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인맥(歌謠人脈 )으로 본 진주(晉州),
한국 가요(韓國歌謠)의 고향(故鄕)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일제(日帝)가 겨레의 숨통을 죄던 1941년, 참으로 고단하고 암울(暗鬱)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태어난 노래 ‘진주라 천리 길’이다. 이 노래는 대사(臺詞)가 더 유명했다.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연자방아 돌고 돌아 세월은 흘러가고 인생은 오락가락 청춘만 늙었더라. 늙어가는 이 청춘에 젊어가는 옛 추억 아-손을 잡고 헤어지던 그 사람 그 사람은 간 곳이 없구나.”인데, 간주곡 선율을 타고 무성영화 변사조의 구성진 가락(Melody)이 일제 강압을 피해 불원 천리(不遠千里) 떠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요원의 불길처럼 애창되어 단번에 진주 노래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난날 어디를 가서 진주에 살거나 진주서 왔다고 하면 ‘진주라 천리 길’을 안부(安否)처럼 물었고, 지금도 촉석루(矗石樓)를 찾은 노년(老年)들은 ‘나무 기둥을 얼싸안고’ 흥얼거린다. 불행히도 작사자ㆍ작곡가ㆍ가수(歌手) 모두 월북(越北)해 오랫동안 금지곡(禁止曲)이 되었다가 풀린 탓에 제목(題目)만 회자(膾炙)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천리 길’의 고향 진주는 남강(南江)이 기름지게 적시며 빚은 ‘영남(嶺南) 제일’의 풍광(風光)으로 예로부터 나라 안에 내로라는 풍류객(風流客)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멋과 풍류(風流)가 흐르는 고을로 이름 높았다. 자연 왕대밭에 왕대 나듯 대중음악(大衆音樂)에도 영향을 끼쳐 진주를 예찬(禮讚)한 노래도 많지만, 진주 사람들이 만든 가요 또한 많기에 진주(晉州)를 "한국 가요의 산실이요 ‘한국 가요의 고향’"이라 일컫는 것이다.
한국 가요사에 큰 획을 그어 뚜렷한 자취를 남긴 진주 출신(出身)을 보면,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삽입곡으로 우리나라 대표 민요(民謠)인 ‘아리랑’을 편곡해 전 세계에 알리고, 한국 최초로 노랫말을 짓고 작곡한 창작 가요 ‘강남 달’을 발표한 김서정(金曙汀:본명 영환 1898~1936)을 비롯하여 민요조 가요를 주로 작곡한 ‘노들강변’의 문호월(文湖月:본명 윤옥 1908~1962), 올드팬(old fan)들의 기억 속에 생생한 베레모(béret帽)와 아코디언(accordion)의 ‘목포의 눈물’ 작곡가 손목인(孫牧人:본명 득렬 1913~1999), 가요 황제(歌謠皇帝)로 추앙받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의 가수 남인수(南仁樹:본명 강문수 1918~1962), 동양의 슈베르트(Schubert· Franz Peter)로 불린 작사 작곡가 ‘나그네 설움’의 이재호(李在鎬:본명 삼동 1919~1960), 아시아의 지휘자로 칭송받은 작사ㆍ작곡가 ‘안개’의 이봉조(李鳳祚 1932~1987), 영화 음악에서 세 차례나 대종상(大鐘賞)을 받은 ‘대머리 총각’의 작곡가 정민섭(鄭民燮 1940~1987) 등 영상 문화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혜성(彗星)처럼 등장해 당대를 주름잡으며 한국 가요계를 떠받치며 가요사(歌謠史)를 화려(華麗)하게 장식(裝飾)한 인물(人物)들이다.
영화 ‘장화홍련전’의 감독(監督)으로 데뷔한 김서정[金曙汀; 김영환(金永煥)의 예명]은 영화 제작과 시나리오 작가, 변사(辯士), 작사·작곡·가수, 바이올린(violin) 주자(走者) 등 여러 부문에서 두각(頭角)을 드러낸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예인(藝人)으로서 장안(長安)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당대(當代) 최고(最高)의 인기인(人氣人)이었다.
서양 곡의 선율(旋律)을 빌려 우리말 가사(歌詞)를 붙인 번안 가요(飜案歌謠)가 널리 불리던 시절, 자서전적(自敍傳的) 성격(性格)을 띤 영화 ‘낙화유수’의 삽입곡(揷入曲)으로 우리말에 곡을 붙인 ‘강남 달’은 영화와 함께 인기 절정(人氣絕頂)이었다. 이렇게 창작 가요(創作歌謠 )를 개척한 그는 ‘강남 제비’, ‘봄노래를 부르자’, ‘암로(暗路)’, ‘세 동무’, ‘포구의 달빛’, ‘임 찾아가는 길’ 등 망국한(亡國恨)이 서린 노래를 지어 남겼다. 그의 어머니는 진주 기생(妓生)이었다.
