이 되기로 한다.
기생이 된 황진이는 송도 유수의 꽃놀이에 참여한다. 송도유수 송화영과, 김참판 그리고 기생 성산월이 참여한 자리에서 황진이는 시와 노래로 성산월을 압도하고, 송유수의 유혹을 받으나 기지로 피한다. 함께 있던 김참판은 처녀시절 혼담이 오갔던 총각의 아버지이다. 그 역시 황진이에게 눈독을 드린다.
그러나 혼담이 있던 김참판의 아들 김지학을 우연히 만나 반은 향락으로 반은 그들 부자를 농락하기 위해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그리고는 그를 김참판이 보낸 백마에 태워 집으로 보낸다.
시문에 능하고 대제학을 지낸 학자인 소세양을 만나 30일의 동거생활에 들어갔다가 다시 한시를 지어 이별하려는 소세양을 주저앉히고, 여자에 대하여는 벽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벽계수를 유혹하여 훼절시키는가 하면, 박연폭포를 찾아 마음을 정양하며 시를 읊기도 한다.
황진이는 당대 도학군자로서의 서화담에 대한 칭송을 듣고 그를 찾아가 유혹하나 서화담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에 그를 스승으로 섬기기로 하고 자주 찾아가 그와 교유한다.
송도 근교의 깊은 산 속 암자에서 20년 면벽 수도했다는 지족선사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를 유혹하여 20년 면벽수도를 공염불로 만들기도 한다.
명창 이방언을 만나고, 이어 악공 엄수와 교유하며, 선전관 이사종과 송도에서 삼년 한양에서 삼년을 지내기도 한다.
그러던 중 인생에 허무함을 느끼고 서화담의 묘에 예를 올린 후 금강산으로 향한다.
위에서 보듯이 이태준의 「황진이」에 서술된 서사적 줄거리는, 전항에서 밝힌, ‘황진이’와 관련된 패설류의 기록들과 거의 유사하다. 소설이라기보다는 패설 혹은 야담류의 기록들을 적절히 재배치해 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문헌에 나타난 사적을 모아보니 이름난 푼수로는 기록이 너머 영성함에랴. 이덕형의 송도기이에 드러난 것이 기중 소상한 편이라 하나 그것도 몇줄 되지 않을뿐 아니라 진이를 친히 보고 적은 것도 아니요 진이는 이미 타계에 간 지 여러 해 뒤 그의 외척 되는 한모라는 팔십 노인에게서 드른 바에 의지함이었다.....36)
이러한 지적은 이태준 역시 패설 혹은 야담류의 기록들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더구나 패설류의 기록과 이태준의 황진이에 나타나는 주요 사건과 인물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태준의 황진이 패설, 야담류의 기록 비고
황진사 黃進士庶女也 崧陽耆舊傳
어머니(현금) 眞之母 陳玄琴 崧陽耆舊傳 외
황진이 黃眞伊, 眞娘, 眞伊, 明月 松都記異 외
용쇠(하인) 없음
외삼촌 없음
사내아이(총각) 十五之時 隣有一書生 崧陽耆舊傳
총각의 어머니 없음
혹부리 중매, 윤판서댁 며느리 없음
송도 유수 송화영 松都留守, 宋公風流人也 松都記異, 識小錄
김참판 없음
김지학(김판서의 아들) 없음
기생 관홍장 없음
기생 성산월 없음
소세양 蘇陽谷世讓少時以剛腸自許 東國詩話彙成
벽계수 宗室碧溪水者 錦溪筆談
명창 이언방 有士人李彦邦者 識小錄
송유수 어머니의 수연, 악공 엄수 宋公 爲大夫人設壽席 於于野談,「識小錄 외
지족선사 知足禪師三十年 識小錄,朝野彙言
서화담 平生慕花潭 識小錄 외
선전관 이사종 宣傳官 李士宗善歌 於于野談
없음 李生者 宰相之子也 於于野談
없음 (遺言) 將死命家人曰 識小錄 외
없음 (林悌) 爲文祭眞伊 於于野談
위 표에서 보듯이 등장 인물 대부분이 패설류에 등장하는 실재 인물들과 동일인이다. 즉 황진이, 황진이의 어머니, 총각, 송도유수37), 소세양, 벽계수, 이언방, 엄수, 이사종, 지족선사, 서화담은 모두 실명으로 등장하며 이들과 관련된 사건에서도 기록과 소설의 차이가 별로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중 앞에서 서술한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들이다. 외삼촌, 용쇠, 총각의 어머니, 혹부리 중매, 김참판, 기생 성산월, 기생 관홍장, 김참판의 아들 김지학 등이 바로 그들이다. 비록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이들이 바로, 작가 이태준의 상상력이 동원되어 창조되면서 황진이를 한편의 허구적인 소설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황진이란 소설 속에서 이들 허구적 인물들과 관련된 ‘황진이’의 모습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추적해 보자.
(1) 출신과 성장
앞에서 황진이의 출생을 ‘황진사의 서녀’라기보다는 ‘맹녀지자’, 즉 맹인의 딸로 추정을 했다. 그러나 이태준은 황진이의 출생과 신분을 ‘황진사의 서녀’로 확정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아버지가 게시대야 한달에 한두번 시량이나 대여주려고 다녀가는 손님같은 사람, 어머니 불상한 생각과 어머니 감사한 생각이 한데 엉키여 눈물이 핑 올려 솟는다. (중략)
와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자기 모녀에게 자기 아버지처럼 박정한 사람도 드물 듯하다. 뻔쩍하면 양반의 집 체도가 어떠니 어떠해야 하느니 하고 대소사를 물론하고 어머니의 소실로서의 지위를 밝히는 것과 자기에게도 서자녀(庶子女)의 슬픔을 던져준 적이 한두번이 아닌 아버지다.38)
이태준은 왜 황진이를 ‘서녀’로 둔갑시켰을까. 이 부분부터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황진이를 맹인의 딸로 허구화했을 경우,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전개될 이야기는 뻔한 것이 된다. 즉, 관가의 행사에 불려 다니는 악공의 딸. 더군다나 그 악공은 맹인이다. 맹인인 어머니의 길잡이 노릇을 하며 드나들었던 관가, 그리고 자주 접할 수밖에 없었던 기생과 양반들. 그렇게 되면 어린 황진이는 자연스럽게 기생으로 변신할 수 있게 된다.39) 그러나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된다면 소설의 극적 재미는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비록 서녀일망정 양반의 후예가 기생으로 변신한다면 어떻게 될까. 더군다나 신분제가 철저한 조선조에서의 일이다. 반쪽짜리 양반으로서 상민의 일을 기록할 수 있고, 상민의 편에서 양반들을 비판할 수 있으며, 기생으로의 변신에 극적인 재미를 더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황진이를 황진사의 서녀로 설정했다고 추정할 수가 있다.
이러한 ‘황진사의 서녀’라는 환경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황진사와 그의 첩이자 황진이의 어머니인 진현금, 외삼촌, 그리고 하인들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황진이의 집안과 관련된 인물들은 그들이 비록 패설류의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설 속에서는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황진이’를 황진사의 서녀로 허구화한 작가 이태준은 그녀를 통해 남존여비는 물론이요 양반과 상민이라는 신분제를 통렬히 비판한다.
그런데 부유칠거는 다 뭐야. 글이라니깐 읽긴 하지만 웬 내치는게 그리 많아. 뭐 계집은 사내 비복인가!40)
“일평생을 동심일체 되어 살아야 할 사람이니 중매 눈이 무엇이며 부모 친척의 눈이 하관인가. 네보고 내보고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생각이 된다.41)
“어머닌 꿈에도 한 번 보시지 않구 뭘루 반하서서 그리세요?”
“그만한 자리가 쉬우냐? 잠작구 있거라.”