▲ 윗줄 왼쪽부터 진주 출신 김서정 작곡가(영화감독), 문호월, 손목인,
작곡가 이재호, 아래줄은 왼쪽부터 이봉조, 정민섭, 남인수
유성기(留聲機) 시대에 민요조(民謠調) 가요를 작곡한 문호월(文湖月)은 1934년 신민요(新民謠) ‘노들강변’을 발표하면서 각광(脚光)을 받기 시작했다.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 반주 악단 일원으로 입문한 그는 당시 유행하던 일본 엔카풍(enka風)에 영향을 받지 않고, 윤백단(尹白丹)의 ‘장한가’로 데뷔한 이래 민요풍 가요를 주로 창작하였다. 이은파(李銀波)의 ‘앞 강물 흘러 흘러’, 고복수(高福壽)의 ‘풍년송’, 이난영(李蘭影)의 ‘불사조’를 비롯하여 ‘에헤라 춘풍’, ‘봄 아가씨’, ‘봄맞이’, ‘분홍 손수건’ 등으로 신민요의 선구자(先驅者)가 되었다.
진주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김천으로 이주했는데 동향인 남인수와 짝을 이뤄 ‘인생극장’과 ‘천리 타향(1937)’을 작곡하기도 했으며, 손목인(孫牧人)을 오케(Okeh)레코드사에 입사시켜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케 했다.
문호월(文湖月)의 소개로 오케(Okeh)레코드사에 들어간 손목인은 고복수(髙福壽)의 ‘타향살이’와 ‘짝사랑’, ‘사막의 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해조곡’으로 일약(一躍) 명성(名聲)을 거머쥐었다. 고복수와 이난영에게는 신예 손목인이 구세주(救世主)나 다름없었다. 그는 김정구(金貞九)의 ‘바다의 교향시’, 심연옥 (沈蓮玉) 의 ‘아내의 노래’, 박단마(朴丹馬)의 ‘슈사인 보이’, 최숙자(崔淑子)의 ‘모녀 기타’, 오기택(吳基澤)의 ‘아빠의 청춘’ 등 명곡(名曲)을 남겼다. 중앙방송국 경음악단 지휘자, 영화음악작곡가협회 부회장, 한국가요작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 진양호 레이크사이드 호텔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이재호 노래비
가요계(歌謠界)의 역사(歷史)요 증인(證人)으로 불리는 이재호(李在鎬)는 ‘북극은 오천 키로’, 진방남의 ‘세세연년’,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고운봉(高雲峰의 ‘남강의 추억’, 백년설(白年雪)의 ‘복지 만리’, ‘번지 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 ‘대지의 항구’, ‘산 팔자 물 팔자’, 백난아(白蘭兒)의 ‘갈매기 쌍쌍’ 등 수백 곡을 발표했다.
광복(光復) 후에도 이인권(李寅權)의 ‘귀국선’, 금사향(金絲香)의 ‘홍콩아가씨’, 송민도(宋旻道)의 ‘아네모네 탄식’, 박재홍(朴載弘)의 ‘물방아도는 내력’, 남인수의 ‘산유화’, ‘무정 열차’, 이해연(李海燕)의 ‘단장의 미아리고개’, 손인호(孫仁鎬)의 ‘울어라 기타 줄’, ‘촉석루의 하룻밤’, 권혜경(權惠卿)의 ‘산장의 여인’, 최갑석(崔甲錫)의 ‘고향에 찾아와도’ 등 국민 가요(國民歌謠)로 애창되는 명곡들이 그의 손에서 빚어졌다.
6.25 전쟁(戰爭) 때에는 임시 수도(臨時首都) 부산(釜山)에서 KBS 상임 지휘자(常任指揮者)로 활동하면서 신진(新進)을 발굴(發掘)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기도 한 그는 작곡에만 머물지 않고 비상(非常)한 문학적 재능(才能)을 보여 고향 진주에 대한 망향가인 ‘남강의 추억’, ‘남강은 말이 없네’, 등 많은 노래를 등대수(燈臺手)라는 의미의 무적인(霧笛人)이란 필명(筆名)으로 작사ㆍ작곡하였다. 문화훈장이 추서(追敍) 되었으며, 진양호(晋陽湖)에는 노래비(-碑)가 있다.
우리 가요를 세계에 알린 이봉조(李鳳祚)는 진주고보 시절 작곡가 이재호로부터 음악성을 인정받아 이 분야에 눈을 뜨게 되어 많은 노래를 작사ㆍ작곡하고 또 노래도 불렀다. 남해 출신으로 진주에서 성장한 그는 테너 색소폰(saxophone) 연주자로서 MBC 관현악단 지휘자로 활동했는데 국내 작곡가 중 가장 많은 국제가요제 입상 경력을 쌓았으며, 트로트(trot)가 주류이던 우리 가요계에 재즈풍(jazz風) 노래를 개척(開拓)한 작곡가(作曲家)로 평가(評價)받았다.