“자리가 혼인하나요? 사람이 하지.”42)
“내가 무에 남만 못하냐? 인물이 남만 못하냐? 침공이 남만 못하냐? 시설일지라도 내 웬만한 선비쯤은 무서울게 없다. 험절이 있다면 유시로부터 곱게 자라 기최(箕箒)에 손이 익지 못한 것뿐이다.”43)
“일체중생이 개유불성아니냐? 나면서 선악심이 따로따로 박혀질리 없다! 서자녀를 천히 녀김은 남의 시앗되기를 질기지 말라는데 일리 있다 하려니와 오륙이 멀정한 자식들을 그 부모나 선조들이 비천하게 살았다 해서 대대손손이 똑같은 운명에 쓰러 넣으려는건 권병을 잡은 놈들의 횡포다! 이목구비가 똑같은 사람에게 인력으로 귀천의 운명을 붙어버리는 것이 횡포가 아니고 무어냐? 아니 천리(天理)에 반역이 아니고 무어냐? 양반? 흥! 이놈들 별놈들인가. 얼마나 도저한가 어디 보자!.”44)
비록 황진사의 서녀이지만 소설 속의 황진이는 소학을 읽고 시조를 읊으며 난과 대를 치는가 하면 여러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다. 남다른 미모와 함께 여러 방면에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황진이가 기생이 된 후의 행적을 전개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이다. 이러한 집안의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어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하인 용쇠가 등장한다.
그런데 황진이를 분명 ‘서녀’로 설정을 해놓은 작가 이태준은 잠시 착각을 하고 있다.
“어째 안된단 말이냐? 내가 치가 떨려서두 쩡쩡 울리는 양반 중에도 상양반의 집으루 널 드려앉혀보구야 말테다. 세상에 그놈의 윤가나 김가나 한양 놈의 집만 양반이라던? 치가 떨린다 가만 있거라.”45)
우선 한양에 있다는 양반 집안과의 혼담부터가 잘못이다. ‘혹부리 중매’나 ‘윤판서댁 며느리’가 양반과 서녀의 혼인을 가능한 것으로 알았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조선조라는 시대 배경 속에 서녀가 양반의 집에 시집가려는 꿈을 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황진이의 어머니 현금은 양반과의 혼인을 바라고, 그것이 깨어지자 위와 같은 오기를 부리는 것이다. 이는 개화가 되었다지만 분명히 집안의 근본을 따지며 적서 차별이 남아 있던 1930년대 이태준의 항변일 뿐이다.
또한 ‘명월 황진이’라는 이름은 분명 작가의 착각이다.
처녀는 나즉히 기침 한 번을 기치고는 팔굽을 떼인 체 화제(畵題)를 쓰되, 여필답지 않게 흥청거림이 황산곡(黃山谷)의 체인듯하다. 한 번 묻힌 먹으로, 서창청공(書牕淸供)이란 넉자를 쓰고 방긋이 아저씨를 쳐다보더니 다시 먹을 묻혀 ‘명월 황진이(明月黃眞伊)’라 쓰고는 붓을 놓는다.(중략)
명월.
황진이.
총각은 그제야 처녀의 성명은 황진이요 명월이란 호까지 가진 것을 알았다.46)
이름에는 아명, 성명, 자, 호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남자들의 경우이고 성장하여 혼인을 하면 또 달라진다. 황진이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는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성명은 물론이요 호까지 있다. 인수를 놓고 낙관까지 한다. 더군다나 그 호라는 것이 기명(妓名)인 명월(明月)이다.
분명 기명은 관가의 기방에서 일정한 수련을 거친 후, 혹은 기생이 된 후에 붙여지는 이름이다.47) 따라서 소설 속의 이름 ‘명월 황진이’가 처녀 시절부터 불리웠다는 것은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된다. 오히려 아명을 설정하여 그 이름이 불리웠다가 후에 기생이 되면서 자연스레 ‘명월’ 혹은 ‘진이’란 이름을 갖게 하는 것이 사실감을 주었을 것이다.
(2) 기생이 되기까지
소설 속의 황진이가 기생이 되는 데에는, 패설류의 기록에도 있는, ‘총각(서생)’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우선 패설류의 기록을 보자.
황진이가 15세 나던 해에 이웃에 한 서생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 총각이 담 밖에서 몰래 들여다 보고 진이의 자태에 매혹되어 혼자 가슴만 태우다가 그만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런데 상여가 진이의 집 문 앞에 이르자 말이 슬피 울며 움직이지 아니하고 사람들의 발도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는 필시 생전에 못이룬 유한의 표상이라하여 공손히 진이의 집에 들어가 그의 저고리를 얻어다 관을 덮어주었더니 비로소 말도 움직이고 사람들의 발도 떨어졌다 한다. 진이가 크게 감동하여 그후 기생이 되었다.48)
이태준은 이러한 기록을 무려 80여쪽에 걸쳐 묘사, 서술해 낸다.49) 짧막한 패설류의 기록에 살을 붙여, 황진이가 기생이 되는 까닭을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이태준의 작가의식이 엿보인다.
진이는 여러 날 아침을 두고 새벽 정신에 생각해 보았다.
“날더러 온전한 양반이 아니라고! 인전 날더러 또 온전한 처녀도 아니랄테지! 흥...... 구구한 도덕이나 그따위 고열한 제도에 묶여져 살 나도 아니다!”
하로 아침은 약그릇을 갖다 놓는 어머니의 손을 이끌었다. 진이는 양치부터하고 얼른 눅어지지 않는 입술을 바르르 떨다가,
“나 기... 기생이 되겠어요.”
하였다.
“......”
어머니는 입술이 파래질 뿐, 그 자리에서는 얼른 아모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50)
총각의 죽음으로 고민하던 황진이는 기생이 되기로 결심한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즉 총각의 상여에 적삼을 벗어 덮어준 후부터 황진이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주는 것은 비록 한벌 적삼에 지나지 않으나 그 비인 적삼 속에는 처녀로서의 명예 전부가 쌔여가는 것’으로 판단했으면서도 황진이는 적삼을 벗어 주었고, 총각이 훔쳐간 당혜의 나머지 한 짝도 내다 준다. ‘나도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이다.
결국 황진이도 병을 얻고 집에서는 굿까지 한다. 다시 불공을 드리고, 청혼이 있는 김에 급히 택일을 서두른다. 이런 때에 기생이 되겠다고 결심을 밝히는 것이다. 지극히 극적인 구성이지만 이 부분에 이태준의 생각이 숨어 있다. ‘구구한 도덕이나 고열한 제도’에 묶여 살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태준의 ‘서자 컴플렉스’가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51)
이러한 극적 구성에 필요한 것이 패설류의 기록에는 없는 ‘총각의 어머니’와 여러 중매장이들이다. 게다가 총각은 황진이의 가슴속에 ‘죽기까지 날 사모한 사람’으로 남아 소설 전편에 걸쳐 진이의 그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인생의 허무로 서술된다. 따라서, 비록 패설류의 기록을 재구성한 것이지만, 총각과의 인연은 소설 황진이 전편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건이자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이태준은 잠시 착각을 한다. 바로 총각의 성격화이다. 처음 황진이의 집 뜰에 들어온 소년(총각)은 배서리를 하러 왔다가 어린 황진이에게 들킨 인물이다. 묘사된 것으로는 하인이나 진배없는 모습이다. 즉 상민이라는 얘기다. 그러기에 황진이는 “너 뉘집 새끼니 너?”하고 대뜸 반말부터 한다.
몇 해 후, 총각이 황진이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날리던 연줄이 끊어져 연이 황진이의 집 안으로 들어가 연을 찾으러 와서이다. 총각은 한눈에 황진이를 알아보았고 연정을 품는다.
그 총각의 어머니는 ‘남의 집에 저녁 설거지까지 보아주고야 밥 한그릇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는 하층민이다. 총각과 관련하여 서술된 이러한 여러 상황들을 종합해 보면 총각은 상민이지만 퍽 잘 생긴 남자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총각은 대화를 듣고 안치민의 묵화를 알아내는가 하면, 글씨를 보고는 그것이 황산곡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상당한 수준의 지적 능력이다.
처녀의 앞에는 대장지 한 장이 깔려 있고 바른편에는 벼루, 왼편에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안치민의 것인 듯한 묵죽 한 폭이 펼처져 있다.52)
처녀는 나즉히 기침 한 번을 기치고는 팔굽을 떼인 체 화제(畵題)를 쓰되, 여필답지 않게 흥청거림이 황산곡(黃山谷)의 체인듯하다.53)
그러나 이러한 총각의 모습은 사실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비록 소설일망정, 서술된 내용을 살펴보면 총각의 모습이 우직하고 순박한 하인의 모습에서부터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글씨와 그림에 일가를 이룬 선비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총각의 성격을 창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지적할 수 있다.