동경가요제(東京歌謠祭)에서 최우수(最優秀) 가창상(歌唱賞)을 수상한 정훈희(鄭薰姬)의 ‘안개’, ‘꽃밭에서’, 현미(玄美)의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밤안개’, 현인(玄仁)의 ‘럭키 서울’, 최희준(崔喜準)의 ‘맨발의 청춘’, ‘태양’, ‘팔도강산’, 차중락 (車重樂)의 ‘사랑의 종말’ 김추자(金秋子)의 ‘무인도’ 등이 있으며, 고향을 노래한 곡으로 ‘향수의 내 고향’이 있다. 대한민국 예술상(大韓民國藝術賞)을 수상(受賞)했다.
영화음악에서 1974년과 1978년 1979년에 걸쳐 대종상을 받은 작곡가 정민섭(鄭珉燮)은 진주사범 재학 때부터 음악의 천재성을 보여 작곡집을 펴냈으며, 1963년 관현악곡으로 동아일보 음악 콩쿠르(concours) 입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곡을 하여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직접 작사ㆍ작곡하고 부인 양미란(梁美蘭)이 부른 ‘당신의 뜻이라면’, 김상희(金相姬)의 ‘대머리 총각’, 이 시스터즈의 ‘목석같은 사나이’,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박재란(朴載蘭)의 ‘박달재 사연’, 김상진(金相鎭)의 ‘이정표 없는 거리’, 봉봉의 ‘육군 김일병’, 희식스(He6)의 ‘초원’, ‘곡예사의 첫사랑’, ‘아니 벌써’, ‘여고 졸업반’ 등 수백 곡에 이른다.
영화음악(映畵音樂)에서는 더욱 두드러져 ‘상록수’, ‘화가 이중섭’, ‘난중일기’, ‘로맨스 그레이’,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일송정 푸른 솔은’, ‘연산군’, ‘돛대도 아니 달고’ 등과 ‘개구리 왕눈이’, ‘아톰’, ‘그레이트 마징가’ 등 추억의 만화 영화(漫畵映畵) 주제가(主題歌)들이 그의 곡이다.
△ 진주 출신 가수로는 남인수가 단연 독보적이다. 열여덟 앳된 나이에 데뷔한 그는
가요 황제로 군림하는 가객(歌客)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애수의 소야곡’, ‘
울며 헤진 부산항’ 등을 불렀다. 진양호반 옆 작은 언덕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진주 출신 가수로는 남인수(南仁樹)가 단연 독보적(獨步的)이다. 열여덟 앳된 나이에 데뷔(debut)한 그는 가요 황제로 군림(君臨)하는 가객(歌客)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애수의 소야곡’, ‘울며 헤진 부산항’, ‘낙화유수’, ‘황성 옛터’(재취입), 등을 불러 나라 잃은 겨레의 설움을 달랬고, 광복의 환희는 ‘감격시대’로 얼싸안았으며, 국토분단의 아픔은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로 어루만졌고, 6.25 피란민의 애절한 절규도 ‘이별의 부산정거장’으로 승화(昇華)시키며 격변(激變)의 고비마다 절절한 노래로 겨레의 가슴을 적셨다.
‘꼬집힌 풋사랑’, ‘서귀포 칠십리’, ‘내 고향 진주’, ‘고향의 그림자’, ‘추억의 소야곡’, ‘청춘 고백’, ‘무너진 사랑탑’ 등 1천여 곡을 통해 조국과 겨레, 진주와 남강, 사랑과 눈물, 고향과 이별을 노래하며 시공을 뛰어넘는 불후(不朽)의 명곡(名曲)들로 한국 가요사에 찬란한 금자탑(金字塔)을 쌓았다. 대한가수협회 초대 회장, 전국공연단체 연합회장,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을 역임(歷任)했으며 진양호 언덕에는 그의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다.
진주(晉州)를 소재로 삼은 노래 또한 많다. 앞서 언급된 여러 곡(曲)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난날 민주화를 외친 젊은 층에 애창(愛唱)된 ‘진주 난봉가’를 비롯해 ‘진양 강산’, ‘진주의 달밤’, 황금심 (黃琴心)의 ‘진주는 천리 길’, 손인호(孫仁鎬)의 ‘원철의 노래’, 이미자와 이동기가 각각 부른 ‘논개’, 나훈아(羅勳兒)의 ‘진주 처녀’, 은방울 자매의 ‘진주의 소야곡’, 최희준(崔喜準)의 ‘진주성’ 등 ‘가요의 고향’ 다운 면모를 여지없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KBS 가요무대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매년 진주 특집(晉州特輯)을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경남일보에서
장일영
첫댓글 진주晉州의 가요인들... 덧붙이는 말은 사족일지도... 다만 마음에 새길 뿐!
진주가 낳은 불세출의 가요인들!
그중 가수 남인수가 제일이라!~