(3) 남성 편력
소설 황진이에 나타난 황진이의 남성 편력은 패설류의 기록과 대부분이 유사하다. 이러한 인물들과 교유하는 황진이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소설 속에 묘사된 바로는, 황진이는 분명 평범한 노류장화는 아니었다.
일생을 처녀대로 무슨 정절을 세워 지키려는 바는 아니다. 아니기 때문에 아니로 한 번 호탕히 인생을 질겨보기 위해 기생을 나선 것이다. 구태여 질겁을 해 감초려는 정조는 아니다. 그러나 또한 무엇을 얻기 위해 구구히 화장에 전락된 몸도 아니다. 돈을 얻기 위해서나 권도에 의지하기 위해서 내놓은 몸은 결코 아니다. 내가 질길 수 있는 사나이면 돈이 있건 없건 권도가 있건 없건 받음이 있건 없건 도리어 내것을 주면서라도 더부러 질길 것이로되 내가 한 번 싫은 사나이면 그와는 영구히 빙탄(氷炭)일 수밖에 없다는 결심이 선지 오랜 것이다.54)
‘더부로 인생을 질길’ 사나이 대장부를 찾는 것이 황진이의 목표다. 이러한 심념으로 그녀는 만나는 모든 사나이들을 평가해 나간다. 물론 작가 이태준의 평가이다. 게다가 패설류의 기록들이 모두 동원된다. 앞에서도 지적했으나, 어쩌면 패설류의 기록을 뼈대로하여 적절히 윤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송도유수, 소세양, 벽계수, 이언방, 지족선사, 서화담, 이사종 등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이 패설류에서 익히 살폈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김참판와 그의 아들 김지학은 황진이를 소설로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허구적 인물이다.
황진이 중편 첫머리에서, 이태준은 황진이를 처녀시절 그의 아들과 혼담이 오갔던 김참판과 만나게 한다. 기생이 된 후에 그녀는 송도유수 송화영이 베푸는 꽃놀이에서 김참판을 만나는 것이다.
“황진사의 서녀!”
김참판은 점점 더 눈이 커지었다.
그리고 속으로, 그럼 그게 바루 그 황진사의 서녀가 아닌가? 형제간도 없이 그 딸 하나란 말을 들었는데...... 바루 그 딸이게 그럼......하면서 김참판은 재삼 숙고하다가 또 한 번 묻는다.
“분명 황진사의 서녀랍디까?”
“분명히 그런 소릴 들었어. 어떤 연유로 기생이 됏는진 몰라하되 본명은 뭐 진이라던가?”
“진이......”
김참판은 고개를 끄덕인다.
작년 봄에 자기 아들과 혼담이 있는 것을 어미가 상인이라고 퇴한 것을 생각하였고, 또 퇴하기를 잘했다 생각하였다.
(중략)
“며느리가 되려던 게집. 그 게집이 된 기생. 그런데다 관홍장이가 어림없다는 미모......”
가만히 속으로 혼자 음미해볼수록 김참판은 일직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일종의 비밀스런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55)
한 번 명월을 보자 이상한 술을 마신것과 같다. 성산월이나 다른 기생들은 앵도나 머루와 같은 얕은 식욕을 느끼었고 그것에 아롱아롱한 애정을 깨달을 뿐이였는데 이 명월에게서는, 이 어느 것이 이쁜 것인지 하나도 붓잡을 수는 없는, 현황할 뿐인 명월에게서는 온 몸과 온 마음이 한덩어리로 그만 그에게로 푹 빠지어 모든 의식을 잊어버리고 싶은 그런 무한히 큰 욕망의 세계가 부드쳐지기 시작하는것이다.56)
조선조의 적서차별을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소설 속의 김참판은 어쩌면 황진이의 시아버지가 될 수도 있었을 사람이다. 더구나 그러한 과거를 김참판은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황진이를 보자 끓어오르는 육욕을 어쩌지 못한다. 그는 기생인 그녀를 농락하려 한다. 그녀가 ‘송류수에게 손을 잡힐 때마다 가슴 속에 뭉클하게 치미는 것이 있어 입술을 부르르 떨’ 정도이다. 송도의 관장인 송유수와 한양 김참판이 황진이를 사이에 두고 온갖 신경전을 벌인다.
물론 황진이도 과거의 혼담을 알고 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참판에게 ‘어떻게 해서나 자기가 당한 몇갑절의 무안을 주리라 별르게 되었다.’ 그녀는 한껏 흥을 돋우고 나서는, 그의 백마까지 얻어타고 교묘히 그를 따돌린다.
여기서 이태준은 다시 황진이로 하여금 혼담의 당사자였던 김지학, 즉 김참판의 아들을 만나게 한다. 김참판이 기다리다 못해 시회(詩會)를 핑계로 황진이를 청한 것이다. 그에게서 얻은 백마를 타고 시회로 향하던 황진이는 ‘편발인 젊은 선비’를 만나게 되는데, 백마가 먼저 알은 체를 해대는 그가 바로 김참판의 아들 김지학인 것이다.
“나는 학골 사는 김지학이오.”
하는 것이다. 명월은 어른 눈을 감으려다 떳다. 그리고 속으로 옳지 네가 너로구나! 하였다. 자기가 반쪽 양반만 아니었더면 두말없이 그가 자기의 남편이였을 사나이다. 너도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하였구나 하면서 명월은 말을 나리었다.57)
황진이는 시회로 가던 길을 돌려 김지학을 유혹해서는 그녀의 집으로 이끈다. 김지학과 단 둘이 방 안에 있을 때에 김참판이 찾아오지만 그녀는 내일 다시 오라며 그를 돌려보낸다. 김참판은 내일 밤 혼자 있을 황진이를 기대하며 돌아간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백마를 타고 오는 것은 자신의 아들이다. 김참판의 마음이 어떠했을까는 짐작할 수 있다.
명월이도 문갑 속에서 황초 한자루를 내여 불을 켜놓았다. 불을 켜놓으니 방안은 구석마다 더 비어지는 듯하다.
‘그까짓 김지학이 녀석!’
반을 향락으로 반은 그들 부자에게 대한 농락으로, 진정은 두지 않고 허탄히 지내버린 일이지만 아직 부르튼 정열에 어루만짐을 받을 손이 없으니 절로 김지학이가 아쉽기도 하다.58)
소설에 나타난 문맥에 따르면 비록 기생의 몸이었지만, 황진이의 첫 남자는 김지학이 된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남자는 물론 상여 사건이 있었던 총각이다. 그는 황진이의 꿈 속에까지 등장하면 전편에 걸쳐 황진이의 심사를 늘 외롭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태준은 ‘반은 향락으로 반은 그들 부자에게 대한 농락으로’ 김참판의 아들 김지학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잔인한 복수일른지 모른다.
따라서 이태준의 「황진이」를 허구화된 소설로 만드는 문제적인 사건과 인물은 바로 황진이가 왜 기생이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이 어떠한 인물들과 연루되었는가이다. 이에 필요한 인물이 바로 김참판와 그의 아들 김지학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소설은 여기서부터 일사천리로 전개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계속된 황진이의 남성 편력이 서술되면서 중간 중간 자신을 그리다가 죽은 총각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심정이 고려가요, 시조, 한시 등과 어우러져 서술된다. 물론 패설류의 기록에 전하는 소세양, 벽계수, 이언방, 지족선사, 서화담, 이사종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기록의 윤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비록 파계했지만 인생을 초탈한 모습의 지족을 다시 만나고, 화담도 고인이 된 지 해가 넘은 때59)에 황진이는 쓸쓸히 금강산 길을 향해 떠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4. 나오면서 - 소설 「황진이」의 의미와 한계
지금까지 야담과 패설류의 기록을 통해 ‘황진이’의 생애를 살피고, 이어 이태준의 소설 「황진이」에 나타난 ‘황진이’의 삶을 추적해 보았다.
이태준은 황진이를 ‘황진사의 서녀’로 그려냈다. 그리고는 그녀가 숙성하면서 혼담이 오가고 이 과정에서 그녀는 출신성분에 따라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게 장치한다. 양반의 딸이지만 서녀로 태어난 여인, 재색을 겸비하고 시문에도 능한 여인, 그러나 양반의 자제와는 정혼할 수 없는 신분의 차이, 이것이 바로 황진이를 갈등으로 몰아넣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적절하게 배치된 것이 황진이를 사모하던 총각의 죽음 그리고 그의 상여에 얽힌 일화이다. 양반과 정혼하려다 실패한 여인, 그런 그녀를 사랑하다 죽은 총각, 황진이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결국에는 자신의 속적삼을 벗어 주는 행동을 한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조선조 유교의 덕목을 감안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처녀의 몸으로 속옷을 벗어 총각의 관을 덮었다는 것은 당대의 관습에 따르면 정조를 잃은 여인이 되는 것이다.
비록 패설류의 기록에 전하는 것이지만 황진이가 기생이 되는 것은 이태준이 설정한 이러한 장치에 의해서이다. 게다가 이태준은 총각의 황진이에 대한 사랑을 그녀 자신이 체감하게 하면서 소설 전편에 걸쳐 황진이의 정신상태 혹은 인생관을 그려낸다.
또한 기생이 된 그녀로 하여금 이태준은 일종의 복수를 하도록 만든다. 바로 김참판과 그의 아들 김지학에 얽힌 내용이 그것이다. 이들 두 인물은 패설류의 기록에는 없는, 이태준에 의해 완벽하게 허구화된 인물들이다. 이들 두 인물과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의 해소는 당시 양반 중심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복수가 된다.
앞에서 살폈듯이 이후의 사건 및 인물은 패설류의 기록과 유사한 것이다. 허구화 혹은 재구성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기록에 전하는 내용의 윤색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이한 것은 전설처럼 기록에 의해 전하는 황진이의 죽음은 소설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의 허무 혹은 총각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서화담을 향한 연정을 품고 그녀는 금강산으로 향하는 것에서 소설은 끝난다.
이런 면에서 이태준의 소설 「황진이」를 썩 잘된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지적한 시대상황을 무시한 인물의 성격화와 함께 중반 이후 군데군데 비현실적인 것은 물론 앞뒤가 맞지 않는 사건들이 나타나며 소설의 종반에 이르러서는 사건들이 갑작스레 축소 혹은 비약되고 있기 때문이다.
① 그러니까 손은 앞에 놓인 물대접을 다거놓더니, 종이 족에 고기어(魚)자를 써서 당그는 것이다. 그러자 물만 담겼던 대접 안에 웬 손벽같은 붕어 한 마리가 꼬리를 철석거려 물을 업지르는 것이다.60)
② 그러나 명월은 허전한대로 지내였다. 빛밝고 향기 진한 꽃일수록 봉접이 더 모여들 듯이 집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명월의 앞에는 사나이가 밟힐 지경이었다. 어떤 사나이는 천만금의 재물을 물쓰듯 하여, 어떤 사나이는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고 지긋지긋하게 쫓아 다니는 것으로, 어떤 사나이는 권모를 부리어, 어떤 사나이는 재담을 부리어 어떤 사나이는 문필이 용한 체하여 별별 수단으로 다 명월과 접근해 보려 하였으나 명월의 마음에 한 번 들기 전에는 다 그냥 밟히여 버리는 띠끌이었다. 그럴수록 명월의 이름은 송도 일경에뿐 아니라 북으로 평양, 남으로 한양에까지 점점 널리 떨치게 되였다.61)
③ 이사종은 송경에서 명월과 삼년, 명월은 다시 한양에서 이사종과 삼년, 합쳐 육년의 광음이 바뀌는 동안, 명월의 청춘도 앞으로 흐를 것보다는, 이미 흘러가 버린 것이 더 많아졌다.62)
①은 서화담이 황진이 앞에서 요술을 부리는 장면이다. 글자를 써넣는 대로 고기 어(魚)자에 붕어가 나타나고 용 용(龍)자에 용이 나타난다. 고대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전기성(傳奇性)이 강한 부분이다. ②는 황진이를 향한 사나이들의 행동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들 모두와 각각의 사건을 설정하여 서술한다면 파노라마식의 긴 소설이 될 것이지만 이태준은 이를 몇 개의 문장으로 압축하여 버린다. ③ 역시 6년의 시간을 한문장으로 표현해 놓았다. 또한 ‘이듬해 가을이다’, ‘다시 봄이다’는 식의 시간 경과를 나타내는 문장으로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면서 사건을 압축 비약해 버린다.
비록 사건의 진행에 다소 무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진이」의 전반 그리고 중반부에는 작가 이태준의 의도가 잘 나타난다. 서화담을 만나고 이사종과의 동거를 기점으로 하여 너무 갑작스런 결말을 맺고 있다. 독자는 ‘무슨 이야기가 더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허점들은 두가지 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선 ‘황진이’를 허구화하는 과정에서 출신과 성장, 그리고 기생이 된 후 김참판에게 복수하는 부분까지는 사건들이 긴밀하게 연결되며 앞에서 살펴본 패설류의 기록을 허구화하여 ‘황진이’와 그녀의 삶을 훌륭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사건과 인물은 패설류의 기록과 거의 유사하며 이 역시 파노라마식의 배열일 뿐이다. 따라서 사건의 긴장이 이완된 형태63)에서 위와 같은 허점들이 노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작품이 신문에 연재되다 중단된 후 1년 여 후에 갑자기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앞에서 밝혔듯이 황진이는 1936년 9월 4일 연재가 중단되고 1938년 2월에서야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송유수 어머니의 수연에 참석하여 송유수를 놓고 벌이는 여러 기생들과 송유수의 첩 평양집의 쟁총(爭寵)을 보고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죽은 총각이 선비가 되어 꿈 속에 나타나면서 심사가 뒤숭숭해지고 그런 마음의 안정을 위해 지족선사를 찾기로 하면서 머리를 자르는 데, 이 부분에서 연재가 중단되었다. 이어 지족선사, 서화담, 이사종과의 교유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다가 이사종과 이별 후 갑자기 금강산으로 향하며 소설이 끝난다.
따라서 단행본의 내용으로 볼 때에 연재 중단된 부분 이후 결말까지는 갑작스럽게 완성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64)
그렇다면 「황진이」를 통해 이태준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사랑에 실패한 한 여인의 남성 편력이나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 조선조 기생의 한과 사랑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통해 이태준이 ‘대의명분만을 찾고 실리성을 배제한 전세대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토로’65)했다는 평가도 주인공이 ‘기생’ 황진이라는 면에서 설득력이 없어 보이며, 단순히 ‘민족적 낭만주의 예술소설’66)이라고 단정짓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무엇보다도 이태준 스스로가 ‘황진이를 쓰기보다는 읽고 싶어 했’으며 신문사에 재직할 당시 ‘몇몇 선배에게 두루 황진이를 청해 보았으나 모두 한 번 써보고는 싶으나 기약을 할 수 없노라하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67)고 밝힌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황진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황진이’ 그 자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 할 수 있다.
이태준의 경우, 백호 임제가 그러했듯이 후대의 문사로서 여인, 기생 그리고 가객 황진이에 대한 그리움의 발로에서 「황진이」가 씌여졌다고 해도 지나친 해석은 아닐 것이다. 이와 함께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황진이’란 한 여인의 삶을 통해 이태준은 왜 조선조 사회에서 그녀가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그러한 삶을 살아야만 했는가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68)
이를 위해 이태준은 비록 패설류라고는 하나 기록에 철저하게 의존하면서 혹은 허구화된 사건과 인물을 통해 그녀가 기생이 되는 과정, 그리고 그 후의 행동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특히 이태준은 황진이의 삶을 그리면서 그녀의 시조와 한시는 물론 향가(「헌화가」), 고려가요(「만전춘」, 「청산별곡」, 「정석가」 등), 시조(이개, 길재)와 기타 여러 한시를 배치69)하여 작품의 분위기 나아가 그녀의 심리까지 차분하게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이태준의 「황진이」는 후에 계속 발표되는 정한숙, 박종화, 안수길, 유주현, 정비석, 최인호, 김남환, 최정주 등의 「황진이」의 근간이 되었다70)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황진이」류 소설’의초석이 되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